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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 남자세례명 115가지 (4/6)

피어나네 2023. 5. 29.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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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115분 자료를 총 여섯 페이지 가나다 순서로 정리했어요. 5월 29일 천주교 세례명 115분 중 20분 세 번째 입니다.

 

 

  1. 5월 29일 남자세례명 115가지 (1/6)

  2. 5월 29일 남자세례명 115가지 (2/6)

  3. 5월 29일 남자세례명 115가지 (3/6)

  4. 5월 29일 남자세례명 115가지 (4/6)

  5. 5월 29일 남자세례명 115가지 (5/6)

  6. 5월 29일 남자세례명 115가지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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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 여자세례명 강경복 수산나, 강완숙 골룸바, 구성열 바르바라, 권천례 데레사, 김연이 율리아나,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문영인 비비안나, 보나, 심아기 바르바라, 심조이 바르바라, 오 마르가리타, 우르술라 레도호프스카, 윤운혜 루치아, 윤점혜 아가타, 이 안나,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이성례 마리아, 이순이 루갈다, 이시임 안나, 이조이 막달레나, 정복혜 칸디다, 정순매 바르바라, 최 비르지타, 최조이 바르바라, 한신애 아가타, 총 26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5월 29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15가지 (3/6)

 

 

 

 

5월 29일 남자세례명 목록 (3/6)

 

  1. 유중성 마태오

  2. 유중철 요한

  3.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4. 윤봉문 요셉

  5. 윤유오 야고보

  6. 윤유일 바오로

  7. 윤지충 바오로

  8. 윤지헌 프란치스코

  9. 이경도 가롤로

  10. 이경언 바오로

  11. 이국승 바오로

  12. 이도기 바오로

  13. 이보현 프란치스코

  14. 이양등 베드로

  15. 이일언 욥

  16. 이재행 안드레아

  17. 이정식 요한

  18. 이중배 마르티노

  19. 이태권 베드로

  20. 이현 안토니오

 

5월 29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15가지 (4/6)

 

 

1. 유중성 마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柳重誠 Matthew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4?-1802년 한국

 

 

유중성 마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두, 마태우스, 마테오, 마테우스, 매튜, 유 마태오, 유마태오.

 

 

유중성 마태오 자료

‘완석’(完碩)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유중성(柳重誠) 마태오(Matthaeus)는 전라도 전주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아주 어렸을 때 집안의 장남이던 부친이 35세의 나이로 돌아가셔서, 그는 전주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있는 작은 아버지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자라게 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 순교자인 유중철 요한과 유문석 요한은 그의 사촌 형제들이다.

유 마태오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데에는 작은아버지 유 아우구스티노와 그 가족의 영향이 컸다. 실제로 유 아우구스티노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가족과 친지들에게 널리 교리를 전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1801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유 마태오의 집안에서는 유 아우구스티노와 유 요한이 먼저 체포되었고, 그는 9월 중순 무렵에 어머니를 비롯하여 다른 친척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그의 어머니는 체포된 지 얼마 안 있어 석방되었다. 그러나 유중성 마태오는 사촌 형수인 이순이 루갈다 등 다른 친척들과 함께 순교를 약속하면서 굳게 마음을 다졌다.

그러나 유 마태오와 친척들은 유배형을 받고, 함경도 회령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때 유 마태오가 사촌 형수인 이 루갈다와 함께 친척들을 대표하여 ‘법에 따라 처형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유 마태오는 친척들과 유배지로 가는 동안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관장이 국법에 따라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지 않고 유배를 보냈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전주 감사는 그들을 다시 잡아 오도록 하여 옥에 가두었다. 이후 유 마태오는, 다시 감사 앞에 끌려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고, 다음과 같은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였다.

“천주교는 집안에서 전해 오던 신앙입니다. 유항검 등 삼촌들이 영광스럽게 죽었으므로 그들과 같이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감사는 결국 조정에 사형 판결을 요청하였고, 얼마 뒤에 임금의 윤허가 내려왔다. 이에 따라 유중성 마태오는 1802년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친척들과 함께 ‘숲정이’라고 불리는 전주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약 18세가량이었다. 당시까지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었다.

유중성 마태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유중철 요한

 

  • 가톨릭 성인 이름
    柳重哲 John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동정 부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79-1801년 한국

 

 

유중철 요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유 요한, 유요한,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유중철 요한 자료

‘종석’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유중철(柳重哲) 요한(Joannes)은, 1779년 전주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801년에 순교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그의 부친이고, 이순이 루갈다가 그의 아내이며, 유문석 요한은 그의 동생이다.

유 요한의 집안에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부친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경기도 양근에 살던 인척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면서였다. 이후 부친은 가족과 친지들에게 널리 교리를 전하였고, 그의 집은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환경으로 유 요한은 일찍 세례를 받고, 신앙 안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또 그는 한정흠 스타니슬라오에게 오랫동안 글을 배워 어느 정도 학식도 갖추게 되었다.

“유중철은 성실하고 솔직한 신심, 굳은 신앙과 열렬한 애덕을 갖추고 있었다. 본분에 충실하고 올바른 생활을 하며, 세속의 모든 허영을 업신여겼으므로 젊은 나이인데도 무게가 있고 점잖은 어른 대접을 받았다.”

유중철 요한은 16세가 되던 1795년,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초남이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첫영성체를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때 ‘동정 생활을 하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주 야고보 신부와 부친 앞에서 털어놓았다.

그로부터 2년 뒤 주 야고보 신부는, 한양에 살던 이순이 루갈다에게서 동정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이에 주 야고보 신부는 전주에 사는 유 요한을 염두에 두고 둘의 혼인을 주선하였고, 마침내 1797년 가을에 유 요한과 이 루갈다의 혼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1798년 10월 유 요한은 아내 이 루갈다와 함께 부모님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이후 유 요한은 동정 서약을 어길 마음이 생길 때마다 이 루갈다와 함께 기도와 묵상으로 이를 극복해 나갔고, 함께 순교의 길로 나가자고 굳게 다짐하였다. 그러다가 1801년 봄, 신유박해로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히게 되었다.

유 요한이 갇히게 되자, 동생 유문석 요한이 줄곧 전주를 오가면서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의복만은 전해줄 수 없었으므로 한여름에도 겨울옷을 그대로 입고 지내야만 하였다. 그는 밤낮으로 목에 칼을 쓰고 있어야만 하였으며, 옥중의 고통은 그에게 진정한 형벌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 요한은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보존하였다.

9월 중순에는 유 요한의 아내 이 루갈다를 비롯하여, 동생과 다른 가족들도 체포되었다. 그리고 20여 일 후에 포졸들은 유문석 요한을 가족에게서 떼어 내, 형 유중철 요한에게 데려왔다. 그런 다음 관장의 명에 따라 그 둘을 교수형에 처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11월 14일(음력 10월 9일)로, 요한의 나이는 22세였다.

유중철 요한이 순교한 뒤, 옥중에 있던 아내 이 루갈다는 그가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순교하였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마침내 편지 한 장이 집에서 왔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러한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요한의 옷 안에서 자기 누이(곧 아내 루갈다)에게 보내는 쪽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쪽지에는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유중철 요한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 가톨릭 성인 이름
    柳恒儉 Augustine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56-1801년 한국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오스딩, 아우구스띠노, 아우구스띠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 오스틴, 유 아우구스티노, 유아우구스티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자료

전주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양반 집안에서 1756년에 태어난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또는 아우구스티노)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전라도 지역 최초의 신자가 된 것이다. 1801년에 순교한 유중철 요한과 유문석 요한은 그의 아들이고, 그 이듬해에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는 그의 며느리이며, 유중성 마태오는 그의 조카이다.

