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7일에 해당하는 여자세례명 로사 베네리니, 에우프로시나, 테오도라, 플라비아 도미틸라, 총 4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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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5월 7일
천주교 여자세례명
4가지
5월 7일 여자세례명 목록
1. 로사 베네리니
- 가톨릭 성인 이름
Rose Venerini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동정녀,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56-1728년
로사 베네리니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로싸, 로즈.
로사 베네리니 자료
성녀 로사 베네리니(Rosa Venerini)는 1656년 2월 9일 이탈리아의 비테르보(Viterbo)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인 고프레도(Goffredo)는 안코나(Ancona)의 카스텔레오네 디 수아사(Castelleone di Suasa) 출신으로 로마(Roma)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비테르보의 대형 병원에서 의사 직무를 훌륭히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비테르보의 오래된 가문 출신인 마르지아 잠피체티(Marzia Zampichetti)와 결혼하여 네 명의 자녀, 즉 도메니코(Domenico),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ddalena), 로사 베네리니, 오라지오(Orazio)를 두었다.
로사 베네리니는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함과 비범한 감성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가정교육을 통해 확고한 그리스도교적 원칙 안에서 형성된 많은 심리적인 재능을 개발할 수 있었다. 그녀의 첫 번째 전기 작가인 지롤라모 안드레우치(Girolamo Andreucci) 신부에 의하면 그녀는 7살 때 이미 자신의 삶을 봉헌하기 위한 서원을 했다고 한다.
청소년기 동안 그녀는 세상의 매력과 하느님께 드린 약속 사이에서 고민하며 지냈는데, 이 위기를 의심 없는 기도와 금욕으로써 이겨냈다. 20살 때 로사 베네리니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녀가 살던 시대에 여성들의 삶은 결혼 아니면 수도생활이라는 두 가지 방향의 선택만이 가능할 뿐이었다.
그녀는 이 두 가지 모두를 존중했지만, 하느님께서는 교회의 유익과 당시 사회를 위해 다른 계획을 깨닫도록 그녀를 부르셨다. 이러한 예언적인 내적 움직임에 의해 그녀는 완전히 혁신적인 해결책에 도달할 때까지 고통과 탐색의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1676년 가을, 그녀는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자신의 서원을 완성하리라는 기대를 갖고 성녀 카타리나(Catharina)의 도미니코회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그녀의 이모인 안나 체칠리아(Anna Cecilia) 옆에서 그녀는 침묵과 묵상 중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방법을 배웠다. 하지만 그녀의 수도원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고통 중에 있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입회 몇 달 만에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가족에게 주어진 불행의 짐을 짊어지게 되었다.
그녀의 오빠인 도메니코가 2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고, 그로부터 몇 달 뒤에 어머니 또한 세상을 떠나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러는 중에 언니 마리아 막달레나는 결혼을 했고, 집에는 이제 막내 오라지오와 24살이 된 로사 베네리니만이 남게 되었다.
하느님을 위해 뭔가 큰일을 하고 싶었던 그녀는 1684년 5월에 주변의 처녀와 부인들을 모아 저녁마다 묵주기도를 바치기 시작했다. 그들과 기도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기도 전후의 대화를 통해 당시의 슬픈 현실에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
당시 여성들은 문화적 · 교육적 · 영성적 가난의 노예와도 같았다. 로사 베네리니는 하느님께서 젊은 여성들의 교육과 그리스도교적 양성이라는 보다 높은 사명을 위해 자신을 부르고 계심을 이해했고, 산발적인 만남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현실적이고 참된 감각을 갖고 투신해야 할 긴급한 필요성을 확인하였다.
1685년 8월 30일 아버지의 집을 떠난 로사 베네리니는 비테르보의 주교인 우르바노 사케티(Urbano Sacchetti) 추기경의 승인을 받고, 두 명의 친구이자 협력자인 제롤라마 콜루첼리(Gerolama Coluzzelli)와 포르지아 바키(Porzia Bacci)와 함께 혁신적인 계획을 따라 기도 안에서 성숙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는 첫 번째 여학교를 시작하였다.
설립자로서 로사 베네리니의 첫 번째 목적은 소녀들을 그리스도교적 정신으로 양성하고 사회생활을 준비하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거창한 주장은 없었지만 그녀는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소녀들을 위한 공립학교를 개교한 것이었다. 비록 시작은 대단하지 않았지만 그 의미만큼은 예언적이라 할만 했다.
