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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7일 남자세례명 12가지

피어나네 2023. 11. 1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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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7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그레고리오 (역사가), 그레고리오 (선교사), 라자로, 로코 곤잘레스, 아니아노, 아치스클로, 알패오, 알폰소 로드리게스, 에우제니오, 자캐오, 후고, 후안 데 카스티요, 총 12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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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7일 여자세례명 빅토리아, 살로메, 엘리사벳, 요안나, 힐다, 총 5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11월 17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2가지

 

 

 

 

11월 17일 남자세례명 목록

 

  1. 그레고리오 (역사가)

  2. 그레고리오 (선교사)

  3. 라자로

  4. 로코 곤잘레스

  5. 아니아노

  6. 아치스클로

  7. 알패오

  8. 알폰소 로드리게스

  9. 에우제니오

  10. 자캐오

  11. 후고

  12. 후안 데 카스티요

 

11월 17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2가지

 

 

1. 그레고리오 (역사가)

 

  • 가톨릭 성인 이름
    Gregory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역사가

  • 활동 연도와 지역
    538-594년 투르

 

 

그레고리오 (역사가)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그레고리오 (역사가) 자료

성 그레고리우스 플로렌티우스(Gregorius Florent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프랑스 중남부 오베르뉴(Auvergne) 지역에 속한 클레르몽(Clermont)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오베르뉴의 원로원 의원이었다. 원래 그의 이름은 게오르기우스 플로렌티우스(Georgius Florentius)였는데, 외가 쪽 친척인 랑그르(Langres)의 성 그레고리우스(1월 4일) 주교를 따라 그레고리우스라는 이름을 택했다. 그의 집안은 친가와 외가 쪽으로 주교와 성인들이 많이 있었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 어머니는 세 자녀를 데리고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성 그레고리우스는 숙부이자 클레르몽의 주교인 성 갈루스(Gallus, 7월 1일)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또한 후에 클레르몽의 주교가 된 성 아비투스(Avitus, 8월 21일) 대부제에게 성경을 배웠다. 563년에 중병에 걸리기도 했지만 투르의 성 마르티누스(Martinus, 11월 11일)의 묘를 순례하고 나서 완쾌되었다.

그 후 잠시 리옹(Lyon)에서 살기도 하고 부제직을 수행하다가 573년 투르의 주교이자 외숙부인 성 에우프로니우스(Euphronius, 8월 4일)가 선종한 후 그의 후계자로 선출되어 주교품을 받았다.

당시 투르는 프랑스 중부의 주요 도시이자 투르의 성 마르티누스의 무덤을 찾는 순례자와 기적을 바라는 환자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하지만 정치적 상황은 복잡해서 그가 재임하는 20년 동안 투르의 지배자는 몇 차례나 바뀌었고, 이로 인해 유능하고 영향력 있는 성 그레고리우스 주교는 정치적 문제에 휘말려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관대하게 위정자들을 대하고 착한 목자로서 주교직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성 그레고리우스는 투르의 대성당을 비롯하여 수많은 교회들을 재건하고, 이단자들의 개종에 힘쓰며, 순례자들을 돌보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그는 정의와 사랑 그리고 신심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유명했다. 특히 그는 성인들의 묘를 순례하고 축일을 성대히 지내며 8권의 “성인전”을 저술해 많은 성인 · 순교자 · 교부들의 이야기와 기적을 상세히 전해주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591년에 완성한 “프랑크족의 역사”(Historia Francorum, 10권)가 있다. 이는 역사서로서 6세기의 역사, 정치, 사회, 전례, 성인 신심 등을 이해하는데 거의 유일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그레고리오 (선교사)

 

  • 가톨릭 성인 이름
    Gregory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선교사, 기적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13-270년? 네오카이사레아

 

 

그레고리오 (선교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타우마투르고, 타우마투르구스.

 

 

그레고리오 (선교사) 자료

소아시아 폰투스(Pontus)의 네오카이사레아(Neocaesarea)의 이방인 가문에서 태어난 성 그레고리우스 타우마투르구스(Gregorius Thaumaturgus, 또는 기적자 그레고리오)는 훌륭한 집안의 자녀답게 그곳에서 법률을 공부하였다.

233년 그는 동생인 성 아테노도루스(Athenodorus, 10월 18일)와 함께 법학을 계속 공부하기 위해 레바논의 베이루트(Beirut)에 갔다.

