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세례명/세례명 이름 찾기

루치아 여자세례명 12인 목록

피어나네 2023. 1. 3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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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세례명 루치아는 루시, 루시아, 루씨아, 루키아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여자세례명 루치아 12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루치아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루치아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본받고 싶은 세례명 찾기

루치아
천주교 여자세례명
12인 목록

 

 

 

 

루치아 여자세례명 목록

 

  1. 루치아 필립피니 (3월 25일)

  2. 윤운혜 루치아 (5월 29일)

  3. 루치아 (6월 24일)

  4. 루치아 (7월 6일)

  5. 루치아 (7월 27일)

  6. 루치아 (9월 16일)

  7. 박희순 루치아 (9월 20일)

  8. 김 루치아 (9월 20일)

  9. 김 루치아 (9월 20일)

  10. 루치아 (9월 26일)

  11. 루치아 (11월 15일)

  12. 루치아 (12월 13일)

 

루치아 천주교 여자세례명 12인 목록

 

 

1. 루치아 필립피니

 

  • 세례명 축일
    3월 25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Lucy Filippini

  • 신분과 직업
    동정녀,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72-1732년

 

 

루치아 필립피니 세례명과 같은 이름

루시, 루시아, 루씨아, 루키아.

 

 

루치아 필립피니 이야기

'신심 깊은 교사회'(Instituti Magistrarum Piarum)의 설립자인 성녀 루치아 필립피니(Lucia Filippini)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의 타르퀴니아(Tarquinia) 태생으로 어린 나이에 고아원에서 자랐다.

그러나 놀라운 신심과 뛰어난 은혜를 많이 받고 성장하였으므로 그 교구의 주교이신 마르칸토니오(Marc'Antonio) 추기경의 주목을 받고 몬테피아스코네(Montefiascone)로 초청받았다.

이곳은 수도자의 지도하에 훈련 교사들을 위한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성녀 루치아는 열과 성의를 다하여 일하던 중에 비테르보(Viterbo)에서 이와 비슷한 기관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던 성녀 로사 베네리니(Rosa Venerini, 5월 7일)를 만났다.

성녀 루치아는 애덕, 단정함, 영적인 일에 대한 확신, 용기 그리고 풍부한 상식 등이 크게 돋보였고 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업은 크게 번창해졌다.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의 강력한 희망에 따라 새로운 교육 센터를 세워야 할 입장이어서 그녀는 로마(Roma)로 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거룩한 교사’로 알려졌고, 성녀 로사 베네리니처럼 놀라운 설교 능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건강을 유지하지 못하여 병을 앓다가 운명하였다. 그녀는 1930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윤운혜 루치아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尹雲惠 Lucy

  • 신분과 직업
    양반, 부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1년 한국

 

 

윤운혜 루치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루시, 루시아, 루씨아, 루키아, 윤 루치아, 윤루치아.

 

 

윤운혜 루치아 이야기

윤운혜(尹雲惠) 루치아(Lucia)는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의 한감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어머니 이씨(李氏)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정광수 바르나바는 그의 남편이고, 윤점혜 아가타는 그의 언니이다.

윤 루치아는 나이가 차자, 여주에 사는 정 바르나바와 혼인하였는데, 비신자인 시부모의 반대로 혼인 문서는 주고받을 수 없었다.

또 시부모가 조상 제사에 참여하도록 강요할 때마다 그녀는, ‘교회에서 금하는 일이기 때문에 제사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를 거부하였다. 결국 윤 루치아는 남편과 함께 부모의 곁을 떠나 한양의 벽동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가 1799년이었다.

한양으로 이주한 뒤부터 윤 루치아 부부는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면서 교회 일을 돕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자기 집 마당 한편에 따로 집회소를 짓고,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모셔다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그 집회소를 교우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때 그곳에 자주 모이던 교우들은 홍필주 필립보, 김계완 시몬, 홍익만 안토니오, 강완숙 골롬바, 정복혜 칸디다 등이었다.

윤 루치아 부부는 전교에도 힘써, 어느 누구보다 많은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성모님의 상본을 그리거나 나무로 묵주를 제작하였고, 교회 서적들을 베껴서 교우들에게 팔거나 나누어 주었다.

