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세례명/세례명 날짜 찾기

1월 28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23가지

피어나네 2023. 1. 28. 08:00
반응형

 

1월 28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글라스티아노, 레오니데, 레우치오, 루지에로, 리카르도, 바울리노, 발레리오, 베드로 놀라스코, 아마데오, 안토니오, 안티모, 야고보, 야고보, 에지디오, 오도, 요셉 프라이나데메츠, 요한, 율리아노, 율리아노 모누아르, 칼리니코, 토마스 아퀴나스, 티르소, 플라비아노, 총 23분 목록이에요.

 

1월 28일이 영명축일인 남자세례명은 어떤 이름이 좋을까요?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천주교 세례명 상세정보로 이동합니다. 어울리는 세례명을 지금 바로 찾아보세요.

 

1월 28일 여자세례명 칸네라, 총 1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1월 28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23가지

 

 

 

 

1월 28일 남자세례명 목록

 

  1. 글라스티아노

  2. 레오니데

  3. 레우치오

  4. 루지에로

  5. 리카르도

  6. 바울리노

  7. 발레리오

  8. 베드로 놀라스코

  9. 아마데오

  10. 안토니오

  11. 안티모

  12. 야고보

  13. 야고보

  14. 에지디오

  15. 오도

  16. 요셉 프라이나데메츠

  17. 요한

  18. 율리아노

  19. 율리아노 모누아르

  20. 칼리니코

  21. 토마스 아퀴나스

  22. 티르소

  23. 플라비아노

 

1월 28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23가지

 

 

1. 글라스티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Glast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830년 파이프

 

 

글라스티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글라스띠아노, 글라스띠아누스, 글라스티아누스.

 

 

글라스티아노 자료

스코틀랜드의 파이프 지방에서 태어난 성 글라스티아누스(Glastianus, 또는 글라스티아노)는 파이프 교구의 주교로서 픽트(Pict) 사람들과 스코틀랜드 사람들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의 종식을 중재하였고, 픽트 사람들이 점령되었을 때 그들의 권익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레오니데

 

  • 가톨릭 성인 이름
    Leonide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레오니데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레오니데스.

 

 

레오니데 자료

성 레오니데와 동료 순교자들은 이집트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순교하였다. 이들은 성 필레몬(Philemon, 3월 8일)과 성 아폴로니우스(Apollonius, 3월 8일)와 관련이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레우치오

 

  • 가톨릭 성인 이름
    Leuc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1년경

 

 

레우치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레우치우스, 레우키오, 레우키우스.

 

 

레우치오 자료

성 티르수스(Thyrsus)는 데키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소아시아 지방 프리지아(Phrygia)의 아폴로니아(Apollonia)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체포된 후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톱으로 몸통을 잘라 죽이는 형벌을 받았으나 톱이 너무 무거워져 사형 집행자들이 들 수가 없어 결국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고 한다.

이때 성 레우키우스(또는 레우치오)와 성 칼리니쿠스(Callinicus)도 함께 순교했는데, 성 칼리니쿠스는 이교도 사제로 성 티르수스의 순교 광경을 보고 개종하여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고 한다. 성 티르수스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옮겨졌다가 그 후에 에스파냐와 프랑스로 모셔졌다.

중세 이후 성 티르수스는 이베리아반도에서 큰 공경을 받았는데, 그 결과 에스파냐의 모자라빅(Mozarabic) 전례의 성무일도에도 수록되었다. 그리고 그의 유해 일부가 프랑스 남동부 시스트롱(Sisteron) 주교좌성당에 모셔진 후 그곳의 수호성인으로서도 공경을 받고 있다. 정교회는 12월 14일에 그들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루지에로

 

  • 가톨릭 성인 이름
    Ruggiero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237년 토디

 

 

루지에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로저, 로제로, 로제르, 루찌에로, 루치에로.

 

 

루지에로 자료

토디의 루지에로의 생애는 거의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1216년에 천사적 사부인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로부터 직접 수도복을 받은 초기의 작은 형제회 회원이란 사실 뿐이다.

