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세례명/세례명 이름 찾기

베드로 9월 남자세례명 19인 목록

pieonane 2023. 2. 1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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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베드로 남자세례명 베드로 클라베르, 베드로 마르티네즈, 베드로 (수도원장), 베드로 아르부에스, 권득인 베드로, 나 베드로 (모방 베드로), 남경문 베드로, 손선지 베드로, 오 베드로 (오메트르 베드로), 유대철 베드로, 유정률 베드로, 이명서 베드로, 이호영 베드로, 정원지 베드로, 조화서 베드로, 최창흡 베드로, 최형 베드로, 홍병주 베드로, 베드로 (순교자), 19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천주교 남자세례명 베드로는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에서 본받고 싶은 베드로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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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받고 싶은 세례명 찾기

베드로
9월 남자세례명
19인 목록

 

 

 

 

베드로 9월 남자세례명 목록

 

  1. 베드로 클라베르 (9월 9일)

  2. 베드로 마르티네즈 (9월 10일)

  3. 베드로 (9월 11일)

  4. 베드로 아르부에스 (9월 17일)

  5. 권득인 베드로 (9월 20일)

  6. 나 베드로 (모방 베드로) (9월 20일)

  7. 남경문 베드로 (9월 20일)

  8. 손선지 베드로 (9월 20일)

  9. 오 베드로 (오메트르 베드로) (9월 20일)

  10. 유대철 베드로 (9월 20일)

  11. 유정률 베드로 (9월 20일)

  12. 이명서 베드로 (9월 20일)

  13. 이호영 베드로 (9월 20일)

  14. 정원지 베드로 (9월 20일)

  15. 조화서 베드로 (9월 20일)

  16. 최창흡 베드로 (9월 20일)

  17. 최형 베드로 (9월 20일)

  18. 홍병주 베드로 (9월 20일)

  19. 베드로 (9월 23일)

 

베드로 9월 천주교 남자세례명 19인 목록

 

 

1. 베드로 클라베르

 

  • 세례명 축일
    9월 9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Claver

  • 신분과 직업
    신부, 선교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580-1654년 콜롬비아

 

 

베드로 클라베르 세례명과 같은 이름

끌라베르,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 클라베르 이야기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Barcelona) 근교 베르두(Verdu)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성 베드로 클라베르(Petrus Claver)는 바르셀로나 대학교에서 공부한 다음 1602년 8월 7일 예수회에 입회하여 1604년까지 타라고나(Tarragona)에서 수련을 받았다.

그는 마요르카(Mallorca) 섬의 몬테시온 예수회 대학에서 1608년까지 철학을 공부하면서 같은 예수회원인 성 알폰수스 로드리게스(Alfonsus Rodriguez, 10월 30일) 수사를 만나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성 로드리게스 수사는 그에게 신대륙으로 가서 선교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래서 그는 선교사가 되려는 소망을 품게 되었다. 1610년 그는 관구장의 지시로 다른 3명의 예수회원들과 함께 콜롬비아 카르타헤나(Cartagena) 항에 도착하였다. 그는 1612년부터 1615년까지 콜롬비아의 수도인 보고타(Bogota)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616년 카르타헤나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당시 콜롬비아는 에스파냐의 식민지였고, 카르타헤나는 노예 매매의 중심지였으므로 성 클라베르는 알폰소 데 산도발(Alfonso de Sandoval) 신부와 함께 콜롬비아 인디오들의 처참한 상황을 개선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서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이 집단 수용되는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음식물과 의약품을 공급하였고, 정기적으로 수용 막사를 방문하여 나병에 걸린 노예들을 돌보아 주면서 그들의 벗이 되었다.

성 클라베르는 40영 년 동안 흑인 노예들을 위하여 헌신하였는데, 그가 생전에 세례를 준 흑인 노예만도 3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는 또한 하루 종일 노예들을 방문하여 고해성사를 주었고, 카르타헤나의 수많은 흑인 노예들이 그의 영적 자녀가 될 정도로 전 생애를 흑인 노예들을 위해서 살았다.

그는 스스로 엄격한 생활을 실천하였고, 살아 있는 동안에 이미 초자연적 은혜를 받아 예언도 하였고 또 기적하는 능력도 있었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힘도 매우 강하였다. 그는 1650년에 전염병에 걸렸다가 곧 회복되었으나, 세상을 떠나기 전 4년 동안 누워서 생활해야 했다. 그는 1654년 9월 8일 카르타헤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851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뒤, 1888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교황 레오 13세는 1896년에 성 베드로 클라베르를 흑인 노예들을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하는 선교사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현재 그는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특히 콜롬비아 선교의 수호성인이며 흑인의 사도로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베드로 마르티네즈

 

  • 세례명 축일
    9월 1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Martinez

  • 신분과 직업
    대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000년 콤포스텔라

 

 

베드로 마르티네즈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 마르티네즈 이야기

성 베드로 마르티네스(Petrus Martinez)는 대주교이자 에스파냐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의 지도자였다. 그는 에스파냐 북서부 갈리시아(Galicia)에서 태어나서 950년경 베네딕토 수도원에 입회하였고, 모존조(Monzonzo)의 성 마리아(Maria) 수도원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후에 콤포스텔라의 성 마르티누스(Martinus)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986년경 콤포스텔라 교구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이슬람교도에게 빼앗긴 국토를 회복하기 위한 운동의 주창자로 유명하며, 전통적으로 '살베 레지나(Salve Regina)'의 작곡자 중 한 명으로 믿어진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베드로

 

  • 세례명 축일
    9월 11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003-1080년 샤바농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 이야기

성 베드로(Petrus)는 오트-로와르의 랑제악 출신으로 좋은 교육을 받던 중에 사제 성소를 발견하였다. 사제 서품 후 그는 고향 마을의 사제로 지냈는데, 극히 엄격하고 모범적인 생활을 함으로써 고향 사람들이 특히 존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본당사목보다는 공동체에서 수도규칙을 따르려고 하였는데, 자신을 모함하고 괴롭히던 어떤 부인이 결국은 회개하여 그에게 오베르뉴(Auvergne)의 페브락에 있는 땅을 희사하였다. 성 베드로는 이곳에다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규칙을 따르는 수도원을 세웠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베드로 아르부에스

 

  • 세례명 축일
    9월 17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Arbues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440-1485년

 

 

베드로 아르부에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 아르부에스 이야기

성 베드로 아르부에스(Petrus Arbues)는 에스파냐 북동부 아라곤(Aragun)의 에필라에서 태어나 이탈리아 볼로냐(Bologna)의 에스파냐계 대학에서 신학과 교회법을 공부하였는데 우수한 성적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덕과 열심까지 뛰어났으므로 그는 수도생활을 갈망하였으나, 그의 뛰어난 학문적 지식 때문에 자기 혼자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1484년 그는 아라곤 왕국의 심문관으로 발탁되었으나 이를 곧 사임하고는 수치스런 그리스도인들과 배교자들을 상대로 설교하였으며, 시민들의 부도덕성과 악습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돌아다녔다.

