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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2일 남자세례명 12가지

피어나네 2023. 6. 2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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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2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니체타, 바울리노, 아론, 알바노, 에베르하르도, 요한 (+5세기), 요한 (+835년), 요한 피셔, 율리오, 인노첸시오 5세, 토마스 모어, 플라비오 클레멘스, 총 12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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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2일 여자세례명 콘소르시아, 총 1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6월 22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2가지

 

 

 

 

6월 22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니체타

  2. 바울리노

  3. 아론

  4. 알바노

  5. 에베르하르도

  6. 요한 (+5세기)

  7. 요한 (+835년)

  8. 요한 피셔

  9. 율리오

  10. 인노첸시오 5세

  11. 토마스 모어

  12. 플라비오 클레멘스

 

6월 22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2가지

 

 

1. 니체타

 

  • 가톨릭 성인 이름
    Niceta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선교사

  • 활동 연도와 지역
    335-414년 레메시아나

 

 

니체타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니체따, 니체따스, 니체타스, 니케따스, 니케타.

 

 

니체타 자료

놀라의 성 바울리누스(Paulinus)와 가까운 친구인 성 니케타(또는 니체타)는 다치아의 레메시아나(지금의 루마니아)의 주교였다. 그러나 그는 베시인들에게 성공적으로 복음을 전한 선교사 주교로 유명하고, 또 그의 시 역시 루마니아인들은 기억하고 있다.

그는 삼위일체에 관한 저서를 비롯하여 전례용 성가를 남겼으며, 많은 학자들은 ‘테 데움’(Te Deum)의 저자라고 믿고 있다. 이전에는 1월 7일에 축일을 지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바울리노

 

  • 가톨릭 성인 이름
    Paul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저술가

  • 활동 연도와 지역
    353-431년 놀라

 

 

바울리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울리누스, 빠울리노, 빠울리누스, 파울리노, 파울리누스.

 

 

바울리노 자료

성 메로피우스 폰티우스 바울리누스(Meropius Pontius Paulinus, 또는 바울리노)는 로마의 부유한 원로원 가문 출신으로 프랑스의 보르도(Bordeaux)에서 태어났다. 그는 보르도의 학교에서 그리스-라틴 문화를 접하였고, 시와 수사학은 로마 황제 그라티아누스의 스승이었던 데치무스 막누스 아우소니우스(Decimus Magnus Ausonius)로부터 배웠다.

그의 부친은 오늘날의 프랑스 지역인 갈리아(Gallia) 지방의 총독이었다. 그는 성공적인 법률가로 성장하여 여러 관직을 맡았고 갈리아와 이탈리아, 에스파냐 등 여러 곳을 여행하였다. 그리고 에스파냐 여자인 테라시아(Therasia)와 결혼하였다.

그러던 성 바울리누스는 보르도의 주교 성 델피누스(Delphinus, 12월 24일)를 만나 그에게 영적 지도를 받으면서 가톨릭에 입문하게 되었다. 세례를 받은 다음 그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아키텐(Aquitaine)으로 가서 은거하였다.

390년 그는 에스파냐에 있는 아내의 영지로 이사했는데, 그 당시 외아들이 세상을 떠나자 막대한 재산을 교회에 희사하고 자신은 아주 엄격한 삶을 시작하였다.

393년경 주민들의 요청에 따라 바르셀로나(Barcelona)의 주교가 그를 사제로 서품하자 성 바울리누스 신부는 나폴리(Napoli) 근교인 놀라의 성 펠릭스(Felix) 무덤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였다. 이때 친척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거의 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하였다.

그는 자선가로 유명했을 뿐만 아니라 폰디(Fondi)에는 성당을, 놀라에는 수로(水路)를 만들었다. 그리고 수도원 같은 분위기였던 자신의 집에는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와 살도록 배려하였다.

그는 폭넓은 교우관계를 유지했는데, 그와 가까웠던 인물 중에는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8월 28일) 주교, 성서학자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12월 7일) 주교, 투르(Tours)의 성 마르티누스(Martinus, 11월 11일) 주교 등 수없이 많은 명사들이 있었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51편의 편지, 32편의 시 등이 있다. 그는 프루덴티우스(Prudentius)에 버금가는 대시인으로서 인정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아론

 

  • 가톨릭 성인 이름
    Aaro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아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런.

