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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2일 남자세례명 11가지

피어나네 2023. 5. 1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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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2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네레오, 도미니코, 디오니시오, 모도알도, 아킬레오, 에텔하르드, 에피파니오, 제르마노, 판크라시오, 프란치스코 파트리치, 필립보, 총 11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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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2일 여자세례명 릭트루다, 요안나, 이멜다 람베르티니, 젬마, 총 4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5월 12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1가지

 

 

 

 

5월 12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네레오

  2. 도미니코

  3. 디오니시오

  4. 모도알도

  5. 아킬레오

  6. 에텔하르드

  7. 에피파니오

  8. 제르마노

  9. 판크라시오

  10. 프란치스코 파트리치

  11. 필립보

 

5월 12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1가지

 

 

1. 네레오

 

  • 가톨릭 성인 이름
    Nere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세기말?

 

 

네레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네레우스.

 

 

네레오 자료

성 네레우스(또는 네레오)와 성 아킬레우스(Achilleus)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년)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생몰 연대는 불분명하다.

확실한 것은 그들의 유해가 로마의 아르데아티나(Ardeatina) 가도에 있는 도미틸라(Domitilla) 카타콤바에 안치되었고, 교황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 12월 11일)가 4세기 말에 그들의 무덤 묘비에 비문을 썼다는 것과 나중에 그들의 무덤 위에 그들에게 봉헌된 성당이 건립되었다는 것이다.

교황 성 다마수스 1세는 비문에서 그들을 로마 황제에게 충성하던 군인이었으나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무기 일체를 내려놓고 더는 황제의 명령을 따를 수 없다며 진영을 떠나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고 승리를 맛본 순교자라고 기록했다.

후대의 전설에서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조카딸 또는 로마의 집정관인 플라비우스 클레멘스(Flavius Clemens)의 조카딸 또는 부인이자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Flavia Domitilla, 5월 7일)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등장했다.

그런데 여러 전승이 섞이면서 역사적 신빙성이 부족한 이야기들이 전해졌다. 한 전승에 따르면,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는 그리스도교 신자인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를 죽이라고 파견된 군인들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모범적 생활에 감동해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어 자신들이 받은 명령을 거부하였다. 교황 성 다마수스 1세는 이를 ‘신앙의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결국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는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와 함께 로마에서 폰자(Ponza) 섬으로 추방되었다. 이 세 사람은 트라야누스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에 테라치나(Terracina) 섬으로 유배지를 옮겼는데,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는 그들의 추방 과정 자체가 하나의 긴 순교록이라고 표현했다. 이 섬에서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는 화형을, 그리고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는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런데 또 다른 전승에 기초한 옛 “로마 순교록” 5월 12일 목록에 따르면,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는 군인이 아니라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를 섬기는 시종 형제로 등장한다.

그들은 자신의 주인에게 결혼보다 동정녀의 삶을 권고했고, 약혼자의 고발로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와 함께 폰티아(Pontia) 섬으로 유배 가서 오랫동안 지냈다. 그 후 집정관에게 모진 채찍질을 당하며 우상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도록 강요받았지만, 당당히 자신들은 사도 성 베드로(Petrus)에게 세례를 받았고 우상에게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밝혔다.

결국 그들은 참수되었고, 그들의 거룩한 유해는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와 함께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의 명으로 성 아드리아누스 성당 성해실로 장엄하게 이장되었다.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는 이미 고대 교회 때부터 순교자로서 공경받았고, 그들의 이름이 5세기 로마의 축일표에 기재되었다. “젤라시우스 전례서”(Sacramentarium Gelasianum)에도 그들의 축일 미사 전례문이 수록되어 있다.

398년 교황 성 시리키우스(Siricius, 11월 26일)는 그들을 기념해서 도미틸라 카타콤바 위에 성당을 세웠고, 이 성당에서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 교황은 재임 중 그들을 기념하여 다음과 같은 강론을 했다.

“이 성인들은 세상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발아래 놓았습니다.”

