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세례명/세례명 이름 찾기

베네딕타 여자세례명 5인 목록

pieonane 2023. 9. 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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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세례명 베네딕타는 베네딕다, 베네딕따, 분다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여자세례명 베네딕타 5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베네딕타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베네딕타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본받고 싶은 여자 세례명 찾기

베네딕타
천주교 여자세례명
5인 목록

 

 

 

 

베네딕타 여자세례명 목록

 

  1. 베네딕타 (1월 4일)

  2. 베네딕타 (5월 6일)

  3. 데레사 베네딕타(십자가의) (8월 9일)

  4. 현경련 베네딕타 (9월 20일)

  5. 베네딕타 (10월 8일)

 

베네딕타 천주교 여자세례명 5인 목록

 

 

1. 베네딕타

 

  • 세례명 축일
    1월 4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Benedicta

  • 신분과 직업
    수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62년

 

 

베네딕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네딕다, 베네딕따, 분다.

 

 

베네딕타 이야기

성 프리스쿠스(Priscus)와 프리스킬리아누스(Priscillianus) 신부와 신앙심 깊은 여성 성녀 베네딕타는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 치하의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베네딕타

 

  • 세례명 축일
    5월 6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Benedicta

  • 신분과 직업
    동정녀

  • 활동 연도와 지역
    +6세기 로마

 

 

베네딕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네딕다, 베네딕따, 분다.

 

 

베네딕타 이야기

성녀 베네딕타는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 교황이 환시 중에 성 베드로(Petrus)가 나타나 그녀의 죽음을 예언했다고 말한 성녀 갈라(Galla, 10월 5일)가 로마에 세운 수녀원의 수녀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데레사 베네딕타(십자가의)

 

  • 세례명 축일
    8월 9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Teresa Benedicta of the Cross

  • 신분과 직업
    수녀, 철학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91-1942년

 

 

데레사 베네딕타(십자가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네딕다, 베네딕따, 분다, 에디트 슈타인, 에디트슈타인, 테레사, 테레시아.

 

 

데레사 베네딕타(십자가의) 이야기

성녀 에디트 슈타인(Edith Stein)은 1891년 10월 12일 독일 동북부 지역의 브레슬라우(Breslau, 오늘날 폴란드의 브로츠와프 Wroclaw)의 전통 유대인 가정에서 11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녀는 두 살 때 목재상을 하던 아버지 지그프리트(Siegfried Stein)를 일사병으로 여의고, 독실한 유대교 신자인 어머니 아우구스트(Auguste Stein Courant)에 의해 양육되었다.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거행되는 유대교 전통 예식을 보고 자라며 유달리 고집스럽고 사색과 독서를 좋아하는 학구적 성격을 지녔던 그녀는 11살 때 숙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경험하면서 삶의 궁극적 의미에 대해, 그리고 유다인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족과 친지들의 행하는 형식적인 유대교 의식과 기도에 실망해 더는 참석하지 않기로 결단을 내리기도 했다. 14살 때에는 학교 교육만으로 자기 가치관과 세계관을 만족시킬 수 없다고 생각해서 갑자기 학업을 중단하고 함부르크(Hamburg)에 있는 큰언니 집에서 지내기도 했다.

그 뒤에 고등학교에 진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녀는 1911년까지는 브레슬라우에서, 1913년부터는 괴팅겐(Gottingen) 대학으로 옮겨 심리학, 철학, 역사학, 독일어학 등을 공부하였다. 그녀는 ‘괴팅겐 학파’에 가입하기 위해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의 조교인 라이나흐(A. Reinach)의 도움을 청했고, 그의 권유로 현상학(現象學)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괴팅겐 철학회에서 가톨릭적 이념으로 가득한 셀러(M. Scheler)의 강의를 경청하면서 그의 정신세계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곧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모라비아(Moravia)의 백색 교회 병원에서 6개월 정도 간호사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녀는 1916년 프라이부르크(Freiburg)에서 에드문트 후설의 지도로 박사 학위를 받고 그의 개인 조교가 되었다. 

그 후 독자적인 연구 활동을 하며 교수 취임 논문을 제출하고 후설이 직접 추천서까지 작성해 주었으나, 당시 독일 학계에서 여성이 교수로 재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개인적으로 큰 실패를 경험하고 브레슬라우로 돌아온 성녀 에디트 슈타인은 계속해서 철학 연구 논문들을 집필하던 중 1921년 여름 같은 괴팅겐 학파의 친구인 콘라트 마르티우스(H. Conrad-Martius)와 그녀의 남편이 경영하던 농장에 머무르게 되었다. 