 

 

아론 자료

성 율리우스(Julius)와 성 아론은 유럽 대륙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로마 사람으로 3세기 중엽 웨일스(Wales) 남동부 뉴포트(Newport)의 케얼리언(칼레온, Caerleon)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순교한 듯하다. 그들은 영국 본토인 브리튼(Britain) 섬의 첫 번째 순교자인 성 알바누스(Albanus)와 동시대 순교자에 포함된다.

그들에 대한 첫 언급은 6세기의 영국 수도자이자 역사가로서 ‘현자’로도 불린 성 길다(Gildas, 1월 29일)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다만 3세기 전의 일을 기록한 것이라 그 내용의 정확성에 관해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언급은 8세기에 활동한 교회 학자이자 역사가인 성 베다(Beda, 5월 25일)에 의해서도 반복되었다.

또한 케얼리언 인근에 9세기까지 그들에게 봉헌된 성당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들의 순교 시기를 3세기 중엽으로 추정한 근거는 당시 로마 군대가 주둔하던 주요 요새가 케얼리언에 있었고, 그 요새가 3세기 말에 잉글랜드의 켄트(Kent)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버려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데키우스 황제나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케얼리언에서 순교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로마 순교록”은 성 율리우스와 성 아론의 순교 시기를 304년경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로 보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은 7월 1일 목록에서 성 율리우스와 성 아론이 성 알바누스가 순교한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에 잉글랜드에서 많은 이들과 함께 다양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싸워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기쁨을 얻었다고 기록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성 율리우스와 성 아론에 대해 같은 내용을 언급하며 다만 장소를 웨일스의 칼레온으로 분명히 했다. 그리고 축일 또한 7월 1일에서 성 알바누스와 같은 날인 6월 22일로 옮겨 기록하였다.

다만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가톨릭교회에서는 이날이 로체스터(Rochester)의 성 요한 피셔(Joannes Fisher)와 성 토마스 모어 (Thomas More)의 축일과 중복되는 이유로 성 알바누스와 함께 6월 20일로 옮겨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알바노

 

  • 가톨릭 성인 이름
    Alb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09년?

 

 

알바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알바누스, 알반.

 

 

알바노 자료

성 알바누스(Albanus, 또는 알바노)는 영국 본토의 첫 번째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는다. 그는 로마노-브리튼 사람으로 베를라미움에 살았는데, 이 도시는 지금 그의 이름을 따서 세인트 알반이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그는 도망해 온 신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다가, 그 자신이 체포되어 초자연적인 빛을 발하면서 순교하였다.

성 베다(Beda) 존자의 기록에 의하면 알바누스가 참수를 당할 때 하늘에서 기적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고 전한다. 순교의 전설적인 곳은 홀머르스트 힐인데, 이곳에는 성 베다의 성당과 경당이 세워진 곳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에베르하르도

 

  • 가톨릭 성인 이름
    Eberhard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085-1164년 잘츠부르크

 

 

에베르하르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베르하르두스, 에벨하르도, 에벨하르두스.

 

 

에베르하르도 자료

성 에베르하르두스(Eberhardus, 또는 에베르하르도)는 어느 신심 깊은 귀부인의 아들로 독일 바이에른(Bayern)의 뉘른베르크(Nuremberg)에서 태어났다.

베네딕토 수도자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후 그는 밤베르크(Bamberg) 대성당의 성직록을 받았으나, 즉시 이를 사임하고 성 미카엘 산의 어느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교회 당국은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파리(Paris)로 보내어 더 높은 학업을 연마토록 하였다.

그러나 수도생활에 대한 동경 때문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결국 그는 교회 당국의 허가를 받아 프뤼페닝(Pruffening) 수도원으로 들어갔다가 나중에 원장이 되었다. 그의 신심과 지혜는 이 수도원에 영적인 열기를 불어 넣었다.

또한 그의 덕과 능력은 자신의 뜻과는 달리 잘츠부르크의 주교좌를 맡게 하였다. 그는 교구민들의 윤리적 자질 향상을 위하여 정열을 바쳤으며, 교구 내에 만연되어 있던 성직자들의 월권행위들을 강력히 규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에베르하르두스 성인은 두 번의 시노드를 개최하고, 특히 천주의 성모 마리아께 대한 신심을 널리 보급하는데 정성을 쏟았다. 만년에 그는 교구를 여행하면서 평화를 심는 사람으로 활약하다가 라인(Rhein)의 시토 수도원에서 운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요한 (+5세기)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세기 나폴리

 

 

