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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6.04.08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피어나네 2026. 4. 8.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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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멀리 있는 놀라운 사건이 아니라, 평범한 길 위에서 주님의 현존을 알아보게 되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자들은 길을 걸으며 주님과 함께 있었지만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고, 빵을 떼시는 자리에서야 비로소 눈이 열렸습니다.

신앙은 특별한 곳을 찾아 나서는 일이 아니라, 이미 함께 걷고 계신 그분을 알아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어요. 오늘도 먼저 다가와 주시며 말씀과 성체로 곁에 머물러주심에 감사합니다.

 

2026년 4월 8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성경 말씀 정리

 

2026년 4월 8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4월 8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사도행전 3장 1-10절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그 무렵

1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2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들려 왔다.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들어다 놓았던 것이다.

3 그가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자선을 청하였다.

4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5 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쳐다보는데,

6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7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8 벌떡 일어나 걸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

9 온 백성은 그가 걷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는 것을 보고,

10 또 그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자선을 청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경탄하고 경악하였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 보기

루카복음 24장 13-35절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13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34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2026년 4월 8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

✚ 강론 시작 10:06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알아보지 못했던 이유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특별한 말이나 행동보다 그저 함께 있어 주는 것이 가장 큰 위로일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위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분을 알아 뵙지 못할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스승을 잃고 모든 희망이 무너진 제자들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엠마오로 향합니다.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조차 그들에게는 더 큰 혼란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슬픔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다가가셔서 성경을 설명해 주시고, 식탁에서 빵을 떼어 주셨습니다. 그때 비로소 제자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되풀이되는 중요한 낱말은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루카 24,25)라고 하시고, 제자들은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24,32)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마음’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깨닫고 이해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곧 부활은 말씀과 성체 안에서 그분의 현존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삶의 무게와 슬픔 때문에 주님을 알아 뵙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곁에서 ‘함께 걸으시는 분’이십니다.

고통을 없애 주시기보다는 함께 지시고, 평화를 위하여 우리와 함께 일하시며, 세상의 어둠 속에서 헤매는 우리에게 빛이 되어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제자들처럼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24,29) 하고 주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주님의 현존을 체험할 때, 우리의 마음은 다시 뜨거워지고 삶은 새로운 의미로 채워집니다. 언제나 당신 백성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예레 1,8).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없으면 줄 수 없고 가진 것을 주기에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자기가 가진 것을 주겠다고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구자를 치유해줍니다. 그러니 그는 은이나 금은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보며 자연스럽게 베드로 사도와 저를 비교하며 나도 베드로 사도처럼, 곧 나도 주님만 가지고 있다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을까 돌아보게 됩니다.

전에는 그렇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물질적으로 제가 가진 것이 없는 것은 아니고 프란치스칸답지 않게 너무 많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만 가지고 있다거나 주님밖에는 가진 것이 없다고 어느 정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진 것이 없지 않고 많아도 그것은 점차 제게 그리 가치 있지 않고, 주님께서 제게 더욱 그리고 점점 가치 있는 분이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제가 가진 것, 재물, 육체적인 힘, 인간적인 능력, 이런 것들은 점차 제게서 빠져나가고 없고, 그에 따라 자신감도 용기도 점차 사라지고 없습니다.

사랑은 어떨까요? 사랑은 제가 가지고 있을까요? 전과 비교할 때 더 많이 가지고 있을까요? 제 사랑이라고 말해도 될지 모르지만 제 사랑은 없어지고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은 점차 커지고 많아집니다.

물론 이 하느님 사랑이 성인들만큼 특히 프란치스코만큼 대단하지 않고 아주 미미해도 제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되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금가락지로 치면 전엔 큰 것을 가지고 있었어도 불순물이 많은 것이었다면 이제는 불순물이 점차 줄어들어 순금이 되어가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제 사랑 그릇이 작아 하느님 사랑이 제 안에서 많고 크지 않을지라도, 하느님 사랑은 작아도 크기에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 그리 부족함이 없습니다.

실로 우리는 없는 것을 줄 수 없고, 가진 것을 줄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줄 수 없습니다. 사랑이 있어도 하느님 사랑이 없으면 줄 수 없습니다.

