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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6.04.23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피어나네 2026. 4. 23.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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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제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오늘 말씀에 오래 머물고 있어요.

신앙은 깨닫기 이전에 먼저 이끌려서 들어가게 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스스로 온 줄 알았는데, 되돌아보니 그 모든 순간이 그분의 계획 안에 이미 이어져 있던 길이었습니다.

오늘도 혼자 알아가려 하기보다 이끌어 주시는 은총 안에 머물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말씀을 통해, 사람을 통해, 상황을 통해 끊임없이 당신께로 이끄시는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2026년 4월 23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성경 말씀 정리

 

2026년 4월 23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4월 23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사도행전 8장 26-40절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그 무렵

26 주님의 천사가 필리포스에게 말하였다. “일어나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거라. 그것은 외딴길이다.”

27 필리포스는 일어나 길을 가다가 에티오피아 사람 하나를 만났다. 그는 에티오피아 여왕 칸다케의 내시로서, 그 여왕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는 고관이었다. 그는 하느님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 돌아가면서, 자기 수레에 앉아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었다.

29 그때에 성령께서 필리포스에게, “가서 저 수레에 바싹 다가서라.” 하고 이르셨다.

30 필리포스가 달려가 그 사람이 이사야 예언서를 읽는 것을 듣고서,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알아듣습니까?” 하고 물었다.

31 그러자 그는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서, 필리포스에게 올라와 자기 곁에 앉으라고 청하였다.

32 그가 읽던 성경 구절은 이러하였다. “그는 양처럼 도살장으로 끌려갔다.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린양처럼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33 그는 굴욕 속에 권리를 박탈당하였다. 그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제거되어 버렸으니 누가 그의 후손을 이야기하랴?”

34 내시가 필리포스에게 물었다. “청컨대 대답해 주십시오. 이것은 예언자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입니까? 자기 자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입니까?”

35 필리포스는 입을 열어 이 성경 말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그에게 전하였다.

36 이렇게 그들이 길을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자 내시가 말하였다.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37)·38 그러고 나서 수레를 세우라고 명령하였다. 필리포스와 내시, 두 사람은 물로 내려갔다. 그리고 필리포스가 내시에게 세례를 주었다.

39 그들이 물에서 올라오자 주님의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데려가셨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지만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다.

40 필리포스는 아스돗에 나타나, 카이사리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을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 보기

요한복음 6장 44-51절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45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46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4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50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2026년 4월 23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37

✚ 강론 시작 08:03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보이지 않는 손길을 믿습니다.

작가 칼릴 지브란은 말합니다.

“보여 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그 뒤에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위대함에 견주어 보면.”

눈에 보이는 사건 너머에 보이지 않는 더 큰 사랑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의 말대로, 우연처럼 보이는 일 뒤에도 하느님의 사랑과 예비하심이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그 모습이 드러납니다. 주님께서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가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필리포스를 먼저 준비시켜 보내십니다. 내시가 말합니다.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사도 8,31)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 6,44).

주님께서 먼저 나를 선택하시고 이끌어 주셨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참된 신앙이 시작됩니다. 모세의 손을 통하여 홍해가 갈라졌지만, 그 일을 이루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던 이스라엘의 잘못을 되풀이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현실에서 도움을 받거나 바라는 일을 이루기 위한 신앙을 넘어 하느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을 믿어서 삶이 변화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눈에 보이는 사건이나 사람에게만 의지하고, 그 뒤에서 이끄시는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인간적 한계와 실망 앞에서 믿음마저 흔들릴 수 있습니다.

필리포스가 떠난 뒤에도 내시는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갑니다]”(사도 8,39). 사람에게 의지하기보다 자신을 이끄시는 하느님의 은총 안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일상 속에서, 나를 이끄시는 분이 결국 하느님이심을 기억하며 이렇게 고백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제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이끌리고 이끄는 나

오늘 사도행전과 복음에서 공통으로 나오는 말이 바로 “이끌어 주지 않으면”입니다.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그래서 오늘은 ‘이끌리는 사람’이라고 주제를 잡아봤습니다. 이끌린다는 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줏대 없이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줏대 있고 성숙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가는 길을 잘 알아 찾아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사실 그럴 수 있으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길을 그럴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잘못 가는 일이 허다한데 주님께 가는 길을 이끌리지 않고 실수 없이 갈 수 있겠습니까?

