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 앞에서는 변명보다 침묵이 먼저 떠올라요. 같은 식탁에 앉아 있어도 마음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할 수 있고, 가까이 있는 듯해도 속마음은 멀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묵상하게 됩니다. 믿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주님보다 다른 것을 먼저 붙들고 있던 제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저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지금 네 마음은 어디에 머물러 있느냐고 다시 물어주심에 감사합니다.
2026년 4월 1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4월 1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 오늘 복음 성경 말씀
-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 오늘 말씀 묵상 모아보기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이사 50장 4-9ㄴ절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4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우리 함께 나서 보자. 누가 나의 소송 상대인가? 내게 다가와 보아라.
9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오늘 복음 성경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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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26장 14-25절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14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15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16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17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하여라.”
1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0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21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2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4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25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2026년 4월 1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교황님 4월 기도지향 00:20
✚ 미사 시작 00:37
✚ 강론 시작 08:05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내 안의 유다를 마주하기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신을 이미 알고 계시면서도 그를 내치시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탁에 앉으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당신에 대한 배신을 예고하십니다. 그러자 유다가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5) 하고 묻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보며 뻔뻔하다고 분노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의 물음은 오늘 우리의 얼굴을 비추는 거울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자세히 보면 다른 제자들도 유다처럼 “저는 아니겠지요?”(26,22) 하며 비켜서려 합니다. 본문에 쓰인 “저마다”(26,22)라는 표현에서 여러 제자가 같은 물음을 던지며 책임에서 한발 물러서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면서, 어느새 예수님을 배신하는 순간들이 많습니다. 늘 ‘나는 아니겠지 …….’ 하며 내가 당한 것, 내가 억울한 것만 생각하고, 내 잘못은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려 합니다.
그러나 죄 앞에 솔직하지 못하고 끝내 감추려 하였던 마음이 유다를 ‘영원한 배신자’로 남게 하였고, 마침내 절망의 선택으로까지 이끌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유다의 가장 큰 죄는 배신 그 자체보다, 회개로 돌아서지 못한 채 자신을 어둠 속에 가둔 절망에 있습니다.
파스카 성삼일을 맞이하며 우리도 하느님께 용서를 청합시다. 회개로 부활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우리를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라고 물으시는 하느님 앞에서, 내 마음은 지금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솔직한 마음으로 살펴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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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 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오늘은 “성주간 수요일”, 흔히 “밀정의 수요일”이라 불린 날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은전 30냥에 팔려 배신당하는 예수님을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배신자에게 마지막까지 인정을 베푸시고 기회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야, 네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 26,21)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음으로써, 마지막까지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라고 묻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다도 묻지만, 그는 “주님”이라 부르지는 않고,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5)라고 묻습니다. 그가 올리브동산으로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친구야,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마태 26,50)하고 여전히 그를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나 그는 스승의 사랑을 끝까지 외면하고 맙니다. 그는 뒤늦게 후회는 했지만, 결국 자책과 죄책감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그런데, 대체 유다는 왜 예수님을 배반했을까?
그것은 은전 30냥에 대한 탐욕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이 바라고 원했던’ 정치적 민족적 메시아가 되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상과 신념을 채워주지 않자, 자신의 그릇된 신념과 이상을 고집한 까닭이었습니다.
‘완고함’이란 이처럼 무섭습니다. 곧 자신의 피조물인 자신의 생각과 이념이라는 ‘우상’을 섬긴 까닭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생각과 이상을 파괴시키는 혁명가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버리지 않고는 결코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정녕, 진정한 혁명가는 자신이 먼저 혁명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혁명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상을 쫒는 자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고, 그리스도에 의해 혁명당한 자만이 진정 변혁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마태 26,24)
이 말씀은 비단 유다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인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라고 말할 용기가 없습니다. 제가 유다처럼, 배신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니, 당신을 배신하는 줄을 알면서도 악에 조정당하고 있고, 오늘도 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말할 용기가 없습니다. 제가 오늘도 배신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알면서도 넘어지고 또 넘어지니 무참할 뿐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저를 건져주십시오.” 당신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시고,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오복음 26장 22절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주님! 더 이상 고집 부리지 않게 하소서.
생각을 움켜잡기보다, 생각에 붙잡히기보다,
생각을 바꿀 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조정 당하게 하소서.
저의 바람이 아니라 당신의 바람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하느님은 다 알고 계시는데, 왜 굳이 죄를 고백해야 할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며 폭탄 선언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마태 26,21)
이 말씀에 제자들은 큰 슬픔에 잠겨 저마다 묻습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마태 26,22)
그런데 가리옷 유다도 똑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마태 26,25)
겉으로 보기엔 똑같은 질문 같지만, 유다의 질문에는 하느님을 향한 무서운 '시험'과 '거짓'이 숨어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유다의 호칭에 주목해야 합니다. 다른 제자들은 "주님(Kyrie)"이라고 불렀지만, 유다만은 "스승님(Rabbi)"이라고 부릅니다. 유다에게 예수님은 내 생명의 주관자가 아니라, 단지 내가 속일 수 있고 내 계획을 평가받아야 할 한 명의 현자에 불과했습니다.