이러한 그의 열성이 많은 적들을 만들게 되었고, 게다가 가학성 음란증을 지녔던 폭군의 분노를 일으켰다. 1485년 3명의 자객이 사라고사(Zaragoza)의 구세주 성당으로 들어왔다.

이때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이틀 뒤에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는 1664년 교황 알렉산데르 7세(Alexander V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867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권득인 베드로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權得仁 Peter

  • 신분과 직업
    상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5-1839년 한국

 

 

권득인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권 베드로, 권베드로, 베드로,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권득인 베드로 이야기

성 권득인 베드로(Petrus)는 서울 문안에서 태어난 신자 집안의 후예이다. 그는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고, 16세 되던 해에 어머니마저 잃었지만, 열심하던 어머니의 표양에 따라 착실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소규모의 장사를 하여 근근이 끼니를 이어 나갔으나 그의 친절과 신심만은 대단히 높았다.

이윽고 그 후 결혼한 그는 사직골에 살면서 첫 닭 울 녘에 일어나서 등잔불을 켜 놓고 날이 밝을 때까지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그 후 그는 너리골로 이사하여 십자가와 성패를 만들어 팔아 전교에 힘쓰는 한편 이를 생계의 방편으로 삼았던 것이다.

1839년 1월 16일 저녁, 그는 집을 찾아온 처남과 함께 이야기하던 중에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갇혔는데, 부인과 처남은 배교하여 석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권 베드로는 백절불굴의 용기를 드러냈으며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았다.

“어찌하여 천주교를 믿느냐?” 하는 포장의 질문에 “천주는 천사와 사람과 만물의 임금이시오, 사람은 이러니 천주님께 감사할 생각을 두지 않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라 하겠습니까?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다 천주를 공경하고 섬길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포장은 성이 나서 무섭게 매질하라고 명령하고, “네 동교인들을 대라”고 소리를 질렀다.

“천주교에서는 남을 죽이거나 해하는 것을 엄금하니 어찌 감히 내 말로써 사람들에게 죽을 위험을 당하게 하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포장은 그를 강제로라도 배교시키기 위하여 못된 죄수들에게 내맡겨 고문하게 하였다. 이 악한 죄수들은 베드로를 어찌나 몹시 매질하였던지 두 번이나 죽은 줄 알고 내버려 두기까지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1839년 5월 24일 금요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니, 이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나 베드로 (모방 베드로)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ubant Peter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3-1839년 한국

 

 

나 베드로 (모방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나 베드로, 나백다록, 나베드로,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에르, 피터.

 

 

나 베드로 (모방 베드로) 이야기

성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신부의 한국 성은 나(羅)이고, 이름은 세례명인 베드로(Petrus)를 한문으로 음차하여 백다록(伯多祿)이라 하였다. 그는 1803년 9월 20일 프랑스 칼바도스(Calvados) 지방의 바시(Vassy)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그날 바로 세례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그는 “세상 끝까지 가서 우상을 섬기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는 비르(Vire) 고등학교와 바이외(Bayeux)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1829년 5월 13일 사제품을 받았다.

보좌신부로 사목하면서 동양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의 서한을 읽고 선교사가 될 결심을 굳힌 그는 1831년 11월 18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3월 마카오로 출발했고, 마카오에서 중국 사천(四川) 교구의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선교지인 사천으로 가는 도중 조선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1833년 3월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성 모방 베드로 신부의 경건함과 열정적인 면을 좋게 보아 기꺼이 조선의 선교사로 받아들였다.

성 모방 베드로 신부는 복건성(福建省)과 북경(北京) 등을 거쳐 서만자(西灣子) 교우촌에서 1년간 머무르며 한문과 중국 문화를 공부하였다. 1835년 10월 20일, 조선 입국을 목전에 두고 브뤼기에르 주교가 내몽골에서 선종한 후 그 소식을 들은 성 모방 베드로 신부는 즉시 서만자를 떠나 11월 17일쯤 마가자(馬架子) 교우촌에 도착했다.

이미 브뤼기에르 주교로부터 부주교로 임명되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그는 주교의 장례를 치른 다음 즉시 마가자를 떠나 당시 주교를 영접하기 위해 국경에 와 있던 조선 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조선 입국을 결정하였다.

압록강을 건너 의주 성문을 비밀리에 통과해 천신만고 끝에 입국에 성공했는데, 이때가 1836년 1월 13일로 그는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가 되었다.

무사히 서울에 도착한 성 모방 베드로 신부는 성 정하상 바오로(丁夏祥, Paulus)의 집에 머물며 조선말을 배우는 한편 우선 한문으로 글을 써서 고해성사를 주었다.

그는 서울에서 시작해 다음으로 경기도와 충청도의 교우촌 16~17개를 방문해 세례를 주고 여러 성사를 집전하였다. 1836년 12월까지 어른 2백 13명에게 세례를 주고, 6백 명 이상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 또한 가는 곳마다 회장을 뽑아 주일과 축일에 교우들을 모아 공동으로 기도하고 교리문답과 그날의 복음 성경과 성인 전기들을 읽고 배우도록 지도하였다.

성 모방 베드로 신부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도 큰 관심을 두어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Thomas), 최방제 프란치스코 사베리오(崔方濟, Franciscus Xaverius),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Andreas) 등 세 명의 소년을 선택하여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에게 필요한 덕행을 가르치는 한편, 당시 상황에서 조선 내에서의 신학생 교육이 불가능했기에 1836년 12월 3일 이들을 마카오로 보내 정식으로 신학을 배우도록 하였다.

1837년 1월 성 샤스탕 야고보(Chastan Jacobus) 신부가 무사히 조선에 입국하자 성 모방 베드로 신부는 그를 맞이한 뒤 곧바로 경기도 양근(楊根) 땅으로 가서 조선말을 배우며 성사를 집전하였다.

그해 부활 대축일을 양근에서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와 함께 보낸 그는 남쪽 지방으로,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는 북쪽 지방으로 가서 사목활동을 펼쳤다.

그런데 지나친 활동으로 몸이 쇠약해진 성 모방 베드로 신부는 1837년 7월 심한 열병에 걸려 서울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그는 상태가 심각해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에게 종부(병자)성사까지 받았는데, 그 후 차츰 열이 떨어져 3개월 뒤에 건강을 회복하였다.

1837년 12월 말에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Imbert Laurentius) 주교까지 조선에 입국하면서 조선 교회는 3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해 커다란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1839년 기해년이 시작되면서 조정은 다시금 천주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배교자의 밀고로 세 명의 외국인 선교사가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음이 알려졌다.