800년에 교황 성 레오 3세(Leo III, 6월 12일)는 그들을 기념하는 새 성당을 지었고, 이 성당은 16세기에 바로니우스(Baronius) 추기경에 의해 재건축되었다.

바로니우스 추기경의 청으로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의 이름이 1595년에 옛 “로마 순교록”과 보편 전례력에 추가되었지만, 역사적 불확실성으로 인해 1969년 전례력을 개정하면서 삭제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5월 12일 목록에서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에 대해 교황 성 다마수스 1세의 비문을 중심으로 로마제국의 군인이었다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무기를 내려놓고 신앙을 고백하며 순교한 뒤 아르데아티나 가도에 있는 도미틸라 카타콤바에 묻혔다고만 기록하였다.

성녀 도미틸라에 대해서는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와 연관 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폰차(Ponza) 섬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순교했다고 5월 7일 목록에서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보편 전례력은 5월 12일에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 순교자 또는 성 판크라티우스(Pancratius) 순교자를 기념할 수 있도록 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도미니코

 

  • 가톨릭 성인 이름
    Dominic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109년경

 

 

도미니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미니꼬, 도미니꾸스, 도미니쿠스, 도미니크, 도미닉, 도밍고.

 

 

도미니코 자료

성 도미니쿠스(Dominicus, 또는 도미니코)는 도미니쿠스 드 라 칼차다로도 불리는 '드 라 칼차다'(de la Calzada)라는 말은 '방죽 길'이란 뜻으로 그가 에스파냐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가는 순례 길을 개척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그는 에스파냐 바스크(Basque) 지방의 비스케이(Biscay) 만에서 태어났다. 젊어서 그는 수차례에 걸쳐서 발바네라(Valvanera)에 있는 베네딕투스 수도원에 입회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무뚝뚝한 그의 외모와 무식한 것이 수도자 생활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그 후 그는 리오하(Rioja) 근방에 움막을 짓고 은수자로서 독수생활을 시작하였다. 오스티아(Ostia)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5월 9일)가 그 지방에 설교하러 왔을 때 성 도미니코는 스스로 그를 수행하였고, 성 그레고리우스가 운명할 때까지 그와 함께 머물렀다.

스승이 운명하자 그는 이전의 은둔생활로 돌아가면서 원래의 은둔소에서 멀지 않은 부레바의 황야에 은둔소를 세웠다. 그곳은 사도 성 야고보(Jacobus, 7월 25일)의 유해가 모셔진 경당으로 가는 순례자들의 통행로였다. 그러나 그곳에는 원시림이 가득하고 매우 위험한 곳이라 통행하는 사람들이 극히 드물었다.

그는 이곳에 움막과 기도소를 짓고 살면서 원목을 베어내고 순례자들을 위한 좋은 길을 만들었다. 그의 노력은 성공적이어서 그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순례자들을 위한 좋은 길과 다리 그리고 대피소 등을 만들어 편익을 제공하였다. 그는 1109년경에 운명하였으며 그가 머물던 은둔소와 무덤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나서 그 자체로 유명한 성지가 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디오니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Dionys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경

 

 

디오니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디오니시오 자료

성 판크라티우스(Pancratius)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거의 없다. 옛 “로마 순교록”은 로마의 아우렐리아(Aurelia) 가도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년 재위)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14살의 어린 나이로 고문을 당하고 참수형으로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그런데 오래된 문서나 비평문 등에 언급된 전설적인 수난기에 따르면, 성 판크라티우스는 290년경 프리기아(Phrygia) 지방 신나다(Synnada)에서 부유한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양친을 여의고 고아가 된 그는 삼촌인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에게 맡겨졌다.

성 판크라티우스는 삼촌을 따라 로마로 와서 살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한창이던 304년경 불과 14살의 나이로 로마의 신상 앞에 희생제물을 바치라는 요구를 받았다.

