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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 남자세례명 115가지 (1/6)

피어나네 2023. 5. 29.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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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115분 자료를 총 여섯 페이지 가나다 순서로 정리했어요. 5월 29일 천주교 세례명 115분 중 20분 첫 번째 입니다.

 

 

  1. 5월 29일 남자세례명 115가지 (1/6)

  2. 5월 29일 남자세례명 115가지 (2/6)

  3. 5월 29일 남자세례명 115가지 (3/6)

  4. 5월 29일 남자세례명 115가지 (4/6)

  5. 5월 29일 남자세례명 115가지 (5/6)

  6. 5월 29일 남자세례명 115가지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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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 여자세례명 강경복 수산나, 강완숙 골룸바, 구성열 바르바라, 권천례 데레사, 김연이 율리아나,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문영인 비비안나, 보나, 심아기 바르바라, 심조이 바르바라, 오 마르가리타, 우르술라 레도호프스카, 윤운혜 루치아, 윤점혜 아가타, 이 안나,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이성례 마리아, 이순이 루갈다, 이시임 안나, 이조이 막달레나, 정복혜 칸디다, 정순매 바르바라, 최 비르지타, 최조이 바르바라, 한신애 아가타, 총 26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5월 29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15가지 (1/6)

 

 

 

 

5월 29일 남자세례명 목록 (1/6)

 

  1. 고성대 베드로

  2. 고성운 요셉

  3. 구한선 타대오

  4.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5. 권상연 야고보

  6. 김강이 시몬

  7. 김계완 시몬

  8. 김광옥 안드레아

  9.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10. 김대권 베드로

  11. 김사건 안드레아

  12. 김사집 프란치스코

  13. 김세박 암브로시오

  14. 김시우 알렉시오

  15. 김원중 스테파노

  16. 김이우 바르나바

  17. 김정득 베드로

  18. 김종교 프란치스코

  19. 김종륜 루카

  20. 김종한 안드레아

 

5월 29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15가지 (1/6)

 

 

1. 고성대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高聖大 Peter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독신,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6년 한국

 

 

고성대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고 베드로, 고베드로,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고성대 베드로 자료

‘여빈’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고성대(高聖大) 베드로(Petrus)는, 충청도 덕산의 별암(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모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는 본디 성격이 매우 포악하여 사람들이 가까이하기를 꺼렸지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뒤로는 그러한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고 베드로는 부모님께 효성을 다하였다. 언제인가는 아버지가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그는 아우인 고성운 요셉과 함께 8개월 동안 아버지의 회복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였다. 또 그들 형제는 언제나 합심하여 성경을 읽고 다른 사람들을 권면하는 데 열심이었으므로, 모든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이후 고 베드로는, 고산 저구리(현,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내 전주로 끌려간 그는 처음에는 용감하게 신앙을 증언하였지만, 목숨을 보전하려는 유혹에 넘어가 석방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온 고 베드로는 곧바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고, 이후로는 가끔 “이 큰 죄를 보속하려면 칼을 맞아야 마땅하다.”고 되뇌곤 하였다. 그러다가 아우와 함께 경상도의 청송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리)으로 이주하여 그곳 신자들과 함께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1815년, 고 베드로와 요셉 형제는 교우들과 함께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내다가 밀고자를 앞세운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이때가 그해 2월 22일경이었다.

경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는 가운데서도 고 베드로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신앙을 굳게 지켰다. 그러자 경주 관장은 그들 형제와 함께 배교를 거부하는 모든 교우를 감사가 주재하는 대구로 이송하였다. 대구에서는 또다시 문초와 형벌이 여러 차례 이어졌으며, 17개월이 넘게 괴로운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고 베드로는 한결같이 이러한 고통을 참아 내면서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에 아우와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까지 그는 혼인을 하지 않은 채 동정을 지키고 있었다.

이에 앞서 대구의 감사는 고성대 베드로 형제가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는 것을 보고는 다음과 같이 조정에 보고하였다.

“고성대와 고성운 형제는 어리석고 무식한 무리로 천주교에 미혹되어 깨달을 줄 모르기에, 엄한 형벌을 하면서 깨우쳐 주려고 하였지만,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또 한 번 죽기로 한 마음을 목석과 같이 고집하니, 그들의 죄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고 베드로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고성대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고성운 요셉

 

  • 가톨릭 성인 이름
    高聖云 Joseph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독신,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6년 한국

 

 

고성운 요셉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고 요셉, 고요셉, 요세푸스,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호세.

 

 

고성운 요셉 자료

 ‘성일’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고성운(高聖云) 요셉(Josephus)은, 충청도 덕산의 별암(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는 본디 성격이 착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며, 신앙생활도 아주 열심히 하였다.

고 요셉은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다. 또한 고 요셉과 고 베드로 형제는 언제나 합심하여 성경을 읽고 다른 사람들을 권면하는 데 열심이었으므로, 모든 신자에게 모범이 되었다. 고 요셉은 형과 함께 경상도의 청송 노래산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는 1815년 2월 22일경, 교우들과 함께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내다가 경주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을해박해의 시작이었다.

이때 노래산 교우촌 신자들은 도적이 온 줄로 알고는 몸이 날쌔고 기운이 세었던 고 요셉의 지휘에 따라 힘으로 대적하였다. 그러나 이내 신자들은 그들이 도적이 아니라 관청에서 파견된 포졸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신자들은 모든 저항을 멈추었고, 고 요셉은 어린양처럼 양순해져서 제일 먼저 포승을 받았다.

고 요셉은 형과 함께 경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고, 감사가 주재하는 대구로 이송되었다. 거기에서도 고 요셉은 모든 고통을 참아 내면서 한결같이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형과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까지 그는 혼인을 하지 않았다. 고성운 요셉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고성운 요셉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구한선 타대오

 

  • 가톨릭 성인 이름
    具漢善 Thaddeu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중인, 복사,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44-1866년 한국

 

 

구한선 타대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구 타대오, 구타대오, 다대오, 다두, 타대우스, 타데오, 타데우스.

 

 

구한선 타대오 자료

구한선(具漢善) 타대우스(Thaddaeus, 또는 타대오)는 경상도 함안 미나리골(현, 경남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그는 글을 많이 읽었는데, 천주교에 입교하기 전에는 어떤 요술에 빠진 적도 있었다.

어느 날 구 타대오는 우연히 천주교 신자를 만나 교리를 듣게 되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이를 받아들여 그에게 교리를 배운 다음, 성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약 10년 동안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다가 리델(F. Ridel, 李福明) 신부의 복사로 선택되어 거제도 전교에 동행한 적도 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된 뒤에, 구 타대오는 리델 신부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지내던 중에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그곳 관아로 압송되었다. 이윽고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간 그는 갖가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또한 옥에 갇혀서는 주요 교리를 설명한 글을 적어 관장의 부인에게 전하였다.