유 아우구스티노에게 교리를 가르쳐 준 사람은 경기도 양근에 살던 인척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였다. 그는 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집에서 주요 교리를 배우는 동안 이를 진리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내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은 뒤에 고향으로 내려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가족과 친척은 물론 그의 집에 있던 종들도 모두 그의 전교 대상이 되었다.

이제 유 아우구스티노에게는 빈부귀천이 따로 없었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면서 모두에게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가난한 이웃은 물론, 자신의 종들에게도 애긍과 희사를 베풀었다.

1786년 봄, 이승훈 베드로를 비롯하여 지도층 신자들이 모임을 갖고 임의로 성직자를 임명하였을 때, 유 아우구스티노도 전라도 지역의 신부로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거나 그들을 모아 놓고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 지도층 신자들은 이러한 행위가 독성죄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따라서 유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성무 활동을 중단하였다.

지도층 신자들은 이때부터 북경에 밀사를 파견하는 데 몰두하였다. 유 아우구스티노 역시 이 계획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1789년 말 밀사 윤유일 바오로를 북경에 파견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헌납하였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유 아우구스티노는 신주를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에 이종사촌 윤지충 바오로가 제사를 폐지한 죄로 체포된 뒤, 잠시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가 전주 감영에 자수하여 형식적으로 배교를 선언하고는 석방되었다.

1794년 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유 아우구스티노는 아우 유관검을 신부에게 보내 전라도 순방을 요청하였다. 그때 마침 조정에서 신부 체포령을 내리자, 주 야고보 신부는 이를 피해 지방 순회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경기도와 충청도를 거쳐 전주 아우구스티노의 집을 방문하여 인근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하였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는, 이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선교사를 태운 서양 선박을 조선에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유 아우구스티노가 앞장서서 이 계획을 도왔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오랫동안 결실을 얻지 못하였고, 그러던 차에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그에 앞서 유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장남 유중철 요한과 이윤하 마태오의 딸인 이순이 루갈다가 동정 부부 서약을 하고 혼인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유 아우구스티노는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가장 일찍 체포되었다. 이어 그는 전주에서 한양으로 압송되었으며, 포도청과 형조, 의금부를 차례로 거치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박해자들은 선교사와 서양 선박 요청 계획의 주동자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를 지목하고 모든 것을 실토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미 순교를 각오하고 있던 그는 결코 신자들을 밀고하거나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박해자들은 결국 유 아우구스티노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이에 그들은 그에게 모반죄를 적용하여 능지처참(陵遲處斬刑 : 대역죄를 범한 자에게 과하던 극형으로, 죄인을 죽인 뒤에 시신의 머리, 몸, 팔 다리를 토막 쳐서 각지에 돌려 보이는 형벌)을 하도록 하였고, 이러한 판결에 따라 유 아우구스티노는 전주로 옮겨져 10월 24일(음력 9월 17일) 남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성 다블뤼(St. A. Daveluy, 安敦伊) 주교는, 뒷날 그가 배교한 것 같다는 추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유항검이 배교하였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정하므로, 그는 하느님 앞에서 다른 순교자들의 팔마가지를 받으리라 믿는다.”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윤봉문 요셉

 

  • 가톨릭 성인 이름
    尹鳳文 Joseph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52-1888년 한국

 

 

윤봉문 요셉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요세푸스, 요제프, 윤 요셉, 윤요셉,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호세.

 

 

윤봉문 요셉 자료

윤봉문(尹鳳文) 요셉(Josephus)은 경상도 경주 인근에서 윤사우 스타니슬라오와 막달레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의 가족은 1866년 병인박해로 재산을 몰수당한 뒤 양산으로 이주하였다가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려고 거제도로 건너가 진목정(현, 경남 거제시 옥포동)에 정착하였다.

윤 요셉의 부친인 윤 스타니슬라오는 그 이전부터 비밀리에 천주교 신앙을 전하고 다녔다. 또한 거제도로 이주한 뒤에는 진 요한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여 입교시켰으며, 이러한 인연 때문에 윤봉문 요셉은 장성하여 진 아녜스와 혼인을 하게 되었다.

1887년 겨울에는 경상도를 담임한 로베르(A. P. Robert, 金保祿) 신부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고자 거제도를 방문하였다. 이때 윤 요셉은 거제도의 회장으로 임명되어 로베르 신부를 안내하였는데, 그해 거제도에서는 15명의 어른이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로베르 신부가 거제도를 떠난 이듬해 봄에는 그곳에서는 박해가 시작되었다. 통영 포졸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함으로써 개인적인 탐욕을 채우려고 일으킨 박해였다. 이 박해 때, 윤 요셉은 다른 교우 3명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그 혼자만 통영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모진 형벌에도 관장이 강요하는 배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통영 관장은 이 사실을 곧바로 대구 감사에게 보고하였다. 그러자 감사는 ‘천주교 신자들은 모두 도적과 같으니, 윤봉문을 진주로 이송하여 처형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따라 윤 요셉은 진주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십계명을 외우면서 신앙을 굳게 증언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그를 하옥시킨 뒤, 그날 밤에 옥리들을 시켜 교수형을 집행토록 하였으니, 그때가 1888년 4월 1일(음력 2월 20일)로, 당시 윤 요셉의 나이는 36세였다.

윤봉문 요셉이 순교한 다음, 로베르 신부는 이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교구장에게 보고하였다.

“저는 운 좋게도 이 거룩한 순교자를 친밀하게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열심인 교우였으며, 비신자들의 회개를 위한 열성이 가득하였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벌써 그에게 눈길을 주어 여러 섬에 신앙을 전파하는 일에서 저를 돕게 하려고 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제게서 빼앗아 가셨지만, 그것은 당신의 충실한 벗들에게만 주시는 영광을 그에게 주시려 하신 것입니다.”

윤봉문 요셉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윤유오 야고보

 

  • 가톨릭 성인 이름
    尹有五 Jame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1년 한국

 

 

윤유오 야고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야고버, 야고부스, 야코보, 야코부스, 윤 야고보, 윤야고보, 자크, 제임스.

 

 

윤유오 야고보 자료

윤유오(尹有五) 야고보(Jacobus)는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인근에 있는 양근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1795년에 순교한 교회의 밀사 윤유일 바오로는 그의 형이다.

일찍부터 형 윤유일 바오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된 윤 야고보는 고향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웃에 교리를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형이 순교한 뒤에는, 인근에 사는 조동섬 유스티노,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등과 만나 기도 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연구하면서 신심을 북돋우었다. 또 1795년 초,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지방 순회에 나서 양근에 도착하였을 때 그를 만나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1801년에는 신유박해가 일어나 각처에서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순교하게 되었다. 이때 윤 야고보도 양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그곳 관아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그는 갖가지 문초와 형벌을 당하면서도 전혀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며, 관장의 강요에도 단호하게 배교를 거부하였다. 그의 마지막 신앙 고백은 다음과 같았다.

“저는 형이 가르쳐 준 십계명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실천해야 할 도리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서적을 밤낮으로 외우고 익혔으며, 진실로 배교할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결국 관장은 윤유오 야고보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1801년 4월 27일(음력 3월 15일), 양근 관아로부터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큰길가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게 되었다.

윤유오 야고보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윤유일 바오로

 

  • 가톨릭 성인 이름
    尹有一 Paul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밀사,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60-1795년 한국

 

 

윤유일 바오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윤 바오로, 윤바오로, 파울로, 파울루스, 폴.

