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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 남자세례명 42가지

피어나네 2023. 5. 2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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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빅토리오, 사바스 레예스 살라사르, 살바도르 라라 푸엔테, 세쿤도, 세쿤디노, 아우구스티노 칼로카 코르테스, 아제라노, 아틸라노 크루스 알바라도, 안티오코, 에우제니오 드 마제노, 에우티키오, 예나로 산체스 델가디요, 크리스토포로 마가야네스, 테오발도, 토리비오 로모 곤살레스, 트란쿠일리노 우비아르코 로블레스, 티모테오, 페드로 데 헤수스 말도나도 루세로, 페드로 에스케다 라미레스, 폴리에욱토, 폴리오, 헤수스 멘데스 몬토야, 호세 마리아 로블레스 우르타도, 호세 이사벨 플로레스 바렐라, 호스피시오, 후스티노 오로나 마드리갈, 훌리오 알바레스 멘도사, 총 42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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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 여자세례명 이스베르가, 총 1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5월 21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42가지

 

 

 

 

5월 21일 남자세례명 목록

 

  1. 고드릭

  2. 니코스트라토

  3. 다비드 갈반 베르무데스

  4. 다비드 롤단 라라

  5. 다비드 우리베 벨라스코

  6. 도나토

  7. 로드리고 아길라르 알레만

  8. 로만 아다메 로살레스

  9. 루이스 바티스 사인스

  10. 마누엘 모랄레스

  11. 마르가리토 플로레스 가르시아

  12. 마테오 코레아 마가야네스

  13. 미겔 데 라 모라

  14. 발렌스

  15. 벤베누토

  16. 빅토리오

  17. 사바스 레예스 살라사르

  18. 살바도르 라라 푸엔테

  19. 세쿤도

  20. 세쿤디노

  21. 아우구스티노 칼로카 코르테스

  22. 아제라노

  23. 아틸라노 크루스 알바라도

  24. 안티오코

  25. 에우제니오 드 마제노

  26. 에우티키오

  27. 예나로 산체스 델가디요

  28. 크리스토포로 마가야네스

  29. 테오발도

  30. 토리비오 로모 곤살레스

  31. 트란쿠일리노 우비아르코 로블레스

  32. 티모테오

  33. 페드로 데 헤수스 말도나도 루세로

  34. 페드로 에스케다 라미레스

  35. 폴리에욱토

  36. 폴리오

  37. 헤수스 멘데스 몬토야

  38. 호세 마리아 로블레스 우르타도

  39. 호세 이사벨 플로레스 바렐라

  40. 호스피시오

  41. 후스티노 오로나 마드리갈

  42. 훌리오 알바레스 멘도사

 

5월 21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42가지

 

 

1. 고드릭

 

  • 가톨릭 성인 이름
    Godric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상인,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065-1170년 핀칼레

 

 

고드릭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고드리꼬, 고드리꾸스, 고드리코, 고드리쿠스.

 

 

고드릭 자료

영국 동부 노퍽(Norfolk)의 월폴(Walpole) 근교에서 앵글로색슥인(Anglo-Saxon) 농부의 세 자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성 고드릭은 10대에 가족을 떠나 행상을 하며 자신의 야망을 키워갔다.

그는 행상뿐만 아니라 선원으로도 일하며 영국제도의 동부 해안과 유럽대륙까지 오가며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을 팔아 이미 30대에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그의 삶은 종교적 생활과는 거리가 멀어졌고, 오히려 음주와 싸움에 능한 호색가이자 때로는 해적질까지도 일삼는 사람으로 동시대의 기록에 언급되었다.

그러던 중 그는 자신의 항해 중 가끔 정박했던 린디스판(Lindisfarne) 섬의 수도원을 방문하여 그곳의 주교였던 성 쿠트베르투스(Cuthbertus, 3월 20일)를 만나고 그곳에서 생활하는 수도자들의 모습에 감동해 회개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성 쿠트베르투스는 이미 687년에 선종해서 린디스판 수도원에 묻혔으니 그 만남은 아마도 영적인 만남이었을 것이다.

그는 에스파냐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프로방스(Provence)의 성 에지디우스(Aegidius) 경당과 로마 등 여러 성지를 순례한 후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스스로 엄격한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그는 40세에 이르러 자신의 죄를 참회하며 모든 재산을 버리고 은수자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 이때 그는 에일릭(Aelric)이라는 이름의 은수자와 함께 2년 동안 은수 생활을 하다가 1108년 에일릭이 죽은 후 마지막으로 예루살렘(Jerusalem) 성지를 순례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더럼(Durham) 교구 주교의 권유로 핀칼레에서 은수자로 살게 되었다.

성 고드릭은 이곳에서 60여 년간 은수자로서 살다가 하느님께로 돌아갔다. 그는 처음에는 동굴에서 생활하다가 후에는 작은 오두막에서 거친 옷을 입고 맨발로 생활하는 등 엄격한 보속의 삶을 살며 높은 성덕을 쌓았다. 그는 야생동물과도 친밀하게 지냈고, 예언과 환시 그리고 천리안의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또한 리보(Rievaulx)의 성 아일레드(Aelred, 1월 12일), 뉴민스터(Newminster)의 성 로베르투스(Robertus, 6월 7일), 캔터베리(Canterbury)의 성 토마스 베케트(Thomas Becket, 12월 29일) 그리고 교황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III)에게 자문을 하곤 했다.

그는 중세 영어로 시를 지었고, 그 가운데 하나는 영어로 기록된 시 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정시의 한 예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고드리쿠스(Godric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니코스트라토

 

  • 가톨릭 성인 이름
    Nicostra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호민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니코스트라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니꼬스뜨라또, 니꼬스뜨라뚜스, 니코스트라투스.

 

 

니코스트라토 자료

저자가 불확실한 성 프로코피우스(Procopius, 7월 8일)의 행전에 따르면 성 니코스트라투스(또는 니코스트라토)와 성 안티오쿠스(Antiochus)는 로마 보병대의 호민관이었다. 그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카이사레아 필리피(Caesarea Philippi)에서 동료 군인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다비드 갈반 베르무데스

 

  • 가톨릭 성인 이름
    David Galvan Bermudez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81-1915년 멕시코

 

 

다비드 갈반 베르무데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다윗, 데이비드.

 

 

다비드 갈반 베르무데스 자료

성 다비드 갈반 베르무데스는 1881년 1월 29일 멕시코 서부 할리스코(Jalisco) 주(州)의 과달라하라(Guadalajara)에서 태어났다. 그는 14살 때 신학교에 들어갔고 우수한 학생이었으나 성소에 대한 회의가 들면서 3년 동안 신학교를 떠나 살았다.

그는 일을 하며 여자를 만나고 방탕한 생활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한 번은 술에 만취해 자신의 여자 친구를 때려 체포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사제직에 대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더는 무시하며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1년간의 엄격한 근신 기간을 보낸 뒤 비로소 신학교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1909년 5월 20일 뒤늦게 사제품을 받은 그는 아마티탄(Amatitan)에서 신학교 강사가 되었고 이어 지도교수가 되었다.

그는 사제가 된 뒤에 과달라하라에 있는 병원과 고아원에서 병들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데 헌신했다. 그리고 멕시코 혁명이 진행되던 시기에는 부상자들의 상처를 돌보고 그들의 고해를 들으며 생활했다.

그는 시가전의 희생자들을 돕기 위해 과달라하라로 가던 도중 호세 아라이사(Jose Araiza) 신부와 함께 체포되었다. 호세 아라이사 신부는 후에 몸값을 내고 감옥에서 풀려났다.

감옥에서 그는 동료 수감자들을 위로하며 자신의 처형 몇 시간 전까지도 그들에게 정성껏 고해성사를 주었다. 1915년 1월 30일, 그는 과달라하라에서 군인들이 쏜 총에 맞아 사제의 신분으로 살해를 당했다.

성 다비드 갈반 베르무데스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Christophorus Magallanes) 신부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다비드 롤단 라라

 

  • 가톨릭 성인 이름
    David Roldan Lara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평신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902-1926년 멕시코

 

 

다비드 롤단 라라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다윗, 데이비드.

 

 

다비드 롤단 라라 자료

성 다비드 롤단 라라는 1902년 3월 2일 두랑고(Durango) 대교구에 속한 멕시코 중부 사카테카스(Zacatecas) 주(州)의 찰치위테스(Chalchihuites)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아기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로부터 정성어린 양육을 받았다. 그는 어릴 때 두랑고의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가족들의 생계를 돌보기 위해 나와서 광부가 되었다.

결국 그는 다시 신학교로 돌아가지 못했고 평신도로 남았다. 그의 친구들과 동료 노동자들은 그의 활기차고 관대한 성품과 지성과 친절함을 지닌 성품을 칭찬했다. 그는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들의 감독으로서 착하고 신심 깊으며 정직한 일꾼이었다. 약혼녀에게도 그는 순수하고 완벽한 젊은이였다.

그는 가톨릭 액션을 위한 멕시코 청년회(The Mexican Youth for Catholic Action)의 책임자로서 자신의 본당신부인 성 루이스 바티스 사인스(Luis Batiz Sainz) 신부를 힘껏 보좌했다.

그는 멕시코 정부의 박해로 인해 교회가 처한 상황에 고뇌하면서, 설령 그것이 순교를 의미하더라도 그리스도께 충실한 신앙인으로 남기를 소망했다. 그는 정부의 반종교적 헌법에 저항했고, 종교 자유 수호를 위한 전국연맹(The National League for the Defense of Religious Liberty, LNDLR)의 부의장으로서 활동했다.

