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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6.04.24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피어나네 2026. 4. 24.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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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는 오늘 말씀이 참 아름답게 다가와요.

신앙은 무언가를 더 많이 이해하고 알아가는 일이라기보다, 함께 살아가는 관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분을 멀리서 바라보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분이 삶 안으로 들어오시고 삶 또한 그분 안에 머물게 되는 것… 지금 이 순간, 그분과 더 이상 거리를 둘 수 없는 관계로 초대해주심에 감사합니다.

 

2026년 4월 24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성경 말씀 정리

 

2026년 4월 24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4월 24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사도행전 9장 1-20절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그는 민족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그 무렵

1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 대사제에게 가서,

2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에 보내는 서한을 청하였다.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3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4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자기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5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6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7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도 볼 수 없었으므로 멍하게 서 있었다.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갔다.

9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10 다마스쿠스에 하나니아스라는 제자가 있었다. 주님께서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예, 주님.” 하고 대답하자

11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곧은 길’이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있는 사울이라는 타르수스 사람을 찾아라. 지금 사울은 기도하고 있는데,

12 그는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들어와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을 보았다.”

13 하나니아스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 제가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습니다.

14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을 모두 결박할 권한을 수석 사제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16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17 그리하여 하나니아스는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안수하고 나서 말하였다.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18 그러자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19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낸 뒤,

20 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 보기

요한복음 6장 52-59절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그때에

52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59 이는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신 말씀이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2026년 4월 24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

✚ 강론 시작 07:26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살아 있는 빵의 의미

신앙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남겨 주신 것을 통하여 그분을 기억합니다. 놀라운 신비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당신을 기억하게 하시면서도 그것을 그저 과거의 추억으로만 두시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계속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시간을 넘어 과거와 현재의 벽을 허무시고, 하늘 나라와 이 세상의 경계를 넘어, 오늘 이 자리에서 당신을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남겨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성체성사의 의미와 신비를 구체적으로 밝혀 줍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요한 6,51)이라고 선포하신 것은, 예수님께서는 저 멀리서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곁으로 내려오셔서 지금 우리의 삶에 힘이 되어 주시는 ‘살아 있는’ 양식이심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살과 뼈를 지닌 인간으로 이 땅에서 사셨으며, 전설 속 영웅처럼 사라진 존재가 아니라, 오늘도 성체 안에서 살아 계신 분으로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며, 하늘과 땅을 이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받아 모신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영원한 생명을 맛보는 새로운 삶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성체성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친교를 나누고, 그분을 닮아 그분과 하나 되어 살아가겠다는 응답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성체성사는 바로 이 일치를 이루는 기적입니다.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하루하루 내 삶의 자리에서 그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울을 따라 회개의 여정을

오늘 사도행전이 전하는 사울의 회개와 관련하여 그의 행위랄까 동작을 가지고 오늘은 한 번 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스테파노의 순교에 이미 가담한 사울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 길을 떠나 다마스커스로 갑니다.

어제 하느님께 이끌리는 것에 관해서 봤고 바오로 사도가 처음에는 하느님께 이끌리지 않고 자기 믿음 대로 갔다고 이미 얘기한 바 있지요. 그러므로 회개 이전의 상태랄까 단계는 하느님께 이끌리지 않고, 자기 좋을 대로 또는 자기 생각이나 믿음 대로 가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렇게 하느님을 열심히 믿고 섬긴 사울인데도 하느님께 이끌리지 않고 자기가 옳다고 굳게 믿고 죽이러 간다는 것입니다. 살기를 내뿜은 것을 보면 그의 맘에 증오가 마음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증오심으로 예수님 상 머리를 망치로 부순 이스라엘 병사처럼 사울도 증오심으로 죽이러 가면서 옳은 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하느님 뜻이라고 믿었을 겁니다.

요즘 고백성사 주며 자주 듣는 고백이 트럼프와 네타냐후가 죽었으면, 죽기 바라는 것은 너무한 것 같아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 신자들이 훌륭하고 올바른 신앙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그 죄가 크고 악해도 죽기를 바라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대로 맡기지 않고 내 뜻대로 되길 바라는 것이 되는 거지요.

