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세례명/세례명 이름 찾기

도미니코 남자세례명 13인 목록

피어나네 2023. 8. 1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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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세례명 도미니코는 도미니꼬, 도미니꾸스, 도미니쿠스, 도미니크, 도미닉, 도밍고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남자세례명 도미니코 13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도미니코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도미니코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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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코
천주교 남자세례명
13인 목록

 

 

 

 

도미니코 남자세례명 목록

 

  1. 도미니코 (1월 22일)

  2. 도미니코 사비오 (3월 9일)

  3. 도미니코 (4월 26일)

  4. 도미니코 (5월 12일)

  5. 도미니코 (8월 8일)

  6. 도미니코 바르베리 (8월 27일)

  7. 도미니코 델 발 (8월 31일)

  8. 도미니코 이바네스 데 에르키시아 (9월 28일)

  9. 도미니코 스파다포라 (10월 3일)

  10. 도미니코 로리카토 (10월 14일)

  11. 도미니코 (12월 20일)

  12. 도미니코 (12월 20일)

  13. 도미니코 (12월 29일)

 

도미니코 천주교 남자세례명 13인 목록

 

 

1. 도미니코

 

  • 세례명 축일
    1월 22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ominic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031년 소라

 

 

도미니코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미니꼬, 도미니꾸스, 도미니쿠스, 도미니크, 도미닉, 도밍고.

 

 

도미니코 이야기

이탈리아의 폴리뇨(Foligno)에서 태어난 성 도미니코(Dominicus)의 어린 시절 기록은 유실되었고, 그가 수도자가 된 후의 기록만 다소 남아 있을 뿐이다.

성 도미니코는 베네딕토회 수도자가 된 후 주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예를 들어 소라, 스칸드릴리아(Scandrilia), 상그로(Sangro) 그리고 다른 도시에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세우는데 일생을 바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세운 각 수도원의 초대원장이 될 만큼 개척자의 정신이 뛰어났으며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는 새 수도원을 세우기 전까지는 주로 독수자처럼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다가 일단 사업이 시작되면 불같이 뜨거운 열정으로 일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구령사업에도 남다른 능력을 보였는데, 때때로 이상한 기적을 행함으로써 수많은 죄인을 회개시키고 교회를 확장하였다. 그는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Campania)의 소라에서 80세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도미니코 사비오

 

  • 세례명 축일
    3월 9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ominic Savio

  • 신분과 직업
    소년,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42-1857년

 

 

도미니코 사비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메니꼬, 도메니코, 도미니꼬, 도미니꾸스, 도미니쿠스, 도미니크, 도미닉, 도밍고.

 

 

도미니코 사비오 이야기

성 도미니코 사비오(Dominicus Savio)는 1842년 4월 2일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 지방 토리노(Torino) 근처의 산 조반니 디 리바(San Giovanni di Riva)에서 가난한 대장장이인 아버지 카를로 사비오(Carlo Savio)와 재봉사인 어머니 비르지타(Birgitta) 사이의 10남매 가운데 하나로 태어났다. 

그는 5살 때부터 매일 미사의 복사를 섰고, 7살 때에 예외적으로 첫영성체를 하였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사제가 되려는 소망을 불태워왔다. 

성 요한 보스코(Joannes Bosco, 1월 31일)가 청소년 교육을 위한 사목을 준비하면서 토리노의 성직자들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을 위한 자신의 사업을 도와주도록 부탁했는데, 성 도미니코 사비오의 본당 신부가 그를 추천하였다. 

면담에서 성 요한 보스코 성인은 이 소년의 영혼 속에 은총이 충만한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12살 때에 토리노의 종합기숙학교인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1월 24일)의 오라토리오에 입학하였다.

성 도미니코 사비오는 성인이 되려는 열망으로 여러 가지 특이한 고행을 원했으나 성 요한 보스코 신부의 지도에 따라 특이한 고행보다는 매일의 일상 속에서 자기가 하는 일을 하나하나 충실히 하는 데서 성화의 길을 찾았다. 그리고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회’를 결성하여 친구들과 더불어 성덕을 닦았다.