그는 필립바 마레리아(Phillippa Mareria, 2월 16일)가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의 리에티(Rieti)에 클라라회 수도원을 세우고 지도할 때 영적 지도자로 활약했고, 1237년 1월 5일에 토디에서 선종했다.

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웠다. 그에 대한 공경은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승인되었다. 그는 로제르(Roger)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리카르도

 

  • 가톨릭 성인 이름
    Richard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169년 보첼르

 

 

리카르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리카르도 자료

영국 사람인 성 리카르두스(Richardus, 또는 리카르도)는 시토회 수도승이었다. 그는 클레르보(Clairvaux)의 성 베르나르두스(Bernardus, 8월 20일)에 의해 프랑스의 캉브레(Cambrai) 근방 보첼르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바울리노

 

  • 가톨릭 성인 이름
    Paul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726-804년 아퀼레이아

 

 

바울리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울리누스, 빠울리노, 빠울리누스, 파울리노, 파울리누스.

 

 

바울리노 자료

학자로도 존경받던 성 바울리누스(또는 바울리노)는 776년부터 샤를마뉴(Charlemagne)의 궁중 관리로 있으면서 요크(York)의 알퀴누스(Alcuinus, 5월 19일) 등과 가까이 지낸 유명 인사였다. 787년 그는 자기 고향 근교인 이탈리아 아퀼레이아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매우 활동적인 성품을 지녔던 그는 많은 교회를 세웠고, 아바르족(Avar, 5-9세기에 중앙아시아, 동유럽, 중앙유럽에서 활동한 몽골계 유목민족)을 위해 선교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시와 찬미가 등의 저술 활동도 하였다. 17세기 이전까지는 그의 축일을 그가 사망한 날인 1월 11일에 기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발레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Vale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315년 사라고사

 

 

발레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발레리우스.

 

 

발레리오 자료

에스파냐 사라고사의 주교인 성 발레리우스(또는 발레리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에스파냐의 총독 다치아누스(Dacianus)에 의해 자신의 부제인 성 빈첸시오(Vincentius, 1월 22일)와 함께 체포되어 철사로 결박된 채 발렌시아(Valencia)로 끌려와 감옥에 갇혔다.

그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별로 없는데, 전통적으로 그는 말을 더듬는 장애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의 제자인 성 빈첸시오 부제가 주로 설교를 담당하고 대변인 역할까지 했던 것 같다.

성 빈첸시오 부제가 발렌시아에서 총독의 혹독한 고문을 받고 순교했으나, 이미 연로했던 성 발레리우스 주교는 우에스카(Huesca) 지방 바르바스트로(Barbastro) 인근의 에네트(Enet)라고 불리는 곳으로 추방당했다.

306년경 엘비라(Elvira) 교회회의에 참석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313년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밀라노 칙령이 반포된 후에도 자신의 교구로 돌아오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315년 선종했다.

그의 유해는 1050년경에 발견되어 사라고사로 이장된 후 주교좌성당 등에 안치되었다. 그는 사라고사의 수호성인으로, 사라고사에서는 1월 29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베드로 놀라스코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Nolasco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설립자,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189-1258년

 

 

베드로 놀라스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 놀라스코 자료

성 베드로 놀라스코(Petrus Nolasco)는 프랑스의 부유한 귀족 가문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았다. 그는 늘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던 부모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

15세 때에 부친과 사별하면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그는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Barcelona)로 가서 막대한 재산을 이용해 상인으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상인으로 여러 나라를 다니던 중 당시 수백 년에 걸쳐 에스파냐를 점령하고 있던 무어인(아랍계)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노예로 삼아 학대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1212년 무어인들은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총공격으로 톨로사(Tolosa)에서 패배해 에스파냐 남쪽 그라나다(Granada)로 밀려난 상태였지만, 노예무역은 여전히 성행하고 있었다.

성 베드로 놀라스코는 그들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그리스도인 노예들의 석방을 위한 대속금을 내고 많은 노예에게 자유를 선물했다. 하지만 몇 년간의 속량 활동으로 그의 막대한 재산도 바닥을 드러냈다. 그러던 중 1218년 8월 1일, 성모님께서 그에게 발현하시어 모슬렘에게 노예가 된 그리스도인 노예들을 구출하는 수도원을 설립하라 말씀하시는 환시를 보았다.

