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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2일 남자세례명 15가지

피어나네 2023. 10. 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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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2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라우토, 마우리시오, 비탈리스, 빅토르, 상티노, 엑스수페리오, 엠메라모, 요나, 이냐시오, 인노첸시오, 칸디도, 토마스, 펠릭스 4[3]세, 포카, 플로렌시오, 총 15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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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2일 여자세례명 디냐, 살라베르가, 에메리타, 이라이스, 총 4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9월 22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5가지

 

 

 

 

9월 22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라우토

  2. 마우리시오

  3. 비탈리스

  4. 빅토르

  5. 상티노

  6. 엑스수페리오

  7. 엠메라모

  8. 요나

  9. 이냐시오

  10. 인노첸시오

  11. 칸디도

  12. 토마스

  13. 펠릭스 4[3]세

  14. 포카

  15. 플로렌시오

 

9월 22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6가지

 

 

1. 라우토

 

  • 가톨릭 성인 이름
    Lauto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68년 콩스탕스

 

 

라우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우도, 라우두스, 라우또, 라우토, 로.

 

 

라우토 자료

성 라우토는 프랑스 노르망디(Normandie) 지방 콩스탕스의 주교로서 40년 동안 사목하였다. 때때로 성 로(Lo) 또는 성 라우두스(Laudus)로도 불리는 그의 가족들의 토지는 후에 생로(Saint-Lo)의 마을이 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마우리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Mauric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87년경? 아가우눔

 

 

마우리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우리시우스, 마우리씨오, 마우리씨우스, 마우리티오, 마우리티우스, 모리스.

 

 

마우리시오 자료

프랑스 리옹(Lyon)의 주교인 성 에우케리우스(Eucherius, 11월 16일)가 동료 주교인 살비우스(Salvius)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막시미아누스 황제 때 갈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바가우데(Bagaudae)의 농민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상부 이집트(Upper Egypt)의 룩소르(Luxor) 인근 테베(Thebes)에서 군인들을 모집하였다.

이때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천여 명의 테반 군단(Theban Legion)이 모집되었고, 그 부대의 지휘관이 성 마우리티우스(Mauritius, 또는 마우리시오)였다. 성 마우리티우스는 테베에서 태어나 자란 이집트인으로 알려졌다.

전승에 따르면, 성 마우리티우스가 황제를 돕기 위해 테반 군단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오늘날 스위스 남부 발레(Valais) 지방의 아가우눔(Agaunum, 오늘날 스위스의 생 모리스 Saint-Maurice)에 도착했을 때, 황제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해서 처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황제의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테반 군단 역시 황제의 명령을 거부했다.

또 다른 전승에 의하면, 성 마우리티우스와 동료 군인들은 갈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바가우데 반란을 격퇴한 승전 축하연에서 로마의 신들에게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을 거절했을 뿐 아니라 다른 무고한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라는 명령 또한 거부했다.

황제로부터 거듭 같은 명령을 받았지만, 그들은 요지부동하였다. 이에 분노한 막시미아누스 황제는 항명에 대한 형벌로 열 명 중 한 명씩 처형하도록 했다.

그래도 테반 군단의 병사들이 따르지 않자 반란을 두려워한 황제는 그들을 모두 아가우눔 일대에서 전멸시키도록 명령했다. 많은 병사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아가우눔에서 순교했고, 그곳에서 탈출한 부대원들도 스위스 북서부 졸로투른(Solothurn)에서 황제의 군대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22일 목록에서 고대 아가우눔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한 테반 군단의 성 마우리티우스, 성 엑스수페리우스(Exsuperius), 성 칸디두스(Candidus)와 베테랑 군인인 성 빅토르(Victor)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은 이들과 함께 성 인노켄티우스(Innocentius)와 성 비탈리스(Vitalis)의 이름도 전해주었다. 후대의 성인 전기 작가들은 독일의 쾰른(Koln)에서 이탈리아 북부 파엔차(Faenza)에 이르기까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많은 테반 군단 소속의 순교자들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아가우눔에 있는 성 마우리티우스와 동료들의 무덤 위에 이미 4세기 말에 성당에 건립되었고, 515년에 부르고뉴(Bourgogne)의 왕인 성 시지스문두스(Sigismundus, 5월 1일)가 ‘아가우눔의 순교자들’을 기념해 오늘날의 생 모리스 앙 발레(Saint-Maurice-en-Valais)에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을 세워 봉헌했다.

성 마우리티우스와 동료들의 유해를 모신 생 모리스 수도원은 그 뒤로 많은 순례자가 찾는 곳이 되었고, 성 마우리티우스는 부르고뉴 왕국의 수호성인으로, 다시 신성로마제국과 황제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게 되었다.