성인이 조직한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회는 신심적인 목적 외에도 성 요한 보스코를 여러 가지 구체적인 면에서 도와주었는데, 성 요한 보스코가 살레시오회의 모체가 되는 모임을 결성했을 때 그 모임의 회원 22명이 주요 회원이 되었다.

한 번은 학교 내에서 두 학생이 돌을 들고 싸울 때, 성 도미니코 사비오는 작은 십자가를 들고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이렇게 말하였다.

“싸우기 전에 이 십자가를 먼저 보아라. 예수 그리스도는 무죄한 분이셨지만, 당신의 박해자들을 용서하시고 운명하셨다. 나는 죄인이다. 그리고 나는 앙심을 갖게 됨으로써 그분을 욕되게 한다. 자, 이제 싸워도 된다. 그러나 그 돌을 먼저 나에게 던져라.”

나이 어린 소년의 이 한마디 말은 그의 인품과 성덕을 밝히는 중요한 말이다.

그는 학교 규칙을 지키는데 지나칠 정도로 세심하였고, 그의 기도 정신은 당대의 어느 큰 성인에 못지않았다. 가끔 성 요한 보스코가 그의 과도한 열성을 탓하고 중지시킬 정도였다. 이럴 때마다 그는 “저는 큰일은 하지 못합니다”라고 하면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작은 일이라도 그것을 하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성 요한 보스코가 고행에 몰두하는 그를 다소 저지했을 때도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신심은 우리가 숨을 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어느 추운 겨울밤 성 도미니코 사비오가 얇은 시트 한 장을 덮고 떨고 있는 것을 본 성 요한 돈보스코가 “왜, 이런 짓을 하느냐, 폐렴에 걸리면 어쩌려고?” 하자, 그는 “우리 주님께서는 베들레헴의 구유에 누워계셔도 폐렴에 걸리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성 요한 보스코를 놀라게 하였다.

또한 성 도미니코 사비오는 아침 미사 때부터 몇 시간 동안 기도에 빠져 있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는 이런 내밀한 기도 시간을 ‘나의 기분 전환’이라고 불렀는데, 이 순간이 그에게는 마치 하늘이 열리는 광경을 보는 듯하다고 말했었다.

한 번은 그가 이런 기도 중에서 일종의 환시를 보았는데, 황량한 들판에 수많은 군중이 있고, 그곳으로 횃불을 들고 가는 어떤 사람을 보았다. 그는 이것을 성 요한 보스코에게 이렇게 설명하였다.

“이 횃불은 영국 국민에게 전해야 할 가톨릭 신앙입니다.”

성 요한 보스코는 이 사실을 당시의 교황 비오 9세(Pius IX)에게 알렸고, 교황은 이 말을 듣고 영국에 대해 더 큰 사목적 배려와 관심을 두게 되었다고 한다.

성 도미니코 사비오의 건강이 날로 악화하고 폐렴까지 겹치자 건강 회복을 위해 1857년 3월 1일 집으로 보내졌다. 그는 예수님의 수난을 생각하며 수술의 고통을 견뎌냈지만, 3월 9일 아스티(Asti)의 몬도니오(Mondonio)에서 15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하느님, 당신께 영원한 찬미를 드리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아! 나는 정말로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있습니다”였다.

그의 시복식은 1914년에 로마에서 거행할 예정이었으나, 몇 가지 반대에 부딪혀서 성 요한 보스코의 시성 후인 1950년 3월 5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1954년 6월 12일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는데, 교회 역사상 가장 나이 어린 성인 가운데 한 명으로서 소년 성가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의 축일은 선종한 날인 3월 9일에 지내나, 살레시오회 등에서는 성인의 축일이 늘 사순시기와 겹치는 이유로 5월 6일로 옮겨 기념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3월 9일 목록에서 “달콤하고 행복한 영혼을 지닌 어린 시절부터, 아직 청소년기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리스도교의 완덕의 길을 걸었다”라고 성 도미니코 사비오의 성덕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도메니코 사비오(Domenico Savio)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도미니코

 

  • 세례명 축일
    4월 26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Dominic

  • 신분과 직업
    선교사,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300년

 

 

도미니코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미니꼬, 도미니꾸스, 도미니쿠스, 도미니크, 도미닉, 도밍고.