구 타대오의 글을 읽은 그 부인은, 관장에게 그를 석방해 주라고 청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관장은 더욱 화가 나서 구 타대오를 옥에서 끌어내어 혹독하게 매질을 하라고 시켰다. 그럼에도 구 타대오는 ‘아프다.’는 신음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이에 관장이 화가 나서 ‘제대로 매질을 하지 못한다.’며 형리들을 꾸짖자, 형리들은 ‘제대로 매질을 하는 것입니다. 만일 더 때리면 그가 죽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관장이 이번에는 구 타대오를 향해 “어찌하여 ‘아프다.’는 소리 한번 내지 않느냐?”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늙으신 어머니가 문밖에 있을 터인데, 만일 신음 소리를 내면 어머니가 이를 듣고 기절하실 것이므로 신음 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또 관장이 “그러면 어찌하여 천주교를 신봉하였느냐?” 하고 묻자, 구 타대오는 “부모에게 효도를 하라고 가르치므로 천주교를 신봉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처럼 모진 형벌을 당한 뒤, 구 타대오는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형벌로 7일 만에 죽었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순교한 뒤 그의 이마에는 ‘품’(品)자 모양의 붉은 점이 찍혀 있었다고 한다. 구한선 타대오의 시신은 가족이 고향 인근에 안장하였다.

구한선 타대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權相問 Sebastian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69-1802년 한국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권 세바스티아노, 권세바스티아노, 세바스띠아노, 세바스띠아누스, 세바스찬, 세바스챤, 세바스티아누스, 쎄바스띠아노, 쎄바스띠아누스.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자료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 또는 세바스티아노)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양반 집안 출신이다. 교회 창설 주역들의 스승이요 학문으로 이름이 높던 권철신 암브로시오는 그의 큰아버지였으며, 교회 창설에 참여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그의 아버지였다. 뒷날 권 세바스티아노는 조선의 풍습에 따라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었다.

1769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권 세바스티아노는 일찍부터 집안의 신앙을 이어받아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또 장성한 뒤에는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한편, 이웃에 사는 윤유일 바오로 형제를 비롯하여 몇몇 교우들과 함께 기도 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연구하였다.

1791년의 신해박해로 생부인 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죽임을 당하자, 권 세바스티아노는 마음이 약해져 한때 교회를 멀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로는 다시 신앙을 회복하였고, 성사를 받으려고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그는 동료들과 함께 주 야고보 신부를 방문하고 모임을 가졌으며, 얼마 뒤에는 고향인 양근으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1795년의 을묘박해로 주 야고보 신부가 피신 생활을 하게 되자, 3일 동안 주 신부를 자신의 집에 유숙시키면서 교리를 배웠다.

1800년 6월 경기도 양근에서 일어난 박해로, 권 세바스티아노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양근과 경기 감영을 오가면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런 다음 1801년의 신유박해가 한창일 무렵에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권 세바스티아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잠시 마음이 약해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이전에 한 말을 취소하였으며, 사정없이 가해지는 형벌을 받으며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러자 형조에서는 그의 최후 진술을 들은 뒤, 다음과 같은 죄목으로 사형을 언도하였다.

“생부 권일신이 사망한 뒤에도 천주교에 깊이 빠졌으며, 아울러 요사한 말과 글을 오로지 대중을 미혹시키는 데에 이용하였다.”

동시에 형조에서는 ‘권상문을 고향으로 이송하여 처형하라.’고 명령하였다. 권상문 세바스티아노의 고향인 양근 주민들이 경각심을 주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양근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권상연 야고보

 

  • 가톨릭 성인 이름
    權尙然 Jame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51-1791년 한국

 

 

권상연 야고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권 야고보, 권야고보, 야고버, 야고부스, 야코보, 야코부스, 자크, 제임스.

 

 

권상연 야고보 자료

윤지충(尹持忠) 바오로는 1759년 전라도 진산 장구동에 거주하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는 ‘우용’이며,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전주에서 순교한 윤지헌 프란치스코가 그의 동생이다.

본디 총명한 데다가 품행이 단정하였던 윤 바오로는 일찍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1783년 봄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또 이 무렵에 고종 사촌 정약용 요한 형제를 통해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되었으며, 다음해부터는 스스로 교회 서적을 구해 읽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3년 동안 교리를 공부한 그는, 1787년 인척인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윤 바오로는 어머니와 아우 윤 프란치스코, 외종사촌 권상연 야고보에게도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또 인척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자주 오가면서 널리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권상연(權尙然) 야고보(Jacobus)는 1751년 진산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디 그는 학문에 정진해 오고 있었으나, 고종사촌인 윤지충 바오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운 뒤에는 기존의 학문을 버리고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다. 그때가 1787년 무렵이었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 바오로는 권 야고보와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려고 집 안에 있던 신주(죽은 사람의 위패)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 여름, 윤 바오로의 어머니(곧 권 야고보의 고모)가 사망하자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이는 어머니의 유언이기도 하였다.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가 신주를 불사르고, 전통 예절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소문은 얼마 안 있어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 소문은 조정에까지 전해져 그곳을 온통 소란스럽게 하였다. 그리고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해 오라’는 명령이 진산 군수에게 내려졌다.

체포령 소식을 들은 윤 바오로는 충청도 광천으로, 권 야고보는 충청도 한산으로 피신하였다. 그러자 진산 군수는 그들 대신 윤 바오로의 숙부를 감금하였고, 이러한 사실을 전해 들은 그들은 곧바로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그때가 1791년 10월 중순경이었다.

진산 군수는 먼저 그들을 달래면서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교가 진리임을 역설하면서 ‘절대로 신앙만은 버릴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여러 차례의 설득과 회유가 있었음에도 그들의 태도가 조금도 변하지 않자, 진산 군수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전주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전주에 도착한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는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하였다. 전라 감사는 그들에게서 천주교 신자들의 이름을 얻어 내려고 갖은 방법을 다 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신앙을 굳게 지키면서 교회나 교우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특히 윤 바오로는,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면서 제사의 불합리함을 조목조목 지적하였고, 이에 화가 난 감사는 그들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김강이 시몬

 

  • 가톨릭 성인 이름
    金鋼伊 Simon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중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65?-1815년 한국(Korea)

 

 

김강이 시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시몬, 김시몬, 사이먼, 시메온, 시므온.

 

 

김강이 시몬 자료

‘여생’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강이(金鋼伊) 시몬은 충청도 서산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장성한 뒤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는 성격이 고상하고 용맹한 데다가 재산도 많았다. 그러나 입교한 뒤에는 재산과 종들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아우인 김창귀 타대오의 가족과 함께 전라도 고산 땅에 가서 살았다.