유다가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물었을 때, 그의 마음속에는 이런 전제가 깔려 있었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똑똑해도 내가 은밀히 사제들에게 받은 은 서른 냥은 모를 거야. 아니, 혹시 알아차렸더라도 이 거룩한 만찬 석상에서, 동료들 앞에서 내 정체를 폭로하여 분위기를 망칠 정도로 무자비할 수는 없지. 이것이 이분의 약점이야.'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아무도 모른다"는 믿음, 혹은 "알아도 어쩌지 못할 것이다"라며 하느님의 자비를 역이용하는 비겁함입니다. 나를 진실하게 할 대상, 곧 주님이 사라진 자리는 즉시 사탄의 놀이터가 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탈개인화(Deindividuation)'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이 가려지고 타인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느끼는 순간, 평소에 작동하던 도덕적 규범과 사회적 책임을 한순간에 던져버립니다.
현대 사회의 악플 문화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미국 심리학자 에드워드 디너(Edward Diener)의 실험은 이를 소름 돋게 증명합니다. 핼러윈 밤, 아이들에게 사탕을 마음껏 가져가라고 했을 때, 혼자 온 아이들보다 가면을 쓰고 단체로 움직여 자신의 신분이 모호해진 아이들이 규칙을 어기고 사탕을 훔쳐 갈 확률이 무려 57%나 높았습니다.
유다가 바로 이 영적 탈개인화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그는 '나는 누구도 모르게 완벽히 숨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 익명성에 대한 믿음은 자유가 아니라, 인간을 통제 불능의 짐승으로 만드는 독약입니다. 자신을 지켜보는 절대자의 시선을 지워버린 유다에게 남은 것은, 결국 스스로 목을 매는 비참한 종말뿐이었습니다.
인류 최초의 조상 아담과 하와도 이 환상에 빠졌습니다. 죄를 지은 그들은 숲속에 숨어 무화과 잎사귀로 자신을 가렸습니다. 하느님께서 "너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실 때, 그들은 사실 하느님이 몰라서 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주님, 저희가 선악과를 먹었습니다"라고 고백하지 않고 "저 여자가 줘서 먹었습니다"라고 핑계를 댄 이유는, 하느님을 '다 아시는 분'으로 대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는 나를 가리게 만들고, 가리는 행위는 하느님의 전지하심을 부인하는 불신앙으로 이어집니다. 유다의 "저는 아니겠지요?"는 에덴동산의 그 비겁한 숨바꼭질이 변주된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를 향한 욕구를 스스로 제어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지켜봐 줘야 합니다. 우리는 다윗 왕의 사례에서 고백의 위대함을 봅니다. 다윗은 밧 세바와 간음하고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죽였습니다. 그는 완벽하게 은폐했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탄 예언자가 나타나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고 지적했을 때, 다윗은 유다처럼 발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즉시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2사무 12,13)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깨달았습니다.
'아, 하느님은 다 보고 계셨구나. 내가 숨길 곳은 우주 어디에도 없구나.'
이 자각이 그를 살렸습니다. 시편 139편에서 그는 노래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낱낱이 아십니다. 제가 앉으나 서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멀리서도 제 생각을 꿰뚫어 보십니다."
다윗이 성군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죄를 안 지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나를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고백은 하느님께 정보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진리 안으로 나를 동기화(Sync)시키는 과정입니다. (출처: 『주석 성경』 사무엘기 하권 12장)
여기서 우리는 신자분들이 가장 자주 던지는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신부님, 하느님이 다 알고 계시는데 굳이 구구절절 제 입으로 죄를 고백해야 합니까?"
하느님은 정보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고백은 하느님을 인정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고백은 바로 이 실험의 영적인 완성입니다. 내가 고해소에서 내 입으로 죄를 뱉는 순간, 내 뇌와 영혼은 "하느님께서 지금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비로소 실재로 받아들입니다. 머리로만 알고 있는 하느님은 나를 정직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하지만 고백을 통해 그분의 시선을 내 삶의 중앙에 모실 때, 우리는 비로소 '거짓의 옷'을 입고 살 수 없게 됩니다.