그러던 가운데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 언니 윤점혜 아가타가 체포되자, 윤 루치아는 자기 부부도 머지않아 체포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그녀는 남편 정 바르나바를 피신시킨 다음, 교회 서적과 성물들을 다른 교우의 집으로 옮겨다 숨겨 놓았다. 그리고 혼자 남아 집을 지키다가 그해 2월에 체포되었다.

이후 윤 루치아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신문을 받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밝혀진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발설하지 않았으며, 배교도 거부하였다.

그러자 박해자들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이에 따라 윤 루치아는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 나가 5월 14일(음력 4월 2일)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형조에서 윤운혜 루치아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너는 남편을 도와 함께 행동하였으며, 시댁의 제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천주교 신자들과 이웃을 삼아 서로 교류하였고, 여성 교우들과 밤낮으로 얽혀 지냈으며, 교회 서적과 성화 · 성물들을 비밀리에 제작하여 이곳저곳으로 가지고 다니며 팔았다. 여러 사람을 유혹해 들여 온, 세상을 어지럽힌 죄는 만 번 죽어도 아쉽지 않다.”

윤운혜 루치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루치아

 

  • 세례명 축일
    6월 24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Lucy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로마

 

 

루치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루시, 루시아, 루씨아, 루키아.

 

 

루치아 이야기

성 파우스투스(Faustus)를 지도자로 하는 24명의 로마 순교자들의 순교 행전은 분실되었다. 그들은 성녀 루치아(Lucia)를 포함한 로마의 순교자들과 동일한 그룹으로 여겨진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루치아

 

  • 세례명 축일
    7월 6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Lucy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루치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루시, 루시아, 루씨아, 루키아.

 

 

루치아 이야기

전설적인 이야기이지만 로마 순교록은 이탈리아 캄파니아(Campania) 출신의 순교자 성녀 루치아(Lucia)와 같은 날에 그녀를 고문하고 괴롭혔던 지방장관 성 릭시우스 바루스(Rixius Varus)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루치아 성녀를 통해 회개하고 그리스도께로 나아갔으며 그녀와 함께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로마 순교록은 수백 명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성 릭시우스 바루스에 대해 많은 참조사항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학자들은 그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갖고 있고 또한 그의 회개 이야기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성 릭시우스 바루스는 릭시오바루스(Rictiovar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루치아

 

  • 세례명 축일
    7월 27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Lucy

  • 신분과 직업
    동정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350년 아멜리아

 

 

루치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루시, 루시아, 루씨아, 루키아.

 

 

루치아 이야기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의 카스텔 폰치아노 출신인 그녀의 이름은 루치아 부팔랄리(Lucia Bufalari)이며 리에티(Rieti)의 성 요한(Joannes)의 동생이다.

그녀는 오빠처럼 성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회에 입회하였고, 아멜리아 수도원의 원장도 역임하였다. 그녀는 독방에서 하느님만 섬기면서도 영웅적인 덕행을 닦았고, 또 가장 엄격한 고행을 실천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루치아

 

  • 세례명 축일
    9월 16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Lucy

  • 신분과 직업
    부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0년

 

 

루치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루시, 루시아, 루씨아, 루키아.

 

 

루치아 이야기

이탈리아 로마(Roma)의 순교자인 성녀 루치아(Lucia)는 중년을 넘은 부인이었고, 성 게미니아누스(Geminianus)는 젊은 교리교사였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를 신뢰할 수 없는 이유로 인해 1969년 그들에 대한 공경이 금지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박희순 루치아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朴喜順 Lucy

  • 신분과 직업
    동정 궁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1-1839년 한국

 

 

박희순 루치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루시, 루시아, 루치아, 박 루시아, 박 루치아, 박루시아, 박루치아.

 

 

박희순 루치아 이야기

성녀 박희순 루치아(Lucia)는 부유한 어느 외교인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육체의 아름다움과 총명하고 순진하며 솔직하고 상냥하여 누구에게나 칭찬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궁중에 불려 들어가 왕후의 시녀가 되었다. 