1795년 초여름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고산을 방문하자, 김 시몬은 여러 차례 신부의 처소로 가서 성사를 받고 교리를 배웠다. 또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지도층 신자로 지목되어 1년 동안을 피신해 다녀야만 하였다. 이때 그의 아내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1년 동안 옥살이를 한 끝에 많은 돈을 쓰고서야 석방될 수 있었다.

박해가 끝난 뒤 김 시몬은, 등짐장사를 하면서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데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온전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장사를 그만두고 경상도 진보의 머루산(현, 경북 영양군 석포면 포산리)으로 들어가 교우촌을 일구었다. 이후에도 그는 다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강원도 울진(현, 경북 울진군)에 가서 정착하였다.

경상도에서 1815년에 을해박해가 일어난 뒤, 김 시몬은 옛 하인의 밀고로 아우인 김창귀 타대오와 조카 김사건 안드레아와 함께 체포되어 경상도 안동에 수감되었다. 이때 김 시몬은 용감하게 관장 앞으로 나아가 포졸들이 빼앗은 자신의 재물을 돌려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그의 요청을 순순히 들어주었다. 보기 드문 일이었다. 김 시몬은 다시 찾은 재물을 굶주리고 있는 옥중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김 시몬은 안동에서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았지만 꿋꿋하게 신앙을 지켰다. 그리고 그해 5월에는 아우와 함께 자신이 살던 강원도의 수부(首府)인 원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도 다시 문초와 형벌은 이어졌고, 그러면서 그의 아우는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유배형을 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김 시몬은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았다.

김 시몬이 보여준 열렬한 신앙과 인내는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러자 감사는 결코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사형을 선고한 뒤, 임금의 윤허를 받고자 그 내용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때 원주 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김강이는 비밀리에 신자들에게 천주교 서적과 소식을 전해 왔으며, 여러 해 동안 천주교 교리를 외우고 익혀서 온몸으로 깊이 빠져 있습니다. 이에 합당한 법률을 시행토록 허락해 주십시오.”

임금은 곧바로 사형 집행을 윤허하였다. 그때 김강이 시몬은 이미 형벌의 상처가 아주 심한 데다가 옥중 생활에서 얻은 이질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그 결과 김 시몬은 임금의 윤허가 내려오기도 전에 옥사하고 말았으니, 그때가 1815년 12월 5일(음력 11월 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 이상이었다.

김강이 시몬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김계완 시몬

 

  • 가톨릭 성인 이름
    金啓完 Simon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복사, 약재상,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2년 한국(Korea)

 

 

김계완 시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시몬, 김시몬, 사이먼, 시메온, 시므온.

 

 

김계완 시몬 자료

‘백심’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계완(金啓完) 시몬은 한양의 양인(良人) 집안에서 태어나 약국을 운영하며 생활하였다. 그는 1791년에 최필공 토마스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본 뒤, 그 타당한 교리에 이끌려 입교하기로 결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최창현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해에 일어난 신해박해로 체포되었다가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김 시몬은 이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신앙을 회복하였다. 또한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1794년 말 조선에 입국하자, 동료들과 함께 주 신부의 거처를 마련하는 데 힘썼고, 동료들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교리를 연구하였다. 그는 종종 주 야고보 신부를 방문하여 성사를 받거나 그의 복사가 되어 교회 일을 도왔다.

1800년 12월경 최 토마스가 체포되자, 김 시몬은 김연이 율리아나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이듬해 초에 본격적으로 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신자들의 문초 과정에서 우연히 그의 이름이 튀어나오게 되었다. 그러자 포졸들은 사방으로 그를 찾으러 다니기 시작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그는 김 율리아나의 집을 빠져나와 이곳저곳으로 피신해 다녔다.

그러는 가운데, 김 시몬의 늙은 아버지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또한 김 시몬도 가족들의 소식을 알아보려고 여기저기로 다니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윽고 문초와 형벌이 시작되자, 김 시몬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드러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깊이 믿어 온 신앙을 버릴 수 없습니다.”고 하면서 “비록 늙으신 아버지가 계시지만, 아버지께 대한 효보다는 천주께 대한 효가 더욱 중요하므로 아버지를 돌보기 어렵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문초가 계속될수록 김계완 시몬의 신심은 더욱 굳어져만 갔다. 관장과 형리들은 ‘더욱 굳게 교리를 실천하기로 다짐하였다.’고 진술하는 그를 보면서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이후 그는 형조로 압송되었고,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문초와 형벌을 받은 후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 새남터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이었다. 사형 판결을 받기 전에 김계완 시몬은 다음과 같이 최후 진술을 하였다.

“저는 무식한 백성으로 천주교에 깊이 빠져 여러 해 동안 신봉하였습니다. 지금 비록 형벌을 당하고 있기는 하지만, 진실로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김계완 시몬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김광옥 안드레아

 

  • 가톨릭 성인 이름
    金廣玉 Andrew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중인, 면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41?-1801년 한국(Korea)

 

 

김광옥 안드레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안드레아, 김안드레아, 안드레아스, 앙드레, 앤드루, 앤드류.

 

 

김광옥 안드레아 자료

충청도 예산 여사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Andreas)는 오랫동안 그 지방의 면장(面長)으로 일하였다. 본디 그는 훌륭한 자질을 갖고 있었지만, 지나치게 사나운 성격 때문에 모두 무서워하였다. 대구에서 1816년에 순교한 김희성 프란치스코가 그의 아들이다.

김 안드레아는 50세쯤 되었을 때, 같은 여사울에 살던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이웃은, 이때 그 사실을 알고 몹시 놀라워하였다.

이후, 김 안드레아는 드러나게 교리의 본분을 실천하면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다. 날마다 교우들과 한자리에 모여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드렸고, 사순 시기마다 금식재를 지키고 갖가지로 극기 행위를 실천하였다. 그러면서 마침내 이전의 성격을 극복하고 어린양과 같이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김 안드레아는 자신이 입교시킨 친척 김정득 베드로와 함께 성물과 서적만을 지닌 채,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가 숨어 살면서 오로지 교리를 실천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포졸들은 그들의 종적을 쉽게 찾아냈다. 이후 김 안드레아는 예산으로, 김 베드로는 홍주로 압송되었다.

예산 현감은 김 안드레아가 체포되어 오자, 바로 공범자들을 대고 천주교 서적을 내놓으라고 명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였다. 두 번째 신문에서도 그는 한결같이 신앙을 증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용맹함을 드러냈다.