그는 성모님의 분부대로 그리스도인 노예 해방을 위한 수도회 설립을 결정하고, 평소 가까이 지내던 아라곤(Aragun) 야고보 1세 왕과 상의하고 그의 지지와 후원을 약속받았다.

그리고 왕의 초청으로 그 당시 아라곤에 와 있던 페냐포르트의 성 라이문두스(Raymundus, 1월 7일)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노예 해방을 위한 속량의 성모회’(메르체다리오회, Mercedarian Order)를 설립했다. 이 수도회는 1235년에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이 수도회의 회원들은 세 가지 수도 서원 외에 그리스도인 노예들의 석방을 위해서는 자신을 인질로 바칠 각오까지 해야 한다는 네 번째 서원도 했다. 성 베드로 놀라스코 역시 노예 석방을 위해 헌신하던 중 북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대신해 포로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때 무어인들이 그를 죽이려고 돛대도 키도 없는 작은 배에 태워 바다로 보냈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에스파냐의 발렌시아(Valencia)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동안의 헌신과 고령으로 인해 허약해진 그는 여생을 기도와 보속으로 보내다가 1256년 수도원 총장직을 후임자에게 넘기고 성탄절 밤에 바르셀로나에서 선종했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오늘날 연구자들은 바르셀로나(Barcelona) 왕립 문서 보관소의 기록을 근거로 5월 6일을 선종일로 보고 있다. 그는 1628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1664년 보편교회에서 그의 축일을 기념하도록 선포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아마데오

 

  • 가톨릭 성인 이름
    Amadeu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110-1159년 로잔

 

 

아마데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마데우스.

 

 

아마데오 자료

프랑코니아(Franconia)의 왕가 출신인 아마데우스(또는 아마데오)는 1110년에 도피네(Dauphine)의 샤트(Chatte) 성에서 태어났다.

그가 8살이 되었을 때 그의 부친인 클레르몽(Clermont)의 아마데우스(1월 14일)가 본느보(Bonnevaux)의 시토 수도원에 입회하자, 그 역시 그곳에서 공부하다가 얼마 후 부친과 함께 클뤼니(Cluny) 수도원으로 옮겨갔다.

그 후 1144년 그는 교황 루키우스 2세(Lucius II)에 의하여 스위스 로잔의 주교로 임명되어 교구 발전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특히 그의 설교는 당대의 명성을 얻기에 충분하였다고 한다. 그에 대한 공적인 공경은 이미 18세기 초에 시작되었고, 1903년 교황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안토니오

 

  • 가톨릭 성인 이름
    Anthony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355-1450년 아만돌라

 

 

안토니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안토니오 자료

안토니우스(Antonius, 또는 안토니오)는 이탈리아의 마르케(Marche) 지방 아만돌라(또는 아스콜리피체노, Ascoli Piceno)에서 태어나 톨렌티노(Tolentino)의 성 니콜라우스(Nicolaus, 9월 10일)의 삶과 설교를 본받고자 톨렌티노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일생 동안 자신의 삶의 귀감인 성 니콜라우스를 따르고자 노력하였고, 그의 무덤을 중심으로 일대를 성역화하고 순례자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었다.

안토니우스는 특히 인내심이 뛰어났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깊었으며, 그의 전구로 이루어진 기적들이 수없이 보고되어 있을 정도로 덕이 높았다. 그에 대한 공경은 1759년에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안티모

 

  • 가톨릭 성인 이름
    Anthim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8세기 브랑톰

 

 

안티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띠모, 안띠무스, 안티무스.

 

 

안티모 자료

성 안티무스(또는 안티모)는 769년 샤를먀뉴(Charlemagne)에 의해 설립된 브랑톰 수도원의 초대원장 중의 한 명이었다. 그 수도원은 817년 노르만족의 침공으로 인해 파괴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야고보

 

  • 가톨릭 성인 이름
    Jame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자선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304년

 

 

야고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야고버, 야고부스, 야코보, 야코부스, 자크, 제임스.

