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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6일 남자세례명 13가지

피어나네 2023. 10. 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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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6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고르넬리오, 니니아노, 로젤로, 루도비코 알레망, 마르치아노, 빅토르 3세, 세르보 데이, 아분단시오, 아분디오, 요한, 요한 마치아스, 제미니아노, 치프리아노, 총 13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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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6일 여자세례명 둘치시마, 루드밀라, 루치아, 세바스티아나, 에디타, 에우페미아, 총 6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9월 16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3가지

 

 

 

 

9월 16일 남자세례명 목록

 

  1. 고르넬리오

  2. 니니아노

  3. 로젤로

  4. 루도비코 알레망

  5. 마르치아노

  6. 빅토르 3세

  7. 세르보 데이

  8. 아분단시오

  9. 아분디오

  10. 요한

  11. 요한 마치아스

  12. 제미니아노

  13. 치프리아노

 

9월 16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3가지

 

 

1. 고르넬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Cornel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교황,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3년

 

 

고르넬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고르넬리우스, 꼬르넬리오, 꼬르넬리우스, 코르넬리오, 코르넬리우스.

 

 

고르넬리오 자료

로마(Roma)의 평범한 사제이던 성 코르넬리우스(또는 고르넬리오)는 성 파비아누스(Fabianus, 1월 20일) 교황이 순교한 후 여러 사정으로 14개월 동안 지연되었던 로마의 주교로 251년 4월에 선출되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교황 선출이 지연된 것은 데키우스 황제의 극심한 그리스도교 박해 때문이었다. 그가 재임 기간 중 이룬 주요 업적은 박해 중에 배교를 선언했던 신자들을 용서하고 다시 교회로 받아들이는 화해 정책이었다. 

왜냐하면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중에 배교를 선언하거나 돈을 주고 이교 신상 앞에 분향했다는 증서를 로마 관리에게 구한 이들도 있었는데, 박해가 끝나자 그들 중에 다시 교회로 돌아오기를 희망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교황좌가 공석으로 있는 동안 로마 교회를 돌봤던 노바티아누스(Novatianus)는 새 교황 선출에 불만을 품고 스스로 로마 교회의 주교라 칭하며 자기를 지지하는 주교에게 주교품을 받고 교회의 분열을 심화시켰다.

게다가 그는 배교를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심지어는 죽을 때까지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단죄하며 교회 또한 그러한 죄를 용서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교황 성 코르넬리우스는 교회가 회개하는 배교자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고, 합당한 보속을 행한 후 교회에 다시 나올 수 있고 성사도 받을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아프리카 교회의 핵심인 카르타고(Carthago)의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 9월 16일) 주교도 교황의 이러한 뜻을 이해하고 지지하였고, 교황 또한 그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노바티아누스는 소수의 지지자와 함께 새 교회를 세운 후 대립 교황이 되었다. 노바티아누스의 극단적 엄격주의를 옹호하던 무리는 재차 힘을 규합하여 동방에서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에 성 코르넬리우스 교황은 교회가 통회하는 배교자들을 용서할 권한이 있음을 재천명하고, 카르타고 교회 회의에서 천명한 사실을 재확인하는 회의를 열었다. 

교황의 제의로 251년 10월 로마에서 개최된 회의에는 60명의 주교와 많은 사제와 부제들이 참석했다. 이 회의를 통해 성 코르넬리우스 교황은 노바티아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의 가르침을 단죄하고 교회의 질서를 바로잡았다.

그런데 252년 6월에 갈루스 황제가 그리스도교 박해를 재개했을 때 성 코르넬리우스 교황은 체포되어 첸툼첼레(Centumcellae, 현재 로마의 항구도시인 치비타베키아 Civitavecchia)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당한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이듬해 6월 순교자로서 삶을 마감하였다.

