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의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왔다.”는 말씀이 유난히 다르게 다가옵니다.
예수님은 이미 아버지와 하나이시기에 그 뜻이 곧 자신의 길이 되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문득 돌아보게 됩니다. 그분의 뜻을 맞추려고만 애쓰고 있는지, 아니면 아직도 내 뜻을 내려놓지 못한 채 계속 비교하며 머뭇거리고 있는지요.
오늘은 내 뜻보다 더 깊은 뜻이 먼저 찾으며 그 방향을 바라보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2026년 4월 22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4월 22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보기
- 지금 바로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 오늘 말씀 묵상 모아보기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사도행전 8장 1ㄴ-8절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1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2 독실한 사람 몇이 스테파노의 장사를 지내고 그를 생각하며 크게 통곡하였다.
3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
4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5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6 군중은 필리포스의 말을 듣고 또 그가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고,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7 사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8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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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장 35-40절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35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36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2026년 4월 22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
✚ 강론 시작 05:30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오늘 나는 무엇을 쥐고 있는가?
어느 누구도 고통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같은 고통이라도 그 의미와 열매는 다르게 나타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두 사람의 고통은 겉으로는 같아 보였지만, 한 사람에게는 절망과 저주, 다른 한 사람에게는 회개의 보속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고통은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구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이 생명을 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철저한 순종으로 아버지와 하나가 되시어,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자 겪으신 고통이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당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밝히십니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다]”(요한 6,38).
그리고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께서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6,39)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일치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의 빵’이 되셨습니다. 사람들과 가지는 관계 안에서, 자신을 거저 내주는 친교의 방식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은총을 체험하지 못한 채, 영적 목마름 속에서 삶의 고통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고통도 하느님의 뜻에 하나 되는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생명을 구하는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뜻’에 ‘나의 뜻’을 맞추고자 할 때, 우리는 그분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나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뜻에 내 마음을 온전히 일치시킬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께서 끊어주실 때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배고프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려면 당신이 생명의 빵이시라는 것을 믿고 당신께 오라고 주님은 오늘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뜯어보고 제게 적용하니 주님이 생명의 빵이시라는 것은 제가 잘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 가는 것은 가야지 하는 생각은 있지만 지금 만사 제쳐 두고 서둘러 가야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배고파야 서둘러 갈 텐데 배가 고프지 않은 것입니다. 목마라야 서둘러 갈 텐데 목이 마르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육신의 배만 고프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사실 저는 매일 성체를 모셔서 영적으로도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습니다. 옛날 군 생활 동안은 제가 육신의 배도 고팠지만 3년 동안 미사를 못 드리니 그때는 하느님 체험도 하지 못했을 때인데도 영적인 목마름이 아주 컸었지요. 그러니 관건은 배고프고 목마라야 간절할 텐데 그렇지 않은 겁니다.
그러나 아마 아직일 것입니다. 아직은 배고프지 않고 목이 마르지 않지만 언젠가는 저도 배고프고 목이 마를 겁니다. 요즘 들어와서 제가 자주 생각하는 것은 제가 스스로 하지 못하면 언젠가 머지않아 하느님께서 하게 해주실 것이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해주셨다고 프란치스코가 유언에서 고백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주님께서 형제들을 보내 주셨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주님께서 친히 알려주셨으며, 회개 생활조차도 주님께서 시작하게 해주셨고, 교회와 사제들에 대한 신앙심도 주님께서 주셨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것은 모두 다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 말 안에는 덜 좋은 것도 있고 더 좋은 것도 있다는 말이고 덜 좋은 것도 주시고 더 좋은 것도 주신다는 말이 들어있으며, 더 좋은 것을 주시려 덜 좋은 것으로 대리 만족하고 안주하는 제게 그것들을 끊는 고통도 주시리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주시려고 곡기를 끊게 해주실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육신 생명을 끊어주실 텐데, 주님께서 끊어주실 그 고통의 때에도 지금처럼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믿음으로 먹는 말씀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를 듣고 호수 건너편까지 찾아온 군중에게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빵" 아야기를 했을 때, 그들은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하고 간청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선언은 “나는 ~이다”(εγω ειμι)라는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선언문입니다. 당신 신비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에 대해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것은 당신 몸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빵은 내 몸이다.”라는 말씀은 한참 뒤에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생명의 빵”은 그분의 신성을 가리킵니다. ‘성찬의 빵’이 거기에 강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빵이 되듯, 이 신성은 말씀이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빵”입니다.”