 

 

윤유일 바오로 자료

‘인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윤유일(尹有一) 바오로(Paulus)는 1760년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이웃에 있는 양근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에 순교한 윤유오 야고보는 그의 동생이고, 윤점혜 아가타와 윤운혜 루치아는 그의 사촌 동생들이다.

양근으로 이주한 뒤 권철신 암브로시오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던 윤 바오로는, 서적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차츰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 다음 스승의 동생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이후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열중하였다.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은 1789년에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에게 밀사를 보내 그동안의 상황을 보고하고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이때 밀사로 선발된 이가 바로 윤 바오로였는데, 그 이유는 그의 성격이 온순한 데다가 심지가 굳고 학식이 높았으며 교리에도 밝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윤 바오로는 북경을 오가는 상인으로 가장하고, 주교에게 보내는 신자들의 서한을 옷 안에 숨긴 뒤, 1789년 10월 조선을 떠나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초에는 북당에 있는 라자로회 선교사들과 남당에 있는 구베아 주교를 만날 수 있었다. 또 윤 바오로는 북경에 머무는 동안 라자로회의 로오(N. J. Raux, 羅) 신부에게 조건부 세례를 받고, 구베아 주교에게 견진성사를 받았다. 아울러 구베아 주교에게서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하는 데 필요한 준비’에 대해 들었다.

윤 바오로가 1790년 봄에 귀국하자, 지도층 신자들은 성직자를 영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일 때문에 윤 바오로는 그해에 다시 한 번 북경을 다녀와야만 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다음 해, 조선 신자들과 한 약속에 따라 후안 도스 레메디오스(Juan dos Remedios)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그 신부는 조선 밀사들과 만나지 못함으로써 조선에 입국할 수 없었다. 이렇게 1791년에 있었던 첫 번째의 영입 시도는 실패로 끝났으며, 바로 그해 말에 일어난 박해로 이러한 노력은 한동안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윤 바오로는 실망하지 않고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 등과 함께 성직자를 영입하고자 꾸준히 노력하였으며, 1794년 말에 마침내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뒤, 윤 바오로는 북경 교회와 연락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지홍’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지황(池璜) 사바는 1767년에 한양의 궁중 악사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원하여 교리를 배웠다. 본래 성격이 순직하고 부지런하였던 그는, 천주교에 입교하자마자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만 열중하였고, 하느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위험이나 궁핍, 고통을 당할 때에도 결코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성직자 영입 운동이 재개된 1793년에, 이미 북경을 다녀온 적이 있는 윤 바오로와 지 사바와 박 요한이 밀사로 선발되어, 함께 조선의 국경으로 가게 되었다. 지 사바와 박 요한은 조선의 사신 행렬에 끼어 북경으로 향하였고 윤 바오로는 그곳에 남았다.

북경에 도착한 지 사바는 얼마 안 있어 구베아 주교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이때 지 사바의 신심에 감명을 받은 구베아 주교는 뒷날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우리는 1793년에 지황의 신앙심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40일간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눈물을 흘리면서 견진과 고해와 성체성사를 아주 열심히 받았습니다. 그래서 북경의 교우들은 그의 신심에 감화를 받았습니다.”

1794년 초, 구베아 주교는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이에 지 사바는 주 신부와 만나 약속 장소를 정한 뒤, 각각 다른 길을 통해 국경으로 가서 상봉하였다. 그러나 감시가 심한 데다가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려야 하였으므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져야만 하였다.

지 사바는 이후 조선으로 귀국하였다가 다시 국경으로 가서 주 야고보 신부를 만났으며,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밤에, 그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 다음 윤 바오로와 함께 주 신부를 안내하여 12일 만에 한양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1765년에 태어난 최인길(崔仁吉) 마티아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이벽 세례자 요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최인철 이냐시오는 그의 동생이다. 최 마티아는 이승훈 베드로가 신앙을 전파하고자 선발한 최초의 회장들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최 마티아는 입교 초기부터 동료들과 함께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앞장섰으며, 윤 바오로가 1790년에 북경 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에는 성직자 영입 운동에 참여하였다.

한양 계동(현, 서울시 종로구 계동)에서 1795년 초에 주 야고보 신부를 맞이한 최 마티아는, 주 신부의 안전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밀고자에 의해 그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고 말았다. 다행히 교우들의 재빠른 처신으로 주 야고보 신부는 최 마티아의 집에서 빠져나와 여회장인 강완숙 골룸바의 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그에 앞서 최 마티아는, 주 야고보 신부에게 피신할 시간을 벌어주고자 자신이 신부로 위장하고 집에서 포졸들을 기다렸다. 그가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중국어를 알았으므로 이런 계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위장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체포된 지 얼마 안 있어 최 마티아의 신분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에 놀란 포졸들은 다시 주 신부의 행방을 쫓으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처럼 최 마티아는 주 신부를 안전하게 피신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곧 주 신부의 입국 경위가 밝혀지고, 그의 입국을 도운 밀사인 윤 바오로와 지 사바도 체포되고 말았다.

윤 바오로와 최 마티아와 지 사바는 체포된 날부터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이때 그들의 신앙심에서 우러나오는 굳은 인내와 결심, 그리고 지혜로운 답변은 박해자들을 당황케 하였다. 그들은 주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수없이 형벌을 가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에는 천상의 기쁨이 넘쳐 얼굴에까지 번졌다. 이제 박해자들은 더 이상 그들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때려죽이기로 결심하였다. 그 결과 윤 바오로와 지 사바와 최 마티아는 그날로 사정없이 매를 맞고 숨을 거두게 되었으니,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이었다. 당시 윤 바오로의 나이는 35세, 지 사바의 나이는 28세, 최 마티아의 나이는 30세였다. 박해자들은 비밀리에 그들의 시신을 강물에 던져 버렸다.

이후 구베아 주교는 조선의 밀사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듣고는, 윤 바오로와 그의 동료들이 순교 당시에 보여 준 용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공경하느냐?’는 질문에 용감히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모독하라고 하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참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윤유일 바오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윤지충 바오로

 

  • 가톨릭 성인 이름
    尹持忠 Paul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진사,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59-1791년 한국

 

 

윤지충 바오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없음.

 

 

윤지충 바오로 자료

윤지충(尹持忠) 바오로(Paulus)는 1759년 전라도 진산 장구동에 거주하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는 ‘우용’이며,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전주에서 순교한 윤지헌 프란치스코가 그의 동생이다.

본디 총명한 데다가 품행이 단정하였던 윤 바오로는 일찍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1783년 봄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또 이 무렵에 고종 사촌 정약용 요한 형제를 통해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되었으며, 다음해부터는 스스로 교회 서적을 구해 읽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3년 동안 교리를 공부한 그는, 1787년 인척인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윤 바오로는 어머니와 아우 윤 프란치스코, 외종사촌 권상연 야고보에게도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또 인척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자주 오가면서 널리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권상연(權尙然) 야고보는 1751년 진산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디 그는 학문에 정진해 오고 있었으나, 고종사촌인 윤지충 바오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운 뒤에는 기존의 학문을 버리고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다. 그때가 1787년 무렵이었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 바오로는 권 야고보와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려고 집 안에 있던 신주(죽은 사람의 위패)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 여름, 윤 바오로의 어머니(곧 권 야고보의 고모)가 사망하자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이는 어머니의 유언이기도 하였다.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가 신주를 불사르고, 전통 예절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소문은 얼마 안 있어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 소문은 조정에까지 전해져 그곳을 온통 소란스럽게 하였다. 그리고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해 오라’는 명령이 진산 군수에게 내려졌다.

