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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 여자세례명 8가지

피어나네 2023. 3. 3.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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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에 해당하는 여자세례명 가타리나 마리아 드렉셀, 논나, 데레사 에우스토키오 베르체리, 마르치아, 아르텔라, 카밀라, 쿠네군다, 포일라, 총 8분 목록이에요.

 

3월 3일이 영명축일인 여자세례명은 어떤 이름이 좋을까요?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천주교 세례명 상세정보로 이동합니다. 어울리는 세례명을 지금 바로 찾아보세요.

 

3월 3일 남자세례명 루치올로, 마리노, 바실리스코, 베드로 르네 로크, 빈발로에, 아스테리오, 안셀모, 야코비노, 에우트로피오, 제르비노, 첼레도니오, 클레오니코, 티시아노, 펠릭스, 포르투나토, 헤미테리오, 총 16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3월 3일
천주교 여자세례명
8가지

 

 

 

 

 

3월 3일 여자세례명 목록

 

  1. 가타리나 마리아 드렉셀

  2. 논나

  3. 데레사 에우스토키오 베르체리

  4. 마르치아

  5. 아르텔라

  6. 카밀라

  7. 쿠네군다

  8. 포일라

 

3월 3일 천주교 여자세례명 8가지

 

 

1. 가타리나 마리아 드렉셀

 

  • 가톨릭 성인 이름
    Catherine Mary Drexel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설립자, 수녀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858-1955년 미국

 

 

가타리나 마리아 드렉셀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까따리나, 드레셀, 드레쎌, 드렉쎌, 카타리나, 캐서린.

 

 

가타리나 마리아 드렉셀 자료

성녀 카타리나 마리아 드렉셀(Catharina Maria Drexel, 또는 가타리나 마리아 드렉셀)은 1858년 11월 26일 미국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의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유복한 가족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자라면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녀는 흑인과 토착 미국인인 인디언들의 물질적, 영성적 삶의 질에 큰 관심을 갖게 되어 그들을 위한 기부금을 모으기 시작했으나 이내 정말 필요하고 부족한 것은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성녀 카타리나는 인디언과 유색인종의 권익을 위해 일하고 그들을 섬기기 위한 복된 성사의 수도회(Sisters of the Blessed Sacrament)를 설립하였다.

자신의 삶을 헌신하며 기금을 마련한 성녀 카타리나 원장은 1894년 뉴멕시코(New Mexico) 산타페(Santa Fe)에 인디언들을 위한 최초의 선교학교 개교식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미시시피(Mississippi) 강 서편의 인디언들을 위한 학교와 미국 남부 지방의 흑인들을 위한 학교들도 개교하였다.

1915년에는 뉴올리언스(New Orleans)에 미국 최초의 흑인들을 위한 대학인 사비에르(Xavier) 대학을 설립하였다. 그녀가 선종할 무렵에는 이미 미국 전역에서 500명이 넘는 수녀들이 63개의 학교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성녀 카타리나는 1988년 11월 20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2000년 10월 1일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논나

 

  • 가톨릭 성인 이름
    Nonna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과부

  • 활동 연도와 지역
    +6세기경

 

 

논나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논, 논니따, 논니타.

 

 

논나 자료

성녀 논나에 대해서는 11세기 말에 기록된 “다윗의 생애”(The Buchedd Dewi)라는 다소 불확실한 전기에 근거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성녀 논나는 웨일스(Wales)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 성 다윗(David, 3월 1일)의 어머니이며, 귀족 출신으로 웨일스 남서부의 디버드(Dyfed)에서 태어난 듯하다.

그녀는 그 지방의 세인트 데이비드(오늘날의 지명) 교외에 있는 티 그윈(Ty Gwyn)의 어느 수도원에서 살다가 샌트(Sant)라는 족장에게 붙잡혀 가서 강제로 아이를 갖게 되었다. 그렇게 태어난 아기가 바로 드위(Dewi)로도 불리는 성 다윗이다.

그녀는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콘월(Cornwall)과 브르타뉴(Bretagne) 등지로 떠나 살다가 브르타뉴의 수녀원에서 선종했다고 한다. 그녀는 논(Non) 또는 논니타(Nonnita)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데레사 에우스토키오 베르체리

 

  • 가톨릭 성인 이름
    Teresa Eustochio Verzeri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설립자, 수녀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801-1852년 베르가모

 

 

데레사 에우스토키오 베르체리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르제리, 에우스토키움, 테레사, 테레시아.