그의 시신은 후대 9월 14일에 로마의 아피아 가도(Via Appia)에 있는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의 루치나(Lucina)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명은 라틴어로 새겨진 최초의 교황 비문으로 그를 ‘순교자’로 표기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14일 목록에서 성 코르넬리우스 교황 순교자의 업적과 고난 그리고 묘지 이장에 대해 기록하면서 전례적으로는 카르타고의 성 키프리아누스 주교와 함께 9월 16일에 기념한다고 언급하였다. 이는 교황 성 코르넬리우스와 성 키프리아누스 주교가 노바티아누스 이단과의 대립 중에 맺은 굳은 우정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교회 미술에서 교황 성 코르넬리우스는 보통 뿔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그의 이름이 라틴어 코르누(Cornu : 소뿔, 뿔피리, 신호나팔)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곁에 소를 두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니니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Nin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선교사

  • 활동 연도와 지역
    +432년? 칸디다 카사

 

 

니니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니니아, 니니아누스, 니니안, 닌니드.

 

 

니니아노 자료

니니안, 니니아 혹은 닌니드 등으로 불리는 성 니니아누스(Ninianus, 또는 니니아노)는 성 베다(Beda, 5월 25일) 시대의 사람이다.

성 아일레드(Aelred)가 기술한 성 니니아누스의 생애에 의하면, 그는 컴브리아(Cumbria) 지방 브리턴인(Britons)의 어느 개종자의 아들로서 로마(Roma)에서 공부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다시 칸디다 카사의 주교가 되어 고향 영국의 선교사로 돌아온 그는 참으로 열렬하게 복음을 전했다.

그는 투르(Tours)의 성 마르티누스(Martinus) 수도원에서 대리석을 가져다가 초석을 놓고 성당을 세웠는데, 이것이 ‘화이트 하우스’로 널리 알려졌고 선교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와 그의 수도자들의 노력에 의하여 인근의 브리턴인들과 발렌시아(Valencia)의 픽트인들이 개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로젤로

 

  • 가톨릭 성인 이름
    Rogell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승,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852년 코르도바

 

 

로젤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로겔로, 로겔루스, 로젤루스.

 

 

로젤로 자료

성 로겔루스(또는 로젤로)는 수도승으로 그의 젊은 제자인 성 세르부스 데이(Servus Dei)와 함께 에스파냐 남부 코르도바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은 모스크 안에서 공개적으로 이슬람교의 신앙을 비난한 죄로 무함마드 1세(Muhammad I) 치하에서 처형된 첫 번째 그리스도인들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루도비코 알레망

 

  • 가톨릭 성인 이름
    Louis Allemard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대주교, 추기경

  • 활동 연도와 지역
    +1450년 아를

 

 

루도비코 알레망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수, 루도비꼬, 루도비꾸스, 루도비쿠스, 루수, 루이, 루이스, 알레만.

 

 

루도비코 알레망 자료

루도비쿠스 알레망(Ludovicus Allemard, 또는 루도비코 알레망)은 14세기 말 프랑스 벨리(Belley) 교구의 아르뱅(Arbent)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비뇽(Avignon)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았고, 1409년에는 삼촌을 따라 피사(Pisa) 시노드에 참석하여 서방의 대이교 논쟁에 말려들게 되었다.

그는 새 교황으로 선출된 마르티누스 5세(Martinus V)를 지지함으로써 대이교의 막을 내리게 하는데 기여한 공로로 1418년에 마귈론(Maguelonne)의 주교로 임명되었고, 1423년에는 아를 교구의 대주교로 또 1426년에는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또 한 차례의 격동기를 맞아 로마(Rome)에서 감금되기도 했지만 과감히 탈출하여 아를 교구로 돌아왔다. 그의 시대는 한마디로 교회가 영혼 구원보다 외적인 여러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될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잘 보여주던 때였다.

그는 내적으로 아무리 거룩하더라도 교회의 외부 일에 휘말리면 어쩔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하는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가능하면 통회자의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1450년 9월 16일 루도비쿠스 알레망이 선종한 후 그의 무덤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보고되었다. 1527년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는 그를 복자로 공경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그는 루이스 알레만(Louis Aleman)으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마르치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c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원로원 의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경

 

 

마르치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시안, 마르치아누스, 마르치안, 마르키아노, 마르키아누스.