황제는 권력을 약속하며 어린 그를 회유했지만, 성 판크라티우스는 몸은 비록 어린아이지만 마음만은 노인과도 같다며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리고 참수형을 받고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그의 시신은 옥타빌라(Octavilla)라는 한 로마의 부인이 정성껏 수습하여 로마의 카타콤바에 새로 만든 무덤에 안장했다. 옛 로마 순교록은 그의 삼촌인 성 디오니시우스도 이때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그에 대한 기록을 삭제했다.

성 판크라티우스의 무덤은 일찍부터 많은 이들이 찾는 순례지가 되었다. 교황 성 젤라시우스 1세(Gelasius I, 492~496년 재위, 11월 21일)와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590~604년 재위, 9월 3일)의 성무 집전서에 성 판크라티우스 기념 미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에 대한 공경은 이미 일찍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을 500년경 교황 성 심마쿠스(Symmachus, 498~514년 재위, 7월 19일)가 재건축했고,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는 이곳에서 복음서를 강화(講話)하고 그에게 봉헌하는 수도원을 세웠다.

교황 호노리우스 1세(Honorius I, 625~638년 재위)에 의해 재건된 성 판크라티우스 대성당은 로마인들이 부활 시기에 주로 찾는 유적지가 되었고, 후대에 추기경좌 성당으로 지정되었다. 그에 대한 공경을 더욱 널리 퍼졌고, 중세 때에는 서양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성 판크라티우스는 특별히 영국에서 큰 공경을 받고 있는데, 이는 캔터베리(Canterbury)의 주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5월 27일)가 그의 첫 번째 성당을 성 판크라티우스에게 봉헌했고, 664년에 교황 성 비탈리아누스(Vitalianus, 1월 27일)가 영국 노섬브리아(Northumbria)의 왕 오스위(Oswy)에게 그의 유해를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중세 후기 14명의 수호자 중 1명으로 여겨졌고, 신생 국가와 청춘 남녀들의 보호자이자 병자들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았다. 그의 유해는 로마와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의 여러 교회에 나뉘어 보관되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순교를 상징하는 검이나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젊은이나 갑옷을 입은 군인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성 판크라티우스가 군인은 아니었지만 같은 날 순교하여 오래전부터 전례 안에서 함께 기념해온 군인 출신의 성 네레우스(Nereus)와 성 아킬레우스(Achilleus)의 영향으로 보인다.

1969년 보편 전례력 개정 이후부터는 5월 12일에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 순교자 또는 성 판크라티우스 순교자를 자유롭게 선택해서 기념할 수 있게 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모도알도

 

  • 가톨릭 성인 이름
    Modoald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640년경 트리어

 

 

모도알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로모알도, 로모알두스, 모도알두스.

 

 

모도알도 자료

로모알두스(Romoaldus)로도 알려진 성 모도알두스(또는 모도알도)의 출생지는 프랑스 아키텐(Aquitaine)이다. 그는 그곳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성녀 세베라(Severa, 7월 20일)와 성녀 이두베르가(Iduberga)는 그의 누이들이다.

그는 자주 국왕 다고베르트(Dagobert)의 궁으로 갔는데, 여기서 메스(Metz)의 성 아르눌푸스(Arnulphus, 7월 18일)와 쾰른(Koln)의 성 쿠니베르투스(Cunibertus, 11월 12일)를 만나 우정을 깊게 하였다.

그 후 그는 독일 트리어의 주교로 착좌했는데, 비록 주교직에 있었으나 철저한 보속생활을 하고 지난날의 과오를 말끔히 씻으려고 노력하였다.

성 모도알두스 주교는 영적 지도자와 상담자 역할은 물론 수도원 건설을 위해서는 땅과 돈을 최우선적으로 지원하였다. 그의 유해는 1107년 독일 북서부 파더보른(Paderborn)으로 이장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아킬레오

 

  • 가톨릭 성인 이름
    Achille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세기말?

 

 

아킬레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낄레오, 아낄레우스, 아칠레오, 아칠레우스, 아킬레우스.

 

 

아킬레오 자료

성 네레우스(Nereus)와 성 아킬레우스(또는 아킬레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년)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생몰 연대는 불분명하다.

