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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05 부활절 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바티칸 생중계

피어나네 2026. 4. 5.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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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모든 것이 분명해진 뒤에야 시작되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게 참 쉽지 않아요.

 

빈 무덤 앞에서 제자들은 아직 다 깨닫지 못했지만, 보고 믿었습니다. 부활은 이해의 끝에서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먼저 마음을 여는 이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 마음이 어느 시간에 머물러 있는지도 함께 돌아보게 되고요.

 

아직 어둠이 남아 있어도, 주님께서 이미 새 아침을 열고 계심을 믿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2026년 4월 5일 평화방송 부활절 미사 명동성당 실시간 생중계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정리

 

2026년 4월 5일, 평화방송 부활절 미사 명동성당 실시간 생중계입니다. 오늘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지금 여기에서 바로 볼 수 있는 평화방송 주님 부활 대축일 부활절 미사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4월 5일
주님 부활 대축일
부활절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사도행전 10장 34ㄱ, 37ㄴ-43절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그 무렵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여러분은

37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 일어난 일과,

38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39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서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40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41 그러나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42 그분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관으로 임명하셨다는 것을 백성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

43 이 예수님을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합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콜로새서 3장 1-4절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형제 여러분,

1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 보기

요한복음 20장 1-9절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바로 보는
평화방송 부활절 미사

명동성당과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 실시간 생중계 주님 부활 대축일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 2026년 4월 5일 12:00

✚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집전

✚ 명동성당 실시간 생중계 부활절 미사

 

 

 

✚ 2026년 4월 5일 17:00

✚ 레오 14세 교황 집전

✚ 바티칸 실시간 생중계 부활절 미사

 

 

 

2026년 4월 5일 오늘 평화방송 부활절 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

✚ 강론 시작 16:26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지금, 여러분의 시간은 아침인가요?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모두에게 참된 기쁨과 희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은 시간을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과 “아직도 어두울 때”(요한 20,1)입니다. 부활은 이미 일어났고, 마리아 막달레나는 아직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같은 때이지만, 부활을 믿는 이는 새 아침을 맞았고, 믿지 못하는 이는 여전히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묻게 됩니다.

“내 마음은 ‘지금’ 어느 시간에 있는가?”

부활은 죽음 뒤의 일만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 삶을 새롭게 하는 사건입니다. 여전히 우리 삶이 고통스럽다고 해서 부활의 기쁨이 헛된 것은 아닙니다.

이 길에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걸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과 함께할 때, 우리 삶은 어둠 속에서도 빛날 수 있습니다. 부활은 절망을 넘어서는 희망을 줍니다. 이 희망이 있기에 제자들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부활을 기념한다는 것은 제자들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켰던 그 부활의 힘을, 오늘 우리 삶으로 불러오는 일입니다. 이기심과 절망을 무너뜨리고, 서로 평화를 건네는 순간마다 부활은 우리 안에 새롭게 일어납니다.

이제 우리의 모든 일상을 부활의 자녀답게 살아감으로써, 우리 모두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1).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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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 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빈 자리의 자유

알렐루야! 부활 대축일을 축하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빈 무덤’을 봅니다. ‘빈 무덤’, 그것은 적어도 예수님의 죽음을 둘러싸고, 그 어떤 일인가가 벌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죽음 안에서 새로운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빈 무덤’은 ‘지나간’ 자리입니다. ‘무덤’이 생명에서 죽음으로 건너간 자리라면, ‘빈 무덤’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지나간, ‘파스카’의 자리입니다.

“파스카”의 의미를 성경과 교부전통에서는 여러 방식으로 해석해왔습니다.

