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세례명 막달레나는 마들렌, 막딸레나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여자세례명 막달레나 16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막달레나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막달레나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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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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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인 목록
막달레나 여자세례명 목록
- 막달레나 (4월 10일)
- 마리아 막달레나 알브리치 (5월 15일)
- 마리아 막달레나 (5월 25일)
- 막달레나 소피아 바라 (5월 25일)
-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5월 29일)
- 이조이 막달레나 (5월 29일)
- 마리아 막달레나 포스텔 (7월 16일)
- 마리아 막달레나 (7월 22일)
- 김업이 막달레나 (9월 20일)
- 박봉손 막달레나 (9월 20일)
- 손소벽 막달레나 (9월 20일)
- 이영덕 막달레나 (9월 20일)
- 이영희 막달레나 (9월 20일)
- 조 막달레나 (9월 20일)
- 한영이 막달레나 (9월 20일)
- 허계임 막달레나 (9월 20일)
1. 막달레나
- 세례명 축일
4월 1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Madeleine - 신분과 직업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74-1835년 카노사
막달레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들렌, 막딸레나.
막달레나 이야기
1774년 3월 1일 이탈리아 베로나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성녀 막달레나(Magdalena)는 어려서 부친을 잃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그녀의 어머니는 자녀들을 남겨둔 채 재혼하여 떠나버렸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8세였다. 그의 형제들은 삼촌 밑에서 자랐는데, 삼촌의 학대 때문에 그녀는 입을 꼭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수녀가 될 마음으로 가까이 있던 카르멜회로 갔으나 성소가 없었던지 돌아오고야 말았다.
그 당시 나폴레옹이 전쟁을 일으켰는데 바로 그 나폴레옹이 그녀의 카노사 성을 둘러보러 왔을 때, 그녀는 용기를 내어 텅 비어 있던 성 요셉(Josephus) 수도원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는 쾌히 승낙하였다. 그녀는 여기서 가난한 사람과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사업을 착수하였다.
또 성녀 막달레나가 베네치아(Venezia)로 갔을 때에는 빛나는 옷을 입은 6명의 수도자들에 둘러싸인 성모님의 환시를 보고 즉시 성모의 명을 따라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 모든 사업은 나폴레옹의 도움이 컸었다. 이리하여 그녀는 ‘애덕의 딸 카노사 수녀회’를 설립한 것이다. 비오 11세(Pius XI)는 그녀를 이렇게 평하였다.
“많은 이들이 자선사업을 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으나, 가난한 사람과 더불어 가난해 지기는 지극히 어려운데 그녀는 실제로 가난하였다.”
그녀는 1941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8년 10월 2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마리아 막달레나 알브리치
- 세례명 축일
5월 15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Magdalen Albrizzi - 신분과 직업
수녀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465년
마리아 막달레나 알브리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들렌, 막딸레나, 메리, 미르얌, 미리암, 알브리찌.
마리아 막달레나 알브리치 이야기
이탈리아의 코모(Como)에서 귀족 가문의 딸로 태어난 마리아 막달레나 알브리치(Maria Magdalena Albrizzi)는 부모가 사망한 후 세상과 결별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고향에 있는 성녀 마르가리타(Margarita) 수녀원에 입회할 마음으로 문 앞에 당도했을 때, “막달레나야, 브루나테로 가야한다.”는 음성을 세 번이나 들었다.
브루나테(Brunate) 산속에 있는 수녀원은 불과 몇 명만 살던 매우 쓸쓸하고 초라한 움막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입회한 후 이 공동체는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그녀가 원장이 된 후 수녀회는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회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후 그곳으로 소속을 변경하였다. 비록 생필품이 부족하여 문전걸식을 하면서도 그녀와 수녀들은 부랑인들과 어려운 처지에 있는 처녀들을 위해 집을 내줄 정도로 환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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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수도자들에게 잦은 영성체를 권장하였다. 그녀가 기적을 많이 행하고 예언과 치유의 은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많은 이들의 방문을 받아야만 했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907년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마리아 막달레나
- 세례명 축일
5월 25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Magdalen - 신분과 직업
수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566-1607년 팟지
마리아 막달레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들렌, 막딸레나, 메리, 미르얌, 미리암.
마리아 막달레나 이야기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의 최고 명문가인 팟지 집안에서 태어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gdalena)는 태어난 다음날 카타리나(Catharina)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어릴 때부터 선행과 신심생활에 큰 관심을 보여 아이들을 모아 놓고 기도와 교리를 가르치기도 하고 성당에서 자주 기도하였다.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기를 좋아했던 그녀는 무엇보다도 성체께 대한 사랑과 존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영성체를 간절히 원하여 특별 관면을 받고 10세 때에 첫영성체를 하고, 12세 때 동정 서원을 하였다.
그 후 피렌체에 있는 산 조반니노(San Giovannino) 수녀원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더욱 열렬한 신앙인이 되었고 수도 성소의 뜻을 굳혀 나갔다. 부친은 딸을 결혼시키려고 하였지만, 그녀는 극렬히 반대하여 1582년 12월 1일 피렌체에 있는 천사의 성 마리아(Santa Maria degli Angeli) 카르멜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1583년 1월 3일 그녀는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1584년 3월 초 병을 얻은 후 놀라운 탈혼이 반복되었는데, 거의 매일 성무일도를 바친 뒤 2-3시간 동안은 탈혼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녀의 병은 아주 위중했다. 동료 수도자가 아프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녀는 십자가를 가리키면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생각하고, 나의 구원을 바라보면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고 대답하여 그녀의 뛰어난 하느님 사랑을 표현하였다.