요한 (+5세기)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5세기) 자료

성 요한(Joannes)은 이탈리아 나폴리의 주교로서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 9월 19일)의 유해를 포추올리(Pozzuoli)에서 나폴리로 이장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요한 (+835년)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835년 나폴리

 

 

요한 (+835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835년) 자료

이탈리아 나폴리의 주교인 성 요한(Joannes)은 '평화의 조정자'로 알려졌다. 그는 나폴리의 수호성인 중의 한 분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요한 피셔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Fish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추기경,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469-1535년 로체스터

 

 

요한 피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피셔 자료

1469년 영국 요크셔(Yorkshire)의 베벌리(Beverly)에서 어느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난 성 요한 피셔(Joannes Fisher)는 1483년 케임브리지의 성 미카엘 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그의 재능이 매우 뛰어나서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자랐다. 그래서 그는 1491년 불과 22세의 나이로 특별 관면을 받은 후 사제로 서품되었다.

1497년 그는 국왕의 모친인 마가렛 보퍼드(Margaret Beaufort)의 고해신부로 활약하는 한편, 그녀를 설득하여 케임브리지에 그리스도 신학교를 설립하고 1505년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1504년 케임브리지 성 미카엘 신학교의 총장이 된 그는 같은 해에 로체스터의 주교가 되었다.

그런데 헨리 7세와 헨리 8세의 혼란한 정치 풍토 속에서 헨리 8세 왕이 교황으로부터 영국 교회를 분리하고 수장령을 반포했을 때 그는 용감하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그리스도의 법을 계속하여 따르겠습니다.”

친구와 적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양심을 끝까지 지켰다.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글도 남아 있다.

“나는 다른 어떤 사람의 양심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결국 그는 1534년 4월 고령에도 불구하고 수장령에 대한 서약을 거부하고 성 토마스 모어(Thomas More, 6월 22일)와 함께 반역 죄인으로 런던탑에 감금되었다.

한편 교황 바오로 3세(Paulus III)가 성 요한 피셔 주교를 구하기 위해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했으나, 오히려 헨리 8세의 분노를 사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결국 그는 1535년 6월 22일 마지막으로 '테 데움'(Te Deum)을 노래하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1850년 영국 가톨릭 교계제도가 재확립된 이후 시복시성이 추진되면서 1886년 12월 2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성 토마스 모어와 다른 52명의 순교자들과 함께 복자품에 올랐고, 순교 400년이 되는 1935년 5월 19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성 토마스 모어와 함께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율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Jul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율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율리우스, 줄리어스.

 

 

율리오 자료

성 율리우스(또는 율리오)와 성 아론(Aaron)은 유럽 대륙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로마 사람으로 3세기 중엽 웨일스(Wales) 남동부 뉴포트(Newport)의 케얼리언(칼레온, Caerleon)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순교한 듯하다. 그들은 영국 본토인 브리튼(Britain) 섬의 첫 번째 순교자인 성 알바누스(Albanus)와 동시대 순교자에 포함된다.

그들에 대한 첫 언급은 6세기의 영국 수도자이자 역사가로서 ‘현자’로도 불린 성 길다(Gildas, 1월 29일)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다만 3세기 전의 일을 기록한 것이라 그 내용의 정확성에 관해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언급은 8세기에 활동한 교회 학자이자 역사가인 성 베다(Beda, 5월 25일)에 의해서도 반복되었다.

또한 케얼리언 인근에 9세기까지 그들에게 봉헌된 성당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들의 순교 시기를 3세기 중엽으로 추정한 근거는 당시 로마 군대가 주둔하던 주요 요새가 케얼리언에 있었고, 그 요새가 3세기 말에 잉글랜드의 켄트(Kent)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버려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데키우스 황제나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케얼리언에서 순교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로마 순교록”은 성 율리우스와 성 아론의 순교 시기를 304년경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로 보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은 7월 1일 목록에서 성 율리우스와 성 아론이 성 알바누스가 순교한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에 잉글랜드에서 많은 이들과 함께 다양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싸워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기쁨을 얻었다고 기록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성 율리우스와 성 아론에 대해 같은 내용을 언급하며 다만 장소를 웨일스의 칼레온으로 분명히 했다. 그리고 축일 또한 7월 1일에서 성 알바누스와 같은 날인 6월 22일로 옮겨 기록하였다.