그 후 937년에 그 자리에 오토 대제(Otto I)가 생 모리스 수도원을 설립했고, 현재 그 자리에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고딕 양식의 마그데부르크 대성당(The Magdeburg Cathedral of Saints Maurice and Catherine)이 자리하고 있는데, 중부 독일 복음주의 개신교회 소속으로 되어 있다.

교회 미술에서 성 마우리티우스는 로마 군대의 지휘관답게 갑옷을 입은 군인으로 방패와 창을 들고 있거나 간혹 깃발을 든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12세기경부터 독일 등에서 성 마우리티우스를 검은 피부의 아프리카인으로 묘사한 그림이나 조각상들이 생겨났다.

이는 그의 라틴어 이름인 마우리티우스가 ‘무어인’(Moors) 또는 ‘북아프리카’라는 뜻을 지닌 ‘마우루스’(Maurus)에서 유래했기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성 마우리티우스는 다양한 지역과 나라 그리고 군인과 염색업자 등 다양한 직종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비탈리스

 

  • 가톨릭 성인 이름
    Vitali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87년경? 아가우눔

 

 

비탈리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비딸리스.

 

 

비탈리스 자료

프랑스 리옹(Lyon)의 주교인 성 에우케리우스(Eucherius, 11월 16일)가 동료 주교인 살비우스(Salvius)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막시미아누스 황제 때 갈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바가우데(Bagaudae)의 농민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상부 이집트(Upper Egypt)의 룩소르(Luxor) 인근 테베(Thebes)에서 군인들을 모집하였다.

이때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천여 명의 테반 군단(Theban Legion)이 모집되었고, 그 부대의 지휘관이 성 마우리티우스(Mauritius)였다. 성 마우리티우스는 테베에서 태어나 자란 이집트인으로 알려졌다.

전승에 따르면, 성 마우리티우스가 황제를 돕기 위해 테반 군단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오늘날 스위스 남부 발레(Valais) 지방의 아가우눔(Agaunum, 오늘날 스위스의 생 모리스 Saint-Maurice)에 도착했을 때, 황제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해서 처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황제의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테반 군단 역시 황제의 명령을 거부했다.

또 다른 전승에 의하면, 성 마우리티우스와 동료 군인들은 갈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바가우데 반란을 격퇴한 승전 축하연에서 로마의 신들에게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을 거절했을 뿐 아니라 다른 무고한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라는 명령 또한 거부했다. 황제로부터 거듭 같은 명령을 받았지만, 그들은 요지부동하였다.

이에 분노한 막시미아누스 황제는 항명에 대한 형벌로 열 명 중 한 명씩 처형하도록 했다. 그래도 테반 군단의 병사들이 따르지 않자 반란을 두려워한 황제는 그들을 모두 아가우눔 일대에서 전멸시키도록 명령했다.

많은 병사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아가우눔에서 순교했고, 그곳에서 탈출한 부대원들도 스위스 북서부 졸로투른(Solothurn)에서 황제의 군대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22일 목록에서 고대 아가우눔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한 테반 군단의 성 마우리티우스, 성 엑스수페리우스(Exsuperius), 성 칸디두스(Candidus)와 베테랑 군인인 성 빅토르(Victor)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은 이들과 함께 성 인노켄티우스(Innocentius)와 성 비탈리스의 이름도 전해주었다. 후대의 성인 전기 작가들은 독일의 쾰른(Koln)에서 이탈리아 북부 파엔차(Faenza)에 이르기까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많은 테반 군단 소속의 순교자들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아가우눔에 있는 성 마우리티우스와 동료들의 무덤 위에 이미 4세기 말에 성당에 건립되었고, 515년에 부르고뉴(Bourgogne)의 왕인 성 시지스문두스(Sigismundus, 5월 1일)가 ‘아가우눔의 순교자들’을 기념해 오늘날의 생 모리스 앙 발레(Saint-Maurice-en-Valais)에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을 세워 봉헌했다.

성 마우리티우스와 동료들의 유해를 모신 생 모리스 수도원은 그 뒤로 많은 순례자가 찾는 곳이 되었고, 성 마우리티우스는 부르고뉴 왕국의 수호성인으로, 다시 신성로마제국과 황제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게 되었다.

그 후 937년에 그 자리에 오토 대제(Otto I)가 생 모리스 수도원을 설립했고, 현재 그 자리에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고딕 양식의 마그데부르크 대성당(The Magdeburg Cathedral of Saints Maurice and Catherine)이 자리하고 있는데, 중부 독일 복음주의 개신교회 소속으로 되어 있다.

교회 미술에서 성 마우리티우스는 로마 군대의 지휘관답게 갑옷을 입은 군인으로 방패와 창을 들고 있거나 간혹 깃발을 든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12세기경부터 독일 등에서 성 마우리티우스를 검은 피부의 아프리카인으로 묘사한 그림이나 조각상들이 생겨났다.