성 마누엘 모랄레스(Manuel Morales)와 사촌 형제인 성 살바도르 라라 푸엔테(Salvador Lara Puente)와 뜻을 같이했던 그는 결국 그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1926년 8월 15일, 성 마누엘 모랄레스와 성 루이스 바티스 사인스 신부가 총살당한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성 다비드 롤단 라라와 성 살바도르 라라 푸엔테 역시 총살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스도 왕 만세! 과달루페(Guadalupe) 성모 만세!”라고 외쳤다.

성 다비드 롤단 라라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Christophorus Magallanes) 사제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다비드 우리베 벨라스코

 

  • 가톨릭 성인 이름
    David Uribe Velasco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89-1927년 멕시코

 

 

다비드 우리베 벨라스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다윗, 데이비드, 벨라스꼬.

 

 

다비드 우리베 벨라스코 자료

성 다비드 우리베 벨라스코는 1889년 12월 29일 칠라파(Chilapa) 교구에 속한 멕시코 남부 태평양 연안 게레로(Guerrero) 주(州)의 부에나비스타 데 쿠에야르(Buenavista de Cuellar)에서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칠라파의 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1913년 3월 2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여러 지역에서 본당사목을 수행했는데, 반가톨릭적인 멕시코 정부의 폭력에 직면하여 많은 고초를 겪었다. 그는 게레로의 이괄라(Iguala)에서 본당사목을 하며 개신교와 정부에 동조해 가톨릭교회에서 분리되려는 세력이 득세하던 지역에서 힘들게 사제직을 수행해야 했다.

1926년 가톨릭교회의 공적인 전례 거행이 금지되고 성당마저 폐쇄되자 그는 은밀히 사제직을 수행했다. 그러나 1927년 4월 7일 체포되어 모렐로스(Morelos) 주의 쿠에르나바카(Cuernavaca)로 끌려갔다.

그를 체포한 군인은 만일 그가 가톨릭교회를 반대하는 헌법에 서명하고 정부에 의해 설립된 어용(御用) 천주교회의 주교가 되는 것을 수용하면 모든 형태의 보장과 자유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하지만 그는 굳건한 믿음으로 이 모든 제의와 회유를 거부했다. 감옥에서 쓴 마지막 글에서도 그는 박해자들이 자신을 모함해 적용한 모든 범죄 사실에 대해 결백하며, 하느님의 손길 안에서 모든 원수를 용서한다고 했다.

그는 1927년 4월 12일 모렐로스 주의 산 호세 비스타 에르모사(San Jose Vista Hermosa) 역 근처로 끌려가 총에 맞아 살해되었다. 그의 유해는 고향 본당에 안치되었다.

성 다비드 우리베 벨라스코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Christophorus Magallanes) 사제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도나토

 

  • 가톨릭 성인 이름
    Dona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도나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나또, 도나뚜스, 도나투스.

 

 

도나토 자료

성 폴리에욱투스(Polyeuctus)와 성 빅토리우스(Victorius) 그리고 성 도나투스(또는 도나토)는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카이사레아(Caesarea)에서 순교했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로드리고 아길라르 알레만

 

  • 가톨릭 성인 이름
    Rodrigo Aguilar Alem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75-1927년 멕시코

 

 

로드리고 아길라르 알레만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귈라르.

 

 

로드리고 아길라르 알레만 자료

성 로드리고 아길라르 알레만은 1875년 3월 13일 멕시코 서부 할리스코(Jalisco) 주(州)의 사율라(Sayula)에서 태어났다. 그는 할리스코의 시우다드구스만(Ciudad Guzman)에서 신학교 교육을 받고 1905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산문과 시(詩) 분야의 문학적 재능으로 잘 알려져 있고, 여러 본당에서 사목활동을 했으며 콜롬부스 기사회(The Knights of Columbus)의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1927년 가톨릭교회에 대한 정부의 박해가 심해지자 그는 신자들의 영적인 요청에 부응하고자 한 목장으로 피신했으나 본당 신자 한 사람의 배신으로 10월 27일 정부군에게 체포되었다.

체포된 다음 날 그는 교수형의 집행을 위해 에주틀라(Ejutla) 중앙 광장으로 끌려갔다. 그는 자신을 체포한 이들을 축복하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며 선물로써 자신의 묵주를 사형 집행인 중 한 명에게 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성 로드리고 아길라르 알레만 신부를 갖고 놀기로 하고 그의 신앙을 시험했다.

망고나무에 밧줄을 걸고 올가미를 신부의 목에 건 사형 집행인들은 반복해서 “누가 더 오래 갈 것이냐?” 하며 물었다. 그들은 정부가 더 오래 갈 것이라는 대답을 기대했지만, 성 로드리고 아길라르 알레만 신부는 “그리스도 왕 만세! 과달루페(Guadalupe) 성모 만세!”라고 크리스테로(Cristero)의 모토를 외쳤다.

그들은 잔인하게도 세 번이나 밧줄을 당겼다가 멈추면서 반복해서 같은 질문을 던졌으나 그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결국 네 번째 시도 때 숨이 끊겨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의 유해는 툴라(Tula)의 본당에 모셔졌다.

성 로드리고 아길라르 알레만은 1992년 11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Christophorus Magallanes) 사제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로만 아다메 로살레스

 

  • 가톨릭 성인 이름
    Roman Adame Rosale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59-1927년 멕시코

 

 

로만 아다메 로살레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로마노, 로마누스.

 

 

로만 아다메 로살레스 자료

성 로만 아다메 로살레스는 1859년 2월 27일 멕시코 서부 할리스코(Jalisco) 주(州)의 테오칼티케(Teocaltiche)에서 태어났다. 그는 과달라하라(Guadalajara)에서 사제직을 위한 공부를 계속해 1890년 11월 30일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여러 본당에서 사목하면서 동정 마리아에 대한 깊은 신심을 보여주었고, 교리교육과 영신 수련 지도 그리고 본당 부속학교들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동정 마리아의 딸들과 밤샘 성체조배회’(The Daughters of Mary of Nocturnal Adoration)를 설립하였고, 여러 목장에 경당을 많이 건립하였다.

가톨릭교회에 대한 멕시코 정부의 탄압이 심해지고 헌법으로 교회의 문을 닫게 했을 때도 그는 민가에서 자신의 사제 직무를 계속 수행하였다. 1927년 4월 18일, 란초 벨라도네스(Rancho Veladones)에서 사순시기 미사를 봉헌한 그는 그 자리에 있는 누군가의 배신으로 다음 날 정부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멕스티카칸(Mexticacan)의 감옥에 갇힌 후 야우알리카(Yahualica)의 본당까지 걸어서 이송되는 며칠 동안 음식도 물도 없이 묶여 지냈다. 몇몇 신자들이 그의 보석금을 제안하자 정부군의 대령은 돈만 받아 챙기고 그를 처형장으로 보냈다.

결국 성 로만 아다메 로살레스 신부는 1927년 4월 21일 빈 무덤으로 끌려가 총살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의 유해는 후에 발굴되어 노치스틀란(Nochistlan)으로 옮겨졌다.

성 로만 아다메 로살레스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Christophorus Magallanes) 사제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루이스 바티스 사인스

 

  • 가톨릭 성인 이름
    Luis Batiz Sainz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70-1926년 멕시코

 

 

루이스 바티스 사인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수, 루도비꼬, 루도비꾸스, 루도비코, 루도비쿠스, 루수, 루이.

 

 

루이스 바티스 사인스 자료

성 루이스 바티스 사인스는 1870년 9월 13일 멕시코 중부 사카테카스(Zacatecas)의 산 미구엘 메스키탈(San Miguel Mezquital)에서 태어났다. 그는 12살에 소신학교에 들어가 1894년 1월 1일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신학교의 영성 지도신부, 사카테카스 교구 찰치위테스(Chalchihuites)의 본당신부 그리고 콜롬부스 기사회(The Knights of Columbus)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사목적 열정과 본당을 운영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가톨릭 노동자와 학교를 위한 연수회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어린이와 어른에 대한 교리교육에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했고 성체신심에도 매우 열정적이었다. 그는 “주님, 저는 순교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비록 비천한 종이지만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저의 피를 한 방울 한 방울 흘리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1926년 멕시코 혁명정부에 의해 성당이 강제로 폐쇄되기 전, 종교 자유 수호를 위한 전국연맹에서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무장 반란의 가능성까지도 논의하는 자리에서 그는 강력하게 정부의 정책을 비판했다. 결국 정부에 의해 성당이 폐쇄되고 박해가 본격화되자 그는 민가로 자리를 옮겼고, 그곳에서 1926년 8월 14일 정부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대중들의 높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그를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다음날 그는 사카테카스로 이송한다는 구실로 가톨릭 청년 멕시코 연맹(The Mexican Association for Catholic Youth) 소속의 세 평신도 회원인 성 다비드 롤단 라라(David Roldan Lara), 성 살바도르 라라 푸엔테(Salvador Lara Puente), 성 마누엘 모랄레스(Manuel Morales)와 함께 도시 밖으로 끌려 나가 길가에서 총살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루이스 바티스 사인스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Christophorus Magallanes) 사제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마누엘 모랄레스

 

  • 가톨릭 성인 이름
    Manuel Morale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평신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98-1926년 멕시코

 

 

마누엘 모랄레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없음.

