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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11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피어나네 2026. 4. 11.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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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믿음은 모든 것이 분명해진 뒤에야 생기는 것이 아니라, 아직 다 알지 못해도 사랑에 자신을 내어맡길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 같아요.

 

제자들은 부활의 소식을 여러 번 듣고도 믿지 않았지만, 그 만남 안에서 완전히 달라져 결국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저 또한 확신보다 먼저 맡김을 배우게 하시는 이 부르심 앞에 조용히 서 봅니다.

 

이런 머뭇거림 속에서도 머물러 주시고, 의심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으시는 그 한결같은 사랑에 감사합니다.

 

2026년 4월 11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성경 말씀 정리

 

2026년 4월 11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4월 11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사도행전 4장 13-21절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무렵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은

13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14 그러나 병이 나은 사람이 사도들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였다.

15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에게 최고 의회에서 나가라고 명령한 다음, 저희끼리 의논하며

16 말하였다. “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저들을 통하여 명백한 표징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에게 알려진 터이고, 우리도 그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17 그러니 이 일이 더 이상 백성 가운데로 퍼져 나가지 않도록, 다시는 아무에게도 그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만 합시다.”

18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지시하였다.

19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20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1 그들은 백성 때문에 그들을 처벌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거듭 위협만 하고 풀어 주었다. 그 일로 백성이 모두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 보기

마르코복음 16장 9-15절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9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다.

10 그 여자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11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12 그 뒤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14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5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2026년 4월 11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

✚ 강론 시작 10:13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믿음은 능력이 아니라 맡김이다.

오늘 독서는 학식과 권위를 자부하던 유다 지도자들 앞에서 담대히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사람들의 눈에 그들은 그저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사도 4,13)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병든 이를 고치고 두려움 없이 복음을 선포하며 참된 지혜를 드러낼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들의 신분이나 능력을 따져 물으시지 않았고, 제자들 또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한 채 오직 주님의 말씀과 권위에 이끌려 자신을 맡겼습니다.

그러나 수난의 시간 앞에서 그들은 다시 인간적 두려움과 계산이 앞섰고,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그 의미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여전히 불신과 완고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제자들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았고, 목숨을 바쳐 복음을 증언하는 참된 증인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체험한 기쁨, 그리고 그 만남 안에서 깨달은 사랑과 그 사랑이 지닌 능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그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이처럼 참된 믿음은 모든 것이 분명해 보일 때나 어떤 특별한 능력을 갖추었을 때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온전히 의지하며 내맡길 때, 그렇게 ‘투신’할 때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 죄의 깊이보다 깊고,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부족함의 크기보다 훨씬 더 큽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께 자신을 맡기는 믿음으로 그분의 참된 제자로 당당히 서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두려움은 마중물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들은 무식하다는 말을 유다 지도자들에게 듣습니다.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사도들이 무식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담대함과 용감함이 이 무식함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원래 무식하였고 용감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두려움이 많은 겁쟁이들일 뿐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돌아가신 뒤 그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다락방에 숨었지요.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요한 20, 19)

그러므로 사도들이 지도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은 그들에 대한 두려움 밑에 있던 사도들이 두려움 위에 있게 됐기 때문일 겁니다.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자기 집을 지킴에, ‘Timor Domini’가 있는 곳에 원수가 들어갈 곳이 없습니다.”라고 권고 27번에서 얘기합니다.

여기서 ‘Timor Domini’는 ‘주님께 대한 두려움’으로 흔히 번역되지만 ‘주님의 두려움’으로 번역할 수도 있으며 실은 두 가지 뜻을 다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대한 두려움과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두려움이 그를 지켜주기에 걱정이나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믿는 우리에겐 인간에 대한 두려움이 주님께 대한 두려움의 마중물이고 주님께 대한 두려움도 마중물로서 주님의 두려움을 안에 모셔 들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두려운 사람을 만나면 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 밑에 있기 때문이고 두려움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없는 사람이 두려운 사람을 만나면 잠시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눈길을 뺏겼다가도 즉시 하느님께 눈길을 돌리고 하느님께 달려갈 것입니다.