확실한 것은 그들의 유해가 로마의 아르데아티나(Ardeatina) 가도에 있는 도미틸라(Domitilla) 카타콤바에 안치되었고, 교황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 12월 11일)가 4세기 말에 그들의 무덤 묘비에 비문을 썼다는 것과 나중에 그들의 무덤 위에 그들에게 봉헌된 성당이 건립되었다는 것이다.

교황 성 다마수스 1세는 비문에서 그들을 로마 황제에게 충성하던 군인이었으나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무기 일체를 내려놓고 더는 황제의 명령을 따를 수 없다며 진영을 떠나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고 승리를 맛본 순교자라고 기록했다.

후대의 전설에서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조카딸 또는 로마의 집정관인 플라비우스 클레멘스(Flavius Clemens)의 조카딸 또는 부인이자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Flavia Domitilla, 5월 7일)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등장했다.

그런데 여러 전승이 섞이면서 역사적 신빙성이 부족한 이야기들이 전해졌다. 한 전승에 따르면,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는 그리스도교 신자인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를 죽이라고 파견된 군인들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모범적 생활에 감동해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어 자신들이 받은 명령을 거부하였다.

교황 성 다마수스 1세는 이를 ‘신앙의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결국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는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와 함께 로마에서 폰자(Ponza) 섬으로 추방되었다.

이 세 사람은 트라야누스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에 테라치나(Terracina) 섬으로 유배지를 옮겼는데,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는 그들의 추방 과정 자체가 하나의 긴 순교록이라고 표현했다. 이 섬에서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는 화형을, 그리고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는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런데 또 다른 전승에 기초한 옛 “로마 순교록” 5월 12일 목록에 따르면,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는 군인이 아니라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를 섬기는 시종 형제로 등장한다.

그들은 자신의 주인에게 결혼보다 동정녀의 삶을 권고했고, 약혼자의 고발로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와 함께 폰티아(Pontia) 섬으로 유배 가서 오랫동안 지냈다.

그 후 집정관에게 모진 채찍질을 당하며 우상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도록 강요받았지만, 당당히 자신들은 사도 성 베드로(Petrus)에게 세례를 받았고 우상에게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밝혔다.

결국 그들은 참수되었고, 그들의 거룩한 유해는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와 함께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의 명으로 성 아드리아누스 성당 성해실로 장엄하게 이장되었다.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는 이미 고대 교회 때부터 순교자로서 공경받았고, 그들의 이름이 5세기 로마의 축일표에 기재되었다. “젤라시우스 전례서”(Sacramentarium Gelasianum)에도 그들의 축일 미사 전례문이 수록되어 있다. 398년 교황 성 시리키우스(Siricius, 11월 26일)는 그들을 기념해서 도미틸라 카타콤바 위에 성당을 세웠고, 이 성당에서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 교황은 재임 중 그들을 기념하여 다음과 같은 강론을 했다. “이 성인들은 세상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발아래 놓았습니다.” 800년에 교황 성 레오 3세(Leo III, 6월 12일)는 그들을 기념하는 새 성당을 지었고, 이 성당은 16세기에 바로니우스(Baronius) 추기경에 의해 재건축되었다.

바로니우스 추기경의 청으로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의 이름이 1595년에 옛 “로마 순교록”과 보편 전례력에 추가되었지만, 역사적 불확실성으로 인해 1969년 전례력을 개정하면서 삭제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5월 12일 목록에서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에 대해 교황 성 다마수스 1세의 비문을 중심으로 로마제국의 군인이었다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무기를 내려놓고 신앙을 고백하며 순교한 뒤 아르데아티나 가도에 있는 도미틸라 카타콤바에 묻혔다고만 기록하였다.