 

 

야고보 자료

야고보(Jacobus)는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 키우시(Chiusi) 부근의 치타 델레 피에베(Citta delle Pieve)에서 어느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법률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제가 될 마음을 굳히고 엄격한 생활부터 시작하였다.

고향 근방의 폐허화된 어느 성당을 수리하면서부터 그는 병자들을 돌보려는 마음을 굳히고 집을 수리하여 그들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재산과 법률 지식을 억압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선기금을 부정하게 착복한 키우시의 주교 때문에 구호소가 점점 황폐화되어 가는 것을 보고 그 기금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일반법정과 교회법정 모두에 키우시 교구의 주교에 대한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으나, 결국 그 주교가 보낸 사람들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야고보

 

  • 가톨릭 성인 이름
    Jame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6세기

 

 

야고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야고버, 야고부스, 야코보, 야코부스, 자크, 제임스.

 

 

야고보 자료

로마 순교록은 팔레스티나(Palestina)에서 은수자로 기억되는 성 야고보(Jacobus)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신앙을 배반한 후 참회하기 위해 무덤에서 오랫동안 머물렀고, 기적으로 유명해졌으며, 하느님께로 나아간 은수자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에지디오

 

  • 가톨릭 성인 이름
    Aegidiu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443-1518년 로렌자나

 

 

에지디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이기디오, 아이기디우스, 에지디우스, 자일스, 질.

 

 

에지디오 자료

이탈리아 나폴리(Napoli)의 로렌자나에서 태어난 에지디우스(또는 에지디오)는 노동자 부모로부터 열심한 신앙을 물려받았으며, 그 역시 어려서부터 농장 노동자로 생활하였다.

어린 시절 작은 형제회 회원들의 영향을 받은 그는 장성한 뒤에 고독한 분위기 속에서 하느님을 섬기기로 결심하고 성모의 소경당 근교에서 은수자로서 정착하였다.

그는 기도에만 몰두하였고 새와 짐승들이 그의 친구였다. 그 후 그는 작은 형제회의 평수사로 들어갔지만 그전처럼 은수자로서 살았다. 그는 자주 탈혼을 경험하였고, 예언의 은혜도 받았다.

전설에 의하면 그가 죽은 지 6개월 동안 시신이 썩지 않았고, 무덤에서도 로사리오를 손에 잡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있었으며, 성체조배를 하는 듯 보였다고 한다. 그는 질(Giles)로도 불린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80년에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오도

 

  • 가톨릭 성인 이름
    Odo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801-880년 보베

 

 

오도 자료

프랑스의 보베에서 태어난 성 오도는 한때 군인이 될 사명감을 강하게 느꼈으나, 곧 이를 포기하고 피카르디(Picardie) 지방의 코르비(Corbie)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카를마르텔(Karl Martell)의 아들을 가르칠 정도로 학덕으로 유명한 수도승이었고, 851년에는 성 파스카시우스 라드베르투스(Paschasius Radbertus, 4월 26일)를 계승하여 그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 후 861년에 그는 자기 고향 교구의 주교가 되었고, 그로부터 20여 년 동안 북부 프랑스 지역에 있는 교회의 개혁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교황 성 니콜라우스 1세(Nicolaus I, 11월 13일)와 랭스(Reims)의 대주교인 힌크마르(Hincmar) 사이의 중재자로도 활약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에 대한 공경은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요셉 프라이나데메츠

 

  • 가톨릭 성인 이름
    Joseph Freinademetz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선교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852-1908년 중국

 

 

요셉 프라이나데메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요세푸스,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프라이나데메쯔, 호세.

 

 

요셉 프라이나데메츠 자료

성 요셉 프라이나데메츠(Josephus Freinademetz, 福若瑟)는 1852년 4월 15일 오스트리아와 인접한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산맥의 다섯 가구만 사는 작은 마을인 오이에스(Oies)에서 아버지 조반마티아(Giovanmattia)와 어머니 안나 마리아 프라이나데메츠(Anna Maria Freinademetz)의 12자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남부 티롤(South Tyrol)로 알려진 이 지방은 당시 오스트리아 헝가리(Austro-Hungarian) 제국의 영토였다. 그는 태어난 날 세례성사를 받고 가족으로부터 단순하지만 독실한 신앙을 물려받았다.