 

 

도미니코 이야기

그레고리우스(Gregorius)와 도미니코(Dominicus)는 도미니코회의 초창기에 살았던 수도자들이다. 그들은 영혼을 구하려는 열망에 불타서 원장의 허락을 받고 에스파냐 아라곤(Aragun)의 바르바스트로(Barbastro) 부근의 무어인들이 사는 산악지대 마을인 소몬타노(Somontano)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들은 피레네 산맥을 따라 가면서 고지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복음 말씀 그대로 돈도 없고 맨발이었다. 작은 마을에서 작은 마을로,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다니며 말씀을 전하고, 대접해 주는 대로 먹고 잠을 잤다. 그러나 산 속의 바위 밑과 자연적인 동굴에서 지낸 때가 더 많았고,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없어 기진맥진한 적이 부지기수였다.

그들은 마을 어귀에 닿으면 조그마한 종을 울려 사람들에게 자신의 도착을 알렸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폭풍우를 만나 바위 밑에 피신해 있던 중 바위더미가 무너지면서 그 밑에 깔려 죽었다.

그들의 시신은 기적적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바르바스트로 교구의 베시안스(Besians)에 안장되었다. 복음적인 선교사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는 그들에 대한 공경은 1854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도미니코

 

  • 세례명 축일
    5월 12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ominic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109년경

 

 

도미니코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미니꼬, 도미니꾸스, 도미니쿠스, 도미니크, 도미닉, 도밍고.

 

 

도미니코 이야기

성 도미니쿠스(Dominicus, 또는 도미니코)는 도미니쿠스 드 라 칼차다로도 불리는 '드 라 칼차다'(de la Calzada)라는 말은 '방죽 길'이란 뜻으로 그가 에스파냐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가는 순례 길을 개척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그는 에스파냐 바스크(Basque) 지방의 비스케이(Biscay) 만에서 태어났다. 젊어서 그는 수차례에 걸쳐서 발바네라(Valvanera)에 있는 베네딕투스 수도원에 입회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무뚝뚝한 그의 외모와 무식한 것이 수도자 생활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그 후 그는 리오하(Rioja) 근방에 움막을 짓고 은수자로서 독수생활을 시작하였다. 오스티아(Ostia)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5월 9일)가 그 지방에 설교하러 왔을 때 성 도미니코는 스스로 그를 수행하였고, 성 그레고리우스가 운명할 때까지 그와 함께 머물렀다.

스승이 운명하자 그는 이전의 은둔생활로 돌아가면서 원래의 은둔소에서 멀지 않은 부레바의 황야에 은둔소를 세웠다. 그곳은 사도 성 야고보(Jacobus, 7월 25일)의 유해가 모셔진 경당으로 가는 순례자들의 통행로였다. 그러나 그곳에는 원시림이 가득하고 매우 위험한 곳이라 통행하는 사람들이 극히 드물었다.

그는 이곳에 움막과 기도소를 짓고 살면서 원목을 베어내고 순례자들을 위한 좋은 길을 만들었다. 그의 노력은 성공적이어서 그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순례자들을 위한 좋은 길과 다리 그리고 대피소 등을 만들어 편익을 제공하였다. 그는 1109년경에 운명하였으며 그가 머물던 은둔소와 무덤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나서 그 자체로 유명한 성지가 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도미니코

 

  • 세례명 축일
    8월 8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ominic

  • 신분과 직업
    신부, 설립자, 설교가

  • 활동 연도와 지역
    1170-1221년

 

 

도미니코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미니꼬, 도미니꾸스, 도미니쿠스, 도미니크, 도미닉, 도밍고.

