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세례명/세례명 이름 찾기

마리아 여자세례명 45인 목록

pieonane 2022. 12. 27.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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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는 익숙하고 사랑스러운 세례명이에요. 예수님의 어머니 이름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어떤 자매는 사운드 오브 뮤직 영화 여자 주인공 이름이 마리아이기 때문에 세례명을 마리아로 하려고 했었대요.

여자세례명 마리아는 메리, 미르얌, 미리암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여자세례명 마리아 45인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마리아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마리아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본받고 싶은 세례명 찾기

마리아
천주교 여자세례명
45인 목록

 

 

 

 

마리아 여자세례명 목록

 

  1. 마리아 (1월 1일)

  2. 마리아 만치니 (1월 30일)

  3. 마리아 데 마티아스 (2월 4일)

  4. 마리아 에우제니아 (예수의) (3월 10일)

  5. 마리아 요세파 (예수 성심의) (3월 20일)

  6. 마리아 마말라 (3월 31일)

  7. 마리아 (4월 2일)

  8. 마리아 크레센시아 회스 (4월 5일)

  9. 마리아 아순타 팔로타 (4월 7일)

  10. 마리아 베르나데트 수비루 (4월 16일)

  11. 마리아 (강생의) (4월 18일)

  12. 마리아 (4월 24일)

  13. 마리아 에우프라시아 펠레티에 (4월 24일)

  14.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 (5월 14일)

  15. 마리아 막달레나 알브리치 (5월 15일)

  16. 마리아 막달레나 (5월 25일)

  17. 마리아 안나 (5월 26일)

  18. 이성례 마리아 (5월 29일)

  19. 마리아 로사 몰라스 이 바베 (6월 11일)

  20. 마리아 (6월 23일)

  21. 마리아 (6월 29일)

  22. 마리아 고레티 (7월 6일)

  23. 마리아 막달레나 포스텔 (7월 16일)

  24. 마리아 막달레나 (7월 22일)

  25. 마리아 (7월 29일)

  26. 마리아 (8월 15일)

  27. 마리아 (8월 21일)

  28. 마리아 미카엘라 (8월 24일)

  29. 마리아 데 라 카베사 (9월 9일)

  30. 마리아 데 세르벨리온 (9월 19일)

  31. 박큰아기 마리아 (9월 20일)

  32. 원귀임 마리아 (9월 20일)

  33. 이연희 마리아 (9월 20일)

  34. 이인덕 마리아 (9월 20일)

  35. 마리아 요세파 로셀로 (10월 3일)

  36. 마리아 프란치스카 (10월 6일)

  37. 마리아 솔레다드 (10월 11일)

  38. 마리아 마르가리타 듀빌 (10월 16일)

  39. 마리아 (11월 1일)

  40. 마리아 포르투나타 비티 (11월 20일)

  41. 마리아 (11월 24일)

  42. 마리아 (12월 2일)

  43. 마리아 카르멘 살례스 (12월 6일)

  44. 마리아 마라비야스 데 헤수스 (12월 11일)

  45. 마리아 크로치피사 디 로사 (12월 15일)

 

천주교 여자세례명 마리아

 

 

1. 마리아

 

  • 세례명 축일
    01월 01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 신분과 직업
    예수의 어머니마리아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

 

 

마리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르멜라, 나탈리아, 돌로로사, 로사리아, 로즈마리, 릴리안, 마리비따, 마리비타, 마리비타, 메리, 미리암, 스텔라, 아순타, 아씀다, 안눈치아따, 임마꼴라따, 첼리나.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이야기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us)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Maria)에 대해 성경은 극히 적은 내용만을 전해주고 있다. 신약성경의 복음서 안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루카 1-2장), 공생활 중 카나의 혼인 잔치(요한 2,1-12)와 예수님의 참가족 이야기(마르 3,31-35),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처형되시는 고통의 순간(요한 19,17-27)에 잠깐 등장한다. 이어서 사도행전 1장 14절에서 제자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는 마리아에 대한 언급이 잠시 나온다.

이렇듯 성경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은 어머니로서, 때로는 하느님의 뜻을 다 알아듣지는 못해도 묵묵히 믿고 따르는 참된 신앙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웃의 어려움을 알아보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고, 제자들을 돌보고 함께 기도하는 자상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성경 안에서 마리아에 대한 언급이 적은 것은 성경의 주된 관심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과 그분의 수난과 부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카와 마태오 복음서의 기록을 통해 보면 마리아는 다윗 가문의 요셉(Josephus, 3월 19일)과 약혼한 처녀였고, 천사 가브리엘(Gabriel)의 방문을 통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구세주,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리라는 예고를 들었다. 그 놀라운 상황 속에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여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응답으로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었다.

마태오 복음에 따르면 성 요셉 또한 꿈에서 천사로부터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라는 말을 듣고 즉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마리아와 요셉은 호적 등록을 위해 유다 지방 베들레헴에 갔다가 그곳의 한 마구간에서 예수를 낳았고, 목자들과 동방 박사들의 방문을 받았다.

율법에 따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봉헌하면서 예언자 성 시메온(Simeon, 10월 8일)과 성녀 한나(Anna, 9월 1일)를 만나 축복과 동시에 장차 마리아가 겪게 될 고통에 대한 예언을 듣기도 했다.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 갔다가 헤로데가 죽은 뒤 천사의 명으로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으로 돌아가 살았다.

마리아의 출생과 가족 관계에 대해서는 170-180년경에 쓰여진 “야고보 원복음서”(Protoevangelium Jacobi)에 대부분 의존하고 있다. 야고보 원복음서는 비록 교회에서 위경(Apocrypha)으로 간주하지만, 마리아의 부모와 성장 과정 등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실제 이 책은 초대교회에 널리 퍼져 있었던 작품일 뿐만 아니라, 마리아의 어린 시절을 다루고 있어 마리아에 대한 공경에 큰 역할을 했다. 그에 따르면, 마리아의 아버지인 성 요아킴(Joachim, 7월 26일)은 부유하고 이스라엘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인 성녀 안나(Anna, 7월 26일)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이들에게 흠이라고는 결혼한 지 오래되었으나 아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아이가 없다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상태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 요아킴은 단식하며 하느님께 기도하고자 광야로 갔고, 집에 남은 성녀 안나 또한 주님 앞에서 울며 탄식 기도를 바쳤다. 그들의 간절한 기도는 곧바로 응답을 받았다. 한 천사가 성녀 안나에게 나타나 그가 잉태하여 낳은 아이는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이라고 예고해 주었다.

이에 성녀 안나는 그 아이를 주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했다. 광야에서 기도하던 성 요아킴 역시 이와 비슷한 환시를 보고는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는 딸을 낳았고, 안나는 아기에게 마리아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마리아가 세 살이 되었을 때,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는 하느님께 약속한 대로 마리아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려가 그곳에서 양육되도록 맡겼다고 한다.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성자 다음으로 모든 천사와 사람들 위에 들어 높임을 받으신 성모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한 지극히 거룩한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교회에서 특별한 공경을 받아왔다.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은 온갖 위험과 아쉬움 중에 성모 마리아의 보호를 청하며 전구 기도를 바쳐왔는데, 이미 3세기 중엽부터 교회 공동체가 사용한 ‘성모님께 보호를 청하는 기도’(sub tuum praesidium, 일을 마치고 바치는 기도)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천주의 성모님, 당신의 보호에 저희를 맡기오니 어려울 때에 저희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마시고 항상 모든 위험에서 저희를 구하소서. 영화롭고 복되신 동정녀시여.” 431년 에페소 공의회는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 후 성모 마리아에 대한 교회 공동체의 공경과 신심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다.

교회 안에 언제나 있었던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이 비록 온전히 독특한 것이기는 하나,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 성자께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받으시는 흠숭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오히려 그 흠숭을 최대한 도와준다. 교회는 하느님의 어머니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신심을 건전한 정통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 시대와 장소의 상황에 따라 또 신자들의 품성과 기질에 따라 승인해왔다.

성모 신심은 어머니께서 존경을 받으실 때 그 아드님, 곧 만물이 그분을 위하여 있고(콜로 1,15-16 참조)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기꺼이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신”(콜로 1,19) 성자께서 바르게 이해되고 사랑과 영광을 받으시게 하며 그분의 계명이 준수되게 한다(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66항 참조). 그래서 교회는 성모 마리아와 관련해 네 가지 믿을 교리를 가르치고 있는데,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마리아가 그것이다.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주요 축일은 다음과 같다 :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1월 1일)

주님 봉헌 축일(2월 2일)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2월 11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월 25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5월 31일)

카르멜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7월 16일)

성모 대성전 봉헌 기념일(8월 5일)

성모 승천 대축일(8월 15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8월 22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9월 8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9월 15일)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10월 7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11월 21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12월 8일)

마리아를 세례명으로 선택한 경우 축일은 위의 날짜 중에서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8월 15일과 1월 1일을 주로 선택한다. 그리고 마리아라는 이름뿐만 아니라 의미상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거나 성모와 관련된 여러 명칭과 애칭들 역시 세례명으로 사용한다.

알림 또는 고지(告知, Annuntiatio)에서 유래해 주님 탄생 예고의 성모(성모영보)를 뜻하는 안눈치아타(Annunciata),

장미(Rose)와 마리아(Maria)를 합친 로즈마리(Rosemary, Rose Marie),

카르멜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서 나온 카르멜라(Carmela) 또는 카르멘(Carmen),

성모 승천(Assumptio Mariae)의 의미를 지닌 아숨타(Assumpta) 또는 아순타(Assunta),

하늘(Caelum)에서 유래하며 하늘의 모후(Regina Caeli)이신 성모를 상징하는 첼리나(Celina) 또는 레지나(Regina),

망망대해에서 길잡이가 되고 우리 삶에 희망을 주는 바다의 별(Stella Maris)과 같은 성모를 뜻하는 마리 스텔라(Marie Stella) 또는 스텔라(Stella),

탄생(Nativitas, Nativity)에서 유래해 성모 탄생을 뜻하는 나탈리아(Natalia) 또는 나탈리(Natalie),

고통의 성모(Mater dolorosa)에서 나온 돌로로사(Dolorasa),

묵주 기도(Rosarium, Rosary)의 성모에서 나온 로사리아(Rosaria) 또는 로살리아(Rosalia),

순결하고 고귀한 의미를 지닌 백합(Lily) 같은 성모를 뜻하는 릴리안(Lilian 또는 Lillian),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Immaculata Conceptio)에서 나와 원죄 없이 잉태되신(무염시태) 성모를 뜻하는 임마쿨라타(Immaculata) 또는 임마콜라타(Immacolata) 등이 있다.

이상과 같은 이름을 세례명으로 사용할 경우 축일은 성모 마리아의 여러 축일 중에서 자유롭게 선택하거나 모든 성인 대축일(11월 1일)을 사용할 수 있다. 성모 마리아의 여러 축일 중에서 선택할 경우 가능한 이름의 의미와 잘 어울리는 날로 축일을 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안눈치아타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인 3월 25일, 로즈마리는 계절적으로 적합한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인 5월 31일, 카르멜라 또는 카르멘은 카르멜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7월 16일, 아숨타 또는 아순타와 마리 스텔라 또는 스텔라는 성모 승천 대축일인 8월 15일, 첼리나 또는 레지나는 성모 승천 대축일인 8월 15일 또는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인 8월 22일, 나탈리아 또는 나탈리는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인 9월 8일, 돌로로사는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인 9월 15일, 로사리아 또는 로살리아는 묵주 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10월 7일, 릴리안과 임마쿨라타 또는 임마콜라타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인 12월 8일을 축일로 선택할 수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마리아 만치니

 

  • 세례명 축일
    01월 30일

  • 호칭 구분
    복녀 마리아 만치니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Mancini

  • 신분과 직업
    과부, 환시자 마리아 만치니

  • 활동 연도와 지역
    1431년 피사

 

 

마리아 만치니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까따리나, 만치니, 메리, 미르얌, 미리암, 카타리나, 캐서린.

 

 

마리아 만치니 이야기

카타리나 만치니(Catharina Mancini)는 피사의 귀족가문 출신으로 이탈리아 내에서 정치적 격동이 소용돌이 칠 당시에 태어났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환시와 기적적인 일로 유명했다.

다섯 살 때 그녀는 환시 중에 시민의 지도자 중 한 명인 복자 베드로 감바코르타(Petrus Gambacorta, 6월 17일)가 피사의 한 저택 지하 감옥에서 고문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간절히 기도했을 때 그를 묶었던 줄이 끊어져 풀려났다고 한다. 그때 성모 마리아가 이 어린 소녀에게 그 남자가 언젠가 그녀의 후원자가 될 것이니 매일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했다. 

카타리나 만치니는 결혼보다는 수도생활을 원했으나 부모의 뜻에 순명해 12살의 나이로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16세에 남편을 잃고 어쩔 수 없이 다시 결혼을 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25세의 나이에 두 번째 남편과 자녀를 모두 잃고 기도와 애덕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그녀는 엄격한 일정대로 기도와 선행, 단식과 금욕을 실천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집을 병원으로 개조해서 병들고 가난한 이들을 데려와 마치 주님을 섬기듯이 돌보았다.

그 당시 시에나(Siena)의 성녀 카타리나(4월 29일)가 피사를 방문해서 그녀와 함께 거룩한 우정을 맺었다. 카타리나 만치니는 성녀 카타리나의 권유로 도미니코회 재속회원이 되었다. 그러면서 마리아(Maria)라는 이름을 받았다. 

마리아 만치니는 복자 베드로 감바코르타의 누이동생인 복녀 클라라 감바코르타(Clara Gambacorta, 4월 17일)와 다른 몇 명의 회원들과 함께 더욱 엄격한 수도생활을 하였다. 그러면서 새롭고 더욱 엄격한 수도원을 설립하게 되는데, 복자 베드로 감바코르타가 그것을 지어주었다. 이로써 그가 미래에 그녀의 후원자가 될 것이라는 동정 마리아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마리아 만치니는 그녀의 친구인 복녀 클라라 감바코르타가 선종한 후 원장으로서 죽을 때까지 정의롭고 거룩하게 산타 크로체(Santa Croce) 수녀원을 운영하였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855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마리아 데 마티아스

 

  • 세례명 축일
    02월 04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데 마티아스

  • 가톨릭 성인 이름
    Maria de Mattias

  • 신분과 직업
    설립자, 수녀원장 마리아 데 마티아스

  • 활동 연도와 지역
    1805-1866년

 

 

마리아 데 마티아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띠아스, 메리, 미르얌, 미리암.

 

 

마리아 데 마티아스 이야기

성녀 마리아 데 마티아스(Maria de Mattias)는 1805년 2월 4일 지리적으로 이탈리아의 프로시노네(Frosinone) 지방에 위치한 교황령의 최남단 마을인 발레코르사(Vallecorsa)에서 태어나 그날로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신심 깊은 가정에서 아버지 조반니 데 마티아스(Giovanni de Mattias)와 어머니 오타비아 데 안젤리스(Ottavia de Angelis)의 네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녀는 매우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읽어주는 성경 이야기를 듣고 인류 구원을 위해 희생양이 되신 예수님께 대한 위대한 사랑을 키워갔다. 비록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여성이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그녀는 스스로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신앙의 진리뿐만 아니라 성경의 일화와 인물들에 대해 배우고 내면화시킨 이 모든 일들은 발레코르사와 그 주변 지역이 무질서와 혼란에 빠져 고통 받던 시기(1810-1825년)에 이루어졌다. 그러면서 마리아의 정신 안에서는 증오와 복수를 야기하는 인간의 피와 사랑과 구원을 가져다 준 그리스도의 피의 존재가 대비되었다.

10대 초반까지 세상과 접촉하지 못하고 집안에 박혀 지내던 그녀는 한때 종교보다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에 더 큰 관심을 두기도 했지만, 16-17세에 이르러 인생의 의미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고 무한한 사랑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내면의 어두움을 걷어내던 그녀는 신비로운 환시를 경험하고 하느님의 아름다운 사랑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 사랑은 모든 이를 위해 당신의 피를 내어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고 명백해졌다. 또한 이 체험은 마리아가 앞으로 만나게 될 모든 사람들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사랑과 천상 아버지의 감미로운 사랑을 깨닫도록 하는 원천이요 힘이자 동기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피를 어떻게 주셨는지를 알고, 하느님의 눈으로 자신의 가치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 사람들의 마음과 사회는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체험이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그녀가 17살이 된 1822년 보혈 선교회를 설립한 성 가스파르 델 부팔로(Gaspar del Bufalo, 1월 2일)가 그녀의 마을을 방문했다. 자기희생의 모범으로써 그리스도의 보혈(보배로운 피)의 신비를 제시한 성인의 설교에 마을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은 마리아는 자신의 가슴 속에 간직했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하느님께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결국 가스파르 성인의 동료 중 하나인 가경자 조반니 메를리니(Giovanni Merlini) 신부의 지도 아래 그녀는 1834년 3월 4일, 그녀의 나이 29살에 프로시오네의 아쿠토(Acuto)라는 작은 마을에서 학교를 시작하며 그리스도의 성혈 흠숭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성녀 마리아 데 마티아스 원장은 30년을 넘게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하며 여러 곳에 소녀들을 위한 학교와 수녀원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당시 여자 아이들이 교육의 혜택을 받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가정생활의 성화를 위해 기혼 여성을 위한 강좌를 여는 등 여성 교육에 헌신하였다. 