기해박해가 본격화하자 신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가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고, 주교의 명으로 충청도 홍주(洪州) 교우촌으로 숨어들었던 성 모방 베드로 신부 또한 자수를 권유하는 주교의 편지를 받고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전라도의 한 교우촌으로 피신했다가 자수한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까지 서울로 압송되면서 세 선교사는 비로소 포도청 옥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여러 차례 형벌과 문초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의연하게 신앙을 고백했다.

조선 정부는 그들이 절대 배교하지 않을 것임을 확인하고 마침내 대역 죄인이라는 죄목으로 군문효수형에 처하도록 판결하였다. 처형 장소는 한강 변의 새남터로 결정하였다.

1839년 9월 21일, 사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자 세 선교사는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가마를 타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형장에 이르자 포졸들은 선교사들의 옷을 벗긴 다음 손을 앞가슴 쪽으로 결박하고, 겨드랑이에 긴 몽둥이를 꿰고, 화살로 귀를 뚫고, 얼굴에 회를 뿌린 다음 군중의 조롱과 욕설을 듣게 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선고문을 읽고 칼을 들어 처형하였다.

성 모방 베드로와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 그리고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는 마지막까지 태연하게 하늘을 향해 기도할 뿐이었다. 그들의 순교로 조선 교회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성직자들을 3년 만에 모두 잃게 되었다. 이때 성 모방 베드로 신부의 나이는 35세였다.

성 모방 베드로 신부와 두 선교사의 시신은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20일 뒤 죽음을 각오한 신자들에 의해 노고산(서울시 마포구 노고산동 서강대 뒷산)에 매장되었다가 1843년 삼성산(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산57-1)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1901년 10월 21일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졌고, 그해 11월 2일 명동대성당에 안치했다가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인 유해실에 안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모방 베드로 신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남경문 베드로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南景文 Peter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6-1846년 한국

 

 

남경문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남 베드로, 남베드로, 베드로,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남경문 베드로 이야기

성 남경문 베드로(Petrus)는 서울의 중인 계급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1801년의 신유박해 전부터 천주교인이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 그에게 신앙을 전해주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20세 때에 병이 들어 대세를 받고서야 입교하게 되었다.

이때 그를 권고한 사람이 박 베드로였기 때문에 자신도 베드로라고 하였다. 처음에 그는 금위영의 병정 노릇을 하다가 후에 조개젓 장사를 하였으며, 스물두 살 때에 허 바르바라(Barbara)와 혼인하였다.

처음에는 교리를 자세히 몰랐으므로 비싼 이자를 받는 돈놀이를 하였으나,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로부터 그런 일은 교회가 금하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대금업을 패하고 신부를 따라 공소 방문을 다녔다. 이러한 열성으로 그는 새로 입국한 선교사들로부터 회장에 임명되었다.

기해박해 때에 베드로는 포졸의 손에 잡힐 번하였으나 외교인 형제들의 도움으로 겨우 난을 면하였다. 그러나 박해가 끝난 후 선교 신부와 신자들이 모두 순교하자 혼자 남아 2, 3년 동안 스스로 타락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스스로 지난날을 뉘우치고 다시 열심한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친구들에게 “이런 죄를 범하였으니 천국에 가려면 순교를 해야 하네”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고 한다. 그는 매일 아침 해 돋기 전에 일어나 오랫동안 기도하고, 보속하는 뜻으로 추운 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고 지냈다.

남 베드로가 천주교 신자임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1846년의 병오박해가 일어나자마자 포졸들은 그를 쉽게 체포하였는데 포졸들이 그를 끌고 가려고 할 때, 그의 아내가 팔에 매달려 “당신 없이 어떻게 살란 말이오?” 하며 붙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제 다 틀렸소. 나는 이 이상 더 살 수 없소” 하고 아내를 물리쳤다. 베드로가 포청 옥에 갇혀 있을 때 그의 형제 하나가 그를 만나 보러 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 음식과 옷을 들여보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옥 안에서 얻어먹는 음식과 지금 입고 있는 옷도 내게는 과하니 다른 것을 더 가져올 필요는 없다”고 이르게 하였다.

한번은 문초 중에 허리춤에서 군사의 패를 떼어 포장에게 바치며 “나는 천주께서 창조하신 물건으로 오늘까지 살아 왔고 또 나라에서 쌀도 많이 받아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죽는 길밖에 없으니 군사의 패를 도로 바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포장이 “네가 배교만 한다면 살려 줄 뿐만 아니라 네 직업도 잃지 않게 해주마.” 하고 약속하였으나 베드로는 듣지 아니하였다. 이에 포장이 명하여 곤장으로 때리는데 어찌나 혹독하게 쳤던지 어깨 위에서 곤장이 부러져나가기까지 하였다.

관리가 신자들을 고발하라고 재촉하자 그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몇 댈 뿐이었다. 형리들은 양 손목을 잡아매어 공중에 매달고 채찍으로 마구 갈겼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이런 매질을 이기지 못하여 숨을 거두니, 때는 1846년 9월 20일이요 나이는 40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손선지 베드로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孫 Peter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20-1866년 한국

 

 

손선지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로, 베드루스, 손 베드로, 손베드로,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손선지 베드로 이야기

성 손선지 베드로(Petrus)는 충청도 임천 지방의 고인돌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남달리 신앙과 품행이 뛰어났다. 어른이 되자 샤스탕(Chastan, 鄭) 신부는 그를 전교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결혼하여 슬하에 두 자녀를 두었던 그는 인자한 가장으로서 자녀 교육에 힘쓰며 사소한 일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아 모범적인 신자 가정을 이루었다. 그가 거처하던 집은 마을의 공소였기 때문에 더욱 세심한 주의와 노력으로 언제나 신자들을 위하여 봉사하며 살았다.

그가 47세가 되던 1866년 추수기에 접어들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좀 완화되는 듯 하다가 얼마 후 더욱 혹심한 박해로 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의 공소 예절에서 그는 신자들을 보고 “곡식이 익으면 바람결에 날리어 땅에 떨어지는 법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가올 박해에 나 같은 사람도 당신 곳간에 가두시려는 모양이군요.” 하며 자기는 순교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무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피신하라고 당부하였다.

그해 12월 3일 저녁 그는 가족과 함께 기도를 하고 있는데 집 밖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자, 즉시 상황을 알아차리고서 재빨리 가족들에게 피하라고 말한 뒤에 자신이 교우임을 자백하여 순순히 체포되었다. 포졸들은 그를 구진포리 주막까지 데리고 가 먼저 이곳에 붙잡아 온 다른 신자들과 함께 밤을 지내게 하였다.

그 사이 손 베드로의 어머니는 마을 원님을 찾아가 아들을 좀 구해달라고 애걸하였다. 또 손 베드로의 아들이 감영에 수시로 드나들며 아버지의 구명운동을 한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아들의 효심에는 감동하였으나 크게 꾸짖고는 “나에게는 큰 유혹이 된다. 내 말을 듣는 순간부터 그런 짓을 다시는 하지 말고,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감영에 오지 말라”고 하면서 일을 중지시켰다.

