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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6.05.31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피어나네 2026. 5. 31.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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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다는 말씀에서 깊고 애틋한 사랑이 느껴져요. 사랑은 말로만 머무르지 않고, 결국 자신을 내어주는 방향으로 흐른다는 걸 배우게 됩니다.

 

누군가와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저의 섣부른 판단과 고집을 내려놓고, 작은 희생과 배려로 사랑을 건네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서로를 향해 열려 있고, 함께 머무르며 하나가 되도록 이끄시는 삼위일체의 사랑은 찬미받으소서!

 

2026년 5월 31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성경 말씀 정리

 

2026년 5월 31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5월 31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탈출기 34,4ㄱㄷ-6.8-9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그 무렵

4 모세는 주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대로 아침 일찍 일어나 돌판 두 개를 손에 들고 시나이 산으로 올라갔다.

5 그때 주님께서 구름에 싸여 내려오셔서 모세와 함께 그곳에 서시어,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셨다.

6 주님께서는 모세 앞을 지나가며 선포하셨다.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다.”

8 모세는 얼른 땅에 무릎을 꿇어 경배하며

9 아뢰었다. “주님, 제가 정녕 당신 눈에 든다면,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하기는 하지만,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코린토 2서 13,11-13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

 

11 형제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자신을 바로잡으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고 평화롭게 사십시오. 그러면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12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모든 성도가 여러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 보기

요한복음 3,16-18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2026년 5월 31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삼위일체대축일 소개 00:06

✚ 미사 시작 00:56

✚ 강론 시작 13:50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오늘은 누군가의 선물이 되어보기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이시면서 동시에 한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 이성으로는 완전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 압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다]”(요한 3,16).

외아들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 다른 누군가가 대신할 수 없는 하나뿐인 아들을 뜻합니다. 그 외아들을 주신다는 것은 당신 자신을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은 이처럼 자신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외아들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 아드님께서는 아버지 뜻대로 십자가에서 목숨까지 내어놓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 주시고, 하느님의 영께서는 세례로 우리를 하느님의 품으로 이끄십니다.

서로 자신을 내어놓고 받아들이는 사랑의 관계 안에서 일치를 이루시는 분이 삼위일체 하느님이십니다. 삼위일체는 수학 공식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입니다. 홀로 계시지 않고 늘 함께 계시며, 서로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사랑의 관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위하여 작은 것이라도 기꺼이 내어놓을 때,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아 갑니다.

우리는 미사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큰 선물인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십니다. 이 사랑의 선물을 받고, 우리도 서로에게 사랑의 선물로 자신을 내어놓읍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우리도 사랑의 공동체를 이룹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총력으로 사랑하시는

저는 올해 삼위일체 대축일을 성부 성자 성령께서 총력으로 우리는 사랑하심을 기리는 축일이라는 면에서 보고자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를 그렇게 총력으로 사랑하셨음에 무한 감동하고 무한 감사드리는 축일이 되어야겠지요.

제 생각에 삼위일체 대축일은 두 가지 신비를 기념합니다. 삼위의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신 신비를 기념하고, 삼위의 하느님께서 합작으로 우릴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신비를 기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축일을 지내며 두 가지 신비를 기념하지만, 이 두 신비는 서로 아주 밀접합니다. 삼위 간의 내적인 사랑과 일치로 우리가 창조되고 구원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부부간의 내적인 사랑이 자녀를 생산하고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부부간의 사랑이 없다면 자녀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고, 부부간의 사랑이 끊어지면 자녀를 함께 키우지 않겠지요.

이런 면에서 자녀의 행불행은 부모의 사랑과 밀접합니다. 부부간에 서로 사랑하며 자녀도 같이 사랑하면 자녀도 계속 행복합니다. 그런데 부부간에 사랑이 식어 헤어진 다음 자녀를 각기 사랑하면 자녀의 행복은 그만큼 많이 불완전해질 텐데 그러나 이것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만일 부부간의 사랑이 깨져 자녀에 대한 사랑도 깨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랑받지 못해 불행할 뿐만 아니라 사랑을 배우지 못해 사랑할 수 없게 되겠지요.

이런 부부간의 사랑과 비교했을 때 성삼위 사이의 완전한 사랑은 삼위 간의 일치일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창조된 우리에 대한 완전한 사랑이고 우리 행복의 원천입니다.