이는 그의 라틴어 이름인 마우리티우스가 ‘무어인’(Moors) 또는 ‘북아프리카’라는 뜻을 지닌 ‘마우루스’(Maurus)에서 유래했기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성 마우리티우스는 다양한 지역과 나라 그리고 군인과 염색업자 등 다양한 직종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빅토르

 

  • 가톨릭 성인 이름
    Victo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87년경? 아가우눔

 

 

빅토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빅또르, 빅똘, 빅톨.

 

 

빅토르 자료

프랑스 리옹(Lyon)의 주교인 성 에우케리우스(Eucherius, 11월 16일)가 동료 주교인 살비우스(Salvius)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막시미아누스 황제 때 갈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바가우데(Bagaudae)의 농민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상부 이집트(Upper Egypt)의 룩소르(Luxor) 인근 테베(Thebes)에서 군인들을 모집하였다.

이때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천여 명의 테반 군단(Theban Legion)이 모집되었고, 그 부대의 지휘관이 성 마우리티우스(Mauritius)였다. 성 마우리티우스는 테베에서 태어나 자란 이집트인으로 알려졌다.

전승에 따르면, 성 마우리티우스가 황제를 돕기 위해 테반 군단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오늘날 스위스 남부 발레(Valais) 지방의 아가우눔(Agaunum, 오늘날 스위스의 생 모리스 Saint-Maurice)에 도착했을 때, 황제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해서 처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황제의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테반 군단 역시 황제의 명령을 거부했다.

또 다른 전승에 의하면, 성 마우리티우스와 동료 군인들은 갈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바가우데 반란을 격퇴한 승전 축하연에서 로마의 신들에게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을 거절했을 뿐 아니라 다른 무고한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라는 명령 또한 거부했다.

황제로부터 거듭 같은 명령을 받았지만, 그들은 요지부동하였다. 이에 분노한 막시미아누스 황제는 항명에 대한 형벌로 열 명 중 한 명씩 처형하도록 했다. 그래도 테반 군단의 병사들이 따르지 않자 반란을 두려워한 황제는 그들을 모두 아가우눔 일대에서 전멸시키도록 명령했다.

많은 병사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아가우눔에서 순교했고, 그곳에서 탈출한 부대원들도 스위스 북서부 졸로투른(Solothurn)에서 황제의 군대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22일 목록에서 고대 아가우눔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한 테반 군단의 성 마우리티우스, 성 엑스수페리우스(Exsuperius), 성 칸디두스(Candidus)와 베테랑 군인인 성 빅토르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은 이들과 함께 성 인노켄티우스(Innocentius)와 성 비탈리스(Vitalis)의 이름도 전해주었다. 후대의 성인 전기 작가들은 독일의 쾰른(Koln)에서 이탈리아 북부 파엔차(Faenza)에 이르기까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많은 테반 군단 소속의 순교자들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아가우눔에 있는 성 마우리티우스와 동료들의 무덤 위에 이미 4세기 말에 성당에 건립되었고, 515년에 부르고뉴(Bourgogne)의 왕인 성 시지스문두스(Sigismundus, 5월 1일)가 ‘아가우눔의 순교자들’을 기념해 오늘날의 생 모리스 앙 발레(Saint-Maurice-en-Valais)에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을 세워 봉헌했다.

성 마우리티우스와 동료들의 유해를 모신 생 모리스 수도원은 그 뒤로 많은 순례자가 찾는 곳이 되었고, 성 마우리티우스는 부르고뉴 왕국의 수호성인으로, 다시 신성로마제국과 황제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게 되었다.

그 후 937년에 그 자리에 오토 대제(Otto I)가 생 모리스 수도원을 설립했고, 현재 그 자리에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고딕 양식의 마그데부르크 대성당(The Magdeburg Cathedral of Saints Maurice and Catherine)이 자리하고 있는데, 중부 독일 복음주의 개신교회 소속으로 되어 있다.

교회 미술에서 성 마우리티우스는 로마 군대의 지휘관답게 갑옷을 입은 군인으로 방패와 창을 들고 있거나 간혹 깃발을 든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12세기경부터 독일 등에서 성 마우리티우스를 검은 피부의 아프리카인으로 묘사한 그림이나 조각상들이 생겨났다.

이는 그의 라틴어 이름인 마우리티우스가 ‘무어인’(Moors) 또는 ‘북아프리카’라는 뜻을 지닌 ‘마우루스’(Maurus)에서 유래했기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성 마우리티우스는 다양한 지역과 나라 그리고 군인과 염색업자 등 다양한 직종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상티노

 

  • 가톨릭 성인 이름
    Sanct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300년 뮤

 

 

상티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산티노, 산티누스, 상티누스, 쌍띠노, 쌍띠누스.