다음날 그는 전주 감사 앞으로 압송되었다. 그가 전교회장이라는 것을 알고 고문과 주리를 잔인하게 가하다 못해 그의 팔까지 부러뜨렸다. 그가 처형장으로 나설 때 남아서 기다리는 다른 신자에게 자기 옷을 주면서 “나는 이제 죽으러 가오. 이 옷은 더 이상 내게 소용이 없으니 이 옷을 입으시오”라고 말하였다.

이윽고 사형장에 도착한 그는 하늘을 향해 ‘예수 마리아’를 부르고 기도했는데, 희광이가 칼로 그의 어깨를 내려치자 그는 머리를 쳐들고 “장난하지 마시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는 전주 숲정이에서 1866년 12월 13일에 순교하였고, 이때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오 베드로 (오메트르 베드로)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Aumaitre Peter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37-1866년 한국

 

 

오 베드로 (오메트르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오 베드로, 오매뜨르, 오메뜨르, 오메트르, 오베드로,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에르, 피터.

 

 

오 베드로 (오메트르 베드로) 이야기

성 피에르 오매트르(Pierre Aumaitre) 신부의 세례명은 베드로(Petrus)이고 한국 성은 오(吳)이다. 그는 1837년 4월 8일 프랑스 서부 앙굴렘(Angouleme) 교구의 뤼페크(Ruffec) 본당에 속한 에제크(Aizecq)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5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조그만 농지를 경작하며 신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꾸려갔다. 성 오매트르 베드로는 어려서부터 성실하고 부지런했지만 학업 성적이 뛰어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첫영성체 교육을 받으면서 사제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지만, 리슈몽(Richemont)의 소신학교에 입학하려 했을 때 큰 어려움을 겪었다.

성적 때문에 소신학교 추천을 꺼리던 본당신부도 감탄할 만큼 매일같이 본당신부와 평신도에게 라틴어를 배우러 다녔고, 결국 입학할 수 있었다. 입학한 뒤에는 특유의 성실함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우등생이 되기까지 하였다.

5년의 소신학교 과정을 마친 그는 1857년 10월에 앙굴렘 대신학교에 진학했고, 1859년 8월 18일에 소품자(小品者)로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1862년 6월 14일에 사제품을 받았다.

수품 후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자신의 선교지가 조선임을 알게 되었다. 가난한 가정에서 사제가 되기까지 많은 은인의 도움을 받았던 그는 선교 사제가 되기까지도 부모의 강한 반대를 극복해야 했다.

게다가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조선으로의 파견은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각오를 담아 부모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그리고 1862년 8월 18일 프랑스를 떠났으나 박해로 인해 조선으로의 입국이 쉽지는 않았다. 거의 1년 가까운 노력 끝에 1863년 6월 말 중국 어선을 타고 연평도 바다를 지나 무사히 조선 땅을 밟게 되었다.

입국 후 서울에서 성 베르뇌 시메온(Berneux Simeon) 주교와 함께 지낸 그는 얼마 뒤에 조선말을 익히기 위해 용인의 손골(현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로 내려갔다. 그런 다음 성 다블뤼 안토니오(Daveluy Antonius) 주교가 전교하던 내포(內浦) 지방에서 활동하다가 1864년 9월부터 경기도의 한 지역을 맡아 사목하였다.

당시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신자들에게 성모 신심을 키워주기 위해 특별한 일을 했는데, 같은 시기에 조선에서 활동했던 칼레(Calais) 신부는 이렇게 증언하였다.

“오매트르 신부는 매년 최대한 장엄하게 성모성월 행사를 거행했으며, 교우들에게 이 아름다운 신심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2년 남짓 본격적인 전교 활동을 펼치던 그는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의 소문이 나돌고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마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수원의 샘골[泉谷里]에서 성사를 주고 있었다.

박해에 대한 소문으로 신자들이 동요하자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성사를 중단하고 신자들을 진정시킨 후 미사와 전례 용구를 모두 감추고 3월 9일 거더리(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있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를 찾아갔다.

여기서 그는 주교와 성 위앵 루카(Huin Lucas) 신부 등과 함께 하루를 보낸 다음 거더리에서 15리(里) 떨어진 ‘소덜’로 피신하였다. 그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피신할 계획을 세웠으나 역풍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을로 돌아왔다.

3월 11일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가 거더리에서 체포되자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다음날 거더리로 와서 자수하였다. 성 위앵 루카 신부도 주교의 편지를 받고 자수하여 거더리로 끌려왔다.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함께 체포된 주교와 동료 신부와 함께 홍주 관아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3월 19일 포도청에서 두 차례의 신문과 고문을 받으면서도 “이 세상의 형벌은 후세의 상”이라며 당당히 신앙을 증거하였다.

결국 3월 23일 군문효수(軍門梟首)의 사형선고를 받고 동료들과 함께 처형지인 충청남도 보령 수영(保寧水營)으로 이송되었다. 당시 국혼(國婚)이 가까운 시기라 조정에서는 서울에서 피를 흘리는 것이 나쁜 징조라 하여 멀리 떨어진 보령 수영으로 처형지를 정했다.

그래서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 성 위앵 루카 신부, 성 황석두 루카(黃錫斗, Lucas), 성 장주기 요셉(張周基, Josephus)과 함께 죽음의 행진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866년 3월 30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처형장인 갈매못(현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이때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를 포함해 갈매못에서 순교한 5위의 순교자 중에서 성 황석두 루카의 시신은 가족들이 거두어 홍산 삽티(현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를 거쳐 고향인 연풍 병방골(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에 이장했고, 1982년 연풍 순교성지로 천묘(遷墓)하였다.

나머지 4위 순교자들의 시신은 사흘 뒤에 신자들에 의해 거두어져 형장 부근에 묻혔다가 6월 초 몇몇 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모셔와 서짓골(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에 매장하였다.

그 후 1882년 3월 제7대 조선 교구장인 블랑(Blanc, 白) 주교의 지시로 발굴되어 일본 나가사키(長崎) 대교구의 오우라 성당으로 옮겨졌다가 12년 만인 1894년 5월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1900년부터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시복식을 앞둔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인 유해실에 안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한 명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유대철 베드로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劉大喆 Peter

  • 신분과 직업
    소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26-1839년 한국

 

 

유대철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유 베드로, 유베드로,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유대철 베드로 이야기

성 유대철 베드로(Petrus)는 역관 유진길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장남이다. 그런데 이 집안은 이상하게도 부자는 열심히 천주교를 믿는 반면, 모녀는 믿기는커녕 이를 반대하여 가정에 불화가 그칠 날이 없었고 신자들을 욕하기까지 하였다.