 

 

마누엘 모랄레스 자료

성 마누엘 모랄레스는 1898년 2월 8일 두랑고(Durango) 대교구에 속한 멕시코 중부 사카테카스(Zacatecas) 주(州)의 메시야스(Mesillas)에서 태어났다. 그는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가난한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꿈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 후 그는 착하고 책임감 있는 노동자이자 충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다가 결혼하여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리고 그는 가톨릭 노동조합과 가톨릭 액션(Catholic Action)의 회원으로서 헌신적으로 활동하면서 열심히 영성 생활을 실천하고 미사와 성체성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또한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평화적인 방법으로 반종교적인 헌법의 철폐를 위해 투신하는 기구인 종교 자유 수호를 위한 전국 연맹(The National League for the Defense of Religious Liberty, LNDLR)의 의장으로서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1926년 8월 15일, 교구사제인 성 루이스 바티스 사인스(Luis Batiz Sainz) 신부가 14일에 정부군에게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성 마누엘 모랄레스는 성 루이스 신부의 석방을 위해 긴밀히 움직였다.

그는 군인들이 와서 그의 이름을 부를 때까지 신부의 석방을 돕기 위한 계획을 짜느라 자신이 활동하던 연맹의 회원들과 회의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체포되어 감옥에서 자신의 사목자와 만나게 되었다.

얼마 뒤 그들은 도시 외곽으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그는 가족들을 부양해야 하니 목숨만을 살려주라고 간청하는 신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러자 그는 큰소리로 “신부님, 저는 죽지만 하느님은 죽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저의 아내와 아이들을 돌봐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리스도 왕 만세! 과달루페 성모 만세!”라고 크리스테로의 모토를 외쳤다.

군인들은 총을 쏘아 그를 살해했다. 이날 그는 뜻을 함께했던 동료 평신도인 성 다비드 롤단 라라(David Roldan Lara)와 성 살바도르 라라 푸엔테(Salvador Lara Puente)와 함께 순교하였다.

성 마누엘 모랄레스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Christophorus Magallanes) 사제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마르가리토 플로레스 가르시아

 

  • 가톨릭 성인 이름
    Margarito Flores Garcia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99-1927년 멕시코

 

 

마르가리토 플로레스 가르시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가리또, 말가리또, 말가리토.

 

 

마르가리토 플로레스 가르시아 자료

성 마르가리토 플로레스 가르시아는 1899년 2월 22일 멕시코 남부 태평양 연안에 있는 게레로(Guerrero) 주(州)의 탁스코(Taxco)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난한 가족을 돕기 위해 들에 나가 일해야 했다. 15살에 신학교에 들어가 사제직을 준비한 그는 1924년 4월 5일 사제품을 받고, 4월 20일에 고향 마을 성당에서 첫 미사를 집전했다.

그는 칠라파(Chilapa) 교구에 속한 아테낭고 델 리오 게레로(Atenango del Rio Guerrero) 본당의 신부로서 3년의 사목활동 중에 사제직에 대한 깊은 헌신을 보여주었다.

그는 가톨릭교회에 대한 멕시코 정부의 박해 때문에 잠시 교구 밖에 머물고 있을 때 성 다비드 우리베 벨라스코(David Uribe Velasco) 신부의 영웅적인 순교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자신도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순교하기를 원했고 신자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열망에 장상의 허락을 받고 교구로 돌아와 은밀히 사목활동을 펼쳤다.

그는 사제로서 자신의 여정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거의 그 목적지에 도달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1927년 6월 정부군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고초를 겪고 풀려났지만, 11월에 다시 본당으로 돌아가다가 체포되어 게레로의 툴리만(Tuliman)으로 끌려가 사형을 선고받았다.

자신을 처형하려는 군인들에게 그는 잠시 기도할 시간을 청해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 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일어서서 머리에 총알을 맞고 순교함으로써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일치를 이루었다. 1927년 11월 12일의 일이었다. 그의 유해는 나중에 고향 탁스코의 성당에 안치하였다.

성 마르가리토 플로레스 가르시아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Christophorus Magallanes) 사제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마테오 코레아 마가야네스

 

  • 가톨릭 성인 이름
    Mateo Correa Magallane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66-1927년 멕시코

 

 

마테오 코레아 마가야네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꼬레아, 마두, 마태오, 마태우스, 마테우스, 매튜.

 

 

마테오 코레아 마가야네스 자료

성 마테오 코레아 마가야네스는 1866년 7월 23일 멕시코 중부 사카테카스(Zacatecas)의 테페치틀란(Tepechitlan)에서 태어났다. 그는 1881년에 장학금을 받고 사카테카스의 신학교에 입학하여 1893년 27살의 나이로 사제품을 받았다.

젊은 사제로서 그는 후에 사제가 되고 순교하게 될 복자 미겔 프로(Miguel Pro, 11월 23일)에게 첫영성체를 해주었다. 그는 1898년 콘셉시온 델 오로(Concepcion del Oro)의 본당신부로, 1908년에는 콜로틀란(Colotlan)의 본당신부로 임명받았다.

1910년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이어지자 몸을 숨겼고, 1926년에는 발파라이소(Valparaiso)의 본당으로 발령받았다. 그는 또한 콜롬부스 기사회(The Knights of Columbus)의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1927년 교회에 대한 정부의 박해가 계속되는 와중에 그는 한 병든 여인에게 노자성체(路資聖體)를 모셔 주다가 군인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정부에 대항하는 크리스테로(Cristero) 무장 세력의 일원이란 죄목으로 고발을 당해 사카테카스 감옥에 수용되었고 곧이어 두랑고(Durango)의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1927년 2월 5일, 그는 정부군의 장군인 오르티스(Ortiz)로부터 가톨릭교회를 박해하는 정부에 대항하다 잡힌 몇몇 크리스테로 수감자들의 고해성사를 들어줄 것을 요청받았다. 그는 장군의 요구에 응해 수감자들의 고해를 들었다. 그러자 장군은 그들의 고해 내용이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했고, 그는 고해의 비밀은 알려줄 수 없다며 강요한다면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장군은 그의 머리에 직접 총을 겨누고 위협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결국 다음날 새벽, 그는 두랑고 변두리에 있는 묘지로 끌려가 머리에 총알을 맞고 순교하였다.

성 마테오 코레아 마가야네스 신부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Christophorus Magallanes) 사제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미겔 데 라 모라

 

  • 가톨릭 성인 이름
    Miguel de la Mora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74-1927년 멕시코

 

 

미겔 데 라 모라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이클, 미가엘, 미구엘, 미카엘, 미키.

 

 

미겔 데 라 모라 자료

성 미겔 데 라 모라는 1874년 6월 19일 멕시코 서부 할리스코(Jalisco) 주(州)의 테칼리틀란(Tecalitlan)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농장일과 농사를 배워 훌륭한 일꾼이 되었다.

그는 십대에 콜리마(Colima)의 신학교에 입학해 1906년 콜리마 주교좌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1912년에는 주교좌성당의 참사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콜롬부스 기사회(The Knights of Columbus)의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멕시코 정부의 가톨릭교회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체포되었다가 사제직 수행을 금지하라는 경고와 함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 1926년 정부가 강제로 성당을 폐쇄하고 공적인 전례를 법으로 금지했을 때 친구들은 그에게 피신하라고 권고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했다.

그래서 그는 정부군의 플로레스(Flores) 장군으로부터 끊임없는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플로레스 장군은 그에게 바티칸 교황청과 무관하게 정부가 지원하던 어용(御用) 가톨릭교회에 동참하도록 강요했다.

장군의 괴롭힘 때문에 그는 할 수 없이 콜리마를 떠나 엘 린콘 델 티그레(El Rincon del Tigre)에 있는 형의 목장으로 피신해야 했다. 정부의 회유와 강압에도 굴하지 않았던 그는 1927년 8월 7일 아침에 사복 차림으로 형과 함께 콜리마 방면으로 가던 중 체포되었다.

성 미겔 데 라 모라 신부의 도피에 격노한 플로레스 장군은 그를 마구간에 가두고 거름 한가운데 세운 말뚝에 묶은 후 형이 보는 앞에서 처형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처형장으로 침묵 중에 걸어가면서 자신의 믿음과 성모님에 대한 사랑을 선포했고, 손에는 묵주를 쥐고 기도문을 외우며 총탄에 스러져 갔다. 8월 7일 정오의 일이었다.

성 미겔 데 라 모라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Christophorus Magallanes) 사제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발렌스

 

  • 가톨릭 성인 이름
    Valen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오세르

 

 

발렌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없음.

 

 

발렌스 자료

성 발렌스는 프랑스 오세르의 주교로 세 명의 소년들과 함께 순교했다고 전해져 온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벤베누토

 

  • 가톨릭 성인 이름
    Benvenuto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289년 레카나티

 

 

벤베누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벤베누또, 벤베누뚜스, 벤베누투스.

 

 

벤베누토 자료

벤베누투스(Benvenutus, 또는 벤베누토)는 이탈리아 마르케(Marche) 지방의 레카나티 출신으로, 그곳은 로레토(Loreto)와 인접한 마을이다. 그는 콘벤투알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었는데, 높은 자리를 탐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늘 새기면서 겸손의 덕을 키웠다고 한다.

미사 중, 특히 영성체할 때 그는 자주 탈혼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때 그의 몸에는 아무런 감각도 없는 듯 보였다고 한다. 한 번은 탈혼 상태에서 깨어보니 동료 형제들의 식사 준비 시간이 훨씬 지났음을 알고 급히 부엌으로 달려가 보니 천사가 모든 준비를 다 해두었다고 한다.

그는 일생동안 입에 맞는 음식을 먹은 적이 없을 정도로 엄격한 삶을 살았다. 그에 대한 공경은 교황 비오 7세(Pius VII, 1800-1823년 재위)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빅토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Victo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빅토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빅또리오, 빅또리우스, 빅토리우스.