그렇습니다. 삼위일체의 사랑은 서로 간에 완전한 일치를 이룰 뿐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에 있어서도 일치를 이룰 것이고 합력하게 할 것이며 총력적으로 사랑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의 사랑을 받아 자녀도 사랑을 지니고, 부모의 사랑을 보고 자녀가 사랑을 배우듯 삼위일체의 합작 사랑은 우리 사랑을 풍요케 하고, 그 사랑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와 같아지는 육화의 사랑이고, 다 내려놓는 비하(卑下) 또는 비허(卑虛)의 사랑이고, 십자가 위에서 다 내어주는 무화(無化)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또한 성령의 사랑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 인도하는 사랑이고,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여 풍요롭게 하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진정 사랑하고픈 사람들이고, 사랑하지 않으면 너무나 불행하기에 성자처럼 성령처럼 사랑하고픈 사람들입니다. 사랑만 해도 부족한 짧은 인생, 먼저 하느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고, 하느님 사랑 안에서 이웃도 사랑하는 삶을 살다가 한 생을 마쳐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하느님은 삼위로 함께 계시기에 사랑이시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가슴 떨리는 신비입니다. 알아듣기에는 어려워도 참으로 벅찬 사랑의 신비입니다. 너무 깊어 헤아려지지 않아도, 오히려 다 헤아려지지 않기에 더 깊이 매료당합니다. 다 이해되지는 않아도, 그 사랑은 충분히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는 이 신비의 내용을 알아듣는 데는 한계가 있다손 치더라도, 중요한 것은 이 신비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듣는 일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라는 이 용어가 생겨난 역사적 배경은 3세기~5세기입니다. 이때, 교회에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인식하는 하느님이 ‘실제 하느님과 다르고’ 또 ‘성령과 하느님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바로 이런 주장들 앞에서 신앙인들은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삼위일체”란 이 용어를 통하여 신앙인들이 고백하고자 했던 것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알아듣는 하느님은 실제의 하느님이고, 또 신앙인들 안에 숨결로 일하시는 성령도 실제 하느님이라는 것을 믿는 일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제2독서>에서,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생기기도 전에 이미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길 빕니다.”(2코린 13,13)

이는 사랑의 하느님과 은총의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의 성령께서는 같은 하느님이심을 말해줍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삼위일체”에 대한 의미를 잘 드러내줍니다. 곧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 가운데 나타났는지’를 드러내주며,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는지’,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말해줍니다. 따라서 이 신비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에 대한 축복을 깨우쳐줍니다.

<제1독서>에서, 모세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구름에 싸여 내려오셔서 모세와 함께 그곳에 서시어,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셨다.”(탈출 34,5)

“주님,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주시기를 바랍니다.”(탈출 34,9)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다.”(2코린 13,11).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길 빕니다.”(2코린 13,13)

<복음>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네 인간들과 함께 사시기를 원하셔서 당신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 아들 예수님을 인간의 동행자로 삼으시고 벗이 되어 “함께 있게” 하시고 당신의 생명으로 이끌게 하십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이렇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느님의 ‘참 사랑’입니다. 곧 아들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하는 사랑입니다. 이 ‘참 사랑’을 단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함께 있음”이며, “함께 한다”는 것의 복음적 의미는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함께 있음”이 사랑입니다. 이 “함께 있음”이 곧 ‘삼위일체 하느님의 본성입니다. 따로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아니하고,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입니다.

서로 사귐으로 친교를 이루며, 상호 교제하고 상호 교환하며, 상호 내재(내주)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내어주어 타자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자신 안에서 타자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와 연대의 관계 맺음이요, 우애와 형제애로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일입니다. 사랑으로 서로 함께 있고, 서로 속해 있고, 서로의 것이 되는 참으로 아름다운 결합의 일치요,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사실,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얼마나 밀접하게 관계 맺고 계시는 지를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께서 인류 역사 안에서 얼마나 다양하고, 얼마나 은혜롭고, 그리고 얼마나 깊게 일하시는 지를 드러내주는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시라는 의미는 “하느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살아계시고 활동하시며, 지금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언제나 우리와 동행 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참으로 하느님은 삼위로 함께 계시기에 사랑이십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이렇게 “함께 있음”이 바로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여기 이 수도가정에서, 이 성당에서 “함께” 만나 한 분이신 주님을 찬미하는 일,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함께 서로 사랑하는 일,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사랑 안에서 우리가 하나가 되는 거룩한 일. 그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성 안으로 쏙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은 이토록, 참으로 아름답고 거룩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자신을 바로잡으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 하고 평화롭게 사십시오. 그러면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2코린 13,11).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3장 16절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손에 못이 박히고
가슴이 창에 찔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면서도
죽기까지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죽기까지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
사랑으로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낮아져 밟힐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나는 삼위일체 교리 때문에 하느님을 믿는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16)