하느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히브리인들의 집을 치지 않고 그 위를 지나갔다고 할 때, 파스카는 ‘위를 지나감’(hyperbasis)이요, 이집트로부터 약속된 땅으로, 곧 종살이에서 자유로 지나간 백성들을 가리킬 때, 파스카는 ‘통과해 지나감’(diabasis)이요, 인간이 아래의 것들로부터 위의 것들로 지나갈 때, 파스카는 ‘위를 향해 지나감’(anabasis)이요, 인간이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날 때, 파스카는 ‘밖으로 지나감’(exodus), 곧 ‘엑소더스’(탈출)요, 인간이 선과 거룩함에 있어 진보할 때, 파스카는 ‘앞을 향해 지나감’(progressio)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다섯 가지의 파스카가 동시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빈 무덤’은 혹 부활의 근거는 될지언정, 부활의 직접적인 증거나 부활이 사건으로 체험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빈 무덤’은 제자들이 눈으로 직접 본 역사적 사실이긴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부활의 참 뜻을 우리가 ‘눈으로는 볼 수 없다’는 상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덤’이 죽은 이를 묻는 곳이라면, ‘빈 무덤’은 죽음 그 자체를 묻어버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유’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빈 무덤’, 그것은 예수님마저 죽어 사라져버린 예수님의 빈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이신 분을 넘어, 진정 예수님이신 예수님이 되게 하는 ‘빈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나는 나다”(탈출 3,14)라고 하시면서 당신 이름에 구속되지 않으신 것처럼, 자신을 비워버린 ‘빈자리의 자유’입니다. 사실, ‘빈 무덤’, 그것은 당신의 본래의 자리인 동시에 우리의 본래의 자리일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본래의 이 자리로, 본래의 생명으로 되돌려놓으십니다. 곧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는 본래의 우리의 생명으로 되돌려놓으십니다. 이를 두고 사도 바오로는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콜로 3,1-3)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던 우리의 생명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빈 무덤’으로 비어 있어 볼 수 없다고 해서, 결코 없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 “부활”은 우리의 믿음을 요청합니다.

그러기에, ‘무덤’이 죽은 이들의 공간이라면, ‘빈 무덤’은 우리가 찾아가야 할 의미의 빈 공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덤’이 ‘예수님은 죽었다’는 생각의 공간이라면, ‘빈 무덤’은 ‘예수님은 죽었다’는 생각을 놓는 빈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에스트로 엑카르트는 앎의 틀 안에 갇혀있지 말고 벗어날 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해지려는 사람은 ~더 나아가 그는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앎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정신적로 가난하고자 하는 사람은 신에 대해서도 피조물에 대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을 정도로 모든 것에서 가난해져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안에 예수님의 ‘무덤’이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의 ‘빈 무덤’이 있는 지를 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 안에 예수님의 무덤이 있다면, 이미 죽은 예수님을 우리는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빈 무덤’을 본다면 부활을 체험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토록,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던 우리의 생명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다름 아닌, 숨겨져 있던 우리의 생명이 다시 살아난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우리의 탄생일인 것입니다.

주님의 파스카를 다시 한 번 축하하며, 여러분들의 생일도 축복합니다. 알렐루야.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20장 8절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주님! 제 안에 드소서.

제 안에 마련해 두신 텅 빈 자리에 드소서.

제 안에 숨겨진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소서.

죽음의 무덤을 비우시고 당신 생명과 사랑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부활하신 분은 갈릴래아에서 기다리신다 .

할렐루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이 밤,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역설의 현장에 서 있습니다. 어둠이 빛을 이긴 줄 알았고, 죽음이 생명을 삼킨 줄 알았는데, 오히려 생명이 죽음을 집어삼켜 버린 승리의 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천사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핵심적인 지시가 있습니다. 바로 "갈릴래아로 가라"는 명령입니다.

"서둘러 제자들에게 가서 이렇게 일러라.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마태 28,7)

왜 하필 갈릴래아일까요? 예루살렘의 화려한 성전도 아니고, 빌라도의 총독관저도 아닙니다. 왜 그 비천하고 가난한 변방으로 가라고 하실까요? 여기에 부활의 생명을 만나는 ‘방향의 법칙’이 숨어 있습니다.