둘째로 이런 사울을 하느님께서는 엎어지게 하십니다. 분명한 것은 사울 스스로 엎어진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스스로 엎어졌거나 스스로 엎어졌다고 생각했다면 사울은 회개는 시작도 하지 못하고 자책이나 하다 끝났을 겁니다.

셋째로 사울은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고 주님께서 엎어지게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엎어짐으로써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게 되고,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주님께 여쭙게 됩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이때까지 사울에게 하느님은 저 높이 초월적으로 계시는 분이지 땅에까지 오시어 엎어트리기도 하시고 눈이 멀게도 하시고 귀에 대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었는데 놀랍게도 자기 삶 안으로 들어오시어 직접 개입하시는 주님임을 처음 체험합니다.

넷째로 사울은 사흘 동안 눈이 멀었고 식음을 전폐한 뒤에야 다시 보게 됩니다. 새로운 눈이 열리려면 사흘이 필요합니다. 이 사흘은 물리적인 사흘이 아니라 새로운 눈이 열리기까지의 시간이고, 주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난 사흘을 뜻하는 것으로서 부활의 사흘이요 영적인 사흘입니다.

그러니 주님과 바오로 사도는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다시 봤지만 우리는 3년이 될 수도 있고 삼십 년 사십 년이 될 수도 있겠지요. 빨리 완전히 죽으면 빨리 살아날 텐데 그러하지 못하니 말입니다.

다섯째로 세례받고 밥 먹어 기운을 차린 뒤 며칠 제자들과 함께 지낸 다음 사울은 곧바로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제자들과 화해하는 것 다시 말해서 공동체와 화해하는 것, 이것이 회개의 한 결과이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도 회개의 다른 결과입니다. 유심히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넷째까지는 ‘됩니다.’의 계속이었고, 다섯째가 되어서야 비로소 스스로 합니다.

프란치스코가 유언에서 주님께서 나에게 회개 생활을 시작하게 하셨다고 했듯이 바오로 사도의 회개도 시작은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하게 된 것이고 그런 다음에 공동체와 화해하고 복음을 선포함으로 주님이 시작하신 회개의 은총을 완성합니다.

주님께서 시작하신 은총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완성해야 할 과제가 우리 앞에 있음을 자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오늘 <복음>은 “생명의 빵”에 대해 하신 설교의 마지막 결론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말다툼이 벌어진 유대인들에게 이르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요한 6,54-55)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몸’(살)은 ‘인간관계’ 곧 ‘사랑의 사귐과 친교’를 의미하고, ‘피’는 ‘생명’ 곧 ‘일치와 유대’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은 예수님과의 사랑의 사귐과 친교로 예수님과의 유대와 일치된 생명을 이루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써, 당신께서 가지셨던 사랑으로 맺는 인간관계를 가지게 되고, 당신의 생명과 일치와 유대를 이루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이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일’, 곧 ‘순명’이라는 ‘행위의 실행’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실행하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머문다.’는 것은 단순한 거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시는 것’을 말합니다. 곧 당신의 신적 생명이 우리에게 증여되고, 선사되고, 우리 안에서 생명이 되어 흐른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살’은 우리의 살이 되고, ‘당신의 피’는 우리의 피가 되고, 그분의 생명 안에서 새롭게 창조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이토록 큰 사랑의 신비로, 우리 안에서 당신 생명의 꽃을 피우십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건네시는 이 크신 사랑은 오늘도 우리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제 안에 머무르되 저를 장악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제게 먹혀 사라짐으로 제 안에 살아계십니다. 당신 안에 저를 허용하시되 저를 가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숨결에 태워 저를 드높게 날게 하십니다. 오늘도 당신은 모든 것을 내어주고 자신을 감추신 그 오묘함과 놀라움으로, 그 그윽한 사랑의 숨결로 저를 적시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7)

“말미암아”라는 말은 ‘그분의 힘으로’라고 번역하기도 하듯이,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바로 당신의 ‘살과 피가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요한 6,55 참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는 말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불사불멸의 명약이요 죽음에 대한 해독제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6장 56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주님! 당신은 제 안에 머무르되 저를 장악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제게 먹혀 사라짐으로 제 안에 살아계십니다.