15세가 채 못 되었을 때 어린 순조 임금이 그의 매력에 몹시 끌려 유혹하려고 별별 수단을 다 썼으나 이 어린 처녀는 비록 외교인이었지만 비상한 지혜와 용기로 그 유혹을 물리 쳤는데, 이 소문은 궁중에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한문과 국문이 능하여 순조의 차녀인 복온 공주에게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루치아는 30세쯤 되었을 때에 처음으로 천주교 이야기를 듣고 곧 믿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궁중에 매인 몸일 뿐 아니라, 김 대비의 총애를 받고 다른 궁녀들을 보살피는 상궁의 자리에 있었고, 더욱이 선왕의 위패를 지키는 소임을 맡았기에 궁궐을 빠져 나오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러나 신앙 때문에 병을 빙자하여 궁중에서 나왔으나, 자기 아버지가 천주교를 대단히 싫어하였기 때문에 남대문 밖의 조카 집에 가서 살았다.

그때부터 사치와 환락 속에서 허송한 세월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후회하여 교리를 더욱 열심히 배우고 본분을 철저히 지키는 데 열심을 배로 하였으며, 특별히 옷과 음식에 있어서 많은 극기를 행하였다. 이리하여 그녀는 오래지 않아 조카의 가족을 입교시켰다.

1839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그녀는 서울의 큰살리뭇골이라는 동네에 집을 한 채 장만하여 전 아가타(Agatha)와 몇몇 여신자와 함께 살았다.

4월 15일 그들이 박해를 피할 방도를 의논하고 있을 즈음에 포졸들이 급습하자, 루치아는 태연히 “이는 천주의 성의이다.” 하고 말한 후 집안에 있는 식구들에게 모두 떠날 준비를 하라고 이르고 술과 안주를 내다 포졸들을 대접하고 옥으로 끌려갔다.

“너희들은 궁인으로 다른 여자들보다 높은 교육을 받았는데 그 사학을 믿을 수가 있단 말이냐?”

“저희들은 사학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이신 천주를 공경하고 섬기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무입니다.”

며칠 동안은 모두가 혹독한 고문을 용감하게 참아 받았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은 배교하였으나, 박 루치아와 전 아가타만이 꿋꿋하게 견디다가 형조로 이송되었다.

여기서 세 번 출두하여 그 때마다 곤장 30대씩을 맞았지만 , “이제야 오주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괴로움이 어떠하였는지 조금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며 태연하니, 그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이상히 여기고 형관은 또한 그것을 마술로 돌렸다고 한다.

5월 12일 “박녀(朴女) 희순은 신자들과 긴밀히 결합하여 밤낮으로 사도에 빠져 있으며, 그의 행동과 언어와 침묵까지도 요술과 마술뿐이요, 입으로 외는 것이나 손으로 표시하는 것이 하나도 사특한 저주 아님이 없는지라, 이에 확증을 얻어 사형을 선고하였으니 재가하심을 청하나이다.” 하는 주청을 형조에서 보냈고, 재가가 있었다.

박 루치아는 서소문 밖에서 다른 8명의 신자와 함께 순교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39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김 루치아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金 Lucy

  • 신분과 직업
    과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69-1839년 한국

 

 

김 루치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루시아, 김루시아, 김루치아, 루시, 루시아, 루씨아, 루키아.

 

 

김 루치아 이야기

성녀 김 루치아(金, Lucia)는 서울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날 때부터 불구였기 때문에 교우들 사이에 보통 ‘꼽추 루치아’로 통하였다. 

그녀가 언제 어떻게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시작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어렸을 때부터 교우였다고 하니 집안도 어느 정도 천주교와 관계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장성한 뒤에는 교우가 아닌 어느 외교인에게 출가하게 되었다. 

외교인 남편과 가족들은 그녀가 다른 교우들과 상종하는 것을 막고, 교우의 본분을 지키는 것도 방해하였다. 이 때문에 성녀 김 루치아는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다가 더는 견딜 수 없어서 남편의 집을 나와 여러 교우들의 집으로 피해 다녔다. 

교우들은 성녀 김 루치아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 주었다. 그녀는 교우들의 집안일을 도와주고 아이들과 병자와 허약한 이를 돌보며 자신이 받은 은혜에 보답하고, 자기의 열성으로 사람들을 감화시켜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되었다.

