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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7일 남자세례명 14가지

pieonane 2023. 10. 8.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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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7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레온시오, 빈첸시오 드 폴, 아데리토, 아둘포, 안티모, 에우프레피오, 엘제아리오, 요한, 요한 마르코, 카이오, 테렌시오, 플로렌티노, 피덴시오, 힐라리오, 총 14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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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7일 여자세례명 에피카리스, 힐트루데, 총 2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9월 27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4가지

 

 

 

 

9월 27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레온시오

  2. 빈첸시오 드 폴

  3. 아데리토

  4. 아둘포

  5. 안티모

  6. 에우프레피오

  7. 엘제아리오

  8. 요한

  9. 요한 마르코

  10. 카이오

  11. 테렌시오

  12. 플로렌티노

  13. 피덴시오

  14. 힐라리오

 

9월 27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4가지

 

 

1. 레온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Leon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레온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레온시우스, 레온씨오, 레온씨우스, 레온티오, 레온티우스.

 

 

레온시오 자료

전승에 따르면 성 코스마(Cosmas)와 성 다미아누스(Damianus)는 아라비아(Arabia)의 명문 가정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로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훌륭한 신앙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들은 시리아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된 후 소아시아 남동부에 있는 실리시아(Cilicia) 지방 에게해(Aegean Sea) 근처에 살면서 외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환자와 가축들을 무료로 치료해주었다.

의료기술이 뛰어나 명의라는 소리를 들었을 뿐만 아니라, 의약으로 낫기 어려운 병자들도 간절한 기도로 돌봐줘 육신과 영혼의 건강까지 치유해주는 의사로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모든 이의 칭송을 받았다. 실제 기도의 힘으로 중병이 완치되는 기적도 일어났다. 그들의 의술과 자선에 대한 명성은 더욱 널리 퍼져나갔다.

3세기 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에 대한 대박해를 시작했을 때, 성 코스마와 성 다미아누스 형제는 실리시아의 집정관인 리시아스(Lysias)에 의해 체포되었다. 곧바로 그들은 배교할 것을 강요당하며 모진 고문을 받았다. 하지만 굳은 믿음을 지니고 있던 이 형제는 끝까지 집정관의 요구를 거부하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전설에 의하면, 리시아스가 처음에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누스를 돌로 쳐 죽이려 했으나 그 돌이 되돌아와 던진 이들이 다치고, 다시 십자가에 묶어 놓고 화살을 쏘았으나 그 화살 또한 쏜 사람에게 되돌아와 꽂혀버렸다. 그래서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도 바다에도 던졌지만 죽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은 참수형에 처했다고 한다. 이때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누스 외에도 그들의 형제인 성 안티무스(Anthimus) · 성 레온티우스(또는 레온시오) · 성 에우프레피우스(Euprepius)도 함께 처형당했다.

그들의 순교 후에 많은 기적이 일어났고, 또 그들의 높은 신앙심을 증명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고 전해온다. 이미 4세기 초부터 예루살렘,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등지에 그들을 기념하는 성당이 건립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들이 순교한 지 백 년이 되었을 때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 그들의 유해를 모신 대성당을 건축했는데, 이곳은 점차 주요한 순례지가 되었다. 6세기에 교황 펠릭스 4세(Felix IV, 526-530년 재위)도 로마에 두 성인에게 봉헌한 대성당을 건립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 이전, 두 성인의 축일은 다른 세 형제와 함께 9월 27일이었는데, 그날은 로마의 대성당이 봉헌된 날이라고도 하고 순교한 날이라고도 한다.