당신 안에 저를 허용하시되 저를 가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숨결에 태워 저를 드높게 날게 하십니다.

오늘도 당신은 모든 것을 내어주고 자신을 감추신 그 오묘함과 놀라움으로, 바람 부는 대로 흘러 다니는 그 그윽한 당신 사랑의 숨결로 저를 적시오니, 찬미받으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개신교에서는 말씀이 예수님의 살과 피라고 하던데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요한 6,56)

찬미 예수님!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요한 6,52)라며 격론을 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변의 개신교 형제들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라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라는 비유이지, 진짜 그분의 몸을 먹으라는 뜻이 아니다."

그들은 말씀이 곧 예수님의 살과 피라고 주장합니다.

어찌 보면 맞는 말 같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Logos)이 육신이 되셨으니, 말씀을 먹는 것이 곧 살과 피를 먹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아주 치명적인 '인식의 누락'이 있습니다.

말씀은 '작동 원리'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훌륭한 작동 원리라도 그것이 내 안에서 실제로 가동되려면 '에너지'와 함께 그 작동 원리를 지닌 이가 '실제로 먹혀야' 합니다. 오늘은 이 '먹힘'의 신비가 어떻게 우리를 하느님의 시스템으로 재창조하는지 심층적으로 파헤쳐 보겠습니다.

어떤 기계가 만들어질 때, 그 기계 안에는 설계도에 따른 '작동 원리'가 이미 들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기계에 작동 원리가 적용되려면 땀과 에너지를 쏟으며 그 작동 원리대로 기계를 만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인 진리(법칙)가 내 삶을 바꾸려면, 성령(에너지)이라는 빵과 함께 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야 합니다. 땀 흘리지 않는 설계도는 종이 조각에 불과하듯, 먹히지 않는 말씀은 공허한 관념일 뿐입니다.

생물학의 『세포 내 공생설』을 다시 떠올려 봅시다. 세포가 미토콘드리아를 먹었을 때, 세포는 단순히 간식을 먹은 것이 아닙니다. 미토콘드리아라는 '상위의 에너지 생산 시스템'을 통째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에게 에너지를 제공하지만, 동시에 세포의 생존 방식을 '산소 호흡'이라는 고효율의 법칙으로 바꿔버립니다.

물론 세포도 미토콘드리아에게 먹힙니다. 내가 죽지 않고는 그분이 내 안에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포가 미토콘드리아에게 자신의 자원을 기꺼이 뜯어 먹히는(순종하는) 시스템을 구축했을 때, 비로소 세포는 수십 억 년을 버틸 생명력을 얻었습니다. (출처: 린 마굴리스, 『공생자 행성』)

마찬가지입니다. 난자가 정자를 받아들이는 순간을 보십시오. 정자는 난자에게 먹힙니다. 하지만 정자가 가지고 온 것은 단순히 단백질 덩어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태아로 성장하라'는 새로운 작동 원리(유전자)입니다. 난자가 정자의 그 강력한 생명 에너지에 삼켜져 자기 복제를 시작할 때, 고작 한 달짜리 난자의 운명은 '인간'이라는 장엄한 시스템으로 격상됩니다.

정자가 난자 밖에서 "너는 사람이 되어라"라고 백만 번 외친들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실제로 정자가 난자 안으로 '먹혀 들어가야' 그 법칙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정자는 난자를 먹으며 새로운 작동원리를 제공하여 새로 태어나게 합니다. (출처: 스콧 길버트, 『발생생물학』)

자녀가 성장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는 부모가 구축해 놓은 '성장 시스템'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 이유는 자녀가 부모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아기는 엄마의 젖을 먹습니다. 모유는 엄마의 피와 살입니다.