내 사랑이 비록 작을지라도 하느님 사랑이 되게 하고, 내 사랑은 점점 작아지고 하느님 사랑은 점점 커지게 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그분 안에 숨겨져 있는 우리의 생명

아마 우리 모두는 실망과 절망에 빠져 본 적이 있을 것 입니다. 가던 길을 중단해버릴 만큼, 희망이 꺾인 적도 있을 것 입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버릴 만큼, 믿었던 바가 의혹과 불신으로 바뀌어버린 적도 있을 겁니다. 오늘 <복음>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16). 그들의 희망과 믿음은 변화되고 깊어지고 정화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건네십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루카 24,17)

“무슨 일이냐?”(루카 24,19)

그들은 먼저 그분에게서 일어난 일이 무슨 일인지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사실, 실망과 절망에 빠질 때가 가장 ‘위기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기회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실망하고 절망에 빠지고 슬퍼질 때, 바로 그때가 우리의 희망을 내려놓아야 하고, 우리의 믿음을 내려놓아야 할 때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때가 우리의 뜻과 생각이 변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눈이 가려져 있음을 깨달아야 할 때요,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요한 20,25)

그렇습니다. 알아야 할 바를 제대로 알아야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믿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성경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주시고,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빵을 떼실 때에”(루카 24,35) 그분을 알아보게 됩니다. ‘떼어내다’는 ‘분리하다’, ‘파괴하다’, 글자 그대로는 ‘으스러뜨리다’라는 의미의 동사이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눈’, 곧 ‘신비를 보는 눈’은 ‘떼어냄’, ‘부수어짐’, ‘으스러뜨림’에서 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부술 때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31)

그것은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그분 안에 숨겨져 있는 우리의 생명을 보는 일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는 까닭입니다.”(콜로 3,1-3).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복음 24장 16절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주님! 곁에 함께 걸으시건만, 당신을 알아 뵙지 못한 저를 용서하소서.

길동무가 되어 주시건만, 곁에 없는 것처럼 무시하였음을 용서하소서.

뼈 속 깊이 계시고 심장에 살아계시며, 발등에 등불이신 당신을 알게 하소서.

제 안에서 숨 쉬시며, 함께 걸으시는 당신을 알아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부활 신앙에 이르는 성경 읽기 방법

성경 제대로 읽는 법: 부활 신앙에 이르게 하라!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루카 24,25-26)

부활하신 주님을 찬미합니다! 오늘 우리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함께 걷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소문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절망에 빠져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왜 그들은 주님의 제자들이었으면서도, 그리고 빈 무덤의 소식을 들었으면서도 믿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성경을 '나의 눈'으로만 읽었기 때문입니다.

왜 성경을 읽으면서도 주님을 몰라보는가: 자기중심적 해석의 늪

유다인들은 성경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났을까요? 이 모든 오류의 공통점은 '자기 위주로 성경을 해석하려 한 것'입니다.

한 철학적인 우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두운 밤에 가로등 밑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행인이 물었습니다.

"무엇을 찾으십니까?"

"열쇠를 잃어버렸습니다."

행인이 함께 찾아주었지만 열쇠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행인이 다시 물었습니다.

"정확히 어디서 잃어버리셨나요?"

그러자 그 사람이 어두컴컴한 골목 끝, 십자가가 서 있는 쪽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기 구석진 곳입니다."

행인이 황당해서 물었죠.

"그런데 왜 여기서 찾고 계십니까?"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거기는 너무 어둡고, 여기는 가로등이 있어 밝으니까요."

유다인들이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성경은 하느님이 '낮고 천한 곳', '고통받는 십자가'에서 일하신다고 예언했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밝고 화려한 곳, 즉 승리와 번영이라는 '나의 욕망'의 가로등 밑에서만 메시아를 찾았습니다. 내가 보고 싶은 하느님만 찾으려 할 때, 성경은 진리가 아니라 나를 정당화하는 '잔소리'가 되고 맙니다.

성경은 예언의 성취이며 가슴을 뜨겁게 하는 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루카 24,27). 성경을 읽는 올바른 방식은 '나의 욕망'을 버리고 '예언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구약은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는 예언이고, 신약은 교회를 통해 우리 삶에서 성취되는 사건입니다. 예언의 성취가 우리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2세기 교회 학자인 성 유스티노(St. Justin Martyr)는 진리를 찾아 헤매던 철학자였습니다. 그는 플라톤 철학에 심취했지만 가슴은 늘 공허했습니다. 어느 날 해변을 걷다 한 노인을 만났는데, 그 노인은 유스티노에게 이렇게 일갈했습니다.

"철학자들은 진리를 추측할 뿐이지만, 예언자들은 성령에 사로잡혀 진리를 직접 보고 기록했소. 그들의 말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보시오."