현재 그 성당은 재건축되었으나 내부에는 두 성인을 묘사한 6세기의 모자이크가 여전히 남아 있다. 또한 두 성인은 이미 6세기경부터 로마 전문(Canon, 오늘날 미사 경본의 감사기도 제1양식)에서 기억하는 성인들 명단에 추가되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1969년 전례 개혁 이후 성 코스마와 성 다미아누스의 축일은 9월 26일로 변경되었다. 이는 같은 날 축일을 기념하는 성 빈첸시오 드 폴(Vincentius de Paul)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26일 목록에 성 코스마와 성 다미아누스 순교자의 행적을 추가하면서 옛 “로마 순교록” 9월 27일 목록에서 언급한 세 명의 형제 순교자의 이름을 26일과 27일 어디에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성 코스마와 성 다미아누스는 약제사의 수호자이고, 성 루카(Lucas) 복음사가 다음으로 의사들의 수호성인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많은 의사들이 성 다미아누스보다 성 코스마를 세례명으로 선호하는데, 이는 그들이 팔라디아라는 여인의 병을 치료할 때 성 다미아누스가 환자의 간청을 거부하지 못하고 치료비를 받는 실수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교회 미술에서 두 성인은 주로 함께 등장하며, 약이 담긴 작은 상자나 의료기기를 들고 있거나 병자를 치료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들은 의사와 약사, 이발사와 미용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빈첸시오 드 폴

 

  • 가톨릭 성인 이름
    Vincent de Paul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81-1660년

 

 

빈첸시오 드 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뱅상, 빈센트, 빈첸시오 아 바오로, 빈첸시우스, 빈첸티오, 빈첸티우스, 빈켄티오, 빈켄티우스, 원선시오.

 

 

빈첸시오 드 폴 자료

성 빈첸시오 드 폴(Vincentius de Paul, 또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 Vincentius a Paulus)은 1581년 프랑스 남서부 랑드(Landes) 지방의 푸이(Pouy, 오늘날의 Saint-Vincent-de-Paul)라는 마을에서 가난한 농장주인 장 드 폴(Jean de Paul)과 베르트랑드 드 모라스(Bertrande de Moras)의 여섯 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5세 때에 고향 인근 닥스(Dax)에서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수학했다. 당시 그는 유명한 변호사인 코메(Comet)의 아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일하며 경제적 어려움 없이 학업에 전념했다. 그리고 1597년 이후에는 툴루즈(Toulouse)의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600년 스무 살의 나이로 사제품을 받았다. 이후로도 그는 몇 년 동안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1605년 그는 어떤 부인의 기부금을 받기 위해 마르세유(Marseilles)에 갔다가 배를 타고 나르본(Narbonne) 돌아오던 중에 이슬람의 해적에게 붙잡혀 튀니지에서 노예로 팔려 가는 불운을 겪었다. 노예 생활 중 그는 한 배교자의 집에 팔려 갔다가 주인을 가톨릭 신앙으로 이끌어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어 1607년 아비뇽(Avignon)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교황의 부특사인 몽토리오(Montorio) 주교와 함께 로마로 가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면서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의 결과로 시작된 교회의 개혁을 목격할 수 있었다. 1609년 그는 프랑스 국왕 앙리 4세(Henry IV)가 있는 파리 궁전의 전담 신부로 파견되었고, 귀족들과 과학자들의 모임에 참석하면서도 과거 노예 생활 중에 겪은 고통을 잊지 않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신의 수입을 나누곤 했다.

1610년 프랑스에 오라토리오회를 설립하러 온 피에르 드 베륄(Pierre de Berulle, 1575-1629년) 신부를 만난 성 빈첸시오 드 폴은 그의 영적 지도를 받으면서 자신의 사명을 깨닫게 되었다. 이듬해 파리 근처 클리시(Clichy)의 본당 신부로 부임한 그는 신자들의 삶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1613년 그는 베륄 신부의 제안으로 파리에서 프랑스 왕실 함대의 사령관인 공디(Gondi) 백작의 전속 사제 겸 가정교사로 임명되었다. 선한 공디 백작과 열심한 신자지만 세심증을 지닌 백작 부인에게 영적 도움을 주며 집안의 하인과 소작인들을 돌보게 된 그는 시골 사람들의 어려움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백작 부인의 청으로 죽어가는 가난한 농부의 병자성사를 집전하면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신의 사명을 더 깊이 깨닫게 된 그는 스스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신을 봉헌하겠다고 서원했다. 그리고 1617년 공디 백작의 집을 떠나 리옹(Lyon) 근처의 가난한 지역인 샤티옹(Chatillon)의 주임신부로 사목을 시작했다. 그는 처음으로 이 마을에 ‘애덕회’를 설립하여 본당 신자들과 함께 가난한 가정을 돕는 일에 힘썼다.