 

 

상티노 자료

성 상티누스(또는 상티노)는 프랑스 파리(Paris)의 초대주교인 성 디오니시우스(Dionysius, 10월 9일)의 제자로 뮤(Meux) 교구의 초대주교였다. 그는 또한 베르됭(Verdun) 교구를 설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엑스수페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xsupe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87년경? 아가우눔

 

 

엑스수페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엑수뻬리오, 엑수뻬리우스, 엑수페리오, 엑수페리우스, 엑스수뻬리오, 엑스수뻬리우스, 엑스수페리우스.

 

 

엑스수페리오 자료

프랑스 리옹(Lyon)의 주교인 성 에우케리우스(Eucherius, 11월 16일)가 동료 주교인 살비우스(Salvius)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막시미아누스 황제 때 갈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바가우데(Bagaudae)의 농민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상부 이집트(Upper Egypt)의 룩소르(Luxor) 인근 테베(Thebes)에서 군인들을 모집하였다.

이때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천여 명의 테반 군단(Theban Legion)이 모집되었고, 그 부대의 지휘관이 성 마우리티우스(Mauritius)였다. 성 마우리티우스는 테베에서 태어나 자란 이집트인으로 알려졌다.

전승에 따르면, 성 마우리티우스가 황제를 돕기 위해 테반 군단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오늘날 스위스 남부 발레(Valais) 지방의 아가우눔(Agaunum, 오늘날 스위스의 생 모리스 Saint-Maurice)에 도착했을 때, 황제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해서 처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황제의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테반 군단 역시 황제의 명령을 거부했다.

또 다른 전승에 의하면, 성 마우리티우스와 동료 군인들은 갈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바가우데 반란을 격퇴한 승전 축하연에서 로마의 신들에게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을 거절했을 뿐 아니라 다른 무고한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라는 명령 또한 거부했다. 황제로부터 거듭 같은 명령을 받았지만, 그들은 요지부동하였다.

이에 분노한 막시미아누스 황제는 항명에 대한 형벌로 열 명 중 한 명씩 처형하도록 했다. 그래도 테반 군단의 병사들이 따르지 않자 반란을 두려워한 황제는 그들을 모두 아가우눔 일대에서 전멸시키도록 명령했다. 많은 병사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아가우눔에서 순교했고, 그곳에서 탈출한 부대원들도 스위스 북서부 졸로투른(Solothurn)에서 황제의 군대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22일 목록에서 고대 아가우눔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한 테반 군단의 성 마우리티우스, 성 엑스수페리우스(또는 엑스수페리오), 성 칸디두스(Candidus)와 베테랑 군인인 성 빅토르(Victor)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은 이들과 함께 성 인노켄티우스(Innocentius)와 성 비탈리스(Vitalis)의 이름도 전해주었다. 후대의 성인 전기 작가들은 독일의 쾰른(Koln)에서 이탈리아 북부 파엔차(Faenza)에 이르기까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많은 테반 군단 소속의 순교자들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아가우눔에 있는 성 마우리티우스와 동료들의 무덤 위에 이미 4세기 말에 성당에 건립되었고, 515년에 부르고뉴(Bourgogne)의 왕인 성 시지스문두스(Sigismundus, 5월 1일)가 ‘아가우눔의 순교자들’을 기념해 오늘날의 생 모리스 앙 발레(Saint-Maurice-en-Valais)에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을 세워 봉헌했다.

성 마우리티우스와 동료들의 유해를 모신 생 모리스 수도원은 그 뒤로 많은 순례자가 찾는 곳이 되었고, 성 마우리티우스는 부르고뉴 왕국의 수호성인으로, 다시 신성로마제국과 황제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게 되었다.

그 후 937년에 그 자리에 오토 대제(Otto I)가 생 모리스 수도원을 설립했고, 현재 그 자리에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고딕 양식의 마그데부르크 대성당(The Magdeburg Cathedral of Saints Maurice and Catherine)이 자리하고 있는데, 중부 독일 복음주의 개신교회 소속으로 되어 있다.

교회 미술에서 성 마우리티우스는 로마 군대의 지휘관답게 갑옷을 입은 군인으로 방패와 창을 들고 있거나 간혹 깃발을 든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12세기경부터 독일 등에서 성 마우리티우스를 검은 피부의 아프리카인으로 묘사한 그림이나 조각상들이 생겨났다.

이는 그의 라틴어 이름인 마우리티우스가 ‘무어인’(Moors) 또는 ‘북아프리카’라는 뜻을 지닌 ‘마우루스’(Maurus)에서 유래했기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성 마우리티우스는 다양한 지역과 나라 그리고 군인과 염색업자 등 다양한 직종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엠메라모

 

  • 가톨릭 성인 이름
    Emmeram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7세기 푸아티에

 

 

엠메라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메라모, 에메라무스, 엠메라무스.