여성들의 인간적 증진과 영성적 향상이 현실화되었고, 교회와 시 당국으로부터 승인을 받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론 첫 시작이 쉽지는 않았다. 자신의 직무로서 교리교육을 담당하는 성직자들의 저항에 직면하기도 했고, 무지한 소녀들의 교육을 마음으로 받아들인 비테르보의 중상류 계층 여성들의 대담함에 충격을 느낀 순응주의자들로부터 호된 의혹을 사기도 했다.
로사 베네리니는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 이 모든 것을 극복하며 자신이 하느님의 계획을 올바로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 확실해질 때까지 주어진 길을 계속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가 옳았다는 것은 교육사업의 결과로써 입증되었다. 같은 일에 종사하는 사목자들로부터 그녀의 교육방법이 가져온 교육적 개선을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창시한 혁신적 교육방법의 타당성이 인정받으면서 그녀의 명성은 교구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비테르보 프로젝트의 특징을 잘 이해한 몬테피아스코네(Montefiascone) 교구의 마르코 안토니오 바르바리고(Marco Antonio Barbarigo) 추기경은 로사 베네리니를 자신의 교구로 초대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항상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던 그녀는 이 초대에 기꺼이 응답하였다. 그래서 1692년부터 1694년까지 몬테피아스코네와 볼세나(Bolsena) 호수 주변 마을에 열 개의 학교를 개교하였는데, 바르바리고 추기경은 적극적인 물질적 후원을 제공하였다.
한편 교사들의 훈련과 학교들을 조직할 기구의 필요성을 느낀 로사 베네리니는 추기경의 도움으로 교사 훈련원을 세웠고, 이곳에서 비슷한 사명을 수행하던 성녀 루치아 필립피니(Lucia Filippini, 3월 25일)를 만나 그녀와 함께 ‘자비로운 교사회’를 공동으로 설립하였는데, 오늘날 베네리니의 자매회로 불린다.
비테르보와 몬테피아스코네에 여학교를 개교한 로사 베네리니는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 서부 라치오(Lazio) 지방에서 또 다른 학교들을 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706년에 로마로 진출했으나 한 동안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시 당국의 신뢰를 얻기까지 6년의 긴 시간을 기다린 끝에 1713년 12월 8일 베네리니 가족의 위대한 친구인 아바테 데글리 아티(Abate Degli Atti)의 도움으로 로마의 중심지인 캄피도글리오(Campidoglio) 바로 아래에 학교를 개교할 수 있었다.
1716년 10월 24일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는 8명의 추기경을 동반하고 그녀가 설립한 학교를 시찰하기 위해 방문하여 “당신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에 행복을 가져다 줄 이 학교에 대해 너무도 고맙습니다.”라며 치하하였다. 이를 계기로 여러 지역의 당국자와 추기경들로부터 자신들의 지역에 학교를 세워달라는 요청이 쇄도하였다.
그녀는 힘겨운 여행을 계속하며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기쁨과 희생이 뒤섞인 고된 작업을 이어갔다. 그녀가 새로운 학교를 시작하는 곳 어디서든 짧은 기간 안에 젊은이들 안에서 높은 교육적 증진의 효과를 가져왔다.
로사 베네리니는 1728년 5월 7일 오후 로마의 성 마르코 공동체에서 성인다운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녀는 일생 동안 40개 이상의 학교를 개교하였다. 그녀의 유해는 평소 그녀가 사랑했던 제수(Gesu)의 성당 근처에 안장되었고, 시복식을 즈음하여 로마에 있는 관구 본부의 경당으로 이장하였다.
그녀는 1952년 5월 4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6년 10월 15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에우프로시나
- 가톨릭 성인 이름
Euphrosyne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말
에우프로시나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우프로시네, 유프라서니, 유프로시나.
에우프로시나 자료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Flavia Domitilla)에 대해서는 여러 전승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로 인해 확실한 내용을 확인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한 전승에 따르면, 그녀는 1세기 말 로마의 집정관이었던 성 플라비우스 클레멘스(Flavius Clemens, 6월 22일)의 조카딸이었다.
