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세례명/세례명 이름 찾기

라파엘 남자세례명 4인 목록

피어나네 2024. 1. 10.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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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천주교 남자세례명
4인 목록

 

 

 

 

라파엘 남자세례명 목록

 

  1. 라파엘 아르나이즈 바론 (4월 26일)

  2. 라파엘 귀자르 발렌시아 (6월 6일)

  3. 라파엘 (9월 29일)

  4. 라파엘 칼리노프스키 (11월 19일)

 

라파엘 천주교 남자세례명 4인 목록

 

 

1. 라파엘 아르나이즈 바론

 

  • 세례명 축일
    4월 26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Rafael Arnaiz Baron

  • 신분과 직업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911-1938년

 

 

라파엘 아르나이즈 바론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없음.

 

 

라파엘 아르나이즈 바론 이야기

성 라파엘 아르나이즈 바론(Raphael Arnaiz Baron)은 1911년 4월 9일 에스파냐 부르고스(Burgos)의 한 부유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네 형제의 맏이로 태어났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몇몇 학교에 다녔고, 영성적 주제와 예술에 대한 감성은 어린 시절부터 두드러졌다. 이러한 자질들은 그가 열정적인 유머와 존경심과 겸손함을 갖고 세상을 향해 개방적이고 활발한 태도를 견지하도록 훌륭하게 균형을 잡아주었다.

그러던 중 발열과 늑막염의 발작으로 공부를 중단해야 했다. 그가 건강을 회복했을 때 아버지는 그를 사라고사(Zaragoza)의 기둥의 성모 대성당에 있는 기둥의 성모에게 봉헌하도록 했고, 가족들은 그가 중등교육을 수료한 오비에도(Oviedo)로 이사했다.

1930년 성 라파엘은 마드리드(Madrid)에서 건축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스도께 헌신하려는 그의 마음이 더욱 깊어진 것도 그 해였다. 그는 중등교육을 완벽히 마친 후, 그해 여름 마케다(Maqueda)의 공작과 공작부인인 그의 삼촌과 숙모의 집이 있는 아빌라(Avila) 근처에서 휴가를 보냈다. 삼촌과 숙모는 그에게 산 이시도로 데 두에나스(San Isidoro de Duenas)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소개해주었고, 그는 그곳의 아름다움과 기도 분위기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성소를 느꼈지만 분명 활동적인 직무를 수행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드리드에서 건축학도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엄률 시토회(트라피스트회) 안에서 ‘절대자’의 신비를 찾기로 결심하였다. 1934년 1월 16일 23세의 나이로 수도회에 입회하며 기쁘게 수도 생활을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의 입회 결정이 고통이나 실망에 자극받아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안에서 주어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주고자 하시는 무한히 선하신 하느님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성 라파엘은 그레고리안 성가와 시간 전례(성무일도)의 수도원 선율에 깊이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어머니와 삼촌과 숙모, 친분이 있던 여러 사람에게 편지를 썼고, 그의 어머니는 그가 죽은 후에 이 편지들을 모아 책으로 냈다.

수도회에 입회하고 넉 달이 지나고, 매우 엄격하고 소박한 사순시기를 보낸 뒤 그는 급작스럽고 심각한 상태의 당뇨병에 걸려 치료를 위해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는 1935년과 1937년 사이에 네 번이나 어쩔 수 없이 집과 수도원 오가는 생활을 반복해야만 했다.

그때는 에스파냐 내전이 한창일 때였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수도원에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을 봉헌하며 공동체의 끝자리를 선택하고 바깥 가장자리에서 살게 되었다. 당시 교회법은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이 수도 서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었다. 그는 1938년 4월 26일, 불과 27세의 젊은 나이에 질병의 마지막 공격을 받고 수도원 의무실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수도원 묘지에 묻혔고, 그의 유해는 나중에 대수도원 성당으로 옮겨졌다.

그는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놀라우리만큼 순수한 방법으로 시토회의 은총을 온몸으로 구현해나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모순과 당혹스러운 질병, 전쟁, 자신의 서원을 발하는 데 있어서의 무능함, 온전히 자기 자신을 포기할 때까지의 비정상적 공동체 관계 등 이 모든 것을 연속해서 겪을 수밖에 없었다.