 

 

엠메라모 자료

거룩한 순회 설교가 성 엠메라무스(또는 엠메라모)는 프랑스의 푸아티에 지방을 주로 다니며 지칠 줄 모르고 복음을 선포하다가 푸아티에의 주교로 정착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어느 교구의 명단에도 올라 있지 않다고 한다. 

성 엠메라무스는 독일 지방에 우상숭배자들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바이에른(Bayern)으로 갔는데, 그는 이곳에서 3년 동안 설교하여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그 후 그는 로마(Roma)를 순례하려고 길을 가다가 뮌헨(Munich)과 티롤(Tirol) 사이에서 테오도 백작의 부하들에 의하여 만행을 당하였다. 

결국 그는 그때 생긴 상처 때문에 끝내 운명하고 말았다. 그 후 성 엠메라무스의 유해가 레겐스부르크(Regensburg)로 이장되어 공경을 받고 있는데 그 이유는 밝혀진 바 없다. 또한 그가 왜 테오도 백작의 부하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상처를 입게 되었는지 그 이유도 알려지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요나

 

  • 가톨릭 성인 이름
    Jona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세기

 

 

요나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요나스, 조나스.

 

 

요나 자료

프랑스 파리(Paris)의 주교인 성 디오니시우스(Dionysius, 10월 9일)의 제자인 성 요나 신부는 파리 인근을 복음화하였다. 그는 로마제국의 지방장관 율리아누스에 의해 파리에서 채찍질과 칼을 맞고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이냐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Igna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 활동 연도와 지역
    1686 –1770년 산티아

 

 

이냐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이그나티오, 이그나티우스, 이냐시우스.

 

 

이냐시오 자료

산티아의 성 이냐시오는 1686년 7월 5일 북부 이탈리아 베르첼리(Vercelli) 지방의 산티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로렌조 마우리지오(Lorenzo Maurizio)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부유한 벨비소티(Belvisotti) 가문의 육남매 중 넷째로 자랐다. 그는 훌륭한 신부로부터 초기 교육을 받으며 그로부터 사제직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

1710년에 교구 신부로 서품을 받은 그는 6년 동안 사제 직무를 수행한 뒤 카푸친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때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과 본당 신자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성 이냐시오는 카푸친회에서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내적인 평화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를 따르는 생활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1717년 5월 24일 서원을 한 그는 장상들에게 순명하는 삶을 살았다. 그의 영적인 여정은 이탈리아 북부 사부아(Savoie) 지방에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복종을 넘어서 그의 형제들을 섬기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였다. 그는 완전히 ‘주님의 의향’을 따랐다. 1727년 성 이냐시오는 토리노 몬테(Torino-Monte)의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이 공동체에서 그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여겨졌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영적 지혜를 베풀었다. 그래서 신부들과 영성적으로 성숙한 이들 그리고 타락한 죄인들이 수도원으로 그를 찾아와 죄를 고백하고 영성지도를 받았다.

1731년에 그는 몬도비(Mondovi)의 수도원으로 파견되어 수도원의 총대리 겸 수련장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는 14년 동안 수련장으로서 자신의 지도에 맡겨진 수련자들이 주님의 진실한 추종자로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의 순종적인 아들이 될 수 있도록 지도하는데 유일한 관심을 두었다.

성 이냐시오의 가르침은 두 기둥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다. 즉 수련자들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과 말보다는 행동으로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수련자들에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함께 해 주었고, 그들의 양성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다.

1744년 그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눈병으로 인해 거의 실명 상태가 되었고, 그로 인해 수련소를 떠나 토리노로 돌아오게 되었다. 어느 정도 치료가 된 뒤에 그는 다시 활동 사도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1743년부터 1746년까지 피에몬테(Piemonte) 지방에서 발생한 전쟁으로 인해 많은 희생자들이 생기고 질병이 돌기 시작하였다.

사르디니아(Sardinia) 왕국(사르디니아와 피에몬테)의 샤를 엠마누엘 3세(Charles Emmanuel III) 왕은 카푸친회 수도자들에게 병원에서 의료적이고 영성적인 지도를 부탁하였다. 그래서 성 이냐시오는 군종신부의 책임자로서 아스티(Asti), 비노보(Vinovo), 알레산드리아(Alessandria)의 병원에서 복음적인 사랑을 실천하며 2년 동안 활동하였다.

피에몬테 지방이 평화를 되찾았을 때 성 이냐시오는 토리노 몬테의 수도원으로 돌아와 생의 마지막 24년 동안 영적 지도자와 고해신부로서 지냈다.