 

 

도미니코 이야기

 펠릭스 데 구즈만(Felix de Guzman)과 아자(Aza)의 복녀 요안나(Joanna, 8월 2일)의 아들인 성 도미니코(Dominicus)는 1170년 8월 8일 에스파냐 북부 부르고스(Burgos) 지방의 칼레루에가(Caleruega)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앙심 깊은 어머니에게 훌륭한 가정 교육과 신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의 형 두 명은 그가 태어났을 때 이미 사제가 되어 교회에 봉사하고 있었고, 그 역시 7살 때부터 삼촌 신부 밑에서 기초 학문을 수학하고 복사로서 미사 전례를 도우며 사제 성소를 키워갔다. 그는 1184-1194년 사이에 팔렌시아(Palecia)의 대학에서 논리학, 수사학, 철학, 신학 등을 공부한 후 1196년경 사제품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그는 오스마(Osma) 교구 주교좌성당의 의전 사제단에 참여하여 함께 시간전례(성무일도)를 바치며 공동생활을 했다. 그리고 1201년 의전 수도회의 부원장으로 선출되어 청빈 생활과 관상 생활에 더욱 몰두했다.

그러던 중 성 도미니코는 1203년과 1205년에 오스마의 주교인 복자 디에고 데 아제베도(Diego de Azevedo, 2월 6일)를 수행해 북유럽을 여행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했다. 그는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Languedoc)를 여행하면서 그곳에서 발생한 알비파 이단으로 인해 교회가 겪고 있는 고통을 목격하며 교회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또한 1206년 프랑스 남부 몽펠리에(Montpellier)에서 알비파(Albigenses), 발두스파(Waldenses), 카타리파(Cathari)에 대항하는 시토회 출신 교황 사절을 만난 후 이단을 척결하는 사명에 투신할 결심을 했다. 그는 1206년 말 알비파에서 가톨릭으로 되돌아온 여성들을 위해 프루이유(Prouille)에 여자 수도원을 설립하고 가톨릭의 진리를 설교하는 데 전념했다.

1208년 교황대사 베드로 카스텔란이 알비파에 의해 피살되었을 때,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 1198-1216년 재위)는 그들을 상대할 십자군을 조직하고 그 총사령관으로 몽포르의 시몽 4세(Simon IV de Montfort) 백작을 임명했다. 알비파와의 전투는 7년이나 계속되었다.

성 도미니코는 십자군을 따라다니며 이단자를 상대로 설교에 힘썼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1214년 시몽 4세가 그에게 성(城)을 하나 주었는데, 이때 그는 여섯 명의 동료들과 함께 알비파의 회개를 위해 활동할 공동체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이듬해 툴루즈(Toulouse)로 옮겨 교황 사절의 동의와 툴루즈 교구의 풀크(Foulques) 주교의 승인을 받아 수도원을 설립했다.

풀크 주교는 그에게 교구 전역을 순회하며 신자들에게 참된 신앙과 윤리를 지키도록 설교하도록 요청했다. 성 도미니코와 풀크 주교는 1215년 제4차 라테라노(Laterano) 공의회가 열린 로마를 방문해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 1198-1216년 재임)에게 설교를 목적으로 하는 새 수도회의 설립 승인을 요청했으나 구두 약속만 듣고 돌아왔다.

하지만 1216년 말 다시 로마를 방문한 성 도미니코는 후임 교황 호노리우스 3세(Honorius III, 1216-1227년 재임)에게 ‘설교자들의 수도회’(Ordo Fratrum Praedicatorum)라는 이름으로 도미니코 수도회(설교자회)의 설립을 공식 승인받았다.

의전 수도회의 영향을 받은 성 도미니코는 수도 생활과 사목 활동을 적절하게 조화시킨 영성 생활을 실천하고자 했다. 그는 수도자들이 청빈, 정결, 순명의 복음삼덕에 대한 서원을 하고 관상 생활을 지향하도록 했다. 그리고 수도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충실히 설교 준비를 하도록 교육에 힘쓰고, 참회와 금욕 생활을 실천하며 탁발 제도도 허용했다.