친구 부부가 외출한 어느 날 서재에서 우연히 손에 잡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생애”를 읽고, 그녀는 자신이 오랫동안 실존적으로 회의하고 있었던 신(神)이 그녀를 사랑해 왔고, 그녀가 전 인격으로 그 사랑에 응답하기를 기다려 왔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하느님 체험 후 그녀는 평화를 얻었고, 이듬해 1월 1일 테레사 베네딕타(Teresia Benedicta, 또는 데레사 베네딕타)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는 카르멜 수도원에 입회할 의지를 확고히 했으나, 어머니의 반대와 지도신부의 만류로 이를 연기하였다. 그 대신 지도신부의 제안으로 1931년까지 슈파이어(Speyer)에 있는 성녀 막달레나 수도원 교사 양성 학교와 도미니코 수녀회의 여학교에서 독일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그리고 점차 후설의 관념론적인 철학 노선을 떠나 그리스도교 철학의 실재론적인 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계속 왕성한 교육 및 학문 활동을 하던 그녀는 발처(R. Walzer) 아빠스로부터 카르멜 수도원 입회를 허락받고 어머니와 힘겨운 이별을 나눈 뒤 1933년 10월 14일 쾰른(Koln)의 카르멜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기 동족과 하느님의 백성이 처한 운명으로 받아들인 그녀는 스스로 십자가를 짊어지는 소명을 실천하고자 자기 수도명을 ‘십자가의 테레사 베네딕타’(Teresia Benedicta a Cruce)로 정하였다. 그녀는 입회 후에도 수도원 원장의 적극적인 학문 지원에 힘입어 지속적인 연구와 저술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십자가의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는 1936년 9월 14일 첫 서원을 했는데, 바로 그해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어머니가 지녀왔던 유대교 신앙을 존중해 주었다. 그리고 1938년 4월 21일 종신서원을 하였다. 

그러나 나치의 유다인에 대한 위협은 날로 심해져 갔고, 십자가의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는 이를 피하고자 수도원의 주선으로 비밀리에 그녀의 언니 로사(Rosa)와 함께 네덜란드의 에히트(Echt) 카르멜 수도원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그녀는 십자가의 성 요한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는 저서 “십자가의 학문”(Kreuzeswissenschaft)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그 무렵에 네덜란드의 주교들이 독일의 반유대주의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이에 화가 난 히틀러(A. Hitler)는 모든 비(非)아리안계 가톨릭 신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십자가의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는 유다인이자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1942년 8월 2일 언니 로사와 함께 나치의 게슈타포(Gestapo)에게 체포되었다. 

그녀는 많은 유다인 출신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함께 아메르스포르트(Amersfoort) 수용소를 거쳐 베스터보르크(Westerbork)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해 8월 7일 이들 중 987명이 폴란드 남부 아우슈비츠(Auschwitz) 수용소에서 살해되었는데, 두 자매는 이틀 후인 8월 9일 가스실에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십자가의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가 사망한 지 20년 만인 1962년 1월 4일 쾰른의 대주교인 요제프 프링스(Josef Frings) 추기경은 그녀의 시복을 위한 소송을 제기했고, 1980년에는 독일 주교회의를 거쳐 로마에서 시복 절차를 위한 공식적 청원이 이루어졌다.

그녀의 죽음이 비록 유다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고 피할 수도 없었지만, 그녀는 유다인과 하느님 백성을 위한 연대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유대교를 떠났으나 유다인으로서 죽임을 당함으로써 동족과 다시 결합한 그녀를 가톨릭교회는 ‘아우슈비츠의 순교자’로 공경하게 되었다.

그 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가 독일을 방문한 1987년 5월 1일 쾰른 대성당에서 순교자로서 시복되었고, 1998년 10월 1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시성식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녀를 “이스라엘의 탁월한 딸이자 전 세계를 위한 성인으로서 교회의 충실한 딸”이라고 칭송했고, 이듬해 10월 1일 자의 교서를 통해 누르시아(Nursia)의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7월 11일), 성 메토디우스(Methodius, 2월 14일)와 성 키릴루스(Cyrillus, 2월 14일) 형제,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4월 29일), 스웨덴의 성녀 비르지타(Birgitta, 7월 23일)와 함께 그녀를 유럽 대륙의 여섯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현경련 베네딕타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玄敬連 Benedicta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4-1839년 한국

 

 

현경련 베네딕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네딕다, 베네딕따, 베네딕타, 분다, 현 베네딕타, 현베네딕타.

