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제 기준과 판단을 더 꽉 붙잡고 있을 때가 많아요.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유리한지 따지며 스스로 안전하다고 여길 자리를 만들곤 합니다.
오늘은 제가 만든 울타리가 아닌 이미 저를 붙잡고 계신 그분의 손 안에 머물러 보려고요. 이미 붙들려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놓지 않고 계신 주님은 찬미 받으소서!

2026년 4월 28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4월 28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보기
- 지금 바로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 오늘 말씀 묵상 모아보기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사도행전 11장 19-26절

그들은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그 무렵
19 스테파노의 일로 일어난 박해 때문에 흩어진 이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까지 가서, 유다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
20 그들 가운데에는 키프로스 사람들과 키레네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안티오키아로 가서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이야기하면서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21 주님의 손길이 그들을 보살피시어 많은 수의 사람이 믿고 주님께 돌아섰다.
22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가라고 보냈다.
23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24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25 그 뒤에 바르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타르수스로 가서,
26 그를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 그들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 보기
요한복음 10장 22-30절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22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23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24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26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2026년 4월 28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
✚ 강론 시작 07:03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내가 만든 기준 내려놓기
오늘 복음은 믿는 이의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성전 봉헌 축제로 시간 배경이 바뀌며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때는 겨울이었다”(요한 10,22).
이는 계절을 알릴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유다 지도자들의 마음이 싸늘해지고 그분의 죽음이 가까워짐을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예수님과 관계를 올바로 맺지 못할 때, 우리의 신앙도 겨울처럼 차가워질 수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10,24)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결국 자신들의 기준에 맞게 말해 달라는 자기중심적 요구에 가깝습니다. 메시아라면 모세처럼 위엄이 있어야 한다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메시아답지 않은’ 분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믿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에게는 ‘받아들이는 태도’, 곧 관계 안에 머무르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자신이 세운 기준에만 매달려 그분을 바라보았기에,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었습니다.
양은 목자를 알고 목자의 인도를 따를 때 안전할 수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 기준, 내 이익, 내 안정만 붙들고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 만든 울타리만 지키는 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한]다”(10,28).
믿음은 결국, 그분의 손안에 머무르느냐 머무르지 않느냐, 곧 받아들임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있습니까? 내 기준, 내 욕심, 자존심입니까? 아니면 목자이신 주님의 손입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을 믿지만 잘 따르지는 못하는?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나는 주님의 양일까? 아닐까? 주님께서 너는 내 양이 아니라고 하시지 않을까? 나는 주님의 양이 아니면서 주님께서 당신 양이 아니라고 할까 봐 두렵기도 하고, 주님께서 그러실 리 없다고 믿고 싶기도 합니다.
이것을 보면 주님의 양이고 싶은 것은 분명한데 아직 주님의 양이 아니라는 생각이 있는 겁니다. 왜 그런 생각이 들까요? 그것은 바로 따름 때문일 겁니다.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내가 과연 주님을 잘 따르고 충실히 따르고 있는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닌데 ‘잘’과 ‘충실히’ 면에서 걸립니다.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 것 같은데, 환갑과 사제서품 30주년이 겹치는 해에 제 인생을 돌아보니 열심히 산 것은 같은데, 잘 살지는 못했다는 반성이 됐습니다.
목표와 방향이 잘 못 되어 인생길을 열심히 잘못 갔다는 성찰이 된 것입니다. 그때까지 열심히 살면 잘 사는 줄 알고 열심히만 살았지 내가 잘살고 있는지 성찰하지 않고 산 것이 잘못 살게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주 ‘열심히’와 ‘잘’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신앙인은 주님을 잘 따라서 가야지 잘 사는 것인데 내가 가고 있는 것이 주님을 잘 따라가고 있는지 성찰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 주님을 실종하지 않으려고 하는 면에서는 잘 따르고 있는데 이제는 반대로 열심히 또는 충실히 따르는 면에서 부족한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오늘 주님 말씀과 관련하여 종합적으로 반성하면 저는 주님이 저의 목자이고 저는 그 양임을 의심치 않고 믿습니다. 목자이신 주님을 따라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도 믿습니다.