1618년 그는 파리에서 제네바의 주교인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1월 24일)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한편 1619년에 성 빈첸시오 드 폴은 공디 백작 부부의 간절한 부탁으로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공디 가문에 속한 마을에서 자유롭게 선교 활동하는 것을 조건으로 들어가 1625년까지 전속 신부로 생활했다. 그러면서 백작이 관할하는 갤리선의 죄수들이 받던 비인간적 대우를 개선하고 그들을 위한 병원을 설립하고 영적인 도움을 주었다.

1625년 백작 부인이 선종한 후 그는 시골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노력하며, 그들의 복음화를 위한 ‘선교 사제회’를 설립하였다. 선교 사제회는 당시 사용하지 않던 나환자 병원인 라자로의 집으로 이사한 후부터 ‘라자로회’(Lazarists)로 불렸다. 그들은 주로 시골의 농부들을 대상으로 교리를 가르치고 성사를 집전하며 선교활동을 전개했고,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본당 단위의 애덕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농번기에는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수도 생활에 전념했다.

1625년 말 성 빈첸시오 드 폴은 남편과 사별한 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며 살던 성녀 루도비카 드 마리약(Louise de Marillac, 3월 15일)을 만나 지도신부가 되었고, 1629년부터 시골의 애덕회를 방문하고 격려하는 일을 그녀에게 맡겼다. 그는 1632년부터 파리에서 성직자들을 위한 모임을 결성했고, 30년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구호사업에도 헌신하였다.

1933년 그는 성녀 루도비카 드 마리약의 친구가 된 상류층 부인들의 협조를 받아 ‘애덕 부인회’를 설립하였다. 그들은 매일 병원을 찾아 환자들을 돌보고 버림받은 아이들을 위한 고아원을 운영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이러한 봉사를 이어갈 수녀회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애덕의 수녀회’(Soeurs de la Charite)를 설립하여 성녀 루도비카 드 마리약을 초대 원장으로 임명하였다.

이 수녀회가 오늘날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이다. 성 빈첸시오 드 폴은 북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 노예들을 대속하는 데 힘썼고, 라자로회의 사제 양성을 위한 피정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이를 새로운 신학교 설립으로 발전시켰다. 또한 해외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것은 물론 프롱드의 난(La Fronde) 때에는 중재 역할을 수행하며 고통받는 희생자를 위한 구호소도 세웠다. 그는 영적인 저술도 많이 남겼다.

귀족적이고도 충성스러운 성격을 지녔던 성 빈첸시오 드 폴은 가난한 이들 안에서 자신의 성소를 발견하고 인간의 고통과 비참을 경감시키기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 그는 또한 가난을 유발하는 구조적 환경을 개선하고 제거하는데 적극성을 보인 탁월한 인본주의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1660년 9월 27일 파리에서 선종하여 라자로회 파리 본부에 묻혔는데, 당시에 이미 그가 설립한 라자로회와 수도회는 프랑스를 넘어 영국과 아일랜드 등지에서 활발한 선교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는 1729년 8월 13일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737년 6월 16일 교황 클레멘스 12세(Clemens X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리고 1885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하여 모든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아데리토

 

  • 가톨릭 성인 이름
    Adheri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2세기 라벤나

 

 

아데리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데리또, 아데리뚜스, 아데리투스.

 

 

아데리토 자료

그리스 태생인 성 아데리투스(Aderitus, 또는 아데리토)는 사제가 된 후 이탈리아 라벤나의 초대주교였던 성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7월 23일)를 계승하여 라벤나의 주교가 되었다. 그의 유해는 라벤나 근교 클라세(Classe)의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대성당에 모셔져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아둘포

 

  • 가톨릭 성인 이름
    Adulf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850년

 

 

아둘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돌뽀, 아돌뿌스, 아돌포, 아돌푸스, 아둘뽀, 아둘뿌스, 아둘푸스.

 

 

아둘포 자료

성 아둘푸스(Adulphus, 또는 아둘포)와 성 요한(Joannes)은 이슬람교를 믿는 아버지와 그리스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형제이다. 그들은 에스파냐의 세비야(Sevilla)에서 살다가 아브탈 라흐만 2세(Abd ar-Rahman II) 왕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코르도바(Cordoba)에서 순교하였다. 성 아둘푸스는 아돌푸스(Adolph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안티모

 

  • 가톨릭 성인 이름
    Anthim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안티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띠모, 안띠무스, 안티무스.