 

 

현경련 베네딕타 이야기

성녀 현경련 베네딕타는 샤스탕(Chastan, 鄭) 신부의 복사 현석문 카롤루스(Carolus)의 누이이고, 역관 집안 출신으로 그녀의 아버지는 1801년에 순교한 현계흠으로 당시 매우 유명하였다. 또 그녀의 시댁 역시 유명한 교우 집안인데, 시아버지 최창현은 한국교회 설립의 주역으로서 신유박해 때에 순교하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열심하였으나 부친이 없어서 동생 카롤루스와 늙으신 어머니와 함께 몹시 가난한 생활을 했다. 또 박해로 인하여 자주 이사를 다니지 않으면 안 되어서 어려서부터 그녀가 당해야 했던 모든 시련을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17세가 되던 해에 영광스런 순교자 최창현의 아들과 혼인하였으나 3년 후에 남편을 잃었으며, 또 자녀가 없었으므로 친정어머니에게로 돌아와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그녀는 불행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행복하고 조용하며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며 자기 영혼 사정을 돌볼 길을 베풀어주신 주님께 감사드렸다. 

그녀는 “천주께서는 더 쉽게 당신을 섬기고 내 영혼을 구하게 하려 하셨다”고 말하며 주님을 찬미하였다. 기도와 묵상과 독서를 정한 시간에 하였고, 주님을 섬기는데 있어 냉담하거나 게으름을 부리는 일이 절대로 없었으며, 또 집안이 화목하여 사람들은 모두 이 집안의 생활을 감탄하였다.

현 베네딕타는 바느질을 해서 생기는 돈을 한 푼도 제 몫으로 따로 떼어놓지 않고 집안을 위해서 내어 놓았으며, 자기 개인의 성화를 위해 힘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무지한 사람들을 가르치고 다른 이의 성화를 위해서도 힘썼다. 

또 냉담자들을 권면함은 물론이요, 근심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병자들을 간호하며, 죽을 위험을 당한 비신자 어린이들에게 대세 줄 기회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선교 신부들의 순회 시기가 되면 신자들을 자기 집에 모이도록 해서 할 수 있는 대로 성사를 받을 준비를 시키곤 하였다.

이리하여 여회장이 된 그녀의 신앙생활과 활동이 곧 박해자의 눈에 띄게 되었고, 박해가 일어나자 제일 먼저 고발된 사람들 중에 들게 되었다. 얼마 동안은 숨어 지냈으나 5월에 이르러 그녀가 숨어있는 곳이 알려져 마침내 포졸들에 의해서 붙잡히게 되었다. 

포장은 현 베네딕타의 동생인 현석문 카롤루스가 서양인 신부의 충복인 줄 아는 만큼, 어떻게 해서든지 그의 숨은 곳을 누이를 통해 알아내려고 하였기 때문에 베네딕타는 그만큼 더 혹독한 고문을 당해야만 하였다. 

그녀는 여덟 차례나 문초를 당하였고 또 선교사를 체포하는 자에게 현상금을 준다고 하였기 때문에 현상금을 탈 목적으로 포졸들은 저희들 마음대로 가혹한 형벌을 가하였다. 그러나 베네딕타의 굳고 참을성 있는 결심으로 그들의 증오와 탐욕에서 나온 횡포는 허사가 되었고, 선교사들에 관한 정보는 한 마디도 얻어 낼 수가 없었다.

8월 23일에 형조로 옮겨진 그녀는 또 어떻게나 혹독한 형벌을 당했던지 몸은 갈기갈기 찢겨졌고, 상처에서는 피고름이 흘러내려 다리를 움직이지 못할 지경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옥중에 만연된 열병에 결려 그녀의 고통은 한층 더 심했지만 조금도 뜻을 굽힐 줄 몰랐다.

마침내 형조에서는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사형 집행일이 되었지만 그녀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마음의 평온을 지닌 채 사형 집행의 시간을 가다렸다. 오랫동안 평안하고 고요하게 잠을 자고 난 다음에 영원한 복락의 시작이 어서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형장을 향하여 잔치에 나가듯 기쁜 마음으로 나가 순교의 칼을 받았다.

이때가 1839년 12월 29일이요, 그녀의 나이는 46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베네딕타

 

  • 세례명 축일
    10월 8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Benedicta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62년?

 

 

베네딕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네딕다, 베네딕따, 분다.

 

 

베네딕타 이야기

성녀 베네딕타의 생애에 대해 알려져 있는 것은 없고, 단지 성녀에 관한 단편이 운율로 이루어진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의 "수난기"에 몇 마디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수난기"에 따르면 베네딕다 성녀는 362년 10월 8일에 순교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날짜 역시 불확실하다. 우수아드(Usuard)는 "로마순교록"에 성녀의 축일을 10월 8일이라고 기록하였다.

바로니우스(Baronius)는 "루그두눔 클라바툼"(Lugdunum Clavatum)에서 성녀가 고대 교구인 라옹(Laon)에서 붙잡혔으며, 리옹(Lyon) 교구 사람으로 리옹의 순교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언급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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