유스티노는 즉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수백 년 전 예언자들이 말한 '고통받는 종'의 모습이 나자렛 예수의 십자가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취된 것을 목격하는 순간, 그의 가슴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는 『유다인 트리폰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 노인의 말을 듣자마자 내 영혼에는 즉시 불이 타올랐습니다. 예언자들과 그리스도의 친구들에 대한 사랑이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나는 비로소 이 철학만이 안전하고 유익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성경의 예언이 실재임을 깨닫고, 그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기쁘게 목숨을 바쳤습니다. (출처: 성 유스티노, 『유다인 트리폰과의 대화』 제8장)

현대에도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납니다.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 스콧 한은 원래 가톨릭을 싫어하던 개신교 목사였습니다. 그는 성경을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오직 성경'만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서학을 깊이 파고들수록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탈출기의 '파스카 어린양'의 예언과 요한 묵시록의 '천상 잔치'가 역사 속 어디에서 성취되고 있는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호기심에 가톨릭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사제가 빵을 들어 올리며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라고 선포하는 순간, 그는 벼락을 맞은 듯 전율했습니다. 수천 년 전 구약의 제사와 예언이 지금 이 제대 위에서 빵의 형상으로 실재(Real Presence)가 되어 성취되고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고백했습니다. "나는 성경을 읽어왔지만, 미사 안에서 성경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예언은 글자가 아니라 성체라는 살점이 되어 내 앞에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명예와 직업을 버리고 가톨릭으로 회심했습니다. 그에게 성경은 더 이상 연구 대상이 아니라, 미사를 통해 내 몸속으로 들어오는 '살아있는 잔치'가 되었습니다. (출처: 스콧 한, 『어린양의 제사』 1999)

이번 부활 시기, 우리도 엠마오의 길을 걸읍시다. 성경을 펴서 예언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시다. 내 자존심과 욕망의 안경을 벗고, 예언의 성취라는 사랑의 렌즈로 성경을 보십시오. 구약은 예수님에 의해 완성되지만, 신약은 교회, 곧 우리에 의해 완성됩니다. 성경의 가장 완벽한 해석은 우리 ‘부활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지금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을 강의 중에 던진 적이 있습니다. 이 질문에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말씀이 많습니다. 너무 추상적인 답이라며 구체적으로 말해보라 하면, 기껏해야 “돈 많이 벌어 잘 살고 싶다.”입니다. 이것이 과연 목표가 될 수 있을까요? 그냥 막연한 희망 사항일 뿐입니다.  

이 질문은 절대 간단하지 않습니다. 성장의 영역에서, 가족 관계 안에서, 직장과 삶의 터전 등 찾을 장소가 너무 많습니다. 이렇게 찾게 될 때, 막연한 목표가 아니라, 선명한 목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돈’이 목표인 경우가 참 많습니다. 돈은 수단일 뿐, 삶의 목표나 목적은 절대 될 수 없는데도 말입니다.  

돈이 목적이 되어 힘들게 사는 분을 보게 됩니다. 말씀마다 다 ‘돈’입니다. ‘돈’을 제외하면 삶의 의미가 사라질까요? ‘돈’ 때문에, 주님을 보지 못하고 그밖에 더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요?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스승의 죽음이라는 충격과 절망을 안고 예루살렘을 등진 채 엠마오로 도망치듯 걸어갑니다. 신앙의 공동체를 떠나 상실감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까이 가시어 함께 걸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런 영적 소경의 상태는 슬픔보다도 결정적으로 그들이 가진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해 줄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허무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 부활의 소식에도 믿지 못하고 침통할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아 주십니다. 십자가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예언자들이 예고한 구원 계획의 필연적인 과정이자 영광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임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비로소 영적인 눈이 완전히 열려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그들은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 시간이 분명 날이 이미 저물어 위험한 밤길인데도 말이지요. 절망의 목적지인 엠마오를 버리고, 고난의 장소이자 사명의 자리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기쁨과 용기로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엠마오의 여정은 우리 각자의 신앙 여정입니다. 세상일이 어렵고 힘들다면서 주님께 벗어나 피난처인 엠마오로 가려고 합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바라보면서 중요한 가치를 찾지 못합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면서 힘을 더해주십니다. 그리고 당신과 함께 할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늘 주님을 바라보도록, 함께하도록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진정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이기심이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오스카 와일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진정한 변화는 외부가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납니다. 우리는 주님을 찾지 못해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먼저 찾아오십니다. 신앙은 보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걸으며 깨닫는 여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끊지 않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로 가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우리가 걷고 있는가입니다. 엠마오의 길은 좌절의 길이 아니라, 동행 속에서 눈이 열리는 부활의 길입니다.

말씀 안에서 성찬 안에서 마음이 타오르는 내면이 불타는 체험입니다. 부활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삶의 의미를 다시 보게 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설득하려 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들의 보폭에 맞추어 그들의 길을 함께 걸어가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은 머무르지 않고 다시 길을 나섭니다. 절망의 길이 사명의 길로 바뀝니다. 마음이 살아나며 다시 삶으로 돌아가는 치유의 여정입니다.

두 제자는 특별한 길이 아니라 평범한 길 위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합니다. 평온할 때보다 흔들릴 때 드러납니다. 부활은 함께 살아가는 길입니다. 우리가 반복해서 하는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과 삶을 만들어갑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나누는 만남이 희망의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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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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