성 도미니코가 설립한 설교자회는 교회와 교황과 신앙의 진리에 충실한 하느님 중심적이며, 그리스도론적이고 사제적인 영성 생활을 실천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심 운동에서 자연스럽게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 운동을 이끌어냈고, 특별히 묵주기도의 전통을 가톨릭 교회 안에 널리 전파했다.

설교를 통한 영혼 구원이란 설립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도자들은 최선을 다해 공부해야 했다. 이런 정신에 따라 도미니코 수도회는 설립 초기에 이미 성 대 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 11월 15일)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월 28일)와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을 배출했다.

설교자회의 설립 승인을 받은 성 도미니코는 여생을 수도회의 정착과 발전을 위해 보냈는데, 회원들과 함께 이탈리아, 에스파냐, 프랑스, 헝가리 등을 순회하며 설교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많은 회원이 새로 입회하면서 수도회도 빠르게 정착했고, 회헌에 따라 영성과 지성의 조화로운 결합 속에 대중들의 요구를 반영해 회개 운동과 선교 활동을 꾸준히 전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1220년에 볼로냐(Bologna)에서 설교자회의 첫 번째 총회를 마치고, 그 이듬해인 1221년 8월 6일 볼로냐의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을 지켜보던 제자들에게 “서로서로 형제들 간에 사랑하라, 겸손하라, 청빈을 자발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영적인 보화를 만들어가도록 하라.”는 말씀을 남겼다.

그가 세상을 떠날 무렵 이미 유럽에는 60여 개의 수도원과 수녀원이 설립되었고 500여 명의 수도자가 생활하고 있었다. 그는 123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천문학자와 설교자의 수호성인이다.

교회 미술에서 성 도미니코는 보통 검은색과 흰색의 수도복을 입고 이마에 별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성인의 어머니가 꿈에 이마에 별을 달고 있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신의 아기를 보았다는 이야기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후대 회원들에 의해 도미니코회 문장에 횃불을 입에 문 개가 등장하는데, 이 또한 성 도미니코의 어머니가 꾼 태몽에서 유래한다.

어느 날 성지 순례 중에 그의 어머니는 자신의 배에서 횃불을 입에 문 개 한 마리가 튀어나와 그 횃불로 온 세상을 불태우는 꿈을 꿨다. 어머니는 이 꿈이 장차 아들이 말[說]로써 세상을 불태우리라는 것을 미리 알려준 태몽으로 이해했다. 실제로 성 도미니코는 뛰어난 언변으로 당대 교회에 큰 어려움을 안긴 알비파 이단을 대적했다.

그리고 동정 성모에게 묵주를 받는 성 도미니코의 모습도 교회 미술에 자주 등장한다. 이는 평소 어려울 때마다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던 성 도미니코에게, 1210년 어느 날 성모님이 나타나 묵주를 주시며 묵주기도를 널리 전파하라는 말씀을 주셨다는 전승에서 유래한다.

사실 성 도미니코와 도미니코 수도회는 묵주기도를 대중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 외에도 순결의 상징인 백합이나 성경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도미니코 바르베리

 

  • 세례명 축일
    8월 27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Dominic Barberi

  • 신분과 직업
    수사, 선교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792-1849년

 

 

도미니코 바르베리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미니꼬, 도미니꾸스, 도미니쿠스, 도미니크, 도미닉, 도밍고, 바베리.

 

 

도미니코 바르베리 이야기

1792년 6월 22일 이탈리아의 비테르보(Viterbo) 근교에서 태어난 도미니코 바르베리(Dominicus Barberi)는 1814년에 예수 고난회에 입회하여 천주의 모친의 도미니코란 수도명을 받았고, 1818년에 서품되었다. 그는 10여 년 동안을 가르쳤고, 수도회의 여러 직책을 거쳤으며 관구장이 되었다. 