그녀는 교황 성 클레멘스 1세(11월 23일)에게 직접 동정녀의 면사포를 받고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다른 많은 이들과 함께 폰티아(Pontia) 섬으로 추방되어 그리스도를 위해 오랜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이탈리아 중부 테라치나(Terracina)로 끌려갔는데, 그곳에서 그녀의 가르침과 기적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러자 재판관은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가 다른 동정녀인 성녀 에우프로시나(Euphrosyna)와 성녀 테오도라(Theodora)와 함께 있는 방에 불을 지르도록 명령했고, 그렇게 해서 그들의 영광스러운 순교가 완성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5월 7일 목록에서 이와 같은 내용을 전해 주면서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는 5월 12일에 기념하는 성 네레우스(Nereus)와 성 아킬레우스(Achilleus) 순교자와도 함께 언급된다고 간단히 기록했다.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95년 로마의 집정관이었던 성 플라비우스 클레멘스의 부인이자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조카딸인 성녀 도미틸라가 그리스도교 신자임이 드러나 가예타(Gaeta) 만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판다타리아(Pandataria) 섬으로 추방되었다.
이교도 역사학자인 수에토니우스(Suetonius)와 디온 카시우스(Dion Cassius)는 성녀 도미틸라가 로마제국의 신들을 숭배하지 않은 무신론자 또는 신성 모독자라는 죄명으로 고발당해 순교했다고 전하고 있다.
교회사가인 에우세비우스(Eusebius)는 자신의 저서인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에서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가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조카딸로 평생 동정을 지키기를 원했으나 그리스도교 신자임이 발각되어 폰티아 섬으로 추방됐다고 했다.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나 다른 학자들도 에우세비우스와 비슷한 내용을 전하며, 그녀가 오랫동안 유배 생활을 하며 긴 순교의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리고 성 플라비우스 클레멘스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로마에서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순교의 길로 들어섰다고 전했다.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에 대한 또 다른 후대의 전승, 즉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년)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순교한 것으로 알려진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 이야기와 섞이면서 그 내용은 더욱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졌다.
전설적 이야기에 따르면,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는 성녀 도미틸라를 죽이기 위해 파견된 로마 황제의 친위대 소속 군인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성녀 도미틸라의 모범적 생활에 감동해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어 자신들이 받은 명령을 거부하였다.
결국 그들은 모두 추방되어 순교와도 같은 긴 유배의 생활을 했고, 마침내 테라치나에서 성녀 도미틸라는 화형을,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는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고 한다. 이때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의 수양 자매인 성녀 에우프로시나와 성녀 테오도라도 함께 순교했다.
성녀 도미틸라 그리고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의 유해는 로마의 아르데아티나(Ardeatina) 가도에 있는 도미틸라 카타콤바에 안치되었고, 398년 성 시리키우스(Siricius, 11월 26일) 교황이 그들을 기념해 그 위에 성당을 세웠다.
800년에 교황 성 레오 3세(Leo III, 6월 12일)는 그들을 기념해 새 성당을 지었고, 이 성당은 16세기에 바로니우스(Baronius) 추기경에 의해 재건축되었다. 그리고 바로니우스 추기경의 청으로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의 이름이 1595년에 옛 “로마 순교록”과 보편 전례력에 추가되었지만, 역사적 불확실성으로 인해 1969년 보편 전례력을 개정하면서 삭제되었다.
성녀 도미틸라가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와 함께 언급되기도 한다고 간단히 기록했던 옛 “로마 순교록”과는 달리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5월 12일 두 명의 군인 순교자에 대한 기록에서 더는 성녀 도미틸라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5월 7일 목록에서 성녀 도미틸라를 소개하면서 집정관 플라비우스 클레멘스의 조카딸로서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추방되어 폰자 섬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오랜 유배의 생활을 하다가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이렇듯 성녀 도미틸라에 대해서는 수많은 초기 순교자들처럼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교회의 전통 속에서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는 황제의 조카딸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목숨 바쳐 신앙을 지킨 순교자로서 기억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테오도라
- 가톨릭 성인 이름
Theodora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말?
테오도라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오도라, 떼오도라.
테오도라 자료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Flavia Domitilla)에 대해서는 여러 전승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로 인해 확실한 내용을 확인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한 전승에 따르면, 그녀는 1세기 말 로마의 집정관이었던 성 플라비우스 클레멘스(Flavius Clemens, 6월 22일)의 조카딸이었다.