1585년 5월 17일 금요일 그녀는 이전보다 훨씬 긴 탈혼에 빠졌는데, 거의 40시간이나 계속되었다. 그 후 6월 16일 삼위일체 대축일 이후 5년 동안 영적 생활의 무미건조와 시련을 겪기도 했다.
1586년 10월 수련기를 마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극도의 고통을 맛보던 중 1590년 부활절에 50일 동안 금욕생활을 하라는 주님의 뜻에 따라 오로지 빵과 물로만 지냈고, 이러한 고행의 보답으로 하느님과의 일치의 선물을 받게 되었다.
그녀는 예언하는 은혜를 받은 것 외에도 먼 곳에 있는 각기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고, 탈혼 상태에 있을 때 어떤 경우에는 무기력해지는 때도 가끔 있었다.
1604년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원장으로 선출되었는데, 얼마 후 병을 얻어 이전에 느껴 본 적이 없는 심신의 고통으로 3년을 보내야 했다. 결국 오랜 고통 뒤에 그녀는 1607년 5월 25일 41세의 나이로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1669년 4월 28일 교황 클레멘스 9세(Clemens IX)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막달레나 소피아 바라
- 세례명 축일
5월 25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Madeleine Sophie Barat - 신분과 직업
설립자, 수녀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779-1865년
막달레나 소피아 바라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들렌, 막딸레나, 소피 바라.
막달레나 소피아 바라 이야기
성녀 막달레나 소피아 바라(Magdalena Sophia Barat, 또는 마들렌 소피 바라)는 술통 제조업자인 아버지 자크 바라(Jacques Barat)와 어머니 마들렌 푸페(Madeleine Foute)의 막내딸로서 1779년 12월 12일에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의 즈와니(Joigny)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열한 살 위의 큰 오빠 루이(Louis)로부터 라틴어와 고전문학, 신학과 철학 등 좋은 교육을 받았는데, 루이는 나중에 예수회 사제가 되었고 동생에게 항상 엄격한 규율과 벌을 주었다고 한다. 루이는 동생의 교육을 위해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6세 된 성녀 막달레나를 파리(Paris)로 데리고 가서 여러 젊은 여성들과의 만남과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대혁명의 여파로 전통적인 가치와 신앙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을 부르심의 징표로 감지한 성녀 막달레나는 21세 되던 때에 오빠의 소개로 예수회의 조제프 바랭(Joseph Varin) 신부를 만나 장차 성심 수녀회(Society of the Sacred Heart)를 창설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바랭 신부는 성녀 막달레나를 ‘예수 성심’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수녀회의 초석이 될 적임자로 생각했다. 그래서 1800년 11월 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에 성녀 막달레나와 세 명의 동료들이 예수 성심께 서원함으로써 성심 수녀회의 설립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성심 수녀회는 예수 성심의 무한한 사랑에 보답하고 그 사랑을 널리 알리는 것을 근본정신으로 하며, 특히 청소년 교육을 통하여 설립 목적을 구현해가고자 했다.
그래서 설립 이듬해인 1801년 파리 북쪽의 아미앵(Amiens)에 그들의 첫 수녀원과 성심학교를 세웠고, 1802년에 성녀 막달레나는 비록 회원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지만(당시 23세) 장상으로 선출되었다.
1806년 성심 수녀회 1차 총회에서 초대 총원장으로 선출된 성녀 막달레나는 일생 동안 수녀회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성심 수녀회는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1804년에는 그르노블(Grenoble)의 성모 방문 수녀회 공동체를 흡수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1818년 미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성심 수녀회의 교육 사업을 활발히 전개한 성녀 로사 필리피나 뒤센(Rosa-Philippine Duchesne, 11월 17일)도 끼어 있었다. 이 수녀회는 1826년에 교황 레오 12세(Leo XII)로부터 공식 승인을 받았다.
성심 수녀회는 발전을 거듭하였고 유럽 각국 주교들의 요청에 의해 여러 나라에 성심학교를 설립되었다. 1830년 프랑스의 7월 혁명으로 인해 푸아티에(Poitiers)의 수련소가 폐쇄를 당하자 성녀 막달레나는 스위스에 새로운 수련소를 세우기도 했다.
1865년 5월 25일 주님 승천 대축일에 그녀가 파리(Paris)에서 선종할 즈음에 성심 수녀회는 유럽과 북아메리카, 중남미 등 16개 나라에 122개의 수녀원과 많은 학교가 있었다.
그녀는 1908년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시복되었고, 1925년 5월 2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성녀 막달레나의 특성은 예수 성심에 대한 돈독한 신심과 사랑과 겸손의 실천이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金允德 Agatha Magdalene - 신분과 직업
부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65?-1815년 한국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아가타 막달레나, 김아가타 막달레나, 마들렌, 막딸레나, 아가다, 아가따.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이야기
경상도 상주의 은재(현, 경북 문경시 가은읍 저음리)에서 태어난 김윤덕(金允德) 아가타 막달레나(Agatha Magdalena)는, 장성한 뒤에 고향 인근에 전파된 복음을 전해 듣고 입교하였다. 그리고 어느 때부터인가 노래산 교우촌(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리)으로 이주하여 그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김 아가타 막달레나는 1815년 2월 22일경, 교우들과 함께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내던 중에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여러 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문초하던 관헌이 ‘대관절 무엇 때문에 죽으려 하느냐?’고 물으면, 그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아무리 비천하고 무식하다고 하더라도, 조물주이신 천주의 은혜를 몰라보고 그분을 배반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렇게 신앙을 증언한 김 아가타 막달레나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대구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던 중에 마음이 약해져 신앙을 배반하기에 이르렀다.