체포령 소식을 들은 윤 바오로는 충청도 광천으로, 권 야고보는 충청도 한산으로 피신하였다. 그러자 진산 군수는 그들 대신 윤 바오로의 숙부를 감금하였고, 이러한 사실을 전해 들은 그들은 곧바로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그때가 1791년 10월 중순경이었다.

진산 군수는 먼저 그들을 달래면서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교가 진리임을 역설하면서 ‘절대로 신앙만은 버릴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여러 차례의 설득과 회유가 있었음에도 그들의 태도가 조금도 변하지 않자, 진산 군수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전주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전주에 도착한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는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하였다. 전라 감사는 그들에게서 천주교 신자들의 이름을 얻어 내려고 갖은 방법을 다 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신앙을 굳게 지키면서 교회나 교우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특히 윤 바오로는,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면서 제사의 불합리함을 조목조목 지적하였고, 이에 화가 난 감사는 그들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천주를 큰 부모로 삼았으니,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그분을 흠숭하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전주 감사는 할 수 없이, 그들에게서 최후 진술을 받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내 조정은 다시 한 번 소란스러워졌고,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형해야 한다’는 소리가 드높게 되었다. 결국 임금은 이러한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들의 처형을 허락하였다. 당시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 소리 한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사형 판결문이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는 곧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를 옥에서 끌어내 전주 남문 밖으로 끌고 갔다. 이때 윤 바오로는 마치 잔치에 나가는 사람처럼 즐거운 표정이었으며,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교리를 설명하였다. 그들은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으니, 그때가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이었다. 먼저 칼날을 받은 윤 바오로가 32세였고, 권 야고보는 40세였다.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의 친척들은 9일 만에 관장의 허락을 얻어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이때 그들은 그 시신이 조금도 썩은 흔적이 없고, 형구에 묻은 피가 방금 전에 흘린 것처럼 선명한 것을 보고는 매우 놀랐다. 이후 교우들은 여러 장의 손수건을 순교자들의 피에 적셨으며, 그 가운데 몇 조각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당시 병으로 죽어 가던 사람들이 이 손수건을 만지고 나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윤지충 바오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윤지헌 프란치스코

 

  • 가톨릭 성인 이름
    尹持憲 Franci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64-1801년 한국

 

 

윤지헌 프란치스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방지거, 윤 프란치스코, 윤프란치스코,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윤지헌 프란치스코 자료

윤지헌(尹持憲)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1764년 전라도 진산(현, 충남 금산군과 논산시 지역)에서 학문으로 이름 있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순교한 윤지충 바오로가 그의 형이다.

윤 프란치스코는 1789년에 형 윤 바오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에 앞서 윤지충 바오로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어 인척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서 읽어 보고 오랫동안 그 내용을 탐독한 끝에 신앙을 받아들였다. 윤 바오로는 1787년에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윤 바오로는 가족과 친지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아우 윤 프란치스코와 함께 열심히 교회의 가르침을 실천해 나갔다.

1791년에 형이 순교하자, 윤 프란치스코는 더 이상 고향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그는 가족을 데리고 진산을 떠나 전라도 고산의 운동(현,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런 다음 교회 서적을 베껴 읽으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고, 자신의 이름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에 입교시켰다. 또 1795년에는 고산의 운동을 방문한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성사를 받았으며, 이후에는 교회의 밀사인 황심 토마스를 북경에 파견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윤 프란치스코의 교회 활동이 관청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의 옥에 갇혔으며,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이때 그는 이미 드러난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입 밖에 내지 않았고, 다음과 같이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음을 확인해 주었다.

“평소에 좋아하던 천주교 교리를 끊지 못하였고, 고질병처럼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있으니, 오로지 만 번 죽겠다는 말씀만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 천당 지옥의 이치를 굳게 믿은 탓에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당시 박해자들은, 교회 밀사가 북경을 왕래한 이유를 알아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에 윤 프란치스코는 조정의 명에 따라 동료들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포도청과 형조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윤지헌 프란치스코는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그리고 의금부에서 마지막 문초를 받은 뒤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였으며, 다시 전주로 이송되어 1801년 10월 24일(음력 9월 17일)에 능지처참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7세였다. 그가 순교한 뒤, 고산에 갇혀 있던 아내와 가족은 모두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윤지헌 프란치스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이경도 가롤로

 

  • 가톨릭 성인 이름
    李景陶 Charle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0-1802년 한국

 

 

이경도 가롤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롤루스, 까롤로, 까롤루스, 샤를, 샤를르, 이 가롤로, 이가롤로, 찰스, 카롤로, 카롤루스, 칼.

 

 

이경도 가롤로 자료

어릴 때는 ‘오희’(五喜)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이경도(李景陶) 카롤루스(Carolus, 또는 가롤로)는 1780년 한양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충청도 연기 군수를 지냈으며, 부친 이윤하 마태오는 당대의 유명한 학자로서 외조부였던 이익의 학문을 잇고 있었다. 또 그의 어머니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에 기여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누이였다. 1802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와 1827년에 전주 옥에서 순교한 이경언 바오로는 그의 동생들이다.

이 가롤로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실천하였다. 본디 성격이 온순하고 너그러웠던 그는, 장성하면서 학문에도 재능을 보여 교회 서적들을 연구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비록 그는 어릴 때 병을 앓아 곱사등이가 되었지만, 그 자신의 신앙과 성품으로 이러한 신체적 결함을 보완하였다.

1793년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장남인 이 가롤로는 미신 행위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지혜를 발휘하여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게 장례를 치렀다. 이후, 그는 되도록 비신자들과는 어울리지 않으면서 가족이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끄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최필공 토마스, 홍재영 프로타시오 등 몇몇 교우들과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교리를 익히곤 하였다.

이 가롤로는 1797년에 어머니와 상의한 뒤, 누이인 이순이 루갈다가 전주의 유중철 요한과 동정 부부로 언약을 하고 혼인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때 그 사실을 알게 된 비신자 친척들이 그를 비난하였으나, 그는 슬기롭게 이를 극복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이 가롤로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관장의 문초 때마다 “아는 신자들은 없으며, 교회 서적은 불태워 버려 남아 있지 않다.”고 거짓으로 자백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한 다음, 처형되기 전날 옥중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어머니에게 보냈다.

“제 일생 지은 죄가 하늘까지 닿았고, 제 마음은 목석과 같아 이와 같이 뛰어난 은혜를 받으면서도 아직 눈물도 흘릴 줄을 모릅니다. 아무리 천주의 인자하심이 무한하다고는 하지만, 어찌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만일 천주께서 당신의 너그러운 손으로 저를 이끌어 주신다면, 만 번 죽는다 해도 무엇이 원통하고 무엇이 불안하겠습니까?”

이러한 편지를 남긴 이경도 가롤로는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 새남터로 끌려 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이경도 가롤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이경언 바오로

 

  • 가톨릭 성인 이름
    李景彦 Paul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2-1827년 한국

 

 

이경언 바오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이 바오로, 이바오로, 파울로, 파울루스, 폴.

 

 

이경언 바오로 자료

‘종회’ 혹은 ‘경병’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이경언(李景彦) 바오로(Paulus)는, 1792년 한양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충청도 연기 군수를 지냈으며, 부친인 이윤하 마태오는 당대의 유명한 학자로서 외조부였던 이익의 학문을 잇고 있었다. 또한 그의 어머니는 교회 창설에 기여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누이였다. 1802년 한양에서 순교한 이경도 가롤로는 그의 형이고, 1802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는 그의 누나이다.