이는 아기의 두려움이 어미의 두려움인 것과 같습니다. 아기가 두려우면 즉시 어미의 품으로 달려가 안깁니다. 어미는 아기가 잘못될까 봐 미리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아기가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보다 더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아기는 걱정하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어미는 걱정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아기의 두려움이 어미의 두려움 안에 있으면 두려워할 것이 없듯이 우리 신앙인의 두려움도 주님의 두려움 안에 있으면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주님께서는 당신의 성령을 사도들에게 보내시어 담대하게 주님 부활을 선포하게 하셨듯이 우리에게도 두려움을 몰아내는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사도들에게서 배우고 격려를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부활은 믿음 안에서 체험하게 되는 신비

오늘 <알렐루야 환호송>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날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 118,24)

그렇습니다. 오늘, 이날은 우리가 만든 날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마련하시고 건네주신 날입니다. 인간에게 큰 사랑이 베풀어진 날이요, 당신의 죽음으로 부활생명을 선물로 주신 날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 날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막달레나 마리아도, 엠마우스의 두 제자들도, 모여 있던 열 한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는 못하였습니다. 맑고 투명한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은 까닭입니다. 이미 듣고 보았지만, 믿지를 않은 까닭입니다.

이를 믿게 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이를 우리는 요즈음 <독서>인 <사도행전>을 통해서, 부활을 믿는 이들 안에서 어떠한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계속해서 듣고 있습니다.

이처럼, 부활은 ‘믿음’ 안에서 체험하게 되는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믿음이 삶이 될 때, 비로소 깨닫게 되고 증거 됩니다. ‘믿음이 삶이 될 때’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당신의 몸을 매달 듯, 그렇게 자신을 내어놓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이 주어집니다.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그러니, 우리가 먼저 알아들어야 할 것은 온 세상에로 “가라”는 파견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자신 안에만 머물지 말고, 타자에게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원임을 말해줍니다. 마치 당신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향하여 먼저 다가오셨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파견 받은 자”가 되어야 하고, 파견하신 분의 뜻을 사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또한 우리는 파견 받았으되, “온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파견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곧 유다민족이나 이방민족이나. 우방이나 적국이나,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민족 온 인류에게로 가라는, 또한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로 가라는 파견이며,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파견입니다.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이웃이 되고, 형제가 되고, 한 가족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2015.6.18.)에서, ‘우리가 더불어 사는 집’인 ‘지구’가 “우리와 함께 사는 누이이며, 두 팔 벌려 우리를 품어주는 어머니”(1항)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피조물에 관한 책임을 설명해줍니다(제2장 피조물에 관한 복음).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형제에게, 모든 피조물에게, 이웃이 되고 형제가 되고 한 가족이 되어주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코복음 16장 15절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주님! 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로, 이웃에게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아가게 하소서.

먼저 다가가고,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자국민이나 이주민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

함께 걷되 손을 잡고 걷고,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게 하소서.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참된 사랑은 더 큰 사랑을 사랑하게 하는 것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요한 2,5)

찬미 예수님!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신심 미사를 봉헌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인 카나의 혼인 잔치는 우리 성모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나를 희생해서 상대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귀한 사랑입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한 차원 더 높은 사랑을 가르쳐주십니다. 진정한 사랑은 단순히 포도주를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그 포도주를 채워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심을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믿어서 그분 말씀에 순종하여 구원되게 만드는 것보다 큰 사랑은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너를 위해 내 인생을 다 바쳤다'라고 말하는 사랑을 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사랑을 받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숨이 막힙니다. 왜 그럴까요? 그 사랑의 목적지가 '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위해 이만큼 희생했으니 너는 이제 내 말을 들어야 한다"라는 무언의 압박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영적인 채무 관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성인처럼 사는 신앙인이나 성직자들에게서도 많이 일어납니다.