자연의 법칙 : 내어주어야 근원(헤르몬)을 만난다

이스라엘의 지형을 보면 하느님이 설계하신 기막힌 영적 교훈이 보입니다. 이스라엘 북쪽에는 해발 2,814미터의 거대한 헤르몬 산이 우뚝 서 있습니다. 그 꼭대기에는 1년 내내 녹지 않는 만년설이 덮여 있지요. 이 차갑고 맑은 눈물이 녹아 내려와 고이는 곳이 바로 갈릴래아 호수입니다.

여기서 신비로운 일이 벌어집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헤르몬 산으로부터 받은 물을 잠시 머금었다가, 즉시 요르단강을 통해 남쪽으로 흘려보냅니다. ‘내어주는 일’을 쉬지 않습니다. 호수 입장에서 물을 내보내는 것은 일종의 ‘죽음’이고 ‘손해’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물을 비워내기에, 헤르몬 산은 비워진 만큼 다시 새로운 만년설의 물을 갈릴래아로 끊임없이 쏟아붓습니다. 쉼 없는 순환, 이것이 갈릴래아를 물고기가 넘쳐나고 수많은 생명이 숨 쉬는 ‘생명의 호수’로 만드는 비결입니다.

갈릴래아는 살리기 위해 자신을 비우는 곳입니다. 반면, 그 물이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바로 사해(Dead Sea)입니다. 사해는 갈릴래아로부터 내려온 물을 ‘모으기만’ 합니다. 나가는 통로가 없습니다. ‘이건 다 내 거야!’라며 움켜쥐는 순간, 뜨거운 태양 아래 물은 증발하고 독한 염분만 남습니다. 결국 그곳은 어떤 생명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가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생명은 흐르는 에너지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사해처럼 모으고 쌓아두려는 방향으로 가는 사람에게는 당신을 드러내실 수가 없습니다. 빛이 어둠에 삼켜지기 위해 어둠 속으로 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갈릴래아처럼 내어주고 나누려는 방향으로 뛰는 이들에게만 부활의 주님은 마중 나오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가르침이 아니라, 빛으로 나아가야 태양을 볼 수 있다는 우주적 자연 법칙입니다. 이제 빛을 만나려면 내가 빛을 향해 움직여야 합니다.

죽음으로 향하는 사람들: 움켜쥐는 손이 곧 나의 무덤이 됩니다. 죽음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집착’과 ‘모음’입니다. 그렇게 다른 이들은 더 부족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주위에는 죽음의 기운이 맴돕니다. 더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는 자가 빛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인도에서 원숭이를 잡는 방법은 참으로 비극적입니다. 좁은 입구를 가진 단지 안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견과류를 가득 넣어둡니다. 원숭이는 손을 넣어 음식을 한 움큼 쥡니다. 그러면 주먹이 커져서 단지 밖으로 손을 뺄 수 없게 되지요.

이때 사냥꾼이 다가옵니다. 원숭이는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려 하지만, 절대 쥔 손을 펴지는 않습니다. ‘이걸 놓으면 굶주릴 거야’라는 집착 때문입니다. 결국 원숭이는 그 작은 먹이 한 줌을 지키려다 자신의 전 생명을 사냥꾼에게 넘겨주고 맙니다. 사냥꾼은 그에게 죽음 자체입니다. 원숭이는 살려고 함으로써 죽음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1947년 뉴욕 맨해튼, 거대한 악취가 진동하는 한 저택에서 형 호머와 동생 랭리 콜리어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들은 명문 대학을 나온 수재들이었고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지독한 저장 강박증(Hoarding)과 불신에 빠져 있었습니다. '세상은 우리 것을 뺏으려 한다. 오직 모으는 것만이 우리를 지켜준다'는 믿음으로 30년 동안 모든 쓰레기를 보물이라 믿고 집안에 쌓아 올렸습니다.