이 지점에서 바오로 사도를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매우 똑똑했고 하느님을 누구보다 열심히 믿는 사람이었지만 자신도 주님께 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선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더욱이 그는 가말리엘이라는 아주 훌륭한 스승 밑에 있던 사람입니다. 가말리엘이 어떤 사람입니까?

유대교 지도자들이 사도들의 활동을 막으려고 할 때 사도들의 활동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면 막으려는 것이 하느님 뜻을 막는 것이 될 것이고,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면 가만둬도 저절로 망할 것이라고 얘기했지요.

그렇게 훌륭하고 현명한 스승이 있었는데도 바오로 사도는 스승의 말을 따르지 않고 자기 믿음 대로 주님을 박해하는 일에 나섰지요.

그러니 그는 그저께 스테파노가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했던 바로 그런 사람이었지요. 결국 하느님께서 직접 나서셨습니다.

그가 가는 길을 주님께서 직접 막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성찰도 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누구에게 이끌리고 있는가? 인간 누구에게인가? 하느님에게인가? 성령인가? 악령 또는 더러운 영인가? 그리고 오늘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그러니까 나는 하느님 말씀에 이끌리는 사람인가? 또 필리포스처럼 성령으로 누군가를 주님께 이끄는 사람인가? 그리고 이런 성찰을 바탕으로 주님께 이끌리고 이끄는 내가 되기로 마음먹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살아있는 빵

어제 <복음>과 오늘 <복음> 사이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군중들은 그분의 신원을 두고 수군거렸습니다(요한 6,4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살아있는 빵”이란 당신께서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빵, 건너와 관계를 맺는 활동 중인 “빵”임을 말해줍니다. 곧 자신을 죽여 타인을 살리고 있는 ‘살아있는 활동 중인 빵’입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빵”은 동시에 “살리는 빵”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곧 먹혀서 먹는 이 안에서 ‘부활하는 빵’이요, 먹는 이를 ‘영원히 살게 하는 빵’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그 빵을 가지고 계실뿐만 아니라 그것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주시는 이 빵은 다름 아닌 “당신의 살”, 곧 먹혀서 ‘먹는 이’에게서 살아있는 살이 되고, 당신의 생명이 되게 하는 ‘살’입니다.

이는 당신의 증여를 통해서, 우리 안에서 죽음을 몰아내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참으로 놀라운 ‘신비’입니다. ‘사랑의 신비’입니다. 우리를 당신 신성에 들게 하고, 우리를 부활시키시는 신비입니다. 그러니 “부활”은 단지 죽지 않고 사는 것만이 아니라 ‘드높여지고 영광 되는 일’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감탄하올 신비인가!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참으로 크나 큰 ‘사랑의 신비’입니다.

그러나 이 “생명의 빵”을 ‘먹을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는 우리 스스로가 응답해야 할 몫입니다. 만약 이를 알면서도 먹지 않는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를르의 체사리우스는 말합니다.

“만일 누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먹지’ 않는다면, (먹지 않고 저장된) 말씀은 만나에 구더기가 들끓었듯이 구더기가 들끓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살아있는 이 ‘빵’, 바로 하느님의 참된 사랑을 받아먹고 살아갑니다. 바로 이 큰 사랑 안에서 우리는 생명을 얻어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요한 6,51)이라 하셨으니, 이제 그 살을 먹은 우리 역시 ‘세상에 생명을 주는 살’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생명이 제 삶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먹혀서 저를 살리듯, 저도 먹혀서 타인을 살리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6장 51절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주님! 오늘도 당신께서는 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당신 자신을 쪼개어 떼어 주시오니, 당신의 생명이 제 삶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제 생명이 당신의 생명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먹혀서 저를 살리듯, 저도 먹혀서 타인을 살리게 하소서.

제 살이 세상에 건네주는 빵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생명의 양식은 나를 먹고 새 삶의 방식을 제공한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요한 6,51)

찬미 예수님!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을 먹어야만 영원히 살 수 있다는 파격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우리는 보통 '먹는다'는 행위를 내가 대상을 파괴하여 내 몸의 영양분으로 만드는 일방적인 약탈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의 '먹음'은 정반대입니다. 그것은 내가 먹은 대상에게 내가 다시 먹힘으로써, 나의 낡은 주권이 사라지고 그 양식의 새로운 법칙에 의해 재창조되는 '거룩한 통합'의 사건입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에너지(은총)'와 '법칙(진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진짜로 오래 살게 만드는 양식은, 내가 그것을 먹었을 때 오히려 그것이 나를 먹어치우고 나에게 새로운 생활 방식과 에너지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먹음으로써 먹히는' 신비가 어떻게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는지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파헤쳐 보겠습니다.