 

 

빅토리오 자료

성 폴리에욱투스(Polyeuctus)와 성 빅토리우스(또는 빅토리오) 그리고 성 도나투스(Donatus)는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카이사레아(Caesarea)에서 순교했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사바스 레예스 살라사르

 

  • 가톨릭 성인 이름
    Sabas Reyes Salaza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83-1927년 멕시코

 

 

사바스 레예스 살라사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사바.

 

 

사바스 레예스 살라사르 자료

성 사바스 레예스 살라사르는 1883년 12월 5일 과달라하라(Guadalajara) 대교구에 속한 멕시코 서부 할리스코(Jalisco) 주(州)의 코쿨라(Cocula)에서 태어났다. 그는 과달라하라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1911년 12월에 사제품을 받은 후 과달라하라의 몇몇 본당에서 사목활동을 했다.

가톨릭 교회에 대한 멕시코 정부의 박해가 계속될 때 그는 산 후안 데 로스 라고스(San Juan de los Lagos) 교구에 속한 할리스코의 토토틀란(Tototlan)에서 은밀히 사목활동을 하고 있었다. 성실하고 열정적인 그는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느님께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갖고 있었고, 자주 연옥 영혼을 위한 기도를 바쳤다.

또한 교리교육뿐 아니라 과학과 상업, 미술과 음악 분야에서 어린이와 젊은이들의 양성하는 데도 관심이 많았다. 당시는 사제로서 사는 것이 매우 위험한 박해시기였기 때문에 토토틀란을 떠나라는 권유를 받았을 때 그는 “나는 여기 머물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보기 위해 기다릴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1927년 성주간이 시작될 때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프란치스코 비스카라(Francisco Vizcarra) 신부와 그의 동료 신부들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성 사바스 레예스 살라사르 신부 외에는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군인들은 모든 분풀이를 그에게 쏟아부었다.

그를 성당 기둥에 단단히 묶고 3일 동안 음식과 물도 주지 않으면서 다른 사제들이 숨은 곳을 말하라며 혹독한 고문을 자행했다. 군인들은 성체를 축성한다는 이유로 그의 두 손을 불태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참아냈다.

1927년 4월 13일, 성주간 수요일에 그는 마을 외곽의 공동묘지로 끌려가 총에 맞아 살해되었다. 죽기 전에 그는 온 힘을 다해 “그리스도 왕 만세!”를 외치며 하늘나라로 갔다.

성 사바스 레예스 살라사르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Christophorus Magallanes) 사제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8. 살바도르 라라 푸엔테

 

  • 가톨릭 성인 이름
    Salvador Lara Puent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평신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905-1926년 멕시코

 

 

살바도르 라라 푸엔테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뿌엔떼, 쌀바도르.

 

 

살바도르 라라 푸엔테 자료

성 살바도르 라라 푸엔테는 1905년 8월 13일 두랑고(Durango) 대교구에 속한 멕시코 중북부 두랑고 주(州)의 베르린(Berlin)에서 태어났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키 크고 강인한 젊은이였던 그는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모든 이들에게 좋은 표양을 보였다.

그는 남편을 잃고 홀로된 어머니를 효성스런 마음으로 돌보았고, 자신의 일터인 광산에서도 맡은 책임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신앙생활에 열심이었고, 반교회적인 혁명 정부에 당당히 맞서던 가톨릭 액션(Catholic Action) 멕시코 청년회에 투쟁적 사도로 참여하고 있었다.

1926년 8월 14일 교구의 성 루이스 바티스 사인스(Luis Batiz Sainz) 신부가 정부군에 의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톨릭 청년 멕시코 연맹(The Mexican Association for Catholic Youth)에서 함께 활동하던 성 다비드 롤단 라라(David Roldan Lara)와 성 마누엘 모랄레스(Manuel Morales)와 함께 신부를 돕기 위한 계획을 짜고 있었다.

다음날 군인들이 그들을 체포하기 위해 들이닥쳐 이름을 부를 때, 그는 기쁨에 찬 목소리로 “나 여기 있소.” 하고 응답했다. 그는 평소와 같은 미소를 띤 얼굴로 친구이자 사촌 형제인 성 다비드 롤단 라라와 함께 나란히 걸어서 처형장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성 루이스 바티스 사인스 신부와 성 마누엘 모랄레스가 총에 맞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기도하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고, 1929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총살형을 받고 하늘나라로 들어갔다.

성 살바도르 라라 푸엔테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Christophorus Magallanes) 사제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9. 세쿤도

 

  • 가톨릭 성인 이름
    Secund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57년 이집트

 

 

세쿤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세군도, 세꾼도, 세꾼두스, 세쿤두스.

 

 

세쿤도 자료

이집트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사제 성 세쿤두스(또는 세쿤도)는 다른 많은 성직자와 평신도, 특히 많은 여성들을 포함한 신자들과 함께 동방교회에서 아리우스파와의 논쟁이 격심하던 때에 그들에 의해 순교하였다.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 주교가 아리우스파에 의해 추방된 사이에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좌를 강탈한 게오르기우스(Georgius) 주교는 열성적인 아리우스주의자로서 많은 신자들을 죽음에로 내몰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0. 세쿤디노

 

  • 가톨릭 성인 이름
    Secund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6년 코르도바

 

 

세쿤디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세군디노, 세꾼디노, 세꾼디누스, 세쿤디누스, 쎄꾼디노, 쎄꾼디누스.

 

 

세쿤디노 자료

성 세쿤디누스(또는 세쿤디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에스파냐 남부 코르도바에서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1. 아우구스티노 칼로카 코르테스

 

  • 가톨릭 성인 이름
    Agustin Caloca Corte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98-1927년 멕시코

 

 

아우구스티노 칼로카 코르테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구스틴, 아오스딩, 아우구스띠노, 아우구스띠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 오스틴.

 

 

아우구스티노 칼로카 코르테스 자료

성 아우구스티누스 칼로카 코르테스(Augustinus Caloca Cortes, 또는 아우구스티노 칼로카 코르테스)는 1898년 5월 5일 멕시코 중부 사카테카스(Zacatecas)의 산 후안 바우티스타 데 테울(San Juan Bautista de Teul)에서 태어났다.

그는 할리스코(Jalisco) 주(州)의 과달라하라(Guadalajara)에서 신학교에 다녔으나 멕시코 혁명 중에 신학교가 약탈당할 때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는 비밀리에 운영되던 보조 신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했고, 1919년에 과달라하라의 신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1923년 8월 15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토타티케(Totatiche)의 본당과 신학교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했다.

1927년 5월 말 신학교의 일과가 마무리될 무렵 정부군이 가까이 도착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칼로카 코르테스 신부는 신학생들을 안전하게 피신시키고 자신 또한 피신하려 했으나 군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토타티케의 감옥에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Christophorus Magallanes) 신부와 함께 갇혔다.

그들은 콜로틀란(Colotlan)으로 이송되었고, 1927년 5월 25일 불타버린 시청 건물에서 총살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33년 그의 시신이 토타티케의 본당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심장은 부패하지 않은 채로 발견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칼로카 코르테스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 사제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2. 아제라노

 

  • 가톨릭 성인 이름
    Agera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승,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888년 베즈

 

 

아제라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게라노, 아게라누스, 아제라누스.

 

 

아제라노 자료

성 아게라누스(또는 아제라노)는 프랑스 중동부 코트도르(Cote-d'Or)의 베즈에서 베네딕토회 수도승이 되었다. 노르만족이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을 침략했을 때(886-889년) 대부분의 수도승들은 피신했으나, 성 아게라누스와 몇몇 동료들은 끝까지 남아 제단을 지키다가 침략자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3. 아틸라노 크루스 알바라도

 

  • 가톨릭 성인 이름
    Atilano Cruz Alvarado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901-1928년 멕시코

 

 

아틸라노 크루스 알바라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띨라노, 크루즈.

 

 

아틸라노 크루스 알바라도 자료

성 아틸라노 크루스 알바라도는 1901년 10월 5일 멕시코 서부 할리스코(Jalisco) 주(州) 테오칼티케(Teocaltiche)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의 허락을 받고 테오칼티케로 가서 글을 읽고 쓰는 것을 배울 때까지 가족들을 위해 목장 노동자로 일했다. 테오칼티케에서 자신의 성소를 발견한 그는 1918년에 당시 멕시코 혁명정부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운영되던 신학교에 입학했다.

2년 후에 그는 신학교 과정을 마칠 수 있도록 과달라하라(Guadalajara)로 보내졌고, 1927년 7월 24일 종교 박해가 절정에 달해 사제가 되는 것을 중범죄에 처리하던 때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로부터 1년 후 그는 쿠퀴오(Cuquio) 본당으로 파견되었는데, 당시 본당은 박해로 인해 인근의 한 목장 주택을 피신처로 삼아 유지되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1928년 6월 29일 자신의 주임신부인 성 후스티노 오로나 마드리갈(Justino Orona Madrigal) 신부를 만나 본당이 처한 어려운 상황에 대해 기도하며 의견을 나눴다.

그해 7월 1일 이른 새벽, 쿠퀴오의 시장과 40여 명의 멕시코 정부군이 목장 주택을 급습해왔다. 그는 자신의 방에서 성 후스티노 오로나 마드리갈 신부가 총에 맞는 소리를 들었다.

군인들을 기다리며 침대 발치에서 기도하던 그 역시 군인들의 총탄에 무참히 쓰러지고 말았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던 그는 성 후스티노 오로나 마드리갈 신부와 함께 현관으로 내던져졌고, 쿠퀴오 마을 중앙 광장으로 끌려가서 죽을 때까지 질질 끌려다녀야 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순교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군중에게 공포심을 주기 위해 광장에 내버려 둔 그들의 시신을 용감한 신자들이 수습해서 쿠퀴오의 성 필립보 성당에 안치하였다.