다만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가톨릭교회에서는 이날이 로체스터(Rochester)의 성 요한 피셔(Joannes Fisher)와 성 토마스 모어 (Thomas More)의 축일과 중복되는 이유로 성 알바누스와 함께 6월 20일로 옮겨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인노첸시오 5세

 

  • 가톨릭 성인 이름
    Innocent V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교황

  • 활동 연도와 지역
    +1276년

 

 

인노첸시오 5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인노첸시우스, 인노켄티오, 인노켄티우스.

 

 

인노첸시오 5세 자료

프랑스의 타랑테즈앙포레(Tarentaise-en-Forez)에서 1224년경 태어나 '타랑테즈(Tarentaise)의 베드로(Petrus)'라고 알려진 그는 16세 때에 작센(Sachsen)의 복자 요르단(Jordan, 2월 15일)의 지도하에 도미니코회 회원이 되었다. 그리고 1259년에 파리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대학 총장이 되었다.

그는 곧 유명한 신학자이자 설교자로 명성을 얻었고, 그의 친구인 성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 1월 28일) 등을 포함하는 연구위원회 회장을 맡았다. 37세 때에 그는 설교자회의 프랑스 관구장이 되면서부터 휘하에 있는 모든 수도원을 도보로 방문했고, 성 토마스 데 아퀴노를 파리 대학에 부임시켰다.

1272년에는 리옹(Lyon)의 대주교, 또 다음 해에는 오스티아(Ostia)의 교구장 추기경이 되었다. 그는 뛰어나고 적극적인 교황 대리자로 활약하였고 그리스 이교 문제에 대해 책임 있는 활동을 하였다.

1276년 1월 21일 그는 도미니코 회원으로는 처음으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교황이 된 복자 인노켄티우스 5세(Innocentius V, 또는 인노첸시오 5세)는 비록 그 재임기간이 5개월에 불과했다.

하지만 교황권을 지지하는 토스카나 연합의 구엘프당(Guelphs)과 신성로마제국을 지지하는 피사의 기벨린당(Ghibellines)을 화해시키고, 피사(Pisa)와 루카(Lucca) 도시간의 평화를 회복시켰으며, 합스부르크(Habsburg) 왕가의 루돌프 1세(Rudolf I)와 앙주(Anjou)의 샤를(Charles) 사이의 중재자로서 활약하였다.

또한 그는 리옹(Lyon) 공의회를 통하여 비잔틴과의 재일치를 모색하다가 6월 22일 갑자기 선종하였다. 그는 1898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토마스 모어

 

  • 가톨릭 성인 이름
    Thomas Mor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인본주의자, 법률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477-1535년

 

 

토마스 모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마, 토머스.

 

 

토마스 모어 자료

법률학자이자 판사이던 요한 모어(Joannes More)의 아들로 런던에서 태어난 성 토마스 모어는 12세 때에 캔터베리(Canterbury)의 대주교이며 영국의 대법관인 요한 모턴의 조수로 생활했다. 나중에 그는 옥스퍼드와 런던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면서 문화와 신학 ·고전 문학 분야에 대한 관심을 넓혔고, 1501년 법조계에 진출했다.

1504년에 그는 영국 하원 의원에 당선되었고, 카르투지오회 수도자가 되려는 꿈을 포기하고 1505년에 제인 콜트(Jane Colt)와 결혼하여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들의 집은 영국의 문예부흥 및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그 이유는 당대의 석학들과 지성인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였기 때문이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기지는 만인의 감탄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영국 인본주의자들의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최고 석학이었다.

그는 시, 역사를 비롯하여 프로테스탄트를 반대하는 논문, 신심 서적과 기도문 등을 저술했고 고전 번역 작업도 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유토피아”(1515-1516년)는 이성이 지배하는 이상적인 국가상을 묘사한 것으로 세계의 고전이 되었다. 또 “루터를 배격하는 헨리의 변명”(1523년)은 그가 가르쳤던 헨리 8세에 대한 강력한 옹호가 담긴 서적이다.

1510년 그는 런던의 사정 장관보(司政 長官補)로 임명되었고, 1511년에는 아내와 사별한 뒤에 과부이던 앨리스 미들턴(Alice Middleton)과 재혼하였다. 헨리가 그의 형 아서(Arthur)의 사망으로 왕으로 등극하면서부터 그는 프랑스와 플랑드르(Flandre)의 외교사절로 활약했고, 1517년에는 추밀원에 진출했으며, 1521년에는 기사작위를 받았다.