이내 감사는, 그녀를 석방해 주도록 하였고, 그녀는 막 감영의 대문을 나가려던 차에, 안동에서 이송되어 온 김종한 안드레아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 김 안드레아는 한숨을 내쉬면서 ‘이처럼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힘써 권면하였다.
김 안드레아와 짧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김 아가타 막달레나의 신앙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다시 감영으로 들어간 그녀는 포졸들을 밀치고는 서슴없이 관장 앞으로 나아갔다. 놀란 관장이 ‘방금 나갔는데, 왜 다시 들어왔느냐?’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까는 혹형을 견디기가 너무 어려워 천주를 배반하였지만, 이것은 크나큰 죄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뉘우치고 다시 관장님 앞으로 온 것입니다. 원하시면 저를 죽여 주십시오. 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진실한 신자입니다.”
관장은 화가 나서 미친년으로 몰아 내쫓게 하였다. 그러나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는 다시 들어와서 이전의 배교를 다시 한 번 큰소리로 취소하였고, 관장은 화가 나서 심하게 매질을 하도록 하였다.
그녀의 살점은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으며, 얼마 되지 않아 뼈가 허옇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내 그녀는 의식을 잃은 채 옥으로 끌려갔는데, 옥에 들어가자마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때가 1815년 음력 4월 말, 또는 5월 초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50세가량이었다.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이조이 막달레나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李召史 Magdalene - 신분과 직업
과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8-1840년 한국
이조이 막달레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들렌, 막딸레나, 이 막달레나, 이막달레나.
이조이 막달레나 이야기
이조이(李召史) 막달레나(Magdalena)가 태어난 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장성한 뒤에 그녀는 금산 고을에 살던 김성서 프란치스코의 아우와 혼인을 하였으나, 19세 때 자식도 없이 과부가 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죽기에 앞서 그녀에게 십계명을 열심히 지키도록 당부하였다.
남편이 사망한 뒤부터 이 막달레나는 오로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시부모에 대한 효도에만 전력을 기울였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보다는, 천주께서 비교적 덕을 닦기 쉬운 처지에 있게 하신 것을 자주 감사하였다.
그녀는 비록 가난하였지만 자발적으로 대재와 소재를 지키면서 극기를 실천하였으며,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 힘썼고, 무엇보다도 무식한 이들을 가르치는 귀찮은 일까지도 기꺼이 맡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 이 막달레나는, 전라도 광주에 있던 홍재영 프로타시오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던 교우들과 같이 체포되었다. 이내 전주로 압송된 그녀는 문초를 받는 동안 과감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고, 갖가지 형벌에도 전혀 굴복하지 않았다.
옥으로 돌아온 뒤 이 막달레나는 자신의 괴로움을 전혀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함께 있는 신자들이 끝까지 신앙을 증언할 수 있도록 권면하는 데에만 마음을 썼다. 그녀는 함께 있는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무엇보다 천주님과 더불어 솔직하게 행동합시다. 그분에게 충실하여 모두 함께 천국에 올라갑시다. 하나도 빠지는 사람이 없도록 합시다.”
이어 감사 앞으로 끌려가 형벌을 당하는 중에도 이조이 막달레나는 한결같이 굳센 마음을 나타냈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40년 1월 4일(음력 1839년 11월 30일)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32세였다. 그녀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이조이는 천주교 신앙을 신봉하여 천당 지옥설을 깊이 믿었으며, 죽은 남편의 훈계를 버리기 어렵다고 하였다. 만일 죽지 않고 살게 된다면 다시 천주교 교리를 배우겠다고 하였으니, 그 독함이 이를 데가 없다. 또 오직 빨리 죽기만을 원한다고 하였으니, 지체 없이 사형에 처한다.”
이조이 막달레나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마리아 막달레나 포스텔
- 세례명 축일
7월 16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Magdalen Postel - 신분과 직업
설립자, 수녀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756-1846년
마리아 막달레나 포스텔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들렌, 막딸레나, 메리, 미르얌, 미리암, 포스뗄.
마리아 막달레나 포스텔 이야기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포스텔(Maria Magdalena Postel)은 1756년 11월 28일 프랑스 노르망디(Normandie)의 바르플뢰르(Barfleur)에서 요한 포스텔(Jean Postel)과 테레사 르발루아(Therese Levallois) 사이에서 태어나 율리아 프란치스카 카타리나 포스텔(Julie Francoise-Catherine Postel)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다른 아이들보다 4년이나 빠른 8살 때 첫영성체를 했다. 그 후 지방 학교를 나온 후 베네딕토 수녀회에서 교육을 받으며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생활을 소망하였으나 결국 사적인 서원만 발하였다.
바르플뢰르로 돌아온 뒤에 그녀는 여학교를 개교했는데, 이 학교는 프랑스 혁명 동안에 성직자법을 거부하는 교회 인사들의 지하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혁명의 와중에서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며 기도와 보속을 실천하던 그녀는 1798년에 작은 형제회 3회원으로 입회하였다.
마침내 프랑스 혁명이 끝나자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포스텔은 다른 동료들과 더불어 혁명의 후유증, 특히 신자들의 종교적 무관심을 치유하고 교육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그래서 여성 교우들을 모집하고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여자 수도회를 설립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그녀의 노력이 계기가 되어 1807년 61세의 늦은 나이에 ‘자비의 그리스도인 학교 수녀회’(The Sisters of Christian Schools of Mercy)를 설립하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새로운 이름을 수도명으로 선택하였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포스텔은 수녀회 설립 초기에 많은 난관에 부딪혔지만 절대로 좌절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극복하였다.