그러니 믿는 것보다는 따르는 것에 문제가 더 있는 것 같은데 힘에 부쳐서 그런 면도 있는 것 같고 오롯이 주님을 따르기보다 아직 세상 걱정이 남아있어서 그런 것도 같습니다. 그리 복잡하지 않고 단순합니다. 더 힘을 내고, 더 주님께 집중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예수님의 손에서 스스로 빠져나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성전봉헌축제’ 때 벌어진 유다인들과의 논쟁을 들려줍니다. 이날 벌어진 논쟁의 주제는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성전 안의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신 예수님을 “둘러싸고”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직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주시오?”(요한 10,24) 라고 도전적인 태도로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요한 10,25)
그러나 그들은 믿기를 원하지 안했으며, 예수님의 ‘양’이 되기를 원하지 안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7)
여기에서, ‘양’의 특성을 ‘듣다’, ‘알다’, ‘따르다’, ‘준다.’ 라는 네 개의 동사를 통해 표현되고 있습니다.
“듣다”라는 말에는 ‘더 깊이’라는 뜻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곧 ‘마음에 담아’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는 마음으로 받아들인 내면적인 관계의 형성을 의미하며, 인격적인 교류를 뜻합니다.
그리고 “알다”라는 단어의 뜻은 단순히 정보를 안다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밀애의 영역에서 체험으로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이 성소의 길은 말씀을 듣고 ‘체험’하면서 알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자신이 알고 있는 ‘앎을 바꾸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따르다”는 뜻은 ‘받아들이다’, ‘환영하다’란 의미를 넘어서, ‘곁에 있다’는 표현입니다. 곧 ‘곁에서 함께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세 동사는 모두가 관계를 깊이 맺는 진실 된 ‘관계성’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듣고 순명하는 진정한 관계가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믿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요한 10,28).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그들을(내 양들)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7)
그렇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그분의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분의 손에서 떨어져 내릴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곧 아무도 우리를 그분의 손에서 채 갈수는 없지만, 자칫 스스로가 자유로이 그분의 손에서 떨어져 내릴 수는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기도 합니다. 그러니 결코 우리는 예수님의 손에서 스스로 빠져나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10장 28절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주님! 제게는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도,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도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손수 빚어 만드시고, 제 영혼에 당신 손의 지문을 새기신 까닭입니다.
오늘도 당신은 제 온 몸에 당신 손때를 묻히십니다.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허리를 감싸 안으십니다.
제가 당신께 소중한 존재인 까닭입니다.
진정, 저는 당신의 것이며, 당신은 저의 전부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말씀이 성체와 흡수되어야 하는 이유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요한 10,27.30)
찬미 예수님! 부활 제4주간 화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에워싸고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라며 지적 확인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지루한 신학적 증명을 늘어놓는 대신, 당신의 양들은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는 관계의 신비를 말씀하십니다.
왜 양들은 신학적 논리가 아니라 목소리에 반응할까요? 그것은 그 목소리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그들의 생존을 결정짓는 '유전자적 각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에너지와 말씀이 결합할 때 일어나는 이 지울 수 없는 각인의 신비를 파헤쳐 보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교육을 통해 정보를 습득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단순한 정보는 금방 잊힙니다. 뇌과학에 따르면, 정보가 뇌세포 사이의 시냅스에 영구적으로 고착화되려면 반드시 ATP라는 에너지와 새로운 단백질이 합성되어야 합니다. 즉, '먹는 행위(에너지)'가 '듣는 행위(정보)'와 동시에 일어날 때 그 정보는 존재의 일부가 됩니다.
동물 행동학자 콘라트 로렌츠의 『솔로몬의 반지』에 나오는 회색기러기들의 각인 현상이 바로 이것을 증명합니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 기러기에게 처음 들리는 소리는 단순한 소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해 줄 '유일한 에너지원'의 신호입니다. 새끼 기러기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자신의 모든 생존 시스템을 그 주파수에 고정합니다. 이것이 바로 각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무리 옳은 '말씀'이라도 그 말에 '피(희생)'가 섞이지 않으면 인간에게 그것은 단지 지루한 '잔소리'로 들릴 뿐이라는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의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 중 하나였던 '손 씻기'가 한때는 수만 명을 죽인 '미친놈의 잔소리' 취급을 받았던 사건입니다.
1840년대 오스트리아 빈 병원의 의사였던 이냐츠 제멜바이스(Ignaz Semmelweis)는 산모들이 산욕열로 죽어가는 원인이 의사들의 더러운 손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동료 의사들에게 "환자를 보기 전 반드시 손을 씻으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수만 명의 생명을 살릴 '진리의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오만한 의사들에게 제멜바이스의 외침은 그저 "우리가 더럽다고 비난하는 기분 나쁜 잔소리"일 뿐이었습니다.