그 후 누이의 초청으로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카이사레아(Caesarea)에 갔을 때 오리게네스(Origenes)를 만나 결국 그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리고 오리게네스에 의해 세례를 받고 개종하였다. 5년 동안 오리게네스의 문하생으로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뒤, 그는 선교사로서 폰투스로 돌아왔다.

이때 그는 아직 젊었음에도 불구하고 네오카이사레아의 주교로 임명되어 거의 30여 년 동안이나 지역 주민들의 개종사업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는 교회의 축제일에 세속적인 흥미를 가미시키는 방법으로 그리스도교 전통을 대중화시킨 인물로서 유명하다.

또한 그는 수많은 신학논문들을 남겼고, 그의 높은 인기 때문에 '타우마투르고' 즉 '놀라운 일을 하는 사람'(기적자)이란 별명을 얻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라자로

 

  • 가톨릭 성인 이름
    Lazar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승, 화가,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867년경 콘스탄티노플

 

 

라자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나자로, 나자루스, 라자루스, 조그라포스.

 

 

라자로 자료

성 라자루스(또는 라자로)는 8세기 말이나 9세기 초에 아르메니아(Armenia)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나이에 콘스탄티노플에 와서 수도승이 되었고, 수도원에서 성화 그리는 법을 배웠다. 그는 수도 생활에 정진하며 기도와 묵상을 통해 얻은 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8세기 초부터 성화상(Icon) 공경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과 파괴령으로 많은 순교자가 나오고 교회의 아름다운 성화상도 많이 파괴되거나 훼손되었다. 8세기 말부터 박해가 완화되고 상화상 공경이 허용되다가 9세기 초에 다시금 성화상 논쟁이 불붙었다. 이때 콘스탄티노플에는 성상 파괴론자인 테오필로스 황제(829-842년 재위)가 있었다.

당시 저명한 화가였던 성 라자루스는 테오필로스 황제의 재위 중에 손상된 성화들을 복구하며 바쁘게 지냈다. 그러나 그로 인해 그는 황제 앞으로 끌려 나갔고, 성화를 그렸다는 이유와 자신이 그린 성화상을 직접 파괴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거부한 죄로 잔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황제는 그를 감옥에 가두고 심한 고문을 가했고, 다시는 성화를 그릴 수 없도록 뜨겁게 달군 인두로 손을 지져 살이 녹고 뼈가 보일 정도로 고통을 주었다.

다행히 성화상을 옹호하던 테오도라 황후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풀려나 보스포러스(Bosphorus) 해협 인근에 있는 수도원에서 지낼 수 있었다. 842년 테오필로스 황제가 사망하고 테오도라가 여황제로 즉위하면서 성화상 공경이 복원되었다.

성 라자루스는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고, 심한 고문으로 상처를 입은 손도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 그는 파괴된 성화상들을 복원하고 새로운 성화를 그리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고, 테오도라의 아들인 미카엘 3세(842-867년 재위) 황제에 의해 서방 교회와의 화합과 단결을 위해 로마(Roma)에 특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그는 867년경 다시금 로마 파견 임무를 수행하던 중 선종했는데, 정확한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시신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 갈라타(Galata)에 있는 에반데레스(Evanderes) 수도원에 묻혔다.

그리스어로 ‘화가’(Zographos)라는 별명을 이름 뒤에 붙여 성 ‘라자루스 조그라포스’라고도 불리는 그의 축일은 가톨릭교회는 2월 23일에 기념해왔다.

옛 “로마 순교록”도 2월 23일 목록에서 그에 대해 기록하였다. 하지만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일치 공의회였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이어받아 동방 정교회에서 축일로 기념해 온 11월 17일로 옮겨 그의 행적을 전해주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로코 곤잘레스

 

  • 가톨릭 성인 이름
    Roque Gonzalez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76-1628년 파라과이

 

 

로코 곤잘레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곤살레스, 로꼬, 로꾸스, 로케, 로쿠스, 로크.

 

 

로코 곤잘레스 자료

성 로쿠스 곤잘레스 데 산타 크루스(Rochus Gonzalez de Santa Cruz, 또는 로코 곤잘레스)는 에스파냐의 귀족 출신으로서 1576년 파라과이의 수도 아순시온(Asuncion)에서 태어났다.