그러니 “말씀이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빵”, 곧 ‘말씀의 빵’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셨을 때, 신명기(8,3)의 말씀을 들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또 예언자 아모스는 말합니다.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아모 8,11)
이는 예수님의 말씀이 ‘참돤 빵이요 참 생명’임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빵을 먹는 일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 벌어집니다. 곧 ‘예수님께 와서 말씀을 듣고 믿는 이’ 안에서 실현되는 빵입니다. 그래서 이 “빵”(말씀)은 믿는 이의 생명을 참된 생명에로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요한 6,39-40)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고, 아들은 그 뜻을 실현하는데 전념하십니다. 곧 ‘당신께 와서 보고 믿는 이들’을 살리십니다. 곧 구원이 바로 ‘아버지의 뜻’입니다.
빵을 먹는 일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 벌어지듯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 역시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에게서 벌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일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진정 우리의 ‘내적인 눈’이 열려야 할입니다. 곧 ‘믿음’으로 열리는 눈 말입니다. 그 눈은 바로 ‘믿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6장 37절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주님! 아래로 흐를 줄을 알게 하소서.
모든 것을 받아 흐르는 큰 강물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아래에 머물러 있을 줄을 알게 하소서.
모든 것을 끌어안은 큰 바다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믿어주지 않아도 믿어 주고, 사랑해주지 않아도 사랑해 주며 물리치기보다 품을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과 제 형제를 물리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살고 싶거든 살리십시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은 나다." (요한 6,40.48 참조)
찬미 예수님!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단 하나의 목적을 선포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살리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살리러 오신 분이기에, 생명을 살리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만이 생명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 명백한 생명의 빛 앞에서도 눈을 감고 "저건 속임수다!"라고 외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은 '인식의 자격'과 '생명의 감각'에 대해 1시간 동안 깊이 탐구해 보겠습니다.
1879년, 프랑스 느베르 수녀원에서 35세의 나이로 선종한 성녀 베르나데트 수비루의 시신은 1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부패하지 않은 채 생생한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1909년, 1919년, 1925년 세 차례에 걸친 공식 검시에서 의사들은 경악했습니다. 내부 장기는 여전히 탄력이 있었고, 혈관 속에는 액체 상태의 혈액이 남아 있었으며, 피부는 마치 잠든 사람처럼 부드러웠습니다.
이것은 과학을 초월한 하느님의 '생명 수호'의 표징입니다. 하지만 이 기적 앞에서 세상은 둘로 나뉩니다. 믿는 자들은 하느님의 전능함에 전율하며 자신들도 그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기를 희망합니다. 반면, 믿지 않는 자들은 "방부 처리를 한 것이다", "밀랍 인형으로 바꿔치기했다"라며 온갖 음모론을 쏟아냅니다.
왜 똑같은 실체를 보고도 반응이 다를까요? 결론은 간단합니다. 생명을 주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피 한 방울, 시간 한 조각을 내어줘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위로부터 내려온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하지 못하니 하느님도 하실 리 없다고 믿는 지적인 자폐 상태, 이것이 바로 영적 불신의 본질입니다. 생명의 감각이 죽은 자에게 기적은 그저 정교한 마술에 불과합니다. (출처: 르네 로랑탱, 『루르드의 베르나데트』)
인간은 자신이 가진 것을 타인에게 투사(Projection)합니다. 내 안에 생명을 살리려는 선의가 없으면, 타인의 숭고한 행동조차 '비열한 연극'이나 '정치적 계산'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체를 보면서도 주님의 사랑이 아니라 '종교적 사기'를 봅니다.