찬미 예수님!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가톨릭 신앙의 가장 핵심적이고도 심오한 신비를 기념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 계시는데, 이 세 분이 완벽하게 하나의 하느님이시라는 교리입니다. 많은 신자가 이 교리를 수학적인 공식인 '1+1+1=1'로 이해하려다 보니 골머리를 앓습니다. 도무지 머리로 이해되지 않으니 그냥 덮어놓고 맹목적으로 믿어야 하는 어려운 숙제처럼 여깁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여러분께 아주 발칙한 고백을 하나 하고자 합니다. 저는 삼위일체 교리가 억지로 믿어야 하는 골칫거리가 아니라, 오히려 제가 '하느님이 진짜 나의 창조주이심'을 확신하게 만든 가장 완벽하고 과학적인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삼위일체 교리 때문에 하느님을 믿습니다. 이 교리가 아니었다면 저는 하느님을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우주의 에너지 보존 법칙에 따르면, 어떤 물질도, 어떤 생명체도 무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법은 없습니다. 반드시 생명을 주고 에너지를 불어넣은 '창조주'가 존재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수많은 신들 가운데 누가 나의 진짜 창조주인지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오늘 저는 논리적이고도 완벽한 4단계의 법칙을 통해, 왜 삼위일체 하느님만이 우리의 진짜 창조주일 수밖에 없는지 파헤쳐 보겠습니다.

1. 창조자라면 구원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최고급 인공지능을 탑재하여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로봇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 날 이 로봇이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걸려 시스템이 붕괴하며 죽어갑니다. 로봇은 살기 위해 묻습니다.

"누가 나를 만들었을까? 나를 만든 자만이 내 시스템을 알고 나를 고칠 수 있다."

그때 수많은 IT 기업이 다가와 서로 "내가 널 만들었다"라고 주장합니다. 로봇은 진짜 주인을 어떻게 가려낼까요?

단순히 "내가 널 만들었다"고 우기는 자가 주인이 아닙니다. 로봇의 시스템이 붕괴하였을 때, 그 내부 운영체제의 오류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백신을 깔아 완전히 고쳐줄 수 있는 자만이 진짜 창조주입니다. 만들었다고 큰소리치면서 정작 고장 났을 때 고쳐주지 못한다면 그는 참 주인이 아닙니다. 아이를 낳기만 하고 젖을 주어 키우지 못한다면 참부모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2. 구원 계획이 구원 이전에 미리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인류 역시 죄라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걸려 죽음의 늪으로 떨어졌습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내가 세상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신들을 먼저 찾아가야 합니다.

이슬람교의 경전 꾸란 제39장 5절을 보면 "알라께서 하늘과 땅을 진리로 창조하셨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힌두교의 경전 춘도기야 우파니샤드 제6장 역시 절대자 브라흐만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고장 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합니까?

이슬람교의 구원 방식은 율법에 대한 철저한 복종입니다. 신은 하늘에 머물며 율법이라는 밧줄을 툭 던져줍니다.

"이 밧줄을 꽉 붙잡고 네 힘으로 기어 올라와라. 그러면 살려주겠다."

불교나 힌두교는 어떠합니까?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카르마를 끊어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신이 밧줄조차 내려주지 않으니, 자기 스스로 우물벽을 맨손으로 기어 올라가야 합니다.

과연 이것이 완벽한 창조주의 구원입니까? 갓난아기처럼 똥통에 빠져 힘이 다 빠진 인간에게, "알아서 기어 올라와라"라고 하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 방관입니다. 아기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머릿속에 설계하지도 않고 무작정 아기부터 낳는 부모는 없습니다.

무언가를 만들었다면,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고칠지 미리 '계획'을 세워두는 것이 창조주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참된 창조주라면, 인간이 죄에 빠지기 전부터 성경이라는 '설계도'에 그 완벽한 구원 메커니즘을 미리 적어두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참된 창조주이신 하느님은 이 무책임한 다른 종교의 신들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느님은 메시아를 통해 어떻게 인간을 구원할 것인지 구약성경에 치밀하게 예언해 두셨습니다.