굴욕감은 그의 일상의 동반자였다. 그의 한 가지 소망은 예수님과 성모님, 십자가, 트라피스트 수도회를 사랑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의 성덕에 대한 명성은 에스파냐 전역으로 급속히 퍼져나갔고, 산 이시도로 데 두에나스의 수도원에 있는 그의 무덤은 많은 은혜를 받는 순례지가 되었다.

1989년 8월 19일, 산티아고 데 콤프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서 열린 제3차 세계 청년대회(World Youth Day)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성 라파엘 수사를 현대 젊은이들의 모범으로 제안했고, 1992년 9월 27일 로마에서 그를 복자품에 올렸다. 시복미사 강론을 통해 교황은 이 에스파냐 출신 트라피스트 회원을 특별히 하느님의 부르심에 무조건적으로 응답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범이라 칭송했다.

성 라파엘 아르나이즈 바론은 2009년 10월 1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시성되었다. 교황은 이날 다섯 복자를 함께 시성하는 미사 강론에서 “새로 시성된 성인들은 인간의 이해와 계산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자기희생과 하느님에 대한 소명을 보여준 이들”이라며, 새 성인들의 거룩한 삶을 본받는 신앙생활을 해나가라고 당부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라파엘 귀자르 발렌시아

 

  • 세례명 축일
    6월 6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Rafael Guizar Valencia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878–1938년 베라크루즈

 

 

라파엘 귀자르 발렌시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발렌치아, 발렌키아.

 

 

라파엘 귀자르 발렌시아 이야기

성 라파엘 귀자르 발렌시아(Raphael Guizar Valencia)는 1878년 4월 26일 사모라(Zamora) 교구에 속한 멕시코 서남부 미초아칸(Michoacan) 주(洲)의 코티자(Cotija)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인 프루덴치오(Prudencio)와 나티비타드(Natividad)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11명의 자녀를 두었다.

라파엘과 그의 형제들은 가정에서부터 훌륭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9살 때 어머니를 여읜 라파엘은 일찍이 수도회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이어 예수회 사제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성소(聖召)는 사제직에 참여하여 하느님의 이름 안에서 자신의 삶을 봉헌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891년 코티자에 있는 소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이어 1896년에 사모라에 있는 대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1901년 6월, 23살의 나이에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직 초기에 그는 많은 시간을 투자해 사모라와 멕시코의 여러 다른 지역에서 선교 사업을 수행하는데 헌신하였다. 1905년 사모라 신학교의 영성지도 신부로 임명된 그는 성체성사에 대한 사랑과 동정 마리아께 대한 깊은 신심 안에서 신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쉬지 않고 일했다.

1910년에 일어난 멕시코 민족주의 혁명의 여파로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정부의 박해가 심해지자 그는 이에 저항하기 위해 1911년에 종교 신문을 창간하였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불행히도 혁명 세력에 의해 폐간되고 말았다. 박해는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고, 그로 인해 그는 수십 년 동안 거처조차 제대로 정하지 못하고 지냈다.

그는 사생활의 제약으로 인해 고통 받았으며 그 외에도 많은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사도직을 계속 수행하기 위해 거리의 상인, 음악가, 동종요법(同種療法) 치료사 등으로 위장하여 병든 이들을 치유하고 위로하며 죽어가는 이들에게 성사를 집전하였다.

그는 혁명 세력들에 의해 쫓겨 다니며 계속되는 체포의 위험 때문에 더 이상 멕시코 지역에 머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1915년 말까지 미국의 남부 지방에 머물렀고, 그 다음 해에 과테말라(Guatemala)로 가서 대규모의 선교사들을 지도하였다.

선교사로서 그의 명성이 쿠바(Cuba)에까지 전해지면서 그는 그곳의 선교사들을 지도해 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쿠바에서의 그의 활동은 매우 생산적이었으며, 특별히 1919년 흑사병 희생자들을 위한 자선사업은 매우 모범적이었다. 1919년 8월 1일 쿠바에 머물고 있던 그는 베라크루즈 교구의 주교로 선출되어 그 해 11월 30일 아나바(Havana)의 주교좌성당에서 주교 서품식을 가졌다.

