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지각한 이유를 설명하던 후배의 이야기가 문득 떠올라요. 지하철에서 옆에 앉은 남자의 목소리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그 목소리를 따라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이 내리는 역에서 함께 내리게 되었다고 했어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늘 어떤 소리를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은 결국 어떤 목소리를 믿고 따라가느냐에 따라 방향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오늘 복음은 먼저 알고 먼저 부르시며 앞장서 걸어가시는 그분의 방향을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완성된 모습이 아니라, 우리 모두 부족한 채로 그분의 목소리를 따라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2026년 4월 26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4월 26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보기
- 지금 바로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 오늘 말씀 묵상 모아보기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사도행전 2장 14ㄱ.36-41절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
오순절에,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 목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36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
37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38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39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
40 베드로는 이 밖에도 많은 증거를 들어 간곡히 이야기하며,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하고 타일렀다.
41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날에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다.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베드로1서 2장 20ㄴ-25절

여러분은 영혼의 목자이신 그리스도께 돌아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20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을 견디어 내면,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받는 은총입니다.
21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시면서,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여러분에게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
22 “그는 죄를 저지르지도 않았고 그의 입에는 아무런 거짓도 없었다.”
23 그분께서는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당신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24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25 여러분이 전에는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었지만, 이제는 여러분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께 돌아왔습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 보기
요한 10,1-10

나는 양들의 문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2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4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5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10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2026년 4월 26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
✚ 강론 시작 15:11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서로를 살리는 관계
부활 제4주일, 성소 주일인 오늘 우리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묵상합니다. 여기서 ‘착한’이라는 말은 단순히 온순하거나 상냥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 말 ‘칼로스’, 곧 ‘참되고 올바른’이라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또한 목자가 양을 알고, 양이 목자를 안다는(요한 10,3-4 참조) 말씀에서 ‘앎’이란 단순히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관계를 맺음을 뜻합니다.
목자는 양들을 진심으로 알고 사랑하기에 목숨을 내어놓고, 양들은 그런 목자를 믿고 따릅니다. 예수님께서 착한 목자이신 까닭은 우리의 나약함까지 모두 아시면서도 우리 곁에 머물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이 모여 부족함이 있어도 갈라서지 않고 서로 보듬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내 안의 고집과 옳고 그름에 대한 나만의 기준에 매달릴 때 우리는 쉽게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예수님을 참목자로 받아들이는 일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우리 모두 양 떼이기에 더 겸손해져야 함을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세상은 여전히 ‘나에게 유리한 사람’을 따져 관계를 맺지만, 하느님의 기준은 다릅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 부족함을 채워 줄 때, 바로 그 자리에서 복음의 힘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나서가 아니라, 오히려 못남과 나약함 때문에 부르심을 받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서로 헐뜯기보다는 상대를 위하여 기도하며, 저마다 받은 부르심을 함께 완성해 가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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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 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가는 문
오늘은 부활 4 주일이며, ‘성소 주일’입니다.
<제1독서>는 오순절에 베드로가 사도 베드로가 했던 설교의 결론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이는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이요 “메시아”로 삼으신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고백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1베드 2,24)
<복음>에서는 “목자와 도둑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비유 속의 “양 우리”에는 안과 밖을 연결하는 “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요, 넘어 들어가는 이는 도둑이며 강도입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3)
여기서, “목자”라는 단어는 ‘먹이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양식을 먹이는 자’를, “양”은 양식을 찾아 따라다니는 이를, “문”은 드나들면서 목초를 찾아 얻을 수 있는 통로를, 그리고 ‘목자와 양’의 관계는 목소리를 알아보는 친밀한 관계입니다.
특별히 ‘문’은 안팎으로 들고나는 두 방향을 갖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 “문”은 안과 밖을 연결하는 수평적 이동의 통로로서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이라는 수직적 이동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곧 이 “문”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인류에게 내려오고, 인류의 사랑이 하느님께 올라갑니다. 그러니 이 ‘문’은 ‘생명과 구원의 문’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는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가는 문으로서 그 문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일치로 들어간다.”