그녀는 당나귀에 짐을 싣고 먼 길을 걸어서 여행하는 힘겨운 여정이었지만 자신이 가는 곳이면 어느 마을에서든지 예수님께서 당신의 피를 흘림으로써 구속의 사랑을 이루신 성혈의 신비를 선포하길 원했다. 그래서 이탈리아 중부 지역에서 그녀는 ‘설교하는 여성’으로 알려졌다. 

그녀가 설립한 공동체는 매우 가난했고 종종 먹을 것이 떨어질 때도 있었지만 항상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과 무엇이든 나누기를 원했다.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 그녀가 설립한 수도 공동체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 이미 70개를 넘어섰다.

그녀는 1866년 8월 20일 로마(Roma)에서 선종하여 로마의 캄포 베라노(Campo Verano) 묘지에 묻혔다. 그녀의 성덕에 대한 명성은 선종 이후에 더욱 널리 퍼져 30년이 지난 1896년 그녀에 대한 시복시성 절차가 시작되었고, 그 열기는 1950년 10월 1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그녀의 시복이 선포되었을 때 최고점에 올랐다. 그 후 그녀의 유해는 로마에 있는 수녀원 총원의 보혈 경당 내로 옮겨 모셨다. 

그녀는 2003년 5월 18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녀의 축일은 예전부터 기념해 오던 2월 4일 또는 선종일인 8월 20일에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마리아 에우제니아 (예수의)

 

  • 세례명 축일
    03월 10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에우제니아 (예수의)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Eugenia of Jesus

  • 신분과 직업
    수녀, 설립자 마리아 에우제니아 (예수의)

  • 활동 연도와 지역
    1817-1898년

 

 

예수의 마리아 에우제니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에우게니아, 외제니, 유진.

 

 

예수의 마리아 에우제니아  이야기

성녀 안나 마리아 에우게니아(Anna Maria Eugenia, 또는 마리아 에우제니아)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가 완전히 패배한 후 군주제가 회복된 1817년 프랑스 메스(Metz)의 경제적으로 부유한 비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파리(Paris) 북쪽 교외의 한 성(城)에서 성장하였다. 그녀의 출생 배경은 그녀가 장차 프랑스 교회 전체에 새로운 영성적 길을 제시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볼테르(Voltaire)와 자유주의의 신봉자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은행업과 정치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교육을 통해 마리아 에우게니아에게 풍부한 감수성과 강인한 성품 그리고 강한 의무감을 일깨워주었다. 가정생활을 통해 그녀는 지적 호기심과 낭만적인 정신,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과 폭 넓은 세계관을 키워갈 수 있었다.

뒤늦게 세례성사를 받은 마리아 에우게니아는 축일 날 성당 미사 중에 별다른 마음의 준비도 없이 관행처럼 첫영성체를 했다. 하지만 그녀의 첫영성체는 미래의 비밀을 예언하는 놀라운 신비의 체험이었다. 그녀는 훨씬 뒤에 자신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로 완전히 돌아서기 전까지는 그 예언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의 청소년기는 행복했지만 전혀 괴로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오빠와 젖먹이 여동생의 죽음을 통해 큰 영향을 받았고, 허약한 건강 상태와 말에서 떨어진 일로 인해 심각한 후유증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에 비해 조숙했던 마리아 에우게니아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힘든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배워 알고 있었다.

마리아 에우게니아가 13살이 되었을 때 한창 성공가도를 달리던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모든 재산과 부동산을 잃었다. 게다가 여러 오해로 인해 부모님이 이혼하자 그녀는 사랑하는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이주하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파리에 사는 가난한 이들에게 큰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마리아 에우게니아 역시 종종 어머니를 따라서 가난한 이들의 가정을 방문하곤 하였다. 

불행은 아직 끝나지 않아 15살 때 그녀는 어머니를 콜레라로 잃고 말았다. 15살의 어린 나이에 세속적이고 천박한 세상에 홀로 남겨진 그녀는 세속적인 즐거움과 경건한 삶의 좁은 길 사이에서 흔들렸다. 괴로움 중에 진리를 찾으며 때로는 절망하기도 한 그녀는 마침내 절대자에 대한 회개의 갈증을 느끼고 초월자에게로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

19살 때 마리아 에우게니아는 파리의 노트르담(Notre Dame) 주교좌성당의 사순절 특강에 참석했다가 이미 설교자로서 그 재능이 잘 알려진 도미니코 수도회(설교자회)의 젊은 수도원장인 앙리 라코르데르(Henri Lacordaire)의 강론을 듣게 되었다. 라코르데르는 세상이란 특별한 장소에서 교회의 쇄신에 관한 환시를 본 라므네(Lamennais)의 제자였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이해했고 이를 변화시키고자 했다. 

또한 그는 젊은이들의 의문과 갈망, 이상주의, 그리스도와 교회 모두에 대한 무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강론 말씀은 마리아 에우게니아의 가슴을 울렸고, 이를 통해 그녀는 그동안의 많은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게 되었다. 동시에 수도 성소에 대한 소망이 일었다. 그녀는 완전한 회개를 경험했고, 그 순간 이후 자신의 모든 정신과 나약함까지도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

이런 순간에 그녀는 라므네의 또 다른 제자인 콩발로(Combalot) 수도원장 신부를 만나게 되었다. 콩발로 신부는 그녀와의 고해성사를 통해 자신이 오랜 시간 동안 꿈꾸어 왔던 수도회의 설립자로 예정된 한 선택된 영혼과 만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마리아 에우게니아에게 자신의 사업을 맡아주길 설득하며, 하느님께서 새로운 수도회를 설립하기 위해 그녀를 선택하셨음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오직 교육에 의해서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고, 진정한 그리스도인 가정을 만들어 당대의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결국 마리아 에우게니아는 이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고, 콩발로 수도원장 신부의 인도를 받기 시작했다. 

22살의 나이에 마리아 에우게니아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 승천 수도회의 설립자가 되어 수도자들의 전 생애를 성화하기 위해 헌신하며 그들과 세상 안에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용기 있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1839년 마리아 에우게니아는 다른 두 명의 젊은 여성들과 함께 파리의 생 쉴피스(Saint-Sulpice) 성당 근처 페루(Ferou) 길에 있는 한 공동주택에서 기도와 연학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841년에 샤토브리앙(Chateaubriand) 부인과 앙리 라코르데르 수도원장, 몽탈랑베르(Montalembert) 같은 여러 지인들의 보호와 후원 속에 수도회의 첫 번째 학교를 개교하였다.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그녀가 설립한 수도회는 네 나라 출신의 16명의 수녀들이 함께 사는 공동체로 성장했다. 그들은 옛 것과 새 것을 연결하기를 원했다. 즉 오랜 역사 안에 쌓여 있는 교회의 영성적 보화와 수도생활의 지혜를 현대인들의 요구에 만족감을 줄 수 있는 교육과 결합하고자 했다. 

이는 그 시대의 가치를 반영하는 문제였으며, 동시에 복음적 가치가 새로운 산업화와 과학의 시대에 부상하는 문화를 관통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와 강생의 신비에 중심을 둔 수도회의 영성은 깊은 관상과 사도직 활동에 헌신하는 것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찾아 나서도록 주어진 삶이었다.

마리아 에우게니아의 생애에 대해서는 19세기 내내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열렬히 사랑했고, 이를 수도회 역사의 활기 있는 한 부분으로 삼았다. 계속해서 그녀는 자신의 모든 힘을 미래의 선물과 수녀회의 확장에 쏟아 부었고, 그것은 그녀의 평생의 사업이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녀에게 많은 수녀와 친구들을 보내주셨다. 초창기 회원 중 한 명인 테레사 엠마누엘(Teresia Emmanuel)은 아일랜드 출신의 신비가로 그녀의 절친한 친구이자 수도회의 공동 설립자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엠마누엘 달종(Emmanuel d’Alzon) 신부는 마리아 에우게니아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고, 1845년에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수도 규칙을 따르는 성모 승천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이 두 설립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서로를 도와주었다. 또한 이 두 설립자는 우정뿐만 아니라 그들이 영감을 준 많은 평신도 협력자들이 수도회와 교회를 위해 봉사하도록 하는 선물을 받았다. 그들은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고 노동하며 수도자와 평신도들을 성모 승천의 길로 이끌며 많은 이들 안에서 그들의 위치를 자리 잡았다. 그녀가 설립한 수도회는 1888년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다.

예수의 마리아 에우게니아 원장수녀는 생애의 마지막 해에 신체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침묵과 겸손으로 지냈다. 그녀의 생애는 완전히 그리스도를 중심에 둔 삶이었다. 1898년 3월 9일과 10일 오늘날의 파리에 속한 오퇴이유(Auteuil)에서 임종을 앞두고 노자성체를 받아 모신 마리아 에우게니아는 온화한 모습으로 하느님께 돌아갔다. 

그녀는 1975년 2월 9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7년 6월 3일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다른 세 명의 복자들과 함께 시성식을 갖고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마리아 요세파 (예수 성심의)

 

  • 세례명 축일
    03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요세파 (예수 성심의)

  • 가톨릭 성인 이름
    Maria Josefa of the Heart of Jesus

  • 신분과 직업
    설립자, 수녀원장 마리아 요세파 (예수 성심의)

  • 활동 연도와 지역
    1842-1912년

 

 

예수 성심의 마리아 요세파 세례명과 같은 이름

게라, 메리, 미르얌, 미리암, 산초, 산쵸, 요세빠, 요셉파, 호세파.

 

 

예수 성심의 마리아 요세파 이야기

성녀 예수 성심의 마리아 요세파(Maria Josepha)는 1842년 9월 7일 에스파냐의 비토리아(Vitoria)에서 의자를 만드는 아버지 베르나베 산초(Bernabe Sancho)와 어머니 페트라 데 게라(Petra de Guerra) 사이의 맏딸로 태어나 다음날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 당시 관례대로 2년 후인 1844년 8월 10일 견진성사를 받았다. 

그녀는 7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도움으로 첫 영성체를 준비해 10살 때 처음으로 성체를 영했다. 그녀는 15살 때 교육을 받기 위해 마드리드(Madrid)에 있는 한 친척에게 보내졌다. 유아기와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성체성사와 성모 마리아께 대한 깊은 신심과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 대한 놀라운 감수성 그리고 고독함에로 기우는 독특한 성향을 갖고 있었다. 18살이 되어 다시 비토리아로 돌아온 그녀는 어머니에게 봉쇄 수도원에 들어갈 뜻을 밝혔다.

어른이 된 후 그녀는 종종 “나는 수도 성소와 함께 태어났다.”고 말했다. 사실 그녀는 1860년 마드리드의 아랑후에스(Aranjuez)에 있는 무염시태 관상 수도원에 들어가려 했으나 치명적인 발진티푸스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어머니의 도움으로 좌절감을 극복하면서 몇 달에 걸쳐 그녀는 자신의 성소가 활동 수도회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 무렵 성녀 마리아 솔레다드 토레스 아코스타(Maria Soledad Torres Acosta, 10월 11일)에 의해 마드리드에 설립된 성모의 종 수녀회에 입회하기로 결심했다. 

서원을 앞두고 그녀는 극심한 회의와 함께 수녀원 안에서 자신의 성소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고심했다. 그녀는 여러 고해신부들에게 자신의 영혼을 열고 대화하며 그들의 조언을 통해서 그동안 자신의 성소에 대해 잘못 판단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성 안토니우스 마리아 클라렛(Antonius Maria Claret, 10월 24일) 대주교와의 만남과 성녀 마리아 솔레다드 토레스 아코스타와의 진지한 대화를 통해 그녀는 차츰 성모의 종 수도회를 떠나 새로운 수도회를 설립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녀가 설립하고자 하는 새로운 수도회의 목적은 병원과 가정에서 환자들에게 전문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그녀와 뜻을 같이 하는 세 명의 성모의 종 수녀회 동료들이 톨레도(Toledo) 대주교의 허락을 받고 그녀와 함께 수녀원을 나왔다.

새로운 수도회의 설립은 성녀 마리아 요세파가 29살이 되는 1871년 봄 빌바오(Bilbao)에서 이루어졌다. 설립 이후 41년 동안 그녀는 자신이 설립한 ‘사랑의 예수의 종 수녀회’의 원장을 맡았다. 그녀는 오랜 병고로 인해 빌바오의 수녀원에 머물 때까지 여러 공동체들을 방문하는 어려운 여정을 계속했다. 

더 이상 어쩔 수 없이 침대나 안락의자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계속해서 성실한 서신 왕래를 통해 에스파냐 안팎의 여러 공동체들의 일들을 처리했다. 1912년 3월 20일 오랜 수고 끝에 그녀가 선종했을 때 이미 43개의 수녀원이 설립되어 천 명이 넘는 수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녀의 거룩한 죽음은 빌바오 뿐만 아니라 그녀가 설립한 수녀회를 통해 그녀를 알게 된 다른 많은 지역에까지 큰 영향을 가져다 주었다. 마찬가지로 그녀의 장례식 또한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녀의 시신은 빌바오 시(市)의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1926년 그녀의 성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수녀원 본원으로 유해를 옮겨 경당 안에 안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녀는 1992년 9월 27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10월 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녀는 예수 성심의 마리아 요세파 산초 데 게라(Maria Josepha Sancho de Guerra, Maria Josefa of the Heart of Jesus Sancho de Guerra)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마리아 마말라

 

  • 세례명 축일
    03월 31일

  • 호칭 구분
    복녀 마리아 마말라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Mamala

  • 신분과 직업
    과부 마리아 마말라

  • 활동 연도와 지역
    1453년

 

 

마리아 마말라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마리아 마말라 이야기

에스파냐 메디나 시도니아(Medina-Sidonia)의 공작 가문의 일원인 마리아 마말라는 헨리쿠스 데 구즈만(Henricus de Guzman)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남편과 사별한 후 세비야(Sevilla)의 클라라회에 입회하여 여생을 보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마리아

 

  • 세례명 축일
    04월 02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 신분과 직업
    은수자 마리아

  • 활동 연도와 지역
    421년경? 이집트

 

 

마리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마리아 이야기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의 통치 때 태어난 팔레스티나(Palestina) 성 조시무스(Zosimus, 4월 4일)는 아주 젊은 나이에 팔레스티나의 수도원에 들어가 은수자가 되었다. 수십 년 동안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던 성 조시무스는 해마다 사순시기가 되면 요르단 광야로 가서 은둔하며 기도생활에 전념하였다. 

사순시기를 지내고자 자신의 수도원과는 20일 정도 떨어진 한적한 곳에서 시편을 읽으며 기도하던 중 충격적인 모습을 하고 있던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완전히 벗은 몸에 길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으로 인해 사람의 모습이라 하기도 어려웠다. 

성녀 마리아는 성 조시무스에게 자신의 몸을 덮기 위해 망토를 던져달라고 청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주며 성목요일에 성체를 모셔다주기를 청했고, 성 조시무스는 성체를 모셔와 그녀에게 영해주었다.

성 조시무스는 그녀의 진실한 마음과 생활을 이해하고 이 참회의 여인에게 다음 해 성목요일에도 성체를 모셔 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이듬해에 성 조시무스가 왔을 때 성녀 마리아는 이미 죽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신은 부패하지 않았다. 

성 조시무스는 성녀 마리아의 시신을 정중히 묻어주고 자신의 수도원으로 돌아와 이 이야기를 전했다.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는 구전으로 전해지다가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인 성 소프로니우스(Sophronius, 3월 11일)가 처음 글로 기록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성 소프로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는 344년경 이집트에서 태어났다. 12살 때 부모 곁에 떠나 집을 나온 그녀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로 가서 17년간 창녀로 살았다. 그러던 중 그녀는 성스러운 십자가 발견을 기념하기 위해 순례자들이 예루살렘(Jerusalem)으로 떠나는 것을 보고 그들과 함께 배에 올랐다. 

그들을 따라 나선 이유는 순례를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몸을 팔며 좀 더 쉽게 돈을 벌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도착해서도 순례자들을 유혹하며 돈을 버는 생활을 계속해 나갔다.

어느 날 그녀는 예루살렘의 주님 무덤 성당에 들어가려 했지만, 보이지 않는 신비스러운 힘이 막아 들어갈 수 없었다. 이에 두려운 마음이 든 그녀는 자신의 불결한 생활 때문이라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성당 밖에 걸려 있던 성모 마리아 이콘을 보며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세상을 떠나 사막으로 들어가 참회하며 고행자로 살겠다고 결심했다. 그런 다음 비로소 성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녀는 거룩한 십자가 유물에 존경을 표한 후 자신이 기도했던 이콘 앞에 와서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그때 그녀는 “요르단을 가로질러 요한 세례자가 살았던 광야, 예수가 세례 받은 곳으로 가서 영광스런 휴식을 찾아라.”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 길로 즉시 광야로 들어간 성녀 마리아는 47년을 세례자 요한처럼, 야생의 열매를 먹으며 속죄의 삶을 살다가 성 조시무스를 만나 성체를 영하고 세상을 떠났다. 로마 순교록은 성녀 마리아를 4월 2일자 목록에 기록하고 있는데, 동방 정교회에서는 4월 1일에 성녀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마리아 크레센시아 회스

 

  • 세례명 축일
    04월 05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크레센시아 회스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Crescentia Hoss

  • 신분과 직업
    동정녀 마리아 크레센시아 회스

  • 활동 연도와 지역
    1682-1744년 카우프보이렌

 

 

마리아 크레센시아 회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크레센씨아, 크레센티아, 크레셴시아, 크레스켄티아, 크레쎈씨아, 헤스, 헤쓰, 호스.