 

 

마르치아노 자료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사제인 성 아분디우스(Abundius)와 부제인 성 아분단티우스(Abundantius)는 로마(Roma)의 플라미니아 가도에서 순교했는데, 헤라클레스를 숭배하라는 명을 받고 거절하자 칼로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유해는 1583년 예수 성명 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런데 성 아분디우스가 사형장으로 가는 길에 로마의 원로원 의원인 성 마르키아누스(Marcianus, 또는 마르치아노)가 방금 죽은 아들 성 요한(Joannes)을 안고 비통에 잠겨 지나가고 있었다.

성 아분디우스가 성 요한을 위해 기도하자 그 소년은 다시 살아났다. 그래서 성 마르키아누스와 성 요한은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리고 함께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빅토르 3세

 

  • 가톨릭 성인 이름
    Victor III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교황

  • 활동 연도와 지역
    1027-1087년

 

 

빅토르 3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빅또르, 빅또리오, 빅또리우스, 빅똘, 빅토리오, 빅토리우스, 빅톨.

 

 

빅토르 3세 자료

이탈리아 베네벤토(Benevento)에서 롬바르드족 공작과 친척 관계인 집안에서 태어난 다우페리오(Dauferio)는 억지로 결혼을 시키려는 부친을 뜻을 반대하며 지내던 중, 부친이 1047년 한 전투에서 전사하자 은수자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가족들이 그를 강제로 집으로 끌고 갔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집에서 지내는 척 하다가 일 년 뒤에 다시 집을 뛰쳐나왔다. 

그는 가족들이 자신을 찾지 못하도록 일부로 고향 마을에 있는 산타 소피아(Santa Sofia) 수도원에 입회해 데시데리우스(Desiderius)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이곳저곳을 돌아 다니면서 방랑생활을 하였고, 살레르노(Salerno)에서는 의학 공부를 하기도 했다. 

1055년 그는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의 베네딕토회에 입회하였고, 1058년 4월 19일 아빠스로 선출되었다. 1059년 그는 남부 이탈리아 수도원에 대한 교황 대리로 임명되어 노르만족과 교황청 사이의 평화협상을 시도하여 교황과의 관계를 개선하였다.

1085년 5월 25일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VII, 5월 25일)가 선종한 후 교황으로 선출된 그는 빅토르 3세란 이름으로 전임 교황을 계승하여 1086년 5월 24일에 착좌할 수 있었지만, 황제 측의 농간으로 1087년 5월 9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축성될 때까지 몬테카시노에 머물렀다.

당시 대립교황은 클레멘스 3세(Clemens III)였다. 그는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재건하고, 유럽의 학문과 문화의 전당으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건축물과 예술 그리고 수도원의 규칙 등으로 특히 유명한 수도원이 되게 하였다.

건강이 악화되어 1087년 9월 16일 몬테카시노에서 선종한 그는 실질적으로 불과 4개월 동안 교황직에 있었지만, 1887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그는 빅토리우스(Victorius, 또는 빅토리오)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세르보 데이

 

  • 가톨릭 성인 이름
    Servus-Dei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852년 코르도바

 

 

세르보 데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세르부스 데이, 쎄르보 데이, 쎄르부스 데이.

 

 

세르보 데이 자료

성 로겔루스(Rogellus)는 수도승으로 그의 젊은 제자인 성 세르부스 데이(또는 세르보 데이)와 함께 에스파냐 남부 코르도바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은 모스크 안에서 공개적으로 이슬람교의 신앙을 비난한 죄로 무함마드 1세(Muhammad I) 치하에서 처형된 첫 번째 그리스도인들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아분단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Abundan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경

 

 

아분단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분단시우스, 아분단티오, 아분단티우스.