이 비유에서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2-3)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양 우리’ 안에 머물러 편안히 자기만의 안식을 누리고자 한다면, 목자에게 귀 기울이지도 않고 목자를 따르지도 않는 양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 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요한 10,4)
목자는 양들을 밖으로 이끌어 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주와 편리로부터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울타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차단된 울타리’가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열려진 울타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랑 때문에, 세상을 위해 밖으로 나가는 일입니다. 사랑을 짊어지고 나가는 일입니다. 곧 생명과 구원을 짊어지고 나가는 일입니다. 사실, 당신께서도 그처럼 ‘성문 밖’으로 나가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교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한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명, “(문을)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양’에게 주어지는 ‘소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드나들고 있는가? 혹은 들어가면, 나갈 필요가 없는 문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사실, 예수님이라는 ‘문’은 ‘다시 문 밖으로 나가기 위해 들어가는 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교회의 사명을 이렇게 일깨우셨습니다.
“안락한 성전 안에만 머무는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길거리로 나가 멍들고, 상처받고, 손에 흙을 묻힌 더러워진 교회가 되기를 나는 꿈꾼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10장 7절
나는 양들의 문이다.
주님! 저를 받아 주소서.
당신 풀밭에서 생명의 풀을 뜯게 하소서.
당신 기쁨이 차오르고 당신 사랑에 깃들게 하소서.
제 생명이 당신 진리 안에서 거룩해지게 하시고, 당신의 집에 저의 거처를 마련해주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왜 어떤 이들은 주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까?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요한 10,27)
찬미 예수님! 부활 제4주일, 착한 목자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을 '착한 목자'라고 하시고, 우리를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실에서 아주 곤혹스러운 질문 하나를 마주하게 됩니다. '왜 어떤 이들은 그토록 간절한 주님의 목소리를 죽어도 알아듣지 못할까? 왜 그들은 주님이 가시는 길을 생명이 아닌 죽음의 길이라고 생각하며 등을 돌릴까?' 하는 점입니다.
오늘은 이 질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행복'이라고 정의하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누구'라고 믿고 있는지에 대해 심층적으로 파헤쳐 보겠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앞서 가고 양들은 그 뒤를 따릅니다. 그런데 양이 목자를 따르려면 전제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목자가 나를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로 데려갈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만약 양이 보기에 목자가 나를 벼랑 끝으로 밀어 넣거나 사자의 아가리 속으로 끌고 간다고 생각한다면, 그 양은 결코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이끄시는 방향은 명확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십자가'로 이끄십니다. 자아를 죽이고,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의 죽음'의 자리로 우리를 앞서 가십니다. 하지만 자아를 섬기고 자기 주먹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 소리는 생명의 노래가 아니라 장송곡으로 들립니다.
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지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수녀님들과 어머니께 "너는 커서 꼭 사제가 되어야 한다"라는 소리를 귀가 따갑게 들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주님의 목소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때 제 귀에 그 소리는 절대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당시 저에게 '결혼하지 못하는 삶'은 곧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쁜 여자와 결혼해서 알콩달콩 사는 것이 인생 최고의 행복이라고 믿고 있던 저에게,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 사제의 삶은 지옥과 같았습니다. 행복의 정의가 '육체의 만족'에 고정되어 있으니, 주님의 목소리는 저를 불행하게 만들려는 악마의 유혹처럼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러다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마리아 발토르타의 『L'Evangelo come mi è stato rivelato』(내게 계시된 대로의 복음)를 읽게 된 것입니다. 그 책 안에서 저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겪는 수많은 고생과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이 세상적으로는 고통스러워 보이는데, 그들의 영혼은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삶'이 아닌, '내가 조금 힘들더라도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삶'이 훨씬 더 크고 본질적인 행복임을 말입니다. 십자가가 고통이 아니라 '사랑의 완성'이라는 행복으로 보이기 시작하자, 비로소 사제로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만이 목자의 음성이 들립니다. 왜냐하면 목자는 우리를 십자가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속 '부자 청년' (마르 10,17-22 참조)의 사례를 보십시오. 그는 계명을 다 지켰고 영원한 생명을 갈구했습니다. 주님은 그를 사랑스럽게 보시고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슬픈 표정으로 떠나갔습니다. 왜일까요? 그는 행복을 '소유'에서 찾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손해'로 보이는 한, 주님은 절대로 그에게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출처: 성 아우구스티누스, 『시편 주해』)
그런데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르기 시작했다가도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왜 그럴까? 그것은 '내가 예수님처럼 할 수 있다'고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단순히 주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양들을 이끄시는 방향은 '나의 완전한 죽음'과 '내 안에서 주님의 뜻이 완전히 성취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 위를 걸을 수 있고, 주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으며, 하늘의 아버지처럼 완전해질 수 있는 존재, 곧 '하느님'이라는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중간에 반드시 무너집니다.