어머니가 “어째서 너는 부모의 말에 순종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일을 고집하느냐?”라고 말씀하시면, 베드로는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복종하겠으나 하늘의 임금, 만물의 주님의 법을 따르는 것이 옳지 않느냐고 온순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어머니의 눈이 어두움을 한탄하면서도 어머니께 대하여는 언제나 지극한 효성을 보여주었다.

박해가 일어나자 그의 마음속에는 순교하고자 하는 열렬한 욕망이 일어났다. 당시 옥에 갇혀있던 부친과 여러 신자들의 본보기는 그의 마음에 불을 질러 놓았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체포된 후 하느님께 대한 열광적인 사랑에 끌려 1839년 7월경 관헌들에게 자수하였다.

재판관은 그의 집안 내력을 자세히 물어보고 신자의 자식임을 알게 되자 옥에 가두고, 배교한다는 말을 하게 하려고 어르고 엄포하고 고문하는 등 갖가지 방법을 다 사용하였다. 그리고 옥사장이 혹형을 대철에게 가하여 몸이 갈기갈기 찢기고 사방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면서도 이 용감한 어린이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루는 어떤 포졸이 구리로 된 담뱃대 통으로 그의 허벅지를 들이박아 살점을 한 점 떼어내면서 소리쳤다. “이래도 천주교를 버리지 않겠느냐?” “그러면요, 이쯤으로 배교할 줄 아세요?” 그러자 포졸들은 벌겋게 달군 숯 덩어리를 집어 들고 입을 벌리라고 하였다. 대철이 “예” 하고 입을 크게 벌리니 포졸들은 놀라서 물러나고 말았다.

다른 교우들이 그에게 “너는 아마 많은 괴로움을 당한 줄로 생각하겠지만 큰 형벌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고 말했다. 대철은 “저도 잘 알아요. 이건 쌀 한 말에 대해서 한 알 같은 것이지요.” 하고 대답하였다.

그 후 고문을 당한 끝에 까무러친 그를 데려와서 다른 죄수들이 정신이 들게 하려고 허둥지둥할 때 그가 한 첫마디는 “너무 수고를 하지 마세요. 이런 것으로 해서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고 말해 형리들을 더욱 놀라게 했다.

유 베드로는 문초받기를 1회, 고문 14회, 태형 6백대 이상과 치도곤 45대 이상을 맞았지만 항상 기쁜 얼굴로 지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기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관헌들은 어린 그를 공공연히 죽이면 군중이 반발할까 두려워서 1839년 10월 31일 형리가 옥 안으로 들어가 상처뿐인 이 가련한 작은 몸뚱이를 움켜쥐고 목에 노끈을 잡아매어 죽였다.

이때 베드로의 나이는 겨우 14살이었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유정률 베드로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劉正律 Peter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37-1866년 한국

 

 

유정률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유 베드로, 유베드로,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유정률 베드로 이야기

성 유정률 베드로(Petrus)는 평안도 윤리면 논재골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어 고아가 되었는데, 호구지책으로 짚신을 삼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또 어쩌다가 돈이 조금 생기면 노름판에 뛰어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는 이덕표라는 친척의 권유로 천주교를 알게 되었고, 그 후 교리를 배워 서울에 있던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로부터 1864년경에 영세 입교하였다.

그는 순교할 때까지 극히 짧은 신앙생활을 했지만 그 열심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세례를 받은 후에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발견하였노라” 하며 자신의 기쁨을 큰소리로 표현했다. 그러나 원래 성격이 급했던 그는 자기 아내가 고집을 부리고 대들면 참지 못하여 부부 싸움을 하고 또 다투다가 아내를 때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가 영세한 뒤로는 아내 때리는 버릇을 고치기 위해 짚신처럼 생긴 나무토막을 가지고 자기 몸을 사정없이 때리고 때로는 피를 흘려가면서 자문자답하기를 “너 아프지? 제가 아프면 또한 네가 때리는 남도 아플 것이 아니겠느냐?”고 하였다. 그러므로 옆에 있는 부인도 크게 달라진 남편을 보고 감화를 받아 마침내 착하고 상냥한 아내가 되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시작한 유 베드로의 마음속에 점차 신앙의 열이 더해감에 따라 많은 이들을 교회로 이끌어 영세 입교시켰다. 1866년 초 그는 친척집을 찾아다니면서 “평안히 계십시오. … 오늘 가면 언제 다시 뵐지 모르겠습니다. …” 하는 밑도 끝도 없는 고별인사를 하여 듣는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바로 그날 저녁 무렵에 그는 공소가 있는 고둔리라는 마을로 가서 신자들이 함께 기도하고 새해 인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날 밤에는 유달리 교우들이 많이 모였기 때문에 회장이 복음을 읽고 강론을 하려고 할 때 갑자기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교우들은 당연한 듯 조용히 체포되었으나, 마침 그날이 설날이었으므로 포졸들에게 술을 대접하는 틈을 이용하여 많은 신자가 피신하고 유 베드로와 몇 명의 신자들만 남아 포졸들에게 잡혔다. 포졸들과 먼 길을 가는 동안 유 베드로는 “오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주 예수께서 우리를 불러 주셨도다.” 하며 마냥 즐거워하면서 평양 감영으로 끌려갔다.

이윽고 문초가 시작되자 신자들은 한결같이 신앙을 고백하였으나, 심한 곤장을 맞고는 4명이 배교하고 유 베드로와 정 회장만이 남았다. 또 그 얼마 후 정 회장도 친구들과 배교자들을 따라 가니 결국 유 베드로 혼자 남게 되었다. 그러자 화가 치민 감사는 배교자들을 불러 들여 곤장을 주면서 유 베드로를 쳐 죽이라고 명을 내리니, 배교자들은 제 목숨을 건지기 위해 유 베드로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유 베드로는 자기를 때리는 동료들에게 “살이 살을 잡아먹는구나.” 하면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 후 배교자들은 감사의 명에 따라 그의 시신을 대동강에 버렸는데, 얼마 후 붉은 피가 물 위로 번져 나갔고, 신기하게도 그의 시체는 가라앉지 않고 언제까지나 둥둥 떠 있었으며, 매 맞은 자리는 이상한 광채가 나며 빛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때가 1866년 2월 17일이며,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이명서 베드로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李 Peter

  • 신분과 직업
    농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21-1866년 한국

 

 

이명서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이 베드로, 이베드로,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이명서 베드로 이야기