그녀는 교황 성 클레멘스 1세(11월 23일)에게 직접 동정녀의 면사포를 받고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다른 많은 이들과 함께 폰티아(Pontia) 섬으로 추방되어 그리스도를 위해 오랜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이탈리아 중부 테라치나(Terracina)로 끌려갔는데, 그곳에서 그녀의 가르침과 기적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러자 재판관은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가 다른 동정녀인 성녀 에우프로시나(Euphrosyna)와 성녀 테오도라와 함께 있는 방에 불을 지르도록 명령했고, 그렇게 해서 그들의 영광스러운 순교가 완성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5월 7일 목록에서 이와 같은 내용을 전해 주면서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는 5월 12일에 기념하는 성 네레우스(Nereus)와 성 아킬레우스(Achilleus) 순교자와도 함께 언급된다고 간단히 기록했다.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95년 로마의 집정관이었던 성 플라비우스 클레멘스의 부인이자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조카딸인 성녀 도미틸라가 그리스도교 신자임이 드러나 가예타(Gaeta) 만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판다타리아(Pandataria) 섬으로 추방되었다.
이교도 역사학자인 수에토니우스(Suetonius)와 디온 카시우스(Dion Cassius)는 성녀 도미틸라가 로마제국의 신들을 숭배하지 않은 무신론자 또는 신성 모독자라는 죄명으로 고발당해 순교했다고 전하고 있다. 교회사가인 에우세비우스(Eusebius)는 자신의 저서인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에서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가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조카딸로 평생 동정을 지키기를 원했으나 그리스도교 신자임이 발각되어 폰티아 섬으로 추방됐다고 했다.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나 다른 학자들도 에우세비우스와 비슷한 내용을 전하며, 그녀가 오랫동안 유배 생활을 하며 긴 순교의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리고 성 플라비우스 클레멘스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로마에서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순교의 길로 들어섰다고 전했다.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에 대한 또 다른 후대의 전승, 즉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년)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순교한 것으로 알려진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 이야기와 섞이면서 그 내용은 더욱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졌다.
전설적 이야기에 따르면,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는 성녀 도미틸라를 죽이기 위해 파견된 로마 황제의 친위대 소속 군인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성녀 도미틸라의 모범적 생활에 감동해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어 자신들이 받은 명령을 거부하였다.
결국 그들은 모두 추방되어 순교와도 같은 긴 유배의 생활을 했고, 마침내 테라치나에서 성녀 도미틸라는 화형을,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는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고 한다. 이때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의 수양 자매인 성녀 에우프로시나와 성녀 테오도라도 함께 순교했다.
성녀 도미틸라 그리고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의 유해는 로마의 아르데아티나(Ardeatina) 가도에 있는 도미틸라 카타콤바에 안치되었고, 398년 성 시리키우스(Siricius, 11월 26일) 교황이 그들을 기념해 그 위에 성당을 세웠다. 800년에 교황 성 레오 3세(Leo III, 6월 12일)는 그들을 기념해 새 성당을 지었고, 이 성당은 16세기에 바로니우스(Baronius) 추기경에 의해 재건축되었다.
그리고 바로니우스 추기경의 청으로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의 이름이 1595년에 옛 “로마 순교록”과 보편 전례력에 추가되었지만, 역사적 불확실성으로 인해 1969년 보편 전례력을 개정하면서 삭제되었다.
성녀 도미틸라가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와 함께 언급되기도 한다고 간단히 기록했던 옛 “로마 순교록”과는 달리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5월 12일 두 명의 군인 순교자에 대한 기록에서 더는 성녀 도미틸라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5월 7일 목록에서 성녀 도미틸라를 소개하면서 집정관 플라비우스 클레멘스의 조카딸로서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추방되어 폰자 섬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오랜 유배의 생활을 하다가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이렇듯 성녀 도미틸라에 대해서는 수많은 초기 순교자들처럼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교회의 전통 속에서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는 황제의 조카딸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목숨 바쳐 신앙을 지킨 순교자로서 기억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플라비아 도미틸라
- 가톨릭 성인 이름
Flavia Domitilla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말?
플라비아 도미틸라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미띨라.