멕시코 혁명이 잦아든 1920년 1월 9일 라파엘 주교는 그의 교구로 돌아왔다. 그는 처음 두 해 동안 교구의 방대한 지역을 방문하며 선교사들을 지도하고 가공할 지진으로 인해 희생된 이들을 도왔다. 대지진은 베라크루즈 교구의 가난한 이들 안에서 대규모의 파괴와 죽음을 야기하였다.

그의 사명은 본당에서의 설교와 교리교육, 혼인 유효화와 고해성사를 듣는 일 그리고 지진 희생자들을 돕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된 관심사 중의 하나는 미래의 사제들을 교육하는 일이었다. 1921년 그는 지난 1914년에 몰수된 할라파(Xalapa / Jalapa)의 오래된 신학교를 돌려받아 보수하였다.

그러나 보수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부에 의해 다시 점거당했다. 그래서 그는 멕시코시티(Mexico City)로 신학교를 옮겨 15년 동안 은밀히 그 기능을 유지하였다. 이 신학교는 박해 기간 동안에 문을 연 유일한 곳으로 300명의 신학생들이 있었다.

그는 베라크루즈 교구의 책임을 맡은 이후 9년 동안 망명 생활을 했고 그 후로도 줄곧 도망을 다녀야 했다. 신앙의 자유를 위해 교구로 돌아와 박해자들의 손에 자신의 목숨마저 맡긴 것은 용맹하고도 모범적인 행동이었다. 1937년 12월, 코르도바(Cordoba)에서 사명을 수행하던 중에 그는 심근경색으로 고통을 받으며 남은 생애를 몸져누워 지내야 했다.

임종을 앞둔 그는 전능하신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면서도 교구와 신학교를 어렵게 운영해 갔다. 그는 또한 매일미사를 집전하였다. 라파엘 주교는 1938년 6월 6일 멕시코시티에서 선종하여 그 다음날 할라파의 주교좌성당에 안치되었다. 그의 장례 행렬은 승리의 사건과도 같았다. 모든 이들이 성인다운 삶을 산 그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라파엘 귀자르 발렌시아 주교는 1995년 1월 29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리고 2006년 4월 28일 시성을 위한 기적 심사를 통과한 후 그 해 10월 15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다른 세 명의 복자들과 함께 시성되었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 출신 주교로서는 처음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할라파 주교좌성당에 있는 그의 무덤은 그를 공경하는 수천의 사람들이 찾아와 도움과 전구를 청하는 순례지가 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라파엘

 

  • 세례명 축일
    9월 29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Raphael

  • 신분과 직업
    대천사

  • 활동 연도와 지역
    없음

 

 

라파엘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없음.

 

 

라파엘 이야기

성 라파엘 대천사는 교회가 전례에서 공경하는 세 천사(가브리엘, 라파엘, 미카엘) 중 하나이다. 구약성경 토빗기에서 토빗과 사라가 기도할 때 그들의 기도를 주님 앞에 전해 드린 천사가 바로 성 라파엘 대천사이다(토빗 12,12). 또한 영광스러운 주님 앞에서 대기하고 또 그분 앞으로 들어가는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12,15).

성 라파엘 대천사는 아자르야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천사임을 감추고 토빗의 명으로 메디아로 떠나는 아들 토비야의 길잡이가 되어 동행했고(5장), 엑바타나에서 마귀에 들려 고생하던 라구엘의 딸 사라가 마귀에서 벗어나 토비야와 혼인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8장).

또한 메디아의 라게스로 가서 토빗이 친구인 가바엘에게 맡긴 돈을 찾아왔고(9장), 마침내 토빗의 시력도 되찾아주었다(11장). 히브리말로 ‘하느님이 치유하신다.’라는 이름의 뜻처럼 성 라파엘 대천사는 토빗과 사라에게 하느님의 치유를 선사해주었다.

신약성경에서는 요한 복음 5장 4절의 벳자타 못에 관한 말씀에서 등장한다.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그 못에 내려와 물을 출렁거리게 하였는데, 물이 출렁거린 다음 맨 먼저 못에 내려가는 이는 무슨 질병에 걸렸더라도 건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경 본문에는 명시적으로 그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교회 전승에 따르면 이 구절에 등장하는 주님의 천사가 바로 치유의 천사인 성 라파엘 대천사라고 한다. 그래서 교회 미술에서 성 라파엘 대천사는 주로 토비야와 동행하는 여행자와 순례자의 모습으로 그리고 내장을 담은 병이나 물고기, 개 등과 함께 등장한다.