부모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착하고 열심한 소년으로 성장한 그는 사제직을 지망하여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23세에 마침내 사제가 되었다. 그런데 자신이 교구 사제직에 부적합하다고 느낀 그는 인디언 원주민들에게 큰 관심을 보이다가 1609년에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 당시는 바로 유명한 파라과이 ‘정복’이 시작될 때였다. 에스파냐는 제국주의를 앞세워 남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에서 가혹한 식민지 정책으로 이 지역의 원주민들을 무참히 짓밟고 통치하였다. 예수회 회원들은 그들의 제국주의에 강력히 맞서 싸우면서 원주민들의 개종사업을 전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성 로쿠스 곤잘레스 신부는 거의 20년 동안이나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원주민들로부터는 적대감을 이겨내야 했고, 정복자인 에스파냐 당국으로부터는 공개적인 반대와 억압을 받아야만 했다.

1626년 성 로쿠스 곤잘레스 신부는 동료인 성 알폰수스 로드리게스(Alfonsus Rodriguez) 신부와 성 후안 데 카스티요(Juan de Castillo) 수사와 함께 원주민을 위한 새로운 정착촌을 건설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착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원주민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성 로쿠스 곤잘레스와 성 알폰수스 로드리게스 신부는 현재의 브라질 남단지역인 카아로(Caaro)로 갔다.

이곳에서 헌신적인 노력을 경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지역 주술사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1628년 11월 15일 주술사가 고용한 일당이 도끼를 들고 성당에 잠입해 그들을 살해하고 성당에 불을 질러 시신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카아로에 있지 않았던 성 후안 데 카스티요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고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성 로쿠스 곤잘레스와 동료 순교자들은 1934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파라과이의 순교자로 그리고 남아메리카 최초의 순교자로서 복자품에 올랐다.

1988년 5월 16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파라과이의 아순시온에서 그들을 시성하였다. 한편 성 로쿠스 곤잘레스의 생애는 영화 ‘미션’(Mission)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아니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Ania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453년 오를레앙

 

 

아니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니아누스, 에그난.

 

 

아니아노 자료

성 아니아누스(또는 아니아노)는 비엔(Vienne) 태생으로서 얼마 동안 은수 생활을 한 후 오를레앙으로 갔을 때, 그곳의 거룩한 주교이자 명망 있던 에부르티우스(Evurtius)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는 이 주교로부터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에부르티우스 주교가 운명할 때 그의 후계자로 임명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주교 후보자 명단을 그릇에 담고 어린이가 제비를 뽑았는데, 그것이 아니아누스에게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가 주교좌에 착좌할 때 그 당시의 관례대로 지방 장관에게 죄수들의 석방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끝내 이 목적을 달성하였다.

451년 오를레앙은 아틸라(Attila)와 훈족들의 침공을 받았는데, 주민들은 이곳의 주교가 이 도시를 방비해야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아니아누스 주교는 백성들을 격려하고 방위군을 조직하였으며, 로마군 대장 아이티우스(Aetius)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아이티우스의 행동이 너무 느려서 도시는 함락되었고, 훈족들이 도시를 약탈하고 포로들을 끌고 가려할 때 아니아누스 주교의 군대가 적들을 센(Seine) 강 너머로 쫓아내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아니아누스는 이 일이 있은 지 2년 후에 운명하였다. 에그난(Aignan)으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아치스클로

 

  • 가톨릭 성인 이름
    Aciscl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코르도바

 

 

아치스클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치스끌로, 아치스끌루스, 아치스클루스, 아키스클로, 아키스클루스.

 

 

아치스클로 자료

에스파냐 남부 코르도바에서 태어난 성 아키스클루스(또는 아치스클로)와 성녀 빅토리아(Victoria)는 남매지간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코르도바에서 순교하였다. 그리스도인으로 고발된 이들 남매는 배교를 강요당하며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인내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성 아키스클루스는 참수형을 받았고, 성녀 빅토리아는 화살을 맞고 순교하였다. 두 순교자의 유해는 한 부인의 손에 의해 집에 묻혔는데, 후일 그 위에 성당이 세워졌다.

9세기 이슬람의 통치하에서 순교한 코르도바의 순교자들 중 일부는 이 성당과 관련되어 있다. 성 아키스클루스와 성녀 빅토리아는 코르도바의 수호성인으로 에스파냐 전역을 물론 프랑스 남부에서도 큰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알패오

 

  • 가톨릭 성인 이름
    Alphae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독서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알패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알패우스, 알페오, 알페우스.