그는 브레사노네(Bressanone, 브릭센 Brixen)의 교구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 해외 선교사로서 일생을 살아갈 것을 고심하기 시작했다. 1875년 7월 25일 사제품을 받고 고향 인근의 성 마르티누스(Martinus) 공동체로 발령을 받은 그는 곧 그곳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하지만 선교사로서 살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서품받은 지 2년째 되던 해에 말씀의 선교 수도회(Societas Verbi Divini, 신언회)의 모태가 된 ‘성 미카엘 선교 신학교’를 설립한 성 아놀드 얀센(Arnold Jansen, 1월 15일) 신부를 만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교구장 주교의 허락을 받고 1878년 8월 네덜란드의 슈타일(Steyl)에 있는 성 미카엘 선교 신학교에 들어갔다.

성 미카엘 선교 신학교에서 선교 사제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한 후 1879년 3월 2일, 성 요셉 프라이나데메츠는 선교사 십자가를 받고 말씀의 선교 수도회 소속 요한 밥티스타 안제르(Joannes Baptista Anzer) 신부와 함께 중국을 향해 출발했다.

5주간의 항해 후 그들은 홍콩(Hong Kong)에 도착해서 2년간 머물며 다음 단계를 준비했다. 1881년 그들은 1,200만 명의 인구에 겨우 158명의 신자가 사는 산둥성(山東省) 남부의 새로운 선교지로 선교 여정을 떠났다.

이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힘겨운 여정으로 강도들의 습격을 받으면서도 첫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형성해야 하는 어려운 사명이었다. 하나의 공동체가 겨우 형성되었을 때 주교의 훈령이 도착해 그들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였다.

오래지 않아 그는 낯선 땅에 처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현지인 교리교사와 같은 헌신적인 평신도들의 중요성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그는 교리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온 힘을 쏟으며 중국인을 위한 교리교육 책자를 준비하였다.

동시에 주교가 된 안제르와 함께 중국인 사제와 다른 선교사들의 영성적 형성과 지속적 교육을 위한 준비에 온 힘을 쏟아부었다. 그의 전 생애는 중국인들 안에서 중국인이 되기 위한 노력으로 점철되었다. 그래서 그는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중국과 중국인을 사랑합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서 죽기를 원하며 그들 가운데 묻혀 안식을 누리고 싶습니다.”

1898년 성 요셉 프라이나데메츠 신부는 후두염을 앓았고, 고된 작업과 다른 많은 힘든 일의 결과로 결핵에 걸렸다. 그래서 그는 주교와 다른 사제들의 권유로 건강을 회복할 희망을 안고 휴식을 위해 일본으로 갔다. 그곳에서 얼마간 요양하며 건강을 회복한 후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지만 완쾌된 것은 아니었다.

1907년 안제르 주교가 유럽에 다녀오기 위해 중국을 떠났을 때 그는 교구의 행정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 기간에 심각한 장티푸스 전염병이 발발했는데, 착한 목자인 그는 자신이 감염될 때까지 많은 공동체를 방문하며 지칠 줄 모르는 도움을 제공했다.

그는 주교좌가 있는 산둥의 타이키아(Taikia, 大化)로 돌아왔지만 병세가 심해져 1908년 1월 28일 선종하였다. 그의 시신은 십자가의 길 제12처에 묻혔고, 그의 무덤은 곧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순례지가 되었다.

성 요셉 프라이나데메츠 신부는 어떻게 하면 중국 문화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깊이 사랑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배웠다. 그는 모든 사람을 위한 하느님 사랑의 복음 메시지를 선포하는 데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 그리고 중국인 신앙 공동체들을 양성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화하였다.