그는 1840년 벨기에에 예수 고난회 최초의 피정의 집을 세웠으며, 1842년에는 영국 잉글랜드(England) 스태퍼드셔(Staffordshire)의 애스턴 홀(Aston Hall)에 예수 고난회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그는 그의 수덕생활과 학문으로 널리 알려졌고, 강론집과 신학 및 신비신학 저서를 발간하였으며, 잉글랜드에 두 개의 수도원을 더 짓고, 또 옥스퍼드 운동의 여러 회원들을 교회로 이끌었는데 그들 중에는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이 가장 유명하다.

도미니코 바르베리는 1849년 8월 27일 심장병이 발작하여 숨을 거두었고, 1963년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도미니코 델 발

 

  • 세례명 축일
    8월 31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ominic del Val

  • 신분과 직업
    소년, 복사,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250년

 

 

도미니코 델 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미니꼬, 도미니꾸스, 도미니쿠스, 도미니크, 도미닉, 도밍고.

 

 

도미니코 델 발 이야기

성 도미니코 델 발(Dominicus del Val)의 축일은 에스파냐 북동부 아라곤(Aragon) 지방 전역에서 기념되고 있다. 그는 7살의 어린 나이로 사라고사(Zaragoza) 주교좌 성당의 복사였는데, 유대인들에 의해 납치되어 벽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도미니코 이바네스 데 에르키시아

 

  • 세례명 축일
    9월 28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ominic Ibanez de Erquicia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89-1633년 나가사키

 

 

도미니코 이바네스 데 에르키시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미니꼬, 도미니꾸스, 도미니쿠스, 도미니크, 도미닉, 도밍고, 에르퀴치아, 이바네즈.

 

 

도미니코 이바네스 데 에르키시아 이야기

성 라우렌티우스 루이스(Laurentius Ruiz)와 성 도미니쿠스 이바네스 데 에르키시아(Dominicus Ibanez de Erquicia, 또는 도미니코 이바네스 데 에르키시아)와 성 야고보 기세이 토모나가(Jacobus Kyushei Tomonaga)와 13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일본 나가사키 지방에 교회를 설립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1633년, 1634년, 1637년에 모두 순교하였다.

그들은 체포된 이후 잔혹한 고문을 당했고 그 시신은 불태워진 후 재마저도 흩어지고 말았다. 출신 국가별로 보면 일본 9명, 에스파냐 4명, 프랑스 1명, 이탈리아 1명, 필리핀 1명이다.

에스파냐 출신의 도미니코회 사제인 성 도미니쿠스 이바네스가 1633년 8월 처음 순교한 이후 필리핀 출신 평신도인 성 라우렌티우스 루이스가 1637년 9월에 순교할 때까지 이들의 순교는 계속되었다. 총 16명의 순교자들 중 13명이 도미니코회 사제이거나 3회원이고 나머지 3명도 그들과 연관되어 있다.

이들 순교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나라에서 필리핀을 거쳐 일본으로 들어왔다. 마닐라(Manila)의 성 토마스(Thomas)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필리핀의 여러 지방에서 설교하며 선교활동을 하던 성 도미니쿠스 이바네스가 1623년에 처음으로 일본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유력한 쇼군의 지원으로 그리스도교가 묵인된 상태였다. 그러다 다음 쇼군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1587년에 반포된 모든 선교사들의 추방 칙령 시대로 되돌아가 혹독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었다. 결국 성 도미니쿠스 이바네스를 비롯한 도미니코회 사제들은 신분을 감추고 활동하던 중 발각되어 십자가형, 참수형, 물고문형, 교수대에 거꾸로 달아 구덩이에 떨어뜨려 죽이는 등 여러 방법으로 마지막 며칠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순교하였다.