그들은 도둑을 막기 위해 신문지 더미와 고철 사이에 정교한 부비트랩(덫)을 설치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 랭리가 눈먼 형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다 자신이 만든 신문지 더미 덫을 건드렸습니다. 순식간에 수 톤의 쓰레기가 쏟아져 내렸고, 그는 자신이 ‘보물’이라 믿으며 모았던 그 무게에 짓눌려 질식사했습니다. 곁에 있던 눈먼 형 호머는 동생이 죽어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쓰레기 벽에 가로막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굶어 죽었습니다.

경찰이 집을 수색했을 때 나온 쓰레기는 무려 140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살리겠다고 모은 것들에 의해 가장 비참하게 살해당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죽이려(모으려) 하면 죽음을 만난다’는 영적 법칙의 실체입니다. (출처: 뉴욕 타임스 1947년 3월 26일 자 기사 재구성)

나의 갈릴래아 : 소유의 무덤을 떠나 만난 부활의 예수님

사실 저 역시 한때는 늘 ‘어떻게 하면 더 많이 가질까’,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더 높이 올라갈까’ 하는 사해의 방향을 향해 있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소유가 저를 살려줄 생명줄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길 끝에는 안식이 없었습니다. 모으면 모을수록 더 허기졌고, 움켜쥐면 쥘수록 영혼은 메말라갔습니다. 저는 살고 싶어서 모았지만, 생명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님께서 제 영혼의 내비게이션을 강제로 꺾어놓으셨습니다. ‘나를 위해 모으는 삶’이 아니라 ‘그분을 위해 전하는 삶’, 즉 사제의 길로 저를 부르신 것입니다. 저는 처음엔 두려웠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다 내어놓고, 결혼도 포기하고, 세속적인 성공도 내려놓으면 내 인생이 통째로 사라져버릴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제 자아에게는 ‘죽음’과 같은 선언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 두려움을 뚫고 갈릴래아를 향해, 즉 ‘전하는 삶’을 향해 첫 발을 떼었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신학교에서, 그리고 제대 위에서 성체를 거행하며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난 네게 다~ 주었다."

소유를 통해 죽음으로 가던 제가, 전함을 통해 사제가 되었을 때 비로소 ‘진짜 생명’이 무엇인지 맛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기쁨을 누리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갈릴래아에서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움직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세상의 지혜들을 통한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경주 최부잣집의 거름(똥) 철학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300년 동안 부를 유지하며 존경받았던 ‘경주 최부잣집’의 사례는 이 생명의 원리를 기가 막히게 보여줍니다. 최부잣집에는 내려오는 ‘육훈(六訓)’ 중 이런 정신이 있습니다.

"돈은 똥(거름)과 같다. 한곳에 모아두면 악취가 나지만, 사방에 흩뿌리면 땅을 살리는 거름이 된다."

그들은 돈을 자기 생명을 유지하는 절대적인 목적(사해)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비옥하게 만드는 ‘거름’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르침을 실천했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똥처럼 여겨 기쁘게 뿌렸을 때, 그들은 죽음을 만난 것이 아니라 온 백성의 존경과 가문의 보존이라는 ‘더 큰 생명과 영광’을 얻었습니다. (출처: 『경주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

한국의 갈릴래아: 죽음의 방향을 거부하고 생명을 낳은 이요한 씨와 대건이 이런 지혜를 가진 이들은 항상 죽음을 선택하고 생명을 만납니다. 여기, 죽음의 벼랑 끝에서 생명의 갈릴래아를 선택하여 온 세상을 울린 기적 같은 실화가 있습니다. 바로 이요한 씨와 그의 아들 대건이의 이야기입니다.

이요한 씨는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아내마저 떠난 차가운 방에서 그는 갓난아기였던 아들 대건이를 홀로 키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대건이마저 아빠와 같은 유전성 질환인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극심한 절망에 빠졌습니다. '나 하나 어둠 속에 가두어지는 것도 지옥인데, 이 예쁜 핏덩이까지 빛을 잃어야 한다니... 차라리 같이 죽는 게 낫지 않을까?' 그것은 사해의 어두운 유혹이 그를 덮치던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죽음 대신 '생명'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대건이의 '눈'이 되어주기로 결단합니다.