 

 

마리아 크레센시아 회스 이야기

성녀 마리아 크레스켄티아 회스(Maria Crescentia Hoss, 마리아 크레센시아 회스)는 독일 남동부 바이에른(Bayern)의 카우프보이렌에서 가난한 가정의 딸로 태어났다. 양친의 신앙생활이 매우 열심하였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단순함의 표양을 보여주었고, 그 결과 자녀들은 모두 세례를 받고 자주 성당에 가서 기도하곤 하였다. 

성녀 마리아 크레스켄티아 회스는 집주위에 있는 프란치스코 수녀회 성당으로 자주 성체조배를 하러 다녔는데, 어느 날 그녀는 십자가로부터 신비스런 목소리를 들었다. “이곳이 네가 거처할 집이니라.”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께 간청하여 수녀원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집안이 너무 어려우니 21세까지만 기다리라는 말씀을 듣고 열심히 가사를 도왔다.

드디어 이 약속은 지켜졌다. 그녀의 수녀원 생활은 겸손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지참금을 전혀 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녀는 아주 조그마한 방이 마련되었으나 지참금을 지불한 새 입회자에게 넘겨주어야 했고 자신은 그녀의 방 마루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 모든 수모를 아주 겸손하게 받아들였고, 그럼으로써 높은 성덕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장상이 임명되었을 때에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그녀의 높은 덕을 보고 살아있는 성녀로 높이 평가한 것이다. 마침내 그녀는 수련장과 원장직까지 역임하였다. 그녀는 수많은 환시를 보았고 자주 탈혼에 빠졌으며 특히 우리 주님의 수난에 대한 신비적 체험이 많았다. 

이 체험은 매주 금요일마다 일어났다. 그러므로 그녀의 영향은 수녀회 뿐만 아니라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모두 그녀의 참 지혜와 겸손으로부터 큰 감명을 받고 돌아갔으며, 교회의 지도자들도 가난한 이 수녀의 의견을 듣고자 애썼다. 

성녀 마리아 크레스켄티아 회스는 1900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1년 11월 25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마리아 아순타 팔로타

 

  • 세례명 축일
    04월 07일

  • 호칭 구분
    복녀 마리아 아순타 팔로타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Assunta Pallotta

  • 신분과 직업
    수녀 마리아 아순타 팔로타

  • 활동 연도와 지역
    1878-1905년 중국

 

 

마리아 아순타 팔로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베르따, 리베르타, 메리, 미르얌, 미리암, 빨로따, 아쑨따.

 

 

마리아 아순타 팔로타 이야기

이탈리아에서 아순타 마리아 리베르타(Assunta Maria Liberta)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마리아 아순타 팔로타(Maria Assunta Pallotta)는 안코나(Ancona) 지방 마르케(Marche)의 카스텔로 디 크로체(Castello di Croce)에서 성장하였다. 

그녀는 여섯 살 때 일찍 학교에 가서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더 이상의 교육을 받을 기회는 없었다. 1897년 갑자기 수도성소를 느낀 그녀는 다음해 5월에 로마에 있는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1902년 피렌체(Firenze)로 옮긴 후 중국에 가서 활동하고자 하는 그녀의 요청이 받아들여져 1904년 3월 마침내 나폴리(Napoli)를 떠나 중국으로 향했다. 

그 해 6월에 중국에 도착한 그녀는 고아들을 돌보며 봉사하다가 다음해 4월초 고아원에서 발병한 치명적인 발진티푸스에 걸려 사망하였다. 그녀는 1954년 11월 7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복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마리아 베르나데트 수비루

 

  • 세례명 축일
    04월 16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베르나데트 수비루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Bernadette Soubirous

  • 신분과 직업
    수녀 마리아 베르나데트 수비루

  • 활동 연도와 지역
    1844-1879년 루르드

 

 

마리아 베르나데트 수비루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베르나데타, 베르나데트, 베르나뎃따, 벨라뎃다.

 

 

마리아 베르나데트 수비루 이야기

성녀 마리아 베르나데트 수비루(Maria-Bernardette Soubirous)는 1844년 1월 7일 루르드에서 가난한 방앗간 주인인 프랑수아의 여섯 아이 중 맏딸로 태어났다. 14세 때의 그녀는 번민하는 듯한 인상에다가 보통보다 작은 소녀로서 민감하나 쾌활한 기질이 있었으며. 다소 발육이 늦은 듯했다고 한다.

1858년 2월 11일과 7월 16일까지, 그녀는 루르드의 가브(Gave) 강변에 있는 마사비엘르 바위에서 동정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체험하였다. 18 차례에 걸쳐 그녀는 매우 젊고 아름다운 부인을 보았는데, 그 부인이 자신에게 여러 가지 요구를 하였다. 이 부인이 나중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로 호칭하게 되는 동정 마리아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는 곳에는 소문을 듣고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마리아 베르나데트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그 ‘부인’을 보지 못하고 그 말씀도 듣지 못하였으나. 무슨 혼란이나 정신적인 이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 발현이 있고난 다음부터 거짓 환시가 유행병처럼 번졌으나, 교회 당국은 그녀의 체험에 대하여 올바른 자세를 견지하였다. 몇 년 후 그녀는 의심 많은 불신자들로부터 심한 고통을 받았으나, 이 모든 것을 영웅적인 용기와 품위로써 물리쳤다. 

1866년에 그녀는 프랑스 느베르(Nevers)의 사랑의 자매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여기서 그녀는 대중적으로 알려지는 위험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내 일을 계속하고자 합니다.” “무슨 일이오?” 이때 그녀의 대답은 “아픈 일”이라고 하였다.

그녀는 35세에 임종을 맞이할 때까지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삶을 살았다. 성녀 마리아 베르나데트는 1925년 6월 14일 복자품에 오른 후, 1933년 12월 8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마리아 베르나데트가 시성된 것은 그녀가 성모 발현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겸허한 단순성과 그녀의 전 생애를 통해 보여 주었던 절대로 의심하지 않은 신뢰심 때문이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마리아 (강생의)

 

  • 세례명 축일
    04월 18일

  • 호칭 구분
    복녀 마리아 (강생의)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of the Incarnation

  • 신분과 직업
    과부 마리아 (강생의)

  • 활동 연도와 지역
    1566-1618년

 

 

강생의 마리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강생의 마리아 이야기

바르바라 오리오(Barbara Aurillot)는 정부 고위관리인 니콜라스 오리오(Nicholas Aurillot)의 딸로서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그녀의 아주머니가 있는 롱샴(Longchamps)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고 종교적인 생활을 원했지만 16세 때에 재정 관리인 피에르 아카리(Pierre Acarie)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신심이 깊고 또 애덕을 실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바르바라 오리오는 모두 6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셋은 카르멜회 회원이 되었고, 한 명은 사제가 되었다.

그러던 그녀의 집안에 큰 재앙이 다가왔다. 그녀의 남편은 앙리 4세(Henri IV)에 대항하는 가톨릭 연합의 후원자였다. 그래서 앙리 4세가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피에르 아카리는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일종의 모반 혐의로 파리에서 추방되었다. 

바르바라 오리오는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아빌라(Avila)의 성녀 테레사(Teresia, 10월 15일)의 저작에 심취하고 애덕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녀의 이 모든 선한 일들은 결국 앙리 왕의 감탄과 지원을 이끌어냈다. 그녀는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의 맨발의 카르멜회를 프랑스로 불러왔고, 1604년부터 1609년 사이에 5개의 수녀원을 세웠다.

1613년 47세의 나이로 남편과 사별한 그녀는 아미앵(Amiens)에 있는 카르멜회에 입회를 청하여 허락을 받고 강생의 마리아(Maria)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곳은 그녀의 큰딸이 있는 곳이었다. 그녀는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1월 24일)의 영적인 제자로 비록 만 4년밖에 수도자로서 살지 못했지만 기혼자로서 뛰어난 성덕의 소유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녀는 “주님, 제가 저지른 온갖 나쁜 표양을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말씀을 남기고 4월 18일 퐁투아즈(Pontoise)에서 선종하였다. 그녀는 1791년 교황 비오 6세(Pius VI)에 의해 시복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마리아

 

  • 세례명 축일
    04월 24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 신분과 직업
    신약인물, 부인 마리아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경

 

 

마리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마리아 이야기

요한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19,25)라고 전해주었다. 

마르코 복음은 같은 장면에서 “여자들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그분을 따르며 시중들던 여자들이었다.”(15,40-41)라고 했다. 이어서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리고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16,1-2)라고 했다. 

그들이 무덤이 도착했을 때 이미 입구를 막았던 돌은 굴려져 있었고, 무덤 안에는 하얗고 긴 겉옷을 입은 젊은이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미 부활하셨다면서 전에 말씀하신 대로 갈릴래아로 가실 것이라 알려주었다. 그들은 겁에 질려 무덤에서 나와 달아났다고 마르코 복음은 전해주었다(16,3-8).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는 요한 복음이 언급한 클로파스(Clopas)의 아내 마리아(Maria)를 성모 마리아와 자매 사이로 해석했고, 작은 야고보와 요세는 예수님과 사촌 사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예수님의 12사도 중 한 명인 알패오(Alphaeus)의 아들 야고보(마태 10,3; 마르 3,18; 루카 6,15)와 ‘주님의 형제’ 야고보(마태 13,55; 마르 6,3; 갈라 1,19)를 같은 인물로 제시하면서 클로파스를 알패오(Alphaeus)와 동일시했다. 결국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는 알패오의 아내 마리아이자 예수님과 사촌지간인 사도 성 소 야고보(Jacobus, 5월 3일)의 어머니라고 설명하였다. 

중세 전통은 성녀 마리아를 안식일 다음 날 빈 무덤에서 주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세 명의 거룩한 마리아’ 중 한 명으로 간주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은 4월 9일 목록에서 클로파스의 아내 성녀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복되신 마리아의 자매로 소개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4월 24일 목록에서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살로메와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gdalena, 7월 22일)를 부활절 아침에 주님의 시신에 발라 드릴 향료를 갖고 무덤에 갔다가 처음으로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거룩한 여인들로 예루살렘에서 함께 기념하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마리아 에우프라시아 펠레티에

 

  • 세례명 축일
    04월 24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에우프라시아 펠레티에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Euphrasia Pelletier

  • 신분과 직업
    설립자, 수녀원장 마리아 에우프라시아 펠레티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6-1868년

 

 

마리아 에우프라시아 펠레티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에우쁘라시아, 에우프라씨아, 유프라시아, 펠르티에.

 

 

마리아 에우프라시아 펠레티에 이야기

성녀 마리아 아 산타 에우프라시아 펠레티에(Maria a santa Euphrasia Pelletier)는 1796년 7월 31일 프랑스 서부 방데 연안의 누아르무티에(Noirmoutier) 섬에서 태어났는데, 그녀의 부모는 방데 전쟁을 피하여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그녀는 18세 되던 1814년 10월 20일 애덕 성모 수녀회에 입회하였고, 1825년에 투르(Tours)에 위치한 수녀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 후 그녀는 앙제(Angers)에 수녀원을 설립해 달라는 앙제 주교의 요청을 받고 파견되어 '앙제의 착한 목자 애덕 성모 수녀원'을 성공적으로 설립한 뒤에 투르로 돌아왔다. 그러나 앙제 수녀원이 운영상 많은 어려움을 겪자 다시 앙제로 가서 수녀원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녀가 경험을 쌓으면 쌓을수록 자기 수녀회의 구조를 크게 변화시켜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으나 수녀원 내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녀는 야심이 많고 순종하지 못한다는 비난과 함께 '능력은 있으나 한 나라를 다스려야 적성이 풀릴 사람'이란 평을 받았다.

마침내 그녀는 앙제에 '착한 목자 수녀회'를 설립하고, 1835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로부터 공식적인 승인을 받았다. 이 수녀회는 윤리적 위험에 처한 여성들을 위하여 헌신하도록 설립되었다.

성녀 마리아 에우프라시아가 33년 동안 이 수녀회를 지도하는 동안 110개의 수녀원으로 발전하였는데, 현재 이 수녀회의 회원 수는 10,000명이 넘는다. 그녀는 1868년 4월 24일 앙제에서 선종하였으며, 1933년 시복되고 1940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

 

  • 세례명 축일
    05월 14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Dominica Mazzarello

  • 신분과 직업
    동정녀, 설립자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

  • 활동 연도와 지역
    1837-1881년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메니까, 도미니까, 도미니카, 마짜렐로, 메리, 미르얌, 미리암.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 이야기

성녀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Maria Domenica Mazzarello)는 1837년 5월 9일 이탈리아 북부 제노바(Genova) 인근 시골 마을인 모르네세(Mornese)에서 농부인 주세페(Giuseppe)와 막달레나 칼카뇨 마자렐리(Maddalena Calcagno Mazzarelli)의 열 자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맏이로서 아버지를 도와 포도밭에서 일하며 동생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거들었다. 그런 가운데도 매일 미사에 빠지지 않고 참례했고 교리 공부나 성당 활동에도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녀의 본당 신부인 도메니코 페스타리노(Domenico Pestarino)가 마리아니스트 수녀회의 규칙을 따르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의 딸회’라는 신심 단체를 조직했을 때 그녀는 바로 가입했다. 그런데 페스타리노 신부가 토리노(Torino)에서 성 요한 보스코(Joannes Bosco, 1월 31일) 신부를 만나게 됨에 따라 성녀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 또한 성 요한 보스코에 대해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이때가 그녀가 17살이 된 1854년이었다.

페스타리노 신부가 만든 신심 단체는 본당에서 행하는 교리 교육 외에는 어떠한 교육도 받을 수 없었던 모르네세 인근 시골 마을의 소녀들을 돌보는 데 힘썼다. 여성과 아동의 권리가 심각하게 침해받고 있던 당시 이탈리아의 상황에서 이 신심 단체에 속한 어린 소녀들이 범죄나 매춘의 길에 빠지지 않고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올바르게 성장하도록 도와주었다. 

1857년에 모르네세와 그 주변 마을에 전염병이 급속히 퍼지는 일이 생겼다. 스무 살의 성녀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와 동료 회원들은 전염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그녀 또한 감염된 친척들을 돌보다가 병에 걸리고 말았다. 고생 끝에 겨우 회복되기는 했으나 이전 같은 건강한 몸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기도 중에 “너에게 소녀들을 맡긴다!”라는 성모님의 목소리를 듣는 환시를 체험하였다. 더는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성녀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는 우연히 한 재단사를 만나 재봉 기술을 배우게 되었다. 그녀는 소녀들을 돕기 위해 재봉소를 열고 동료들과 함께 재봉 기술을 배워가면서 소녀들을 가르쳤다.

한편 성 요한 보스코 신부는 소년들을 위해 살레시오회를 세운 후 소녀들을 위한 수녀회를 만들기를 원했다. 1864년 성 요한 보스코는 소년들과 함께 모르네세로 소풍 갔다가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소녀들을 교육하는 성녀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를 만나게 되었다. 

이 만남이 계기가 되어 1872년 8월 5일 성녀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와 모르네세에서 함께 봉사하던 열 명의 동료들은 지역 주교와 성 요한 보스코 앞에서 수도 서원을 발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 수도회’(Daughters of Mary Help of Christians), 곧 살레시오 수녀회(Salesian Sisters of Don Bosco)가 창립되었다.

살레시오 수녀회의 공동 창립자로서 초대 총장이 된 성녀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는 성 요한 보스코의 영성과 교육 방법을 받아들여 소녀들을 위한 교육과 공동체 형성에 맞게 발전시켰다. 살레시오 수녀회는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와 프랑스 등지로 퍼져나갔고, 더 많은 소녀들이 참여하면서 많은 공동체가 조직되었다.

1877년 선교를 위해 처음으로 우루과이로 파견되는 살레시오회 수녀들을 배웅하기 위해 제노바 항구까지 동행했던 성녀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는 돌아오는 길에 프랑스에 있는 수녀들을 방문하기 위해 배를 탔다. 힘든 여정 끝에 프랑스 남동부의 마르세유(Marseille) 부근 생시르쉬르메르(Saint-Cyr-sur-Mer)의 공동체를 방문하고 돌아오던 중 성녀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는 지병이 악화하여 큰 고통을 받았다. 