이 바오로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가르침을 받아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실천하였다. 비록 몸은 허약하였지만 성격은 유순하면서도 강인하였고, 정신적으로도 훌륭한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신유박해 이듬해인 1802년에 형과 누나가 순교한 뒤, 그의 집안은 아주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이 바오로는 어머니와 형수와 함께 살면서 가난을 신앙으로 이겨 냈다. 또 22세 되던 해에 한 중인 집안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아내의 성질이 고약하여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모범적인 인내로 이를 극복하였다.

평소에 이 바오로는 속병이 있어 자주 고통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아무런 불평도 나타내지 않고 오히려 화평한 얼굴로 생활하였으며, 자주 성경을 읽거나 깊은 묵상에 빠지곤 하였다. 그는 언제나 냉담자를 권면하고, 교우들을 격려하며,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열중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들의 곤경을 덜어 주려고 노력하였다. 1819년에 순교한 조숙 베드로가 이러한 그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이 바오로는 이후 명도회(明道會)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학식과 재주를 이용하여 교회 서적을 베끼거나 상본을 모사하였고, 이를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북경을 오가는 밀사들에게 필요한 경비를 마련해 주느라 힘썼으며, 회장들을 양성하는 일에도 헌신하였다. 정하상 바오로 성인이 북경을 오가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준 것도 바로 그였다.

이 바오로는 언제나 마음속에 순교의 뜻을 품고 있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면서 자주 묵상하였고, 다른 교우들에게도 천주를 위해 죽음을 당할 준비를 하도록 권고하곤 하였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난 뒤, 이 바오로는 자신이 나누어 준 서적과 상본 때문에 전주 관아에 고발되었다. 이내 전주에서는 그를 체포하려고 한양에 포졸들을 파견하였다. 얼마 안 되어 체포된 그는 먼저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신앙을 고백한 다음, 조정의 명령에 따라 전주로 이송되었는데, 이후의 사실은 그 자신이 전주 옥중에서 기록한 수기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바오로는 여러 차례의 혹독한 형벌 때문에 약해지려는 마음을 끊임없이 채찍질해 가면서 순교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에게는 오직 형과 누나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는 전주 옥중에서 어머니와 가족에게, 그리고 아내에게, 그리고 명도회 회원들에게 보내는 세 통의 서한을 작성해 보냈는데, 여기에도 이러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상처의 괴로움으로 말하자면, 나의 너무나 연약한 육체만으로는 그것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천주의 은총과 성모의 도우심이 아니라면 어찌 한시인들 이를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 천주께서 지금까지 내게 무수한 은혜를 내려 주신 것으로 볼 때, 분명히 나를 저버리려고 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내가 먼저 천국에 올라가게 되면, 누구든지 이 큰 집에 올라오실 때에 내가 마중 나가 우리의 보편된 아버지께로 함께 가서 그분을 찬미할 것입니다.”

이처럼 끝까지 신앙을 증언하느라 노력하였지만, 선천적으로 약했던 이경언 바오로의 육체는 더 이상 고통을 이겨 내지 못하였다. 상처는 계속 깊어졌으며, 그는 신음 속에서 마지막 며칠을 보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1827년 6월 27일(음력 윤 5월 4일) 전주 옥중에서 하느님께 영혼을 바쳤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이경언 바오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이국승 바오로

 

  • 가톨릭 성인 이름
    李國昇 Paul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선생,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72-1801년 한국

 

 

이국승 바오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이 바오로, 이바오로, 파울로, 파울루스, 폴.

 

 

이국승 바오로 자료

‘성겸’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이국승(李國昇) 바오로(Paulus)는 충청도 음성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충주로 이주해 살았다. 호는 ‘미암’(靡庵)이다.

장성한 뒤 충주 지역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된 이 바오로는, 이 새로운 종교를 철저히 배우려고 경기도 양근 땅에서 살던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그에게서 교리를 배우고는 은총으로 마음이 움직여 즉시 교회의 본분을 지키기 시작하였다.

집으로 돌아오자 이 바오로의 스승은, 그를 불러 마음을 돌려보려고 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아직은 순교에 이를 만큼 신앙이 굳건하지는 않았다. 1795년의 을묘박해가 일어난 뒤, 충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형벌을 받던 도중에 석방된 사실에서 이를 잘 알 수 있다.

집으로 돌아온 이 바오로는,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자신의 죄를 보속하려고 전심전력을 다하였다. 또 부모가 혼인을 시키려고 하자, 가족 때문에 본분을 다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혼인을 거부하고 동정을 지키며 살기로 작정하였다. 그럼에도 부모들의 재촉은 계속되었고, 그는 이를 피하고자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그 후 이 바오로는 훈장 생활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하였다. 또 최창현 요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등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과 함께 교리를 익혔으며,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고,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만나 성사도 받았다.

이제 이 바오로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포졸들은 체포된 신자들에게서 그의 이름을 듣게 되었다. 이때부터 포졸들은 이 바오로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녔으며, 곧 그를 체포하여 포도청으로 압송하였다. 포도청으로 압송되면서도 이 바오로는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 바오로가 옥에 이르렀을 때, 마침 황해도 출신의 고광성이 배교하고 옥문을 나서려 하고 있었다. 이에 이국승 바오로는 그에게 “배교한 것은 제가 아니고, 마귀가 저를 속여 저의 입을 빌려 말한 것입니다.”라고 관장 앞에 나가 말하도록 권면하였으며, 고광성은 여기에서 힘을 얻어 순교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바오로 또한 형벌과 문초를 받는 동안 여러 차례 고광성과 같은 일을 겪어야만 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이 바오로의 진심을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그가 여러 차례 유감을 느끼도록 한 뒤에야 신앙을 굳게 증언하고, 사형 선고를 이끌어 내는 데 필요한 힘을 내려 주셨다. 이때 그는 형조에서 다음과 같이 최후 진술을 하였다.

“지난 10년 동안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이미 고질병같이 되었으니, 비록 형벌을 받아 죽는다고 할지라도 신앙을 지키는 마음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일찍이 충주에서 체포되었을 때에는 혹독한 형벌을 이기지 못해서 ‘마음을 바꾸겠다.’는 뜻으로 말하고 석방되었지만, 이는 저의 본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이국승 바오로는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에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런 다음, 며칠 후에 충청도 공주로 이송되어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순교 후, 그의 조카들이 시신을 거두어 공주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이국승 바오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이도기 바오로

 

  • 가톨릭 성인 이름
    李道起 Paul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도공,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43-1798년 한국

 

 

이도기 바오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이 바오로, 이바오로, 파울로, 파울루스, 폴.

 

 

이도기 바오로 자료

1743년 충청도 청양에서 태어난 이도기(李道起) 바오로(Paulus)는 고향에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다. 본디 그는 글을 알지 못하였지만, 하느님의 사랑과 천주교의 덕행만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후에 이 바오로는 얼마 안 되는 재산을 모두, 비신자들을 입교시키는 데 사용하였다. 또 천주교 신앙 때문에 여러 가지로 위협을 받게 되자 이곳저곳으로 피해 다니며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가족과 함께 청양을 떠나 산 너머에 있는 정산으로 이주한 뒤에, 그곳 옹기점에 터전을 잡았다.

