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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칠리아 여자세례명 3인 목록

피어나네 2025. 6. 10.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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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세례명 체칠리아는 세실리아, 쎄실리아, 카이킬리아, 케킬리아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여자세례명 체칠리아 3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체칠리아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체칠리아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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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칠리아
여자세례명
3인 목록

 

 

 

 

체칠리아 여자세례명 목록

 

  1. 체칠리아 (6월 9일)

  2. 체칠리아 (9월 20일)

  3. 체칠리아 (11월 22일)

 

체칠리아 천주교 여자세례명 3인 목록

 

 

1. 체칠리아

 

  • 세례명 축일
    6월 9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Cecilia

  • 신분과 직업
    동정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3세기 볼로냐(Bologna)

 

 

체칠리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세실리아, 쎄실리아, 카이킬리아, 케킬리아.

 

 

체칠리아 이야기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이탈리아 내의 수도회 활동을 위하여 한적한 곳을 찾았을 때 성 도미니코(Dominicus, 8월 8일)는 볼로냐를 택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가 소망하던 훌륭한 대학을 세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적당한 곳을 물색하여 수도원을 지었으나 반대가 극심하였다. 그것은 그 땅을 소유하고 있던 안달로가(家)의 위세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안달로의 무남독녀인 디아나(Diana)의 간절한 호소에 굴복하였다. 성 도미니코는 사적으로 그녀의 동정서원을 받아들였고 가능하면 수도생활을 하도록 격려하고 있었다. 얼마동안 그녀는 자기 집에 그대로 머물면서 회개 생활을 하였다.

그 후 그녀는 도미니코 수녀회의 수도원을 짓기로 집안사람들을 설득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그녀의 부친은 완강히 거부할 뿐 아니라 그녀가 수녀회에 들어가는 것조차 금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집을 나와서 성 아우구스티누스회에 입회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온 가족이 몰려와서 강제로 그녀를 집으로 데려갔다. 집에 온 그녀는 독방에 갇혀 지냈으나 또 다시 집을 탈출하여 록사나(Roxana)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작센(Sachsen)의 요르단(Jordan, 2월 13일)이 안달로와 그의 아들들을 설득시켰을 뿐만 아니라, 도미니코 수도원을 짓는데 도움까지 베풀도록 그들의 마음을 누그러트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디아나는 1222년에 로마(Roma)의 성 식스투스(Sixtus) 수녀원에서 온 4명의 수녀들과 함께 볼로냐의 성녀 아녜스(Agnes) 수녀원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들 중에 체칠리아(Caecilia)와 아마타(Amata, 2월 20일)가 있었다. 이 두 수녀의 생활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디아나와 마찬가지로 높은 성덕으로 유명하였다.

체칠리아는 로마의 귀족가문 출신으로 매우 뛰어난 여성이었다. 그녀는 17세 때 성 마리아(Maria) 수녀원에 들어갔다. 디아나는 1236년 1월 9일에 35세의 일기로 운명하였고, 체칠리아는 설립자 성 도미니코를 오랫동안 도왔다. 그들은 사망 후에 성녀 아녜스 수녀원에 나란히 안장되었고, 1891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함께 시복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체칠리아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柳 Cecilia

  • 신분과 직업
    과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61-1839년 한국(Korea)

 

 

체칠리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세실리아, 쎄실리아, 유 세실리아, 유 소사, 유 조이, 유세실리아, 유소사, 유조이, 유체칠리아, 카이킬리아, 케킬리아.

 

 

체칠리아 이야기

성녀 유 체칠리아(Caecilia)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스무 살 되던 해에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후처로 들어가면서 남편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깊은 신심을 보여주었다. 신유년 서울에서 큰 박해가 일어나서 남편이 옥에 갇혔을 때 그녀 역시 세 아이와 함께 붙잡혀 들어갔다가 다행히 풀려 나왔다.

그러나 가산은 모두 몰수되어 의지할 곳이 없었다. 어려운 처지에 살 길이 막연했던 유 체칠리아는 경기도 광주의 마재에 있는 시동생 정약용 요한의 집에 가서 도움을 청했지만 믿지 않는 친척들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해 무수한 고생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맏딸과 전처의 아들인 순교복자 정철상 카롤루스(Carolus)의 아내와 아들마저 죽자 자신이 낳은 정하상 바오로(Paulus)와 정정혜 엘리사벳(Elisabeth)만 남게 되었다.