 

 

안티모 자료

전승에 따르면 성 코스마(Cosmas)와 성 다미아누스(Damianus)는 아라비아(Arabia)의 명문 가정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로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훌륭한 신앙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들은 시리아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된 후 소아시아 남동부에 있는 실리시아(Cilicia) 지방 에게해(Aegean Sea) 근처에 살면서 외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환자와 가축들을 무료로 치료해주었다.

의료기술이 뛰어나 명의라는 소리를 들었을 뿐만 아니라, 의약으로 낫기 어려운 병자들도 간절한 기도로 돌봐줘 육신과 영혼의 건강까지 치유해주는 의사로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모든 이의 칭송을 받았다. 실제 기도의 힘으로 중병이 완치되는 기적도 일어났다. 그들의 의술과 자선에 대한 명성은 더욱 널리 퍼져나갔다.

3세기 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에 대한 대박해를 시작했을 때, 성 코스마와 성 다미아누스 형제는 실리시아의 집정관인 리시아스(Lysias)에 의해 체포되었다. 곧바로 그들은 배교할 것을 강요당하며 모진 고문을 받았다. 하지만 굳은 믿음을 지니고 있던 이 형제는 끝까지 집정관의 요구를 거부하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전설에 의하면, 리시아스가 처음에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누스를 돌로 쳐 죽이려 했으나 그 돌이 되돌아와 던진 이들이 다치고, 다시 십자가에 묶어 놓고 화살을 쏘았으나 그 화살 또한 쏜 사람에게 되돌아와 꽂혀버렸다.

그래서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도 바다에도 던졌지만 죽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은 참수형에 처했다고 한다. 이때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누스 외에도 그들의 형제인 성 안티무스(또는 안티모) · 성 레온티우스(Leontius) · 성 에우프레피우스(Euprepius)도 함께 처형당했다.

그들의 순교 후에 많은 기적이 일어났고, 또 그들의 높은 신앙심을 증명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고 전해온다. 이미 4세기 초부터 예루살렘,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등지에 그들을 기념하는 성당이 건립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들이 순교한 지 백 년이 되었을 때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 그들의 유해를 모신 대성당을 건축했는데, 이곳은 점차 주요한 순례지가 되었다. 6세기에 교황 펠릭스 4세(Felix IV, 526-530년 재위)도 로마에 두 성인에게 봉헌한 대성당을 건립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 이전, 두 성인의 축일은 다른 세 형제와 함께 9월 27일이었는데, 그날은 로마의 대성당이 봉헌된 날이라고도 하고 순교한 날이라고도 한다. 현재 그 성당은 재건축되었으나 내부에는 두 성인을 묘사한 6세기의 모자이크가 여전히 남아 있다.

또한 두 성인은 이미 6세기경부터 로마 전문(Canon, 오늘날 미사 경본의 감사기도 제1양식)에서 기억하는 성인들 명단에 추가되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1969년 전례 개혁 이후 성 코스마와 성 다미아누스의 축일은 9월 26일로 변경되었다. 이는 같은 날 축일을 기념하는 성 빈첸시오 드 폴(Vincentius de Paul)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26일 목록에 성 코스마와 성 다미아누스 순교자의 행적을 추가하면서 옛 “로마 순교록” 9월 27일 목록에서 언급한 세 명의 형제 순교자의 이름을 26일과 27일 어디에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성 코스마와 성 다미아누스는 약제사의 수호자이고, 성 루카(Lucas) 복음사가 다음으로 의사들의 수호성인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많은 의사들이 성 다미아누스보다 성 코스마를 세례명으로 선호하는데, 이는 그들이 팔라디아라는 여인의 병을 치료할 때 성 다미아누스가 환자의 간청을 거부하지 못하고 치료비를 받는 실수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교회 미술에서 두 성인은 주로 함께 등장하며, 약이 담긴 작은 상자나 의료기기를 들고 있거나 병자를 치료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들은 의사와 약사, 이발사와 미용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에우프레피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uprep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에우프레피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우쁘레삐오, 에우쁘레삐우스, 에우프레피우스.