 

 

알패오 자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그의 재임 12주년을 기념하여 베푼 게임에서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총독이 그리스도인들만 제외한 죄수들의 사면을 요청하였다. 이때 고다라(Godara)의 부제이던 성 자캐우스(Zachaeus)만 제외되어 비인간적인 고문을 받았다.

그는 이토록 심한 고통 중에서도 하느님을 찬미하였는데, 이 광경을 본 성 알패우스(또는 알패오)도 스스로 박해에 뛰어들었다. 알패우스는 엘레우테로폴리스(Eleutheropolis)의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카이사레아(Caesarea) 교회의 독서자였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303년 11월 17일 함께 참수를 당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알폰소 로드리게스

 

  • 가톨릭 성인 이름
    Alphonsus Rodriguez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98-1628년 파라과이

 

 

알폰소 로드리게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로드리게즈, 알론소, 알폰수스, 알퐁소, 알퐁수스.

 

 

알폰소 로드리게스 자료

성 로쿠스 곤잘레스 데 산타 크루스(Rochus Gonzalez de Santa Cruz)는 에스파냐의 귀족 출신으로서 1576년 파라과이의 수도 아순시온(Asuncion)에서 태어났다.

부모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착하고 열심한 소년으로 성장한 그는 사제직을 지망하여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23세에 마침내 사제가 되었다. 그런데 자신이 교구 사제직에 부적합하다고 느낀 그는 인디언 원주민들에게 큰 관심을 보이다가 1609년에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 당시는 바로 유명한 파라과이 ‘정복’이 시작될 때였다. 에스파냐는 제국주의를 앞세워 남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에서 가혹한 식민지 정책으로 이 지역의 원주민들을 무참히 짓밟고 통치하였다. 예수회 회원들은 그들의 제국주의에 강력히 맞서 싸우면서 원주민들의 개종사업을 전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성 로쿠스 곤잘레스 신부는 거의 20년 동안이나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원주민들로부터는 적대감을 이겨내야 했고, 정복자인 에스파냐 당국으로부터는 공개적인 반대와 억압을 받아야만 했다.

1626년 성 로쿠스 곤잘레스 신부는 동료인 성 알폰수스 로드리게스(Alfonsus Rodriguez, 또는 알폰소 로드리게스) 신부와 성 후안 데 카스티요(Juan de Castillo) 수사와 함께 원주민을 위한 새로운 정착촌을 건설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착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원주민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성 로쿠스 곤잘레스와 성 알폰수스 로드리게스 신부는 현재의 브라질 남단지역인 카아로(Caaro)로 갔다. 이곳에서 헌신적인 노력을 경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지역 주술사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1628년 11월 15일 주술사가 고용한 일당이 도끼를 들고 성당에 잠입해 그들을 살해하고 성당에 불을 질러 시신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카아로에 있지 않았던 성 후안 데 카스티요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고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성 로쿠스 곤잘레스와 동료 순교자들은 1934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파라과이의 순교자로 그리고 남아메리카 최초의 순교자로서 복자품에 올랐다.

1988년 5월 16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파라과이의 아순시온에서 그들을 시성하였다. 한편 성 로쿠스 곤잘레스의 생애는 영화 ‘미션’(Mission)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성 알폰수스 로드리게스는 알론소 로드리게스(Alonso Rodriguez)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에우제니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ugen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 활동 연도와 지역
    +422년 피렌체

 

 

에우제니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우게니오, 에우게니우스, 에우제니우스, 유진.

 

 

에우제니오 자료

성 에우게니우스(Eugenius, 또는 에우제니오)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주교인 성 제노비우스(Zenobius, 5월 25일)의 부제로 밀라노(Milano)의 주교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12월 7일)의 제자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자캐오

 

  • 가톨릭 성인 이름
    Zachae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자캐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자카리아스, 자카리야, 자캐우스, 자케오, 자케우스, 재커리, 즈가리아, 즈가리야, 즈가리야.

 

 

자캐오 자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그의 재임 12주년을 기념하여 베푼 게임에서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총독이 그리스도인들만 제외한 죄수들의 사면을 요청하였다.

이때 고다라(Godara)의 부제이던 성 자캐우스(또는 자캐오)만 제외되어 비인간적인 고문을 받았다. 그는 이토록 심한 고통 중에서도 하느님을 찬미하였는데, 이 광경을 본 성 알패우스(Alphaeus)도 스스로 박해에 뛰어들었다.