성 아틸라노 크루스 알바라도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Christophorus Magallanes) 사제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4. 안티오코

 

  • 가톨릭 성인 이름
    Antioch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호민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안티오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띠꼬, 안띠꾸스, 안띠오꼬, 안띠오꾸스, 안티오꼬, 안티오꾸스, 안티오쿠스, 안티코, 안티쿠스.

 

 

안티오코 자료

저자가 불확실한 성 프로코피우스(Procopius, 7월 8일)의 행전에 따르면 성 니코스트라투스(Nicostratus)와 성 안티오쿠스(또는 안티오코)는 로마 보병대의 호민관이었다. 그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카이사레아 필리피(Caesarea Philippi)에서 동료 군인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성 안티오쿠스는 안티쿠스(Antich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5. 에우제니오 드 마제노

 

  • 가톨릭 성인 이름
    Eugene de Mazenod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설립자,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2-1861년 마르세유

 

 

에우제니오 드 마제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제노드, 에우게니오, 에우게니우스, 에우제니우스, 유진.

 

 

에우제니오 드 마제노 자료

성 카롤루스 요세푸스 에우게니우스 드 마제노(Carolus Iosephus Eugenius de Mazenod, 또는 에우제니오 드 마제노)는 1782년 8월 1일 프랑스 남부 액상 프로방스(Aixen-Provence)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프랑스의 중산층으로 수녀원 부속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부유했고, 아버지는 귀족 출신으로 전통 교육을 받았으나 가난했다. 그들의 혼인생활과 성 에우게니우스의 가정생활은 지속적인 집안싸움과 외할머니의 간섭, 신경과민의 이모에 의해 꽤나 괴로웠다.

1790년 12월 13일, 8살의 성 에우게니우스와 그의 가족은 프랑스 대혁명을 피하여 이탈리아로 피신했다. 그의 가족들은 프랑스의 니스(Nice), 이탈리아의 토리노(Torino), 베네치아(Venezia), 나폴리(Napoli), 팔레르모(Palermo)에서 11년을 생활했다. 성 에우게니우스는 매일의 생활을 통해 이탈리아어와 독일어를 배웠다.

대부분의 교육은 베네치아의 본당신부인 바르톨로 지넬리(Bartolo Zinelli) 신부로부터 받았다. 팔레르모에서는 젊고 부유한 이탈리아 귀족들과 함께 방탕하고 세속적인 삶을 살았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끝나고 어머니는 프랑스로 돌아갔지만 아버지는 외면상의 정치적인 이유로 이탈리아에 남았다. 아버지가 1802년 가족 소유의 땅을 회수하고자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성 에우게니우스는 부모님을 재결합시키고자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19세기 초반에 드문 사건인 부모의 이혼을 경험했다.

부모로부터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유년시절과 지속적인 가정불화와 가정의 파괴는 성 에우게니우스로 하여금 도움이 필요한 가정과 그 구성원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게 했다.

수년 동안 성 에우게니우스는 혼자 괴로워하면서 팔레르모에서 경험했던 세속적인 삶에 한 손을 담그고, 다른 한 손은 베네치아에서 바르톨로 지넬리 신부와 함께 경험했던 종교적 삶의 아름다움에 담근 채 생활했다. 해답을 구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그는 1805년 수감자들에게 교리교육을 하고, 함께 노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하느님께서 승리하시어, 1807년 성 금요일에 십자가 발치 아래에서 신비 체험을 한 성 에우게니우스는 충만한 하느님 사랑의 힘에 의해 감동을 받고 1808년 파리에 있는 성 술피스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1811년 29세의 나이로 프랑스 아미앵(Amiens)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귀족 출신이라는 배경 때문에 수품 직후 아미앵의 주교 총대리직을 제안받았으나, 이를 포기하고 액상 프로방스의 본당 신부를 택하여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일하고 선교하였다.

그는 상류층에서 사용하는 프랑스어가 아닌 지방 사투리를 사용해 그들을 교회로 끌어들였다. 그는 병자들, 수감자들,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였으며 젊은이들을 보살폈다. 교도소에서 사목할 때 그는 병에 감염되어 거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다.

성 에우게니우스는 자기 주변에 성직자와 평신도를 막론하고 많은 추수꾼들을 모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전의 카르멜회 수도원에서 일하였고, 그들 중 성직자들은 지역 전체에 걸쳐 본당 업무를 수행하며 프로방스의 선교회를 형성하였다.

이 작업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그 명성이 퍼져나가 다른 지역에서도 그들을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성 에우게니우스는 공식 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826년 2월 17일에 교황 레오 12세(Leo XII)로부터 새 수도회인 오블라티 선교 수도회(원명 : 원죄 없으신 마리아 봉헌 선교 수도회)의 설립을 승인받았다.

성 에우게니우스는 계속해서 선교사로 남고자 했지만 교회는 그가 설립한 작은 수도회의 발전을 확실하게 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그는 1823년 마르세유의 총대리로 임명되었고, 1832년 10월 14일에는 이코시아(Icosia)의 명의주교가 되었으며, 1834년에 보좌주교가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는 그를 1837년 12월 24일에 프랑스 마르세유의 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23개의 본당을 설립했으며, 50여개의 성당을 건축하거나 재건하고 은퇴하거나 박해당한 사제들을 돌보았으며, 교계 규율을 재건하고 젊은이들을 위한 교리 교재를 개발하였다. 그는 또한 33개의 수도회들을 교구로 받아들였고, 교구 사제의 숫자를 두 배 이상으로 늘리며 모든 서품식을 집전하였다.

성 에우게니우스 주교는 본당들을 재정비하고 교육에 있어서의 정부의 독점을 약화시키고자 남몰래 노력하였다. 교황직에 대한 적극적 옹호자였던 그는 교회의 일에 대한 정부의 개입에 대항해 싸웠다.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에 대한 교황의 선포에 공적으로 찬성했으며 그 교리를 널리 퍼뜨리고자 노력했다.

그는 25권에 달하는 저서를 썼다. 복자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마르세유의 대주교로 승품된 그는 1856년에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원로원 회원이 되었고,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1859년에는 추기경직을 제안받았다.

1841년 12월 2일 성 에우게니우스 주교의 첫 선교사들이 캐나다에 진출하였고, 그가 선종할 당시에는 10개국에서 선교하는 6명의 수도회 주교와 400명의 선교사들이 있었다. 오늘날 68개의 나라에 5,000명이 넘는 선교사들이 이 선교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성 에우게니우스 드 마제노는 1861년 5월 2일 마르세유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1975년 10월 19일 교황 복자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95년 12월 3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모든 가정의 수호성인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6. 에우티키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utych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4세기경

 

 

에우티키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우띠치오, 에우띠치우스, 에우티치오, 에우티치우스, 에우티키우스.

 

 

에우티키오 자료

북아프리카 마우레타니아(Mauretania, 현재의 모로코와 알제리에 해당하는 지역의 로마시대 명칭) 출신의 성 티모테우스(Timotheus)와 성 폴리우스(Polius) 부제 그리고 성 에우티키우스(또는 에우티키오) 부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7. 예나로 산체스 델가디요

 

  • 가톨릭 성인 이름
    Jenaro Sanchez Delgadillo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86-1927년 멕시코

 

 

예나로 산체스 델가디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제나로.

 

 

예나로 산체스 델가디요 자료

성 예나로 산체스 델가디요는 1886년 9월 19일 멕시코 중서부 할리스코(Jalisco) 주(州)의 사포판(Zapopan)에서 크리스토발 산체스(Cristobal Sanchez)과 훌리아 델가디요(Julia Delgadillo)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과달라하라(Guadalajara)의 신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한 후 1911년 8월 20일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여러 본당에서 사목하면서 겸손과 순종의 덕으로 병자들을 돌보고 어린이들의 교리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가톨릭교회에 대한 멕시코 정부의 박해가 심해지면서 공적인 전례가 금지되었을 때, 그는 민가에서 비밀리에 설교하며 사제직을 수행했다.

그는 라 카냐다(La Canada) 목장에서 카스티요(Castillo) 가족의 집에서 살았다. 1927년 1월 17일 그는 여러 신자와 함께 사냥을 나갔다가 기다리고 있던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모든 사람이 그에게 도망가라고 했지만 그는 신자들과 함께 끝까지 남았다.

한밤중에 성 예나로 산체스 델가디요 신부는 처형을 위해 테코로틀란(Tecolotlan)으로 이송되었다. ‘라 로마 오 크루스 베르데’(La Loma o Cruz Verde)로 알려진 ‘녹색 십자가의 작은 언덕’에서 사형 집행인들은 아카시아 속(屬)의 일종인 메스키트(mesquite) 나무를 택해 그의 목에 올가미 밧줄을 걸고 나뭇가지 위로 줄을 던져 그를 매달았다.

새벽 동이 트기 전에 군인들은 그의 왼쪽 어깨에 총을 쏘았고, 밧줄을 풀어 시신을 바닥에 떨어뜨린 다음 군인 중 한 명이 총검으로 가슴을 찔러 구멍을 냈다. 그의 시신은 개인 집으로 옮겨졌으나 즉시 테코로틀란의 공동묘지에 매장하라는 정부 당국의 명령에 따라 그곳에 묻혔다.