현대 생물학의 『세포 내 공생설』(Endosymbiotic Theory)은 먹고 먹히는 관계가 어떻게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지 보여주는 가장 완벽한 모형입니다. 우리 몸의 에너지를 만드는 '미토콘드리아'는 원래 독립된 박테리아였습니다.

약 20억 년 전, 거대한 세포 하나가 이 작은 박테리아를 잡아먹었습니다. 일반적인 자연계라면 박테리아는 소화되어 사라졌겠지만, 여기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먹힌 자(미토콘드리아)가 죽지 않고 오히려 먹은 자(대세포)의 자원을 먹으며 그 안에서 '에너지 공장'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논리가 나옵니다. 세포는 미토콘드리아를 먹었지만, 결과적으로 세포의 주권은 미토콘드리아의 법칙에 먹혔습니다. 이제 세포는 미토콘드리아가 제공하는 '에너지의 법칙' 없이는 단 1초도 살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성체성사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의 자아를 땔감 삼아 태우시고, 그 대신 '성령'이라는 하늘의 에너지를 방출하십니다. 내가 주님을 먹었으나 결국 그분의 에너지에 내가 먹힘으로써 그분의 방식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출처: 린 마굴리스, 『공생자 행성』)

생명의 시작인 '수정' 과정 또한 이 일치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난자가 정자를 받아들이는 순간, 난자는 정자를 '먹습니다.' 하지만 그 찰나에 난자의 운명은 정자가 가져온 유전 정보라는 법칙에 완전히 먹힙니다.

정자가 가지고 온 유전자라는 '법칙(진리)'이 난자의 핵 속으로 침투하여, 난자를 이제 더 이상 난자가 아닌 '태아'라는 전혀 새로운 정체성으로 재창조하기 때문입니다. 난자의 생명 주기는 고작 1달이지만, 정자를 먹고 그것의 법칙에 자신을 내어줄 때 비로소 9달을 살고, 다시 수십 년을 사는 인간으로 태어납니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 영혼이 바로 이 난자와 같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먹음)하지만, 그분의 신성한 법칙이 내 영혼을 먹어치워 나를 '죄인'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완전히 탈바꿈시킵니다. 먹었으나 먹힘으로써 이전의 나는 죽고, 그리스도의 법칙으로 움직이는 새로운 인간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출처: 스콧 길버트, 『발생생물학』)

이제 요한복음 21장의 신비를 연결해 봅시다. 베드로가 낚아 올린 153마리의 물고기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상징합니다. 베드로(교회)는 그들을 그물로 낚아 올렸습니다. 어떻게 잡았을까요? 바로 그들에게 '먹힘'으로써 잡습니다. 낚시꾼은 미끼를 내어주고 물고기를 잡듯, 교회는 성체라는 미끼를 세상에 내어줌으로써 영혼들을 낚아 올립니다.

하지만 잡힌 물고기들은 결국 어부의 에너지와 법칙을 따라야 합니다. 물고기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유일한 길은 교회의 입속으로, 즉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으로 '먹혀 들어가는' 것입니다. 물고기가 물속에만 있으면 그저 짐승일 뿐입니다.

하지만 베드로(교회)에게 잡히고, 그리스도의 지체들에 의해 '먹히게' 될 때 그 물고기는 비로소 '하느님 자녀'라는 영광스러운 정체성으로 통합됩니다. 먹힌다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한낱 미물이었던 존재가 하느님 가족의 살과 피로 재구성되는 승격의 사건입니다. (출처: 성 아우구스티누스, 『요한복음 주해』)

여기서 우리는 아주 실존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과연 무엇을 먹으며 살고 있는가?" 인간은 먹는 대로 됩니다. 삼겹살을 먹으면 돼지 세포가 내 몸을 구성하듯, 내가 어떤 '사상'과 '논리'를 먹느냐에 따라 내 인생의 길이 결정됩니다.

그리스도를 먹으면 새로운 운영체제(OS)가 설치됩니다. 우리가 세상의 지식이나 돈을 먹으면, 그것은 나의 '삼구(욕망)'를 채우는 도구가 될 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라는 빵을 먹으면, 우리 영혼에는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인생 운영체제(OS)'가 설치됩니다.