성 이명서 베드로(Petrus)는 충청도의 어느 열심한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박해를 피하여 이리저리 다니다 보니 자연 고향을 등지게 되었고, 나중에는 완주군 구이면 고소대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고소대 사람이라고도 한다. 그는 1866년에 다시 전주 성지동으로 이사하여 살았는데, 온순한 성품과 착한 마음씨를 지녔고 예의범절이 깍듯하며 착하고 어진 사람으로도 널리 알려졌으나 가슴앓이로 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성지동 신자들이 다가올 박해를 예상하고 한 자리에 모였을 때 그는 “사세가 그렇게 다급하게 되었다면 빨리 피해야지요, 나는 병 때문에 피하지 못할 처지이고 천주님의 안배에 의지할 따름입니다. 필요하시다면 천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내 병은 영원히 낫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순교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1866년 12월 5일 저녁에 포졸들이 이 베드로의 집을 덮치자 심경이 달라진 그는 생에 대한 미련이 남아 포졸에게 애걸하였으나, 옆에 있던 조화서의 말을 듣고 “내 아까는 무서워서 그랬지만 사실은 나도 신자올시다” 하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그도 전주로 끌려가 감사 앞에서 문초를 받았다. 가슴앓이 환자인 줄 알면서도 감사는 죄수의 손발과 머리를 묶어 고정시켜 놓고 등허리를 난타하였다. 배교하라는 감사의 말에 그는 “수십 번을 죽는다 해도 천주교를 따를 것이오.”라고 하면서 배교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마침내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우리의 소원이 이렇게 빨리 이루어지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하고 기뻐하였고, “오늘 치명하면 곧장 천국에 들어가 진복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 행복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며 기뻐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는 전주 숲정이 형장에서 1866년 12월 13일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고, 이때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이호영 베드로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李 Peter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2-1838년 한국

 

 

이호영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이 베드로, 이베드로,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이호영 베드로 이야기

성 이호영 베드로(Petrus)는 경기도 이천 땅 구월에서 가난한 시골 양반의 자제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을 여윈 후 모친과 누이 아가타(Agatha)와 함께 서울 한강 북쪽 문막이라는 곳에서 살 때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를 만났다. 신부는 그의 충실성을 보고 아직 젊은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말과 행동에서 절제가 있었고, 여러 교우와 외교인을 항상 권면하여 자기의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던 중, 하루는 과거 보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왕의 총신과 아는 사이가 되어 급제를 하게 된 꿈을 생각하며 순교를 예감하였다고 한다.

1835년 2월 어느 날, 베드로와 그의 누이 아가타는 붙잡혀 옥에 갇혔다. 그는 수없이 심문과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포기 하지 않았다. 재판관이 “만일 네가 말로 천주를 배반하기 싫거든 커다란 글자 하나를 써 줄 터이니 거기에다 점 하나만 찍든지 침을 뱉든지 하면 배교하는 표로 인정하고 너를 놓아 주겠다”고 하였으나, 그는 “만 번 죽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단호히 말하였다.

그래서 이호영 베드로는 사교를 믿는다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때 그는 “나는 칼 밑에 치명하기가 원이었다. 그러나 천주의 명령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4년 동안이나 옥중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갖은 고문과 병고를 잘 참아냈고, 항상 대재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양순한 표양이 외면에 드러나 옥졸들조차 칭찬하였다고 한다.

이윽고 그는 옥중에서 병으로 순교하니, 때는 1838년 11월 25일, 그의 나이는 36세 때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정원지 베드로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鄭 Peter

  • 신분과 직업
    농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46-1866년 한국

 

 

정원지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정 베드로, 정베드로,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정원지 베드로 이야기

성 정원지 베드로(Petrus)는 충청도 진잠의 어느 열심한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일찍이 공주에서 순교하였기 때문에 그는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을 떠나 여러 곳을 전전하며 살다가 체포되기 얼마 전에는 전주 완주군 소양면 성지동에 있는 조화서 베드로의 집에서 셋방살이를 하였다. 그는 여기서 결혼하여 형과 한집에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 대단히 열심하고 또 지극히 착실한 신자였기 때문에 조화서 베드로는 이 젊은이를 성의껏 지도해 주었다.

1866년 12월 3일 전라 감사가 보낸 포교와 포졸들이 성지동을 습격하자 정 베드로는 마을을 몰래 빠져나와 산에서 하룻밤을 꼬박 세운 뒤, 마을 일이 궁금하여 발몬이라는 마을 뒷산마루 아래만 살피면서 정신없이 내려오다가 산마루로 오르던 포졸과 정면으로 마주쳐 꼼짝없이 체포되었다. 그는 조 베드로 일행과 구진포리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전주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효성이 지극하였기에 노모를 생각하다가 처음에는 신자임을 부인하였으나, 조 베드로 등의 위로와 격려로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교우임을 똑똑히 밝히게 되었다. 감사 앞에 끌려가 교리를 가르쳐 준 선생들을 대라고 하자, 그는 유일한 스승은 천주교를 믿다가 이미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 한 분뿐임을 확실히 밝혔다.

자기 아버지가 이 교를 신봉하다가 죽었는데도 같은 교를 믿는다고 해서 놀라는 포졸들에게 그는 “나는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를 만나 뵙기 위해서라도 성교를 충실히 따를 것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였다.

그 후 그는 옥에서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전하였다.

“나의 죽음을 슬퍼하지 마시오. 천국에서 우리가 서로 만날 때가 오리니 그날을 기다립시다.”

갇힌 지 9일이 지난 12월 13일 정 베드로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전주 숲정이 형장으로 끌려갔다. 형 집행을 위해 모든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동안 포청의 관리 하나가 술에 취하여 죄수들을 희롱하며 “죽어 천당은 무슨 놈의 천당이냐?”고 하며 하늘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이때 그는 머리를 번쩍 들고 “몰상식한 놈 같으니, 그래 너는 네 아버지, 네 어머니를 저주하느냐?” 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다시 머리를 숙인 채 조용히 않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스물 한 살의 젊은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치명하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조화서 베드로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趙 Peter

  • 신분과 직업
    농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5-1866년 한국

 

 

조화서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조 베드로, 조베드로,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조화서 베드로 이야기

성 조화서 베드로(Petrus)는 수원 지방의 도마지에서 태어났고, 1839년에 순교한 조 안드레아(Andreas)의 아들이다. 부친을 잃은 뒤에 그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신창 땅으로 이사하여 몇 년 간을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복사 겸 마부로 일하였으나, 최 신부가 선종함으로써 1864년에 다시 전주 소양면 성지동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조용하고 착실하게 살고 있었다. 

그는 한 막달레나(Magdalena)를 아내로 맞아 아들 조윤호 요셉을 낳았는데, 얼마 후 부인 한 막달레나가 죽자 홀아비로 있다가 다시 김 수산나와 재혼하였다. 그의 성격은 쾌활하면서도 겸손하고 양순했으며, 신자의 본분을 충실하게 지켜 신자다운 몸가짐을 잃지 않았다.

1866년 12월 5일 저녁 갑자기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붙잡힌 조 베드로는 자기 집에서 심문을 받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놀란 그의 며느리가 달려 나가 자기 남편인 조윤호 요셉에게 집에서 벌어진 사건을 이야기하였다.

