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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남자세례명 10가지

피어나네 2023. 5. 1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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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디오스코로, 베난시오, 빌리암, 에리코, 요한 1세, 테오도토, 페레다리오, 펠릭스 (주교), 펠릭스 (수사), 포타몬, 총 10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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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여자세례명 마트로나, 알렉산드라, 에우프라시아, 엘지바, 율리타, 카밀라 젠틀리, 클라우디아, 테쿠사, 파이나, 총 9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5월 18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0가지

 

 

 

 

5월 18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디오스코로

  2. 베난시오

  3. 빌리암

  4. 에리코

  5. 요한 1세

  6. 테오도토

  7. 페레다리오

  8. 펠릭스 (주교)

  9. 펠릭스 (수사)

  10. 포타몬

 

5월 18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0가지

 

 

1. 디오스코로

 

  • 가톨릭 성인 이름
    Dioscor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독서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5년 키노폴리스

 

 

디오스코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디오스꼬로, 디오스꼬루스, 디오스코루스.

 

 

디오스코로 자료

성 디오스코루스(또는 디오스코로)는 이집트 키노폴리스 교회의 독서자였다. 그는 뜨거운 철판 위에 올려지는 등 혹독한 고문 끝에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베난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Venan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소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1년? 카메리노

 

 

베난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난시우스, 베난씨오, 베난씨우스, 베난티오, 베난티우스.

 

 

베난시오 자료

이탈리아 중부 카메리노에서 큰 공경을 받는 성 베난티우스(또는 베난시오) 순교자의 생애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그에 대해 전해지는 전설적 이야기는 아마도 프레네스테의 아가피투스(Agapitus von Praeneste)가 쓴 “수난기”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성 베난티우스는 그 “수난기”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고, 그 책을 통해 그의 출생과 수난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 책에 따르면, 성 베난티우스는 귀족 출신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후 포르피리우스라는 사제와 함께 살았다.

그는 데키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안코나(Ancona) 부근 카메리노에서 총독 안티오쿠스 앞에 끌려가 배교를 강요당했다. 그러나 15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당히 신앙을 고백했고, 총독은 그를 감옥에 가두고 심한 고문을 자행했다.

그는 매를 심하게 맞아 이가 모두 빠지고 턱뼈가 부서지는 고통을 당했고, 불 위에 거꾸로 매달려 열기와 연기에 그을리는 형벌을 비롯해 참혹한 고문 끝에 참수형을 받고 다른 열 명의 동료들과 함께 순교했다. 그가 죽자마자 그를 재판했던 두 명의 재판관이 급사하고, 지진이 일어나 사람들이 모두 베난티우스를 성인으로 공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그의 유해는 641년에 다른 순교자들의 유해와 함께 교황 요한 4세(Joannes IV)에 의해 로마로 옮겨져 라테라노(Laterano) 대성전 근처의 한 경당에 모셔졌다고 한다. 그에 대한 공경 예식은 로마에서부터 시작되어 나중에 카메리노로 전해졌다고 한다.

카메리노에서 성 베난티우스는 그 지역의 주보 성인으로 공경을 받아왔는데, 은판으로 장식된 성해함과 그곳에만 있는 그의 순교 모습을 담은 그림 등은 카메리노에서 그에 대한 공경이 일찍부터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14세기경의 한 시(詩)의 기록에 따르면, 13세기 중엽 시칠리아 군대의 침략으로 카메리노가 파괴될 때 성 베난티우스의 유해가 나폴리(Napoli)로 약탈당하였으나 교황 클레멘스 4세(Clemens IV, 1265~1268년 재위)의 중재로 카메리노로 반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전에 카메리노의 주교였다가 교황이 된 클레멘스 10세(1670~1676년 재위)는 성 베난티우스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축일을 격상시키고 또 성인의 축일 성무일도에 적합한 찬미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한편 성 베난티우스는 아드리아해(Adriatic Sea)에 접한 달마티아(Dalmatia) 지방 살로나(Salona,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스플리트 Split)의 주교이자 순교자로서 로마에서 공경받는 성 베난티우스(4월 1일)와 동일 인물로 추정되기도 하는데, 확인할 길은 없다.