성녀 도미틸라에 대해서는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와 연관 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폰차(Ponza) 섬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순교했다고 5월 7일 목록에서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보편 전례력은 5월 12일에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 순교자 또는 성 판크라티우스(Pancratius) 순교자를 기념할 수 있도록 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에텔하르드

 

  • 가톨릭 성인 이름
    Ethelhard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대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803-805년? 캔터베리

 

 

에텔하르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뗄하르드, 에뗄하르트, 에텔하르트.

 

 

에텔하르드 자료

일부 기록에서 성 에텔하르드는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승품되기 전에 링컨셔(Linconlnshire)의 루스(Louth)에 있는 대수도원의 원장이었으며 잉글랜드(England) 윈체스터(Winchester)의 주교였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파머(Farmer)는 그가 윈체스터의 주교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오파(Offa) 왕과 교황이 리치필드(Lichfield)와 캔터베리를 분리한 직후에 캔터베리의 주교직으로의 승품되었다. 그리고 처음에 성 에텔하르드는 머시아(Mercia)의 지배가 된 켄트(Kent) 지방의 양떼를 맡지 못했다.

796년 오파 왕이 죽고 켄트 지방이 반란을 일으키자 성 에텔하르드는 피신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다음 해 복자 알퀴누스(Alcuinus, 5월 19일)의 도움을 받아 캔터베리 교회를 재건할 수 있었다.

802년 교황 성 레오 3세(Leo III, 6월 12일)는 캔터베리 교회를 이전의 상태로 재허가 하였으며 수도 관구를 런던(London)으로 옮기자는 의견을 불허하고 리치필드 관구를 없앴다.

성 에텔하르드는 803년 클로브쇼(Clovesho) 시노드를 열어 새로 선출된 주교로 하여금 신앙 고백과 소속 관구 주교에게 순명을 서약할 것을 자필로 쓰는 의무규정을 만들었다.

성 에텔하르드가 803-805년 사이에 캔터베리에서 사망하자 그의 시신은 캔터베리 대성당에 모셔졌고 관구의 재건을 감독한 업적으로 공경을 받았다. 그의 삶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지만 그에게 보낸 복자 알퀴누스와 교황 성 레오 3세의 편지가 남아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에피파니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piphan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310/320-402/403년 살라미스

 

 

에피파니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삐빠니오, 에삐빠니우스, 에피파니우스.

 

 

에피파니오 자료

남부 팔레스티나(Palestina)의 베산두케(Besanduce)에서 태어난 성 에피파니우스(또는 에피파니오)는 성경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언어의 전문가였다.

팔레스티나에서 은수자로 지내던 그는 이집트로 가서 몇 군데의 사막 공동체에서 체류하였다. 333년경에 팔레스티나로 돌아온 그는 사제로 서품되었고 이어서 자신이 세운 엘레우테로폴리스(Eleutheropolis)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뛰어난 학문과 엄격성, 고행, 영적 지혜와 권고로 인해 높은 명성과 칭송을 받았고 ‘팔레스티나의 현인’으로 불렸다.

또한 그는 키프로스(Cyprus) 섬 살라미스 교구의 주교 그리고 367년에는 자기 수도원의 장상으로 있으면서 키프로스의 대주교가 되었다.

성 에피파니우스는 아리우스(Arius) 이단에 대하여 엄중한 설교를 자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파의 발렌스 황제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지 않은 극소수의 정통파 주교였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유명하였는지를 증명할 수 있다.

그는 메테시우스와 동방 주교들의 요구에 반대하던 바울리누스(Paulinus) 주교를 후원하였고, 382년에 교황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 12월 11일)가 소집한 로마(Roma) 공의회에도 참석하여 큰 공을 세웠다. 오리게네스(Origenes)의 가르침에 대한 그의 반박 때문에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와 우의를 돈독히 하였다.

한 번은 그가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annes Chrisostomus, 9월 13일)를 반대하는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테오필루스(Theophilus)를 지원하기 위하여 콘스탄티노플로 갔으나, 곧 자신의 입장과 위치를 파악하고서 키프로스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그는 살라미스로 돌아오는 도중 바다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수많은 신학 저서를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삼위일체나 부활에 관한 것 등이 유명하며 또 옛 유대 관습에 관한 글도 남아 있다. 그는 성모 신심에 권위가 있었고 베드로의 수위권을 강력히 가르쳤던 분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제르마노

 

  • 가톨릭 성인 이름
    Germa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총대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634/640?-733년경 콘스탄티노플

 

 

제르마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게르마노, 게르마누스, 제르마누스, 젤마노.