알패우스는 엘레우테로폴리스(Eleutheropolis)의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카이사레아(Caesarea) 교회의 독서자였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303년 11월 17일 함께 참수를 당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후고

 

  • 가톨릭 성인 이름
    Hugh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140-1200년 링컨

 

 

후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위고, 후꼬, 휴스.

 

 

후고 자료

성 후고(Hugo)는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Bourgogne)의 아발론 성에서 성주인 빌리암(William)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8세 때에 어머니 안나(Anna)를 잃고 빌라드-브느와(Villard-Benoit)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성장했다. 그는 19세 때에 부제품을 받고 성 막심(Maxim)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1160년에 그는 그랑드 샤르트뢰즈(Grand Chartreuse) 수도원을 방문한 뒤에 카르투지오회 회원이 될 결심을 하고, 그곳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10년 후에 그는 카르투지오회의 재정담당이 되었고, 1175년에는 잉글랜드(England) 카르투지오회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의 성덕과 학덕에 대한 명성은 전 영국에 퍼졌고, 그의 영향력 또한 점점 커졌다. 이 때문에 그는 거의 18년 동안이나 공석이던 영국 잉글랜드 중동부 링컨 교구를 맡아 교구의 신앙을 일신했는데, 이때 보여 준 그의 지혜와 정의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그는 잉글랜드에 사는 유대인 박해정책을 반대하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1200년 11월 17일 런던(London)에서 선종했고, 1220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Honorius 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교회미술에서 그의 상징은 백조이다. 성 후고는 야생 백조 한 마리를 애완용으로 길렀는데, 그 백조가 늘 그를 따르고 임종까지 지켜봤다고 한다. 그리고 한 손에 성작을 들고 있고, 그 성작 위에 아기 예수님이 앉아 있는 모습으로도 표현된다.

이는 성 후고가 벅든(Buckden)에서 미사를 집전하던 중 일어난 기적과 관련된 것으로, 성변화 중에 일어난 그리스도의 환시를 표현한 것이다. 그 외에 링컨 주교좌성당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후안 데 카스티요

 

  • 가톨릭 성인 이름
    Juan de Castillo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사,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28년 파라과이

 

 

후안 데 카스티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카스틸로.

 

 

후안 데 카스티요 자료

성 로쿠스 곤잘레스 데 산타 크루스(Rochus Gonzalez de Santa Cruz)는 에스파냐의 귀족 출신으로서 1576년 파라과이의 수도 아순시온(Asuncion)에서 태어났다.

부모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착하고 열심한 소년으로 성장한 그는 사제직을 지망하여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23세에 마침내 사제가 되었다. 그런데 자신이 교구 사제직에 부적합하다고 느낀 그는 인디언 원주민들에게 큰 관심을 보이다가 1609년에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 당시는 바로 유명한 파라과이 ‘정복’이 시작될 때였다. 에스파냐는 제국주의를 앞세워 남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에서 가혹한 식민지 정책으로 이 지역의 원주민들을 무참히 짓밟고 통치하였다.

예수회 회원들은 그들의 제국주의에 강력히 맞서 싸우면서 원주민들의 개종사업을 전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성 로쿠스 곤잘레스 신부는 거의 20년 동안이나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원주민들로부터는 적대감을 이겨내야 했고, 정복자인 에스파냐 당국으로부터는 공개적인 반대와 억압을 받아야만 했다.

1626년 성 로쿠스 곤잘레스 신부는 동료인 성 알폰수스 로드리게스(Alfonsus Rodriguez) 신부와 성 후안 데 카스티요 수사와 함께 원주민을 위한 새로운 정착촌을 건설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착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원주민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성 로쿠스 곤잘레스와 성 알폰수스 로드리게스 신부는 현재의 브라질 남단지역인 카아로(Caaro)로 갔다.

이곳에서 헌신적인 노력을 경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지역 주술사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1628년 11월 15일 주술사가 고용한 일당이 도끼를 들고 성당에 잠입해 그들을 살해하고 성당에 불을 질러 시신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카아로에 있지 않았던 성 후안 데 카스티요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고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성 로쿠스 곤잘레스와 동료 순교자들은 1934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파라과이의 순교자로 그리고 남아메리카 최초의 순교자로서 복자품에 올랐다.

1988년 5월 16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파라과이의 아순시온에서 그들을 시성하였다. 한편 성 로쿠스 곤잘레스의 생애는 영화 ‘미션’(Mission)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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