옛 “로마 순교록”은 5월 18일 목록에서 성 베난티우스 소년 순교자에 대해 기록했으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그에 대한 기록을 삭제하였다.

다만 옛 “로마 순교록”이 4월 1일 목록에서 로마에서 공경받는 성 베난티우스 주교 순교자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한 것에 비해, 새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성 베난티우스 주교 순교자와 함께 달마티아(Dalmatia)와 이스트리아(Istria) 반도에서 온 동료 순교자들(8명)이 로마에서 공경을 받는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빌리암

 

  • 가톨릭 성인 이름
    William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사, 신부

  • 활동 연도와 지역
    1297-1369년 툴루즈

 

 

빌리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굴리엘모, 빌헬름, 윌리암, 윌리엄.

 

 

빌리암 자료

프랑스의 툴루즈에서 태어난 빌리암 드 노로즈(William de Naurose)는 매우 어린 나이에 고향에 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완덕의 길을 걷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었다. 특히 그는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신심이 돈독했다.

사제가 된 빌리암은 파리 대학교에서 수학하였고 그의 설교와 영적 지도는 당대 최고봉이었다. 또 연옥 영혼을 위한 기도 운동을 전개했던 것으로 유명한데, 그것은 어느 부유한 부인이 그녀의 죽은 친척을 위하여 기도를 부탁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오! 주님,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

이 기도는 그가 늘 드리는 주요 기도문이 되었다. 윌리엄으로도 불리는 그에 대한 공경은 1893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에리코

 

  • 가톨릭 성인 이름
    Eric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160년 스웨덴

 

 

에리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리꼬, 에리꾸스, 에리쿠스, 에리히, 에릭.

 

 

에리코 자료

1150년부터 스웨덴의 왕으로 재임했던 성 에리쿠스(Ericus, 또는 에리코)는 국내에 그리스도교를 전하는 데 큰 도움을 베풀었다. 또 에리쿠스 왕의 법률로 알려진 유명한 법을 제정하였다.

그는 핀란드(Finland) 사람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웁살라(Uppsala)의 주교인 영국인 출신 성 헨리쿠스(Henricus, 1월 19일)를 설득하여 핀란드 사람들을 복음화시키는데 노력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성 에리쿠스 왕은 자기 영토를 침공한 덴마크 왕의 아들 마뉴스 휘하에서 암약하던 스웨덴 폭도들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그는 공식적으로 시성된 바는 없지만 스웨덴의 수호성인으로 오랫동안 공경을 받아왔다. 그는 에릭(Eric)으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요한 1세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I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교황,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526년

 

 

요한 1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1세 자료

교황 성 요한 1세(Joannes I)는 470년경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 지방의 어느 도시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할 뿐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523년 8월 13일에 교황 성 호르미스다(Hormisdas, 8월 6일)를 계승하여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그는 로마의 부제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였다고 한다. 동로마제국 황제인 유스티누스 1세가 이단 척결을 앞세워 아리우스주의자들을 박해하자, 아리우스주의자이면서 동고트족과 이탈리아의 왕인 테오도리쿠스(Theodoricus)가 교황 요한 1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즉 그에게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유스티누스 1세 황제를 직접 찾아가 아리우스주의자들의 건물 압수와 강제 개종을 통한 박해를 중단하도록 부탁해달라는 것이었다.

525년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동로마제국에 도착한 성 요한 1세는 황제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당시 서로마제국은 이미 멸망한 상태였다. 서로마제국은 동고트족(Ostrogoths)과 서고트족(Visigoths) 그리고 프랑크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교황이 있던 로마는 동고트 왕국에 속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마제국의 상징적 대표인 교황 성 요한 1세와 황제 유스티누스 1세의 만남은 서로마제국 교회와 동로마제국 교회 간의 유대감뿐만 아니라, 로마제국의 재통일을 꿈꾸는 황제와의 관계를 한층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협상 결과는 만족스러웠지만, 강제로 개종한 사람들이 다시 아리우스주의 이단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교황 요한 1세가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는 황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그의 대관식도 집전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동로마제국에 있던 거의 모든 주교가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결과도 얻었다.