플라비아 도미틸라 자료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에 대해서는 여러 전승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로 인해 확실한 내용을 확인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한 전승에 따르면, 그녀는 1세기 말 로마의 집정관이었던 성 플라비우스 클레멘스(Flavius Clemens, 6월 22일)의 조카딸이었다.
그녀는 교황 성 클레멘스 1세(11월 23일)에게 직접 동정녀의 면사포를 받고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다른 많은 이들과 함께 폰티아(Pontia) 섬으로 추방되어 그리스도를 위해 오랜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이탈리아 중부 테라치나(Terracina)로 끌려갔는데, 그곳에서 그녀의 가르침과 기적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러자 재판관은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가 다른 동정녀인 성녀 에우프로시나(Euphrosyna)와 성녀 테오도라(Theodora)와 함께 있는 방에 불을 지르도록 명령했고, 그렇게 해서 그들의 영광스러운 순교가 완성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5월 7일 목록에서 이와 같은 내용을 전해 주면서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는 5월 12일에 기념하는 성 네레우스(Nereus)와 성 아킬레우스(Achilleus) 순교자와도 함께 언급된다고 간단히 기록했다.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95년 로마의 집정관이었던 성 플라비우스 클레멘스의 부인이자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조카딸인 성녀 도미틸라가 그리스도교 신자임이 드러나 가예타(Gaeta) 만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판다타리아(Pandataria) 섬으로 추방되었다.
이교도 역사학자인 수에토니우스(Suetonius)와 디온 카시우스(Dion Cassius)는 성녀 도미틸라가 로마제국의 신들을 숭배하지 않은 무신론자 또는 신성 모독자라는 죄명으로 고발당해 순교했다고 전하고 있다.
교회사가인 에우세비우스(Eusebius)는 자신의 저서인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에서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가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조카딸로 평생 동정을 지키기를 원했으나 그리스도교 신자임이 발각되어 폰티아 섬으로 추방됐다고 했다.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나 다른 학자들도 에우세비우스와 비슷한 내용을 전하며, 그녀가 오랫동안 유배 생활을 하며 긴 순교의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리고 성 플라비우스 클레멘스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로마에서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순교의 길로 들어섰다고 전했다.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에 대한 또 다른 후대의 전승, 즉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년)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순교한 것으로 알려진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 이야기와 섞이면서 그 내용은 더욱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졌다.
전설적 이야기에 따르면,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는 성녀 도미틸라를 죽이기 위해 파견된 로마 황제의 친위대 소속 군인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성녀 도미틸라의 모범적 생활에 감동해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어 자신들이 받은 명령을 거부하였다.
결국 그들은 모두 추방되어 순교와도 같은 긴 유배의 생활을 했고, 마침내 테라치나에서 성녀 도미틸라는 화형을,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는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고 한다. 이때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의 수양 자매인 성녀 에우프로시나와 성녀 테오도라도 함께 순교했다.
성녀 도미틸라 그리고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의 유해는 로마의 아르데아티나(Ardeatina) 가도에 있는 도미틸라 카타콤바에 안치되었고, 398년 성 시리키우스(Siricius, 11월 26일) 교황이 그들을 기념해 그 위에 성당을 세웠다.
800년에 교황 성 레오 3세(Leo III, 6월 12일)는 그들을 기념해 새 성당을 지었고, 이 성당은 16세기에 바로니우스(Baronius) 추기경에 의해 재건축되었다. 그리고 바로니우스 추기경의 청으로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의 이름이 1595년에 옛 “로마 순교록”과 보편 전례력에 추가되었지만, 역사적 불확실성으로 인해 1969년 보편 전례력을 개정하면서 삭제되었다.
성녀 도미틸라가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와 함께 언급되기도 한다고 간단히 기록했던 옛 “로마 순교록”과는 달리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5월 12일 두 명의 군인 순교자에 대한 기록에서 더는 성녀 도미틸라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5월 7일 목록에서 성녀 도미틸라를 소개하면서 집정관 플라비우스 클레멘스의 조카딸로서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추방되어 폰자 섬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오랜 유배의 생활을 하다가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이렇듯 성녀 도미틸라에 대해서는 수많은 초기 순교자들처럼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교회의 전통 속에서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는 황제의 조카딸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목숨 바쳐 신앙을 지킨 순교자로서 기억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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