현대의 위대한 영성가 헨리 나우웬은 그의 저서 『내면의 목소리』에서 자신이 겪었던 영적 위기를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그는 라르슈 공동체에서 한 장애인 형제를 돌보며 밤낮으로 헌신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 형제가 나우웬이 아닌 다른 봉사자를 따르거나 주님의 평화를 느끼며 독립적인 모습을 보일 때, 나우웬은 묘한 질투심과 상실감을 느꼈습니다. 그때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헨리, 너는 그를 사랑하는 것이냐, 아니면 그가 너를 필요로 하는 그 상태를 사랑하는 것이냐?' 나우웬은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사랑이 사실은 상대가 나 없이는 살 수 없게 만듦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려던 이기적인 욕망이었음을 말입니다. 내가 도와줬으니 나를 믿으라는 사랑은 결국 상대를 내 자아의 감옥에 가두는 행위입니다.(출처: 헨리 나우웬, 『내면의 목소리』)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전혀 다르게 행동하십니다.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성모님은 하인들에게 "내가 해결해 줄 테니 걱정 마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혹은 "내가 예수의 엄마니까 내 말만 들어라"고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으셨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께 상황을 알리신 뒤, 하인들에게 가장 짧고 강력한 한마디를 던지십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요한 2,5).

이것이 성모님의 참사랑 실천법입니다. 성모님은 사람들의 시선을 자기에게 묶어두지 않으시고, 곧장 예수님께로 던져버리십니다. 내가 아닌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게 만드는 것, 그래서 기적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나를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게 만드는 것! 이것이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가장 큰 사랑입니다.

1841년 12월 8일, 돈 보스코 성인은 제의실에서 매를 맞던 떠돌이 소년 바르톨로메오 가렐리를 만납니다. 성인은 소년의 자존감을 살려주기 위해 다정하게 말을 건넸지만, 소년은 시종일관 "아무것도 못 합니다", "글도 모릅니다"라며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돈 보스코는 최고의 사랑을 베풉니다. 바로 소년이 '주님의 능력'을 끌어다 쓸 수 있는 통로를 열어준 것입니다.

"얘야, 그럼 나를 위해 성모송 한 번만 바쳐주겠니?" 소년은 주저하며 "저는 기도할 줄 몰라요"라고 답했습니다. 성인은 "내가 가르쳐줄 테니 시키는 대로만 따라 해보렴"이라며 소년과 함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성모송을 다 마쳤을 때, 소년의 눈빛이 바뀌었습니다. 훗날 가렐리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날 신부님과 성모송을 바치는 순간, 제 마음속에 있는 어둠이 걷히고 '나도 무언가 할 수 있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용기가 샘솟았습니다."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 대로 하면 ‘나도 무언가 할 수 있는 소중한 사람’이란 자존감이 생깁니다. 하느님은 그런 명령만 내리시기 때문입니다. 3일 뒤인 12월 11일, 가렐리는 약속대로 다른 떠돌이 소년 6명을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가렐리는 평범한 노동자가 아닌, 수많은 아이를 주님께로 인도하는 살레시오회의 첫 번째 사도가 되었습니다.(출처: 테레시오 보스코, 『돈 보스코 전기』; 살레시오회 역사 사료) 이것이 참사랑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인도해주는 것. 그래야 더 큰 자존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께 참사랑을 배웠습니다. 참사랑은 상대를 나에게 묶어두는 쇠사슬이 아니라, 주님께로 날려 보내는 날개입니다. 전설적인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의 유명한 일화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1930년대, 그는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연주했습니다. 연주가 끝나자 공연장은 떠나갈 듯한 갈채와 환호로 가득 찼습니다. 관객들은 지휘자의 천재적인 곡 해석에 매료되어 그에게 끝없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토스카니니는 그 영광을 자신의 것으로 가로채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격에 젖어 눈물을 흘리는 단원들을 향해 몸을 굽히고는 작게 속삭였습니다.