처형당하기 전 성 예나로 산체스 델가디요 신부는 사형 집행인에게 “당신을 용서합니다. 나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도 당신을 용서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왕은 영원하십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유해는 1934년 과달라하라 교구의 승인을 받아 할리스코의 테콜로틀란 코쿨라(Tecolotlan Cocula) 본당으로 이장하여 모셨다.

성 예나로 산체스 델가디요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Christophorus Magallanes) 사제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8. 크리스토포로 마가야네스

 

  • 가톨릭 성인 이름
    Christopher Magallane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69-1927년 멕시코

 

 

크리스토포로 마가야네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크리스또뽈, 크리스터퍼, 크리스토발, 크리스토퍼, 크리스토포루스, 크리스토폴, 하라.

 

 

크리스토포로 마가야네스 자료

크리스토발 마가야네스 하라(Cristobal Magallanes Jara)로도 알려진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Christophorus Magallanes, 또는 크리스토포로 마가야네스)는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 중에 반란을 선동했다는 날조된 혐의를 받고 미사를 봉헌하던 중에 체포되어 재판도 없이 죽임을 당한 순교자로서 가톨릭교회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1869년 7월 30일 멕시코 서부 할리스코(Jalisco) 주(州)의 토타티케(Totatiche)에서 농부였던 라파엘 마가야네스(Rafael Magallanes)와 클라라 하라(Clara Jara)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목동으로 일하던 그는 19살 때에 과달라하라(Guadalajara)에 있는 산 호세(San Jose)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30세에 과달라하라에 있는 산타 테레사(Santa Teresa)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후 같은 도시의 한 학교에서 교목 신부로 봉직했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토타티케의 본당신부로 임명된 후 학교와 목공예품 상점을 설립하고, 칸데라리아(Candelaria) 댐 건설을 돕는 등 고향의 발전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멕시코 서부 시에라마드레 산맥(Sierra Madre Mts.)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인 후이촐족(Huichol)의 복음화도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아스퀠탄(Azqueltan)에 있는 아메리카 인디언 마을에 선교 기관을 설립했다.

1914년 정부로부터 과달라하라의 신학교를 폐쇄하라는 결정이 내려졌을 때, 그는 자신의 본당에서 신학교를 열 것을 제의하였다. 1915년 7월 토타티케에 개교한 신학교는 빠르게 성장해 다음 해에 이미 17명의 학생이 등록했고, 학칙과 두 명의 교수를 파견해준 과달라하라 교구의 호세 프란치스코 오로스코 이 히메네스(Jose Francisco Orozco y Jimenez) 대주교로부터 승인도 받았다.

그는 무장 반란에 반대하여 많은 저술과 설교를 했으나 오히려 그 지역의 크리스테로 반란을 도모했다는 부당한 고발을 당해 체포되었다. 1927년 5월 21일 농장에서 미사를 봉헌하던 중에 체포된 그는 얼마 안 남은 소지품마저 사형 집행인에게 주었고 그들의 죄 또한 용서해주었다.

그리고 아무런 재판도 없이 4일 후인 5월 25일 할리스코의 콜로틀란(Colotlan)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 칼로카 코르테스(Augustinus Caloca Cortes) 신부와 함께 순교하였다. 그는 사형 집행인에게 “나는 결백하며, 나의 피로써 나의 멕시코 형제들이 일치할 수 있기를 하느님께 간구한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크리스테로 전쟁과 관련하여 희생된 24명의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성인품에 올랐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9. 테오발도

 

  • 가톨릭 성인 이름
    Theobald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대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001년 비엔

 

 

테오발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떼오발도, 떼오발두스, 테오발두스, 테오발드.

 

 

테오발도 자료

성 테오발두스(Theobaldus, 또는 테오발도)는 970년에 프랑스 비엔의 대주교가 되어 선종할 때까지 수도원 쇄신의 충실한 지지자였으며, 왕실의 간섭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903년에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0. 토리비오 로모 곤살레스

 

  • 가톨릭 성인 이름
    Toribio Romo Gonzalez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900-1928년 멕시코

 

 

토리비오 로모 곤살레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곤잘레스, 또리비오, 뚜리비오, 뚜리비우스, 투리비오, 투리비우스.

 

 

토리비오 로모 곤살레스 자료

성 토리비오 로모 곤살레스는 1900년 4월 16일 산 후안 데 로스 라고스(San Juan de los Lagos) 교구에 속한 멕시코 서부 할리스코(Jalisco) 주(州) 할로스토티틀란(Jalostotitlan)의 산타 아나 데 과달루페(Santa Ana de Guadalupe)에서 목장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처음에는 부모의 반대도 있었지만, 1912년에 산 후안 데 로스 라고스에 있는 소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장난을 좋아하는 쾌활하고 행복한 신학생이었다.

1920년에 과달라하라의 신학교에 들어가 1922년 12월 23일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22살의 어린 나이에 사제품을 받기 위해 교황청의 관면을 받았다. 사제가 된 후 여러 본당에서 사목하면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리교육과 신앙생활에서 성체성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1927년 가톨릭교회에 대한 멕시코 정부의 박해가 극심해지면서 주거도 제한되고 신자들과 공동으로 묵주기도를 바치거나 미사를 봉헌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시련의 시기가 닥쳐왔다. 열렬한 기도의 사람이었던 그는 묵상과 영신 수련 그리고 성체조배를 강조하며 모범적인 방법으로 은밀히 사도직을 수행했다.

그는 늘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자신의 가장 기본적인 것마저 희생하며 이웃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동정심을 통해 위대한 신앙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는 순명과 소망으로 더욱 빛났다. 그 또한 박해로 인해 두려움을 느꼈지만, 하느님께서 은총과 강인함을 주시기를 청하면서 하느님을 위해 기꺼이 죽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27년 안전을 위해 여러 차례 장소를 옮긴 뒤에 테킬라(Tequila) 마을 외곽의 버려진 양조장 건물 안에 머물 곳을 마련한 후 매주 금요일 밤늦게까지 은밀히 사제직을 수행했다.

본당 공동체를 조직하고 사목하기 위해 늦은 밤까지 오랜 시간 힘들게 일한 그는 1928년 2월 25일 토요일 새벽 5시경 미사를 봉헌하려 했으나 너무 피곤해서 잠시 잠을 자고 나서 미사를 드리려고 침대에 들었다. 한 시간 정도 흐른 뒤에 정부군이 갑자기 들이닥쳐 그가 자고 있던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군인 중 한 명이 그가 신부임을 알아채고 “여기 신부가 있다. 그를 죽여라” 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다 총에 맞았다. 그리고는 몇 걸음 더 가다가 또 다른 총알을 맞고 바닥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성 토리비오 로모 곤살레스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Christophorus Magallanes) 사제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1. 트란쿠일리노 우비아르코 로블레스

 

  • 가톨릭 성인 이름
    Tranquilino Ubiarco Roble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99-1928년 멕시코

 

 

트란쿠일리노 우비아르코 로블레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뜨란꾸일리노, 우비아르꼬.

 

 

트란쿠일리노 우비아르코 로블레스 자료

성 트란쿠일리노 우비아르코 로블레스는 1899년 7월 8일 시우다드구스만(Ciudad Guzman) 교구에 속한 멕시코 서부 할리스코(Jalisco) 주(州)의 사포틀란 엘 그란데(Zapotlan el Grande)에서 태어났다. 멕시코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신학교가 폐쇄되고 건물 또한 강탈당했지만, 그는 개인적으로 사제직을 위한 공부를 계속했다.

그는 1920년에 주교의 부름을 받아 시날로아(Sinaloa)에 갔지만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교가 사망해 돌아와야 했다. 그 후 그는 과달라하라(Guadalajara) 신학교에서 학업을 재개해 1923년 8월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산 후안 데 로스 라고스(San Juan de los Lagos) 교구에 속한 할리스코 주의 테파티틀란(Tepatitlan)에서 사목활동을 펼쳤다.

박해 중에도 헌신적이고 지치지 않는 사목자였던 그는 애덕을 갖고 성사를 집전하며 신자들의 영적 요구를 돌보는 헌신적인 사제였다. 특히 박해 중에도 개인 집에서 신자들과 함께 미사성제를 계속해서 집전했다. 1928년 10월 초, 그는 미사를 봉헌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사려고 과달라하라로 갔다.

어떤 사람이 그가 사목하고 있는 지역이 할리스코 주에서 가장 박해가 심한 곳이라고 경고했지만, 그는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기꺼이 순교할 마음을 갖고 있었다.

어느 날 밤, 그는 미사를 집전하고 혼인을 축복하기 위한 준비를 하다가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교수형을 선고받고 과달라하라 도시 외곽의 가로수길로 끌려갔다.

그곳에는 교수형을 위한 밧줄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을 처형할 도구들을 축복하며 불의한 범죄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한 병사에게 “오늘 당신은 나와 함께 천국에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한 후 숨을 거두었다. 1928년 10월 5일 아침에 일어난 일이었다.

성 트란쿠일리노 우비아르코 로블레스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Cristobal Magallanes) 사제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2. 티모테오

 

  • 가톨릭 성인 이름
    Timothy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4세기경

 

 

티모테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디모떼오, 디모떼우스, 디모태오, 디모태우스, 디모테오, 디모테우스, 티모시, 티모테우스.

 

 

티모테오 자료

북아프리카 마우레타니아(Mauretania, 현재의 모로코와 알제리에 해당하는 지역의 로마시대 명칭) 출신의 성 티모테우스(Timotheus, 또는 티모테오, 디모테오)와 성 폴리우스(Polius) 부제 그리고 성 에우티키우스(Eutychius) 부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3. 페드로 데 헤수스 말도나도 루세로

 

  • 가톨릭 성인 이름
    Pedro de Jesus Maldonado Lucero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92-1937년 멕시코

 

 

페드로 데 헤수스 말도나도 루세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로, 베드루스, 예수스, 지저스, 페트루스, 피터.