어느 날 밤 유 체칠리아는 꿈속에서 남편을 만났는데, “나는 천국에 방 여덟이 있는 집을 하나 지었는데 다섯은 차고 셋만 남았소. 그러니 생활이 어렵더라도 참아 받으시오. 그리고 꼭 우리를 만나러 오도록 하시오.” 하고 말했다. 과연 가족 여덟 식구 중에서 이미 다섯이 순교하거나 죽었으니 그 꿈은 꼭 들어맞았다. 그리고 그 꿈은 그녀의 가슴에 깊은 인상을 박아주어 큰 힘과 용기를 주었다.

한편 그녀의 아들인 성 정하상 바오로는 신심 깊은 생활을 하며 선교사들을 조선에 영입하기 위해 여러 해 동안 어머니와 떨어져 살았다. 어머니 유 체칠리아에게는 이것이 큰 시련이었는데, 아들이 북경으로 떠날 때마다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아픔을 기도로써 참아 이겨냈다.

그러면서도 가난한 사람을 도왔으니 어떤 때는 그녀가 먹을 것도 먹지 않고 내어주었다고 한다. 또 나이가 너무 많아 가사를 돌볼 수 없었기에 거의 모든 시간을 기도와 신앙생활에만 전념하며 지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한창일 때 그녀의 조카 한 사람이 시골에 집까지 장만하여 주며 피신하기를 권했으나, “나는 늘 순교하기를 원하였는데 이제 그 기회가 왔으니 아들 바오로와 함께 순교할 생각이다.” 하며 거절하였다.

그러던 중 그해 7월 11일에 아들이 체포되고, 이어서 7월 19일에는 그녀 또한 79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큰 죄를 지은 국사범과 같이 오라로 꽁꽁 묶여 끌려갔다. 그것은 그녀의 집안이 순교자 집안이요, 그녀의 아들이 외국인과 자주 만났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며칠 동안 옥에 갇혀 있던 유 체칠리아는 포장 앞에 나가 신문(訊問)을 당하였다. 처음 다섯 번 문초를 당하는 동안에 태형을 2백 30대나 맞았다. 기운이 쇠약한 체칠리아였지만 끝까지 참아내며 자세 하나 흐트러트리지 않고 태연자약한 태도를 보여 주어 형리들을 놀라게 했다.

체칠리아는 참수당하기를 바랐으나 나라 법률에 노인에 대한 참수를 금하였기 때문에 재판관들은 때려서 죽이기로 하고 두 번이나 그녀를 불러내어 문초를 거듭하고 위협하며 형벌을 가하였다. 체칠리아는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맡기고 모든 고통을 참아냈다. 마침내 기운이 다하여 옥 바닥에 누워 마지막으로 “예수 마리아!” 하고 소리 내어 부르고 숨을 거두었다.

이때가 1839년 11월 23일로 그녀의 나이는 79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체칠리아

 

  • 세례명 축일
    11월 22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Cecilia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30년경

 

 

체칠리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세실리아, 쎄실리아, 카이킬리아, 케킬리아.

 

 

체칠리아 이야기

여러 필사본으로 전래된 성녀 카이킬리아(Caecilia, 또는 체칠리아)의 순교록은 5세기 중엽에 기록되었다. 그 전승들에 따르면 그녀는 로마 원로원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어린 시절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면서 평생 동정을 지킬 것을 서약하였다.

성녀 체칠리아는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이교도인 성 발레리아노(Valerianus, 4월 14일)라는 귀족 청년과 결혼하였으나, 결혼식이 끝난 후 그에게 자신은 동정 서약을 하였으며 천사의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음을 말하였다. 성 발레리아노는 그 천사를 보게 해 주면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래서 성녀 체칠리아는 먼저 그를 교황 성 우르바노 1세(Urbanus I, 5월 25일)에게 보내어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도록 하였다. 세례를 받고 돌아온 그는 백합으로 장식된 관을 쓴 두 천사가 성녀 체칠리아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 결국 그녀의 동정서약에 동의하였다. 또한 그의 동생인 성 티부르시오(Tiburtius, 4월 14일)도 후에 천사를 보고 교황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때부터 성 발레리아노와 성 티부르시오 형제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멀리하고,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을 돕는 자선활동과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총독인 알마키우스(Almachius)의 미움을 사서 체포되었다.