그는 활기에 넘친 공동체들이 스스로 개방해 지역 주민들과 연대하도록 했고, 중국인 신자들 스스로 교리교사, 수도자, 사제로서 자기 민족을 위한 선교사가 되도록 고무하였다. 그의 생애는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는 사랑입니다.”라는 그의 모토로 표현될 수 있다.

그는 1975년 10월 19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3년 10월 5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말씀의 선교 수도회의 설립자인 성 아놀드 얀센과 아프리카의 사도인 성 다니엘 콤보니(Daniel Comboni, 10월 10일) 주교와 함께 같은 교황으로부터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요한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425-539년경 레오마이

 

 

요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자료

프랑스 수도생활의 개척자로서 공경을 받는 성 요한(Joannes)은 랑그르(Langres) 교구의 디종(Dijon)에서 태어났다. 그는 처음에 레오마이에서 은수생활을 시작했는데 제자들이 모여들자 몰래 그곳을 떠나 레렝스(Lerins) 수도원에서 수도승이 되었다.

그 후 그의 고향 주교의 명으로 무티에생장(Moutier-Saint-Jean) 수도원을 설립하기 위해 레오마이로 되돌아왔다. 그가 오랫동안 그 수도원을 지도하는 동안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났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8. 율리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Jul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127-1208년 쿠엥카

 

 

율리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율리아누스, 줄리안, 줄리언.

 

 

율리아노 자료

에스파냐 부르고스(Burgos)에서 태어난 성 율리아누스(Julianus, 또는 율리아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최초로 자신을 봉헌한 성인이다. 에스파냐 중부 뉴 카스티야(New Castilla)의 쿠엥카에서 알폰소 9세(Alphonso IX) 왕에게 재차 붙잡혔을 때 그는 그 도시의 주교로 내정되었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그의 열망 때문에 성 율리아누스는 그의 남은 시간을 모두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하고, 직접 그의 손으로 번 돈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그는 비를 청할 때 간구하는 성인이며, 뉴 카스티야의 쿠엥카 교구의 수호성인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9. 율리아노 모누아르

 

  • 가톨릭 성인 이름
    Julian Maunoir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선교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606-1683년 브르타뉴

 

 

율리아노 모누아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모느와르, 율리아누스, 줄리안, 줄리언, 쥘리앵.

 

 

율리아노 모누아르 자료

프랑스의 렌(Rennes) 교구 태생인 율리아누스 모누아르(Julianus Maunoir, 또는 율리아노)는 신심 깊은 가정에서 성장하여 1625년에 예수회원이 되었다.

1637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캐나다의 선교사로 보내주기를 원했으나 오히려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 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그 지방의 언어를 습득한 후 부르기 쉬운 음악 등을 이용해 매우 효과적인 신앙 부흥 운동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였다.

모두가 그의 방법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브르타뉴 지방 사람들과 함께 동고동락하였다. 결국 그곳의 주교와 교구사제들도 그의 노력에 동참하여 큰 결실을 거두었다. 브르타뉴의 사도로 불리는 그는 1683년 1월 28일 플레빙(Plevin)에서 폐렴으로 선종하여 그곳 성당에 묻혔다.

그는 1951년 5월 20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의 축일은 지역에 따라 1월 29일에 지내기도 하고, 예수회에서는 7월 2일에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0. 칼리니코

 

  • 가톨릭 성인 이름
    Callinic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1년경

 

 

칼리니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갈리니꼬, 갈리니꾸스, 갈리니코, 갈리니쿠스, 칼리니꼬, 칼리니꾸스, 칼리니쿠스.

 

 

칼리니코 자료

성 티르수스(Thyrsus)는 데키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소아시아 지방 프리지아(Phrygia)의 아폴로니아(Apollonia)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체포된 후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톱으로 몸통을 잘라 죽이는 형벌을 받았으나 톱이 너무 무거워져 사형 집행자들이 들 수가 없어 결국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고 한다.

이때 성 레우키우스(Leucius)와 성 칼리니쿠스(또는 칼리니코)도 함께 순교했는데, 성 칼리니쿠스는 이교도 사제로 성 티르수스의 순교 광경을 보고 개종하여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고 한다.