 

 

제르마노 자료

성 게르마누스(또는 제르마노)는 634년 또는 640년경 동로마 제국의 헤라클리우스 황제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황제 세력 간의 왕위 쟁탈 과정에서 축출되어 콘스탄티노플의 성녀 소피아 성당의 성직자들 손에 맡겨졌다. 그곳에서 좋은 교육을 받은 후 668년에 그 성당의 사제가 되었다.

715년 그는 정통 신앙을 지닌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2세(Anastasius II)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선출되었다. 착좌 후 곧바로 주교회의를 소집하여 그리스도 단의설(Monotheletism) 이단과 그 추종자들을 단죄하였다.

725년 황제 레오 3세(Leo III)가 성화상 공경을 배척하고 성화상 파괴를 지시한 것에 대하여 강론과 저술로써 단호하게 반대하였다. 계속된 억압에도 굴하지 않았고, 결국에는 항의의 표시로 730년 총대주교직에서 물러나 그리스 아테네(Athenae) 근처에 있는 자신의 영지 플라토니움(Platonium)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의 역사적 저술인 “이단자들과 주교회의에 대하여”(De Haeresibus et Synodis)라는 책을 집필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733년경 세상을 떠났다.

그의 대부분의 저작들은 성화상 공경을 반대하는 황제 레오 3세의 지시로 모두 불태워졌지만, 네 편의 교의신학적인 서간들이 남아 있다.

성 게르마누스는 특별한 가치가 있는 일곱 편의 강론을 통하여 성모 마리아에 대하여 귀중한 가르침을 남겼다. 또한 그는 전례를 적극 권장하고 찬미가를 작곡한 사람으로서 이름을 남겼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판크라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Pancra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소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경 로마

 

 

판크라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방그라시오, 방그라씨오, 판크라스, 판크라시우스, 판크라씨오, 판크라씨우스, 판크라티오, 판크라티우스.

 

 

판크라시오 자료

성 판크라티우스(Pancratius, 또는 판크라시오)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거의 없다. 옛 “로마 순교록”은 로마의 아우렐리아(Aurelia) 가도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년 재위)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14살의 어린 나이로 고문을 당하고 참수형으로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그런데 오래된 문서나 비평문 등에 언급된 전설적인 수난기에 따르면, 성 판크라티우스는 290년경 프리기아(Phrygia) 지방 신나다(Synnada)에서 부유한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양친을 여의고 고아가 된 그는 삼촌인 성 디오니시우스(Dionysius)에게 맡겨졌다.

성 판크라티우스는 삼촌을 따라 로마로 와서 살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한창이던 304년경 불과 14살의 나이로 로마의 신상 앞에 희생제물을 바치라는 요구를 받았다.

황제는 권력을 약속하며 어린 그를 회유했지만, 성 판크라티우스는 몸은 비록 어린아이지만 마음만은 노인과도 같다며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리고 참수형을 받고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그의 시신은 옥타빌라(Octavilla)라는 한 로마의 부인이 정성껏 수습하여 로마의 카타콤바에 새로 만든 무덤에 안장했다.

옛 “로마 순교록”은 그의 삼촌인 성 디오니시우스도 이때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기록했으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자료의 불확실성으로 같은 날 목록에서 그에 대한 기록을 삭제했다.

성 판크라티우스의 무덤은 일찍부터 많은 이들이 찾는 순례지가 되었다. 교황 성 젤라시우스 1세(Gelasius I, 492~496년 재위, 11월 21일)와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590~604년 재위, 9월 3일)의 성무 집전서에 성 판크라티우스 기념 미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에 대한 공경은 이미 일찍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을 500년경 교황 성 심마쿠스(Symmachus, 498~514년 재위, 7월 19일)가 재건축했고,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는 이곳에서 복음서를 강화(講話)하고 그에게 봉헌하는 수도원을 세웠다.

