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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6.06.01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피어나네 2026. 6. 1.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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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누군가에게 상처받은 기억은 오래 붙들고 살면서, 정작 제가 밀어냈던 사랑은 잘 기억하지 못해요. 바쁘다는 이유로, 상처받기 싫다는 이유로, 내 방식대로 살고 싶다는 이유로 주님께서 보내시는 마음들을 외면한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그분을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제 계획과 자존심, 그리고 제 방식은 끝까지 놓지 않으려고 하고요. 그래서 말씀보다 생각을 붙들고, 사랑보다 계산을 붙들고, 진실보다 체면을 붙들곤 합니다.

 

그런 저를 보면서도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한없이 부족한데도 끝까지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은 위로이면서도 미안함으로 다가와요.

 

제가 버린 시간도, 제가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주님은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한결같이 손해 보는 사랑을 하시는 주님께 감사합니다.

 

2026년 6월 1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성경 말씀 정리

 

2026년 6월 1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6월 1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2베드 1,2-7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그리스도께서는 귀중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2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님을 앎으로써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풍성히 내리기를 빕니다.

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부르신 분을 알게 해 주심으로써, 당신이 지니신 하느님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신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 주셨습니다.

4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5 그러니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6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7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 보기

마르 12,1-12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에게

1 비유를 들어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2 포도 철이 되자 그는 소작인들에게 종 하나를 보내어, 소작인들에게서 포도밭 소출의 얼마를 받아 오라고 하였다.

3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를 붙잡아 매질하고서는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4 주인이 그들에게 다시 다른 종을 보냈지만, 그들은 그 종의 머리를 쳐서 상처를 입히고 모욕하였다.

5 그리고 주인이 또 다른 종을 보냈더니 그 종을 죽여 버렸다. 그 뒤에 또 많은 종을 보냈지만 더러는 매질하고 더러는 죽여 버렸다.

6 이제 주인에게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만 남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7 그러나 소작인들은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8 그를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9 그러니 포도밭 주인은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

10 너희는 이 성경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11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12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두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워 그분을 그대로 두고 떠나갔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2026년 6월 1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성 유스티노 소개 00:06

✚ 교황님 6월 기도지향 01:15

✚ 미사 시작 01:34

✚ 강론 시작 09:28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버려진 자리에서 피어난 생명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그 대상은 군중이 아니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입니다. 한 사람이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두르고 즙 짜는 틀과 망대까지 마련합니다. 이 포도밭은 이사야 예언자가 노래한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이사 5,2 참조).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포도밭을 소작인들에게 맡기시고 떠나신다는 설정은, 인간에게 주어진 책임의 시간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침묵은 인간이 자유롭게 충실하거나 자유롭게 배반할 수 있는 시간을 열어 놓습니다.

때가 되자 주인은 종을 보내 열매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종을 때리고 모욕하며,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예언자들이 겪었던 고통을 고스란히 보여 줍니다.

마침내 주인은 “사랑하는 아들”(마르 12,6)을 보냅니다. 이 아들은 단순한 사자가 아니라 주인의 마음이며,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들이 걸었던 고통의 길 한가운데에서 함께하십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그를 상속자로 여겨 말합니다.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12,7).

그들의 말은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을 죽이려 하였던 요셉의 형제들이 한 말과 비슷합니다(37,20 참조). 질투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합니다. 소작인들은 결국 ‘사랑하는 아들’마저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립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 밖에서 십자가에 달리실 사건을 미리 보여 줍니다. 결국 주인은 그들을 심판하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맡길 것입니다. 포도밭은 파괴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사라지지 않고, 그곳을 맡은 이들이 바뀔 뿐입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마르 12,10).

인간의 교만과 욕심으로 내치고 버린 존재가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중심이 됩니다. 십자가는 버림받음이지만, 그 버림받은 자리에서 부활이 이루어집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12,11).

그 놀라움은 눈부신 승리라기보다, 상처 난 자리에서 조용히 피어나는 생명처럼 우리 안에 흔적으로 남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뺄 것은 빼고, 더할 것은 더할 줄 아는

오늘 베드로 사도는 더하는 삶을 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뒤집어 얘기하면 빼는 삶을 살지 말라는 말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빼지 말아야 할 것을 빼진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빼는 삶을 사는 사람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은 왜 그럽니까? 빼야 할 것이 뭔지 몰라서 그럽니까? 몰라서 빼는 삶을 사는 사람도 있고 알고서 빼는 삶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빼는 것이 나은 경우가 있습니다. 나쁜 것은 빼는 것이 맞습니다. 예를 들어 독소는 빼야 하고 교만으로 들어가 있는 힘 같은 것은 빼야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빼는 사람은 잔디밭의 잡초처럼 곧 뽑아내야 할 나쁜 것으로 그것을 보는 것이고, 빼야 할 것을 빼는 사람은 지혜롭고 성숙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그렇게 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모든 것을 다 나쁘게 보는 것이고 모든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의 눈이 나쁜 것일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뺄 것을 빼고 더할 것을 더할 줄 알아야 지혜롭고 성숙한 데다 거룩하기까지 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프란치스코의 권고처럼 그리고 오늘 베드로 사도의 말처럼 악습/악덕은 몰아내야 하지만, 덕은 더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 한 가지 덕을 갖고 있으면 다른 덕이 그 위에 쌓이게 되고, 특히 겸손의 덕이 밑받침되면 모든 덕이 그 위에 쌓이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잘 알고 있는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하나의 덕을 가지고 있고 다른 덕들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은 모든 덕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의 덕을 거스르는 사람은 하나도 갖지 못하고 모든 덕을 거스르게 됩니다.”(덕들에게 바치는 인사 6-7)

프란치스코는 덕과 악습에 관해 다른 권고도 했는데 오늘은 바쁜 일정 때문에 이 권고를 소개하는 것으로 나눔을 마치겠습니다.