 

 

페드로 데 헤수스 말도나도 루세로 자료

성 페드로 데 헤수스 말도나도 루세로는 1892년 6월 15일 멕시코 북부 치와와(Chihuahua) 주(州)의 치와와 시(市)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톨릭교회를 박해하는 멕시코의 정치적인 상황으로 신학교가 폐쇄되어 미국 텍사스(Texas) 주의 엘파소(El Paso)에서 사제직을 위한 공부를 계속해야 했다.

1918년 1월 25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먼저 고향 인근 산 니콜라스 데 카레타스(San Nicolas de Carretas)라는 마을로 발령받아 그곳에서 타라우마라족(Tarahumara)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가난한 사람과 고아들을 돌보며 교육에 힘썼다.

1924년 1월 그는 치와와 시의 산타 이사벨(Santa Isabel) 본당의 사목자로 부임하였다. 신학생 때 그는 “나는 나의 마음과 심장을 항상 하늘나라와 감실에 둘 것이다.”라는 말을 분명히 했었다. 그리고 이 말은 평생 그의 삶을 이끌었고, 사제직을 수행하면서 다른 모든 것 앞에 둔 가치였다.

그는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위대한 사랑을 갖고 있었고, 지속적으로 성체를 조배하며 신자들 가운데서 밤샘 성체조배를 위한 많은 그룹을 만들었다. 그는 또한 콜롬부스 기사회(The Knights of Columbus)의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1937년 2월 10일, 그는 사순시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을 맞아 신자들의 고해를 듣고 그들의 머리에 재를 얹어주는 예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그때 일단의 무장한 남자들이 들이닥쳐 그를 죄수로 체포했다. 그는 축성된 성체를 작은 성합에 담아 이를 들고 군인들을 뒤따라갔다.

시청에 도착하자 정치인과 경찰들은 그를 모욕하고 사정없이 때렸다. 권총으로 그의 머리를 내려쳤고, 그로 인해 두개골이 골절되고 왼쪽 눈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그는 피로 뒤범벅되었고, 거의 반쯤 의식을 잃은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때 성합이 떨어지며 뚜껑이 열렸다.

군인 중 한 명이 그에게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먹으라고 했고, 그는 자신을 위한 노자성체(路資聖體)를 스스로 모실 수 있었다. 극심한 고통 속에 그는 그 지역의 공립병원으로 이송되었고, 다음날인 1937년 2월 11일 숨을 거두었다. 그의 묘비에는 단 네 마디로 이 순교자를 적절히 묘사하는 글귀가 새겨졌다. “당신은 사제다”(You are a priest).

성 페드로 데 헤수스 말도나도 루세로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Christophorus Magallanes) 사제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4. 페드로 에스케다 라미레스

 

  • 가톨릭 성인 이름
    Pedro Esqueda Ramirez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87-1927년 멕시코

 

 

페드로 에스케다 라미레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로, 베드루스, 페트루스, 피터.

 

 

페드로 에스케다 라미레스 자료

성 페드로 에스케다 라미레스는 1887년 4월 29일 멕시코 서부 할리스코(Jalisco) 주(州)의 산 후안 데 로스 라고스(San Juan de los Lagos)에서 태어났다.

그는 산 후안 데 로스 라고스 교구의 보좌신부로서 열정을 가지고 어린이들의 교리교육을 위한 직무에 헌신하였다. 그는 교리 교사들의 연구를 위한 여러 센터를 설립했다. 늘 성체성사에 대한 깊은 신심을 가졌던 그는 박해 기간에도 은밀히 가정집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 앞에서 지속적으로 조배하는 모임들을 조직하였다.

가톨릭교회에 대한 멕시코 정부의 박해가 극심하던 때 그는 체포되었고, 그 과정에서 군인들의 폭행으로 얼굴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를 때린 한 군인이 이제는 아마도 사제가 된 것을 후회할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당당히 대답했다.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잠시나마 나는 천국을 보았다.”

1927년 11월 22일, 그는 처형을 위해 감옥 밖으로 끌려 나왔다. 많은 어린이가 그의 곁에 모여들었고, 자신의 옆에서 함께 걸어가던 한 소년에게 그는 끊임없이 반복해서 말했다.

“절대 교리 공부를 멈추지 마라. 그리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작은 종잇조각에 교리 교사들에게 주는 자신의 마지막 권고를 적어주었다. 그는 할리스코의 테오칼티틀란(Teocaltitlann) 변두리에 이르러 세 발의 총알을 맞고 순교하였다.

성 페드로 에스케다 라미레스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Christophorus Magallanes) 사제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5. 폴리에욱토

 

  • 가톨릭 성인 이름
    Polyeuc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폴리에욱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뽈리에욱또, 뽈리에욱뚜스, 폴리에욱투스.

 

 

폴리에욱토 자료

성 폴리에욱투스(또는 폴리에욱토)와 성 빅토리우스(Victorius) 그리고 성 도나투스(Donatus)는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카이사레아(Caesarea)에서 순교했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6. 폴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Pol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4세기경

 

 

폴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뽈리오, 뽈리우스, 폴리우스.

 

 

폴리오 자료

북아프리카 마우레타니아(Mauretania, 현재의 모로코와 알제리에 해당하는 지역의 로마시대 명칭) 출신의 성 티모테우스(Timotheus)와 성 폴리우스(또는 폴리오) 부제 그리고 성 에우티키우스(Eutychius) 부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7. 헤수스 멘데스 몬토야

 

  • 가톨릭 성인 이름
    Jesus Mendez Montoya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80-1928년 멕시코

 

 

헤수스 멘데스 몬토야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예수스, 지저스.

 

 

헤수스 멘데스 몬토야 자료

성 헤수스 멘데스 몬토야는 1880년 6월 10일 모렐리아(Morelia) 대교구에 속한 멕시코 남서부 미초아칸(Michoacan) 주(州)의 타림바로(Tarimbaro)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4년에 모렐리아 대교구의 신학교에 입학해 1906년 6월 3일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교구 내의 여러 곳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했고, 가톨릭교회에 대한 멕시코 정부의 박해가 심해지는 시기에는 과나후아토(Guanajuato)의 발티에리야(Valtierrilla) 본당의 사목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주고자 노력하는 사제였다. 그는 신자들의 영성 생활 안에서 그들을 돕는 방법을 찾았고, 신자들의 영성 생활을 강화하는 방법으로 고해성사 안에서 상담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정성껏 돌보았고, 노동자와 농민들의 교리교사이자 안내자로 헌신했다. 그는 전례적 찬양을 위해 성가대도 만들고 지휘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8년 2월 5일 멕시코 혁명정부의 반종교적 정책에 저항하는 크리스테로(Cristero)를 찾기 위해 정부군이 그 지역으로 들어와 그가 머물고 있던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는 즉시 성체를 모신 감실을 보호하기 위해 집으로 갔고 그곳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군인들에게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해 주도록 했고, 다행히 군인들이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 성체를 모신 다음 그는 신자들을 향해 돌아서서 말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나는 그분의 뜻을 실천할 것입니다.”

군인들은 그를 밖으로 끌고 나가 세 발을 총을 쏘았고 순교자는 하늘나라로 들어갔다.

성 헤수스 멘데스 몬토야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Christophorus Magallanes) 사제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8. 호세 마리아 로블레스 우르타도

 

  • 가톨릭 성인 이름
    Jose Maria Robles Hurtado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88-1927년 멕시코

 

 

호세 마리아 로블레스 우르타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요세푸스, 요셉,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후르타도.

 

 

호세 마리아 로블레스 우르타도 자료

성 호세 마리아 로블레스 우르타도는 1888년 5월 3일 멕시코 서부 할리스코(Jalisco) 주(州)의 마스코타(Mascota)에서 열심한 가톨릭 신자인 안토니오 로블레스(Antonio Robles)와 페트로닐라 우르타도(Petronilla Hurtado)의 아들로 태어났다.

12살 때 과달라하라(Guadalajara)의 신학교에 들어간 그는 1913년 25살의 나이로 과달라하라 교구사제로 서품되었다. 몇 년 후 그는 예수 성심의 수녀회(The Sisters of the Sacred Heart of Jesus)를 설립했고,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많은 책을 저술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교리교육을 실시했다.

테콜로틀란(Tecolotlan)에서 본당신부로서 재임하는 동안 그는 강론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모범과 성체성사에 대한 지극한 헌신을 통해 신자들이 예수님의 성심에 더욱 깊이 빠져들도록 했다. 이런 열정 때문에 그는 ‘성심에 미친 사람’으로도 알려졌다.

그는 본당 내의 병자들을 돌보는 데 지치지 않는 열성을 보였고, 본당 신자들의 고해를 듣는 데 여러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는 과달루페(Guadalupe) 성모님을 공경하는 신심도 매우 깊었고, 콜롬부스 기사회(The Knights of Columbus)의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1917년 멕시코 헌법에 따라 가톨릭의 모든 전례와 신심 행위가 금지되었을 때 그는 직접적이고 헌법적인 방해 속에서도 어떻게든 멕시코인들이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참된 왕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돕고자 했다.

그래서 멕시코의 중심이 되는 곳에 거대한 십자가를 세우고자 했고, 1923년 기공식 때에는 4만여 명의 신자들이 참여하여 위대한 역사의 초석을 쌓았다. 이곳을 그 당시에는 ‘라 로마’(La Loma)라 불렀고 오늘날에는 ‘그리스도 왕(王)의 산’으로 부르고 있다.