 

 

아분단시오 자료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사제인 성 아분디우스(Abundius)와 부제인 성 아분단티우스(또는 아분단시오)는 로마(Roma)의 플라미니아 가도에서 순교했는데, 헤라클레스를 숭배하라는 명을 받고 거절하자 칼로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유해는 1583년 예수 성명 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런데 성 아분디우스가 사형장으로 가는 길에 로마의 원로원 의원인 성 마르키아누스(Marcianus)가 방금 죽은 아들 성 요한(Joannes)을 안고 비통에 잠겨 지나가고 있었다.

성 아분디우스가 성 요한을 위해 기도하자 그 소년은 다시 살아났다. 그래서 성 마르키아누스와 성 요한은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리고 함께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아분디오

 

  • 가톨릭 성인 이름
    Abund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경

 

 

아분디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분디우스.

 

 

아분디오 자료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사제인 성 아분디우스(또는 아분디오)와 부제인 성 아분단티우스(Abundantius)는 로마(Roma)의 플라미니아 가도에서 순교했는데, 헤라클레스를 숭배하라는 명을 받고 거절하자 칼로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유해는 1583년 예수 성명 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런데 성 아분디우스가 사형장으로 가는 길에 로마의 원로원 의원인 성 마르키아누스(Marcianus)가 방금 죽은 아들 성 요한(Joannes)을 안고 비통에 잠겨 지나가고 있었다.

성 아분디우스가 성 요한을 위해 기도하자 그 소년은 다시 살아났다. 그래서 성 마르키아누스와 성 요한은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리고 함께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요한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소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경

 

 

요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자료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사제인 성 아분디우스(Abundius)와 부제인 성 아분단티우스(Abundantius)는 로마(Roma)의 플라미니아 가도에서 순교했는데, 헤라클레스를 숭배하라는 명을 받고 거절하자 칼로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유해는 1583년 예수 성명 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런데 성 아분디우스가 사형장으로 가는 길에 로마의 원로원 의원인 성 마르키아누스(Marcianus)가 방금 죽은 아들 성 요한(Joannes)을 안고 비통에 잠겨 지나가고 있었다.

성 아분디우스가 성 요한을 위해 기도하자 그 소년은 다시 살아났다. 그래서 성 마르키아누스와 성 요한은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리고 함께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요한 마치아스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Macia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평신도, 3회원

  • 활동 연도와 지역
    1585-1645년

 

 

요한 마치아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시아스, 마씨아스, 마키아스,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마치아스 자료

성 요한 마치아스(Joannes Macias)는 에스파냐 서부 에스트레마두라(Extremadura)의 리베라 델 프레스노(Ribera del Fresno)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네 살 때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으나 삼촌인 마치아스의 도움을 받아 자라면서 양치기로 성장했다.

그는 긴 하루를 그냥 보낼 수 없어서 묵주 기도를 바치거나 교회의 신비들을 하나하나 묵상하기 시작했고, 또 성모 마리아(Maria)와 성 요한(Joannes) 복음사가의 환시들을 보기도 했다. 그는 이웃 마을에서 미사에 참례하던 중 도미니코회 수사들을 만나면서 수도 생활에 대한 뜻을 갖게 되었다.

그 후 그는 25살의 한 부유한 사업가와 함께 일하면서 남아메리카를 여행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는 페루의 리마(Lima)에 도착할 때부터 수도자가 될 마음을 굳히고 도미니코회의 3회원이 되었다.

그의 엄격한 생활은 하루에 1시간 정도 자는 것으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영적인 지혜가 날로 깊어져 그를 능가할 수도자가 없을 정도였다.

성 마르티누스 데 포레스(Martinus de Porres, 11월 3일)가 그의 친구였다. 그는 수도원 문지기로 활동하며 사람들의 기부를 받아 가난한 이들과 갑자기 불행을 당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헌신하다가 1645년 9월 16일 60세의 일기로 선종하였다.

성 요한 마시아스(Joannes Massias)로도 불리는 그는 1837년 성 마르티누스 데 포레스(Martinus de Porres, 11월 3일)와 함께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5년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그가 선종한 날인 9월 16일을 전례적 기념일로 지내나 도미니코회와 리마에서는 9월 18일에 그를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제미니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Gemin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0년

 

 

제미니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게미니아노, 게미니아누스, 제미니아누스, 지미냐노.