그들은 로마의 신들을 모신 신전에 희생 제사를 바치라는 총독의 강요를 거절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수하여 심한 매질을 당한 후 로마 근교 아피아 가도(Via Appia)에서 참수형을 받고 성 막시모(Maximus, 4월 14일)와 함께 순교하였다.

총독의 시종이었던 성 막시모는 성 발레리아노와 성 티부르시오가 그리스도에 대해 보여준 굳은 신앙과 용기에 감화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가 죽을 때까지 채찍질을 당해 순교하였다. 성녀 체칠리아는 이들 세 명의 순교자들의 장례를 지내주고 그들의 시신을 아피아 가도에 있는 프레테스타투스(Praetestatus) 카타콤바에 안장하였다.

순교자들의 장례를 지낸 후 체포된 성녀 체칠리아는 총독으로부터 배교를 강요당했다. 그녀는 온갖 위협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알마키우스 총독 앞에서 그리스도인임을 밝혔다. 총독은 도저히 그녀의 신앙을 꺾을 수 없다고 생각해 결국 사형을 선고하였다. 사형 방법은 그 당시 흔히 사형수에게 적용된 것으로 목욕탕에 가두고 쪄서 죽이는 가혹한 형벌이었다.

목욕탕에 가둔 지 24시간이 지났음에도 성녀 체칠리아가 죽지 않자 당황한 총독은 목을 베어 죽이기로 재차 결정하였다. 그러나 형리의 서툰 솜씨 때문에 세 번이나 칼로 목을 베인 후에도 성녀는 3일 동안이나 숨이 붙어 있어 모진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중에도 자기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오른손 손가락 3개와 왼손의 검지를 펴서 자기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고 그분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뜻을 보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교황 성 우르바노 1세에게 자기 집을 성당으로 사용하도록 봉헌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시신은 아피아 가도에 있는 칼리스투스(Callistus) 카타콤바에 모셔졌고, 곧 많은 이들이 찾는 순례지가 되었다.

성녀 체칠리아에 대한 공경은 여러 세기를 지나며 교회 안에서 보편화되었고, 그녀의 행적들이 수많은 전설이 되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순교 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옛 “로마 순교록”이 성녀 체칠리아와 성 발레리아노 등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Marcus Aurelius Severus Alexander, 222-235년 재위) 치하에서 순교했다고 기록하고 있기에 그들의 순교 연대를 어느 정도 추정할 뿐이다.

9세기에 교황 성 파스칼 1세(Paschalis I, 2월 11일)는 로마의 트라스테베레(Trastevere)에 있던 성녀 체칠리아의 집터에 그녀를 기념해 새로 성당을 건립하고 카타콤바에 있던 성녀 체칠리아의 유해를 그곳으로 옮겨 모셨다(821년).

그리고 1599년 이 성당을 재건축하면서 유해를 확인하기 위해 관을 열었을 때도 성녀의 유해는 부패하지 않고 마치 살아 있는 듯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11월 22일 목록에서 그녀에 대해 전해주며 로마의 트라스테베레에 그녀의 이름으로 봉헌된 성당이 고대부터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성녀 체칠리아는 교회 음악과 음악인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원치 않았던 결혼식 때 성녀 체칠리아는 결혼 음악과 환호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고, 오히려 내심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는 순교록의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그래서 성녀는 음악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다고 여겨졌고, 1584년 로마에 음악원이 세워질 때 그 학원의 수호자로 선포되었다. 그러면서 성녀 체칠리아를 교회 음악의 수호자로 공경하는 것이 점차 보편화되었다. 이런 이유로 성녀 체칠리아의 문장은 오르간이 되었고, 교회 미술에서 천사들 곁에서 오르간이나 비올라 등을 연주하는 모습으로 주로 표현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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