“모든 언약이나 위협이 소용없습니다. 다시는 제게 물어보지 마십시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따르지 않습니다. 사또께서는 임금님의 명령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저도 천주의 명령을 거역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는 제 대군대부(大君大父)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 만 번 부당합니다. 우리 천주께서 저의 비밀한 생각과 감정과 의향을 보고 계시므로 마음속으로라도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현감은 김 안드레아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매질을 시켰으나 헛일이었다. 세 번째, 네 번째 신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후 안드레아는 감사의 명에 따라 김정득 베드로와 함께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서로를 권면하면서 형벌과 옥중의 고통을 견디어 냈으며,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8월 21일(음력 7월 13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여기에는 ‘그들의 고향인 예산과 대흥으로 압송하여 참수하라.’는 명령이 덧붙여졌다. 당시 안드레아에게 내려진 선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천주교에 깊이 빠져 생업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숨어 살면서 제멋대로 (교리를) 외우고 익혔으며, 천주교와 관련된 물건들을 감추어 두었다.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십계를 버리기 어렵다고 하면서 ‘한 번 죽는 것이니 달게 받겠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그 죄상을 생각해 보니 만 번 죽여도 오히려 가볍다.”

예산까지 내려오는 동안, 김 안드레아와 김 베드로는 그동안의 형벌 때문에 걸음을 뗄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용기와 힘으로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헤어질 시간이 되자,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손을 마주잡으며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라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

   이튿날 김광옥 안드레아는 들것에 실려 예산 형장으로 가면서도 큰 소리로 묵주 기도를 바쳤다. 또 지정된 장소에 이르자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 뒤에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기도를 마친 다음, 목침을 가져다 스스로 그 위에 자신의 머리를 누였다. 그리고 두 번째 칼날에 목숨을 바쳤으니, 이때가 1801년 8월 25일(음력 7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0세가량이었다.

김광옥 안드레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金耆良 Felix Peter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중인, 상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6-1867년 한국(Korea)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펠릭스 베드로, 김펠릭스 베드로,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펠리체, 피터.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자료

김기량(金耆良) 펠릭스 베드로(Felix Petrus)는, 1816년 제주 섬 함덕리(현, 제주도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람들은 그를 ‘김 선달’이라고 불렀다. 그는 배를 타고 다니면 장사를 하던 사람이었는데, 1857년 2월 18일(음력 1월 24일) 동료들과 함께 무역을 하려고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였다.

그로부터 1개월 이상이 지난 3월 26일, 김기량은 중국의 광동 해역에서 영국 배에 구조되었는데, 동료들은 이미 탈진하여 죽은 상태였다.

이후 김기량은 홍콩의 파리 외방 전교회 극동 대표부로 보내졌으며, 이곳에서 프랑스 선교사들과 조선 신학생 이 바울리노를 만나게 되었다. 이 바울리노는 당시 그곳에서 휴양 중이었다.

이 바울리노는, 김기량을 만난 다음 날부터 그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김기량은 여기에 마음이 쏠려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하였고, 그의 신앙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깊어졌다. 그런 다음 그는 1857년 5월 31일에 홍콩의 부대표인 루세이유(J. J. Rousseille)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김 펠릭스 베드로는 고향인 제주로 내려가기 전 1858년 3-4월에 페롱(S. Feron, 權) 신부와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이때 신부들은 그가 ‘제주의 사도’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실제로 그는 가족과 그의 사공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열중하였으며, 이듬해 봄에는 육지로 나와 교구장인 성 베르뇌(S. Berneux, 張敬一) 주교를 만나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김 펠릭스 베드로는 이후로도 육지를 오가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865년에는 두 번째로 난파하여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였으며, 그곳에서 프티장(Petitjean) 신부를 만나고 다음 해에 귀국하였다. 이후 그는, 육지로 다시 나와 리델(F. Ridel) 신부를 방문하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사공 2명을 세례 받도록 하였다. 이 무렵 그는 다음과 같은 천주가사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어와 벗님들아 순교의 길로 나아가세. / 그러나 순교의 길로 나아가기는 어렵다네. / 나의 평생 소원은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섬기는 것이요, /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천당뿐이로다. / 펠릭스 베드로는 능히 주님 대전에 오르기를 바라옵나이다.

그러나 제주의 복음화를 위한 김 펠릭스 베드로의 노력은 1866년의 병인박해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박해가 일어난 직후, 그는 여느 때처럼 무역을 하러 경상도 통영으로 나갔다가 그곳의 게섬(현, 경남 통영시 산양읍 풍화리)에서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체포되었다.

이윽고 통영 관아로 끌려간 김 펠릭스 베드로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굳게 신앙을 지켰다. 더욱이 옥에 갇혀서는 함께 있던 교우들에게 “나는 순교를 각오하였으니, 그대들도 마음을 변치 말고 나를 따라오시오.”라고 권면하였다.

통영 관장은 대구 감사에게 ‘김기량과 그 동료들을 배교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러자 감사는 ‘그들을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따라 김 펠릭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다시 혹독한 매질을 당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의 목숨이 붙어 있자, 관장은 그들 모두를 옥으로 옮겨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때가 1867년 1월(음력 1866년 12월)로, 당시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나이는 51세였다. 이때 관장은 특별히 그의 가슴 위에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김대권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金大權 Peter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39년 한국(Korea)

 

 

김대권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베드로, 김베드로,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김대권 베드로 자료

김대권(金大權) 베드로(Petrus)는 충청도 청양의 수단이(현, 충남 청양군 사양면 신왕리)에서 태어나, 보령의 청라동(현, 충남 보령군 청라면 청라리)으로 이주해 살았다.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화춘 야고보은 바로 그의 아우이다.

김 베드로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교리를 배워 왔으나, 열심히 계명을 지키기 시작한 것은 부모가 사망한 뒤였다.

김 베드로는 한때 충청도 공주의 옹기점에서 일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는데, 이 무렵에는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느 날 그의 아내는 호랑이에게 물려가 죽을 뻔하였다. 그 사고 뒤에 그들은 지난날의 잘못을 서로 이야기하였고, 이후로는 아내와 화합하여 화목한 가정을 꾸려 나가게 되었다.

김 베드로는 언제나 교리의 가르침에 따라 계명을 지키는 데에 열중하였다. 주일마다 이웃에 복음을 전하였으며, 예수 성탄 대축일이면 근처의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면서 밤을 새웠다. 언젠가는 호랑이가 그의 앞에 나타난 적도 있었는데, 그는 이에 개의치 않고 평소처럼 기도를 다 하고 내려왔다. 사순 시기 때면 기도와 묵상을 거르지 않았고, 하루에 한 끼의 식사만을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아우 김 야고보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도 아우의 뒤를 따르겠다고 하면서 순교의 뜻을 밝혔다.