신자들의 이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멕시코 정부의 가톨릭에 대한 부당한 박해는 더욱 극심해졌다. 점증하는 박해의 위험과 개인적으로 멕시코를 떠나라는 분명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성 호세 마리아 로블레스 우르타도 신부는 그대로 남아 신자들을 위한 직무를 계속했다.

그는 정부에 의해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한 가톨릭 신자 가정과 생존자들을 위해 무엇이든 자신이 할 수 있는 위안을 제공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활동 때문에 죽임을 당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쓴 한 편의 시에서 “나는 순교할 때까지 당신을 사랑하기를 소망합니다.”라며 순교자다운 신앙을 표현했었다.

1927년 6월 25일, 마침내 그는 당시 자신을 숨겨주고 있던 한 신자의 집에서 미사를 드리던 중 체포되었다. 그는 유죄 판결을 받고 떡갈나무에 매달리는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다음날 채 동이 트기도 전에 그는 교수형이 집행될 나무를 향해 끌려갔다. 사형을 집행할 이들을 위해 마지막 연민의 표시로 그는 주머니에 갖고 있던 작은 봉헌 초를 그들에게 주며 자신을 목매달 나무까지 가는 길에 어둠을 비추도록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그는 그들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그대들의 손을 더럽히지 말라.”며 자신의 손으로 직접 올가미를 목에 걸고 순교의 길로 용감히 나아갔다.

성 호세 마리아 로블레스 우르타도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Christophorus Magallanes) 사제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9. 호세 이사벨 플로레스 바렐라

 

  • 가톨릭 성인 이름
    Jose Isabel Flores Varela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66-1927년 멕시코

 

 

호세 이사벨 플로레스 바렐라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레라, 요세푸스, 요셉,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호세 이사벨 플로레스 바렐라 자료

성 호세 이사벨 플로레스 바렐라는 1866년 11월 28일 과달라하라(Guadalajara) 대교구에 속한 멕시코 중부 사카테카스(Zacatecas)의 테울(Teul)에서 태어났다. 그는 과달라하라 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1896년 사제품을 받고 멕시코 서부 할리스코(Jalisco) 주(州)의 여러 본당에서 사목한 후 사포틀라네요(Zapotlanejo) 본당의 마타틀란(Matatlan)에서 오랫동안 사목하고 있었다.

거의 26년 동안 그는 모든 이에게 가난의 영성과 자기희생과 신심 그리고 지혜를 가지고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제로서의 직무에 헌신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에게 강인하고도 관대한 사목자였던 그는 가톨릭교회에 대한 정부의 박해로 본당을 폐쇄하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몸을 숨겼다. 그리고 본당 신자들을 위해 은밀히 사목활동을 계속했다.

반가톨릭적인 사포틀라네요의 시장 호세 오로스코(Jose Orozco)는 어떤 사제든 신고하거나 체포하면 상을 주겠다고 공포했다. 결국 그와 함께 신학교에서 생활하다 나간 오랜 친구 한 명이 그를 시장에게 고발했고, 그는 1927년 6월 18일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농장들을 돌던 중 체포되었다.

그는 구금되어 있던 사흘 내내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도 먹지 못했고, 일부로 감옥 밖에서 크게 틀어놓은 음악 소리 때문에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이렇듯 잔인한 고문과 함께 시장의 회유도 잇따랐다.

음악을 듣던 시장은 그에게 아름다운 음악을 들어보라고 조롱하며, 만일 헌법에 따라 가톨릭교회를 탄압하는 서류에 서명만 하면 자유의 몸이 될 것이라고 유혹했다. 하지만 성 호세 이사벨 플로레스 바렐라 신부는 오히려 “나는 하늘나라에서 더 좋은 음악을 들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1927년 6월 21일 새벽, 결국 그는 공동묘지 근처 들판으로 끌려 나갔다. 군인들은 계속해서 그에게 신앙을 부인하도록 강요하며 위협했으나 그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그를 총살하라는 명령이 한 병사에게 주어졌을 때, 그가 자신에게 세례를 준 신부임을 깨달은 그 병사는 차마 총을 쏠 수 없었다. 시장은 그 병사를 총으로 쐈다. 이어 다른 군인들이 그에게 총을 겨누었지만, 신비하게도 발사되지 않았다. 그래서 병사 중의 한 명이 칼을 꺼내 용맹한 순교자의 목을 베어 무참히 살해했다.

성 호세 이사벨 플로레스 바렐라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Christophorus Magallanes) 사제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0. 호스피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Hospi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580년경

 

 

호스피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호스삐씨오, 호스삐씨우스, 호스피시우스, 호스피씨오, 호스피씨우스, 호스피티오, 호스피티우스.

 

 

호스피시오 자료

성 호스피티우스(또는 호스피시오)는 프랑스 방리유(Banlieu) 부근, 오늘날 성인의 이름을 딴 도시(Cap-Saint-Hospice)에서 은수자로서 살았다.

그는 오래되어 폐허가 된 탑 위에서 사순시기뿐만 아니라 매일같이 철제 사슬을 몸에 두르고 오직 빵과 대추야자만을 먹으며 살았다. 그는 예언과 기적의 선물을 받았다.

성인의 유해는 5월 21일에 레랭(Lerins) 수도원으로 옮겨졌는데, 이날을 현재 축일로 기념하고 있다.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1월 17일) 주교는 자신의 저서에서 성 호스피티우스를 언급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1. 후스티노 오로나 마드리갈

 

  • 가톨릭 성인 이름
    Justino Orona Madrigal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77-1928년 멕시코

 

 

후스티노 오로나 마드리갈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유스띠노, 유스띠누스, 유스티노, 유스티누스, 저스틴.

 

 

후스티노 오로나 마드리갈 자료

성 후스티노 오로나 마드리갈은 1877년 4월 14일 멕시코 서부 할리스코(Jalisco) 주(州)의 아토약(Atoyac)에서 매우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94년에 과달라하라(Guadalajara)의 신학교에 입학한 후 가난한 부모를 돕기 위해 몇 년 동안 신학교 과정을 중단하고 일을 하는 등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성소를 지켜 1904년 27세의 나이로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여러 본당에서 헌신적인 사목자로 활동했고, 쿠퀴오(Cuquio) 본당에서 사목할 때 고아들과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들을 돌보기 위한 수도회로 ‘성심의 클라렛 형제회’를 설립하였다.

반가톨릭적인 멕시코 정부가 교회에 대한 박해를 강화하고 있을 때 그는 피신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나는 살든지 죽든지 이곳에서 나의 양떼와 함께 하겠다.”라며 거절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교구 신자들에 대한 사목을 계속하기 위해 그는 본당의 보좌인 성 아틸라노 크루스 알바라도(Atilano Cruz Alvarado) 신부와 함께 인근의 한 목장 주택을 피신처로 삼아 몸을 숨겼다.

그곳에서 두 신부는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며 사제로서 사목을 계속할 수 있는 계획을 논의했다. 1928년 7월 1일 이른 새벽, 쿠퀴오의 시장과 40여 명의 정부군이 목장을 급습했다. 군인들이 그의 방문을 열었을 때 그는 용감하게 “그리스도 왕 만세!”를 외쳤고, 즉시 군인들이 쏜 총탄을 맞고 순교하였다.

성 후스티노 오로나 마드리갈과 성 아틸라노 크루스 알바라도의 시신은 쿠퀴오 중앙 광장에 버려졌고, 용감한 신자들이 그들의 시신을 수습해서 쿠퀴오의 성 필립보 성당에 안치하였다.

성 후스티노 오로나 마드리갈은 1992년 11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Christophorus Magallanes) 사제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2. 훌리오 알바레스 멘도사

 

  • 가톨릭 성인 이름
    Julio Alvarez Mendoza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66-1927년 멕시코

 

 

훌리오 알바레스 멘도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율리오, 율리우스, 줄리어스.

 

 

훌리오 알바레스 멘도사 자료

성 훌리오 알바레스 멘도사는 1866년 12월 20일 멕시코 서부 할리스코(Jalisco) 주(州)의 과달라하라(Guadalajara)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4년 사제품을 받은 후 일생 할리스코의 메코아카네요(Mechoacanejo) 본당에서 사목활동을 했다. 그는 목장 지역을 방문하며 성당에 나오지 않는 이들을 찾아 나서는 사랑 가득한 본당 신부였고, 어린이들의 친구이자 아버지가 되었다. 

그는 또한 가난한 본당 신자들을 위해 공예를 가르치고, 직접 재단사의 일을 배워 가난한 이들을 위해 옷을 만들기도 했다. 시골 본당의 신부로 일생 사목하면서 그는 성체성사에 대한 투철한 헌신과 과달루페의 성모에 대한 깊은 신심을 갖고 살았다.

가톨릭교회에 대한 멕시코 정부의 박해가 심해졌을 때도 그는 농장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산속의 계곡에서 세례성사를 집전했다. 결국 그는 1927년 3월 26일 사제직을 계속 수행했다는 죄목으로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며칠 동안 말안장에 묶인 채로 아마로(Amaro) 장군이 있는 레온(Leon)까지 끌려가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3월 30일 산 훌리안(San Julian)에서 총살형으로 처형되었고, 그의 시신은 일생을 보냈던 본당 근처의 쓰레기 더미 위에 버려졌다. 그는 죽기 전에 “나의 죄라면 하느님의 직무 안에 머문 것일 뿐, 당신들 모두를 용서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성 훌리오 알바레스 멘도사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Christophorus Magallanes) 사제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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