1797년, 이 바오로의 나이 54세가 되었을 때 정사박해가 발생하였다. 그때 이 소식을 들은 인근의 한 비신자가 와서 ‘천주교인들의 두목으로 고발하겠다.’며 그를 위협하였다. 이에 겁이 난 그의 아내가 도망할 것을 권하였지만, 그는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일을 하려 하지 않았고, 신입 교우들이 자신의 행동에 걸려 넘어질 것을 염려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그해 6월 8일, 이 바오로가 집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에, 한 떼의 포졸들이 나타나 그를 체포하였다. 이내 포졸들은 십자고상과 교회 서적 몇 권을 찾아낸 뒤, 그에게 천주교 신자들이 있는 곳을 대라고 하면서 매질을 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산 관아로 끌려간 바오로는 자주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때때로 포졸들은 그를 장터로 끌고 나가 모욕을 주거나 매질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으며, 배교를 강요하는 관장 앞에서 용감하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곤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바오로는 자주 굶주렸고, 혹독한 추위로 고통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앉거나 눕거나 끊임없이 천주를 생각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라는 천사의 말을 전해 주는 목소리를 듣고는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럭저럭 1797년이 지나고, 1798년 새해가 밝았다. 이 바오로는 다시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하루는 관장이 벼슬을 주겠다고 회유하자, 그는 “정산 고을을 전부 주신다 해도 천주를 배반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마음이 약해질 것을 두려워하여 옥으로 찾아오는 아내와 교우들이 물리쳤다.

6월 10일 아침, 포졸들이 와서 사형 집행일이 되었다고 알려 주자, 이 바오로는 기쁨에 넘쳐 어찌할 줄을 몰라하였다. 이윽고 그는 포졸들에게 이끌려 정산 형장으로 갔고, 그곳에서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주변에 모인 비신자들까지 이 형벌에 가세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배교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머리를 쳐들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성모 마리아님, 하례하나이다.”라고 외쳤다.

이 바오로는 여러 차례 실신하였고, 다리가 부러질 때까지 매를 맞았다. 그리고 버려진 채로 있게 되었다. 이틀 후 저녁 무렵, 관장은 그의 죽음이 궁금하였는지 ‘가서 살펴보고 죽지 않았으면 아주 죽여 버리고 오라’고 명령하였다. 포졸들은 이 명령에 따라 그의 몸을 잔인하게 짓이겨 버렸다.

이제 이도기 바오로의 몸은 더 이상 사람 꼴이 아니었으니, 그때가 1798년 7월 24일(음력 6월 12일)로, 순교 당시 그의 나이는 55세였다. 이후 그의 시신은 관장의 명에 따라 묻혔는데, 7-8일 뒤에 정산에서 조금 떨어져 사는 교우들이 그 시신을 비밀리에 찾아다가 그들의 마을에 안장하였다.

이도기 바오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이보현 프란치스코

 

  • 가톨릭 성인 이름
    李步玄 Fransi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73-1800년 한국

 

 

이보현 프란치스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방지거, 이 프란치스코, 이프란치스코,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이보현 프란치스코 자료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1773년 충청도 덕산 황모실(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의 부유한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친을 여의었다. 그는 조금 고집스러운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는 나이가 된 후에는 어떻게나 난폭하였던지, 아무도 그를 억제할 수 없었다.

20세가 조금 넘었을 때, 이 프란치스코는 고향 인근에 살던 황심 토마스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황심은 훗날 북경을 왕래한 교회의 밀사로 그의 아내는 바로 이 프란치스코의 누이였다.

진리를 깨닫고 얼마 안 되어, 이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소행을 고치고 본성을 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혼인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지만, 모친의 권유에 순종하려고 혼인을 하였다. 그런 다음 교리를 자유롭게 실천하고자 황 토마스와 함께 충청도 연산으로 이주해 살았고, 1795년에는 주 야고보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셔다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교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이 프란치스코의 열심은 날로 더해 갔다. 그는 보속과 고행에 열중한 나머지 산중에 들어가 힘들게 생활한 적도 있었다.

1797년의 정사박해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자, 이 프란치스코는 박해를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가족과 동네 교우들을 격려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는 날마다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를 그들에게 들려주면서 “신앙을 고백하고 천국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마라.”고 권면하였다.

박해가 시작된 지 한두 해가 지난 어느 날, 이 프란치스코는 머지 않아 자신에게도 위험이 닥쳐오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 술을 대접하면서 ‘이것이 마지막 잔치’라고 말하였다. 과연 이틀 뒤에 포졸들이 연산 땅에 나타났고, 그는 곧바로 체포되어 그곳 관아로 압송되었다.

연산 관장은 포졸들에게 끌려온 이 프란치스코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확인한 뒤, 교우들과 교회 서적이 있는 곳을 대도록 하면서 배교를 종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배교를 거부하고, “만물의 대군(大君)이신 천주에 대해 말한 책을 관장에게 맡길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화가 난 관장은 포졸들을 시켜 그에게 혹독한 매질을 하게 한 다음 옥에 가두었다.

얼마 뒤 이 프란치스코는 충청 감사의 명에 따라, 그의 고향 덕산을 관할하는 해미 관장에게 이송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형벌을 받으면서도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사람들의 기원이 태초에 그들을 창조하신 천주께 있으니, 어찌 그분을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나절 넘게 이 프란치스코는 갖은 고문을 당하였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옥으로 끌려간 뒤에도 그는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고, 함께 갇힌 사람들을 격려하였다.

해미 관장은 할 수 없이 감사에게 이 프란치스코의 처분을 문의하였다. 그러자 감사는 ‘아무것도 자백하지 않으면 매를 쳐서 죽이라.’는 명령을 내려보냈고, 이에 따라 그는 다시 한 번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런 다음 관장이 사형 선고문을 내밀자, 기쁜 표정으로 거기에 서명하였다.

다음 날 아침, 이 프란치스코는 장터로 끌려 나가 혹독하게 매를 맞았다. 그럼에도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망나니들은 그를 넘어뜨린 뒤, 몽둥이로 불두덩을 짓찧어 죽게 하였다. 그때가 1800년 1월 9일(음력 1799년 12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며칠 뒤에 교우들이 그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는데, 그토록 많은 형벌을 받았는데도 얼굴에는 웃음을 띠고 있었으며, 이를 직접 목격한 비신자들 여러 명이 입교하였다고 한다.

이보현 프란치스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이양등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李陽登 Peter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회장, 상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68년 한국

 

 

이양등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이 베드로, 이베드로,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이양등 베드로 자료

이양등(李陽登) 베드로(Petrus)는 경상도 울산의 죽령 교우촌(현, 경남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회장이었다. 본디 성품이 선량하였던 그는 꿀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열심히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하였다.

이 베드로는, 1866년의 병인박해를 피해 죽령 교우촌으로 이주해 온 허인백 야고보와 김종륜 루카를 만나 서로 권면해 가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때까지도 이곳은 비교적 안전하였다. 그러나 2년 뒤인 1868년에 포졸들이 마침내 죽령 교우촌을 찾아내게 되었고, 이 베드로는 얼마 되지 않아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경주로 압송되어 가는 동안 이 베드로는 동료들의 권면을 잘 받아들여 순교를 결심하였다. 실제로 그는 경주 진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고 굳건하게 신앙을 증언하였다.

이어 이 베드로는 동료들과 함께 울산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당하고 신앙을 한결같이 증언하였기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중구 남외동)로 끌려 나가 김종륜 루카, 허인백 야고보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이었다. 순교 당시에 이양등 베드로는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하며, 그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허인백의 야고보의 아내 박조예에 의해 거두어져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이양등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이일언 욥

 

  • 가톨릭 성인 이름
    李日彦 Job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67-1839년 한국

 

 

이일언 욥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이 욥, 이욥.

 

 

이일언 욥 자료

충청도 홍주의 대벌 마을에서 태어난 이일언(李日彦) 욥은, 1801년 이전에 아버지 점손(占孫)에게서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의 관명(冠名)은 태문(太文)이었다.