결국 1832년 생-소뵈르-러-비콩트(Saint-Sauveur-le-Vicoste)에 본원을 개설하였고, 1837년에 작은 형제회 제3회의 규칙을 기초로 해서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다.
그 후 수녀회는 날로 발전해 나갔고, 설립자는 거의 40여 년 동안 수녀회를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다가 1846년 7월 16일 본원에서 선종하였다.
그녀가 설립한 수녀회는 1859년 교황 비오 9세(Pius IX)로부터 일부 승인을 거쳐 1901년에 완전한 승인을 받았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포스텔은 1908년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25년 5월 24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마리아 막달레나
- 세례명 축일
7월 22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Magdalen - 신분과 직업
신약인물, 예수의 제자, 부인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경
마리아 막달레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들렌, 막딸레나, 메리, 미르얌, 미리암.
마리아 막달레나 이야기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gdalena)는 복음서에서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루카 8,2)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갈릴래아 호수 서쪽에 있는 어촌 마을인 막달라(Magdala) 출신의 마리아라는 뜻으로 지명을 이용해 이름을 수식한 것으로 보아 가까운 친척이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이름은 신약성경에서 모두 12번 나온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치유 은총으로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뒤에 비슷한 처지의 다른 여인들과 함께 자기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을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었다(루카 8,2-3).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마지막까지 십자가 곁을 지켰고(마태 27,56; 마르 15,40; 요한 19,25), 저녁때가 되어 아리마태아 출신의 부유한 사람이자 의회 의원인 요셉(Josephus, 3월 17일)이 빌라도의 허락을 받고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 받아 바위를 깎아 만든 자기의 새 무덤에 모실 때도 그 맞은쪽에서 지켜보고 있었다(마태 27,61; 마르 15,47).
안식일 다음 날, 주간 첫날 이른 아침에 몇몇 여인과 함께 향료를 들고 무덤으로 달려갔다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고 그리스도의 시신이 없음을 발견했으며(마태 28,1; 마르 16,1; 루카 24,1-3; 요한 20,1-2), 무덤 밖 동산에서 슬피 울고 있을 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시고 “마리아야!” 하며 부르시는 부활하신 스승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사도들에게 전할 사명을 받고 제자들에게 가서 그 소식을 전하였다(요한 20,11-18).
복음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다른 여러 마리아 중에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와 분명하게 같은 인물로 제시된 이는 없다. 단지 서방 교회 전통에서는 오래전부터 예수님께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루카 7,36-50)와 성녀 마르타(Martha, 7월 29일)와 성 라자루스(Lazarus, 7월 29일)의 동생인 베타니아(Betania)의 마리아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와 같은 인물로 보아왔다.
오리게네스를 비롯한 초기 성서학자들은 이들을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보았지만,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가 591년의 강론에서 루카 복음 7장의 ‘죄 많은 여자’를 ‘창녀’로 잘못 해석하고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와 요한 복음 11장 2절의 ‘베타니아의 마리아’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와 같은 사람으로 간주하면서 이런 전통이 생겼다.
그 후 서방 교회에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만나 창녀 생활을 청산하고 회개한 인물로서 참회와 속죄의 이상적 모델로 여겨져 왔다. 실제로 많은 예술가가 그러한 모습으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를 표현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과 전통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이미지를 왜곡하는 부정적 결과를 가져왔다. 가톨릭 교회는 1969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례 개혁을 진행하면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가 창녀였다는 오해를 철회하고, 11세기 로마에서 시작해 다른 곳으로 확산하여 7월 22일에 로마 보편 전례력에서 기념해 온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를 위한 기념일은 유지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성경 안에서 드러나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의 분명한 모습, 즉 일곱 마귀에서 해방된 후 헌신적으로 예수님과 그 일행의 시중을 들었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시는 마지막 순간에도 주님 곁을 지켰으며, 주간 첫날 이른 아침에 무덤으로 가서 빈무덤을 발견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나 경배했고, 주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다른 사도들에게 알리라는 사명을 예수님께 직접 받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동방 교회 전승은 10세기부터 ‘향유를 들고 다니는(Mirofora)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를 기념하면서 베타니아의 성녀 마리아와는 다른 사람으로 보아왔다.
그 전승에 따르면 주님 승천과 성령 강림 이후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성모 마리아와 사도 성 요한(Joannes, 12월 27일)과 함께 에페수스(Ephesus)로 가서 선교하다가 선종한 후 그곳에 묻혔다고 한다.
그런데 프랑스 교회의 전승은 이와는 다르다. 그에 따르면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성녀 마르타와 성 라자루스와 동료들과 함께 박해를 피해 배를 타고 이스라엘을 떠나 표류하다가 프랑스 남서부 프로방스(Provence) 지방에 도착해 마르세유(Marseilles)에서 복음을 전하고 알프스 산의 한 동굴에서 30년 동안 은수자로 살다가 선종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의 유해 또한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 지역에 매장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프랑스 전승은 서방 교회의 오랜 전통대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와 베타니아의 성녀 마리아를 같은 사람으로 보고 기념해 왔다.
옛 “로마 순교록” 역시 7월 22일 목록에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해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주셨고 부활의 첫 목격 증인이 된 인물로 마르세유에서 선종했다고 기록했고, 7월 29일 목록에서는 구세주를 환대한 성녀 마르타에 대해 그녀의 동생인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와 죽음에서 소생한 성 라자루스와 함께 설명하며 프랑스 남동부 타라스콩(Tarascon) 지역에서 선종했다고 기록하였다.