 

 

에우프레피오 자료

전승에 따르면 성 코스마(Cosmas)와 성 다미아누스(Damianus)는 아라비아(Arabia)의 명문 가정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로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훌륭한 신앙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들은 시리아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된 후 소아시아 남동부에 있는 실리시아(Cilicia) 지방 에게해(Aegean Sea) 근처에 살면서 외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환자와 가축들을 무료로 치료해주었다.

의료기술이 뛰어나 명의라는 소리를 들었을 뿐만 아니라, 의약으로 낫기 어려운 병자들도 간절한 기도로 돌봐줘 육신과 영혼의 건강까지 치유해주는 의사로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모든 이의 칭송을 받았다. 실제 기도의 힘으로 중병이 완치되는 기적도 일어났다. 그들의 의술과 자선에 대한 명성은 더욱 널리 퍼져나갔다.

3세기 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에 대한 대박해를 시작했을 때, 성 코스마와 성 다미아누스 형제는 실리시아의 집정관인 리시아스(Lysias)에 의해 체포되었다. 곧바로 그들은 배교할 것을 강요당하며 모진 고문을 받았다. 하지만 굳은 믿음을 지니고 있던 이 형제는 끝까지 집정관의 요구를 거부하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전설에 의하면, 리시아스가 처음에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누스를 돌로 쳐 죽이려 했으나 그 돌이 되돌아와 던진 이들이 다치고, 다시 십자가에 묶어 놓고 화살을 쏘았으나 그 화살 또한 쏜 사람에게 되돌아와 꽂혀버렸다. 그래서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도 바다에도 던졌지만 죽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은 참수형에 처했다고 한다. 이때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누스 외에도 그들의 형제인 성 안티무스(Anthimus) · 성 레온티우스(Leontius) · 성 에우프레피우스(또는 에우프레피오)도 함께 처형당했다.

그들의 순교 후에 많은 기적이 일어났고, 또 그들의 높은 신앙심을 증명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고 전해온다. 이미 4세기 초부터 예루살렘,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등지에 그들을 기념하는 성당이 건립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들이 순교한 지 백 년이 되었을 때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 그들의 유해를 모신 대성당을 건축했는데, 이곳은 점차 주요한 순례지가 되었다.

6세기에 교황 펠릭스 4세(Felix IV, 526-530년 재위)도 로마에 두 성인에게 봉헌한 대성당을 건립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 이전, 두 성인의 축일은 다른 세 형제와 함께 9월 27일이었는데, 그날은 로마의 대성당이 봉헌된 날이라고도 하고 순교한 날이라고도 한다.

현재 그 성당은 재건축되었으나 내부에는 두 성인을 묘사한 6세기의 모자이크가 여전히 남아 있다. 또한 두 성인은 이미 6세기경부터 로마 전문(Canon, 오늘날 미사 경본의 감사기도 제1양식)에서 기억하는 성인들 명단에 추가되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1969년 전례 개혁 이후 성 코스마와 성 다미아누스의 축일은 9월 26일로 변경되었다. 이는 같은 날 축일을 기념하는 성 빈첸시오 드 폴(Vincentius de Paul)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26일 목록에 성 코스마와 성 다미아누스 순교자의 행적을 추가하면서 옛 “로마 순교록” 9월 27일 목록에서 언급한 세 명의 형제 순교자의 이름을 26일과 27일 어디에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성 코스마와 성 다미아누스는 약제사의 수호자이고, 성 루카(Lucas) 복음사가 다음으로 의사들의 수호성인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많은 의사들이 성 다미아누스보다 성 코스마를 세례명으로 선호하는데, 이는 그들이 팔라디아라는 여인의 병을 치료할 때 성 다미아누스가 환자의 간청을 거부하지 못하고 치료비를 받는 실수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교회 미술에서 두 성인은 주로 함께 등장하며, 약이 담긴 작은 상자나 의료기기를 들고 있거나 병자를 치료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들은 의사와 약사, 이발사와 미용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엘제아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lzea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3회원

  • 활동 연도와 지역
    1285?-1323년

 

 

엘제아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엘제아리우스, 엘지아르, 엘지알.