교황 호노리우스 1세(Honorius I, 625~638년 재위)에 의해 재건된 성 판크라티우스 대성당은 로마인들이 부활 시기에 주로 찾는 유적지가 되었고, 후대에 추기경좌 성당으로 지정되었다. 그에 대한 공경을 더욱 널리 퍼졌고, 중세 때에는 서양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성 판크라티우스는 특별히 영국에서 큰 공경을 받고 있는데, 이는 캔터베리(Canterbury)의 주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5월 27일)가 그의 첫 번째 성당을 성 판크라티우스에게 봉헌했고, 664년에 교황 성 비탈리아누스(Vitalianus, 1월 27일)가 영국 노섬브리아(Northumbria)의 왕 오스위(Oswy)에게 그의 유해를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중세 후기 14명의 수호자 중 1명으로 여겨졌고, 신생 국가와 청춘 남녀들의 보호자이자 병자들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았다. 그의 유해는 로마와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의 여러 교회에 나뉘어 보관되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순교를 상징하는 검이나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젊은이나 갑옷을 입은 군인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성 판크라티우스가 군인은 아니었지만 같은 날 순교하여 오래전부터 전례 안에서 함께 기념해온 군인 출신의 성 네레우스(Nereus)와 성 아킬레우스(Achilleus)의 영향으로 보인다.

1969년 보편 전례력 개정 이후부터는 5월 12일에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 순교자 또는 성 판크라티우스 순교자를 자유롭게 선택해서 기념할 수 있게 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프란치스코 파트리치

 

  • 가톨릭 성인 이름
    Francis Prtrizzi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선교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328년 시에나

 

 

프란치스코 파트리치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방지거,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프란치스코 파트리치 자료

프란치스코 파트리치(Franciscus Patrizzi, 또는 프란체스코)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 지방 시에나의 귀족 가문인 파트리치가의 후손이다.

그는 소년 시절에 도미니코 회원인 복자 암브로시우스 산세도니(Ambrosius Sansedoni, 3월 20일)의 강론을 듣고 하느님께만 몰두하게 되었다. 그는 어느 사막에 들어가서 은둔 생활을 할 꿈을 키웠으나, 과부이며 맹인이던 어머니께 대한 의무 때문에 집에 있어야만 하였다.

어머니가 사별하자 그는 22세의 나이로 성 필리푸스 베니티우스(Philippus Benitius, 8월 23일)가 세운 마리아의 종 수도회에 입회하여 유명한 선교사 및 설교자가 되었다. 대중적인 그의 설교는 수많은 군중을 사로잡았으나 회원들 사이에는 끊임없는 질투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매우 예민한 그는 혹시라도 스캔들이 생길까봐 고심하다가 성모님께 도움을 청했는데 이상하게도 갑자기 벙어리가 되었다. 물론 이런 증세는 오래 가지 않았지만 그는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혀를 사용하라는 뜻으로 이 표지를 받아들였다.

그 후 그는 놀라운 설교를 할 수 있었는데, 이때부터 그의 설교를 두고 시비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사망일을 1328년의 성모 승천 대축일이라고 예언한 뒤 바로 그 날 사망하여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그에 대한 공경은 1743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필립보

 

  • 가톨릭 성인 이름
    Philip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선교사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아지로네

 

 

필립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비리버, 필리뽀, 필리뿌스, 필리포, 필리포스, 필리푸스, 필립, 필립부스, 필립뽀, 필립뿌스, 필립포, 필립푸스.

 

 

필립보 자료

성 필리푸스(Philippus, 또는 필립보)는 교황청에 의해 시칠리아(Sicilia)로 파견된 첫 번째 선교사로서 아지로네의 작은 언덕 마을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 중에는 모순되거나 전설적인 내용들이 많이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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