"여러분,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베토벤만이 모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목적지'가 되는 것을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베토벤의 위대함을 전하는 정직한 '표지판'일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연주자들이 지휘자 때문에 행복한 게 아닌 베토벤 때문에 행복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성모님을 닮은 참사랑 실천법입니다. 교부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마리아의 영혼이 우리 각자 안에 있어 주님을 찬송하게 하고, 마리아의 정신이 우리 각자 안에 있어 주님 안에서 기뻐하게 합시다. 우리가 마리아처럼 '그분께서 시키는 대로' 행할 때, 우리 삶의 맹물은 감미로운 포도주로 변화될 것이며, 우리 주변 사람들은 우리를 넘어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 암브로시오, 『동정녀론』).

나를 믿게 만드는 가짜 사랑의 유혹을 뿌리치고,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는 한마디로 사람들에게 구원의 믿음을 선물합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성모님과 함께 참된 사랑의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아내는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고, 아버지는 성모님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자녀를 가르쳐야 합니다. 참된 사랑은 더 큰 사랑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우리 마음에는 두 개의 마음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를 괴롭히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괴롭히는 마음이 작동할 때, 실패가 거듭되게 됩니다.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처럼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기를 괴롭히는 마음에서 나오는 말은 ‘잘 안될 거야. 내가 할 수 있을까?’ 등의 의심과 불안의 말입니다. 이런 말이 반복될수록 자기를 괴롭히는 마음의 크기가 더 커지게 됩니다.

이때 실패를 받아들이면서 자기를 아끼는 마음을 키워야 합니다. 자기를 아끼는 마음이 들어서면 실패는 끝나게 되면서,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절망이 괴롭히는 마음을 부른다면, 희망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 제자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과연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복음은 마르코 복음의 맺음말 앞부분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제자들의 불신입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마리아 막달레나의 말을 믿지 않았고, 시골로 가던 두 제자의 예수님 부활 증언 역시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웠던 제자들인데 왜 믿지 못했을까요?

자기를 아끼는 마음보다 자기를 괴롭히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부활 소식을 들었지만, ‘설마 정말 부활하셨을까? 예수님께서 계시지도 않고 또 예수님을 배신한 우리인데 무엇을 할 수 있겠어?’라는 의심과 불안의 말과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식탁에 앉아 있는 열한 제자에게 직접 나타나십니다. 복음서에서 식탁은 친교, 성체성사를 상징합니다. 그들이 당신을 배신하고 또 의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친교를 나누는 식탁으로 먼저 찾아오십니다. 그러면서 믿지 않는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제자들을 내치기 위해 꾸짖으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자기를 괴롭히는 마음을 깨부수기 위함이었습니다. 굳어버린 마음을 깨워서 온전한 믿음으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사명을 전하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이렇게 배반했고, 의심했던 부족한 사람을 오히려 당신의 도구로 삼는 주님이십니다. 이를 받아들이려면, 먼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실패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넘어 주님의 뜻을 따르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도 쉽게 포기하고 좌절에 빠집니다. 부족하고 나약하다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서 자기를 괴롭히는 마음을 키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큰 사랑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라고 하십니다. 그때 실패에도 주님의 뜻을 제대로 따를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온 힘 다해 세상에 선포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당신에게 당신의 길이 있고, 나에게 나의 길이 있다. 올바른 길, 정확한 길, 유한한 길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니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예수님의 부활은 개인적 구원만이 아니라, 창조 전체를 새롭게 하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생명 전체를 향한 책임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부활은 더 넓은 사랑으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모든 존재를 향해 생명을 살리는 부활의 참된 사랑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멀리 전해야 할 소식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존재를 사랑으로 다시 바라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복음 선포는 완벽한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진실한 사람이 하는 관계적 행위입니다. 두려움을 넘어 사랑으로 자신을 확장해 가는 내면의 성장이 중요합니다.

진실성과 인격을 통한 드러남이 바로 복음입니다. 더 나아가 오늘의 복음 선포는 만나는 모든 존재에게 생명과 사랑이 느껴지는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은 부활을 이야기하며, 부활은 복음을 완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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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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