그녀는 배운 것이 없어 세속적으로는 무지한 부인이었지만 천주를 전심으로 사랑하고 영혼 구하기에 열중하여 여러 외교인을 입교시키기도 하였다. 그녀가 지닌 신앙의 논리는 상식적이고 그 대답 또한 풍요로웠다.

한 번은 어떤 외교인 양반이 “지옥이 그렇게 좁다고 하니 어떻게 사람을 그리 많이 집어넣을 수 있을꼬?” 하며 빈정댔다.

그러자 성녀 김 루치아는 “당신의 그 작은 마음이 비록 만 권의 서적을 품고 있어도 그것 때문에 좁다고 생각하신 적은 한 번도 없지요?”라고 반문하였다.

이 말을 들은 그 양반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천주교인들은 무식한 사람도 모두 조리 있는 말을 한단 말이야!” 하며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성녀 김 루치아는 기해년(1839년) 4월 중순에 붙잡혀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옥중에서도 그녀는 병자를 도와주며, 얼마 안 되는 자기 돈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며 애덕을 실천하였다.

포장이 다른 교우들의 이름과 주소를 대라고 하자, 그녀는 아무 말도 할 마음이 없고 죽기로 작정하였노라고 말할 따름이었다. 얼마 후 성녀 김 루치아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태형 30대를 맞았는데, 매가 그녀의 마른 몸에 닿자 마치 뼈를 때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고 한다.

이 형벌을 받은 후 옥에 들어오자마자 기진하여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리고 며칠 후 함께 갇혀 있던 여교우들의 간호를 받으면서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그해 9월 어느 날 71살의 나이로 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성녀 김 루치아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김 루치아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金 Lucy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8-1839년 한국

 

 

김 루치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누시아, 김 루시아, 김 루치아, 김누시아, 김루시아, 김루치아, 루시, 루시아, 루씨아, 루키아.

 

 

김 루치아 이야기

성녀 김 루치아(金, Lucia)는 1818년(순조 18년) 강원도 강촌(江村)에서 태어나 9살부터 천주교를 믿는 어머니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외교인이었던 아버지가 사망한 후 어머니와 언니와 함께 수계생활을 하며 14살 때 이미 동정을 지킬 결심을 하였다. 

재주와 용모가 뛰어났던 성녀 김 루치아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치른 후 자신을 받아 주는 교우들의 집에서 잔심부름하며 지냈다. 성녀 김 루치아는 나중에 함께 자수하여 순교한 성녀 이매임 데레사(李梅任, Teresia)의 서울 집에서 몇몇 여교우들과 함께 머물며 덕을 쌓았고, 이때 평생 동정을 지킬 결심을 더욱 굳게 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고 성 남명혁 다미아노(南明赫, Damianus)와 성 이광헌 아우구스티노(李光獻, Augustinus)의 어린 자녀들이 고문과 혹형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순교를 결심한 성녀 김 루치아는 함께 살고 있던 성녀 이매임 데레사, 성녀 이영희 막달레나(李英喜, Magdalena), 성녀 이정희 바르바라(李貞喜, Barbara), 성녀 김성임 마르타(金成任, Martha) 등과 함께 4월 11일에 포졸 앞으로 가서 묵주를 내보이며 자수하였다.

아직 어린 나이의 성녀 김 루치아는 포청과 형조에서 천진한 태도와 한결같은 신앙으로 모든 형벌과 고문을 참아 내어 특히 포장의 마음을 끌었다. 교리에 대한 심문 중에도 성녀 김 루치아는 적절한 비유와 논리정연한 답변으로 포장을 감동시켰다. 포장과 성녀 김 루치아 사이에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었다.

“너는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참으로 그 교(敎)를 믿을 수 있느냐?” “예, 저는 진정으로 이 교를 믿습니다.” “교를 버려라. 그러면 네 목숨을 살려주마.” “저희가 믿는 천주는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는 분이시니 모든 피조물의 큰 임금이시고 아버지이신 분을 어찌 배반하겠습니까? 만 번 죽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서 교를 배웠고 몇 살부터 믿었으며 공범은 몇이나 되느냐? 어째서 시집을 안 갔느냐? 영혼은 무엇이냐? 죽기가 무섭지 않으냐?”

