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일에 해당하는 여자세례명 가타리나, 아델로가, 요안나 드 레토낙, 총 3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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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남자세례명 고르넬리오, 라우렌시오, 베드로 캄비아노, 부르카르도, 브루노, 시몬 피다티, 아달발도, 아프로니아노, 칸디도, 펠리치아노, 포르투나토, 플로스쿨로, 피르모, 총 13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2월 2일
천주교 여자세례명
3가지
2월 2일 여자세례명 목록
1. 가타리나
- 가톨릭 성인 이름
Catherine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수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522-1590년 리치
가타리나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까따리나, 카타리나, 캐서린.
가타리나 자료
리치의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de Ricci, 또는 가타리나)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 지방의 피렌체(Firenze)에서 태어나 알레산드라(Alessandra)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그녀는 아버지에 의해 숙모가 수녀로 있는 집 근처의 베네딕토회 수녀원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던 성녀 카타리나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집안일뿐만 아니라 수녀원에서 배운 대로 신앙생활을 충실히 실천해나갔다.
특히 그녀의 생애를 관통하게 될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신심을 키워나갔다. 부자 청년과 결혼을 권하는 아버지를 설득해 결국 토스카나 지방 프라토(Prato)에 있는 도미니코회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수녀원에 입회하여 엄격한 수련을 받은 그녀는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의 이름을 따서 카타리나라는 수도명을 선택했다. 그녀는 입회 초기에 큰 병을 앓았는데 그 고통마저도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분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한 은총의 시련으로 받아들였다.
완덕을 향한 모범적 생활로 존경을 받은 그녀는 젊어서부터 수녀원의 수련장과 원장직을 맡아 훌륭히 수행하였다. 장상의 직분을 사임한 후에도 성녀 카타리나는 놀라운 신앙 체험을 한 인물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다.
예를 들어 매 주일 같은 시간에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탈혼 상태에 들어가곤 했는데, 이때 그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수난에 흠뻑 취하곤 했다. 이러한 현상은 12년 동안이나 정기적으로 일어났다.
성녀 카타리나의 영향력은 수녀원의 벽 안에서만 인정된 것이 아니었다. 교회 지도자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그녀의 의견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늘 겸손함을 간직하고자 노력했던 성녀 카타리나는 교회의 개혁 운동에도 최선을 다해 성 필리푸스 네리우스(Philippus Nerius, 5월 26일)와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Carolus Borromeo, 11월 4일) 그리고 교황 성 비오 5세(Pius V, 4월 30일)와 함께 현대 교회의 개혁자로서 높은 칭송을 받게 되었다.
성녀 카타리나는 오랜 투병 생활 끝에 1590년 2월 2일 수녀원에서 선종하였다. 그녀는 1732년 교황 클레멘스 12세(Clemens XII)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746년 6월 29일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병자들의 수호자인 리치의 성녀 카타리나의 축일은 옛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선종일이 아닌 2월 13일에 기념해왔는데, 1971년 전례력을 개혁하면서 선종일인 2월 2일로 변경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2월 2일 목록에서 성녀 카타리나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다만 도미니코회에서는 그날이 주님 봉헌 축일과 겹치는 관계로 2월 4일로 옮겨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아델로가
- 가톨릭 성인 이름
Adeloga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동정녀 - 활동 연도와 지역
+745년 키칭겐
아델로가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하델로가.
아델로가 자료
프랑크족의 공주인 성녀 아델로가는 프랑코니아(Franconia) 지방의 키칭겐에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설립하고 초대원장이 되었다. 그녀는 하델로가(Hadeloga)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요안나 드 레토낙
- 가톨릭 성인 이름
Jane de Lestonnac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과부,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56-1640년
요안나 드 레토낙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레토냑,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후아나.
요안나 드 레토낙 자료
성녀 요안나 드 레토낙(Joanna de Lestonnac)은 프랑스의 보르도(Bordeaux)에서 저명한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당대의 유명한 인문주의 철학자였던 미셸 에켐 드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의 조카이다.
당시 프랑스는 국가의 분열뿐만 아니라 가족 간의 분열을 가져온 종교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혼란을 겪고 있었다. 성녀 요안나의 어머니는 칼뱅주의(Calvinism)에 빠져 그 누구의 권고도 듣지 않았다. 다행히도 성녀 요안나는 아버지와 삼촌 덕분에 자기 종교로 이끌고자 했던 어머니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성녀 요안나는 17살에 가스통 드 몽페랑(Gaston de Montferrant)과 결혼하여 여덟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던 그녀는 1597년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41살에 과부가 되었고 네 아이도 어려서 잃었다.
그녀는 나머지 네 자녀가 모두 자라서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돌보았다. 그녀의 두 딸인 마르타(Martha)와 막달레나(Magdalena)는 보르도에 있는 수도원에서 서원을 했고 아들 프란치스코(Franciscus)는 결혼을 했다.
아직 어린 소녀였던 막내딸을 아들에게 맡기고 성녀 요안나는 어린 시절부터 꿈꾸어 온 수도생활을 하기 위해 1603년 툴루즈(Toulouse)의 개혁 시토회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그러나 수도원의 엄격한 생활은 그녀의 건강을 해쳤고 그녀는 서원을 하기도 전에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툴루즈 수도원에서 지냈던 마지막 밤에 성녀 요안나는 하느님의 특별한 비추임을 체험하였다. 그것은 설립자로서의 소명과 마리아 영성에 대한 직관이었다.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려는 그녀의 계획은 몇 년에 걸쳐 조금씩 윤곽이 드러났다. 즉 청소년 교육이라는 과제와 자신의 구원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에도 마음을 써야 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정리되었다.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한 그녀는 젊은 소녀들을 모아 라 모드(La Mothe)에 있는 자신의 땅에서 2년 동안 준비의 시간을 가졌고, 보르도에 극심한 역병이 발생했을 때 용감하게 시민들을 간호하였다.
그러던 중 1605년에 새로 부임한 예수회의 요한 드 보르드(Joannes de Bordes) 신부와 라이문두스(Raymundus) 신부를 비롯한 몇 명의 사제들이 영적으로 그녀의 헌신을 알아보고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되었다.
당시 보르도에서는 특히 여자 아이들의 교육이 큰 문제였다. 대부분 칼뱅주의에 빠진 여교사들이 소녀들의 교육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당시 예수회가 소년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던 것처럼 가톨릭적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던 소녀들을 위한 교육을 맡아줄 여성 수도회의 설립이 절실하던 때였다.
요한 신부와 성녀 요안나는 이런 점에서 서로 뜻을 같이 하고 이를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곧바로 수도회 설립 작업에 들어갔다.
1606년 3월 6일 성녀 요안나는 요한 신부의 도움으로 보르도의 대주교를 설득하여 특별히 여자 아이들의 교육을 직접적인 사도직으로 하는 여성 수도회인 마리아회를 설립하였다.
성녀 요안나의 마리아회는 1607년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로부터 승인을 받았고, 1610년 마침내 보르도에 마리아회의 첫 번째 수녀원을 설립하고 원장이 되었다.
그녀는 수도회의 사도직을 실현하기 위해 학교를 설립하여 소녀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한때 그녀는 다른 수녀들의 음모에 휘말려 희생될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모진 시련을 인내로써 극복하였다.
1640년 2월 2일 96세의 일기로 선종하여 보르도에 묻힌 성녀 요안나의 마리아회는 프랑스 전역뿐만 아니라 에스파냐를 비롯해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 그녀는 1900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49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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