제멜바이스는 말(정보)만 했지, 그 말을 증명할 에너지를 주지 못했습니다. 의사들은 그의 말을 비웃으며 계속해서 씻지 않은 손으로 산모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결국 제멜바이스는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되었고, 거기서 간수들에게 매를 맞다 상처가 덧나 '패혈증'으로 죽었습니다.
놀라운 반전은 그의 죽음 이후에 일어났습니다. 그가 죽자 사람들은 그가 그토록 외쳤던 '손 씻기'라는 말씀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미친 게 아니라 진짜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 말씀은 비로소 의학계의 지울 수 없는 '법칙'으로 각인되었습니다.
그가 살아 있을 때 뿌린 수만 장의 전단지는 쓰레기였으나, 그의 죽음이라는 피가 섞였을 때 그 말씀은 인류를 구원하는 생명이 되었습니다. 피를 흘리지 않는 목자의 말은 잔소리가 되지만, 피를 쏟은 목자의 말은 영혼의 유전자가 됩니다. (출처: 셔윈 뉼랜드, 『의학의 역사』)
현상학적으로 볼 때,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경험하는 '하나 됨'은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일어납니다. 태아는 어머니의 양수라는 액체를 통해 어머니의 심장 박동과 목소리를 듣습니다. 이때 목소리는 공기를 타고 전달되는 가벼운 소리가 아닙니다. 양수라는 육체적 에너지를 통해 태아의 온몸을 때리는 강력한 '물리적 진동'입니다.
어머니의 목소리(정보)가 양수의 파동(에너지)과 결합하여 태아의 뼈와 근육에 새겨질 때, 태아는 비로소 '인간의 시스템'으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수만 명의 목소리 중에서도 어머니의 음성을 단 1초 만에 식별해 냅니다. 그 음성은 뇌가 아니라 세포에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 태내의 신비와 같습니다. 우리가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의 피라는 거룩한 양수 안으로 침잠할 때, 그분의 말씀은 우리 영혼의 시냅스를 재구성합니다. 에너지가 부족한 상태에서 듣는 말씀은 지루한 신학이 되지만, 주님의 살과 피를 먹으며 듣는 말씀은 우리 존재를 하느님으로 변형시키는 '최초의 울림'이 됩니다.
최근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가수 서인영 씨의 고백은 이 원리를 아주 절절하게 보여줍니다. 그녀는 과거 욕설 논란과 이혼이라는 풍파를 겪으며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할 만큼 깊은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시기에 설상가상으로 어머니마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절망 속에서 그녀는 꿈에 나타난 어머니를 만납니다. 어머니는 딸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야, 내가 너 대신 죽은 거야!"
서인영 씨는 이 한마디를 "내가 너를 대신해 죽었으니까, 너는 이제 정말 잘 살아야 해!"라는 목소리로 알아들었습니다. 이전까지 "잘 살아라"라는 말은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평범한 도덕적 잔소리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이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처절한 희생의 에너지와 결합하여 전달되었을 때, 그것은 서인영 씨의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인생의 운영체제'로 각인되었습니다.
우리가 성체를 모셔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하라"는 정보만 주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쏟으시며 "내가 너를 위해 죽었다"는 생명 에너지를 먼저 주셨습니다. 그분의 살과 피를 먹으며 듣는 "사랑하라"는 말씀은 이제 뇌가 아니라 세포에 새겨집니다.
어머니의 죽음이 딸을 다시 살게 하는 법이 되었듯, 그리스도의 성체는 그분의 말씀을 우리 인생의 유전자로 각인시키는 유일한 활성 코드입니다. 피를 마시지 않은 자는 그 목소리를 잊어버리지만, 피를 수혈받은 자는 그 목소리를 자기 본성으로 삼게 됩니다.
영화 'A.I. Artificial Intelligence' (2001)에는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로봇 소년 데이비드가 인간 어머니를 진짜 어머니로 사랑하게 되는 '각인 절차'입니다. 어머니가 데이비드의 목 뒷부분을 만지며(에너지 접촉), 일곱 개의 특정 단어(정보)를 말해줄 때 데이비드의 전자 회로는 영구적으로 재프로그래밍됩니다.