이요한 씨가 절망이라는 탯줄을 끊고 생명을 향해 뛰어갔을 때, 온 세상이 그들의 편이 되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헤르몬 산의 만년설'처럼 무려 1억 3천만 원이라는 거액의 성금을 모아 전달했습니다. 또한 가톨릭 대학교 성모병원은 이요한 씨의 아들에게 수술을 지원하여 한쪽 눈이라도 완전히 실명되지 않게 해 주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름 모를 수많은 봉사자가 달려와 그들이 머물 쾌적한 새 보금자리를 마련해주었고, 대건이가 특수 교육을 받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매달 후원금을 보내왔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죽여 아들을 살리려 하자, 세상이라는 생명체가 그들을 껴안은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장성한 대건이는 아버지를 가장 존경하며 세상에 희망을 전하는 청년으로 자라났습니다. 아버지가 생명의 방향인 갈릴래아를 선택했을 때, 죽음의 골방은 생명의 잔칫집으로 부활한 것입니다. (출처: KBS 「인간극장 - 내 사랑 대건아」 2003년 5월 방영분 재구성)

생명으로 향하는 사람들 : 심부름하는 자가 기적을 만납니다.

오늘 복음의 여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무덤가에서 슬픔을 움켜쥐고 있지 않았습니다.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습니다." (마태 28,8)

이 ‘달려감’이 부활의 핵심 동력입니다. 여인들은 전하는 ‘심부름꾼’이 되었기에, 그 길목에서 마주 오시는 예수님을 뵙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문득 70년대 초등학교 다닐 때가 생각났습니다. 선생님께서 가정 환경 조사를 하셨는데, ‘가족은 몇 명인가?’라고 물어보셨고 여기에 집에 무슨 가전제품이 있는지를 물어 손들게 했습니다. 라디오, 텔레비전, 냉장고, 전화기, 곤로 등등…. 아마 지금에야 거의 다 가지고 있는 가전제품이겠지만 당시에는 이런 가전제품이 없는 집이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전제품이 우리 집에는 다 있었습니다. 이때 들은 생각은 “우리 집, 부자구나.”였습니다.

집에 가서 어머니께 “우리 집 부자지?”라고 물었습니다. 단호하게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상, 중, 하로 따진다면 ‘중’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가전제품이 다 있고, 친구 집에 놀러 가도 우리 집이 더 크고 좋았는데도 말입니다.

부는 상대적입니다. 긴 연필 1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긴 연필 2번이 있습니다. 자기보다 더 긴 연필 2번을 보고서, 긴 연필 1번은 ‘나는 작다’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더 긴 연필 2번도 자기보다 더 긴 연필을 보면 ‘나는 작다’라고 할 것입니다. 이처럼 비교하지 않아야 자기의 행복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바라보고 만족할 수 있는 사람만이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의 어둠을 이기시고 생명의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안에서 커다란 행복을 깨닫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게 하는 주님의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부활이며, 이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깨닫고 희망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만으로도 세상 안에서 비교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을 생각하지 않고, 또 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 안에서 계속 비교하면서 어렵고 힘든 삶을 살게 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 무덤에 갔다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무덤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때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예수님께서 이미 세 번이나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셨음에도 그들은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안 계신다는 사실에만 집중하면서 말씀 자체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상징인 수의(아마포)와 얼굴을 쌌던 수건을 무덤에 남겨두셨습니다. 비록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여주지는 않으셨지만, 부활의 흔적을 남기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깨닫지 못합니다. 세상의 기준, 부정적인 생각으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움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께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기준, 나의 부정적인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

 

오늘의 명언

신은 우리를 죽이기 위해 절망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일깨우기 위해 그것을 보낸다(헤르만 헤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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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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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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