2001년 발행되어 2004년 일부 개정된 최신 “로마 순교록”은 7월 22일과 29일의 관련 목록에서 프랑스 전승과 관련된 언급을 삭제하고, 7월 29일에 성녀 마르타뿐만 아니라 죽었다가 주님에 의해 소생한 성 라자루스와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던 성녀 마리아를 함께 기념하도록 함으로써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와 베타니아의 성녀 마리아를 동일 인물로 보던 전통에서 벗어났다.
2016년 6월 3일 예수 성심 대축일에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예수님 부활의 첫 목격자인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의 의무 기념일을 축일로 승격하는 교령을 발표했다.
경신성사성 차관 아서 로시 대주교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단히 사랑했고, 아울러 그분에게 사랑받은 이 여성의 중요성이 자비의 희년에 새롭게 조명되길 바란다.”라며 “이 결정은 여성의 존엄성과 새로운 복음화, 그리고 하느님 자비의 위대함에 대한 깊은 성찰의 결과”라고 밝혔다.
그리고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특히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에게 주님의 부활 소식을 알림으로써 그들이 용기를 내어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도록” 예수님께 받은 영예로운 사도 직무를 수행했기에 “새로운 복음화의 여정을 걷는 교회는 성녀의 이런 특별한 역할에 주목하고 전례를 통해 공경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했다.
이런 취지에 따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을 위해 마련된 새 감사송은 ‘사도들을 위한 사도’(Apostolorum Apostola)라는 제목을 부여받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과 연구 결과를 통해 밝혀진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의 행적과 역할을 정리하여 작성되었다.
“… 살아 계신 주님을 사랑하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주님을 뵈었으며 무덤에 묻히신 주님을 찾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경배하였나이다. 주님께서는 동산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어 사도들 앞에서 사도 직무의 영예를 주시고 새로운 삶의 기쁜 소식을 세상 끝까지 전하게 하셨나이다. …”
감사송 본문은 특별히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가 주님 부활의 첫 증인이라는 사실과 사도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증언하는 첫 번째 사람으로서 사도 직무의 영예를 주님에게 직접 받았음을 강조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김업이 막달레나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金業伊 Magdalen - 신분과 직업
과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74-1839년 한국
김업이 막달레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막달레나, 김막달레나, 마들렌, 막딸레나.
김업이 막달레나 이야기
성녀 김업이 막달레나(Magdalena)는 어느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나이가 들면서부터 동정을 지키려고 하였으나 부모들의 강압에 못 이겨 어느 교우에게 출가하였다.
그러나 중년에 들어서 남편과 자녀를 잃고, 서울 근교 애고개로 이사하여 망건을 만들면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생계를 유지하며 어렵게 살았다. 시어머니의 성격이 괴팍하고 또 질시와 냉대를 받았지만, 그녀는 주님을 생각하며 희생과 극기로써 이를 이겨냈다.
시어머니가 죽은 후부터 그녀는 더욱 열심한 생활을 했고,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으며, 위독한 외교인 아이들에게 대세를 주고, 교우 자녀들에게도 교리를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1836년 10월 어느 날 김 막달레나는 관헌에게 체포되어 포청으로 끌려갔다. 그 후 형조의 옥에서 3년을 지냈는데, 갖은 형벌을 받았어도 육순이 넘는 그녀는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마침내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66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박봉손 막달레나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朴鳳孫 Magdale - 신분과 직업
과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6-1839년 한국
박봉손 막달레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들렌, 막딸레나, 박 막달레나, 박막달레나.
박봉손 막달레나 이야기
성녀 박봉손 막달레나(Magdalena)는 서울의 어느 외교인 집안에서 태어났고, 15세 되던 해에 시골로 시집간 후 딸 둘을 낳고는 과부가 되었다. 이어서 시부모마저 여의게 되니 하는 수 없이 서울 친정으로 돌아왔다.
이때 친정에는 김 체칠리아라는 훌륭한 여교우가 새어머니로 와 있어서, 박봉손은 새어머니의 권고와 가르침을 받아 1834년경에 입교하고 수계생활을 시작하였다.
입교한 후 그녀는 남대문 밖 이문골에 살고 있던 외삼촌 김사문의 곁방살이를 하게 되었다. 집은 작은데다가 가난한 사람, 늙은이, 어린이 등 10여 명이 동거하고 있었으므로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 게다가 교우들의 왕래가 잦고 보니 번잡함이 그지없었다.
그러나 박봉손은 그런 중에도 궂은 일은 자기가 도맡아하고 쉬운 일은 남에게 사양하였으며, 번잡한 중에서도 즐거워하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는 적이 없었다. 그녀는 온갖 시련 속에서도 마음이 한결같고 또 지극히 겸손했다.
입교한 지 5년 만에 박해가 시작되자 외삼촌과 함께 남대문밖 이문골에 살고 있던 다른 사람은 모두 피신했으나, 박봉손은 혼자 집을 지키며 순교의 마음을 굳히고 포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1839년 3월 중순 어느 날, 다른 날처럼 기도하고 있다가 포졸들이 달려들어 외삼촌과 박봉손을 함께 잡아갔다.
박봉손은 오라에 묶인 채 포장 앞에 끌려나와 첫 번째 문초를 받았다. 포장은 “배교하고 집사람들의 간 곳을 대라. 그리고 책과 동교인들을 대지 않으면 심하게 때리겠다.”고 위협하였다.
이에 그녀는 “배교는 할 수 없고, 집안사람은 저도 모르게 피신하여 그들이 간 곳을 알 수 없으며, 동교인과 책에 대해서도 아는 바 없나이다.” 하고 단호히 응수하였다.