 

 

제미니아노 자료

이탈리아 로마(Roma)의 순교자인 성녀 루치아(Lucia)는 중년을 넘은 부인이었고, 성 게미니아누스(Geminianus, 또는 제미니아노)는 젊은 교리교사였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를 신뢰할 수 없는 이유로 인해 1969년 그들에 대한 공경이 금지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치프리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Cypr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교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00/210?-258년 카르타고

 

 

치프리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치쁘리아노, 치쁘리아누스, 치프리아누스, 치프리안, 키프리아노, 키프리아누스, 키프리안.

 

 

치프리아노 자료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 또는 치프리아노)는 200~210년경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유복한 이교도 가정에서 태어났다. 원래 그의 이름은 타스키우스(Thascius)였는데, 나중에 자신을 개종하도록 이끌어준 사제를 기념해 카이킬리우스(Caecilius)라는 이름을 추가로 사용하였다. 

그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당대에 뛰어난 수학자이자 법률가였으며 교사였다. 그는 246년경, 비교적 늦은 나이에 속세의 불의와 부패에 회의와 실망을 느끼던 중 하느님의 은총으로 연로한 카이킬리우스라는 사제를 만나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그는 즉시 당대의 저명한 성서학자이자 유명한 저술가가 되었다. 그는 세례를 받고 얼마 후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249년 초 신자들의 원의에 따라 카르타고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주교품을 받고 얼마 되지 않아 249년에 일어난 데키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신자들의 권유로 잠시 피신하였으나, 은밀히 피신처에서 편지 등을 보내는 방법으로 교구에 대한 사목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 박해 중에 교황 성 파비아누스(Fabianus, 236~250년 재위, 1월 20일)가 순교하고 교황좌가 공석이 되면서 로마 교회를 지도하던 사제단은 그의 피신에 대해 유감을 뜻을 서간으로 전했다. 그는 자신의 피신 동기와 그동안의 활동에 대해 서간으로 보고하고 251년에 교구로 돌아왔다.

교구로 돌아왔을 때 이미 박해로 인해 많은 신자가 순교했고, 그 여파로 인해 교구 내의 많은 배교자도 발생한 상황이었다. 박해의 빌미가 되었던 것은 이교의 신상 앞에 분향하라는 것이었는데, 이를 거부하고 순교한 이들도 많았지만 굴복하여 분향한 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분향하지는 않았지만 분향했다는 증서를 로마 관리들로부터 받기 위해 돈으로 매수한 이들도 있었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교구에 돌아오자마자 배교자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교회로 돌아오고자 할 때 그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이런 상황에서 펠리키시무스(Felicissimus) 부제는 주교의 반대자와 일부 증거자와 배교자를 규합해 성 키프리아누스 주교에게 정면으로 대립하였고, 게다가 그가 주교품에 오를 때 반대했던 사제 노바투스(Novatus)가 가담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펠리키시무스 부제와 노바투스 신부 등은 배교한 신자들에게 합당한 참회 절차도 요구하지 않고 교회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그들의 지나친 관대함을 나무라며 박해 당시 배교한 이들에 대한 교회의 규율이 준수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래서 죽을 위험에 처한 배교자를 제외하고는 그에 상응하는 공식적인 참회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고, 논란이 심화하면서 새 교황이 선출되기 전까지 배교자를 받아들이는 문제에 관한 결정을 유보하기로 했다.

그런데 251년 3월 교황으로 선출된 성 코르넬리우스(Cornelius, 9월 16일)는 배교자들에게 관용과 용서를 베풀자고 했고, 성 키프리아누스는 그런 교황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하지만 새 교황 선출에 불만을 품고 스스로 로마 교회의 주교라 칭하며 분열을 일으킨 노바티아누스(Novatianus)는 교회가 배교자들을 결코 용서해줄 수 없다는 강경한 주장을 펼쳤다. 