 

 

데레사 에우스토키오 베르체리 자료

1801년 7월 31일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의 베르가모에서 태어난 성녀 테레사 에우스토키오 베르체리(Teresia Eustochio Verzeri, 또는 데레사 에우스토키오 베르체리)는 아버지 안토니오 베르체리(Antonio Verzeri)와 여백작인 어머니 엘레나 페드로카 그루멜리(Elena Pedrocca-Grumelli)의 일곱 자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베르체리 가문은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나중에 브레시아(Brescia)의 주교가 된 성녀 테레사의 동생은 지롤라모(Girolamo, 히에로니무스)로, 테레사는 성녀 바울라(Paula, 1월 26일)의 딸을 본받는다는 의미에서 에우스토키오(Eustochio 또는 Eustochium, 9월 28일)로 이름지었다.

성녀 테레사는 10세 때에 첫영성체를 하면서부터 수녀가 될 마음을 품었다. 그 후 견진성사를 받고나서부터는 베르가모 대성당의 총대리인 요셉 신부로부터 영성지도와 격려를 받았다.

그 후 그녀는 세 번씩이나 산 그라타(San Grata)의 베네딕토 수도원에 들어갔지만 세 번 다 교육을 받는 도중에 나왔다. 그 후에 그녀는 그로모라고 부르는 작은 집에서 소녀들에게 신앙교육을 시키는데 전념하였다.

이것은 후에 그녀가 세운 수녀회의 씨앗이었다. 성녀 테레사는 1831년 베르가모에서 '예수 성심의 딸들 수도회'(Daughters of the Sacred Heart of Jesus)를 설립했다.

그녀는 안토니아를 비롯한 비르지니아 시모니 그리고 카타리나 만제노니 등의 도움을 받아 소녀들을 대상으로 교육하는 한편, 단식과 침묵 등을 통하여 힘든 완덕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후 성녀 테레사는 요셉 신부의 지도하에 공동생활을 위한 규칙을 만들었으며, 가난한 어린이 교육, 병자방문 그리고 윤리적 위기에 처한 소녀들의 휴식처 겸 신앙교육, 여성 피정지도 등을 실시하였다.

1841년 성녀 테레사 원장과 그의 동료들은 종신서원을 발했고, 이듬해 베르가모 주교로부터 수도회 규칙서에 대한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1847년 교황 비오 9세(Pius IX)는 이 수도회를 공식 인준하였다.

성녀 테레사는 북부 이탈리아를 강타한 콜레라에 걸려 1852년 3월 3일 브레시아(Brescia)에서 운명하였다. 그녀의 유해는 베르가모의 예수 성심의 딸들 수도회 성당에 모셔졌다.

예수 성심의 딸들 수도회는 그 후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브라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카메룬, 인디아, 알바니아 등으로 진출해서 그들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

성녀 테레사는 1946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2001년 6월 10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마르치아

 

  • 가톨릭 성인 이름
    Marcia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마르치아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키아.

 

 

마르치아 자료

성 펠릭스(Felix), 성 포르투나투스(Fortunatus), 성 루키올루스(Luciolus), 성녀 마르키아(또는 마르치아)와 36명의 동료들이 북아프리카에서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아르텔라

 

  • 가톨릭 성인 이름
    Arthelais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동정녀

  • 활동 연도와 지역
    +560년경 베네벤토

 

 

아르텔라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르뗄라, 아르뗄라스, 아르텔라스.

 

 

아르텔라 자료

성녀 아르텔라는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집정관 루키우스(Lucius)와 그의 아내 안투사(Anthusa)의 딸로서 매력적인 처녀였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녀의 미모에 빠져 청혼하였는데,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그녀의 빼어난 미모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부친에게 사자를 보내어 그녀를 입궁시키라고 명하였다. 부모와 그녀는 반대하였지만 도망가는 길 외에 황제의 명을 어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베네벤토에 있는 나르세스(Narses) 삼촌에게 피신하기로 작정하고 달마티아(Dalmatia)의 부다까지 부친의 배웅을 받은 그녀는 수행원들과 여행을 계속하던 중에 강도들을 만났는데, 하인들은 모두 도망치고 성녀 아르텔라만 붙잡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3일 만에 풀려나서 목적지에 당도할 수 있었다.

베네벤토에 도착하자 그녀는 맨발로 걸어서 성모 성당에 당도하여 이제까지 무사히 인도해주신 주님께 감사의 표시로 종을 선물로 드렸다. 그때부터 그녀는 주일을 제외한 모든 날에 단식을 하고 끊임없는 기도생활을 하며 지내다가 16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카밀라

 

  • 가톨릭 성인 이름
    Camilla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동정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37년 오세르

 

 

카밀라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밀라.

 

 

카밀라 자료

성녀 카밀라는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에서 오세르의 성 게르마누스(Germanus, 7월 31일)를 만나 개종하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치비타베키아(Civitavecchia) 태생인 그녀는 성 게르마누스의 선교여행에 동반하여 프랑스의 오세르로 가서 은수자가 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쿠네군다

 

  • 가톨릭 성인 이름
    Cunegundes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동정녀, 과부, 황후

  • 활동 연도와 지역
    978-1033/1039년

 

 

쿠네군다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구네군다, 구네군데스, 구네군디스, 쿠네군데스, 쿠네군디스.