또한 그는 1523년에 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529년에는 월시(Walsh) 추기경 후임으로 평신도로서는 처음으로 대법관직에 올랐다. 성 토마스 모어는 이때 왕의 이혼에 대하여 강력한 어조로 반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법관에 기용된 것이었다.

그 후 그는 헨리 8세 왕의 이혼 문제에 침묵을 지킴으로써 왕의 혼란을 가중시킴과 아울러 분노케 하다가, 헨리 8세가 카타리나(Catharina of Aragun) 왕비와의 이혼 허가를 교황청에 제출하는 서류에 서명하기를 거부했을 때 국왕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또 교회를 반격하는 일련의 서류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한 후 성 토마스 모어는 대법관직을 사임하고, 1532년에 첼시(Chelsea)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또한 그는 헨리 8세가 카타리나의 시녀였던 앤 불린(Anne Boleyn)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에게 후계 지위를 양도한다는 소위 왕위 계승 문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왕에게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534년에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혔고, 15개월 동안 옥중 생활을 하는 중에도 영국 교회에 대한 왕의 수장령에 서명할 것을 요청하는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에게 침묵권을 행사하며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 일로부터 꼭 5일 째 되는 날인 1535년 7월 6일, 마침내 그는 참수형을 받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국왕의 충실한 종이 될 수 있으나 먼저 하느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던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1850년 영국 가톨릭 교계제도가 재확립된 이후 시복시성이 추진되면서 1886년 12월 29일 로체스터(Rochester)의 성 요한 피셔(Joannes Fisher) 주교와 다른 52명의 순교자들과 함께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그리고 순교 400년이 되는 1935년 5월 19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성 요한 피셔 주교와 함께 시성되었다.

그의 축일은 7월 9일로 정해졌다가 1970년 이후 성 요한 피셔 주교의 순교일인 6월 22일에 그와 함께 기념하게 되었다. 법률가의 수호자로서 공경을 받던 그는 2000년 10월 31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정치인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플라비오 클레멘스

 

  • 가톨릭 성인 이름
    Flavius Clement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집정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96년

 

 

플라비오 클레멘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글레멘스, 끌레멘스, 클레멘트, 플라비우스.

 

 

플라비오 클레멘스 자료

성 플라비우스 클레멘스(또는 플라비오 클레멘스)는 로마의 정치가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조카이자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Titus Flavius Sabinus)의 아들이다. 그는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사촌으로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조카딸인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Flavia Domitilla, 5월 7일)와 결혼하였다.

95년 로마의 집정관이었던 성 플라비우스 클레멘스는 이듬해에 그리스도인이란 죄목으로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리고 그의 부인이었던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 역시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가예타(Gaeta) 만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판다타리아(Pandataria) 섬으로 추방되어 순교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에 대한 전승은 여러 가지가 섞여 있어서 상당히 혼란스럽다. 옛 “로마 순교록”은 5월 7일 목록에서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의 순교를 전하면서 그녀를 집정관 성 플라비우스 클레멘스의 조카딸로 기록하였다.

또한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는 교황 성 클레멘스 1세(Clemens I, 11월 23일)에게 직접 동정녀의 면사포를 받고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다른 많은 이들과 함께 폰티아(Pontia) 섬으로 추방되어 그리스도를 위해 오랜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이탈리아 중부 테라치나(Terracina)로 끌려갔는데, 그곳에서 그녀의 가르침과 기적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되자 재판관은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와 다른 동정녀인 성녀 에우프로시나(Euphrosyna)와 성녀 테오도라(Theodora)가 함께 있는 방에 불을 지르도록 명령했고, 그렇게 해서 그들의 영광스러운 순교가 완성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은 6월 22일 목록에서 집정관이자 순교자인 성 플라비우스 클레멘스의 유해 이장에 대해 기록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키다가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처형되었는데, 그의 유해가 로마에 있는 교황 성 클레멘스 성당에서 발견되어 장엄하게 그곳에 모셨다고 적었다. 그래서 성 플라비우스 클레멘스는 전통적으로 유해 이장일인 6월 22일에 축일을 기념해왔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5월 7일 목록에서 성녀 도미틸라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녀를 집정관 성 플라비우스 클레멘스의 조카딸로 소개하였다. 그리고 6월 22일 목록에서 로마에서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순교한 성 플라비우스 클레멘스를 기념하는데, 그가 무신론이란 혐의로 처형되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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