성 티르수스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옮겨졌다가 그 후에 에스파냐와 프랑스로 모셔졌다. 중세 이후 성 티르수스는 이베리아반도에서 큰 공경을 받았는데, 그 결과 에스파냐의 모자라빅(Mozarabic) 전례의 성무일도에도 수록되었다.

그리고 그의 유해 일부가 프랑스 남동부 시스트롱(Sisteron) 주교좌성당에 모셔진 후 그곳의 수호성인으로서도 공경을 받고 있다. 정교회는 12월 14일에 그들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1. 토마스 아퀴나스

 

  • 가톨릭 성인 이름
    Thomas Aquina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신학자, 교회학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224/1225-1274년

 

 

토마스 아퀴나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마, 아퀴노, 토마스아퀴나스, 토머스.

 

 

토마스 아퀴나스 자료

성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 또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탈리아 로마(Rome)와 나폴리(Napoli) 중간에 있는 로카세카(Roccasecca)의 가족성(城)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퀴노의 백작 란둘프(Landulph)와 신심 깊은 어머니 테오도라(Theodora)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불과 다섯 살의 나이에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으로 보내져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1239년경에는 더 좋은 교육을 받아 훌륭한 지도자가 되길 바라는 가족의 뜻에 따라 나폴리 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도미니코회의 스승을 만나 큰 영향을 받으면서 가족의 뜻과는 달리 수도자가 되려는 뜻을 품게 되었다.

그는 1244년 가족들의 완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결국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였다. 이때 가족들은 그를 설득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강제로 데려다가 15개월 동안이나 로카세카 성에 감금시킨 일도 있었다.

그러나 성 토마스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1245년에 다시 수도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1245년부터 3년 동안을 파리(Paris)에서 수학하고, 1248년부터 쾰른(Koln)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그는 프랑스 파리와 독일 쾰른에서 당시 저명한 신학자로 이름난 성 대 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 11월 15일)의 문하생으로 공부하여 1256년에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1250년과 1251년 사이의 어느 때에 사제품을 받았다. 성 토마스의 스승이었던 성 대 알베르투스는 그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이 말 없는 황소는 그의 울부짖음으로 전 세계를 가득 채울 것이다.”

1252년부터 그는 주로 파리와 이탈리아의 나폴리(Napoli), 아나니(Anagni), 오르비에토(Orvieto), 로마(Roma), 비테르보(Viterbo) 등지에서 강의했고, 1259-1264년 사이에 “대이교도대전”(對異敎徒大全, Summa Contra Gentiles)을 마무리 지으면서 그의 저작 중 가장 유명한 “신학대전”(神學大全, Summa Theologiae)의 집필에 착수하였다.

파리로 돌아온 1269년에는 수도사제와 교구사제 간의 논쟁에 말려들었고, 벨기에 브라반트(Brabant)의 시게르(Siger)와 요한 페캄(John Pecham) 그리고 파리의 주교 에티엔느 탕피에의 철학적인 가르침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1274년 리옹(Lyon) 공의회에 참석하여 동방과 서방 교회의 재일치 가능성을 논의하라는 복자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Gregorius X, 1월 10일)의 부름을 받았으나, 리옹으로 가는 도중 테라치나(Terracina) 교외 포사 누오바(Fossa Nuova)에 있는 트라피스트회 수도원에서 1274년 3월 7일 선종하였다.

1369년 1월 28일 에스파냐의 툴루즈(Toulouse)로 그의 유해가 옮겨졌고, 그때부터 이날을 성인의 축일로 기념하게 되었다.