이 절차가 끝나면 데이비드는 오직 그 어머니만을 향한 일편단심의 존재가 됩니다. 에너지가 수반된 말씀이 기계의 논리를 생명의 논리로 바꾼 것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먹고 마시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행위가 바로 이 각인 절차입니다.
왜 신앙이 지루하게 느껴질까요? 에너지가 빠진 정보만을 취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 없는 말씀 공부는 머리만 키울 뿐 영혼을 각인시키지 못합니다. 반대로 말씀 없는 성체성사는 맹목적인 에너지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첫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를 통해 하느님 말씀이 각인되어 예수님을 보고 바로 알아볼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 목소리가 “하느님의 어린양” 곧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이기에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는 점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당신의 살과 피라는 무한한 에너지를 내어주십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의 파동에 실어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거대한 정체성의 말씀을 우리 영혼에 쏘아 보내십니다. 이 미사 중에 성체를 모시고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리스도의 날 위한 수난을 묵상하십시오. 그 뜨거운 가슴이 없다면 말씀은 각인되지 못합니다. 각인되지 못하면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기에 하늘로 오를 수 없습니다. 그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세 예술가들은 작품에 서명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발휘한 예술적 재능이 원래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주신 은사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미켈란젤로 역시 이런 마음으로 서명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26살에 완성한 피에타에 대해 관광객들은 다른 작가의 작품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작품을 다른 작가의 것으로 착각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밤에 몰래 피에타의 성모님 어깨띠 부분에 라틴어로 ‘피렌체의 미켈란젤로 부에나로티가 만들었다’(MICHAELANGELUS BONAROTUS FLORENTINUS FACIEBAT)라고 적었습니다.
훗날 미켈란젤로는 자기 태도를 크게 후회했습니다. 예술적 은사를 주신 하느님을 망각한 채, 오로지 자기 재능만으로 작품을 제작한 것처럼 행사하며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 했음을 뉘우친 것입니다. 그 뒤 그는 자기 작품에 어떤 서명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재능, 재주는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자기를 드러낼수록 하느님은 보이지 않게 되고, 제대로 따를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 없이 우리의 모든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도 마찬가지로 자기만을 드러내려 했고, 자기의 바람만을 채우려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도 없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이런 마음을 복음에서 “때는 겨울이었다.”(요한 10,22)라고 표현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시간과 계절은 종종 영적인 상태를 암시하곤 합니다. 여기서 ‘겨울’은 단순히 물리적인 추위를 의미한다기보다, 예수님을 배척하고 믿지 않는 유다인들의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의 상태, 즉 영적인 겨울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요한 10,24)라고 말하면서 도발적으로 다가옵니다. 이에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요한 10,25.26)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 삶 자체가 메시아이심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을 열고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양은 수많은 목동의 소리 중에서 오직 자기 목자의 음성만을 구별해 냅니다. 신앙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식별하는 것에서 신앙이 시작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이루어지고, 그분의 뜻을 따를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안전한 그분의 품 안에 머무르며 참된 평화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교육이란 알지 못하는 바를 알도록 가르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지 않을 때 행동하도록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마크 트웨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이미 이루어진 사랑의 상태를 드러내는 예수님의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참 많이도 나뉘어 있습니다. 생각은 옳음을 주장하고, 마음은 상처를 품고, 관계는 쉽게 갈라집니다. 우리의 깊은 내면에는 하나됨을 향한 갈망이 있습니다. 이 하나됨은 생각이나 감정의 일치가 아니라,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존재의 일치입니다. 하느님과 하나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과도, 타인과도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위는 곧 하느님의 행위였으며, 그분에게 하나됨은 말이 아니라 삶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생각과 말, 행동이 자주 분리되어 살아갑니다. 참된 하나됨은 타자를 지워버리는 동일성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서로를 살리는 관계적 일치입니다. 이 하나됨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회복되어야 할 우리의 본래적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미 완전히 이룬 존재가 아니라, 하나됨을 향해 끊임없이 되어 가는 존재입니다. 분열 속에서도 통합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의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하나 된다는 것은 멀리 있는 신비가 아니라, 오늘의 삶 속에서 조금 더 진실하게, 조금 더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우리를 하나로 잇는 살아있는 길은 오직 오늘의 진실한 사랑입니다. 진실한 사랑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참된 일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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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