노바티아누스는 자기를 지지하는 주교에게 주교품을 받고 대립 교황이 되어 교회의 분열을 심화시켰고, 카르타고에서 성 키프리아누스 주교와 대립하던 노바투스 신부도 로마로 건너와 노바티아누스를 지지하고 나섰다. 

결국 노바투스 신부는 지금까지의 견해와 달리 배교자들은 영원히 교회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식의 강경한 주장을 내세우는 배타적 엄격주의자로 돌변하였다. 그러면서 로마 교회와 카르타고 교회 모두 분열의 위기에 처하였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251년 봄에 두 편의 저서, “가톨릭교회 일치”(De ecclesiae catholicae unitate)와 “배교자들에 관하여”(De lapsis)를 저술 · 배포하여 신자들이 오류에 빠지지 않고 교회 안에 일치를 이루도록 촉구하였다. 

이 문제는 251년 5월 열린 카르타고 주교회의에서 그의 가르침을 공인하면서 해결되었고, 로마 교회에서도 성 코르넬리우스 교황과 노바티아누스파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다.

배교자 문제가 해결된 지 얼마 되지 않은 252년 아프리카 지역에 흑사병이 발생하면서 교회는 새로운 박해에 직면하게 되었다. 흑사병의 참혹함 속에서 성 키프리아누스를 반대하는 이들과 관리들은 그리스도교 신자들 때문에 하늘이 분노해 전염병을 내렸다고 비난하며 박해의 빌미로 삼았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데메트리아누스에게”(Ad Demetrianum)와 “죽음에 대하여”(De mortalitate)라는 저서를 통해 그들의 그릇된 주장을 반박하고,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 키프리아누스는 생의 말년에 이단자들의 세례 문제에 대한 논쟁에 휘말렸다. 아프리카 교회에서 제기된 이 문제는 나중에 로마 교회와의 심각한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즉 “이단 교회에서 세례받은 자가 가톨릭교회로 개종하려면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성 키프리아누스는 이단자들의 세례는 무효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성 키프리아누스는 255년 카르타고에서 주교회의를 열어 자신의 주장을 재확인했고, 256년 71명의 주교가 모인 카르타고 주교회의에서 확실히 결정하여 당시 교황인 성 스테파누스 1세(Stephanus, 254~257년 재위, 8월 2일)에게 알렸다. 

하지만 교황은 단호히 이를 거부하며 이단자가 교회에 찾아오면 다시 세례를 베풀 필요 없이 합당한 참회 예식을 치른 다음 받아주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답을 보냈다. 그리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파문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이는 로마 교회와 아프리카 교회의 대립으로 발전했으나 257년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로 인해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 박해를 강화하면서 그리스도교의 모든 집회를 금지하고 또 모든 주교와 사제와 부제들이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 예식에 참여하도록 요구하는 칙서를 반포하였다.

교황 성 스테파누스 1세가 그해 8월 2일 순교하였고, 성 키프리아누스 주교 또한 이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지방 총독인 파테르누스에게 재판을 받고 카르타고에서 50마일 거리에 있는 쿠루비스(Curubis, 오늘날 튀니지의 코르바 Korba)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모든 주교와 사제 그리고 부제들을 사형에 처하라는 황제의 칙령이 내려왔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새 총독인 갈레리우스 막시무스에게 소환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끝까지 이교의 신에게 제사 바치기를 거부하여 258년 9월 14일 카르타고 근교에서 참수됨으로써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그는 교회, 사목, 성경, 성사 그리고 배교자 문제에 관해 박해와 여러 어려운 상황에서도 13편의 저서와 65편의 서간들을 남겼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교 라틴 문학의 선구자로 추앙을 받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이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모두 9월 14일 목록에서 성 키프리아누스의 업적과 순교에 대해 기록하면서 전례적으로는 9월 16일에 성 코르넬리우스 교황과 함께 기념한다고 언급하였다.

이는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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