“아홉 살 적부터 어머니 곁에서 천주교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엄금하기 때문에 저와 같이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하나도 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겨우 20살밖에 안 되었으니 시집을 아직 가지 않은 것이 이상할 것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처녀의 몸으로 혼인 문제에 대하여 대답한다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니 여기에 대해서는 더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 또 영혼은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신령한 실체입니다. 저도 죽기는 무섭습니다. 그러나 제가 살려면 천주를 배반하라고 하시니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죽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네가 말하는 영혼은 어디에 있단 말이냐?” “영혼은 육체 안에 있습니다.”

“너는 천주를 보았느냐?”

“시골에 사는 백성들이 임금님을 뵈옵지 않고서는 임금님이 계신 것을 믿을 수 없습니까?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을 보고 저는 그것들을 창조하신 대왕과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오, 네 말이 옳기는 하다. 그러나 네가 상감과 대신들보다 많이 안단 말이냐?”

“저희의 종교는 하도 아름답고 참된 것이어서 상감과 대신들이 연구하려 하신다면 기꺼이 믿게 되실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포장은 처음에는 부드러운 말로, 다음은 위협하는 자세로 그녀의 신앙심을 꺾어 보려고 오랫동안 노력했으나 창피만 당하자 다시 온갖 고문을 시켰다고 한다. 이윽고 그녀는 사형선고를 받자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지금까지 천주의 은혜로 형벌과 고통 가운데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결국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천주께서 언제 나를 부르실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하여 천주께 기도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나의 뒤를 따르시오. 나는 다만 천주의 부르심을 기다릴 뿐입니다.”

1839년 7월 20일 성녀 김 루치아는 다른 교우들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22살이었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성녀 김 루치아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루치아

 

  • 세례명 축일
    9월 26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Lucy

  • 신분과 직업
    동정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400년경? 칼타지로네

 

 

루치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루시, 루시아, 루씨아, 루키아.

 

 

루치아 이야기

루치아(Lucia)는 시칠리아(Sicilia) 섬의 칼타지로네에서 열심하고 기품 있는 부모의 딸로 태어났다. 하느님께서는 루치아를 어려서부터 특별히 돌보아주셨다. 

그녀가 여섯 살 때 한 번은 어머니와 함께 교외에 나갔다가 무화과열매를 따기 위해 나무에 올라갔다가 갑자기 폭풍이 몰려오며 번개가 쳐 나무가 산산이 부서지고 루치아 역시 죽은 듯이 땅에 떨어진 일이 있었다. 

그때 갑자기 한 노인이 루치아 옆에 서서 그녀를 일으켜 세우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그 노인은 바로 성 니콜라우스(Nicholaus)였다.

젊은 시절 늘 영적인 삶을 갈망하던 경건한 삶을 살던 루치아는 마침내 살레르노(Salerno)에서 프란치스코회 율수 3회에 입회하여 성녀 막달레나 수도원에 들어갔다.

수련자 때부터 그녀는 겸손과 순명의 모범이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에 동참하며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기쁨을 얻었다.

그녀의 성덕과 명성은 널리 퍼져나갔고, 사람들은 그녀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조언을 듣기 위해 사방에서 몰려왔다. 누구도 위안을 얻지 못하고 돌아가지 않았고, 많은 죄인들이 회개했으며, 경건한 영혼들은 더욱더 격려를 받았다.

오랫동안 고통스런 병을 앓던 루치아는 1400년경 9월 26일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그 후 그녀의 무덤에서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 그녀의 높은 성덕을 증명해 주었다. 교황 레오 10세(Leo X, 재위 1513-1521년)는 그녀에 대한 공경을 승인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루치아

 

  • 세례명 축일
    11월 15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Lucy

  • 신분과 직업
    동정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476-1544/1547년 나르니

 

 

루치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루시, 루시아, 루씨아, 루키아.