 

 

쿠네군다 자료

성녀 쿠네군다(Cunegundis, 또는 구네군다)는 룩셈부르크(Luxembourg)의 백작인 아버지 지크프리트 1세(Siegfried I)와 어머니 헤드비히(Hedwig)에게 아주 어릴 때부터 훌륭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녀는 20세에 독일 바이에른(Bayern)의 공작인 성 헨리쿠스 2세(Henricus II, 7월 13일)와 결혼하였다. 이때 성 헨리쿠스는 동방의 어느 목수가 제작한 십자가를 선물했는데, 이것이 지금도 뮌헨에 보존되어 있다.

전기작가에 따르면, 결혼 첫날밤에 성녀 쿠네군다는 남편에게 정결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일생을 봉헌하기 위해 동정을 지키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남편인 성 헨리쿠스 또한 평소 그러한 희망이 있었다며 일생 남매처럼 지내되 세상에는 알리지 말자며 동정서원을 발했다.

이런 이유로 “로마 순교록”은 그녀에게 동정녀라는 칭호를 붙이고 있다.

당시 황제인 오토 3세가 서거하자 성 헨리쿠스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1002년 바이에른의 왕으로 추대되었고, 그의 대관식은 마인츠(Mainz)에서 성 빌리지스(Willigis, 2월 23일) 대주교에 의해 거행되었다.

이어 1014년에 성 헨리쿠스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8세(Benedictus VIII)로부터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받으며 신앙에 충실하고 교회를 보호할 것을 맹세했다.

그런데 결혼 첫날밤부터 서로 동정을 지키며 남매처럼 지내던 성녀 쿠네군다는 얼마 뒤에 중상자들의 희생물이 되었고, 남편마저 일시적이나마 아내를 의심하게 되었다.

확고히 항변해야 할 처지에 선 그녀는 불에 의한 시죄법(試罪法) 적용을 허용해 달라고 청할 정도였다. 그녀는 당시 관습대로 뜨거운 불로 달구어진 12개의 쟁기 위로 걸어갔지만 아무런 상처나 화상도 입지 않아 자신의 결백을 증명했다.

이때 성 헨리쿠스는 잠시나마 아내를 의심한 자신의 잘못을 머리 숙여 사과하고 마음으로 일치하여 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선정을 베풀고, 나라 안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1007년 성녀 쿠네군다는 황제에게 청을 드려서 밤베르크(Bamberg) 교구를 설립하고 대성당을 건립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성당과 수도원을 짓게 하였다.

그러던 중 중병을 앓게 된 성녀 쿠네군다는 병이 나으면 독일 중부 헤센(Hessen) 북부에 있는 카셀(Kassel) 근교의 카우풍엔(Kaufungen)에 수도원을 세우겠다고 약속했고, 완치된 후 1021년 그곳에 베네딕투스회 수녀원을 세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1024년에 남편인 성 헨리쿠스 2세가 선종하였다.

남편이 사망한 후 성녀 쿠네군다는 나라를 다스려달라는 청을 물리치고 수도 생활에 정진할 결심을 했다.

1년 후 남편의 기일을 맞아 카우풍엔 수도원 봉헌식이 있었는데, 미사 중에 복음이 낭독된 후 왕관과 화려한 옷을 벗은 성녀 쿠네군다는 머리를 깎고 주교로부터 수녀복을 받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자신의 재산은 가난한 이들과 성당 건축에 모두 봉헌하고, 지난날 황녀로서 누린 모든 부귀영화를 잊고 비천한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초라한 수도원에서 기꺼이 살았다.

기도와 성경 읽기를 즐기며 엄격한 단식과 보속의 생활을 해 주위 사람들로부터 하느님 앞에 흠 없는 삶을 살았다는 칭송을 받았다.

1033년 또는 1039년 3월 3일 선종한 그녀의 유해는 밤베르크 대성당으로 운구되어 평소 오빠라고 부르던 남편 성 헨리쿠스 옆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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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부귀영화 속에 교만과 방종으로 흐를 수 있는 삶을 겸손과 정결한 삶으로 완성한 그녀는 1200년 3월 29일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녀는 룩셈부르크의 성녀 쿠네군다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포일라

 

  • 가톨릭 성인 이름
    Foila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동정녀

  • 활동 연도와 지역
    +6세기경 골웨이

 

 

포일라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없음.

 

 

포일라 자료

성녀 포일라는 성 콜간(Colgan)의 여자형제로 아일랜드 골웨이 지방에서 몇 개 본당의 수호성녀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 외에 그녀에 대한 정보는 남아있지 않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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