당시 선교지의 대목구장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던 성 도미니쿠스 이바네스는 1633년 8월 4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고, 현재 그의 편지 중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성 야고보 기세이 토모나가는 일본인 출신 사제로 기데수(Kyudetsu)의 귀족 출신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나가사키의 예수회 대학에서 수학한 후 교리교사로 활동하다가 1614년에 일본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필리핀의 마닐라와 대만에서 설교하다가 1632년에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모국인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는 사제로서 신앙을 전파했다는 지목으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1633년 8월에 51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성 라우렌티우스 루이스와 성 도미니쿠스 이바네스 데 에르키시아와 성 야고보 기세이 토모나가와 13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모두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1981년 2월 18일에 마닐라에서 복자품에 올랐고, 1987년 10월 18일 같은 교황에 의해 로마(Roma)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시성되었다. 이들의 축일은 모두 9월 28일에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도미니코 스파다포라

 

  • 세례명 축일
    10월 3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Dominic Spadafora

  • 신분과 직업
    신부, 선교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521년

 

 

도미니코 스파다포라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미니꼬, 도미니꾸스, 도미니쿠스, 도미니크, 도미닉, 도밍고, 스빠다포라.

 

 

도미니코 스파다포라 이야기

1450년경 시칠리아(Sicilia) 섬에서 태어난 도미니코 스파다포라(Dominicus Spadafora)는 팔레르모(Palermo)의 성녀 지타(Zita) 수도원에서 설교자회에 입회하였다.

사제품을 받은 후 그는 파도바(Padova)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공부하며 몇 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후 그는 팔레르모로 돌아와 선교사로서 8년 동안 시칠리아 사람들에서 설교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1487년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그는 로마의 총원에서 총장의 협조자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시칠리아의 몬테 체리뇨네(Monte Cerignone)에 엄격한 규율을 지키는 은총의 모후 수도원을 설립하기 위해 로마를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원장으로서 일생을 보내며 선교여행과 수많은 활동을 통해 영혼 구원사업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1521년 12월 21일 평소와 같이 저녁기도 후에 수도자들에게 강의한 후 선종하였다. 도미니코 수도회에서는 그의 축일을 10월 3일(유해 이장일, 1677년)에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도미니코 로리카토

 

  • 세례명 축일
    10월 14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ominic Loricatus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060년

 

 

도미니코 로리카토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미니꼬, 도미니꾸스, 도미니쿠스, 도미니크, 도미닉, 도밍고.

 

 

도미니코 로리카토 이야기

성 도미니코(Dominicus)의 부모는 아들이 성직자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주교에게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여 아들이 사제직에 나아가도록 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젊은 신부가 나중에 이런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크게 느끼고 앞으로는 결코 미사나 성무를 집행하지 않으리라 결심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 아펜닌 산 중에는 몬테펠트로의 요한이라는 성자가 일단의 은수자 무리를 지도하고 있었다. 수많은 제자들이 18개에 달하는 움막 속에서 엄격한 은수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도미니코는 원장을 찾아가서 자기도 이 고행의 대열에 끼워달라고 간청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이곳의 선배 은수자들도 놀랄 정도로 열심히 보속생활을 하였다.

이렇게 몇 년을 살다가 그는 폰테 아벨라나(Fonte Avellana)로 갔는데, 이곳은 성 베드로 다미아누스(Petrus Damianus, 2월 21일)가 지도하는 은수소였다. 이곳의 원장도 오랜 동안 영웅적인 보속생활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양과 생활 태도를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염소 가죽으로 행낭을 만들어 입었고(이 때문에 행낭이란 뜻의 로리카토라는 별명을 얻었다), 편태는 물론 손발에는 쇠사슬을 묶었고, 음식은 극히 소량을 섭취하고, 맨땅에서 잠을 잤다. 이런 고행을 그는 죽을 때까지 계속하였다.

그는 나중에 산 세베리노 근방의 어느 은둔소의 원장이 되었다. 죽는 날의 마지막 밤에도 그는 밤기도를 형제들과 함께 바치고, 1시경을 바치면서 운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도미니코

 

  • 세례명 축일
    12월 2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ominic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000-1073년 실로스

 

 

도미니코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미니꼬, 도미니꾸스, 도미니쿠스, 도미니크, 도미닉, 도밍고.