아기가 엄마를 뜯어 먹면서 배우는 것은 무엇입니까? 엄마의 언어, 엄마의 도덕, 엄마의 생활 방식입니다.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늑대 소년'들이 결코 인간의 행동 방식을 닮을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인간의 젖을 먹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새로 태어나게 만들려면, 상위 존재가 하위 존재에게 진짜로 '먹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시간과 건강과 감정을 뜯어 먹히는 그 처절한 희생(에너지)을 통해, 비로소 '인간의 작동 원리(진리)'가 자녀의 영혼에 이식되는 것입니다.

이 '먹힘과 재창조'의 신비를 인류 문화사에서 가장 완벽하게 그려낸 작품은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입니다. 수용소라는 죽음의 시스템 속에서, 아버지 귀도는 아들 조슈아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양식으로 내어줍니다. 조슈아가 그 끔찍한 수용소를 '1,000점을 따면 탱크를 받는 게임'이라는 즐거운 세상으로 믿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귀도가 아들에게 "이건 게임이다"라고 말(말씀)만 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귀도는 그 말을 아들이 믿게 하려고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배고픈 아들에게 자신의 빵을 몰래 떼어 먹였고(살), 공포에 질려 울음이 터지려는 순간에도 우스꽝스러운 광대 짓을 하며 웃음을 주었습니다(피).

조슈아는 매일 아버지의 희생을 먹었습니다. 아버지가 뜯어 먹히며 만들어준 그 '사랑의 에너지'가 있었기에, 조슈아는 아버지의 '게임 시스템(진리)'에 기쁘게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귀도가 마지막에 총살당하러 끌려가면서도 윙크를 보냈을 때, 조슈아는 그것을 슬픈 죽음이 아니라 게임의 완벽한 피날레로 받아들였습니다.

조슈아는 아버지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써, 절망의 땅에서 유일하게 희망의 시스템으로 살게 된 '부활한 인간'이 된 것입니다. 아버지가 먹혔기에 아들은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 새로운 세상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출처: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 '인생은 아름다워' 1997)

예수님은 어떻게 그토록 완벽한 하느님의 아들로 사셨을까요? 그분 또한 '먹는 신비' 안에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매 순간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는 것"을 당신의 양식으로 삼으셨습니다. 결국 양식과 뜻은 함께 들어옵니다. 뜻을 실천하지 않으면 양식도 끊깁니다.

아드님은 세례 때부터 아버지의 성령(에너지)을 전적으로 받아드셔(먹어), 아버지의 시스템(뜻)에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먹힌 상태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그 '아버지의 시스템'을 우리에게 적용하려 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이 우리에게 '먹히기로' 결단하신 것입니다.

개신교의 주장처럼 말씀이 살과 피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이 관념에 머물지 않고 우리 영혼의 뼈와 근육이 되게 하려면, 그 말씀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체라는 형상으로 우리 안에 '실제로' 씹히고 소화되셔야 합니다.

우리가 성체를 모실 때, 그리스도의 신성한 유전자가 우리 영혼의 핵으로 침투하여 우리의 낡은 '인간 시스템'을 먹어치우고 '하느님 시스템'을 설치하는 것입니다. 먹히지 않는 말씀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입니다. 자신이 늑대라고 믿는 아이에게 밖에서 ‘너는 인간이다.’라고 외지는 말은 그 아이를 새로 태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이 원리는 세상의 질서 속에서도 유효합니다. 위대한 스승은 제자들에게 지식(말씀)만 주지 않습니다. 앤 설리번 선생님은 짐승처럼 날뛰던 헬렌 켈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평생을 뜯어 먹혔습니다.