 

 

엘제아리오 자료

사브랑(Sabran)의 성 엘제아리우스(Elzearius, 또는 엘제아리오)는 프로방스(Provence) 지방 앙주이(Ansouis)에서 그리 멀지 않은 로비앙(Robians)의 부친 성에서 태어났고, 모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는 마르세유(Marseilles)의 성 빅토르(Victor) 수도원의 원장인 사브랑의 빌리암(William)으로부터 교육받고 성장하였다.

수도원장은 그의 아저씨였는데 매우 엄격한 교육을 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그는 영적 지도자의 영향을 받아 작은 형제회 제3회 회원이 되었고, 1299년에 소유권 및 정치적인 입지를 고려해서 같은 프로방스의 귀족 가문의 딸인 델피나(Delphina, 12월 9일)와 결혼하였다. 알프스맥 저지대에 위치한 퓌미셸(Puimichel) 성에서 태어난 델피나는 당시 15세였다.

이들 부부는 처음에는 앙주이에서 살다가, 곧 퓌미셸 성으로 옮겨 와 살았다. 그들은 서로에 대하여 지극한 신뢰와 사랑을 지녔으며, 델피나는 남편을 따라 작은 형제회 제3회 회원이 되었다. 또한 신심이 두터웠던 그들은 서로 합의하에 동정을 지키기로 서약하였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이 거룩한 부부는 관상과 기도를 중심으로 사회활동을 하였으며, 선행과 애덕 실천에서 남다른 모범을 보이며 삶으로써 주위의 귀감이 되었다. 성 엘제아리우스는 매일같이 성무일도를 바쳤다. 그의 나이 23세 때에 부친의 명예와 유산을 받게 되었을 때 그는 이에 따르는 온갖 위험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열렬한 신심과 지혜로써 세속적인 재물을 다스렸다.

또한 그는 국왕의 부름을 받고 궁중의 일을 돌보기도 하였는데, 왕의 부탁으로 파리(Paris)에 대사로 갔다가 중병을 얻어 1323년 9월 27일 사망하였다. 사망하기 전에 그는 즉시 총고백을 하고 그리스도의 수난사를 매일 묵상함으로써 온갖 고통을 이겨냈다.

노자성체를 영하면서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이것이 나의 희망 전부였다.” 그는 자신의 고해신부인 어느 작은 형제회 회원의 팔에 안겨 영광된 삶을 마쳤다.

1309년경에 그는 자신의 조카인 그리모아드의 빌리암의 대부를 섰는데, 빌리암은 나중에 우르바누스 5세(Urbanus V) 교황이 되었고, 1369년 4월 15일 자신의 대부인 엘제아리우스를 시성하였다.

한편 델피나는 남편과 사별한 뒤 37년을 더 살았는데, 그녀는 그 동안에 나폴리(Napoli)의 '성녀 클라라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의 수녀가 된 나폴리 여왕 산치아(Sanchia)와 함께 죽을 때까지 수녀원에서 살았다. 그녀와 여왕은 절친한 사이였다.

델피나는 대부분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많은 자선을 베푸는 등 은수자처럼 생활하다가 1360년에 사망하였다. 델피나는 1363년부터 시성 절차가 진행되었으나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1791년 델피나의 유해는 앱트(Apt)에 있는 작은 형제회 성당에 남편의 유해와 나란히 안치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요한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850년

 

 

요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자료

성 아둘푸스(Adulphus)와 성 요한(Joannes)은 이슬람교를 믿는 아버지와 그리스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형제이다. 그들은 에스파냐의 세비야(Sevilla)에서 살다가 아브탈 라흐만 2세(Abd ar-Rahman II) 왕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코르도바(Cordoba)에서 순교하였다. 성 아둘푸스는 아돌푸스(Adolph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요한 마르코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Mark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사도들의 제자,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비블로스

 

 

요한 마르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꼬, 마르꾸스, 마르쿠스, 마크, 말구,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마르코 자료

1970년 이전의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성 요한 마르코(Joannes Marcus)는 페니키아(Phoenicia, 오늘날의 레바논 지역) 지방 비블로스의 주교로서 묘사되었다.

그는 아마도 사도행전 12장 12절(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베드로는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과 25절(바르나바와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사명을 수행한 다음,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을 데리고 돌아갔다)에 언급된 요한 마르코와 동일인물로 추정된다.