그러나 포장은 피신한 사람들의 행방을 알아내고도 형벌을 더하고 주리를 틀게 하였으나, 박봉손은 혹형 중에서도 침착하게 “과연 어떤 사람이 내왕했는지 모릅니다.”라고 대답할 뿐 아무도 고발하지 않았으며 또한 마음을 조금도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형조로 이송된 후에도 형관이 이제라도 단념하면 놓아 주겠다고 달래보았으나 그녀는 “단념하려 했으면 벌써 포청에서 했을 것인데 여기까지 온 것은 위주 치명하고자 함이니 국법대로 죽여주십시오.” 하고 대답할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리하여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 치명하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44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손소벽 막달레나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孫小碧 Magdalen - 신분과 직업
부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1-1840년 한국
손소벽 막달레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들렌, 막딸레나, 손 막달레나, 손막달레나.
손소벽 막달레나 이야기
성녀 손소벽 막달레나(Magdalena)는 1839년 12월 29일에 순교한 최창흡 베드로(Petrus)의 아내요, 최영이 바르바라(Barbara)의 어머니이며, 조신철 카롤루스(Carolus)의 장모이다.
그녀는 신앙 때문에 먼 곳으로 귀양을 간 어느 열심한 신자의 딸로,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녀는 오랫동안 신자가 없는 지방에서 살았고 또 견디기 힘든 박해를 당했기 때문에 감히 교우들과 상종하지 못하다가, 늦게야 성교회의 참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17세 때에 당시 유명한 교우이던 최창흡 베드로에게 시집을 갔다. 그 후 막달레나는 자녀 11명을 낳았으나, 대부분이 어려서 죽고 맏딸 바르바라와 두 살짜리 작은 딸만 남았다.
손 막달레나 가족은 콜레라가 창궐하던 1821년경에 세례를 받았고, 선교사들이 입국한 후부터는 더욱 신앙생활에 열심하여 성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던 중 기해년 7월에 박해가 극에 달하여 많은 교우들이 체포될 때, 그녀는 포교의 손을 피하기 위하여 여러 친척들과 같이 숨어 있었으나 결국 남편과 딸과 함께 잡혔다.
그런데 사위인 조 카롤루스가 중국에서 가져온 교회 물건들이 그녀의 집에서 압수되었기 때문에 포장은 7회에 걸쳐 엄한 심문과 형벌을 가하였다.
포장은 태장 260대를 때리고, 여러 번 주리를 틀어보았으나 그녀의 마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또다시 포장이 배교를 강요하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 목숨은 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제게 주신 천주의 것이니 그분만이 아무 때라도 그것을 도로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을 주재하시는 천주를 위해서 죽어야 한다면 죽겠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이때 막달레나는 두 살짜리 젖먹이 막내딸을 옥에까지 데리고 갔었는데, 그 가엾은 어린 것이 공기도 부족하고 햇볕도 먹을 것도 없는 곳에 있는 것이 어머니 된 마음에 언짢고 또 용기가 꺾일지 몰라 어린 딸을 품에서 떼어내어 읍내에 있는 친척집에 보냈다고 한다.
막달레나는 형조로 이송되어 또다시 심문과 고문을 받았으나, 그 전과 같이 변함없는 용기를 보여 바로 그날 사형이 언도되었다. 이리하여 그녀는 남편이 순교한 지 1개월 정도 후인 1840년 1월 31일에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40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이영덕 막달레나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李榮德 Magdalen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2-1839년 한국
이영덕 막달레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들렌, 막딸레나, 이 막달레나, 이막달레나.
이영덕 막달레나 이야기
성녀 이영덕 막달레나(Magdalena)는 외교인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고, 1840년 1월에 순교한 이인덕 마리아의 언니이며, 그녀의 어머니는 조 바르바라(Barbara)이다. 원래 명문가의 자녀로 태어났다고 하나 그 가족의 내력은 알 수 없으며, 더욱이 체포 당시에는 곤궁한 지경에 있었다 한다.
어려서부터 막달레나는 어른처럼 점잖고 성품이 매우 온화하였으며, 외할머니가 열심한 교우였으므로 천주교의 진리를 쉽게 배워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천주교를 몹시 꺼리던 아버지 때문에 모든 것을 비밀리에 진행해야 하였다.
그러던 중에 교리를 가르쳐 주던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가 지방으로 여행을 떠난 틈을 타서 막달레나는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몰래 성세성사를 받았다. 이 때문에 아버지는 더욱 더 천주교를 미워하고 반대했기 때문에 그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막달레나가 나이 스무 살이 되자 부친은 혼기를 놓칠세라 어떤 비신자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하였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동정을 지키려고 하였기 때문에 꾀병을 부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런 핑계에 넘어가지 않고 엄하게 다루면 복종하리라 생각하여 딸을 매우 학대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의 완고함을 꺾어보려고 혈서를 써서 부친에게 드렸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막달레나와 아버지의 갈등은 거의 10여년이나 계속되었는데, 그녀는 혼인을 모면할 아무런 방법도 발견하지 못하게 되자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에게 집을 떠날 허락을 청하였다.