그녀는 자신이 1879년에 이탈리아의 니차 몬페라토(Nizza Monferrato)로 옮긴 수녀회 모원으로 돌아와서 늑막염으로 고생하다가 1881년 5월 14일 “천국에서 만나자!”라는 말을 남기고 불과 마흔네 살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평소 함께 살던 수녀들과 소녀들로부터 ‘성녀’라고 불릴 정도로 모범적 삶을 살았던 그녀는 1938년 11월 20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51년 6월 24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녀의 유해는 토리노(Torino)의 살레시오회 수도원 옆 도움이신 성모 마리아 대성당 내 성 요한 보스코의 무덤 곁에 안장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마리아 막달레나 알브리치

 

  • 세례명 축일
    05월 15일

  • 호칭 구분
    복녀 마리아 막달레나 알브리치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Magdalen Albrizzi

  • 신분과 직업
    수녀원장 마리아 막달레나 알브리치

  • 활동 연도와 지역
    1465년

 

 

마리아 막달레나 알브리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들렌, 막딸레나, 메리, 미르얌, 미리암, 알브리찌.

 

 

마리아 막달레나 알브리치 이야기

이탈리아의 코모(Como)에서 귀족 가문의 딸로 태어난 마리아 막달레나 알브리치(Maria Magdalena Albrizzi)는 부모가 사망한 후 세상과 결별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고향에 있는 성녀 마르가리타(Margarita) 수녀원에 입회할 마음으로 문 앞에 당도했을 때, “막달레나야, 브루나테로 가야한다.”는 음성을 세 번이나 들었다. 

브루나테(Brunate) 산속에 있는 수녀원은 불과 몇 명만 살던 매우 쓸쓸하고 초라한 움막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입회한 후 이 공동체는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그녀가 원장이 된 후 수녀회는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회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후 그곳으로 소속을 변경하였다. 

비록 생필품이 부족하여 문전걸식을 하면서도 그녀와 수녀들은 부랑인들과 어려운 처지에 있는 처녀들을 위해 집을 내줄 정도로 환대하였다. 그녀는 수도자들에게 잦은 영성체를 권장하였다. 그녀가 기적을 많이 행하고 예언과 치유의 은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많은 이들의 방문을 받아야만 했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907년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마리아 막달레나

 

  • 세례명 축일
    05월 25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Magdalen

  • 신분과 직업
    수녀 마리아 막달레나

  • 활동 연도와 지역
    1566-1607년 팟지

 

 

마리아 막달레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들렌, 막딸레나, 메리, 미르얌, 미리암.

 

 

마리아 막달레나 이야기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의 최고 명문가인 팟지 집안에서 태어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gdalena)는 태어난 다음날 카타리나(Catharina)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어릴 때부터 선행과 신심생활에 큰 관심을 보여 아이들을 모아 놓고 기도와 교리를 가르치기도 하고 성당에서 자주 기도하였다.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기를 좋아했던 그녀는 무엇보다도 성체께 대한 사랑과 존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영성체를 간절히 원하여 특별 관면을 받고 10세 때에 첫영성체를 하고, 12세 때 동정 서원을 하였다. 

그 후 피렌체에 있는 산 조반니노(San Giovannino) 수녀원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더욱 열렬한 신앙인이 되었고 수도 성소의 뜻을 굳혀 나갔다. 부친은 딸을 결혼시키려고 하였지만, 그녀는 극렬히 반대하여 1582년 12월 1일 피렌체에 있는 천사의 성 마리아(Santa Maria degli Angeli) 카르멜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1583년 1월 3일 그녀는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1584년 3월 초 병을 얻은 후 놀라운 탈혼이 반복되었는데, 거의 매일 성무일도를 바친 뒤 2-3시간 동안은 탈혼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녀의 병은 아주 위중했다. 동료 수도자가 아프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녀는 십자가를 가리키면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생각하고, 나의 구원을 바라보면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고 대답하여 그녀의 뛰어난 하느님 사랑을 표현하였다. 

1585년 5월 17일 금요일 그녀는 이전보다 훨씬 긴 탈혼에 빠졌는데, 거의 40시간이나 계속되었다. 그 후 6월 16일 삼위일체 대축일 이후 5년 동안 영적 생활의 무미건조와 시련을 겪기도 했다. 

1586년 10월 수련기를 마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극도의 고통을 맛보던 중 1590년 부활절에 50일 동안 금욕생활을 하라는 주님의 뜻에 따라 오로지 빵과 물로만 지냈고, 이러한 고행의 보답으로 하느님과의 일치의 선물을 받게 되었다.

그녀는 예언하는 은혜를 받은 것 외에도 먼 곳에 있는 각기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고, 탈혼 상태에 있을 때 어떤 경우에는 무기력해지는 때도 가끔 있었다. 1604년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원장으로 선출되었는데, 얼마 후 병을 얻어 이전에 느껴 본 적이 없는 심신의 고통으로 3년을 보내야 했다. 

결국 오랜 고통 뒤에 그녀는 1607년 5월 25일 41세의 나이로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1669년 4월 28일 교황 클레멘스 9세(Clemens IX)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마리아 안나

 

  • 세례명 축일
    05월 26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안나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Anne

  • 신분과 직업
    동정녀, 은수자 마리아 안나

  • 활동 연도와 지역
    1618-1645년 키토

 

 

마리아 안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낸시, 니나, 마리아나, 마리안나, 메리, 미르얌, 미리암, 애나, 애니, 앤.

 

 

마리아 안나 이야기

성녀 마리아 안나 아 예수 데 파레데스(Maria Anna a Jesu de Paredes)는 당시 에콰도르의 수도였던 페루비안 마을에서 태어났고, 마리아 안나 데 파레데스 이 플로레스(Maria Anna de Paredes y Flores) 즉 ‘키토의 꽃’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녀는 에스파냐 귀족의 딸로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신심이 뛰어나서 언니들과 더불어 로사리오와 십자가의 길의 기도 바치기를 매우 좋아하였다. 12세 때에는 몇 명의 친구들과 어울려 일본인들을 개종시키려다가 키토 교외 산에서 은수자로 살려는 생각이 떠올라 포기하였다. 그러나 이 일 역시 정치적인 문제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기 고해신부인 예수회원의 지도를 받으면서 성당에 가는 일을 제외하고는 독수자처럼 생활하였다.

그리고 성녀 마리아 안나는 관을 하나 마련한 뒤 매 금요일마다 그 속에서 지내며 죽음을 묵상하기도 하였다. 팔과 다리를 쇠사슬로 묶고 고행자가 입는 말총 속옷을 입었으며, 가시관과 쇠못관을 만들어 고행하였다. 음식은 극히 소량만 먹었고, 물은 그리스도의 갈증을 느낄 정도가 되어서야 겨우 입을 축이는 정도였다. 

이와 동시에 예언과 기적도 일어났다. 1645년 키토 지방에 지진과 더불어 전염병이 번졌다. 사순 제4주일의 강론을 들은 그녀는 자신이 백성의 희생물이 되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나섰다. 결국 지진은 멈추었지만 그녀는 26세의 젊은 나이로 운명하고 말았다. 그녀는 1853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시복되었고, 1950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녀는 마리아나 데 파레데스(Mariana de Parede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8. 이성례 마리아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李聖禮 Mary

  • 신분과 직업
    양반, 부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1-1840년 한국

 

 

이성례 마리아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이 마리아, 이마리아.

 

 

이성례 마리아 자료

1801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이성례(李聖禮) 마리아(Maria)는, 내포 지역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의 집안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성처럼 씩씩한 정신을 지녔던 그녀는 17세 때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혼인하여 홍주 다락골의 새터(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살면서 1821년에 장남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낳았다.

이 마리아는 언제나 집안일을 지혜롭게 꾸려 나갔고, 일가친척들이 불화 없이 지내도록 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 나이가 어린 남편을 공경하고 그의 말에 순종하면서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나갔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는 가족과 함께 한양으로 이주하였으며, 박해의 위험이 있자 다시 강원도를 거쳐 경기도 부평,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안양 3동)로 이주하였다. 그동안 장남 최양업 토마스는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떠났다.

이처럼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자주 이주하는 가운데서도 이 마리아는 모든 어려움과 궁핍을 기쁘게 참아 내었다.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지쳐서 칭얼거릴 때면, 요셉과 성모 마리아가 이집트로 피난 가시던 이야기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인내심을 갖도록 하였다. 또 수리산에 정착한 뒤로는, 남편을 도와 이 마을을 교우촌으로 일구는 데 노력하였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 남편 최 프란치스코가 한양을 오가면서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 묻어 주고 교우들을 돌보자, 이 마리아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자식들을 보살폈다. 그러던 가운데 포졸들이 마침내 수리산 교우촌으로 들이닥쳤다. 이때 그녀는 음식을 준비해서 포졸들을 대접한 다음, 남편 일행의 뒤를 따라 어린 자식들과 함께 한양으로 향하였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이 마리아는 남편이나 다른 자식들과 격리되어, 젖먹이 최 스테파노와 함께 여인들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문초와 형벌을 받아 팔이 부러지고 살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졌으나, 용감하게 신앙을 증언하였다.

이 마리아는 이러한 육체적인 고통보다 갓난아기에 대한 모성애 때문에 더 큰 고통을 느껴야만 하였다. 젖은 나오지 않았고, 먹일 것이 없어서 한 살밖에 안 되는 최 스테파노가 굶어 죽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남편이 매를 맞다가 순교하고, 최 스테파노가 더러운 감옥 바닥에서 죽어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던 그녀는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이 마리아는 자신의 본디 마음과는 달리 현세적인 구원을 도모하려는 그릇된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장남 최양업 토마스가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이내 그녀는 다시 체포되어 형조로 압송되었다.

이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인자하심으로 당신 여종의 나약함을 구원해 주시는 은혜를 베푸셨다. 형조에 이르자, 이 마리아는 용감한 신자들의 권면으로 큰 용기를 얻게 되었다. 이제 그녀는 이전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쳤고, 재판관 앞으로 나가 전에 한 말을 용감하게 취소하였다.

또 모성애를 비롯하여 모든 유혹을 용감히 이겨 냈으며, 막내아들을 하느님께 바친 것을 기뻐하였다. 이 무렵 그녀의 둘째 아들인 최의정 야고보가 한 달 이상 감옥을 오가면서 모친과 신자들의 시중을 들었다.

이 마리아는 관례대로 마지막 문초와 형벌 끝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감옥으로 찾아온 자식들에게 “형장에는 오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자신의 마음이 약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녀는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이제는 다들 가거라. 절대로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마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1840년 1월 31일(음력 1839년 12월 27일), 이성례 마리아는 동료 신자 6명과 함께 형장으로 정해진 당고개(현, 서울 용산구 원효로2가)로 끌려 나갔다. 그런 다음 영광스럽게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녀의 나이는 39세였다. 순교 당시까지 그녀는 안온하고 평화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성례 마리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9. 마리아 로사 몰라스 이 바베

 

  • 세례명 축일
    06월 11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로사 몰라스 이 바베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Rose Molas y Vallve

  • 신분과 직업
    설립자, 수녀 마리아 로사 몰라스 이 바베

  • 활동 연도와 지역
    1815-1876년

 

 

마리아 로사 몰라스 이 바베 세례명과 같은 이름

로싸, 로즈, 메리, 미르얌, 미리암.

 

 

마리아 로사 몰라스 이 바베 이야기

성녀 마리아 로사 몰라스 이 바베(Maria Rosa Molas y Vallve)는 1815년 3월 24일 에스파냐 북동부의 타라고나(Tarragona) 근처 레우스(Reus)에서 태어나 로사 프란치스카 마리아 데 로스 돌로레스(Rosa Francisca Maria de los Dolores)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레우스에서 작은 상점을 운영하는 매우 경건한 부모 밑에서 성장하며 그리스도교 신앙을 물려받았다. 

그녀가 17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그 지방에 퍼진 콜레라에 걸려 돌아가셨다. 그녀는 첫영성체 이후 오랫동안 종교적인 성소를 갈망했지만 아버지는 그녀가 집을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 곁에 머물며 가사를 돕다가 26살이 된 1841년 1월에 레우스에서 병원을 운영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공동체에 입회하였다. 

그녀는 종교적 덕행뿐만 아니라 병들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실질적이고 효율적으로 돌보는 데 있어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또한 그녀는 분쟁 상태에 있는 이들의 중재자로도 활약했다. 1844년 레우스를 둘러싸고 양측 군대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도 사람들을 돕기 위해 끝까지 도시에 남았고, 협상을 위해 전선 한가운데를 지나가며 마르틴 수르바노 바라스(Martin Zurbano Baras) 장군에게 포격 중단을 요구해 휴전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성녀 마리아 로사는 1849년 동료 자매들과 함께 토르토사(Tortosa)로 갔고, 그곳에서 지역 고아들과 노인들 그리고 정신 장애인들을 수용하는 시설인 ‘애덕의 집’ 운영 책임을 맡았다. 그녀가 애덕의 집에 처음 갔을 때 그곳에 수용된 이들이 너무나 소홀하게 방치되고 있는 현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요양기관에 입원한 300여 명의 환자는 의학적으로 적절하고 적합한 처치를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열악한 환경과 대우로 인해 ‘비참의 집’으로 불렸다. 그래서 그녀는 요양기관의 위생체계와 환자들을 돌보는 방법을 현대적으로 개선해 나갔고,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요양기관의 질서 체계를 확립해 나갔다. 

그녀는 질병에 취약한 유아들을 격리 수용하고 의료체계의 표준화와 개선된 간호방식을 하나하나 만들어갔다. 그녀는 자신이 책임자로 있는 8년 동안 요양기관에 요구되는 그 시대의 의학적 요청을 하나하나 받아들여 개선해 나갔다. 그러자 토르토사 당국은 그녀에게 학교와 시립병원의 책임도 맡게 하였다.

그러던 중 성녀 마리아 로사는 자신이 입회한 공동체가 적법한 방식으로 설립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와 12명의 동료 수녀들은 관할권을 지닌 지역 주교의 뜻에 자신들을 맡겼고, 지역 주교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위로를 주는 그녀의 헌신과 탁월한 행정 능력 그리고 개인적인 성덕을 보고 1857년 3월 14일 ‘위로의 수녀회’ 설립을 허락하였다. 

성녀 마리아 로사는 이듬해 11월 14일 수녀회의 명칭을 ‘위로의 성모 수녀회’(Sisters of Our Lady of Consolation)로 명명하고, 하느님의 위로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특별히 가난한 지역을 찾아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자비의 사도직을 수행하고자 했다. 일생을 그렇게 헌신한 성녀 마리아 로사는 1876년 6월 11일에 토르토사에서 선종하였다.

성녀 마리아 로사가 설립한 위로의 성모 수녀회는 1888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교황청 설립 수녀회로 승격되었고, 1901년 최종적으로 회헌을 인준받았다. 

그녀는 1977년 5월 1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8년 12월 11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성인품에 올랐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시성식 강론을 통해 성녀 마리아 로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사람들을 위로하였고, 위로하면서 온갖 위로의 원천이신 그리스도를 전하였다. 

이 여인의 삶 자체가 하느님의 자비와 위로를 선포하는 예언자적인 표시”라고 언급하였다. 많은 사람에게 ‘자비의 사도’이자 ‘위로의 사도’로 불리는 성녀 마리아 로사는 자신의 직무를 실용적이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수행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0. 마리아

 

  • 세례명 축일
    06월 23일

  • 호칭 구분
    복녀 마리아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 신분과 직업
    동정녀 마리아

  • 활동 연도와 지역
    1213년 오와니에

 

 

마리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마리아 이야기

니벨레의 어느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마리아(Maria)는 자신의 소망을 수도생활에 두었으나, 부모들은 이미 좋은 신분에 있는 사람과 결혼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혼은 하되 훌륭한 일을 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이 때문에 그녀의 남편 될 사람은 금욕생활은 물론 집을 나환자 구호소로 만들었다. 

이 젊은 부부는 최선을 다하여 환자들을 돌보았고 마리아는 철저한 금욕생활을 실천하였다. 그녀는 자발적으로 엄격한 규칙을 만들어 지켰고, 허름한 의상을 입었으며, 음식과 잠도 절약하였다. 또 대부분의 시간을 성당에서 지냈으며, 추운 겨울에도 맨땅에서 잠을 잤다. 이리하여 그녀의 높은 성덕은 차츰 알려지게 되었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날로 많아졌다.

그러나 그녀는 죽기 얼마 전부터 독수생활에 대한 성소를 느끼기 시작하여 남편의 동의하에 집을 떠났다. 그녀는 오와니에에 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곁에 거처를 마련하고 엄격한 독수생활을 하니, 그녀에게는 수많은 기적과 환시까지 보게 되었다.

그녀는 현세에서 천상의 거주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금욕생활로 인하여 병을 얻어 고생하다가 38세의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녀는 네덜란드 최고 신비가 중의 한 사람으로서 공경을 받는다. 야고보 데 비트리 추기경이 기록한 그녀의 전기에 의하면, 그녀는 그리스도의 수난 신심이 형성되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1. 마리아

 

  • 세례명 축일
    06월 29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 신분과 직업
    신약인물, 예수의 제자, 부인 마리아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경

 

 

마리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마리아 이야기

성 요한 마르코(Joannes Marcus)의 어머니이며(사도 12,12), 예루살렘에 있던 성녀 마리아의 집은 사도들이 모이는 집합소였다. 사도 베드로(Petrus)가 헤로데의 감옥에서 출옥한 뒤 맨 처음 찾았던 사람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2. 마리아 고레티

 

  • 세례명 축일
    07월 06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고레티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Goretti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마리아 고레티

  • 활동 연도와 지역
    1890-1902년

 

 

마리아 고레티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리에따, 마리에타, 마리엣따, 마리엣타, 메리, 미르얌, 미리암.