큰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을 지내며 죽음과 부활의 시간표를 보여준 요나의 표징을 보십시오. 또한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이사 53,5)라고 명시한 이사야서의 고난받는 종의 예언을 보십시오.

이 수많은 구원의 설계도와 예언들이 수백 년 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실현되었습니다. 진짜 창조주만이 고장 난 피조물을 고칠 완벽한 설계도를 미리 가지고 계시며, 그 계획대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3. 구원하는 과정에서 삼위일체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좁고 어두운 우물에 아이가 빠졌을 때, 진짜 부모는 위에서 "율법을 지켜라", "스스로 깨달아서 올라와라"라고 소리치며 책을 던져주지 않습니다. 참된 창조주의 구원은 철저히 '삼위일체의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유튜브에 올라와 전 세계를 울렸던 외국의 한 실제 구조 현장 영상이 이를 완벽하게 보여줍니다.

걸음마를 갓 뗀 어린 아기가 지름이 수십 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 좁고 깊은 우물 구멍 속으로 추락했습니다. 우물 입구가 너무 좁아 덩치 큰 어른들은 도저히 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어른들은 무작정 뛰어들지 않고 먼저 '계획'을 세웁니다.

"우리가 위에서 밧줄을 꽉 잡아당길 테니, 체구가 가장 작은 소년을 밧줄에 묶어 거꾸로 내려보내자."

이 기가 막힌 구조 방법에 따라, 마을에서 가장 작은 일곱 살짜리 소년의 발목에 굵은 밧줄을 묶어 우물 속으로 거꾸로 매달아 내려보냈습니다. 캄캄한 우물 밑바닥에서 소년은 울고 있는 아기를 두 팔로 꽉 끌어안습니다. 그리고 지상을 향해 소리칩니다. "당기세요!" 지상의 어른들이 일제히 밧줄을 끌어당겨, 소년과 아기를 무사히 구출해 냅니다.

여러분, 이 눈물겨운 구출 작전 안에 하느님의 삼위일체 신비가 완벽하게 담겨 있습니다.

우물 밖에서 계획을 세우고 밧줄을 당기시는 어른들은 '성부 하느님'이십니다. 압도적인 거룩함을 지니신 아버지가 죄악의 좁은 우물에 직접 닿으면 세상이 타버립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인간이 껴안을 수 있는 '인간의 작은 체구'를 입은 소년을 내려보내십니다. 그분이 바로 강생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물 밑바닥까지 거꾸로 내려오시어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두 팔을 벌려 우리를 꽉 끌어안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당기시는 생명의 힘을 아들에게 끊어지지 않게 전달해 준 그 '밧줄'은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 하느님'이십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자신을 만든 진짜 부모를 찾는 방법도 이 삼위일체의 신비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아빠는 거친 세상에 나가 피땀 흘려 노동하여 생존의 '에너지'를 벌어 아내에게 줍니다. 엄마는 그 에너지를 받아 자신의 몸속에서 부드러운 '모유'로 변환시킵니다. 거친 바깥세상의 에너지를 아기가 먹을 수 있는 생명의 양식으로 바꾸어 내어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에너지를 공급하시는 성부 하느님은 '아버지'이십니다. 그 거대한 에너지를 받아, 우리 죄인들이 직접 소화할 수 있도록 당신의 살과 피로 변환시켜 먹여주시는 예수님은 완벽한 '어머니'의 역할을 하십니다. 그리고 엄마와 아기 사이를 끊임없이 흐르며 생명을 돌게 하는 작용 자체가 '성령'이십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분이라면, 나를 구원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부모가 아기를 키울 때 보여주는 이 절박하고 헌신적인 모습이 나타나야만 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이르러 우리를 살리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이 그토록 확연하고 눈부시게 드러난 것입니다. 구원의 과정에 이 완벽한 부모의 양육 방식, 곧 삼위일체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는 가짜 신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삼위일체의 모습으로 다가오신 그분만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진짜 창조주임을 굳게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4. 구원될 수 있다면 구원자도 될 수 있게 만들어야 참 창조자입니다

마지막 4단계입니다. 참된 부모는 아기를 구원하고 젖을 먹이는 데서 끝내지 않습니다. 그 아이가 자라나서 자신과 똑같이 생명을 낳고 구원하는 '부모'가 되게 만듭니다. 참된 창조주는 피조물을 그저 불쌍히 여겨 살려두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똑같은 본성을 수여하여 '구원자'로 격상시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모습대로 인간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식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아버지는 아드님의 피와 성령의 밧줄을 통해 똥통에 빠진 우리를 살려내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제 살았으니 적당히 살아라"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내 피로 너를 구원하였으니, 이제 너도 나와 똑같은 하느님이 되어라. 세상으로 나가 너의 피와 사랑을 내어주어 죽어가는 저 이웃들을 구원하는 창조의 동업자가 되어라!"