그는 병든 이들을 찾아 다녔고 불쌍한 이들을 위해 돈과 먹을 것들을 구하러 다녔다. “낙원은 게으름뱅이들을 위한 곳이 아니다. 어서 일을 하자!”라고 줄곧 이야기하던 그는 1770년 9월 22일 토리노 몬테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수도자들과 평신도들을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거룩한 길을 안내하였고, 하느님으로부터 버려졌다고 느끼던 사람들을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다시 진정한 신앙에로 이끌었다.

그는 카푸친회 신부로서 특히 충성심, 검소함, 겸손함을 통해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에 충실했다. 그는 영성적으로 병든 이들을 잘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죄인과 고립된 이들의 아버지’라고 불렸다.

그는 1966년 4월 17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2년 5월 19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인노첸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Innocent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87년경? 아가우눔

 

 

인노첸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인노첸시우스, 인노켄티오, 인노켄티우스.

 

 

인노첸시오 자료

프랑스 리옹(Lyon)의 주교인 성 에우케리우스(Eucherius, 11월 16일)가 동료 주교인 살비우스(Salvius)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막시미아누스 황제 때 갈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바가우데(Bagaudae)의 농민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상부 이집트(Upper Egypt)의 룩소르(Luxor) 인근 테베(Thebes)에서 군인들을 모집하였다.

이때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천여 명의 테반 군단(Theban Legion)이 모집되었고, 그 부대의 지휘관이 성 마우리티우스(Mauritius)였다. 성 마우리티우스는 테베에서 태어나 자란 이집트인으로 알려졌다.

전승에 따르면, 성 마우리티우스가 황제를 돕기 위해 테반 군단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오늘날 스위스 남부 발레(Valais) 지방의 아가우눔(Agaunum, 오늘날 스위스의 생 모리스 Saint-Maurice)에 도착했을 때, 황제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해서 처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황제의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테반 군단 역시 황제의 명령을 거부했다.

또 다른 전승에 의하면, 성 마우리티우스와 동료 군인들은 갈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바가우데 반란을 격퇴한 승전 축하연에서 로마의 신들에게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을 거절했을 뿐 아니라 다른 무고한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라는 명령 또한 거부했다.

황제로부터 거듭 같은 명령을 받았지만, 그들은 요지부동하였다. 이에 분노한 막시미아누스 황제는 항명에 대한 형벌로 열 명 중 한 명씩 처형하도록 했다. 그래도 테반 군단의 병사들이 따르지 않자 반란을 두려워한 황제는 그들을 모두 아가우눔 일대에서 전멸시키도록 명령했다.

많은 병사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아가우눔에서 순교했고, 그곳에서 탈출한 부대원들도 스위스 북서부 졸로투른(Solothurn)에서 황제의 군대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22일 목록에서 고대 아가우눔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한 테반 군단의 성 마우리티우스, 성 엑스수페리우스(Exsuperius), 성 칸디두스(Candidus)와 베테랑 군인인 성 빅토르(Victor)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은 이들과 함께 성 인노켄티우스(Innocentius, 또는 인노첸시오)와 성 비탈리스(Vitalis)의 이름도 전해주었다. 후대의 성인 전기 작가들은 독일의 쾰른(Koln)에서 이탈리아 북부 파엔차(Faenza)에 이르기까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많은 테반 군단 소속의 순교자들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아가우눔에 있는 성 마우리티우스와 동료들의 무덤 위에 이미 4세기 말에 성당에 건립되었고, 515년에 부르고뉴(Bourgogne)의 왕인 성 시지스문두스(Sigismundus, 5월 1일)가 ‘아가우눔의 순교자들’을 기념해 오늘날의 생 모리스 앙 발레(Saint-Maurice-en-Valais)에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을 세워 봉헌했다.

성 마우리티우스와 동료들의 유해를 모신 생 모리스 수도원은 그 뒤로 많은 순례자가 찾는 곳이 되었고, 성 마우리티우스는 부르고뉴 왕국의 수호성인으로, 다시 신성로마제국과 황제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게 되었다.

그 후 937년에 그 자리에 오토 대제(Otto I)가 생 모리스 수도원을 설립했고, 현재 그 자리에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고딕 양식의 마그데부르크 대성당(The Magdeburg Cathedral of Saints Maurice and Catherine)이 자리하고 있는데, 중부 독일 복음주의 개신교회 소속으로 되어 있다.

교회 미술에서 성 마우리티우스는 로마 군대의 지휘관답게 갑옷을 입은 군인으로 방패와 창을 들고 있거나 간혹 깃발을 든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12세기경부터 독일 등에서 성 마우리티우스를 검은 피부의 아프리카인으로 묘사한 그림이나 조각상들이 생겨났다.