 

 

마리아 고레티 이야기

성녀 마리아 고레티(Maria Goretti)는 1890년 10월 16일 이탈리아 안코나(Ancona) 지방의 코리날도(Corinaldo)에서 가난한 농부의 일곱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루이지 고레티(Luigi Goretti)와 어머니 아순타 카를리니(Assunta Carlini)는 비록 가난했지만 서로 사랑하며 자녀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고 충실한 신앙생활로 인도하고자 했다. 

어려서부터 상냥하고 총명하며 예의 바른 마리아는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마리에타(Marietta, 성모 마리아를 뜻하는 ‘바다의 별 Maris Stella’의 축약형)로 불렸고, 시골에 사는 가난한 농부의 딸로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지 못했다. 

1896년 집안 형편이 더 어려워져 그나마 갖고 있던 작은 농장마저 포기하고 정든 고향을 떠나 팔리아노(Paliano) 인근의 콜레 지안투르코(Colle Gianturco)로, 1899년에는 오늘날의 라티나(Latina)와 네투노(Nettuno) 인근 레 페르리에레(Le Ferriere)로 이사 가서 다른 사람의 농장에서 소작인으로 일했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자신의 땅을 갖기 위해 매일같이 열심히 일하며 루이지 고레티가 그만 건강을 잃고 자리에 눕게 되었다. 농장 주인은 그가 하던 일을 맡을 다른 사람을 구했는데, 새로 농장에 온 사람은 조반니 세레넬리(Giovanni Serenelli)로 그에게는 17살 된 알레산드로 세레넬리(Alessandro Serenelli)라는 아들이 있었다. 

1900년 마리아가 10살 때 병약한 아버지는 말라리아 걸려 고생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족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어린 나이지만 마리아는 어머니를 도와 집안 살림을 하며 동생들을 돌보았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에게 배운 대로 동생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고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에 대해 자신이 들은 이야기들을 전해주었다.

나이에 비해 성숙한 편이었던 마리아는 첫영성체를 할 나이가 되었으나 글을 읽고 쓸 줄도 몰랐다. 그녀는 어머니가 알려주는 바를 암송하고, 어머니 친구의 도움을 받고 교리 공부를 시작했다. 그녀의 순수한 열정을 안 본당 신부도 자주 그녀를 찾아 교리를 가르쳐줬다. 

마침내 성녀 마리아 고레티는 1902년 5월 29일 감격스러운 첫영성체를 할 수 있었다. 미사 중에 본당 신부의 강론을 들으면서, 그녀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순수한 영혼을 지키고 죄를 멀리하며 성모님의 보호하심을 믿고 늘 기도할 것을 다짐했다.

그해 7월 5일 오후, 성녀 마리아 고레티는 평소처럼 집안일을 하며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농장 일을 하며 이웃해 살던 조반니 세레넬리 가족과 그녀의 어머니도 모두 일을 나간 뒤였다. 

그때 일하러 가던 중 핑계를 대고 돌아온 18살의 알레산드로는 자신의 셔츠를 기워 달라며 마리아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베란다에 앉아 바느질하던 어린 마리아를 강제로 침실로 끌고 가서 문을 잠그고 미리 준비한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칼로 위협했다. 

알레산드로는 욕정에 눈이 멀어 마리아를 강제로 강간하려 했지만, 마리아는 큰소리로 “안 돼! 알레산드로. 이것은 하느님께 대죄를 짓는 거야!”라며 완강히 저항했다. 그녀가 끝까지 버티자 알레산드로는 이성을 잃고 날카로운 칼로 마리아의 가슴을 마구 찔러댔다. 그녀의 몸에는 모두 14군데의 깊은 상처가 생겼고, 뒤늦게 돌아온 가족들이 피범벅이 된 그녀를 급하게 병원으로 옮겼다.

상처가 너무 심해 마취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수술에 들어갔으나 의사들도 더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겨우 의식을 되찾은 성녀 마리아 고레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을 생각하며 그토록 극심한 고통을 참아냈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병원으로 찾아온 본당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보고 마지막 영성체를 했다. 

본당 신부는 성체를 영해 주면서 “십자가 위에서 원수를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 주님처럼, 너를 이토록 참혹하게 만든 알레산드로를 진심으로 용서해 주겠느냐?”라고 묻자 마리아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저 역시 그를 용서하고 그를 위해 천국에서 기도할 겁니다. 저는 십자가 옆에 있던 강도처럼 그를 천국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마 하느님께서도 그를 용서해 주실 거예요.” 

이렇게 정결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성녀 마리아 고레티는 1902년 7월 6일 오후,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에 마지막 성체를 모시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그녀의 유해는 로마 남부 네투노에 있는 예수 고난회의 은총의 성모와 성녀 마리아 고레티 성당에 모셔져 있다.

그녀의 영웅적 덕행과 정결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순교자다운 죽음은 그 지역뿐만 아니라 세계 전 지역으로 널리 알려졌고, 그녀의 시성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났다. 한편 알레산드로는 로마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종신형 대신 30년의 노동형을 받았다. 

여러 해 동안 전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지내던 그는, 어느 날 밤 한 어린 소녀가 머리에 화관을 쓰고 하얀 베일을 휘감은 채 손에 백합을 들고 나타난 것을 보았다. 자신이 참혹하게 죽인 소녀가 환한 미소를 띤 얼굴로 다가와 백합꽃을 전해주는 꿈을 꾼 뒤에 비로소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진심으로 뉘우치며 성녀 마리아 고레티와 그녀의 가족에게 용서를 구했다. 남은 형기를 모범적으로 마치고 출옥한 알레산드로는 성녀 마리아 고레티의 어머니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했다. 어머니 역시 이미 자신의 딸이 용서했다며 그를 껴안고 기꺼이 용서해 주었다.

성녀 마리아 고레티는 1947년 4월 27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복되었는데, 그때 알레산드로는 시복 재판의 중요한 증인이 되었다. 그리고 한때 어린아이를 성인품에 올리는 문제로 논쟁이 일기도 했지만, 교황청 시성성은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수호한 그녀의 영웅적 행동을 어른의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1950년 6월 24일 교황 비오 12세는 그녀의 시성식 미사를 봉헌하며 “마리아는 하느님의 너그러운 은총과 그 은총에 대한 굳은 결의의 응답에 의지하여 목숨을 바치고 동정의 영광을 잃지 않았다.”라며 그녀를 일컬어 ‘20세기의 성녀 아녜스(Agnes)’라고 칭송했다. 

이 시성식 미사에는 성녀의 어머니와 형제들 그리고 회개한 후 새사람이 된 알레산드로도 참석했다. 알레산드로는 후에 카푸친 작은형제회의 평수사가 되어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 회개와 봉사의 삶을 살았다. 성녀 마리아 고레티는 모든 청소년의 수호성인으로서, 특별히 서로 용서하지 못하고 성도덕이 문란해지는 현대인에게 훌륭한 모범이 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3. 마리아 막달레나 포스텔

 

  • 세례명 축일
    07월 16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포스텔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Magdalen Postel

  • 신분과 직업
    설립자, 수녀원장 마리아 막달레나 포스텔

  • 활동 연도와 지역
    1756-1846년

 

 

마리아 막달레나 포스텔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들렌, 막딸레나, 메리, 미르얌, 미리암, 포스뗄.

 

 

마리아 막달레나 포스텔 이야기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포스텔(Maria Magdalena Postel)은 1756년 11월 28일 프랑스 노르망디(Normandie)의 바르플뢰르(Barfleur)에서 요한 포스텔(Jean Postel)과 테레사 르발루아(Therese Levallois) 사이에서 태어나 율리아 프란치스카 카타리나 포스텔(Julie Francoise-Catherine Postel)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다른 아이들보다 4년이나 빠른 8살 때 첫영성체를 했다. 그 후 지방 학교를 나온 후 베네딕토 수녀회에서 교육을 받으며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생활을 소망하였으나 결국 사적인 서원만 발하였다. 

바르플뢰르로 돌아온 뒤에 그녀는 여학교를 개교했는데, 이 학교는 프랑스 혁명 동안에 성직자법을 거부하는 교회 인사들의 지하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혁명의 와중에서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며 기도와 보속을 실천하던 그녀는 1798년에 작은 형제회 3회원으로 입회하였다.

마침내 프랑스 혁명이 끝나자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포스텔은 다른 동료들과 더불어 혁명의 후유증, 특히 신자들의 종교적 무관심을 치유하고 교육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그래서 여성 교우들을 모집하고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여자 수도회를 설립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그녀의 노력이 계기가 되어 1807년 61세의 늦은 나이에 ‘자비의 그리스도인 학교 수녀회’(The Sisters of Christian Schools of Mercy)를 설립하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새로운 이름을 수도명으로 선택하였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포스텔은 수녀회 설립 초기에 많은 난관에 부딪혔지만 절대로 좌절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극복하였다. 결국 1832년 생-소뵈르-러-비콩트(Saint-Sauveur-le-Vicoste)에 본원을 개설하였고, 1837년에 작은 형제회 제3회의 규칙을 기초로 해서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다. 

그 후 수녀회는 날로 발전해 나갔고, 설립자는 거의 40여 년 동안 수녀회를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다가 1846년 7월 16일 본원에서 선종하였다. 그녀가 설립한 수녀회는 1859년 교황 비오 9세(Pius IX)로부터 일부 승인을 거쳐 1901년에 완전한 승인을 받았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포스텔은 1908년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25년 5월 24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4. 마리아 막달레나

 

  • 세례명 축일
    07월 22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Magdalen

  • 신분과 직업
    신약인물, 예수의 제자, 부인 마리아 막달레나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경

 

 

마리아 막달레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들렌, 막딸레나, 메리, 미르얌, 미리암.

 

 

마리아 막달레나 이야기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gdalena)는 복음서에서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루카 8,2)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갈릴래아 호수 서쪽에 있는 어촌 마을인 막달라(Magdala) 출신의 마리아라는 뜻으로 지명을 이용해 이름을 수식한 것으로 보아 가까운 친척이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이름은 신약성경에서 모두 12번 나온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치유 은총으로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뒤에 비슷한 처지의 다른 여인들과 함께 자기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을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었다(루카 8,2-3).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마지막까지 십자가 곁을 지켰고(마태 27,56; 마르 15,40; 요한 19,25), 저녁때가 되어 아리마태아 출신의 부유한 사람이자 의회 의원인 요셉(Josephus, 3월 17일)이 빌라도의 허락을 받고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 받아 바위를 깎아 만든 자기의 새 무덤에 모실 때도 그 맞은쪽에서 지켜보고 있었다(마태 27,61; 마르 15,47). 

안식일 다음 날, 주간 첫날 이른 아침에 몇몇 여인과 함께 향료를 들고 무덤으로 달려갔다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고 그리스도의 시신이 없음을 발견했으며(마태 28,1; 마르 16,1; 루카 24,1-3; 요한 20,1-2), 무덤 밖 동산에서 슬피 울고 있을 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시고 “마리아야!” 하며 부르시는 부활하신 스승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사도들에게 전할 사명을 받고 제자들에게 가서 그 소식을 전하였다(요한 20,11-18).

복음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다른 여러 마리아 중에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와 분명하게 같은 인물로 제시된 이는 없다. 단지 서방 교회 전통에서는 오래전부터 예수님께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루카 7,36-50)와 성녀 마르타(Martha, 7월 29일)와 성 라자루스(Lazarus, 7월 29일)의 동생인 베타니아(Betania)의 마리아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와 같은 인물로 보아왔다. 

오리게네스를 비롯한 초기 성서학자들은 이들을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보았지만,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가 591년의 강론에서 루카 복음 7장의 ‘죄 많은 여자’를 ‘창녀’로 잘못 해석하고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와 요한 복음 11장 2절의 ‘베타니아의 마리아’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와 같은 사람으로 간주하면서 이런 전통이 생겼다. 

그 후 서방 교회에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만나 창녀 생활을 청산하고 회개한 인물로서 참회와 속죄의 이상적 모델로 여겨져 왔다. 실제로 많은 예술가가 그러한 모습으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를 표현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과 전통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이미지를 왜곡하는 부정적 결과를 가져왔다. 가톨릭 교회는 1969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례 개혁을 진행하면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가 창녀였다는 오해를 철회하고, 11세기 로마에서 시작해 다른 곳으로 확산하여 7월 22일에 로마 보편 전례력에서 기념해 온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를 위한 기념일은 유지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성경 안에서 드러나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의 분명한 모습, 즉 일곱 마귀에서 해방된 후 헌신적으로 예수님과 그 일행의 시중을 들었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시는 마지막 순간에도 주님 곁을 지켰으며, 주간 첫날 이른 아침에 무덤으로 가서 빈무덤을 발견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나 경배했고, 주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다른 사도들에게 알리라는 사명을 예수님께 직접 받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동방 교회 전승은 10세기부터 ‘향유를 들고 다니는(Mirofora)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를 기념하면서 베타니아의 성녀 마리아와는 다른 사람으로 보아왔다. 그 전승에 따르면 주님 승천과 성령 강림 이후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성모 마리아와 사도 성 요한(Joannes, 12월 27일)과 함께 에페수스(Ephesus)로 가서 선교하다가 선종한 후 그곳에 묻혔다고 한다. 그런데 프랑스 교회의 전승은 이와는 다르다. 

그에 따르면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성녀 마르타와 성 라자루스와 동료들과 함께 박해를 피해 배를 타고 이스라엘을 떠나 표류하다가 프랑스 남서부 프로방스(Provence) 지방에 도착해 마르세유(Marseilles)에서 복음을 전하고 알프스 산의 한 동굴에서 30년 동안 은수자로 살다가 선종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의 유해 또한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 지역에 매장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프랑스 전승은 서방 교회의 오랜 전통대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와 베타니아의 성녀 마리아를 같은 사람으로 보고 기념해 왔다. 옛 “로마 순교록” 역시 7월 22일 목록에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해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주셨고 부활의 첫 목격 증인이 된 인물로 마르세유에서 선종했다고 기록했고, 7월 29일 목록에서는 구세주를 환대한 성녀 마르타에 대해 그녀의 동생인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와 죽음에서 소생한 성 라자루스와 함께 설명하며 프랑스 남동부 타라스콩(Tarascon) 지역에서 선종했다고 기록하였다. 

2001년 발행되어 2004년 일부 개정된 최신 “로마 순교록”은 7월 22일과 29일의 관련 목록에서 프랑스 전승과 관련된 언급을 삭제하고, 7월 29일에 성녀 마르타뿐만 아니라 죽었다가 주님에 의해 소생한 성 라자루스와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던 성녀 마리아를 함께 기념하도록 함으로써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와 베타니아의 성녀 마리아를 동일 인물로 보던 전통에서 벗어났다.

2016년 6월 3일 예수 성심 대축일에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예수님 부활의 첫 목격자인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의 의무 기념일을 축일로 승격하는 교령을 발표했다. 

경신성사성 차관 아서 로시 대주교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단히 사랑했고, 아울러 그분에게 사랑받은 이 여성의 중요성이 자비의 희년에 새롭게 조명되길 바란다.”라며 “이 결정은 여성의 존엄성과 새로운 복음화, 그리고 하느님 자비의 위대함에 대한 깊은 성찰의 결과”라고 밝혔다. 

그리고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특히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에게 주님의 부활 소식을 알림으로써 그들이 용기를 내어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도록” 예수님께 받은 영예로운 사도 직무를 수행했기에 “새로운 복음화의 여정을 걷는 교회는 성녀의 이런 특별한 역할에 주목하고 전례를 통해 공경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했다.

이런 취지에 따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을 위해 마련된 새 감사송은 ‘사도들을 위한 사도’(Apostolorum Apostola)라는 제목을 부여받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과 연구 결과를 통해 밝혀진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의 행적과 역할을 정리하여 작성되었다. 

“… 살아 계신 주님을 사랑하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주님을 뵈었으며 무덤에 묻히신 주님을 찾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경배하였나이다. 주님께서는 동산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어 사도들 앞에서 사도 직무의 영예를 주시고 새로운 삶의 기쁜 소식을 세상 끝까지 전하게 하셨나이다. …” 

감사송 본문은 특별히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가 주님 부활의 첫 증인이라는 사실과 사도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증언하는 첫 번째 사람으로서 사도 직무의 영예를 주님에게 직접 받았음을 강조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5. 마리아

 

  • 세례명 축일
    07월 29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 신분과 직업
    신약인물, 동정녀 마리아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경 베타니아

 

 

마리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마리아 이야기

베타니아의 성녀 마리아는 신약성경의 루카 복음 10장 38-42절과 요한 복음 11~12장에서 등장한다. 두 곳의 내용을 종합하면 성녀 마리아는 주님을 환대한 성녀 마르타(Martha)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성 라자루스(Lazarus)의 누이동생으로 예루살렘 인근 베타니아에 살았고,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린 적이 있었다. 

이들 3남매는 주님의 친구이자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들로, 예수님께서도 종종 그들 집에 머무신 듯하다. 루카 복음은 예수님께서 방문하셨을 때의 일을 전하며 성녀 마르타를 활동적인 여성으로 묘사하였다.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던 성녀 마르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10,40) 하고 말했을 때, 주님께서는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10,41-42)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성녀 마르타는 보통 활동적이고 봉사하는 그리스도인의 상징으로, 성녀 마리아는 기도하며 관상 생활을 추구하는 이들의 모범으로 인식되었다.