앵베르 범 주교는 “그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요. 집에 남아 있는 것이 더 좋겠소. 하지만 아버지가 원하는 혼인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였기 때문에 그녀는 집에 머물러 있었지만, 몇 달 후에는 혼인을 해야 할 급박한 상황에 직면하였기 때문에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집을 몰래 빠져나와 친한 신자 집으로 피신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앵베르 주교는 아직 조선 풍속을 잘 몰랐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양반집 부인이나 처녀들이 집을 나갔다가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 죽음의 길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주교는 그들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고 회장들에게 부탁하여 이 일을 잘 해결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 막달레나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은 조그마한 집에 살면서 굶주림과 추위로 많은 고생을 하였지만, 이제는 마음 놓고 천주교를 믿을 수 있었기 때문에 곤궁과 고통을 오히려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막달레나는 주님께 감사하며 어려운 가운데서도 동정을 지키며 살았는데, 기해년 7월경에 그들은 살던 집에서 체포되었다. 포도청에 붙잡혀 온 이 막달레나는 주리를 틀리고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시달렸으며 옥중의 모든 고초를 당해야만 했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자기와 같은 옥에서 고초를 당하던 어머니가 결국 열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드디어 사형선고가 내려지고 바라던 순교의 복된 영광의 날이 다가오자, 이 막달레나는 안온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해 순교하였다.
때는 1839년 12월 29일이요, 그녀의 나이는 28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이영희 막달레나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李榮喜 Magdalen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9-1839년 한국
이영희 막달레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들렌, 막딸레나, 이 막달레나, 이막달레나.
이영희 막달레나 이야기
성녀 이영희 막달레나(Magdalena)는 시흥군 봉천리에 살던 가난한 양반 집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 허 막달레나와 언니 이 바르바라(Barbara)와 고모 이 테레사(Teresia)는 모두 열심한 신자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완고한 외교인이라 부친 몰래 신앙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장성하자 아버지는 딸을 출가시키려고 하였고, 막달레나는 동정을 지킬 결심을 하였기 때문에 집을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집에는 여신자 한 사람이 하인으로 있었는데, 어느 날 저녁 막달레나는 자신의 결심을 알린 후 “여기서 서울까지는 30리 길이고, 나는 길을 모르지만 아버지가 내일 서울로 가시니 네가 그 뒤를 잘 따라가 자취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라, 그러면 나는 또 네 뒤를 따라가겠다.”고 말하였다.
집은 숲이 우거진 산 가운데에 있었으므로 막달레나는 숲 가운데로 뚫고 들어가 고의적으로 몸에 몇 군데 상처를 내어 옷에 피를 묻힌 다음, 옷을 찢어서 여기 저기 흩어 놓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이리하여 하녀와 막달레나는 계획대로 부친의 뒤를 따라 고모인 이 테레사의 집으로 갔다.
딸이 범에게 잡아먹힌 줄 알고 실의에 빠진 아버지는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가 아내로부터 막달레나가 살아있다는 말을 듣고 서울로 달려가 딸이 무사한 것을 보고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이제는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하면서 그녀가 서울에 머무르며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게 하였다고 한다.
막달레나는 고모인 이 테레사와 다른 여교우들과 함께 살면서 성교의 교리를 지키고, 박해를 만나면 끝까지 항구하자고 서로 위로 격려하며 지내던 중,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원의가 간절하여 마침내 1839년 4월 11일에 포졸들에게 가서 자수하였다.
닷새 후에 포장이 “이제는 옥의 괴로움을 맛보았으니 생각을 바로 돌렸느냐?”고 물으며 배교하기를 독촉하자, 막달레나는 “만일 천주님을 배반하고 우리 교를 버릴 생각이었다면 스스로 자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포장님 앞에서 제가 어떻게 오늘은 이렇게 말하고 내일은 저렇게 말하겠습니까? 저의 결심은 변함이 없으니 나라 법대로 죽여주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막달레나는 주리를 틀리고 곤장을 맞고 여러 번 문초를 당하였으나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용감히 참아 받았다. 이리하여 막달레나는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녀는 1839년 7월 20일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하여 순교하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31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조 막달레나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조 Magdalen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7-1839년 한국
조 막달레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들렌, 막딸레나, 조막달레나.
조 막달레나 이야기
성녀 조 막달레나(Magdalena)는 같이 순교한 이 카타리나(Catharina)의 맏딸이다. 대세를 받고 돌아가신 아버지 집안 식구들이 천주교를 엄금했기 때문에 어머니와 막달레나는 외가로 돌아와 살기로 하였다.
그녀의 외조모는 매우 열심하였기에 그들은 편안히 본분을 지키며 살 수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고분고분하게 듣고 열심히 배웠으며 천주와 이웃을 사랑하는데 빠르게 진보하였다. 매일 이른 새벽에 일어나 신심의 일을 다 한 다음에야 집안일을 했고, 바느질과 길쌈으로 어머니와 가사를 돌보았다.
그녀의 나이 18세에 이르자 어머니가 딸을 교우에게 출가시키려 하였고, 막달레나는 비로소 어머니에게 동정을 지킬 결심을 말하였다. 그러나 모친은 그녀의 뜻을 이해하지만 자신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 못하는 집안 친척들과 또 여러 가지로 의심하는 외교인을 피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가 어떤 교우 집의 하녀로 들어갔다.
그러나 쉴 새 없는 노동과 음식이 넉넉지 못하여 병에 걸리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병에서 완쾌되자 그녀는 좀 덜 고된 교우 집으로 옮겨가 여러 해를 살면서 자신을 위해서 극히 필요한 것 외에는 절약하여 시골에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의 생활을 도왔다.
서른 살이 된 그녀는 이제 혼담을 이야기할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하고 어머니 곁으로 돌아와 효성과 열심함으로 모든 교우들의 모범이 되었다. 교리를 모르는 이에게는 가르쳐주고, 병자를 간호하고 위로하며, 죽어가는 어린 아이들에게는 대세를 주었다.