김 베드로는, 전라도 고산으로 이주하여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1827년 정해박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때 그는 교우들에게 피신을 권유하면서도 자신은 천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오래지 아니하여 포졸들이 그 마을로 들이닥치자, 김 베드로는 웃는 얼굴로 그들 앞에 나아가 순순히 고산 관아로 끌려갔다.

고산에서 한차례 신앙을 증언한 김 베드로는, 곧 전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서적을 갖다 바치거나 교우들의 이름을 댈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전주 관장이 그의 아들을 데려와 목에 칼을 겨누었을 때도 그는 “이러한 일로 목이 잘리면 아들에게도 크나큰 영광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배교를 거부하였다. 이후 그의 아들은 유배형을 받았다.

감사 앞으로 끌려가서도 김 베드로의 신앙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은 수난의 은혜를 한 터럭만이라도 갚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순교의 뜻을 드러냈다. 그의 결심이 얼마나 굳었는지는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매를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저의 살과 뼈에 사무쳐 있으므로, 사지를 자르거나 뼈를 부순다고 하여도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감사는 할 수 없이 김 베드로를 옥에 가두도록 명하였다.

김대권 베드로는 동료들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동안 그는 세 번이나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면서 한결같이 목숨 건지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임금의 명으로 전주 장터(숲정이)로 끌려 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이었다.

김대권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김사건 안드레아

 

  • 가톨릭 성인 이름
    金思健 Andrew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중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4-1839년 한국(Korea)

 

 

김사건 안드레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안드레아, 김안드레아, 안드레아스, 앙드레, 앤드루, 앤드류.

 

 

김사건 안드레아 자료

충청도 서산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김사건(金思健) 안드레아(Andreas)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교리를 배웠다. 1815년에 유배형을 받은 김창귀 타대오는 그의 아버지였고, 그해 강원도 원주에서 옥사한 김강이 시몬은 그의 큰아버지였다.

본디 김 안드레아의 집안은 부유하였으나, 부모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부터 재산을 버리고 이곳저곳으로 이주해 다닌 탓에 가난하게 되었다. 그의 가족이 피신해 다닌 곳은 전라도 고산, 경상도 진보, 강원도 울진 등지였다. 그러다가 김 안드레아는 1815년의 을해박해 때 아버지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참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여기면서 가끔 당시의 일을 후회하곤 하였다.

아버지가 유배를 간 뒤 김 안드레아는 경상도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기도와 전교, 성경 읽기에 많은 시간을 바치면서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중하였다. 또 신자 가정을 찾아 교회 서적과 성물을 전해 주거나 교리를 가르쳐 주었고, 죽을 고비에 있는 비신자 자녀들에게는 대세를 주었다. 그러면서 김 안드레아는 다시 순교할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1827년에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김 안드레아는 체포될 것으로 짐작하고 천주의 섭리를 잘 따르고자 많은 기도를 드렸다. 실제로 얼마 안 있어 포졸들이 그를 체포하러 왔고, 그는 이내 상주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교우들을 밀고하라.’는 관장의 명을 거부하고, 오히려 천주교의 주요 교리와 십계명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화가 나서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는 다리뼈가 허옇게 드러났지만, 마음이 약해지기는커녕 기쁜 마음으로 이를 참아 내었다.

며칠 뒤 김 안드레아는, 경상도의 수부인 대구로 압송되어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그는 전주로 이송되어 포졸들이 교우들에게서 빼앗은 성물에 대해 답변을 한 다음, 다시 대구로 끌려오게 되었다.

대구 옥에는 형벌을 이겨 낸 많은 교우들이 김 안드레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들과 함께 12년 동안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 다시 한 번 배교 여부를 묻는 문초가 있었는데, 이때 임금에게 올린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김사건은 천주를 공경하여 받들었고, ‘그 묘미를 깊이 깨달아 비록 죽을지라도 여한이 없다.’고 하였으니, 법에 따라 처단하려고 합니다.”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김사건 안드레아는 마침내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포졸들은 그의 시신을 수습한 뒤 예를 다하여 장사를 지내 주었으며, 신자들은 오랫동안 그를 특별히 공경하였다.

김사건 안드레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김사집 프란치스코

 

  • 가톨릭 성인 이름
    金-- Franci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44-1802년 한국(Korea)

 

 

김사집 프란치스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프란치스코, 김프란치스코, 방지거,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김사집 프란치스코 자료


‘성옥’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金)사집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충청도 덕산의 비방고지(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합덕리 창말)에 있는 양가(良家) 집안에서 태어나, 과거 공부를 하던 도중에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세속 학문을 버리고 교리를 실천하는 데에만 노력하였으며, 일상을 기도와 독서로 보냈다.

김 프란치스코의 타고난 슬기와 재능,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에 대한 희사와 애긍은 복음 전파의 훌륭한 수단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학문을 바탕으로 교회 서적을 열심히 필사하여 가난한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 효성이 지극하였던 그는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자, 2년 동안 육식을 삼가면서 교회의 가르침대로 예를 다하였다.

1801년에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김 프란치스코가 교우들에게 나누어 준 책들은 하나둘씩 포졸들에게 압수되었다. 이내 그의 이름이 관청에 보고되었고, 관청에서는 배교자 2명에게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실제로 그들이 김 프란치스코의 집을 탐문하고 돌아간 지 얼마 안 되어 포졸들이 그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덕산 관아로 압송된 김 프란치스코는 관장에게 유혹과 형벌을 번갈아 받으면서도 신앙을 굳게 지켰다. 관장이 죄수들에게 매질을 하는 천한 임무를 그에게 맡겼지만, 이것마저도 그의 마음을 바꾸지는 못하였다.

김 프란치스코는 옥중에서 자식들에게 편지를 보내 “천주님과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교우답게 살아가는 데 힘쓰도록 하여라. 그리고 다시는 나를 볼 생각은 하지 말아라.” 하고 당부하였다.

같은 해 10월, 김 프란치스코는 해미로 이송되어 치도곤 90대를 맞아야만 하였다. 그런 다음 2개월 뒤에 상처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청주 병영으로 이송되었다. 엄동설한에 해미에서 청주로 가는 3일간의 180리 길은 김 프란치스코에게 극복하기 어려운 고통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인종(忍從)과 마음의 평온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청주로 이송된 지 얼마 안 있어 김 프란치스코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많은 구경꾼이 모여 있는 장터(현, 충북 청주시 남주동)로 끌려 나가 곤장 80대를 맞고는 그 자리에서 순교하고 말았으니, 이때가 1802년 1월 25일(음력 1801년 12월 22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8세였다.

목격한 증인들의 말에 따르면, 김사집 프란치스코는 신 · 망 · 애 삼덕(三德)이 끝까지 아주 열렬한 것 같았고, 마음이 철석같이 굳었다고 한다.