요한 복음 11장을 보면 성 라자루스가 병을 앓고 있을 때 성녀 마리아와 성녀 마르타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청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가지 않으시고 며칠 뒤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씀을 듣고 성녀 마르타는 주님을 맞으러 나갔으나 성녀 마리아는 그냥 집에 있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는 이미 성 라자루스가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지난 뒤였고,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위로하고자 와 있었다. 성녀 마리아는 스승님께서 부르신다는 언니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 가서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며 울었고, 예수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셨다. 주님의 명령으로 라자루스가 무덤에서 나와 소생하자 마리아를 찾아왔던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요한 복음 1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에 가셨을 때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성녀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성 라자루스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때 성녀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 에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12,5)라는 유다 이스카리옷의 말에 예수님께서는 당신 장례 날을 위한 일이라며 마리아를 두둔해주셨다.

프랑스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성녀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 · 승천하신 후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와 성 라자루스와 동료들과 함께 박해를 피해 배를 타고 이스라엘을 떠나 표류하다가 프랑스 남서부 프로방스(Provence) 지방에 도착해 그 지방에 복음서를 전달했다. 

이런 프랑스 전승에는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 이후 그리스도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gdalena, 7월 22일)와 주님께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루카 7,36-50)와 베타니아의 성녀 마리아를 동일 인물로 보았던 전통이 반영되어 있다. 

실제로 옛 “로마 순교록”은 7월 22일 목록에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해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주셨고 부활의 첫 목격 증인이 된 인물로 마르세유에서 선종했다고 했고, 7월 29일 목록에서 성녀 마르타에 대해서는 구세주를 환대한 집주인으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와 성 라자루스와 남매 사이로 프랑스 남동부 타라스콩에서 선종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관련 목록에서 프랑스 전승과 관련된 언급을 삭제하고, 7월 29일에 성녀 마르타뿐만 아니라 죽었다가 주님에 의해 소생한 성 라자루스와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던 성녀 마리아를 함께 기념하도록 함으로써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와 베타니아의 성녀 마리아를 동일 인물로 보던 전통에서 벗어났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녀 마르타, 성녀 마리아, 성 라자로 기념일’을 7월 29일로 정하고, 기존의 로마 보편 전례력 7월 29일에 기념하던 ‘성녀 마르타 기념일’을 대체하기로 한 교황청 경신성사성의 교령(2021년 1월 26일)을 승인 확정했다. 그동안 서방 교회 전통에서 성녀 마리아의 신원이 분명하지 않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로마 보편 전례력을 개정하면서 7월 29일에 성녀 마르타 기념일만 수록했었다. 

성 라자루스는 로마 보편 전례력에서는 빠졌지만, 옛 “로마 순교록”의 12월 17일 목록에서 주님에 의해 죽음에서 소생한 인물이자 주교로서 프랑스의 마르세유에서 선종했다고 소개하며 기념해 왔었다. 이번 교령은 최신 “로마 순교록”의 연구 결과와 일부 지역 전례력에서 이미 3남매를 같은 날 함께 기념해 온 사실 등을 근거로 7월 29일을 3남매의 복음적 증거를 함께 기념하는 날로 변경 · 확정한 것이다. 

그러면서 “주 예수님은 베타니아의 집에서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의 가족 정신과 우애를 경험하셨고, 이런 까닭에 요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다고 말한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너그러이 환대를 베풀었고,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온순하게 경청했으며, 라자로는 죽음을 굴복시키신 분의 명령으로 무덤에서 즉시 나왔다.”라고 3남매의 복음적 증거를 강조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6. 마리아

 

  • 세례명 축일
    08월 15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 신분과 직업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

 

 

마리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마리아 이야기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us)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Maria)에 대해 성경은 극히 적은 내용만을 전해주고 있다. 신약성경의 복음서 안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루카 1-2장), 공생활 중 카나의 혼인 잔치(요한 2,1-12)와 예수님의 참가족 이야기(마르 3,31-35),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처형되시는 고통의 순간(요한 19,17-27)에 잠깐 등장한다. 이어서 사도행전 1장 14절에서 제자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는 마리아에 대한 언급이 잠시 나온다. 

이렇듯 성경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은 어머니로서, 때로는 하느님의 뜻을 다 알아듣지는 못해도 묵묵히 믿고 따르는 참된 신앙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웃의 어려움을 알아보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고, 제자들을 돌보고 함께 기도하는 자상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성경 안에서 마리아에 대한 언급이 적은 것은 성경의 주된 관심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과 그분의 수난과 부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카와 마태오 복음서의 기록을 통해 보면 마리아는 다윗 가문의 요셉(Josephus, 3월 19일)과 약혼한 처녀였고, 천사 가브리엘(Gabriel)의 방문을 통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구세주,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리라는 예고를 들었다. 그 놀라운 상황 속에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여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응답으로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었다. 

마태오 복음에 따르면 성 요셉 또한 꿈에서 천사로부터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라는 말을 듣고 즉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마리아와 요셉은 호적 등록을 위해 유다 지방 베들레헴에 갔다가 그곳의 한 마구간에서 예수를 낳았고, 목자들과 동방 박사들의 방문을 받았다. 

율법에 따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봉헌하면서 예언자 성 시메온(Simeon, 10월 8일)과 성녀 한나(Anna, 9월 1일)를 만나 축복과 동시에 장차 마리아가 겪게 될 고통에 대한 예언을 듣기도 했다.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 갔다가 헤로데가 죽은 뒤 천사의 명으로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으로 돌아가 살았다.

마리아의 출생과 가족 관계에 대해서는 170-180년경에 쓰여진 “야고보 원복음서”(Protoevangelium Jacobi)에 대부분 의존하고 있다. 야고보 원복음서는 비록 교회에서 위경(Apocrypha)으로 간주하지만, 마리아의 부모와 성장 과정 등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실제 이 책은 초대교회에 널리 퍼져 있었던 작품일 뿐만 아니라, 마리아의 어린 시절을 다루고 있어 마리아에 대한 공경에 큰 역할을 했다. 그에 따르면, 마리아의 아버지인 성 요아킴(Joachim, 7월 26일)은 부유하고 이스라엘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인 성녀 안나(Anna, 7월 26일)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이들에게 흠이라고는 결혼한 지 오래되었으나 아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아이가 없다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상태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 요아킴은 단식하며 하느님께 기도하고자 광야로 갔고, 집에 남은 성녀 안나 또한 주님 앞에서 울며 탄식 기도를 바쳤다. 그들의 간절한 기도는 곧바로 응답을 받았다. 한 천사가 성녀 안나에게 나타나 그가 잉태하여 낳은 아이는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이라고 예고해 주었다. 

이에 성녀 안나는 그 아이를 주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했다. 광야에서 기도하던 성 요아킴 역시 이와 비슷한 환시를 보고는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는 딸을 낳았고, 안나는 아기에게 마리아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마리아가 세 살이 되었을 때,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는 하느님께 약속한 대로 마리아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려가 그곳에서 양육되도록 맡겼다고 한다.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성자 다음으로 모든 천사와 사람들 위에 들어 높임을 받으신 성모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한 지극히 거룩한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교회에서 특별한 공경을 받아왔다.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은 온갖 위험과 아쉬움 중에 성모 마리아의 보호를 청하며 전구 기도를 바쳐왔는데, 이미 3세기 중엽부터 교회 공동체가 사용한 ‘성모님께 보호를 청하는 기도’(sub tuum praesidium, 일을 마치고 바치는 기도)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천주의 성모님, 당신의 보호에 저희를 맡기오니 어려울 때에 저희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마시고 항상 모든 위험에서 저희를 구하소서. 영화롭고 복되신 동정녀시여.” 431년 에페소 공의회는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 후 성모 마리아에 대한 교회 공동체의 공경과 신심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다.

교회 안에 언제나 있었던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이 비록 온전히 독특한 것이기는 하나,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 성자께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받으시는 흠숭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오히려 그 흠숭을 최대한 도와준다. 교회는 하느님의 어머니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신심을 건전한 정통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 시대와 장소의 상황에 따라 또 신자들의 품성과 기질에 따라 승인해왔다. 

성모 신심은 어머니께서 존경을 받으실 때 그 아드님, 곧 만물이 그분을 위하여 있고(콜로 1,15-16 참조)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기꺼이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신”(콜로 1,19) 성자께서 바르게 이해되고 사랑과 영광을 받으시게 하며 그분의 계명이 준수되게 한다(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66항 참조). 그래서 교회는 성모 마리아와 관련해 네 가지 믿을 교리를 가르치고 있는데,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마리아가 그것이다.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주요 축일은 다음과 같다 :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1월 1일)

주님 봉헌 축일(2월 2일)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2월 11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월 25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5월 31일)

카르멜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7월 16일)

성모 대성전 봉헌 기념일(8월 5일)

성모 승천 대축일(8월 15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8월 22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9월 8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9월 15일)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10월 7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11월 21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12월 8일)

마리아를 세례명으로 선택한 경우 축일은 위의 날짜 중에서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8월 15일과 1월 1일을 주로 선택한다. 그리고 마리아라는 이름뿐만 아니라 의미상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거나 성모와 관련된 여러 명칭과 애칭들 역시 세례명으로 사용한다.

알림 또는 고지(告知, Annuntiatio)에서 유래해 주님 탄생 예고의 성모(성모영보)를 뜻하는 안눈치아타(Annunciata),

장미(Rose)와 마리아(Maria)를 합친 로즈마리(Rosemary, Rose Marie),

카르멜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서 나온 카르멜라(Carmela) 또는 카르멘(Carmen),

성모 승천(Assumptio Mariae)의 의미를 지닌 아숨타(Assumpta) 또는 아순타(Assunta),

하늘(Caelum)에서 유래하며 하늘의 모후(Regina Caeli)이신 성모를 상징하는 첼리나(Celina) 또는 레지나(Regina),

망망대해에서 길잡이가 되고 우리 삶에 희망을 주는 바다의 별(Stella Maris)과 같은 성모를 뜻하는 마리 스텔라(Marie Stella) 또는 스텔라(Stella),

탄생(Nativitas, Nativity)에서 유래해 성모 탄생을 뜻하는 나탈리아(Natalia) 또는 나탈리(Natalie),

고통의 성모(Mater dolorosa)에서 나온 돌로로사(Dolorasa),

묵주 기도(Rosarium, Rosary)의 성모에서 나온 로사리아(Rosaria) 또는 로살리아(Rosalia),

순결하고 고귀한 의미를 지닌 백합(Lily) 같은 성모를 뜻하는 릴리안(Lilian 또는 Lillian),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Immaculata Conceptio)에서 나와 원죄 없이 잉태되신(무염시태) 성모를 뜻하는 임마쿨라타(Immaculata) 또는 임마콜라타(Immacolata) 등이 있다.

이상과 같은 이름을 세례명으로 사용할 경우 축일은 성모 마리아의 여러 축일 중에서 자유롭게 선택하거나 모든 성인 대축일(11월 1일)을 사용할 수 있다. 성모 마리아의 여러 축일 중에서 선택할 경우 가능한 이름의 의미와 잘 어울리는 날로 축일을 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안눈치아타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인 3월 25일, 로즈마리는 계절적으로 적합한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인 5월 31일, 카르멜라 또는 카르멘은 카르멜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7월 16일, 아숨타 또는 아순타와 마리 스텔라 또는 스텔라는 성모 승천 대축일인 8월 15일, 첼리나 또는 레지나는 성모 승천 대축일인 8월 15일 또는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인 8월 22일, 나탈리아 또는 나탈리는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인 9월 8일, 돌로로사는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인 9월 15일, 로사리아 또는 로살리아는 묵주 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10월 7일, 릴리안과 임마쿨라타 또는 임마콜라타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인 12월 8일을 축일로 선택할 수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7. 마리아

 

  • 세례명 축일
    08월 21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 신분과 직업
    순교자 마리아

  • 활동 연도와 지역
    1181년 알시라

 

 

마리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마리아 이야기

알시라의 성 베르나르두스(Bernardus)의 여동생인 성녀 그라시아(Gratia, Gracia)와 성녀 마리아(Maria)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여러 차례 개정 작업을 거친 현 “로마 순교록”에서는 그들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지만, 옛 “로마 순교록”에서 그들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에스파냐 발렌시아 지방 알시라에서 시토회 수도승으로 아흐메드(Ahmed)라고 불리던 성 베르나르두스와 그의 여동생으로 자이다(Zaida)로 불리던 성녀 마리아와 조라이다(Zoraida)로 불리던 성녀 그라시아가 순교하였다. 그들은 이슬람교를 믿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들이다.

전승에 따르면 성 베르나르두스의 본래 이름은 아흐메드로 발렌시아 지방에 있었던 사라센 왕국의 카렛(Carlet) 지방 족장인 알만소르(Almanzor)의 아들이었다. 그에게는 형과 두 명의 여동생이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형과 함께 궁정에서 지내며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1156년 아라곤(Aragon) 왕국과의 전쟁에서 사로잡힌 포로들의 석방을 위한 외교적 임무를 띠고 카탈루냐(Cataluna) 지방의 바르셀로나(Barcelona)에 갔다. 외교적 협상에 실패한 그는 돌아오던 중에 길을 잃고 밤새 숲속을 헤매다가 어디선가 천사가 부르는 듯한 노랫소리를 듣고 타라고나(Tarragona)의 포블레트에 있는 시토회의 왕립 수도원(Real Monasterio de Santa Maria de Poblet)을 찾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수도원장의 친절한 환대를 받고 흰색 수도복을 입은 수도승들의 겸손과 기도 생활에 크게 감동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교 교리와 신앙에 대해 배우고 나서 이슬람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시토회에 입회하였다. 그러면서 베르나르두스라는 새로운 이름을 수도명으로 정했다.

1181년에 성 베르나르두스는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발렌시아로 돌아왔다. 그리고 카렛으로 가서 여동생인 자이다와 조라이다 그리고 아버지를 이어 족장에 오른 형을 만났다. 여동생들은 그의 말을 듣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자이다는 마리아로, 조라이다는 그라시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 소식을 들은 형이 격분하자 성 베르나르두스는 성녀 그라시아와 성녀 마리아와 함께 피신했다가 그해 8월 21일 알시라에서 체포되어 무참히 살해되었다. 그들의 시신은 이슬람교의 지배하에서도 개종하지 않은 에스파냐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알시라에 묻혔다. 

1242년 그 지역을 정복해 무슬림의 손에서 해방한 아라곤의 왕 하우메 1세(Jaume I, 1208-1276)는 그들의 유해를 찾은 후 순교 장소에 성당을 지어 봉헌하며 삼위일체 수도회에 관리를 위임했다. 1603년 그들의 유해는 시토회의 포블레트 수도원으로 이장되었고, 1643년 이들 세 순교자는 알시라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8. 마리아 미카엘라

 

  • 세례명 축일
    08월 24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미카엘라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Michaela

  • 신분과 직업
    동정녀, 설립자 마리아 미카엘라

  • 활동 연도와 지역
    1809-1865년

 

 

마리아 미카엘라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메지에르, 메리, 미르얌, 미리암, 미카엘라.

 

 

마리아 미카엘라 이야기

에스파냐의 마드리드(Madrid)에서 태어난 성녀 마리아 미카엘라 데메지에르(Maria Michaela Desmaisieres)는 부모님 덕에 부족함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프랑스의 우르술라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다가 13세 때에 아버지가 사망한 후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도우며 살았다. 

그녀는 결혼하라는 모든 요구를 물리치고 파리(Paris)와 브뤼셀(Brussel)의 에스파냐 대사이던 오빠를 찾아가 몇 년을 함께 살았다. 그런데 그녀가 하는 일이 주로 연회에 참석하는 등 외적으로 화려한 일들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매일 영성체를 하고 또 고행복을 입고 지냄으로써 이 모든 세속적인 일들을 이기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하루의 대부분을 버림받은 사람들,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데 주력하였다.

에스파냐로 다시 돌아온 그녀는 즉시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한 조직을 갖추었다. 이 빈민 구제회가 발전하여 '성체와 애덕의 시녀회'라는 수녀회가 되었고, 1859년에 그녀는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수녀회는 주로 거리의 윤락여성들을 돌보았는데, 설립자가 생존해 있을 때에 교황청의 인가를 받고 날로 성장하였다. 

그녀는 1865년 8월 24일 콜레라에 걸린 환자들을 돌보다가 그 병에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1925년 시복되었고, 1934년 3월 4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녀의 축일은 8월 25일에 기념하기도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9. 마리아 데 라 카베사

 

  • 세례명 축일
    09월 09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데 라 카베사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de la Cabeza

  • 신분과 직업
    과부 마리아 데 라 카베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175년

 

 

마리아 데 라 카베사 세례명과 같은 이름

또리비아, 메리, 미르얌, 미리암, 토리비아.

 

 

마리아 데 라 카베사 이야기

에스파냐의 토레존(Torrejon)에서 태어난 성녀 마리아 토리비아(Maria Toribia)는 성 이시도루스(Isidorus, 5월 15일)와 결혼하여 남편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지만 검소하게 살면서 어려운 이를 돕는 생활을 하였다. 