이 신비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성인은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입니다. 그녀는 어느 날 기도 중에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주님, 제 마음을 당신께 다 드릴 테니 당신의 마음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자 놀라운 환시가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가타리나의 가슴을 열어 그녀의 심장을 꺼내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녀의 심장을 '먹어(흡수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며칠 뒤, 주님은 당신의 불타는 심장을 가타리나의 가슴 속에 넣어주셨습니다.

이후 가타리나는 고백했습니다.

"이제 저는 제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생각합니다. 제 안의 낡은 가타리나는 주님의 사랑에 먹혀 사라졌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제 안에서 숨 쉬고 계십니다."

그녀가 주님께 먹히기를 자처했을 때, 그녀는 일개 여인이었음에도 유럽의 평화를 이끄는 하느님의 대사가 되었습니다. 나를 먹어주시는 주님을 모실 때 비로소 우리는 위대한 존재로 상승합니다. (출처: 레이몽드 드 카푸아,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전기』)

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 부르셨을까요? 세상의 다른 모든 양식은 나를 '나'로 남겨두지만, 예수님은 나를 먹어치워 '하느님'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빵은 내 위장을 잠시 채우고 썩어 없어지지만, 위에서 온 양식은 내 자아를 먹어치우고 나를 영원으로 인도합니다. 미토콘드리아가 세포의 영양분을 먹고 대신 빛과 열을 내주듯, 여러분이 모시는 성체가 여러분의 이기심을 먹게 하십시오. 그분이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의 자존심을 땔감 삼아 성령의 불꽃을 피우게 하십시오.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마지막 권고를 가슴에 새깁시다.

"그대는 그대가 먹는 바로 그것(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야 한다. 먹힘으로써 그대의 비천한 인성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신성이 채워질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유일한 방식이다." (출처: 성 아우구스티누스, 『강론집』 272).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전 세계적으로 컴퓨터 수요는 다섯 대 정도만 있을 것이다.”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보유한 컴퓨터만 해도 3대(집무실, 사제관, 노트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IT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한 것도 아닙니다. 상업용 컴퓨터 시장을 개척했던 IBM 창업자 토마스 왓슨의 1943년에 했던 말입니다.

미국 통신 재벌 AT&T는 컨설팅 기업 매켄지에 1980년대 초에 휴대전화 사업에 뛰어들지를 물었습니다. 답변은 “2,000년이 되어도 휴대전화 이용자는 100만 명이 못 될 것”이라고 조언했고, 이 조언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2,000년 휴대전화 가입자는 7억 명이 넘었고, 매켄지 컨설팅으로 AT&T는 꿈의 사업 기회를 날리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자기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빠르게 변화합니다. 그래서 2,300년 전 중국 전국시대 사상가 한비자에 말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이 달라지면 일이 달라지고, 일이 달라지면 대비하는 방법도 달라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반대했던 사람들, 그들은 변화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우리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을 나의 선택이나 의지의 결과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본질이 철저한 하느님의 은총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 6,44)라고 하십니다. 결국 신앙은 인간의 탐구력으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 비로소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죽음을 뛰어넘는 생명의 빵을 주십니다.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빵을 먹는 자는 육체적으로 죽음을 맞이할지라도, 영혼은 절대 죽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다가올 십자가의 희생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며, 이는 미사 때마다 우리가 모시는 성체성사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단순히 좋은 가르침이나 기적을 주시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당신 자신을 통째로 찢어 양식으로 내어주시는 분입니다. 이런 사랑 앞에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성체를 모시고 있을까요? 성체는 단순한 상징이나 습관이 아닙니다. 참된 생명의 양식입니다. 이 주님의 뜻에 맞춰 우리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반성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소크라테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살아 있는 빵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일상 속 선택과 방향을 묻고 있습니다. 우리 삶 안으로 들어오시는 한 인격의 초대입니다. 우리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은총이 바로 생명의 빵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살리는 양식인지, 무엇이 우리를 더 공허하게 만드는 양식인지를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멀리서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를 살게 하시는 생명이십니다.

우리는 결국 어떤 생명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우리 존재는 결정됩니다.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생명을 필요로 합니다. 생명을 소유하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생명이 우리를 변화시키도록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참된 삶은 더 많이 얻는 데 있지 않고, 우리를 살리는 것을 선택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우리의 정체성과 삶의 방향이 결정됩니다.

살아 있는 빵이 우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이 곧, 우리를 살게 하는 일치의 참된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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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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