현대의 학자들은 그를 복음사가 성 마르코(4월 25일)와 동일인물로 본다. 그러나 동방교회에서는 성 요한 마르코를 복음사가 성 마르코와 다른 사람으로 여기는데, 그를 비블로스(Byblos)의 주교라고 하며 9월 27일에 축일을 지낸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카이오

 

  • 가톨릭 성인 이름
    Ca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세기 밀라노

 

 

카이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이오, 가이우스, 까이오, 까이우스, 카이우스.

 

 

카이오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9월 27일 목록에서 밀라노의 주교이자 사도 성 바르나바(Barnabas, 6월 11일)의 제자인 성 카이우스(또는 카이오)가 네로 황제의 박해로 극심한 고통을 겪다가 주님 안에 안식을 누리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일부 중세 문헌과 전승에 따르면, 그는 사도 성 베드로(Petrus)와 성 바오로(Paulus)의 순교 당시 로마(Roma)에 있었고, 성 비탈리스(Vitalis, 4월 28일)와 그의 쌍둥이 아들인 성 게르바시우스(Gervasius, 6월 19일)와 성 프로타시우스(Protasius, 6월 19일)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 카이우스를 1세기 사도 시대와 연결 짓는 것은 역사적 근거가 없다.

그에 대해 확실히 알려진 것은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이 같은 날 목록에서 언급한 것처럼 3세기에 밀라노의 주교였다는 것뿐이다.

그의 시신은 지금은 사라진 나보리아나(Naboriana) 대성당에 묻혔다가 후대에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대성당 근처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는 성 가이우스(Gaius)로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테렌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Terenc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토디

 

 

테렌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떼렌씨오, 떼렌씨우스, 테런스, 테렌시우스, 테렌씨오, 테렌씨우스, 테렌티오, 테렌티우스.

 

 

테렌시오 자료

순교자 성 피덴티우스(Fidentius)와 성 테렌티우스(Terentius, 또는 테렌시오)의 유해는 12세기에 이탈리아의 토디에서 발견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플로렌티노

 

  • 가톨릭 성인 이름
    Florent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5세기

 

 

플로렌티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플로렌띠노, 플로렌띠누스, 플로렌티누스.

 

 

플로렌티노 자료

옛 “로마 순교록” 9월 27일 목록에서 전해주는 성 플로렌티누스(또는 플로렌티노)와 성 힐라리우스(Hilarius)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거의 없다.

단지 성 플로렌티누스가 오늘날 스위스 남서부의 시옹(Sion)에서 혀가 잘린 뒤에 성 힐라리우스와 함께 칼에 찔려 순교했다는 것뿐이다. 그들의 순교 장소에 대해서도 확실한 정보는 없어서 스위스와 프랑스로 어느 곳으로 논쟁을 벌여왔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프랑스 동부 디종(Dijon) 인근 브레무르(Bremur) 요새에서 성 힐라리우스와 함께 반달족(Vandals)의 칼에 찔려 순교한 성 플로렌티누스를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순교 시기는 5세기로 보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피덴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Fiden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토디

 

 

피덴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피덴시우스, 피덴씨오, 피덴씨우스, 피덴티오, 피덴티우스.

 

 

피덴시오 자료

순교자 성 피덴티우스(또는 피덴시오)와 성 테렌티우스(Terentius)의 유해는 12세기에 이탈리아의 토디에서 발견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힐라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Hilary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5세기

 

 

힐라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힐라리우스, 힐러리.

 

 

힐라리오 자료

옛 “로마 순교록” 9월 27일 목록에서 전해주는 성 플로렌티누스(Florentinus)와 성 힐라리우스(Hilarius, 또는 힐라리오)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거의 없다.

단지 성 플로렌티누스가 오늘날 스위스 남서부의 시옹(Sion)에서 혀가 잘린 뒤에 성 힐라리우스와 함께 칼에 찔려 순교했다는 것뿐이다. 그들의 순교 장소에 대해서도 확실한 정보는 없어서 스위스와 프랑스로 어느 곳으로 논쟁을 벌여왔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프랑스 동부 디종(Dijon) 인근 브레무르(Bremur) 요새에서 성 힐라리우스와 함께 반달족(Vandals)의 칼에 찔려 순교한 성 플로렌티누스를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순교 시기는 5세기로 보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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