이토록 눈부신 삼위일체 교리가 단지 머리 아프고 이해하기 어려운 수학 공식이라고 덮어두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삼위일체의 신비야말로 나의 믿음을 가장 확고하게 만들어주는 우주적인 생존의 근거이며, 하느님이 나의 진짜 창조주이심을 증명하는 가장 위대한 사랑의 교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니 무조건 어렵다고 넘기지 마시고, 매일 이 사랑의 신비를 연구하고 묵상하려 치열하게 노력해야 합니다. 성체라는 달콤한 생명의 피를 기쁘게 받아먹으며 "나를 살려 나를 하느님으로 만드시려고 삼위일체 하느님이 총동원되셨구나!"라는 압도적인 자존감으로 세상을 사십시오. 구원받은 자에서 세상을 살리는 구원자로 날아오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학생을 대상으로 인터넷 게임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수용될 때와 배제될 때 기능적자기공명영상(fMRI)을 촬영하여 뇌의 어느 부분이 활성화되는지를 보았습니다. 게임에서 자기를 따돌리는 배제를 경험하면 스트레스가 일어나며, 뇌에서도 내측 대상 피질과 전성엽이 활성화되는 것입니다. 이 부위는 신체적 통증이 있을 때 활성화되는 곳입니다.

이를 통해 사회적으로 누군가에게 거절당하거나 집단에서 소외를 경험하는 것을 뇌에서는 신체적으로 몸이 아픈 것과 똑같이 받아들인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절이나 소외로 심한 스트레스를 느낄 때, 진통제인 타이레놀 먹는 것도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함께한다는 것 자체로 매우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체적 통증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편하다, 귀찮다’ 등의 이유를 붙여서 혼자 있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하는 경우를 봅니다. 오히려 함께함으로 얻는 스트레스가 크다고 말합니다.

사랑의 삶은 함께함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홀로’에서는 자기 몸에 계속 통증을 주게 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함께하시길 원하십니다. 통증 없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하느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느님께서 하나를 이루는 신비를 직접 보여주시면서, 우리 역시 함께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삼위일체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은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요한 3,16)

삼위일체 하느님은 그 자체로 성부, 성자, 성령의 완전한 사랑의 친교 안에 계십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자기들만의 폐쇄적인 사랑에 머물지 않고, 이 세상을 향해 흘러넘칩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외아들을 내어주셨다는 것은, 우리를 위해 당신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온전히 내어주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자는 성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세상에 오십니다. 성부와 성자는 본질적으로 하나이지만, 구원의 역사 속에서 성자는 파견되는 자로서의 역할을 취하십니다. 죄 많은 세상이 심판받아 마땅해 보이지만, 삼위일체 하느님의 목적은 치유와 회복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즉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십니다.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죽지 않고 오래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요한 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은 성부 성자 성령이 나누는 신적 사랑의 사귐 안으로 우리가 초대받아 그 사랑을 누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에 응답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벗어버리고, 함께하는 기쁨 안에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머물면서 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행복은 더하는 것이 아니라, 덜어내는 것이다(법정).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관계의 신비이며 사랑의 신비이며 일치의 신비입니다. 삼위일체는 하느님의 본질이 사랑임을 우리에게 드러냅니다. 서로 사랑하며 하나 되어 살아가는 하느님의 삶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참된 일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내어주고 받아들이는 사랑의 존재이십니다. 하느님의 자기 전달은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선물로 건네시는 분이십니다. 삼위일체는 이해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 먼저 살아야 할 사랑의 현실입니다.

성부는 성자를 영원히 사랑하시고, 성자는 성부께 온전히 내어드리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사랑의 결합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우리 또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삶은 삼위일체 신비의 반영이며 체험입니다.

일치와 나눔 사랑과 친교 봉사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삼위일체적 삶은 관계를 회복하는 관계의 삶입니다. 사랑하고 섬기고 일치를 이룰 때 우리는 이미 삼위일체 하느님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일치와 친교를 나누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되십시오. 내어줌과 받아들임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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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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