그의 미완성 대표작인 “신학대전”은 현대 가톨릭 신학의 뿌리로 받아들여질 만큼 위대한 신학 사상을 담고 있다. 로마에서 시작한 집필은 파리로 옮겨서도 계속되었다. 하루는 하느님께서 성 토마스에게 나타나셔서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 참 잘 썼다. 그 대가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는 “주님, 당신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렇듯 하느님의 축복 속에 그의 집필 작업이 계속되었으나, 1273년 12월 6일 성 니콜라우스 축일 미사 중에 강렬한 하느님 체험을 한 후부터 돌연 모든 집필 작업을 중단했다. 당시 “신학대전” 제3부 ‘속죄’에 대한 부분을 집필 중이던 그에게 왜 더는 글을 쓰지 않느냐는 친구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느님의 발현 시에 형언키 어려운 신비를 보았다. 그동안 내가 오랜 기간 심혈을 기울여 쓴 것은 이 신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 “신학대전” 미완의 대작으로 남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지적 능력을 통해 하느님을 더 깊이 탐구하고 철저히 섬긴 대학자였다. 동시에 그는 지극히 겸손하고 거룩한 사람이었다. 그는 환시와 탈혼, 그리고 하느님의 계시를 체험했다.

1261년 교황 우르바누스 4세(Urbanus Ⅳ)는 당시 몇몇 나라에서 지키던 성체 축일을 보편교회 전례력에 포함하기 위해 미사 전례문과 성무일도(시간 전례)에 들어갈 성체 찬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당대 석학인 성 토마스와 성 보나벤투라(Bonaventura, 7월 15일)에게 그 일을 맡겼다.

어느 날 우연히 성 토마스의 찬미가를 본 성 보나벤투라는 그 완벽함에 감탄해 자신이 작성한 찬미가를 찢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교황은 성 토마스가 작성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성무일도와 미사 전례문을 정했다.

그는 이외에도 오늘날 가톨릭교회에서 사용하는 많은 찬미가를 지었고, 주님의 기도(Pater Noster), 사도신경(Symbolum Apostolicum) 그리고 성경 일부에 대한 주해서도 썼다.

그는 1323년 7월 21일에 교황 요한 22세(Joannes XX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1567년에는 교황 비오 5세(Pius V)에 의하여 교회 학자로 선언되었다. 그리고 1880년에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하여 모든 대학교와 대학 그리고 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그에게 붙여진 칭호는 ‘보편적 박사’(Doctor Communis) 또는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이다. 교황 레오 13세는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Aeterni Patris)에서 모든 신학생이 그의 사상을 연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그리스도교 최대의 신학자이며, 그의 사상은 그의 사후부터 현재까지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지배하고 있고, 그의 저서들은 신앙과 이성 간의 예리한 구분으로 특징지어지는 탁월한 저작들로 평가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2. 티르소

 

  • 가톨릭 성인 이름
    Thyrs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1년경

 

 

티르소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띠르소, 띠르수스, 티르수스.

 

 

티르소 자료

성 티르수스(Thyrsus)는 데키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소아시아 지방 프리지아(Phrygia)의 아폴로니아(Apollonia)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체포된 후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톱으로 몸통을 잘라 죽이는 형벌을 받았으나 톱이 너무 무거워져 사형 집행자들이 들 수가 없어 결국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고 한다.

이때 성 레우키우스(Leucius)와 성 칼리니쿠스(Callinicus)도 함께 순교했는데, 성 칼리니쿠스는 이교도 사제로 성 티르수스의 순교 광경을 보고 개종하여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고 한다. 성 티르수스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옮겨졌다가 그 후에 에스파냐와 프랑스로 모셔졌다.

중세 이후 성 티르수스는 이베리아반도에서 큰 공경을 받았는데, 그 결과 에스파냐의 모자라빅(Mozarabic) 전례의 성무일도에도 수록되었다.

그리고 그의 유해 일부가 프랑스 남동부 시스트롱(Sisteron) 주교좌성당에 모셔진 후 그곳의 수호성인으로서도 공경을 받고 있다. 정교회는 12월 14일에 그들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3. 플라비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Flav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치비타베키아

 

 

플라비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플라비아누스, 플라비안.

 

 

플라비아노 자료

로마(Roma) 장관의 부관이었던 성 플라비아누스(Flavianus, 또는 플라비아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치비타베키아에서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그 외 세례명 날짜로 찾기

 

날짜순 천주교 세례명

어떤 세례명이 좋을까?

pieonane.com

 


 

그 외 세례명 이름으로 찾기

 

이름순 가톨릭 세례명

본받고 싶은 가톨릭 성인 찾기

pieonane.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