이 욥은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경상도 안의로 유배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관장의 눈 밖에 나서 다시 옥에 갇혔고, 물도 얻어먹지 못하는 고통을 겪어야만 하였다. 10년을 갇혀 있는 동안 그는 갖은 모욕과 학대를 받았으나, 묵묵히 참고 따름으로써 참다운 신자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는 관장의 허락 아래 개인 집에서 연금 생활을 하게 되었다.

1815년부터 이 욥은 안의로 찾아온 아내와 함께 생활하였다. 1826년 5월에는 연금에서 풀려나 전라도 임실의 대판이라는 곳으로 이주하였으며, 여기서 그는 교리를 실천하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듬해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이 욥의 아내는 그에게 피신을 권유하였으나, 그는 이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전에 순교하지 못한 것이 분해 죽겠다. 그런데 지금은 이처럼 궁벽한 곳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천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기회가 없으니 기막힌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탄식하였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났을 때에 전주 포졸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이 욥을 체포하였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바라던 뜻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고는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따라나섰다.

전주 관장은 이 욥을 처음 문초하는 과정에서 그의 전력을 알아내고는 혹독하게 매질을 시켰다. 그는 비록 키가 작고 몸집도 보잘것없었지만, 신앙의 인내로 형벌을 참아 내 보는 이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그곳에 있던 박해자들은 “우리가 그의 외모를 보고 잘못 판단했군. 이 사람은 정말 천주교인들의 두목이 분명하이.”라고 수군거렸다.

문초와 형벌이 며칠 동안 계속되었지만, 이 욥의 신앙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자 관장은 사형 선고를 내린 다음 그를 옥에 가두어 두도록 하였다.

이후, 이일언 욥은 김대권 베드로 등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동안 그는 세 번이나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면서 한결같이 목숨 건지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임금의 명으로 전주 장터(숲정이)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72세였다.

처형 장소로 가는 동안, 이일언 욥은 자식들이 울면서 따라오자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옥중에서 신음해 오다가 오늘 마침내 천국으로 떠나는 것이다. 왜들 우느냐? 오히려 나의 행운을 기뻐하여라. 너희 아버지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을 기뻐하고, 너희들도 훌륭한 교우가 되거라.”

이일언 욥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이재행 안드레아

 

  • 가톨릭 성인 이름
    李在行 Andrew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76-1839년 한국

 

 

이재행 안드레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드레아스, 앙드레, 앤드루, 앤드류, 이 안드레아, 이안드레아.

 

 

이재행 안드레아 자료

‘종일’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이재행(李在行) 안드레아(Andreas)는,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20세가 넘어서야 천주교 교리를 듣고 입교하였다. 본디 성격이 꼿꼿하고 관대하여 존경을 받았던 그는 신앙을 받아들이자마자 성실하게 교리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고향에서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산골에서 은거해 살았다.

이후 이 안드레아는 오랫동안 이곳저곳으로 이주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아주 가난하게 되었지만, 언제나 인내심과 박애 정신을 보여 주었으며, 가족들이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그의 기도와 독서 생활, 부지런함과 덕행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1827년에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이 안드레아는 가족을 모아 놓고 주님의 뜻에 따라 순교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면서 격려하였다. 포졸들이 그의 집에 들이닥친 것은 경상도 순흥의 곰직이(현,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에서 살고 있을 때였다. 포졸들이 쳐들어오자 그는 기꺼이 그들을 따라 안동으로 끌려갔다.

안동 관장은 이 안드레아가 끌려오자 천주교 신자임을 확인한 뒤, 혹독한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는 꿋꿋한 목소리로 이를 거부하고는 다음과 같이 신앙을 증언하였다.

“천주는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요, 모든 사람을 기르시는 가장 높은 아버지이십니다. 착한 일에는 상을 주고 악한 것을 벌하시는 이도 그분이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분을 흠숭해야 할 본분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저도 그분을 흠숭하는 것입니다.”

안동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이 안드레아는 대구로 이송되었고, 여기에서 다시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의 굳은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감사가 여러 차례 달콤한 말로 유혹하였지만, 그는 결코 천주교 신앙에 대한 믿음을 바꾸지 않았다.

이후 이 안드레아는 동료들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12년 동안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 다시 한 번 배교 여부를 묻는 문초가 있었는데, 이때 형조에서 임금에게 올린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재행은 여러 해 동안 천주교 교리를 외우고 익혔으며, 죽기로 맹세하고 뉘우치지 않으므로 법에 따라 처단하려고 합니다.”

당시까지 대구 옥에 갇혀 있던 신자는 이재행 안드레아와 김사건 안드레아, 박사의 안드레아 등이었다. 그들은 임금이 사형 집행을 윤허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매우 기뻐하면서, 자신들이 쓰던 물건과 옷을 다른 죄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재행 안드레아는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마침내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때 이를 바라보는 죄수와 옥졸들이 모두 슬픔을 감추지 못하였는데, 이는 오랫동안 그가 보여 준 모범적인 모습 때문이었다. 순교 당시 이 안드레아의 나이는 63세였다. 이후 포졸들은 그의 시신을 수습한 뒤 예를 다하여 장사를 지내 주었으며, 신자들은 오랫동안 그를 특별히 공경하였다.

이재행 안드레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이정식 요한

 

  • 가톨릭 성인 이름
    李廷植 John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회장, 장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5-1868년 한국

 

 

이정식 요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 요한, 이반, 이요한,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이정식 요한 자료

이정식(李廷植) 요한(Joannes)은 경상도 동래 북문 밖에 살던 사람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무과에 급제한 뒤 동래의 장교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활 쏘는 법을 가르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나이 59세 때에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한 뒤로는 첩을 내보내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 요한은 이후 가족을 열심히 권면하여 입교시켰으며, 누구보다 계명을 지키는 일에 열심이었다. 화려한 의복을 피하고, 항상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애긍에 힘쓰면서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한 작은 방을 만들어 십자고상과 상본을 걸어 놓고 묵상과 교리 공부에 열중하였다.

이러한 열심 때문에 이 요한은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그는 언제나 자신의 본분을 다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기장과 경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울산 수박골로 피신하여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1868년 동래 교우들의 문초 과정에서 이 요한 회장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동래 포졸들은 그가 사는 곳을 수소문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는 그의 거주지를 찾아내 그곳에 있던 교우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그때 이 요한의 아들 이월주 프란치스코와 조카인 이삼근 베드로는 이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스스로 포졸들 앞으로 나와 자수하였다.

이내 동래로 압송된 이 요한 회장은 그곳에서 대자 양재현 마르티노를 만나 서로 위로하며 신앙을 굳게 지키자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문초를 받게 되자, 이 요한은 천주교 신자임을 분명히 하고는 많은 교우들을 가르쳤다는 것도 시인하였다. 그러나 교우들이 사는 곳만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또한 형벌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하였지만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이 요한과 동료들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며 47일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고통을 당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신앙을 버림으로써 석방된 사람은 없었다.

동래 관장은 마침내 사형을 결정하였다. 그런 다음 옥에 있는 신자들을 끌어내어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로 압송하였다. 이때 사형을 맡은 군사들이 부자(父子)를 한날에 죽이는 것을 꺼려했지만, 동래 관장은 동시에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요한은 1868년 9월 참수형을 당하기에 앞서 삼종 기도를 바치고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에 칼을 받았다. 당시 이정식 요한의 나이는 73세였다. 그의 시신은 가족에 의해 거두어져 사형장 인근에 안장되었다.