성 라파엘 대천사는 여행자와 눈먼 사람 그리고 청소년의 수호천사로 여성형 이름은 라파엘라(Raphaela)이다. 성 라파엘 대천사의 축일인 9월 29일은 본래 로마의 살레리아노 가에 세워진 성 미카엘 대성당 봉헌 기념일인데, 1970년 세 대천사의 축일이 합쳐지면서 같은 날 기념하게 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라파엘 칼리노프스키

 

  • 세례명 축일
    11월 19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Raphael Kalinowski

  • 신분과 직업
    신부

  • 활동 연도와 지역
    1835-1907년

 

 

라파엘 칼리노프스키 세례명과 같은 이름

칼리노브스키, 칼리노스키, 칼리노우스키.

 

 

라파엘 칼리노프스키 이야기

성 라파엘 칼리노프스키 신부는 1835년 9월 1일 빌나(Vilna, 오늘날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 Vilnius)에서 귀족 출신의 저명한 수학교수인 안드레아 칼리노프스키(Andreas Kalinowski)와 요세파 포이온스카 칼리노프스키(Josepha Poionska Kalinowski)의 아들로 태어나 요셉(Josephus)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빌라에 있는 귀족들을 위한 학회에서 아버지로부터 수학하여 학업에 있어서 우수한 성과를 거두었다. 1851년부터 다음해까지 그는 호리호르키(Hory-Horky)에 있는 농업학교에서 동물학, 화학, 농학, 양봉을 배우고, 1853년부터 1857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Sankt Petersburg)에 있는 공병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공학 학위를 취득하고 위관급 장교로서 공병학교의 수학강사로 있으면서 1859년에는 쿠르스크-키예프-오데사(Kursk-Kiev-Odessa)를 잇는 철도의 설계를 담당하였다. 1862년에 대위로 승진하여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t-Litovsk)로 배치된 그는 그곳에서 주일학교를 시작하여 모든 비용을 제공하며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와서 배울 수 있도록 하였다.

 1863년 러시아의 압제에 대항하여 폴란드 반란이 발발했을 때 그는 러시아 군대에서 제대하고 빌나 지방의 반란정부의 각료가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죄수에게 사형을 선고하거나 집행하지 않겠다는 양해를 구했다.

1864년 3월 24일 러시아에 체포된 그는 반란의 책임을 물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정치적 희생양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러시아 정부는 다시 그의 형을 시베리아(Siberia)에서 10년간의 중노동으로 감형하였다.

복역 기간 중 그는 놀라우리만큼 강한 정신력과 인내심 그리고 사랑을 가지고 동료 죄수들에게 기도의 정신과 평온함 그리고 희망을 갖도록 도우며 위로할 줄 알았다.

 1874년 풀려난 그는 리투아니아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프랑스 파리(Paris)로 가서 3년 동안 개인교사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1877년 마침내 그는 오랫동안 간직해 온 성소에 응답하여 오스트리아의 그라츠(Graz)에 있는 맨발의 카르멜회에 입회하여 성 요셉의 라파엘(Raphael a Sancto Ioseph)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는 헝가리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1882년 1월 15일 크라쿠프(Krakow) 근처의 크체르나(Czerna)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사도적 열정에 불탔던 그는 신앙을 위해 자신을 남김없이 바쳤고, 다른 카르멜회 수사와 수녀들이 완덕의 산에 오르도록 도와주었다. 고해성사를 통해 죄에 빠진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고, 교회의 일치를 위해 그의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다. 그래서 그의 장상은 그에게 많은 중요한 임무를 맡겼고, 죽을 때까지 그는 모든 일을 완벽하게 실행하였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던 그는 1907년 11월 15일 마침내 하느님께 자신의 영혼을 바쳤다. 그는 바도비체(Wadowice)에 자신이 설립한 수도원에서 선종하였고, 그의 유해는 크체르나에 있는 수도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살아 있을 때나 죽은 후에나 성덕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놀라우리만큼 칭송을 받았다. 1934년부터 크라쿠프 교구에서 그의 시복에 대한 절차가 시작되었고, 1983년 6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그의 시복식이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 거행되었다. 그 후 1991년 11월 17일 같은 교황으로부터 시성되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보편교회 모든 그리스도의 모범으로 칭송받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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