김사집 프란치스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김세박 암브로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金世博 Ambrose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중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61-1828년 한국(Korea)

 

 

김세박 암브로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암브로시오, 김암브로시오, 암브로시우스, 앰브로스.

 

 

김세박 암브로시오 자료

‘군미’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세박(金世博) 암브로시우스(Ambrosius, 또는 암브로시오)는 1761년 한양의 역관 집에서 태어나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의 관명(冠名)은 ‘언우’였고, 1786년경 유배지에서 사망한 김범우 토마스는 그의 먼 친척이었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다음 김 암브로시오는,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그러나 가족은 이를 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특히 성격이 포악한 아내는 그의 신앙생활을 심하게 방해하였고, 천주교를 욕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김 암브로시오는 가족과 이별한 뒤, 교우들을 찾아다니면서 교리를 가르쳐 주거나 교회 서적을 필사하면서 살아갔다. 그러다가 조선에 입국한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성사를 받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김 암브로시오는 가끔 산중으로 들어가 살면서 신심을 함양하는 데 열중하곤 하였다.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즐겨 하였고, 식생활을 절제하는 데 힘썼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밤중에 일어나 기도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김 암브로시오는 수색을 피할 길이 없음을 알고는 직접 안동 관아로 가서 천주교 신자임을 자백하였다. 이내 그는 안동 관장 앞으로 끌려가, 교회 서적과 동료들이 있는 곳을 밀고하라는 추궁을 받았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 달 뒤, 김 암브로시오는 대구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이재행 안드레아, 김사건 안드레아, 박사의 안드레아 등을 만나 서로 권면하면서 신앙을 지켜 나갔다. 때때로 그는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혹독한 형벌을 받았으나, 백절불굴의 인내심으로 이를 참아 내었다. 이후 감사는 그의 죄목을 다음과 같이 적어 형조로 올려 보냈다.

“김세박은 자수해 와서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는데, 죽기를 맹세하고 뉘우치지 않습니다.”

결국 김 암브로시오는 자신의 사형 선고문을 서명을 하고 처형될 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는 음식을 완전히 끊기로 작정하고 철저하게 금식재를 지켰다. 자신이 먹는 음식이 인근의 주민들에게서 거둔 세금으로 제공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때 함께 있는 동료들이 똑같이 음식을 먹지 않으려고 하자, 김 암브로시오는 ‘그것은 자살 행위가 된다.’고 하면서 음식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김세박 암브로시오는 형벌과 금식재로 쇠약해진 탓에 끝까지 옥중 생활을 이겨 내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828년 12월 3일(음력 10월 27일)에 옥사하고 말았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67세였다. 김세박 암브로시오가 사망하자 교우들이 모두 이를 애석해하였고, 그의 거룩한 생애와 영광스러운 종말을 공경하였다고 한다.

김세박 암브로시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김시우 알렉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金時佑 Alexiu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독신,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3-1816년 한국(Korea)

 

 

김시우 알렉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알렉시오, 김알렉시오, 알렉시스, 알렉시우스, 알렉씨오, 알렉씨우스.

 

 

김시우 알렉시오 자료

일명 ‘시회’ 혹은 ‘시우재’라고 하는 김시우(金時佑) 알렉시우스(또는 알렉시오)는 1783년 충청도 청양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디 그는 성품이 착하고 어질었으며, 어느 정도 학식도 있었다. 그러나 오른쪽 몸이 반신불수인 탓에 혼인을 할 수가 없었고, 일하기가 어려워 가난하게 생활해야만 하였다.

일찍이 고향 인근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김 알렉시오는 열심히 신자의 본분을 지키면서 누이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교우들에게 교리를 설명해 주거나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가난하였으므로 이곳저곳으로 교우들을 찾아다니며 애긍을 받아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때때로 왼손으로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고 약간의 돈을 얻기도 하였다.

김 알렉시오는, 고향을 떠나 교우들이 살고 있는 진보 머루산 교우촌(현,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다가 1815년 초에 일어난 을해박해 때에 포졸들이 쳐들어와 교우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자, 자원하여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밝히고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이때 그는 포졸들에게 “나도 천주교 신자인데 병신이라서 잡아가지 않는군요?”라고 울면서 말하였고, 함께 체포해 가기를 원하였다고 한다.

안동으로 끌려간 김 알렉시오는,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지만, 신앙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그가 보여준 굳건한 신심은 형리들조차 칭찬할 정도였다. 형벌을 받으면서도 그는 천주교의 주요 교리를 박해자들에게 이해시켜 주려는 노력까지 하였다.

이렇게 신앙을 증언한 김 알렉시오는 동료들과 함께 대구로 압송되어 다시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다시 한 번 천주교의 진리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모든 영혼들을 구하시려고 수난을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감사께서도 예수님에게 감사를 드리고, 그분을 흠숭하고, 천주교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이 말을 들은 감사는 김 알렉시오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여 그의 턱을 부수고, 말을 하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사형 선고문을 작성하여, 서명을 받은 다음 옥으로 돌려보냈다.

“김시우는 스스로 천주교의 소굴이 되어 늘 교리를 전하고 익혔으며, 십계는 물론 남들이 외우지 못하는 『칠극』이나 묵주 기도 등도 외우고 있다. 그가 천주교에 깊이 빠져 있다는 사실은 다시 설명할 필요도 없다. 교회 서적을 감추어 둔 곳에 대해서는 단지 그 지명만을 이야기할 뿐이고, 누구에게 서적을 나누어 주었는지는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도 진술하지 않았다.”

옥에 갇힌 김 알렉시오는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고, 구할 수도 없었다. 다른 죄수들처럼 음식과 바꿀 짚신을 삼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대구로 이송되어 온 지 약 2개월 만에 굶주림과 형벌의 상처 때문에 옥사하고 말았으니, 이때가 1816년 음력 10월 21일 이전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는데, 아직 혼인을 하지 못한 때였다.

이후 오랫동안, 조선 신자들 사이에서는 김시우 알렉시오의 열심과 재능, 변론과 용기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졌다. 또 이를 듣는 모든 신자가 그를 교회의 영광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시우 알렉시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김원중 스테파노

 

  • 가톨릭 성인 이름
    김원중 Stephen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66년 한국(Korea)

 

 

김원중 스테파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스테파노, 김스테파노, 스더, 스테파누스, 스테판.