자기 아들 요셉이 집으로 들어오자 아버지는 “너는 여기에 들어와선 안 된다. 어서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였으나 아들은 이를 완강히 거절하면서 자기 아버지 방으로 들어가 함께 체포되었다.

이렇게 하여 부자가 함께 묶여 전주로 향하는 도중에 여러 가지 수모와 혹심한 천대를 받았으며, 주막에서 며칠을 묵어가며 목적지인 전주에 도착한 후 곧이어 다른 신자들과 함께 심문을 받게 되었다.

조 베드로는 감옥에 갇혀서도 함께 있는 다른 신자들을 격려하여 평온한 마음으로 순교에 임하도록 준비시켰다. 또한 그는 죽인다고 협박하며 배교를 강요하는 원님에게 “내 비록 이 세상에서는 죽어 없어지더라도 죽은 뒤 내 곧 새 세상에 가서 살게 될 것이요.”라고 응수하여 더욱 잔인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윽고 그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사형장에 도착한 조 베드로는 침착하게 죽을 준비를 한 다음 희광이에게 “이곳 처형장에서까지도 흉포한 그대여! 천주교를 좀 믿어보시오. 우리는 죽으면서도 천주교를 신봉할 것입니다”라고 한 후 성호를 긋고 나서 세찬 칼을 세 번 받고 장엄하게 순교하였다.

때는 1866년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최창흡 베드로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崔昌洽 Peter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7-1839년 한국

 

 

최창흡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최 베드로, 최베드로,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최창흡 베드로 이야기

성 최창흡 베드로(Petrus)는 서울의 중인 집안 출신으로서 1801년에 순교한 서울의 총회장 최창현의 아우이며, 자신과 같은 해에 순교한 손소벽 막달레나(Magdalena)는 그의 부인이고, 1840년에 순교한 최영이 바르바라(Barbara)는 그의 딸이다.

열세 살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또 형의 순교 후 집안의 파산되었으므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몇 해 동안을 신자들과 떨어져 어느 정도 냉담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신유박해가 끝난 1815년경에 다시 신자들과 가까워져 기도문과 교리를 배워 익혔다.

그리고 지난날의 자기 생활이 언제나 마음을 무겁게 하여 순교만이 자신의 잘못을 보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하여 순교하고자 하는 열렬한 원의를 가지고 있었다.

베드로는 30세경에 신유박해로 몰락한 집안인 서울 출신의 손소벽 막달레나를 아내로 맞이하여 자녀 열한 명을 낳았으나 아홉 명은 어려서 죽었다. 1821년 콜레라가 유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고 최창흡은 부인과 함께 대세를 받고 신자의 본분을 철저히 지켜나가 선교사들이 서울에 들어왔을 때에는 착실한 신자라는 평판을 듣고 있었다.

이와 같이 열심히 살아가던 최 베드로와 그의 가족은 6월에 함께 잡혀 포도대장 앞에 끌려가 7회에 걸쳐 지극히 혹독한 신문(訊問)을 당하였다. 신문 중에 포장이 최 베드로에게 “네가 사도를 행하느냐?”고 묻자 베드로는 “천주교에서 가르치는 진리 가운데 악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과연 천주교를 믿습니다.” 하며 분명하게 대답하였다.

“천주를 배반하라.”

“못합니다.”

“언제부터 천주학을 했느냐?”

“어려서부터 믿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포졸들은 모두 “이 놈은 그 교의 늙은 괴수로구나” 하고 소리 지르며 욕하였다. 최 베드로는 다시 주리를 틀리고, 150도의 태형을 당하였으나 배교도 아니 하고 신자를 고발하지도 않았다.

형조로 옮겨 가서도 같은 형벌과 또 매우 혹독한 장형을 당하였으나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한결같은 용기로 참아 받자, 바로 그날로 사형이 언도되었다.

최 베드로는 형장으로 끌려가며 옥졸에게 “여감방에 있는 내 아내와 딸에게 가서 내 운명을 슬퍼하지 말라고 전해 주게. 그것은 너무나 인성을 따른 감정이어서 진실한 신자에게 마땅치 않은 일일 것이니, 오히려 주님을 찬미하고 이러한 큰 은혜를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잊지 말고 나를 따라오라고 전해 주시오.” 하고 부탁했다.

그는 수레를 타고서도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최 베드로는 옥에 갇힌 지 7개월 후인 12월 29일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이때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최형 베드로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崔炯 Peter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4-1866년 한국

 

 

최형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최 베드로, 최베드로,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최형 베드로 이야기

일명 ‘치장’으로도 불리던 성 최형 베드로(崔炯, Petrus)는 1814년 충청도 공주(公州)에서 스무 살에 천주교에 입교한 최인호 야고보(崔仁浩, Jacobus)와 황 안나(Anna)의 3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4살(또는 8살) 때부터 형제들과 함께 부모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그의 형제 중 동생인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崔方濟, Franciscus Javier)는 1836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Andreas)와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Thomas)와 함께 사제직을 준비하러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가 이듬해 병으로 사망한 신학생이었다.

그의 누이는 결혼을 거부하고 평생 동정녀로 살다가 1856년경 선종하였다. 그리고 그의 형 최수 베드로(崔燧, Petrus)는 옥중에서 신앙을 증거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절두산(양화진)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이렇듯 신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한 그는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웠으나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부모를 도와 농사일이나 수공업 등의 손일을 하며 가계를 도왔다.

1836년 1월에 입국한 성 모방 베드로(Maubant Petrus, 羅) 신부는 최방제를 신학생으로 선발했을 뿐 아니라 그의 형인 성 최형 베드로의 신심과 재능을 높이 평가해 복사(服事)로 선발하였다.

그때부터 그는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로 성 모방 베드로 신부가 순교할 때까지 2~3년간 그의 복사로 생활하며 전교에 힘썼다. 그리고 그 무렵인 1838년경(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한 1946년경)에 여 데레사(혹은 김 데레사)와 혼인하였다.

기해박해의 여파가 이어지던 1840년 성 최형 베드로는 아버지와 여러 신자와 함께 체포되었다. 다행히 관청까지 끌려가지는 않고 중간에 돈만 갈취당한 채 풀려났다.

1845년 1월 유학길을 떠났던 성 김대건 안드레아 부제가 어렵게 입국하여 서울에 도착하자 그를 도와 조선 입국을 애타게 기다리던 페레올(Ferreol, 高) 주교와 성 다블뤼 안토니오(Daveluy Antonius, 安) 신부를 모셔오기 위해 배를 준비해 상해(上海)로 건너갔다.