이정식 요한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8. 이중배 마르티노

 

  • 가톨릭 성인 이름
    李中培 Martin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51?-1801년 한국

 

 

이중배 마르티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띠노, 마르띠누스, 마르티누스, 마틴, 말딩, 이 마르티노, 이마르티노.

 

 

이중배 마르티노 자료

이중배(李中培) 마르티누스(Martinus, 또는 마르티노)는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 출신으로, 본디 용기와 힘이 남보다 뛰어나고 호쾌한 기개가 있었다. 반면에 그에게는 난폭하고 성을 잘 내는 성격도 있었는데, 이러한 성격은 그가 천주교에 입교한 뒤로 완전히 변하기 시작하였다.

이 마르티노가 처음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된 것은 1797년이었다. 이때 그는 사촌인 원경도 요한과 함께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김건순 요사팟에게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는 곧바로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 다음 부친과 아내에게 교리를 전하였고, 이후로는 교회의 지시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특히 그는 누가 알게 되더라도 상관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하였는데, 그의 용감한 성격이 이를 뒷받침해 주었다.

1800년의 예수 부활 대축일에 이 마르티노는 사촌인 원 요한과 함께 동료의 집으로 가서 부활 삼종 기도를 바치고, 성가를 부르며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에는 천주교 신앙을 뿌리 뽑으려는 마음을 갖고 있던 여주의 관장이 포졸들을 풀어 은밀히 신자들을 찾고 있었다. 바로 그때 천주교 신자들이 모임을 갖고 있다는 밀고가 들어왔고, 관장은 곧장 포졸들을 그곳으로 보내 신자들을 모두 체포하도록 하였다.

관청에 끌려가자마자 이 마르티노 일행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그들은 자주 이 마르티노의 굳센 용기와 격려로 힘을 얻어 굳건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 마르티노의 옥중 생활은 6개월이나 계속되었다. 그동안 그는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으나 결코 신앙이 흔들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함께 있는 신자들이 굳건하게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권면하였다. 또 그는 사촌인 원 요한의 늙은 여종이 옥으로 찾아와 그의 마음을 되돌리려고 하자 엄하게 꾸짖어 보냈으며, 심지어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아버지를 설득하였다.

“아버님, 저는 효의 근본을 잊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님도 저와 같은 신자이시니, 부자의 정을 넘어 더 높은 곳에서 이 사실을 바라본다면, 인정에 끌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배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본디 이 마르티노는 약간의 의술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옥중에서 보여준 그의 의술은, 평소 같아서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적 같은 효험을 나타냈다고 한다. 목격자들은 한결같이 병을 치료받으려고 찾아온 사람들로 옥이 장터 같을 정도였고, 모든 이가 그 효험에 놀라워했다고 전하였다.

1800년 10월에 이 마르티노와 동료들은 경기 감영으로 이송되어 다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에 신유박해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자, 경기 감사는 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을 다시 끌어내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 마르티노는 이에 굴하지 않았으며, 동료들과 함께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서로 용기를 북돋워 나갔다.

감사는 마침내 최후 진술을 받아서 조정에 보고하였고, 조정에서는 ‘고향으로 돌려보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이 마르티노는 동료들과 함께 여주로 압송되어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50세가량이었다.

이에 앞서 경기 감사가 조정에 올린 이중배 마르티노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천주교에 깊이 빠져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없앴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합니다.”

이중배 마르티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9. 이태권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李太權 Peter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2-1839년 한국

 

 

이태권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이 베드로, 이베드로,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이태권 베드로 자료

‘승화’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이태권(李太權) 베드로(Petrus)는, 충청도 홍주의 배울에 살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전라도로 유배를 갔다가 3년 뒤에 그곳에서 사망한 이무명은 그의 아버지이고, 1812년 홍주에서 순교한 이여삼 바오로는 그의 삼촌이다.

이 베드로는, 아홉 살 때인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석방된 적이 있으며, 1801년의 박해 때에는 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형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또다시 석방되었다. 또 1802년에도 삼촌들과 함께 체포된 적이 있었다.

이처럼 이 베드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심약한 마음을 나타냈지만, 석방된 뒤에는 천주교의 본분을 계속해서 지켜 나갔다. 또 교회 서적을 베껴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거나 이웃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어머니를 모시고 가족과 함께 전라도 지역으로 이주해서 살던 그는, 1827년에 다시 한 번 박해를 당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려고 하였으나, 가족을 남겨 두고 떠날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천주의 명을 기다리기로 결심하고 동생만을 피신시켰다.

과연 얼마 뒤에 포졸들은, 이 베드로가 살고 있는 마을에 나타났고, 그는 이내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처음에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교회 서적을 바치고 교우들이 있는 곳을 말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고는 아무것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이후로는 혹독한 형벌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굳게 지켰다. 그러자 전주 감사는 “그를 도저히 살려둘 수 없다.”고 하면서 옥에 가두도록 명령하였다.

이 베드로는, 김대권 베드로, 이일언 욥 등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동안 그는 세 번이나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면서 한결같이 목숨 건지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 때에, 임금의 명으로 전주 장터(숲정이)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7세였다.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이태권 베드로는 성 샤스탕(St. J. Chastan, 鄭) 신부의 명에 따라 옥중 수기를 남겼다. 한편 사형 판결이 있기 전에 형조에서 임금에게 올린 그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태권은 밤낮으로 천주교에 깊이 빠져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를 받들었으니, 법에 따라 처단하려고 합니다.”

이태권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0. 이현 안토니오

 

  • 가톨릭 성인 이름
    李鉉 Anthony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1년 한국

 

 

이현 안토니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이 안토니오, 이안토니오.

 

 

이현 안토니오 자료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이현(李鉉) 안토니우스(Antonius, 또는 안토니오)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어 교회 서적을 얻어 보고 천주교 신앙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삼촌 이희영 루카가 김건순 요사팟의 집에서 살게 되자 자주 그곳에 갔으며, 1797년 가을부터 김건순 요사팟에게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 안토니오는 점차 천주교의 교리가 진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한양으로 올라가 홍필주 필립보의 집을 찾아갔고, 이곳에서 교리를 더 공부한 뒤에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런 다음 정광수 바르나바, 최필제 베드로, 김종교 프란치스코 등과 교류하면서 교리를 실천하였으며, 기도 모임에도 열심히 참여하였다.

그 후 이 안토니오는 같은 교우인 홍익만 안토니오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이로써 홍필주 필립보와는 동서 사이가 되었다. 1800년 겨울에 그는 양친이 사망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이 안토니오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이내 포도청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았다. 이에 앞서 그의 삼촌 이희영 루카도 체포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사형을 당하였다.

문초가 시작되자 이 안토니오는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계속 문초와 형벌이 가해지자, 잠시 마음이 약해져 ‘신앙을 버리고 마음을 고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교우들을 밀고하지는 않았다.

이후 형조로 이송된 이 안토니오는 포도청에서의 잘못을 깊게 뉘우쳤다. 그러고는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신앙을 굳게 지켜 순교하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하였다. 그러므로 박해자들이 아무리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처럼 굳게 신앙을 지킨 다음, 이현 안토니오는 함께 갇혀 있던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의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이었다. 그가 사형 판결을 받기 전에 말한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다.

“저는 4년 전부터 동료들과 함께 교회 서적을 읽으면서 여기에 깊이 빠졌습니다. …… 여러 해 동안 천주교에 빠져 이를 믿어 왔으니, 이제 아무리 형벌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신앙을 믿는 마음을 바꾸지는 않겠습니다.”

이현 안토니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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