이는 그의 라틴어 이름인 마우리티우스가 ‘무어인’(Moors) 또는 ‘북아프리카’라는 뜻을 지닌 ‘마우루스’(Maurus)에서 유래했기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성 마우리티우스는 다양한 지역과 나라 그리고 군인과 염색업자 등 다양한 직종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칸디도

 

  • 가톨릭 성인 이름
    Candid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87년경? 아가우눔

 

 

칸디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간디도, 간디두스, 깐디도, 깐디두스, 칸디두스.

 

 

칸디도 자료

프랑스 리옹(Lyon)의 주교인 성 에우케리우스(Eucherius, 11월 16일)가 동료 주교인 살비우스(Salvius)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막시미아누스 황제 때 갈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바가우데(Bagaudae)의 농민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상부 이집트(Upper Egypt)의 룩소르(Luxor) 인근 테베(Thebes)에서 군인들을 모집하였다.

이때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천여 명의 테반 군단(Theban Legion)이 모집되었고, 그 부대의 지휘관이 성 마우리티우스(Mauritius)였다. 성 마우리티우스는 테베에서 태어나 자란 이집트인으로 알려졌다.

전승에 따르면, 성 마우리티우스가 황제를 돕기 위해 테반 군단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오늘날 스위스 남부 발레(Valais) 지방의 아가우눔(Agaunum, 오늘날 스위스의 생 모리스 Saint-Maurice)에 도착했을 때, 황제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해서 처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황제의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테반 군단 역시 황제의 명령을 거부했다.

또 다른 전승에 의하면, 성 마우리티우스와 동료 군인들은 갈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바가우데 반란을 격퇴한 승전 축하연에서 로마의 신들에게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을 거절했을 뿐 아니라 다른 무고한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라는 명령 또한 거부했다.

황제로부터 거듭 같은 명령을 받았지만, 그들은 요지부동하였다. 이에 분노한 막시미아누스 황제는 항명에 대한 형벌로 열 명 중 한 명씩 처형하도록 했다. 그래도 테반 군단의 병사들이 따르지 않자 반란을 두려워한 황제는 그들을 모두 아가우눔 일대에서 전멸시키도록 명령했다.

많은 병사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아가우눔에서 순교했고, 그곳에서 탈출한 부대원들도 스위스 북서부 졸로투른(Solothurn)에서 황제의 군대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22일 목록에서 고대 아가우눔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한 테반 군단의 성 마우리티우스, 성 엑스수페리우스(Exsuperius), 성 칸디두스(또는 칸디도)와 베테랑 군인인 성 빅토르(Victor)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은 이들과 함께 성 인노켄티우스(Innocentius)와 성 비탈리스(Vitalis)의 이름도 전해주었다. 후대의 성인 전기 작가들은 독일의 쾰른(Koln)에서 이탈리아 북부 파엔차(Faenza)에 이르기까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많은 테반 군단 소속의 순교자들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아가우눔에 있는 성 마우리티우스와 동료들의 무덤 위에 이미 4세기 말에 성당에 건립되었고, 515년에 부르고뉴(Bourgogne)의 왕인 성 시지스문두스(Sigismundus, 5월 1일)가 ‘아가우눔의 순교자들’을 기념해 오늘날의 생 모리스 앙 발레(Saint-Maurice-en-Valais)에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을 세워 봉헌했다.

성 마우리티우스와 동료들의 유해를 모신 생 모리스 수도원은 그 뒤로 많은 순례자가 찾는 곳이 되었고, 성 마우리티우스는 부르고뉴 왕국의 수호성인으로, 다시 신성로마제국과 황제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게 되었다.

그 후 937년에 그 자리에 오토 대제(Otto I)가 생 모리스 수도원을 설립했고, 현재 그 자리에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고딕 양식의 마그데부르크 대성당(The Magdeburg Cathedral of Saints Maurice and Catherine)이 자리하고 있는데, 중부 독일 복음주의 개신교회 소속으로 되어 있다.

교회 미술에서 성 마우리티우스는 로마 군대의 지휘관답게 갑옷을 입은 군인으로 방패와 창을 들고 있거나 간혹 깃발을 든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12세기경부터 독일 등에서 성 마우리티우스를 검은 피부의 아프리카인으로 묘사한 그림이나 조각상들이 생겨났다.

이는 그의 라틴어 이름인 마우리티우스가 ‘무어인’(Moors) 또는 ‘북아프리카’라는 뜻을 지닌 ‘마우루스’(Maurus)에서 유래했기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성 마우리티우스는 다양한 지역과 나라 그리고 군인과 염색업자 등 다양한 직종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토마스

 

  • 가톨릭 성인 이름
    Thoma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대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488-1555년 빌라노바

 

 

토마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마, 토머스.