그녀는 성품이 온화하고 겸손하며 또 너무나 헌신적이어서 쉬운 일은 남에게 시키고 힘든 일은 자기가 도맡아 하였다. 자신의 고생을 돌보지 아니하였고 박해로 인하여 당할 수 있는 위험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1839년에 이르자 외교인들이 교우들을 못 견디게 굴기도 하고 또 박해의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여 위험이 더 급박하여졌으므로 막달레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올라와 살기로 하였다.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는 막달레나 모녀가 서울로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몇몇 회장에게 분부하여 교우 집에 살도록 주선하게 하였다.
모녀는 회장이 주선한 조 바르바라(Barbara)의 집으로 갔다. 그런데 이 집에는 조 바르바라와 그녀의 두 딸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들의 신세는 조 막달레나의 경우와 비슷하였다.
그러나 막달레나가 모면하려던 박해는 다른 어느 지방보다도 서울에서 더 심하였다. 그래서 함께 살던 교우들은 서로 용기를 북돋워주면서 박해를 받으면 잘 참자고 권면하며 지냈다.
이윽고 기해박해가 시작되어 포졸들이 주교 계신 곳을 알아내려고 사방으로 찾아다닌다는 것을 들었을 때, “만일 주교님이 잡히시면 우리도 자수하도록 합시다.” 하고 한 사람이 제의하자, 막달레나는 힘찬 목소리로 “예, 자수하는 것이 관계없다면 우리 예수님과 우리 주교님의 뒤를 따르기 위하여 그렇게 합시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수할 필요도 없이 한 달도 채 못 되어 기해년 7월 상순 어느 날 수많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포장이 그들을 불러 문초하고 각각 주리 한 번을 틀게 한 다음 옥에 가두었다.
그런데 감방도 좁은데다가 교우들로 가득 차 있었고 또 때는 아주 무더운 한 여름이어서 열병이 발생하였다. 두 모녀는 마침내 열병에 걸려 1839년 9월 하순 며칠 사이를 두고 차례로 천주님을 찬미하면서 옥사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33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한영이 막달레나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韓榮伊 Magdalen - 신분과 직업
과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4-1839년 한국
한영이 막달레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들렌, 막딸레나, 한 막달레나, 한막달레나.
한영이 막달레나 이야기
성녀 한영이 막달레나(Magdalena)는 외교인이자 가난한 시골 양반의 집에서 태어났고, 장성한 후에는 권영좌의 후처로 들어가 1840년 1월에 순교한 권진이 아가타(Agatha)의 어머니가 되었다.
남편은 당시 글씨로 유명한 학자였는데, 중년에야 천주교에 뜻을 두고 아내에게도 권하다가 죽기 전에 세례를 받고 가족들에게 천주교인답게 살라는 간절한 부탁을 남겼다. 막달레나는 이 권고에 따라 신자의 본분을 충실히 지키며 살았다.
그녀는 살림이 너무나 어려워서 어느 신자 집에 몸을 의지하며 살았으나 그 가난을 잘 견디어 나갔다. 몇 해 후에 딸 권진이 아가타가 그의 친구 이경이 아가타와 함께 자기에게 피신하여 왔다.
이리하여 셋이 함께 서로 격려하며 신앙을 북돋우고 신심을 닦으며 고신극기를 하였다. 이리하여 지난날의 잘못을 참회하고 함께 순교의 길을 걷기를 진실로 원하게 되었다.
한 막달레나와 그녀의 딸 권진이 아가타 그리고 이경이 아가타는 배교자의 밀고로 7월 17일에 체포되었다. 포장은 그들의 성명만 물은 다음 막달레나 혼자만 옥에 가두게 하고 젊은 여자 3명은 이웃집에 가두고 지키게 하였다.
포장은 한 막달레나와 두 아가타에게 무서운 형벌을 내렸다. 특히 주리와 곤장의 형벌을 가하였으나 그들은 불굴의 인내로 그것을 참아내었다.
형조로 이송되어 새로운 신문과 고문을 당했으나 순교 의지만을 드러내므로 마침내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서소문 밖의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막달레나는 평화로운 마음으로 기도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참수형을 받고 치명하였다.
이때가 1839년 12월 29일이요, 그녀의 나이는 56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허계임 막달레나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許季任 Magdalen - 신분과 직업
부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73-1839년 한국
허계임 막달레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들렌, 막딸레나, 허 막달레나, 허막달레나.
허계임 막달레나 이야기
성녀 허계임 막달레나(Magdalena)는 시흥군 동면 봉천리에 사는 이씨와 결혼하여 살면서 두 딸을 두었는데, 이들이 곧 기해년 7월 20일과 9월 3일에 순교한 이영희 막달레나와 이정희 바르바라(Barbara)이다.
비록 남편은 완고한 외인으로 천주교를 몹시 싫어하여 입교시키지 못했지만, 남편 몰래 신앙을 지키며 두 딸을 입교시킨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과 기도에 힘입어 두 딸이 훗날 순교하게 된 것이다.
특히 그녀는 이 바르바라가 동정을 지키기 위해 외교인 청년과 결혼시키려는 아버지의 고집을 꺾고 서울로 가서 자유로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일을 볼 때, 그녀가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겪은 희생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그녀 자신도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시누이집으로 와서 두 딸과 시누이와 함께 주님께 대하여 충성을 지키고 박해를 당하게 될 때는 항구하자고 서로 격려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7월과 9월에 두 딸을 먼저 주님의 품으로 보내고, 그녀는 같은 해 9월 26일에 67세의 일기로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아 치명하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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