 

 

김원중 스테파노 자료

충청도 진천의 발래기(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명암리)에 살던 김원중 스테파누스(Stephanus, 또는 스테파노)는 본디부터 성품이 순량하고 온후하였으며, 그의 열심과 신덕은 교우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의 이웃에는 사촌인 김선화 베드로가 살고 있었다.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진천 관아에서는 이미 발래기 신자들에 대해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으므로, 전갈을 보내와 “다시는 천주교를 봉행하지 않겠다는 증거로, 천주교 서적을 관아에 갖다 바치고 직접 관장 앞에서 다짐을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러한 전갈을 받은 발래기 신자들은 놀랍고 두려운 나머지 대부분 관청으로 서적을 갖다 바치고, 관장 앞에 가서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때 김 스테파노만은 “내가 천주교를 신봉하는데 어찌 배교 행위를 하겠느냐?”라고 말하면서 서적도 갖다 바치지 않고, 관아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외교인들은 물론, 발래기의 신자들까지도 그 화가 자신들에게 미칠까 두려워 김 스테파노를 원망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신앙을 위해 모든 원망을 감수하였다.

1866년 11월 10일(음력 10월 4일), 관아에서는 다시 전갈을 보내와 “발래기 사람들은 모두 관아에 출두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명령을 전해 들은 김 스테파노는 교우들에게 “이제 들어가면 모두 죽게 될 것이다. 그러니 모두 관아로 갈 것이 아니라, 죽음을 달게 받을 정도로 신덕이 깊은 사람만 관아로 가자.”고 말하였다.

이튿날 진천 관아에서 포졸들이 왔을 때, 발래기 신자들 중에서 김 스테파노를 비롯하여 10명만이 자진하여 체포되었다. 그들 일행이 관아로 들어가자 관장은 “일전에 갖다 바친 책이 누구의 것이냐?”라고 물었다. 김 스테파노는 책을 갖다 바친 적이 없으면서도 “저의 책이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관아에서는 곧바로 그를 가두어 버렸고, 이때 신성순 회장과 2명의 신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겁에 질려 배교를 다짐하였다.

진천 관아에서는 25일 동안 이들을 가두었다가, 모두 12월 6일(음력 10월 30일)에 감사가 주재하던 공주로 압송하였다. 이때 김 스테파노는 공주로 압송되기에 앞서 아우에게 편지를 보내, “나는 주님을 위해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으니, 너도 아무쪼록 주님을 위해 열심히 수계하여 훗날 천당에서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하여라.”라고 당부하였다. 아울러 아내에게도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을 전하였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창조하신 것이오. 자녀들을 잘 보살피고, 죽으나 사나 주님의 명에 순종하다가, 죽은 뒤에 천당에서 서로 만날 수 있도록 합시다. 나는 공덕이 없지만 주님의 도우심만을 믿고 천당에 오르기를 바라고 있으니, 이 세상에서는 다시 나를 볼 생각을 하지 마시오.”

김원중 스테파노 일행을 인도받은 공주 관아에서는 이들을 모두 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이후 그들이 어떠한 형벌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모두가 끝까지 신앙을 증언하였으며, 12월 16일(음력 11월 10일) 함께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는 사실이다. 김원중 스테파노의 아우가 공주로 와서 이들 네 명의 시신을 찾아 장사를 지내 주었다.

김원중 스테파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김이우 바르나바

 

  • 가톨릭 성인 이름
    金履禹 Barnaba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중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1년 한국(Korea)

 

 

김이우 바르나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바르나바, 김바르나바, 바르나바스.

 

 

김이우 바르나바 자료

김이우(金履禹) 바르나바는 한양 명례방의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유배지에서 1786년경에 사망한 김범우 토마스는 그의 맏형이자 이복형이고, 1801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김현우 마태오는 그의 아우이다.

1794년 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 김 바르나바는 아우 김 마태오와 함께 적극적으로 교회 활동에 참여하였고, 홍필주 필립보의 집으로 가서 주 야고보 신부를 만났다. 그리고 정인혁 타대오, 최필제 베드로 등 몇몇 교우들과 함께 자주 기도 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강습하였다.

김 바르나바는 주 야고보 신부가 박해의 위험 때문에 피신해야 했을 때, 자신의 집을 피신처로 제공하고 그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주 야고보 신부가 설립한 평신도 단체 ‘명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800년 주 야고보 신부가 다시 한 번 자신의 집을 방문하여 미사를 집전하게 되었을 때는 미사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하기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김 바르나바는 아우 김 마태오와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김 바르나바는 엄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했는데, 특히 박해자들은 그에게 그동안의 행적을 무섭게 추궁하였다. 그의 집이 신자들의 집회 장소였고, 그가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숨겨 준 사실이 이미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김이우 바르나바는 아무것도 발설하지 않았고, 여러 차례의 형벌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 냈다. 그러나 형벌을 끝까지 견디어내지 못하고 결국 포도청에서 장사(杖死)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1년 음력 5월경이었다.

김이우 바르나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김정득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金丁得 Peter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중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1년 한국(Korea)

 

 

김정득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베드로, 김베드로,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김정득 베드로 자료

‘대춘’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정득(金丁得) 베드로(Petrus)는, 충청도 홍주의 대흥 고을에서 태어나, 친척인 김광옥 안드레아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후, 그가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던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 내용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김 베드로는 김 안드레아와 함께 교회 서적과 성물만을 지닌 채,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가 숨어 살면서 오로지 교리를 실천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던 탓에, 포졸들이 쉽게 그들의 종적을 찾아내고 말았다. 이후 베드로는 홍주로, 안드레아는 예산으로 각각 압송되었다.

홍주 관장은 김 베드로가 끌려오자마자, 그를 배교시키기 엄한 문초와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김 베드로는 감사의 명에 따라 김광옥 안드레아와 함께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서로를 권면하면서 형벌과 옥중의 고통을 견디어 냈으며,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8월 21일(음력 7월 13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여기에는 ‘그들의 고향인 예산과 대흥으로 압송하여 참수하라.’는 명령이 덧붙여졌다. 당시 김정득 베드로에게 내려진 선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국가의 금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사는 폐지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산속에 숨어 살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고 유혹하였으며, 형벌과 문초를 가하여도 아주 모질어서 굴복하지 않았다. 그 죄상을 생각해 보니,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다.”

예산까지 내려오는 동안, 김 베드로와 김 안드레아는 천상의 기쁨에 가득 차서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헤어질 시간이 되자, 그들은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라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 김 베드로는 예산에서 얼마를 더 가, 대흥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이튿날 읍내로 끌려 나가 칼날 아래 목숨을 바쳤으니, 그때가 1801년 8월 25일(음력 7월 17일)이었다.