 

 

루치아 이야기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의 나르니에서 11명의 형제 중에 맏이로 태어난 루치아(Lucia)는 어릴 때부터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키로 작정하였으나, 그녀의 나이 14세 때에 거의 강제적으로 약혼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약혼반지를 버리고 완강히 거부하다가, 다음 해에 그 젊은이와 결혼하기로 약속하였다. 이 약속은 그녀가 고해신부의 충고도 있었지만 성모 마리아를 환시를 통하여 보았기 때문이었다.

남편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 부부는 명목상의 부부였지 실제상의 부부는 아니었다. 이렇게 3년을 살다가 남편이 아내에게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허용하자, 그녀는 도미니코 재속 3회의 수도복을 입고 비테르보(Viterbo)의 공동체에서 생활하였다.

여기서 그녀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다가 오상 성흔을 받았다. 매 수요일과 금요일마다 피가 흘렀는데, 3년 동안이나 계속되니 이를 숨길 수 없었다.

교황청과 의사들도 이 사실을 확인하였고, 그전의 남편도 이 현상을 보고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였다. 또 페라라(Ferrara)의 공작 에르콜레는 그녀를 위해 수도원을 지어주었는데, 이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23세였다.

그러나 1505년부터 그녀는 대중들 앞에서 자취를 감추고 39년을 수녀원 안에서만 살았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보기 위하여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1544년에 그녀가 운명했을 때 사람들은 그때까지 그녀가 살아있었음을 알고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루치아

 

  • 세례명 축일
    12월 13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Lucy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14년

 

 

루치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루시, 루시아, 루씨아, 루키아.

 

 

루치아 이야기

성녀 루치아(Lucia)는 시칠리아(Sicilia)섬의 시라쿠사(Siracusa)에서 부유한 귀족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배워 신심 깊은 아이로 성장했으나 불행히도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직 어린 소녀였던 성녀 루치아는 스스로 하느님께 동정을 서원했는데, 어머니조차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일찍이 남편을 잃고 홀로 된 어머니 에우티키아(Eutychia)는 한 귀족 청년의 청혼을 허락하며 딸의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원했다. 그러나 스스로 동정을 서원했던 성녀 루치아는 자신의 결심을 어머니에게조차 말하지 못하고 오로지 기도에만 매달렸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불치의 병에 걸리자 성녀 루치아는 카타니아(Catania)에 있는 성녀 아가타(Agatha, 2월 5일)의 무덤에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말을 듣고 어머니를 모시고 가서 간절히 기도하였다. 기도의 은총으로 어머니의 병이 치유되자 성녀 루치아는 동정으로 살고 싶은 뜻을 밝히고 어렵게 어머니의 허락을 받았다.

동정 생활을 허락받은 성녀 루치아는 자신의 결혼 지참금마저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러자 성녀 루치아에게 청혼했던 젊은이는 자신의 소유가 될 재산이 사라진 것에 분개해 성녀 루치아가 그리스도인이며 로마제국의 법을 어겼다고 고발하였다.

이때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가 절정에 달한 시기였기에 성녀 루치아는 즉각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녀는 배교를 강요하며 심한 고문을 가하는 재판관 앞에서 “당신이 황제의 뜻을 따르기를 원하듯 나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소원”이라고 당당히 자신의 신앙과 의견을 피력했다.

재판관은 도저히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매음굴로 보내라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여러 남자와 소 떼까지 이용해서 성녀 루치아를 끌어내려 했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녀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난 재판관은 성녀 루치아를 불에 태워 죽이려고 했으나 나무에 불이 붙지 않아 그 또한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박해자는 긴 칼을 성녀에 입속에 찔러 넣어 죽였다고 한다.

빛을 의미하는 ‘룩스’(Lux)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이름을 가진 성녀 루치아는 이런 모진 고문을 받을 때 눈알이 뽑히는 형벌까지도 받았다. 그러나 천사의 도움으로 뽑힌 눈알을 돌려받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성녀 루치아는 이름 그대로 어둠을 밝히는 빛나는 동정 순교자로서, 시력이 약하거나 시력을 잃은 이들과 눈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서 특별한 공경을 받고 있다.

이런 이유로 교회 미술에서 성녀 루치아는 순교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나 칼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자신의 두 눈알이 담긴 쟁반을 들고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많이 표현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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