헬렌이 물건을 던지면 온몸으로 맞았고, 헬렌의 손바닥에 수만 번의 글자를 새기느라 자신의 시력을 잃어갔습니다. 헬렌 켈러가 비로소 "사랑"이라는 하느님의 언어를 이해하게 된 것은 설리번이 가르친 단어 덕분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기꺼이 먹히고 있는 설리번의 '희생의 에너지'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설리번의 포옹이 사랑이라고 느꼈다면, 그 사랑이란 말씀은 그 안아줌의 먹힘을 통해 그 안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 먹히는 존재를 찾아야 합니다. 그가 더 위 시스템이고, 그를 먹으면 그의 시스템에 합류하여 그가 사는 것처럼 살게 됩니다. (출처: 헬렌 켈러 자서전, 『내가 살아온 이야기』)

개신교 형제들이 말씀이 살과 피라고 할 때, 기쁘게 웃으며 답해주십시오.

"맞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진짜 피가 되어 돌고 살이 되어 움직이려면, 그 말씀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제 자아를 먹어치우도록 제가 그분을 영성체로 모셔야 합니다."

세상의 빵은 내 위장을 채우고 썩어 없어지지만, 그리스도의 살은 내 영혼을 점령하여 나를 영원히 살게 합니다. 미토콘드리아가 세포의 자원을 먹고 대신 빛과 열을 내주듯, 여러분이 모시는 성체가 여러분의 이기심을 먹게 하십시오.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 제7권에서 주님의 음성을 이렇게 기록하며 성체성사의 본질을 선포했습니다.

"나는 성인(成人)들의 음식이다. 자라나라, 그러면 나를 먹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는 보통의 음식처럼 나를 너의 것으로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네가 나에게로 변화될 것이다." (St. Augustine, Confessiones, 7, 10, 16).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아이들과 놀이동산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아이들은 입장하자마자 뛰어다니기 시작합니다.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재미있는 놀이기구를 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쉴 새 없이 아이들은 돌아다녔습니다. 저녁에 집에 돌아갈 때까지 말입니다. 그렇다면 보호자로 따라갔던 저는 어떠했을까요? 놀이기구 타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카페에 앉아 책만 읽고, 또 산책했습니다.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기는 했지만, 너무 피곤했습니다. 수시로 아이들 위치를 확인하며 쫓아다니는 것만으로도 피곤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왜 보내셨을까요? 편하게 쉬라고 보내신 것일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바쁘게 움직여야 합니다. 특히 기쁘고 즐겁게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구나 이용 시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편하고 쉬운 것만을 쫓는 것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어도 하느님의 일이라면 기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늘 뒤로 미룬다는 것입니다. 기도도, 봉사도, 희생도, 사랑 실천도….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용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언젠가는 하느님 나라로 가야 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없는 이유를 찾기보다, 서둘러 실천할 수 있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요한 6,52)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식인 풍습) 받아 들으며 큰 충격과 함께 거부감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특히 율법에서 피는 생명 그 자체이기에 피를 마시는 행위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렇게 오해하고 있음에도 당신의 말씀을 철회하거나 부드럽게 순화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라고 더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계속해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라고 하십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가장 위대한 은총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하나 됨의 기적을 얻게 됩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살을 찢고 피를 흘리시기까지 당신 전부를 내어주신 사랑을 이야기하십니다. 이로써 주님 안에 머무르고, 주님과 함께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도 주님에게서 벗어나려는 우리입니다. 마감 시간이 있다는 것을 잊은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마감 시간이 있기에 지금 당장 서둘러서 하느님의 뜻에 집중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주변 환경 때문에 겪는 고민은 우리 내면에 자리한 문제에 비하면 실로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올리버 홈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를 살리는 것을 먹어야 합니다. 성체를 모신 삶은 다른 이들을 위한 살아 있는 성체가 되는 삶입니다.

먹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살리는 힘의 극치입니다. 생명은 고립된 것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관계 속에서 완성됩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내어준다는 것은 자기존재 전체를 내어주는 궁극적인 사랑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먼저 말씀하시기보다 당신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은 그것을 내 안에 받아들여 나의 일부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많이 먹고 있지만 실상 우리를 살리는 것은 먹고 마시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를 받아먹고 사는 우리는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며 세상을 살리는 사랑의 자녀들이 됩니다. 참된 것을 내어주어야 참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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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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