김정득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8. 김종교 프란치스코

 

  • 가톨릭 성인 이름
    金宗敎 Franci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중인, 의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54-1801년 한국(Korea)

 

 

김종교 프란치스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프란치스코, 김프란치스코, 방지거,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김종교 프란치스코 자료

‘치회’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종교(金宗敎)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1754년 한양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의원이 되었다. 그는 가난한 데다가 호감이 가지 않는 외양을 하고는 있었지만, 학문에 대한 취미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주역인 이벽 세례자 요한은 이러한 그를 매우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놀라운 사람이라고 자주 말하곤 하였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김범우 토마스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김 프란치스코는, 처음부터 드러나게 교회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1791년 신해박해 때에는 박해자들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오르지 않았다.

1794년 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김 프란치스코는 다음 해 초에 최인길 마티아의 집으로 가서 주 야고보 신부를 만난 뒤,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러나 이해 여름에 일어난 을묘박해로 체포된 후에는 마음이 약해져서 석방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온 김 프란치스코는 곧바로 신앙을 회복하고 적극적으로 교회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또 동료들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교리를 공부하는 한편,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힘썼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김 프란치스코는 절친한 최필공 토마스가 체포되는 것을 보고는 잠깐 경기도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정약용 요한의 문초 과정에서 우연히 그의 이름이 나오면서 체포되었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김 프란치스코는 엄한 문초와 형벌에 다시 마음이 약해져 신앙을 버리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형조로 이송된 후에는 갖가지 혹형을 당하고도 다음과 같이 굳건하게 신앙을 증언하였다.

“저는 예전에 배교하고 석방된 후, 다시 신앙을 회복하였습니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찾아가 세례명을 받고는 ‘천주교 신앙이 올바른 도리’라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이제 형벌과 문초를 당할지라도 조금도 이러한 생각을 바꿀 마음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만 번 죽는다 하더라도 이를 달게 받아들이겠습니다.”

형조에서는 마침내 김종교 프란치스코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1801년 10월 4일(음력 8월 27일) 홍필주 필립보와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김종교 프란치스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9. 김종륜 루카

 

  • 가톨릭 성인 이름
    金宗倫 Luke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9-1868년 한국(Korea)

 

 

김종륜 루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루카, 김루카, 누가, 루가, 루까, 루카스, 루크.

 

 

김종륜 루카 자료

김종륜(金宗倫) 루카(Lucas)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충청도 공주에서 천주교에 입교한 다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본관은 경주요, 족보에 기록된 이름은 ‘경희’(敬熙)이다.

김 루카는 평소에 화목함을 특히 강조하였고, 어느 누구와도 화목하게 지내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부모님을 모시고 경상도 상주 멍에목(현, 경북 문경시 동로면 명전리)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다시 언양 간월(현, 경남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을 거쳐 울산 죽령(현, 경남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죽령 교우촌에서 김 루카는 이양등 베드로 회장과 허인백 야고보를 만나 서로 권면해 가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때까지도 이곳은 비교적 안전하였다. 그러나 2년 뒤인 1868년에는 포졸들이 마침내 죽령 교우촌을 찾아내게 되었고, 김 루카는 얼마 되지 않아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경주로 압송되어 가는 동안 김 루카는 동료들의 권면을 잘 받아들여 순교하기로 결심하였다. 실제로 그는 경주 진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고 굳건하게 신앙을 증언하였다.

이어서 김 루카는 동료들과 함께 울산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당하고 신앙을 한결같이 증언하였기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중구 남외동)로 끌려 나가 이양등 베드로 회장과 허인백 야고보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순교 당시에 김종륜 루카는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하며, 그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허인백 야고보의 아내 박조예에 의해 거두어져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김종륜 루카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0. 김종한 안드레아

 

  • 가톨릭 성인 이름
    金宗漢 Andrew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6년 한국(Korea)

 

 

김종한 안드레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안드레아, 김안드레아, 안드레아스, 앙드레, 앤드루, 앤드류.

 

 

김종한 안드레아 자료

신자들 사이에서 ‘계원’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Andreas)는 충청도 면천의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났다.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한현’(漢鉉)으로 나온다. 1814년에 순교한 김진후 비오의 아들로, 김 데레사 성녀의 아버지이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작은할아버지이다.

김 안드레아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몇 년 뒤, 맏형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에 앞서 그의 맏형은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던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의 도움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이를 가족에게 전해 주었다. 한편 김 안드레아의 부친인 김진후 비오는 처음에 입교를 거부하였으나, 계속되는 자식들의 권유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에는 아주 열심인 신자가 되었다.

부친 김 비오가 박해를 받고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였으므로, 그의 자녀들은 안전한 신앙생활을 위해 뿔뿔이 흩어져 살 수밖에 없었다. 김종한 안드레아도 가족과 함께 홍주를 거쳐 경상도 영양의 우련밭(현, 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으로 가서 오랫동안 숨어 살았다.

김 안드레아는 교리를 실천하는 데 아주 열심이었다. 끊임없는 기도 생활과 이웃을 위한 애긍, 신심을 함양하기 위한 극기 행위는 거의 일상이 되었다. 낮에는 천주교 서적을 필사하여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밤에는 신자들을 자신의 집에 모아 놓고 가르쳤다. 또한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에도 노력하여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난 뒤, 김 안드레아는 영양에서 체포되어 안동으로 끌려갔으며,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대구로 이송되었다. 그가 대구 감영 앞에 이르렀을 때, 마침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가 잠시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어 감영 문을 나가고 있었다. 이것을 본 그는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그녀를 열성적으로 권면하였고, 이에 감화되어 그녀는 다시 관장 앞으로 나아가 신앙을 증언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김 안드레아가 신앙을 증언할 차례였다. 관장은 그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권하였으나, 그의 신앙은 여러 차례의 형벌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김 안드레아는 조용하면서도 꿋꿋하게 천주교가 진리임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감사는 그의 결심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김종한은 마음 깊이 천주교를 좋아하여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도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다니면서 익혀 왔습니다.”라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조정에서 사형 판결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김 안드레아는 옥중에서 두 통의 편지를 형에게 보내고, 교우들에게도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형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저는 순교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며, 감히 이 마지막 은혜를 바라기까지 합니다. 제가 만일 이 훌륭한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이후에는 어떻게 삼구(三仇 : 영혼 구원의 세 가지 원수. 곧 육신, 세속, 마귀를 이른다)에 대적해 나가겠습니까? …… 만약에 제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그것을 영영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천주님의 은총을 바라고, 다음으로는 여러 교우들의 기도를 믿습니다.”

김종한 안드레아가 옥에 갇혀 있은 지 1년 6개월 정도가 되어서야 임금은 사형을 윤허하였다. 그러자 대구 감사는 즉시 천주교 신자들을 옥에서 끌어내 처형하도록 하였다. 이때 김 안드레아가 지도층 신자로 지목되어 제일 먼저 칼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때는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이었다. 김 안드레아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김종한 안드레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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