그녀는 남편과 사별한 후에도 남편 못지않은 신심과 가난을 실천했기 때문에 마리아 데 라 카베사(Maria de la Cabeza)라는 이름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697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XII)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0. 마리아 데 세르벨리온

 

  • 세례명 축일
    09월 19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데 세르벨리온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de Cervellione

  • 신분과 직업
    동정녀, 수녀 마리아 데 세르벨리온

  • 활동 연도와 지역
    1230-1290년

 

 

마리아 데 세르벨리온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세르벨로, 세르벨론.

 

 

마리아 데 세르벨리온 이야기

성녀 마리아 데 세르벨리온(Maria de Cervellione)은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 귀족 가문의 딸로 태어났다. 어느 날 보통 ‘메르체다리오회’(Mercedarian 또는 Order of Mercy)라고 부르는 ‘노예 해방을 위한 속량의 성모회’(Order of the Blessed Virgin Mary of Mercy) 소속 베르나르도 데 코르베라(Bernardo de Corbera) 신부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 

그 신부는 당시 에스파냐와 북아프리카에서 무슬림에 의해 노예가 되거나 포로로 잡힌 그리스도인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속량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었다. 이에 크게 감동한 성녀 마리아 데 세르벨리온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1265년 그녀는 바르셀로나의 메르체다리오회 수도원 인근에 사는 신심 깊은 여성들의 작은 공동체에 들어갔다. 

그들은 베르나르도 신부의 지도를 받으며 기도와 선한 일을 실천하며 지냈다. 그 후 그들은 속량의 성모회 3회(Third Order of Our Lady of Ransom de Mercede)를 구성하는 승인을 받고 속량의 성모회 수도복을 입게 되었다. 그들은 서원할 때 복음삼덕 외에 그리스도인 노예들을 위한 기도의 약속을 추가했다.

초대 원장으로 선출된 성녀 마리아 데 세르벨리온은 동료 자매들과 함께 무슬림에 의해 노예가 된 그리스도인들 속에서 활동하며 그들을 돕는 데 일생을 바쳤다. 1290년 9월 19일 바르셀로나의 수녀원에서 선종한 후 같은 도시에 있는 속량의 성모회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생애 말년에 그녀는 예언의 은사를 받아 많은 이들을 도와주었고, 사후에도 폭풍 속에서 곤경에 처한 선원들에게 나타나 구해준 기적으로 인해 에스파냐에서 뱃사람들의 수호성인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이런 이유로 교회 미술에서 그녀는 수도복을 입고 백합과 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692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XII)에 의해 승인되었다. 성녀 마리아 데 세르벨리온은 성녀 에울랄리아(Eulalia, 2월 12일)와 함께 바르셀로나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으며, 마리아 데 세르벨로(Maria de Cervello) 또는 마리아 데 세르벨론(Maria de Cervellon) 등으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1. 박큰아기 마리아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朴大阿只 Mary

  • 신분과 직업
    부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6-1839년 한국

 

 

박큰아기 마리아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리아, 메리, 미르얌, 미리암, 박 마리아, 박마리아.

 

 

박큰아기 마리아 자료

성녀 박큰아기 마리아(Maria)는 부유한 집안의 딸로서 박희순 루치아(Lucia)의 언니이다. 박 마리아는 동생인 루치아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다가 외교인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히자 조카 집에서 동생과 함께 지내던 중 4월 15일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행적은 기록상으로 별로 나타나지 않으나, 동생과 함께 매질과 주리형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녀는 국법에 따라 동생과 같은 날 순교하지 못하고, 동생이 순교한 후 9월 3일에 54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치명하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2. 원귀임 마리아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元貴任 Mary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9-1839년 한국

 

 

원귀임 마리아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리아, 메리, 미르얌, 미리암, 원 마리아, 원마리아.

 

 

원귀임 마리아 자료

성녀 원귀임 마리아(Maria)는 고양군 용대리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그러나 아홉 살 때부터는 서울에 사는 열심한 교우이며 고모인 원 루치아(Lucia) 집에 기거하면서 교리를 배웠다.

마리아는 천성이 순하고 선량하여 고모의 자랑거리였으며, 16세 때에 동정허원을 하고 머리를 얹어 시집간 여자 행세를 하였으며, 언제나 나이보다 점잖은 모범과 한결같은 마음씨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1839년 2월 포교들이 집으로 몰려왔을 때에 다행히 몸을 피할 수 있었지만, 마을 사람의 밀고로 붙잡히게 되었다. 처음 한동안은 당황하여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으나, 이 세상에서 주님의 뜻이 아닌 일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에 이르자 마음의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그녀는 문초를 당할 때마다 거의 매번 고문을 당하였지만, 거의 항상 조용하고 의젓하게 답변하였다.

“네가 천주교인이냐?”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저는 천주교인입니다.”

“배교하라, 그러면 살려주마.”

“저는 천주를 공경하고 제 영혼을 구하고자 합니다. 제 결심은 단단하여서 죽어야만 한다면 죽겠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 영혼을 구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배교하면 영혼을 잃게 됩니다.”

결국 마리아는 다른 교우들과 마찬가지로 옥중에서 허기와 갈증으로 모진 고생을 했고, 또 열병에 걸리는 등 수많은 고생을 하다가 마침내 1839년 7월 20일에 다른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순교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22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3. 이연희 마리아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李連熙 Mary

  • 신분과 직업
    부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4-1839년 한국

 

 

이연희 마리아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이 마리아, 이마리아.

 

 

이연희 마리아 자료

성녀 이연희 마리아(Maria)는 1839년 5월 24일에 순교한 남명혁의 아내로서 성격이 강직하고 매우 영리하며 부지런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리에도 밝아서 많은 여교우들을 가르쳐 성사를 타당하게 받도록 주선했다.

남편과 함께 주교와 신부들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첨례를 보았으며, 성직자와 신자들이 모여오면 이들을 대접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하는 등 갖은 열성을 보였다. 이러한 그녀의 모범은 많은 교우들의 마음을 끌었고, 그녀의 남편이 회장직을 잘 수행하도로 도와주었다.

기해년 4월 7일 그녀는 남편과 12세 된 아들과 함께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이것은 아내가 체포된 데 대한 양심을 품은 어느 예비신자의 밀고로 이루어진 것이다. 마리아는 옥에 갇혀 있을 때 포졸들의 무례한 언동을 준절히 꾸짖기도 했다.

그러나 남편 남 다미아누스(Damianus)로부터 “교우는 천주를 위하여 순량한 양같이 죽어야 하오. 이렇게 좋은 기회를 잃지 마오.” 하는 주의를 듣고부터는 모욕과 학대를 원망하지 않고 참아 받았다.

그러나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모정의 순교였다. 당시 12세의 아들이 다른 감방에 갇혀 있었는데 형리들이 그 아들을 매질한 뒤 잔인하게도 싱글벙글 웃으며 마리아를 찾아와 아들을 매질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들이 가혹한 형벌을 이기지 못하여 혹시 배교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이것은 주님의 가장 크신 영광을 위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아니 하였다고 한다.

어떤 증인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마음을 송두리째 바쳐 천주를 진실히 사랑하였고, 그 영혼의 원은 오직 천국을 향하여 있었다.” 한다. 그녀는 12살 된 아들을 남겨 놓고 1839년 9월 3일, 서소문 밖에서 36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치명하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4. 이인덕 마리아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李仁德 Mary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8-1840년 한국

 

 

이인덕 마리아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이 마리아, 이마리아.

 

 

이인덕 마리아 자료

성녀 이인덕 마리아(Maria)는 1839년 12월 29일에 순교한 이영덕 막달레나(Magdalena)의 동생으로 할머니 조 바르바라(Barbara)에게서 천주교의 진리를 배워 어머니와 언니와 함께 입교하였다. 이들 세 사람은 그녀의 부친이 너무나 완고하고 또 천주교를 적대시했기 때문에, 부친이 지방으로 여행을 떠난 틈을 이용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이 사실을 안 부친은 더욱 엄해졌고, 더욱이 언니 이 막달레나의 혼인 문제로 심각한 상태에 이르자, 어머니와 언니와 함께 집을 뛰쳐나와 어느 신자 집에 숨어 살게 되었다.

처음에 이 소식을 들은 주교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였으나, 양반집 주인과 처녀들이 도망을 쳤다가 집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 죽음의 길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고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그들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고 회장들에게 부탁하여 그들을 보살펴 주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조금마한 집 한 칸을 얻어 거기서 살게 되었으나 굶주림과 추위로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 놓고 천주교를 신봉하게 되었으므로 곤궁과 고통은 별로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수계생활에만 전념하였다.

또 그들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자 하는 한결같은 마음과 원의로 주교가 체포되면 함께 자수키로 하였으나, 자수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말았다. 기해년 7월 어느 날 포졸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붙잡혔기 때문이다.

포청에 잡혀온 이 마리아는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무척 고생하였음은 물론이요, 잔악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뜻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형조로 이송된 후 또다시 그녀의 항구심을 꺾어보려고 새로운 고문을 가했으나 모두가 쓸데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교우요, 죽는 날까지 교우로 있겠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형조판서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녀는 언니인 이 막달레나가 사형선고를 받고 순교한 1개월 후인 1월 31일, 서울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아 치명하여 언니와 함께 동정과 순교의 두 가지 영광을 얻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22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5. 마리아 요세파 로셀로

 

  • 세례명 축일
    10월 03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요세파 로셀로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Josepha Rossello

  • 신분과 직업
    설립자 마리아 요세파 로셀로

  • 활동 연도와 지역
    1811-1880년

 

 

마리아 요세파 로셀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요세빠, 요셉파.

 

 

마리아 요세파 로셀로 이야기

이탈리아 북서부 리구리아(Liguria)의 사보나(Savona)에서 가까운 알비솔라 마리나(Albisola Marina)에서 짐꾼의 아홉 자녀 가운데 하나로 태어난 성녀 마리아 요세파 로셀로(Maria Josepha Rossello)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어려서부터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일찍이 수도생활을 원했으나 건강 등의 문제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16세 때에 작은 형제회의 3회원이 되었다.

1837년 그녀의 재능을 알아 본 사보나 교구의 주교가 그녀에게 집을 한 채 주고 소녀와 처녀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소규모로 출발한 이 단체는 나중에 병원과 학교 등을 거느린 ‘자비의 모후 수녀회’로 크게 발전하였다. 

성녀 마리아 요세파 로셀로는 40년 이상 이 수녀회를 운영하는데 헌신하였다. 그녀가 설립한 수녀회는 이미 그녀의 생전에 이탈리아와 라틴 아메리카 등으로 활발히 퍼져 나갔다. 

1880년 12월 7일 선종한 그녀는 1938년 11월 6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49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6. 마리아 프란치스카

 

  • 세례명 축일
    10월 06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프란치스카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Francisca

  • 신분과 직업
    동정녀, 3회원 마리아 프란치스카

  • 활동 연도와 지역
    1715-1791년 나폴리

 

 

마리아 프란치스카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방지가, 프란체스카, 프란치스카, 프랜시스.

 

 

마리아 프란치스카 이야기

성녀 마리아 프란치스카(Maria Francisca)는 안나 마리아 로사 니콜레타 갈로(Anna Maria Rosa Nicoletta Gallo)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16세 때에 부친이 어느 집안의 자제와 혼인하도록 강요하였으나 자신은 이미 하느님만 사랑하기로 결심한 후라며 거절하였다. 그러자 그녀의 부친은 그녀를 방안에 가두고 빵과 물만 주는 등 갖은 학대를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것도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한 단계로 받아들이며 인내하였고, 어머니가 그녀를 설득하려 하자 자신은 작은 형제회 3회 회원이 되겠다는 뜻만 밝혔다. 결국 그녀는 1731년 9월 8일 작은 형제회의 3회원이 되었다.

성녀 마리아 프란치스카의 주요 신심은 주님의 수난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녀는 그 후 38년 동안이나 교구사제인 요한 페시리의 사제관에서 일하였다. 

이때 그녀는 신비스런 현상들이 몸에서 일어남을 감지하기 시작했는데,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거나 사순절의 금요일이 되면 예수님의 수난에 버금가는 고통을 앓기 시작하였다. 

즉 게세마니(Gethsemane) 동산의 번뇌, 매 맞음, 가시관을 쓰심, 모욕, 침 뱉음, 죽음에 이르는 고통 등이었다. 사실 그녀는 오상 성흔을 이미 받았던 것이다.

이외에도 그녀에게는 더 많은 신체적인 고통이 따랐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자발적인 고행까지 행하였다. 한 번은 연옥 영혼들의 고통을 체험하였다고 한다. 성녀 마리아 프란치스카는 프랑스 혁명 초기까지 살았다. 그녀는 이 혁명의 무서움을 미리 예언하였다.

성녀의 유해는 나폴리의 산타 루치아 델 몬테(Santa Lucia del Monte) 성당에 모셔졌다. 그녀는 1843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867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7. 마리아 솔레다드

 

  • 세례명 축일
    10월 11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솔레다드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Soledad

  • 신분과 직업
    설립자 마리아 솔레다드

  • 활동 연도와 지역
    1821-1887년

 

 

마리아 솔레다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솔레다드, 아코스타, 토레스.

 

 

마리아 솔레다드 이야기

성녀 마리아 솔레다드 토레스 아코스타(Maria Soledad Torres Acosta)는 세례 때에 엠마누엘라(Emmanuela)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녀는 조용한 성품의 소녀로 자랐으며 놀이보다는 기도하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던 그녀가 미카엘 마르티네스 이 산즈(Michael Martinez y Sanz)라는 성모의 종 3회원 신부를 만나게 됨으로써 큰 변화를 일으켰다. 그는 수많은 병자와 버려진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인물이었다.

1851년 미카엘 마르티네스 이 산즈 신부는 7명의 부인들을 모았는데, 그들 가운데 맨 마지막 인물이 바로 엠마누엘라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녀는 이 수녀회의 실질적인 설립자가 되어 '고통의 성모님'의 가호 아래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이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1861년 '마리아 시녀회'는 겨우 교구 차원의 승인을 얻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였다. 1875년에는 산티아고데쿠바(Santiago de Cuba)에 첫 번째 해외 수녀원을 건립하였다. 

성녀 마리아 솔레다드는 35년 동안 이 수녀회의 지도자로서 봉사하였다. 그녀는 1950년 시복되었고, 1970년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8. 마리아 마르가리타 듀빌

 

  • 세례명 축일
    10월 16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마르가리타 듀빌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Margaret d'Youville

  • 신분과 직업
    과부, 설립자 마리아 마르가리타 듀빌

  • 활동 연도와 지역
    1701-1771년 캐나다

 

 

마리아 마르가리타 듀빌 세례명과 같은 이름

두비유,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따, 말가리타, 메리, 미르얌, 미리암.

 

 

마리아 마르가리타 듀빌 이야기

성녀 마리아 마르가리타 듀빌(Maria Margarita d'Youville, 또는 Maria Margarita Dufrost de Lajemmerais)은 1701년 10월 15일 캐나다 퀘벡(Quebec)주 몬트리올(Montreal) 교외 바렌(Varennes)에서 태어나 캐나다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성인이 된 인물이다. 

그녀는 크리스토퍼 뒤프로스트 드 라제므레(Christopher Dufrost de Lajemmerais)와 마리 르네 골티에(Marie-Renee Gaultier) 사이의 여섯 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7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극심한 가난 속에서 고생하던 그녀는 증조부인 피에르 부셰(Pierre Boucher)의 영향으로 퀘벡의 우르술라회에서 2년을 더 공부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어머니의 둘도 없는 협조자로서 동생들의 교육을 도맡게 되었다.

1722년 성녀 마리아 마르가리타는 프랑수아 듀빌(Francois d'Youville)과 결혼을 하고 시댁에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큰 고통이었다. 남편이 가정을 꾸려 나가는 데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의 잦은 외박과 인디언과의 불법 주류 거래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았다. 

남편이 심각한 병에 걸렸을 때 이미 그녀는 여섯 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결국 1730년 29살의 나이로 남편을 잃은 그녀는 절망적인 가난을 경험하게 되었고, 여섯 명의 자녀 중 네 명이 유아 때 사망하는 고통을 겪었다.

이런 모든 일 중에서도 성녀 마리아 마르가리타는 자신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키워나갔고, 모든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부드러운 사랑을 더욱 깊이 경험하였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모든 이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녀는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많은 자선 사업을 하였다. 훗날 사제가 된 두 명의 아들을 교육하고 눈먼 여성을 집으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얼마 가지 않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함께 나눌 세 명의 젊은 여성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1737년 12월 31일 그들은 하느님께 서원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래서 성녀 마리아 마르가리타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몬트리올의 애덕의 수녀회, 일명 ‘회색 수녀회’의 설립자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일생을 통해 언제나 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위해 사회의 관습과 싸웠다. 자신의 친척과 이웃들에게 받는 조롱과 비웃음에도 당당하게 맞섰다. 

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에 힘쓰던 중 공동체의 집이 화재로 전소되고 동료 중 한 명의 죽음을 경험하며 건강이 크게 나빠지기도 했지만 그 모든 일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헌신하고자 하는 그녀의 신심을 더 깊게 만들었다. 