교황 성 요한 1세는 526년 4월 19일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서 로마 교회의 전례로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거행함으로써 콘스탄티노플 교구와 에피파니우스 교구에 대한 교황의 수위권을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이는 교황의 수위권과 관련해서 가톨릭교회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일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있던 테오도리쿠스 왕은 이미 위대한 철학자이자 신학자요 교황 성 요한 1세의 친구였던 보에티우스(Boetius, +524년)를 처형했었다.

그리고 아리우스주의자의 입장에서 협상 결과가 미흡하다고 판단한 왕은 귀향하는 교황 요한 1세까지도 동로마제국과 공모했다는 혐의로 체포하여 자신의 왕국 수도인 라벤나(Ravenna)의 감옥에 가두었다. 이 감옥에서 고령으로 쇠약해진 교황 성 요한 1세는 526년 5월 18일 숨을 거두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5월 27일 목록에서 교황 성 요한 1세를 순교자로 언급하였다. 즉 아리우스주의자인 이탈리아의 왕 테오도리쿠스에 의해 라벤나로 끌려가 정통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오랜 시간 감옥에 갇혔다가 생을 마쳤다고 기록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5월 18일로 옮겨 교황 성 요한 1세 순교자에 대해, 로마 교황으로서 처음으로 동로마제국에 가서 유스티누스 1세 황제와 함께 콘스탄티노플의 성당에서 파스카 미사를 봉헌하고 돌아오는 길에 테오도리쿠스 왕에게 체포되어 라벤나의 감옥에서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고 기록하였다. 교황 성 요한 1세의 시신은 로마로 옮겨져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테오도토

 

  • 가톨릭 성인 이름
    Theodo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안키라

 

 

테오도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오도또, 데오도뚜스, 테오도또, 테오도뚜스, 테오도투스.

 

 

테오도토 자료

성 테오도투스(또는 테오도토)는 3세기에 소아시아 지방 중앙 내륙 고지대인 갈라티아(Galatia, 오늘날의 터키)의 안키라(오늘날의 앙카라 Ankara)에서 여관을 운영하던 사람이다. 그는 자애롭고 열정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죄인들의 회개를 돕고 신앙이 흔들리는 이들을 격려하곤 했다.

당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절정에 달했을 때였기에 그 지방의 그리스도인들은 잔인한 집정관의 학정으로 수없이 잡혀가서 고문을 받거나 순교하고 있었다. 성 테오도투스는 자신의 여관을 그리스도인들의 피난처이자 병자들을 위한 병원과 전례 거행의 장소로 제공했다.

그는 또한 용감하게 감옥에 갇힌 신자들을 돕거나 순교자들의 유해를 수습해 장사지내곤 했다. 그는 안키라에서 멀지 않은 말로스(Malos)에서 순교자 발렌스(Valens)의 시신을 찾아 그리스도교 예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매장해주었다.

안키라로 돌아오는 길에 성 테오도투스는 7명의 그리스도인 동정녀들이 큰 위험에 처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의 고모(이모)인 성녀 테쿠사(Thecusa)를 비롯해 성녀 알렉산드라(Alexandra), 성녀 클라우디아(Claudia), 성녀 파이나(Phaina), 성녀 에우프라시아(Euphrasia), 성녀 마트로나(Matrona), 성녀 율리타(Julitta), 모두 7명의 그리스도인 동정녀들이 집정관 앞에 끌려가 심문을 받았다.

그들은 당당히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했고, 집정관은 그들을 매음굴로 보냈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순결을 지킬 수 있었다. 결국 재판관은 그들의 목에 무거운 돌을 매달아 호수에 던져버렸다. 성 테도도투스는 이들 동정 순교자들의 유해를 몰래 찾아내어 정중하게 매장해주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집정관에게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 끝에 참수형을 받고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성 테오도토스의 시신은 기적적으로 말로스로 옮겨져 프론토(Fronto)라는 사제에 의해 매장되었고, 그의 무덤 위에 경당이 세워져 큰 공경을 받았다. 성 테오도투스는 여관업자들의 수호성인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페레다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Fereda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863년경 이오나

 

 

페레다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페레다리우스.