그리고 그해 8월 17일 상해의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의 집전으로 조선교회의 첫 사제가 된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사제 서품식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제대로 된 사공 하나 없는 작은 목선 ‘라파엘호’를 타고 8월 31일 상해에서 출발해 풍랑을 만나 제주도 용수리 포구에 표착했다가 다시 배를 수리하여 10월 12일 밤 오늘날 전라북도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나바위의 후미진 장소 또는 충청남도 강경읍 황산마을 인근 포구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1846년 9월 16일 병오박해(丙午迫害)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한 뒤에 성 최형 베드로는 서울로 상경하여 순청동(巡廳洞, 오늘날 서울시 중구 순화동과 봉래동1가에 걸쳐 있던 마을)에 거주하며 생활하였다.

얼마간 성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의 복사로 활동한 그는 남대문 밖에서 조그마한 가게를 경영하며(또는 목수 일을 하며) 어느 정도 부유하게 살았는데, 틈틈이 종교 서적을 베끼거나 묵주를 만들면서 외교인과 예비 교우들을 친절하게 맞아들였다.

1856년 3월 성 베르뇌 시메온(Berneux Simeon, 張) 주교가 입국한 뒤에는 여러 차례 주교를 방문해 교회 일을 도왔다.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는 교회 서적을 체계적으로 간행하기 위해 1861년(또는 1862년) 서울에 인쇄소를 세우고 그 책임자로 성 최형 베드로를 임명하였다.

그는 주교의 명대로 기꺼이 그 일을 맡아 여러 가지 어려움과 장애를 이겨 나가며 4년 동안 “성교일과”(聖敎日課)와 “성찰기략”(省察記略) 등의 교회 서적을 많이 간행하였다.

1863년 거처를 석정동(石井洞)으로 옮긴 그는 비록 회장은 아니었지만,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로부터 대세를 주는 권한을 받을 정도로 큰 신임을 받고 있었다.

1866년 2월 23일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가 체포되면서 많은 교회 서적이 적발되자 그는 사태가 위태롭게 전개됨을 알고 일단 몸을 피하였다.

하지만 이선이(李先伊)라는 밀고자가 포졸들에게 그의 집을 알려주었고, 포졸들이 그의 집에 들이닥쳤을 때 미처 피신하지 못한 그의 아내가 혹독한 문초를 받아 피와 살이 범벅이 되면서도 끝까지 남편의 피신처를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집에 살던 14살 된 하녀가 밤중에 몰래 집을 빠져나가는 것을 본 포졸들이 그녀를 붙잡아 다그치며 곤장을 쳐서 그가 숨어 있는 곳을 알아냈다.

마침내 포졸들은 3월 1일 성 최형 베드로를 체포하여 온몸에 석회를 뿌리고 주먹으로 마구 때린 다음 포도청으로 끌고 갔다. 그는 천주교를 신봉했다는 죄와 사악한 책을 출판했다는 죄 그리고 다른 신자들을 선동했다는 죄 등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형 선고문에는 “혹심한 곤장에도 굴하지 않고 쇠나 돌같이 고집이 세어 사교를 단념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였다. 또 진리를 고백하면서 사형 선고문에 직접 서명까지 하였다. 이에 국법을 따라 마땅히 사형에 처하노라.”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성실한 벗이자 함께 교회 서적을 출판하는 직무를 맡았던 성 전장운 요한(全長雲, Joannes)과 함께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때가 1866년 3월 9일로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얼마 후 교우들이 그의 시신을 장사지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의 어깨와 다리에 깊은 상처가 여럿 있었고 많은 뼈가 부서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교우들은 이구동성으로 “모든 신앙 증거자 중에서 최형이 가장 혹독한 고문을 당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순교 후 성 최형 베드로의 시신은 왜고개(현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에 매장되었다가 1909년 5월 28일 성 남종삼 요한(南鍾三, Joannes)의 유해와 함께 발굴되어 명동 주교관으로 옮겨졌다가 6월 17일 명동 성당 지하 묘소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1968년 시복식을 계기로 다시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해실로 옮겨 안치하였다.

성 최형 베드로는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한 명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8. 홍병주 베드로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洪秉周 Peter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8-1840년 한국

 

 

홍병주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홍 베드로, 홍베드로.

 

 

홍병주 베드로 이야기

성 홍병주 베드로(Petrus)와 성 홍영주 바오로(Paulus)는 형제지간이고, 매우 유명한 가문의 자손들이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 순교한 홍낙민 루카(Lucas)는 그들의 조부이고, 1840년 전주에서 참수당한 홍재영 프로타시우스는 그들의 삼촌이다.

그리고 아버지 홍빈영은 1801년의 지긋지긋한 난을 치르고 나서 충청도 내포평야에 있는 서산 고을 여사울이란 곳에 살고 있었다. 이 형제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은 신앙과 견실한 학식뿐이었는데, 이들은 그것을 잘 이용하여 후일 천주교의 명성을 크게 높였다.

그들의 학덕과 모범적인 신자생활을 익히 알던 전교 신부들은 그들 형제를 지방의 회장으로 임명하니, 그들은 남을 가르치는 일과 약한 자를 격려하는 일과 병자를 간호하는 일 그리고 자선 사업에서 자신의 직분을 성실히 수행했다.

그러므로 모방(Man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도 교회의 여러 가지 증대한 일을 처리하게 했고, 또 그들은 기대에 맞게 잘 처리하여 교회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시작되어 성직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면 목숨을 잃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 형제는 선교사들을 용감하게 집에 모시고 접대하였으니, 이미 그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준비하고 있었음이 분명하였다.

한편 조정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김여상은 체포자 명단에 그들의 이름도 올려놓고 있다가 그해 9월에 홍 베드로와 바오로를 붙잡았다. 그러나 형제는 똑같이 순교자의 자손답게 하느님을 증거하고 다른 신자들을 고발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포장은 이들 형제의 배교를 단념하고 형조로 이송하였는데, 당시 형조판서 홍명주는 이들의 친척이었다. 그는 이들 형제 때문에 자신에게 무슨 해가 미칠까 두려워한 나머지 부하들에게 모든 수단을 다 써서 그들을 배교시키되 사형언도는 내리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에 그 부하들은 상관에게 잘 보일 생각으로 그들을 배교시키지 위해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쓸데없는 일이었으니, 이 형제는 끝까지 마음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입장이 되자 마침내 그들에 대한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형인 홍 베드로는 박종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같이 참수되었고, 동생인 홍 바오로는 그 이튿날에 형을 따라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는 그 당시 법에서 형제를 같은 날 죽이지 못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따로따로 형을 집행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형은 42세의 나이로 1840년 1월 31일에 순교하였으며, 동생은 39세의 나이로 그 이튿날에 참수당하여 영광스런 월계관을 함께 받았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9. 베드로

 

  • 세례명 축일
    9월 23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900년

 

 

베드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 이야기

성 안드레아(Andreas), 성 요한(Joannes), 성 베드로(Petrus)와 성 안토니우스(Antonius)는 그 당시 시칠리아(Sicilia) 섬을 점령 중이던 사라센들에 의해 아프리카로 추방되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잔혹한 고문을 받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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