1745년 2월 2일 그녀와 초창기 두 명의 동료들은 공동으로 소유한 것들을 저당 잡혀서 도움이 필요한 수많은 사람들을 돕기로 하였다. 2년 후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라고 불리던 성녀 마리아 마르가리타는 다 쓰러져가던 몬트리올의 한 병원을 맡아줄 것을 요청받았다. 

그래서 그녀와 동료 수도자들은 그 병원을 재건하여 가장 버림받은 이들을 돌보는데 사용하였다. 동료 수녀들과 평신도 협력자들의 도움으로 그녀는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볼 수 있는 재단을 설립하게 되었다.

1765년 발생한 화재로 병원이 파괴하였지만 그녀의 신앙과 용기마저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동료 수녀들과 병원에서 지내던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앙 안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보고 찬미 드리기를 요청하였다. 64살의 나이에 그녀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쉼터의 재건을 맡았다. 

인생 전체를 통해 가난한 이들에게 자신을 내어준 성녀 마리아 마르가리타는 결국 지친 몸을 이끌고 1771년 12월 23일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녀는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 봉사한 사랑하는 어머니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성녀 마리아 마르가리타 듀빌은 비록 한 명의 여성이었지만 그녀가 가난한 이들을 돌보던 탁월한 노력은 널리 그리고 멀리 퍼져나갔다. 그녀가 설립한 수녀회는 캐나타 전역은 물론 미국과 남아메리카 그리고 아프리카 등지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교황 성 요한 23세(Joannes XXIII)는 1959년 5월 3일에 그녀를 복자품에 올리면서 사랑과 연민으로 모든 이에게 다가가는 수녀회의 사명에 걸맞게 그녀에게 ‘보편적 애덕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붙여주었다. 

그녀는 많은 고아들과 미래를 걱정하는 청소년들, 희망 없이 살며 환멸을 느낀 소녀들, 보상받지 못하는 사랑과 미망인들의 고통스럽고 불행한 환경에 큰 위로를 주었다. 또한 그녀는 다른 이들을 돕는데 자신의 삶을 봉헌한 이들에게 더욱 자비로운 정신으로 다가갔다. 

결국 그녀는 1990년 12월 9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녀의 축일은 캐나다에서 10월 16일 또는 4월 11일에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9. 마리아

 

  • 세례명 축일
    11월 01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 신분과 직업
    하녀, 순교자 마리아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경?

 

 

마리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마리아 이야기

이탈리아 로마(Roma)의 관리이던 테르툴루스의 노예이던 성녀 마리아는 요람에서부터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였다. 그녀는 자주 단식하고 기도하였는데, 특히 이교신의 축제 때에는 더욱 열심히 기도하였다. 

박해가 일어나자 그녀의 주인은 마리아를 배교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그녀가 집정관의 손에 넘어가는 것이 두려웠던 테르툴루스는 어두운 방에 감금해 놓았다.

그러나 이 사실이 밖으로 알려졌고, 따라서 그는 집정관의 요구에 따라 그녀를 내어주자 마리아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화형 언도를 받았다. 형이 집행될 때 그녀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제가 섬기는 하느님이 저와 함께 계시기에 두렵지 않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착한 노예를 본 재판관은 마음이 변하여 어느 군인에게 그녀를 넘겨주었으나, 그 군인 역시 그녀를 두려워하여 도망가도록 선처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연사했다고 여겨지나, 로마 순교록에는 순교자로 기록되어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0. 마리아 포르투나타 비티

 

  • 세례명 축일
    11월 20일

  • 호칭 구분
    복녀 마리아 포르투나타 비티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Fortunata Viti

  • 신분과 직업
    수녀 마리아 포르투나타 비티

  • 활동 연도와 지역
    1827-1922년

 

 

마리아 포르투나타 비티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비띠, 포르뚜나따, 포르투나따.

 

 

마리아 포르투나타 비티 이야기

1827년 이탈리아의 베롤리(Veroli)에서 안나 펠리체 비티(Anna Felice Viti)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마리아 포르투나타 비티(Maria Fortunata Viti)는 일찍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형제들의 손에 의해 양육되었다. 

성장한 후 그녀는 베네딕토회의 수녀가 되어, 성체성사에 대한 위대한 애정을 갖고 살았다. 그녀는 1967년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1. 마리아

 

  • 세례명 축일
    11월 24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마리아

  • 활동 연도와 지역
    +851년 코르도바

 

 

마리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마리아 이야기

무슬림의 딸인 성녀 플로라(Flora)는 에스파냐 남부 코르도바에서 태어나 비밀리에 그리스도인으로 키워졌는데, 그것은 그녀의 어머니가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처녀로 성장했을 때 그녀는 자기 오빠의 고발에 의해 매를 맞고 투옥되었다. 자신에게 최후의 진술을 하도록 기회를 준 것을 이용해 성녀 플로라는 성공적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그 후 그녀는 성 아키슬루스(Acislus) 성당에서 기도하던 중에 부제로서 순교한 어떤 사람의 동생인 성녀 마리아(Maria)를 만났다. 그들은 끝까지 그리스도인으로 살 것을 굳게 언약하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신자임이 발각되어 재차 재판관에게 끌려갔다. 

재판관은 배교하지 않으면 창녀로 팔겠다고 위협했으나 그들은 끝까지 항거하여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 모든 사실은 성 에울로기우스(Eulogius)가 남긴 증언에 의한 것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2. 마리아

 

  • 세례명 축일
    12월 02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 신분과 직업
    순교자 마리아

  • 활동 연도와 지역
    +256년경

 

 

마리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마리아 이야기

이탈리아 로마(Roma)에서 성 에우세비우스(Eusebius) 신부와 성 마르첼루스(Marcellus) 부제, 그리고 성 히폴리투스(Hippolytus), 성 막시무스(Maximus), 성 아드리아(Adria), 성녀 바울리나(Paulina), 성 네온(Neon), 성녀 마리아(Maria), 성녀 마르타나(Martana), 성녀 아우렐리아(Aurelia)는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체포되어 세쿤디아누스(Secundianus) 재판관에게 죽기까지 모진 고문을 받고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성 에우세비우스, 성 마르첼루스, 성 네온, 성녀 마리아는 참수형을, 성녀 아드리아와 성 히폴리투스는 채찍형을, 성녀 바울리나는 고문실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성 막시무스는 티베르(Tiber) 강으로 던져지는 익사형을 받아 순교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3. 마리아 카르멘 살례스

 

  • 세례명 축일
    12월 06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카르멘 살례스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Carmen Salles

  • 신분과 직업
    설립자, 수녀 마리아 카르멘 살례스

  • 활동 연도와 지역
    1848-1911년

 

 

마리아 카르멘 살례스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까르멘, 메리, 미르얌, 미리암, 바랑게라스, 살레스.

 

 

마리아 카르멘 살례스 이야기

성녀 마리아 카르멘 살례스 이 바랑게라스(Maria Carmen Salles y Barangueras)는 1848년 4월 9일 에스파냐 북부에 위치한 바르셀로나(Barcelona) 지방의 빅(Vic)이라는 마을의 신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호세 살례스(Jose Salles)와 어머니 프란치스카 바랑게라스(Francisca Barangueras) 사이에서 10남매의 둘째도 태어난 그녀는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선포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교리와 그로부터 4년 뒤 프랑스의 루르드(Lourdes)에서 발현하신 성모님 이야기를 통해 원죄 없으신 마리아께 대한 특별한 신심을 지니게 되었다. 

그녀는 1858년 가족과 함께 에스파냐 동북부 카탈루냐(Cataluna) 지방의 몬세라트(Montserrat)를 순례하였다. 이 작은 마을은 8세기 무어인의 침략과 12세기 나폴레옹의 침략에 맞서 가톨릭 신앙을 지켜낸 유명한 순례지였다. 이 여행 중에 성녀 카르멘 살례스는 첫영성체 후 하느님께 자신의 삶을 봉헌할 것을 결심하였다.

몇 년 뒤 성녀 카르멘 살례스는 교회 안에서 자신이 뜻했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면서 약혼자와의 결혼을 포기하고 거룩한 성체회에 입회하였다가 곧 교육 수도회인 영보 도미니코 수녀회에 입회하여 20여 년 동안 봉사의 삶을 살았다. 

당시 에스파냐는 산업혁명과 내란으로 인해 정치, 사회, 종교적으로 암울한 시기였고, 사람들은 전염병과 가난으로 인해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교육, 특별히 여성들에 대한 교육을 통해 가정을 지키고 자라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성모님의 사랑을 전해주고 싶은 강한 열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열망은 1892년 부르고스(Burgos)에서 청소년들에게 학문과 그리스도교적 사랑을 가르치는 ‘원죄 없으신 마리아 교육 선교 수녀회’를 설립하여 교구 인가를 받음으로써 마침내 현실화되었다. 동시에 예방교육의 중요성을 실천하고자 가난한 가정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한 학교도 바로 시작하였다.

성녀 카르멘 살례스는 ‘교육은 사랑’이라는 정신에 따라 1911년 7월 25일 마드리드(Madrid)에서 선종할 때까지 전국에 학교 13곳을 설립하여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에 헌신했다. 

수녀회는 설립자가 선종한 후, 선교정신에 입각하여 수녀회 명칭을 ‘원죄 없으신 마리아 교육 선교 수녀회로’로 바꾸고 1912년 브라질에 7명의 수녀를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세계 곳곳에 진출하여 교육 선교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 

그녀는 선종한지 100년도 채 되지 않아 가경자로 선포됐으며, 1998년 3월 15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다. 이어 2012년 10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녀의 축일은 로마 순교록에는 선종일인 7월 25일로 기록되었지만 전례적으로는 12월 6일에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4. 마리아 마라비야스 데 헤수스

 

  • 세례명 축일
    12월 11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마라비야스 데 헤수스

  • 가톨릭 성인 이름
    Maria Maravillas de Jesus

  • 신분과 직업
    설립자, 수녀원장 마리아 마라비야스 데 헤수스

  • 활동 연도와 지역
    1891-1974년

 

 

마리아 마라비야스 데 헤수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라빌라스, 메리, 미르얌, 미리암, 예수스, 지저스.

 

 

마리아 마라비야스 데 헤수스 이야기

 

성녀 마리아 마라비야스 데 헤수스는 1891년 11월 4일 에스파냐의 마드리드(Madrid)에서 아버지 루이스 피달 이 몬(Luis Pidal y Mon)과 어머니 크리스티나 치코 데 구스만 이 무뇨스(Cristina Chico de Guzman y Munoz)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녀의 아버지는 교황청 주재 에스파냐 대사였고, 그녀는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성장했다.

마리아 마라비야스는 이미 8살 때 정결 서원을 하며 자비로운 일에 자신을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그 후 십자가의 성 요한(Joannes a Cruce, 12월 14일)과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Teresia de Avilla, 10월 15일)의 저작들을 접하면서 맨발의 카르멜회 수녀가 되려는 성소(聖召)를 느꼈다.

1913년 그녀를 신앙적으로 도와주던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했을 때 어머니는 맨발의 카르멜회에 들어가려는 마리아 마라비야스의 결정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하지만 그녀는 1919년 10월 12일 마드리드의 엘 에스코리알(El Escorial)에 있는 맨발의 카르멜회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1924년 5월 30일 종신 서원 전에 이미 마리아 마라비야스 수녀는 하느님으로부터 체로 데 로스 안젤레스의 카르멜회를 설립하라는 특별한 소명을 받았고, 1926년 10월 31일 다른 세 명의 카르멜회 수녀들과 함께 수도회를 설립함으로써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이는 맨발의 카르멜회의 수도 규칙에 따라 설립된 테레지안 카르멜회의 첫 번째 수도회였다.

성녀 마리아 마라비야스는 새로운 수도회를 설립하거나 맨발의 카르멜회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를 설립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예수의 성녀 테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정신과 이상을 더 깊이 살고 전파하는 것만을 추구했다.

1926년 6월 28일 마드리드 알칼라(Madrid-Alcala) 교구의 주교는 그녀를 새로운 수도회의 원장으로 임명했다. 1933년 그녀는 인도(India)의 코타밤(Kottavam)에 수녀원을 설립했고, 여기서부터 여러 분원이 인도 안에서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역할은 수녀원장으로서 자연적인 반감과 책임 있는 직책을 수행하기에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일생동안 설립한 수녀원들이 영속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녀는 강한 정신력과 성실함으로 교회와 수녀들에 대한 순명과 사랑의 의무를 수행하였다.

그녀는 종종 자신이 설립한 수녀원의 빈곤함 때문에 곤란을 겪기도 했다. 수녀들은 가구도 제대로 없는 작은 집에서 텅빈 벽에 성경 구절이나 카르멜회 출신 성인들의 말씀을 걸어 놓고 살았다.

에스파냐 내전이 발발했을 때 체로 데 로스 안젤레스 수녀원의 수녀들은 수녀원을 빼앗기고 마드리드의 한 아파트에서 살았다. 이런 와중에도 1937년 9월 살라망카(Salamanca)의 바투에카스(Batuecas)에 또 하나의 수녀원을 설립했다. 그리고 1939년 내전이 끝나면서 체로 데 로스 안젤레스의 수녀원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토록 엄청난 박탈과 박해의 한가운데서도 성녀 마리아 마라비야스 원장은 늘 용기와 행복을 주입시켰고 수녀들이 감탄할만한 모범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같은 회의 수녀들조차 알지 못한 심연이 있었다. 오직 그녀의 영적 지도자들만이 그녀의 생애 전체를 관통했던 영혼의 어둔 밤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 영혼의 어둔 밤은 그녀에게 극심한 영적 건조함과 시련을 주었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뜻에 전적인 신뢰와 포기로 응답하도록 이끌어주었다.

그 후로도 여러 해 동안 에스파냐의 여러 지역에 수녀원들이 설립되었다. 성녀 마리아 마라비야스 원장은 자신이 처음 입회하였던 엘 에스코리알의 맨발의 카르멜회에 수녀들을 보내 회복을 도왔고 아빌라에 있는 유서 깊은 강생의 수도원에도 그렇게 했다.

그녀가 직접 설립한 수도원과 같은 목적을 가진 다른 수도원들과의 결합을 위해 그녀는 성녀 테레사회를 설립하였고, 1972년 교황청으로부터 공식 승인을 얻었다.

1974년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에 성녀 마리아 마라비야스 원장은 병자성사를 받고 마지막 노자성체를 영했다.

그리고 12월 11일 마드리드 인근 라알데우엘라(La Aldehuela)의 카르멜회 수녀원에서 여러 수녀들에 둘러싸여 선종하였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면서 “카르멜회 회원으로서 죽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라는 말을 반복해서 되뇌었다고 한다.

그녀는 1998년 5월 10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3년 5월 4일 마드리드의 콜론(Colon) 광장에서 100만여 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다른 네 명의 복자들과 함께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식을 갖고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녀는 마리아 마라비야스 데 헤수스 피달 이 치코 데 구스만(Maria Maravillas de Jesus Pidal y Chico de Guzman)으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5. 마리아 크로치피사 디 로사

 

  • 세례명 축일
    12월 15일

  • 호칭 구분
    성녀 마리아 크로치피사 디 로사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Crocifissa di Rosa

  • 신분과 직업
    설립자 마리아 크로치피사 디 로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831-1855년

 

 

마리아 크로치피사 디 로사 세례명과 같은 이름

로싸, 로즈, 메리, 미르얌, 미리암

 

 

마리아 크로치피사 디 로사 이야기

이탈리아의 브레시아(Brescia)에서 9남매 중에 한 명으로 태어난 성녀 마리아 크로치피사 디 로사(Maria Crocifissa di Rosa)는 바울라 프란치스카 마리아(Paula Francisca Maria)라는 이름으로 영세한 유복하고 신심 깊은 집안의 딸이었다.

그녀는 성모 방문 수녀회의 교육을 받고 자랐으나 17세 때에 어머니가 사망하자 학교를 떠나 집에 돌아와 부친의 집안일을 돕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수도생활에 대한 갈망이 열화같이 치솟았고, 그녀는 아버지는 이를 반대하고 결혼시키려 했기 때문에 크게 실망하여 나날을 지냈다.

그러면서 그녀는 아콰프레다에 있는 아버지의 직물공장에서 일하는 여공들의 영적인 이익을 위하여 일하는 한편, 1836년의 콜레라 희생자들을 돌보기 위하여 병원에서도 활동하였고, 그 다음 해에는 버려진 소녀들을 위한 집을 짓고 원장이 되었다. 또 그녀는 농아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개설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1840년 그녀는 자신의 영적 지도자인 몬시뇰 파우스티노 핀초니에 의하여 병자를 돌보는 수녀회의 장상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그녀는 마리아 크로치피사라는 이름을 받았다.

이 수녀회는 브레시아의 애덕 시녀회로 불린다. 처음에는 어려움이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이 수녀회는 1843년에 브레시아의 주교로부터 승인을 받았고, 1848년에 유럽을 휩쓴 전쟁 중에는 이탈리아의 북부 전선에서 부상자를 치료하는 한편 브레시아 병원을 운영하였다.

성녀 마리아는 1850년에 교황청으로부터 수녀회 승인을 받았고, 그 5년 후에 브레시아에서 운명하여 영웅적인 삶을 마감하였다. 그녀는 1954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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