저도 사제가 되기로 한 이후에도 수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안 돼!’라고 했다면 저는 주님을 따름이 거기서 멈췄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적어도 대죄는 짓지 않는 수준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비결은 딱 하나였습니다. 바로 '내가 그리스도이고 하느님이다'라는 정체성을 믿기로 한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인데 이 하찮은 죄 하나를 왜 못 이기지?'라고 스스로를 대접하기 시작했습니다. 아기가 자신이 언젠가 뛸 수 있는 '인간'임을 믿기에 계속 넘어지면서도 일어나는 것처럼, 저도 제가 하느님임을 믿으니 죄와 싸울 용기가 생겼습니다.
성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한 큰 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주님의 물음에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요한 21,17)라고 답하며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는 자신이 비록 나약하지만, 주님의 은총으로 주님처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을 수 있는 '그리스도'가 될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나약함보다 주님이 주신 하느님 자녀의 신분을 더 크게 믿었기에 끝까지 따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면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끝까지 주님의 양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존재임을 믿어야만 합니다.
전 세계 천재들의 모임인 '멘사(Mensa)'의 회장을 지낸 빅터 세르브리아코프의 이야기는 정체성의 힘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어린 시절 학교에서 "공부를 못하는 열등생"이라는 평가를 받고 15세에 퇴학당했습니다. 그는 이후 17년 동안 자신을 '바보'라고 믿으며 육체노동자로 떠돌았습니다.
그러다 32세가 되던 해, IQ가 161이라는 검사 결과를 받았습니다. 그는 전율했습니다. '아, 나는 바보가 아니라 천재였구나!' 그 순간 그의 삶은 180도 바뀌었습니다. 이전에는 포기했던 모든 일에 '나는 천재니까 할 수 있어'라고 덤벼들었습니다. 정체성이 바뀌면 능력도 따라옵니다.
우리가 "나는 죄인인 인간일 뿐이야"라고 믿으면 평생 죄에 패배하겠지만, "나는 그리스도의 유전자를 가진 하느님이다"라고 믿으면 죄를 이기고 주님의 목소리를 끝까지 따르는 기적의 주인공이 됩니다. (출처: Victor Serebriakoff, 『IQ: A Smart History』)
이를 위해 예수님은 먼저 작업을 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될 수 있음을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바로 앞 장인 9장에는 태생 소경의 치유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눈을 뜨게 된 그에게 사람들이 누구냐고 묻자, 그는 아주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공동번역 성경이나 원문을 보면 그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라고 말하는데, 이것의 헬라어 직역은 "Ego Eimi", 즉 하느님의 고유한 성호인 "나는 있는 나다" (요한 9,9 참조)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그의 시력을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그가 '내가 바로 하느님이다'라는 정체성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야만 바리사이들의 그 모진 박해를 뚫고 주님의 양이 되어 끝까지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똑같은 일을 하십니다.
그분은 진흙을 우리 눈에 바르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넣어주십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가 되고 하느님이 되었음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더 이상 죄의 노예인 인간이 아니라, 나다(I am)!"라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으십니까? 둘 중의 하나입니다. 나를 우상으로 섬기던지, 아니면 믿음이 부족하던지.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다. 그러니 나를 따라오너라. 십자가가 바로 최고의 행복이다!"