 

 

페레다리오 자료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성 페레다리우스(또는 페레다리오)는 863년에 이오나 수도원의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수도원장 재임 중 덴마크 바이킹 해적들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 콜룸바(Columba, 6월 9일)의 유해를 아일랜드로 옮겼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펠릭스 (주교)

 

  • 가톨릭 성인 이름
    Felix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스폴레토

 

 

펠릭스 (주교)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펠리체.

 

 

펠릭스 (주교) 자료

성 펠릭스는 이탈리아 움브리아(Umbria) 지방 스폴레토나 인근 도시인 스펠로(Spello)의 주교였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펠릭스 (수사)

 

  • 가톨릭 성인 이름
    Felix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515-1587년 칸탈리체

 

 

펠릭스 (수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펠리체.

 

 

펠릭스 (수사) 자료

성 펠릭스는 이탈리아 중부 아브르초(Abruzzo) 북서부의 치타두칼레(Cittaducale) 교구에 속한 칸탈리체에서 1515년 5월 18일, 신앙심 깊은 농부인 산티 포리(Santi Porri)와 산타 포리(Santa Porri) 부분의 네 아들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는 아홉 살 때부터 남의 집에 들어가서 28세가 될 때까지 농부와 목동으로 생활하면서, 특히 양을 돌보는 시간을 기도로 보냈다. 성장한 뒤에도 그는 일하면서 기도하는 등 매우 높은 차원의 관상 기도를 하였는데, 상당히 오랜 시간을 하느님과 대화하면서 지낼 정도였다.

그러던 중 한 동료가 사막 교부들의 삶에 관한 책을 읽어 주었을 때 그는 그들을 따르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 그래서 그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를 신청하여 1543년에 안티콜리(Anticoli)에 있는 로마 관구의 수련소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수련기 때부터 그는 이미 가난과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그는 수련장에게 간청하여 보속과 금욕을 배로 늘렸다. 그리고 동료 수도자들뿐만 아니라 칸탈리체의 어린이들도 그를 일컬어 '성인'이라고 불렀다. 1544년 5월 18일 그는 몬테 산 조반니(Monte San Giovanni) 수도원에서 장엄 서약을 하였다.

그 후 3년 동안 티볼리(Tivoli)와 비테르보(Viterbo)에서 영적 교육을 더 받은 뒤 1547년 로마의 성 보나벤투라 수도원으로 파견되어, 이후 40년 동안 탁발 수사로 그곳에서 평생을 보냈다.

성 필리푸스 네리우스(Philippus Nerius, 5월 26일)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른 이의 고통을 대속하는 사람"이라며 늘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였다. 성 펠릭스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하느님께 감사"를 연발하고 또 실제로 감사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는 72세의 일기로 1587년 5월 18일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 펠릭스는 1625년 10월 1일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712년 5월 22일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화에서 그는 흔히 팔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그것은 성모 마리아가 그에게 나타나 아기 예수를 팔에 안겨 주는 환시를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포타몬

 

  • 가톨릭 성인 이름
    Potamo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40년경 헤라클레아

 

 

포타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뽀따몬, 포따몬.

 

 

포타몬 자료

성 포타몬은 상(上) 이집트 헤라클레아의 주교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 주교에 의하면 이교도와 아리우스(Arius) 이단 양쪽으로부터 박해를 받은 순교자이다.

동시대의 서한과 테베(Thebae)의 주교인 성 파프누티우스(Paphnutius, 9월 11일)의 기록에 의하면 310년에 시작된 막시미누스 다이아(Maximinus Daia)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광산에서의 강제 노동형을 선고받았고, 한 쪽 다리를 절고 한 쪽 눈을 잃는 등 극심한 고초를 겪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종교 관용령 이후 풀려난 그는 325년 니케아(Nicaea) 공의회에 참석하여 아리우스 이단자들과 대항하던 성 아타나시우스의 맹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그는 또한 335년의 티레(Tyre) 공의회에도 성 아타나시우스와 동행하여 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결국 성 포타몬은 아리우스주의자들에 의해 처참하게 매를 맞고 죽임을 당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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