소설 속 자베르 형사는 법과 응징만이 정의라고 믿는 인물입니다. 그는 미리엘 주교가 은식기를 훔친 장 발장에게 은쟁반까지 내어주며 용서하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 그것을 '숭고한 사랑'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자베르의 머릿속에서 주교의 행위는 '범죄자를 교묘하게 심리적으로 굴복시키려는 위선적인 기술'이거나 '질서를 어지럽히는 노망난 노인의 실수'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평생 누군가를 살려본 적이 없고 오직 잡아 가두는 일만 했기에, 생명을 살리는 '자비'라는 단어를 자신의 사전에서 지워버렸습니다. 나중에 장 발장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줬을 때도, 자베르는 그 선행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악당이 나를 살릴 리가 없다! 이건 나를 모욕하는 것이다!"라고 비명을 지르며 센강에 몸을 던집니다. 자신의 내면이 어두우면 빛조차 자신을 태우는 불길로 느끼게 됩니다. 생명을 살리려는 의지가 없는 자에게 하느님의 나라는 가장 고통스러운 감옥이 됩니다. (출처: 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
반면, 작은 생명이라도 살리려 애쓰는 사람은 그 실천을 통해 하느님의 마음으로 한 걸음씩 다가갑니다. 등불을 사랑하다 보면 태양을 갈망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위대한 인도주의자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의 회고록을 보면, 그의 신앙은 '살리려는 의지'와 함께 성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친구들이 새총으로 새를 잡으러 가자고 했을 때 그는 거절하지 못하고 따라갔습니다. 하지만 나무 위에 앉아 노래하는 새를 조준하는 순간, 마을 성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 소리는 그에게 "살려라!" 하는 하느님의 음성처럼 들렸습니다. 그는 새총을 던져버리고 박수를 쳐서 새들을 날려 보냈습니다.
이 작은 '살림의 경험'은 그의 영혼에 거대한 지진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이후 곤충 한 마리도 함부로 죽이지 않으려 애썼고, 30세가 되던 해에 "이제부터는 나를 위해 살지 않고 남을 살리는 데 내 생명을 다 쓰겠다"라고 결단하며 아프리카 가봉의 랑바레네로 떠났습니다. 슈바이처는 환자들의 썩어가는 살점을 닦고 그들을 살려내면서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생명을 살리려는 나의 이 갈망은, 바로 나를 살리려 하시는 하느님의 갈망이 내 안에서 메아리치는 것이었구나!"
그는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시는 예수님을 보며, 그것이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온 인류를 살리려는 '우주적인 생명 경외'의 정점임을 단번에 이해했습니다. 생명을 아끼는 연습이 그를 신학의 문자로 된 예수님이 아니라, 살아서 역사하시는 생명의 주님께로 인도한 것입니다. (출처: 알베르트 슈바이처, 『나의 생애와 사상』)
살리려는 의지는 무신론자의 굳게 닫힌 마음도 단숨에 부활시킵니다. 밀라노에 사는 청년 안드레아는 철저한 유물론자였습니다. 그는 신을 믿는 이들을 나약한 패배자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폭우가 쏟아지던 밤, 그는 길가 배수구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테지만, 그날따라 고양이의 절박한 눈망울이 그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는 차가운 물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진흙투성이가 된 고양이를 건져 올렸습니다. 자신의 비싼 외투 안으로 고양이를 품고 집으로 달려와 밤새 체온을 나눠주었습니다. 새벽녘, 고양이가 기적처럼 눈을 뜨고 가냘프게 야옹 소리를 내며 안드레아의 손바닥을 핥았을 때, 그는 전율했습니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작은 심장의 박동, 그 생명의 신비 앞에 안드레아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내가 이 보잘것없는 생명을 살리려고 이렇게 행복해하다니! 그렇다면 이 생명을 만드시고, 지금 나를 살려두고 계신 분은 얼마나 더 큰 기쁨으로 나를 보고 계실까?'
이 질문은 그를 성당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제대 앞에 서서 신부님이 들어 올리는 성체를 보았습니다. 이전에는 그저 밀떡 조각으로 보이던 그것이, 이제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하느님이 품고 계신 뜨거운 심장'으로 보였습니다. 안드레아는 고백했습니다.