 

 

도미니코 이야기

성 도미니코(Dominicus)는 피레네산맥이 에스파냐 방향으로 이어지는 나바라(Navarra) 남서쪽, 에스파냐 동북부의 라 리오하(La Rioja)에 있는 카냐스(Canas)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수도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아버지의 양 떼를 돌보며 양치기로 살았다. 

일하면서 홀로 있는 시간에 기도하기를 좋아했던 그는 점점 독수 생활에 대한 매력에 이끌려서 라 리오하의 산 밀란 데 라 코골라(San Millan de la Cogolla)에 있는 베네딕토회에 입회해 수도승이 되었다. 그는 기도와 노동 그리고 금욕과 엄격한 생활을 통해 다른 수도승들의 모범이 되었고 후에 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수도 생활과 수도회의 개혁사업에 힘썼고, 그의 지도로 수도원이 점차 번창하자 팜플로나(Pamplona)의 왕인 가르시아 산체스 3세(Garcia Sanchez III)가 수도원의 토지와 재산을 탐내 강제로 징발하려고 했다. 국왕의 요구를 거부한 그는 결국 동료 수도승들과 함께 강제 추방되고 수도원도 빼앗겼다.

성 도미니코와 그를 따르는 수도승들은 1041년 레온(Leon) 왕국의 페르난도 1세(Fernando I) 왕의 도움으로 이미 쇠퇴하여 몇몇 수도승만 남아 있던 실로스의 성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 수도원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이 공동체에서 원장으로 추대되었고,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 정신에 영감을 받아 수도 생활과 수도원에 대한 쇄신과 개혁 작업을 추진해 나갔다. 생활 규칙을 재정비하고 기도와 전례 생활을 중심으로 하는 수도원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에스파냐의 고대 문헌 연구에도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실로스의 수도원은 자연스럽게 에스파냐에서 학문과 영성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되었다. 실로스의 수도원은 한적한 곳에 있었지만, 부르고스(Burgos) 교구의 중심지로 인정받을 만큼 영적 은총이 충만했는데, 이 모두가 성 도미니코의 높은 성덕 때문이었다고 한다.

성 도미니코와 그의 수도원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에스파냐의 왕족과 귀족들도 가문에 아기가 태어나면 성인과 그 수도원의 수도승들에게 축복받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1073년 12월 20일 그가 수도원에 선종한 후 그의 무덤을 찾은 많은 순례자가 기도하여 은혜를 받고 치유받는 기적도 많이 일어났다고 한다.

또한 그는 임산부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았다. 도미니코회를 설립한 성 도미니코(8월 8일)의 어머니인 아자(Aza)의 복녀 요안나(Joanna, 8월 2일)는 실로스의 성 도미니코에게 전구하여 아들을 낳았고, 그래서 아기의 이름을 도미니코로 지었다고 한다.

성 도미니코가 헌신했던 실로스의 성 세바스티아누스 수도원은 그의 사후 실로스의 성 도미니코 수도원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이 수도원의 도서관은 역사적 가치가 높은 에스파냐의 고대 문헌 희귀본을 소장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도미니코

 

  • 세례명 축일
    12월 2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ominic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612년 브레시아

 

 

도미니코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미니꼬, 도미니꾸스, 도미니쿠스, 도미니크, 도미닉, 도밍고.

 

 

도미니코 이야기

성 도미니코(Dominicus)는 성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 5월 20일)를 계승하여 이탈리아 브레시아의 주교가 되었다.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Carolus Borromeo, 11월 4일)는 그의 유해를 이장하여 안치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도미니코

 

  • 세례명 축일
    12월 29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ominic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도미니코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미니꼬, 도미니꾸스, 도미니쿠스, 도미니크, 도미닉, 도밍고.

 

 

도미니코 이야기

성 도미니코(Dominicus)와 성 빅토르(Victor), 성 프리미아누스(Primianus), 성 리보수스(Lybosus),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성 크레스켄티우스(Crescentius), 성 세쿤두스(Secundus), 성 호노라투스(Honoratus)는 아프리카에서 순교했다는 사실 외에 알려진 바가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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