저는 어렸을 때, 어머니가 저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이미 꿰뚫어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자주 경험했습니다. 어느 주일, 성당에 가지 않고 친구들과 몰래 오락실에 다녀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완전범죄를 꿈꾸며 성당 입구에서 주보만 슬쩍 챙겨 집으로 돌아왔지요. 어머니 앞에 주보를 당당히 내밀며 "엄마, 저 성당 잘 다녀왔어요!"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눈빛이 이상했습니다. 어머니는 "정말 성당만 갔다 왔니? 신부님 강론은 어떠셨어?"라고 넌지시 물으셨습니다. 저는 대충 둘러댔지만, 결국 어머니는 제가 오락실에서 게임에 열중하고 있던 모습을 동네 아주머니를 통해 이미 다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저는 그때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다 알고 계시면서 왜 나한테 물어보셨을까?'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것은 저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가 나쁜 길로 빠지지 않게 하려는 어머니만의 '거짓말 방지 장치'였습니다. 엄마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제가 직접 고백하게 함으로써, 제가 '거짓으로 숨길 수 있다'는 오만한 착각에서 벗어나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만약 제가 끝까지 고백하지 않았다면, 저는 끊임없이 제 자아를 긍정하며 '거짓말은 유용한 수단'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거짓을 아버지로 삼고 사는 사람은 결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엄마의 질문은 제가 진실 앞에 무릎 꿇게 하려는 사랑의 초대였습니다.
이번 성주간 수요일, 우리도 유다의 질문 "저는 아니겠지요?"를 멈춥시다. 대신 다윗처럼, 그리고 돌아온 탕자처럼 고백합시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다 알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고해소에 들어갈 때, 그곳은 심판의 자리가 아니라 거짓의 옷을 벗고 하느님의 자녀라는 빛의 옷으로 갈아입는 잔칫집이 될 것입니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주님, 제가 고백하지 않아도 당신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제가 고백하는 이유는 제 마음의 닫힌 문을 열어 당신의 빛이 들어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백은 하느님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치유하는 것입니다." (출처: 성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제10권).
또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했습니다.
"죄를 짓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죄를 숨기는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의 비밀은 지옥의 불씨가 되고, 하느님 앞에서의 폭로는 천국의 이슬이 된다." (출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마태오 복음 강론』).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공부 잘하는 아이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1) 계획을 잘 세운다.
2) 집중할 수 있도록 먼저 주변 정리를 한다.
3) 그냥 공부한다.
답은 몇 번일까요? 아마 1번이나 2번을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답은 3번이었습니다. 3번일 리가 없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뇌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뇌과학자 장동선 박사는 말합니다.
“우리 뇌는 뭔가를 시작하고자 하는 열정, 의지를 뇌에 입력해야 행동으로 출력되는 것이 아니라, 출력(행동)을 먼저 해야 그것을 프로세싱하기 시작한다.”
학창 시절에 계획을 아주 잘 세우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계획은 정말 완벽했습니다. 하지만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시험 때만 되면 열심히 정리하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이 친구 역시 마찬가지로 성적이 좋지 않았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도 그렇습니다. 계획을 세워 그 조건이 채워지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자기 주변 정리를 잘하고 나서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먼저 믿음을 갖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즉, 그냥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행동에 맞게 주님의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믿음이 사라진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유다 이스카리옷입니다. 그는 수석 사제들을 직접 찾아가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마태 26,15)라며 흥정을 벌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잡히신 것이 권력자들의 함정 때문만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제자의 주도적인 탐욕과 배신 때문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수석 사제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줍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은돈 서른 닢을 황소에게 받혀 죽은 노예의 몸값으로 나옵니다. 예수님을 하찮은 노예의 몸값으로 취급하여 팔아넘긴 것입니다.
그리고 장면이 넘어가 최후 만찬 장면입니다. 여기서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 26,21)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역시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5)라고 말합니다. 호칭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항상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스승님’이라는 호칭은 주로 바리사이나 외부인, 믿음이 없는 자들이 사용하던 것이었습니다. 유다가 이제 믿음이 없는 자가 되어 위선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내 삶의 절대적인 주님으로 모시고 있을까요? 그냥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으로 모실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하지 마라. 당신은 헬렌 켈러, 파스퇴르, 미켈란젤로, 마더 데레사, 레오나르도 다 빈치, 토머스 제퍼슨, 그리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게 주이졌던 것과 정확히 같은 시간을 하루에 가지고 있다(H.잭슨 브라운 주니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선(善)과 배반(背叛) 사이에 서 있는 우리들 관계입니다. 겸손한 자각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데서 옵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을 너무 쉽게 믿습니다.
유다의 배반은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니라 작은 선택들이 모이고 쌓인 결과였습니다. 이렇듯 인간은 선과 악이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동시에 함께 지닌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제자이면서도 배반할 수 있고, 충실하고자 하면서도 도망칠 수 있습니다. 내려놓지 못하는 가장 큰 장애는 “나는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배반의 상황, 두려움의 순간, 유혹의 자리,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는 시험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힘만으로 완전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고,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의 삶을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용기, 그것이 신앙의 깊이를 만듭니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내려놓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는 성주간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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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