이 믿음으로 무장하여, 착한 목자를 끝까지 따르는 복된 양들이 되시길 빕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양들의 문이다.
작은 물고기가 있었습니다. 이 물고기는 헤엄치며 무엇인가를 찾는지 계속 두리번거립니다. 그러다 나이 많은 물고기를 만나서, “어떻게 해야 바다를 찾을 수 있을까요?”라고 묻습니다. 나이 많은 물고기는 “바다? 너는 지금 바다에 있단다.”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작은 물고기는 화를 내며 말합니다.
“여기는 물이에요. 제가 찾는 것은 바다라고요.”
바다에 살고 있으면서도 바다를 찾고 있습니다. 듣지 않으려는 마음이 계속 바다만 찾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습도 그렇지 않을까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계속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주님 뜻에 맞게 사는 사람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씀보다 세상의 말을 들으려고 합니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는 길이 더 현명한 것처럼 착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길이 얼마나 중요한지, 참된 목자와 양의 관계를 이야기하시면서 전해주십니다. 우선 참된 목자와 양의 관계는 목소리를 알아듣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릅니다. 그냥 수많은 양 떼 중의 하나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존재로 하나하나 이름을 부르시면서 일대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력이 약한 양은 철저하게 청각에 의존해서 목자를 따라갑니다. 나를 유혹하는 세상의 많은 소음이 있지 않습니까? 그 가운데 참된 목자의 목소리를 구별하고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함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참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뒤에서 채찍질하면서 양들을 억지로 몰아대지 않습니다. 대신 양들이 가야 할 거칠고 험한 길을 먼저 걸어가시며 앞장서십니다. 십자가 역시 우리가 짊어질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먼저 앞서 짊어지셨기 때문에, 안심하고 그 뒤를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라고 하십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고대 중동의 양 우리를 알아야 합니다. 돌로 담을 쌓고 뚫려 있는 입구에 목자가 직접 가로누워 잠을 잤다고 합니다. 목자 몸 자체가 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사나운 짐승이 들어올 수도 또 양이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온몸을 바쳐 우리를 보호하시는 절대적인 피난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게 됩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우리는 과연 누구의 목소리를 듣고 따릅니까? 두려움과 불안을 조장하는 세상의 목소리가 아닌, 내 이름을 다정히 부르며 평화로 이끄시는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 안에서 참된 안식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행복한 소통은 문화로 소통하고, 감성과 영혼의 언어로 소통하고, 칭찬으로 소통하는 것이다(사색의 향기 정석 중).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양들의 문이다.
모두가 서로 다른 빛깔로 한 분이신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성소란 어떤 역할에 묶이는 삶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삶을 우리가 자유롭게 살아내는 것입니다. 삶의 방향 전체를 바꾸는 선택입니다. 우리는 어떤 문을 통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참된 성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하여, 생명의 길로 들어가는 삶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어떤 ‘문’을 통과하며 살아갑니다. 문(門)은 통과해야만 의미가 있습니다. 문 앞에 머무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과하여 생명으로 나아가는 삶이 우리의 성소입니다. 그 문은 곧 우리의 가치 판단 기준이며, 어떤 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방향과 결과가 달라집니다.
성소란 살아 있는 존재가 되라는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그래서 성소는 현실입니다. 안정과 익숙함을 내려놓고 하느님을 신뢰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입니다. 성소는 특별한 사람들의 길만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사랑하고, 섬기고, 살아가는 이 모든 삶이 이미 성소입니다.
이렇듯 문(門)이 자신을 주장하지 않고 다른 이들이 지나가도록 내어주듯이, 성소도 그렇게 자신을 내어주는 삶입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주는 삶이 참된 성소의 본질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사랑, 진실, 용서, 배려라는 성소의 모습으로 매 순간 하느님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다양한 모든 성소를 진심으로 존중하며, 함께 기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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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