"내가 고양이를 살렸을 때 느꼈던 그 절박한 사랑이, 바로 저 빵 안에 들어있음을 저는 온몸으로 느낍니다."
생명을 살려본 사람만이 생명의 주인을 알아봅니다. (출처: 이탈리아 가톨릭 잡지 『Famiglia Cristiana』 회심 사례 재구성)
남을 비난하고 죽이는 일에 익숙한 손은 결코 성체 안에 계신 주님을 만질 수 없습니다. 작은 생명이라도 살리려 애쓰십시오. 상처받은 이웃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고, 절망에 빠진 이에게 희망의 손길을 내미십시오. 여러분이 누군가를 살릴 때, 여러분의 영안(靈眼)이 열릴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50년 전의 물건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면 어떨까요? 오래된 물건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 가치가 올라갑니다. 그런데 50년 전의 것인데도 그 보관 상태가 아주 좋다면 어떨까요? 그 가치는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 가치를 몰라서 함부로 다룬다면 어리석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오래될수록 더 귀하게 여기고 소중하게 다루게 됩니다.
지금은 하느님 나라에 계시지만, 제1대 인천 교구장님이셨던 나굴리엘모 주교님의 방에서 보았던 오래된 타자기가 생각납니다. 주교님께서는 좋은 타자기지만, 이제는 컴퓨터로 인해 쓸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었습니다. 쓸모없는 물건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이 타자기는 인천교구 박물관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물건만 그럴까요? 사람도 그렇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가치가 높아집니다. 그런데 그 가치를 보지 않고 함부로 다룹니다. 나이를 커다란 흠이라 생각하고, 젊었을 때보다 힘없고 능력도 떨어졌다면서 가치가 전혀 없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이 나이 안에 역사가 담겨 있기에 가치는 계속 올라갑니다.
나이가 들수록 할 수 없는 것이 많아짐은 당연합니다. 자존감이 떨어지면서 화가 많아지고 부정적인 생각도 늘어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자기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반면, 나이 먹으면서 익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삶의 연륜을 가지고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환하게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자기 역사로 가치를 높이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은 신앙의 여정을 걷는 우리에게 깊은 안도감과 동시에 명확한 시선을 요구합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요한 6,37)라는 말씀에 얼마나 커다란 위로를 받게 됩니까? 부족함을 계속 느낄 수밖에 없는 우리이지요. 그러나 주님께 가는 사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그분 사랑에 큰 감동을 받게 되면서, 그 사랑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당연히 매일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보고 믿음으로써 이미 시작된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과거의 죄, 자격지심, 실패와 상관없이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그분은 결코 우리를 내치지 않으시는 완벽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하느님의 뜻이 당연히 개인의 뜻을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않는 군중처럼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은 너무나도 큽니다. 이 사랑을 받아들여야 그에 따른 보상도 큽니다. 나의 가치는 계속 올라가면서 지금을 더 힘차게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보다 자기 뜻을 드러내는데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명언
사람에게 이기려면 게임으로 이기려 해서는 안 된다. 연습과 노력으로 이겨야 한다(벤호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소중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지나쳐 버리기 쉬운 우리들 삶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지 못하며 살고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지식을 넘어 존재 전체를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맡기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문제는 모름이 아니라 믿지 않음과 살지 않음에 있습니다. 믿음은 감정이 아니라 올바른 실천으로 이어지는 결단입니다.
생명의 빵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받아들이지 못해 우리가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 믿음은 가짜 믿음입니다. 더 많은 것을 보려는 욕심이 아니라 이미 본 것을 잊지 않는 충실함이 믿음입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증명하려 하면서도 정작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맡기고 살아가는 데에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믿음 앞에서 머뭇거리는 존재입니다.
더 많은 것을 보는 데 있지 않고, 이미 맛 보고 있는 생명의 빵을 온 존재로 받아들이고 살아내는 믿음의 삶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며 살아가는 믿는 마음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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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