 

 

토마스 자료

알론조 토마스 가르시아와 루치아 마르티네스 카스텔라노스의 아들로 태어난 빌라노바의 성 토마스는 에스파냐 카스티야(Castilla)의 푸엔텔라나(Fuentellana)에서 나서 자랐고, 10세 때에 알칼라(Alcala)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여기서 문학 석사와 신학교수 자격증을 받고, 불과 26세의 나이에 그 대학교의 교수로 발탁되었다.

1516년 그는 성 아우구스티노회에 입회하여 1518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여러 수도원의 원장을 역임하다가 안달루시아(Andalusia)와 카스티야의 관구장이 되었다. 이때 그는 성 아우구스티노회 최초의 선교단을 멕시코로 파견하였다.

그 후 그는 카를로스 5세의 전속사제로 임명되었으나 그라나다(Granada)의 주교직은 거부하던 중 1544년에 발렌시아(Valencia)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이 교구는 90년 동안이나 주교좌가 공석이었기 때문에 그는 즉시 개혁에 착수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으로 일약 유명한 주교로 인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어인들의 개종을 위해서도 정열을 쏟았다. 또한 그는 사제들로 하여금 개종자들의 어린이들을 교육할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비록 트렌토(Trento) 공의회에는 참석하지 못하였으나 에스파냐 교회 내의 개혁 운동에는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1658년 교황 알렉산데르 7세(Alexander V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펠릭스 4[3]세

 

  • 가톨릭 성인 이름
    Felix IV[III]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교황

  • 활동 연도와 지역
    +530년

 

 

펠릭스 4[3]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펠리체.

 

 

펠릭스 4[3]세 자료

526년 교황 성 요한 1세(Joannes I, 5월 18일)가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고 돌아오자마자 이탈리아와 동고트족(Ostrogoths)의 왕인 테오도리쿠스(Theodoricus)에 의해 투옥되어 얼마 후에 사망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테오도리쿠스 왕은 그의 영향력을 이용해 펠릭스 부제를 후임 교황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황실의 신임을 이용하여 교회의 유익을 꾀하는 매우 현명한 정책을 펼쳐 나갔다.

성 펠릭스 4세는 아를(Arles)의 주교 성 카이사리우스(Caesarius, 8월 27일)의 은총과 자유 의지에 관한 저서를 승인하였고, 529년의 프랑스 오랑주(Orange) 제2차 지역 공의회에 대표자를 파견하였으며, 성 코스마(Cosmas)와 다미아누스(Damianus) 대성당을 짓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4년간 재임하였는데, 가장 돋보이는 점은 그의 단순성과 겸손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애정이었다고 한다. 그가 교황 성 펠릭스 3세가 아니라 펠릭스 4세로 불리게 된 것은 교황 리베리우스(Liberius, 352-366년 재위) 시대의 대립교황 펠릭스가 사후 합법적인 교황 명단에 펠릭스 2세로 올랐기 때문이다.

로마 순교록은 그의 축일을 9월 22일로 기록하고 있으나, 10월 12일을 축일로 기념하기도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포카

 

  • 가톨릭 성인 이름
    Phoca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정원사,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시노페

 

 

포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뽀까스, 포까스, 포카스.

 

 

포카 자료

흑해 근방 파피아고니아(Paphiagonia)의 시노페(Sinope)에서 정원사로 있던 성 포카는 기도와 관상의 엄격한 생활을 하면서 여행자들에게 쉴 곳을 제공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또 신앙 때문에 박해받는 이들을 적극 도왔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트라야누스 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그리스도인으로 고발되어 순교하였다.

한 번은 일단의 군인들이 집에 들이닥쳤을 때 그는 군인들이 쉴 곳을 마련해 주었는데, 그들의 말인즉 포카라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군인들에게 내일 아침에 그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성 포카는 자신의 임종 준비를 마치고 무덤을 판 뒤에 군인들에게 자신이 포카임을 밝혔다. 그때 군인들은 그의 친절한 자세와 용기에 기가 꺾였으나 이미 명령을 받은 자들인지라 그를 참수시켰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플로렌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Floren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5세기 글론느산

 

 

플로렌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플로렌시우스, 플로렌씨오, 플로렌씨우스, 플로렌티오, 플로렌티우스.

 

 

플로렌시오 자료

성 플로렌티우스(또는 플로렌시오)는 은수자이자 프랑스 투르(Tours)의 성 마르티누스(Martinus, 11월 11일)의 제자이다. 독일 바이에른(Bayern) 지방 출신인 그는 투르의 성 마르티누스에게 사제품을 받고 프랑스의 프와투(Poitou) 지방의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 후 그는 앙주(Anjou)의 글론느 산에서 은수자가 되었는데, 그를 따르는 수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자 그들을 위해서 오늘날 플로랑 르 비으(Florent le Vieux)라고 불리는 대수도원을 설립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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