사랑과 지혜가 있는 곳에 두려움도 무지도 없습니다. 인내와 겸손이 있는 곳에 분노도 동요도 없습니다. 기쁨과 더불어 가난이 있는 곳에 탐욕도 인색도 없습니다. 고요와 묵상이 있는 곳에 걱정도 방황도 없습니다. 자기 집을 지킴에 주님의 두려움이 있는 곳에 원수가 들어갈 곳이 없습니다. 자비와 신중함이 있는 곳에 지나침도 완고함도 없습니다.(악습을 몰아내는 덕)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우리는 주님의 포도원을 어떻게 돌보고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작인에게 경고합니다. 소작인들은 의무를 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도조를 받으러 온 종들을 때리고, 모욕하고, 상처 입히고, 죽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맡겨진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해 주인의 아들마저도 죽여 버렸습니다.

여기에서, ‘소작인’이란 직접적으로는 유대인 지도자들이겠지만, 넓게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요, 바로 우리들 자신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포도원’을 맡기셨습니다. 이 세상이라는 ‘포도원’, 교회라는 ‘포도원’, 우리 자신이라는 ‘포도원’을 맡겼습니다. 사실, 내 몸마저도 내 것이 아니건만, 나 자신이 마치 ‘나의 것’인 양 꼭 붙들고 있기가 다반사입니다.

마치 비유 속의 소작인처럼, 주인에게 속해있는 존재이면서도 속해 있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주인을 반역할 때가 많습니다. 주인을 주님으로 모시기보다,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이 주님의 것인 줄을 알면서도 차마 주님께 돌려드리지 못하고, 저기자신에 대한 애착으로 자신을 꼭 움켜쥐고 있기가 일수입니다.

참으로 딱한 우리 자신입니다. 더군다나 수도승인 우리는 ‘항상 자기 머리 위에 누군가를 두고 사는 사람’들인데도 말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우리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이러한 반역을 멈추라는 메시지입니다.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건네는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자신 밖에 모르는 우리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신다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아직도 여전히 맡기신 ‘포도밭’을 돌보라는 신뢰에 가득 찬 사랑의 말씀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특별히 포도원 주인의 믿음과 자비를 보게 됩니다. 도조를 받으러 보낸 종들이 계속해서 무참히 맞고 죽는 배신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기까지 베풀어지는 믿음과 자비입니다. 그것은 마침내는 당신의 아들마저도 죽음을 당하지만, 끝까지 포도원을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무한한 사랑입니다.

이는 아무리 인간의 죄가 크다 하여도 인간의 죄를 뛰어넘는 하느님 계획의 초월성과 구원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마르 12,11)

조용히 눈을 감아 봅니다. 반역을 일삼는 나를 온갖 사랑으로 끌어안고 돌보시는 당신을 봅니다. 아직도 여전히 나에 대한 믿음을 거두지 않으시고, 나에 대한 희망을 거두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기다리시고 계시는 당신을 봅니다. 내가 이렇게 아직도 사랑받고 있다는 이 놀라움, 당신께서 하신 사랑의 놀라움, 그 사랑, 이 모든 신비를 봅니다.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하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놀랍기만 하네.~~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코복음 12장 11절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주님! 당신께서 제게 하신 일
놀랍기만 합니다.

도망칠수록 더 강한
사랑의 철창으로
꽁꽁 묶으시고
제 안에 꿈틀거리는
반역을 멈추게 하십니다.

거부되고 버려지고 넘어져도
오히려 그를 통해
구원의 섭리로 이끄시고
감춰둔 당신 사랑의
신비를 보여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언제나 제 머리 위에
당신 사랑을 두고 살게 하소서.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하느님의 무모한 투자: 맹독을 마신 아들이 부활의 항체가 되기까지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구나." (마르 12,10-11)

찬미 예수님! 연중 제9주간 월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웅장하고도 뼈아픈 비유, 바로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포도원을 정성껏 가꾸어 소작인들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소출을 거둘 때가 되어 종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리고, 머리를 깨고, 심지어 죽여버립니다.

보통의 지혜로운 주인이라면 이때 군대를 이끌고 가서 소작인들을 진압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주인은 세상의 경제학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가장 무모하고 미친 결정을 내립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아들이 하나 있지.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마르 12,6 참조).

주인은 자기 외아들을 그 살인마들이 득실거리는 죽음의 포도원으로 홀로 밀어 넣습니다. 소작인들은 쾌재를 부르며 그 상속자를 포도원 밖으로 던져 잔인하게 죽여버립니다.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아들이 죽을 것을 정말 모르셨을까요? 아닙니다.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들을 그 참혹한 죽음의 구덩이 속으로 던져 넣으셔야만 했을까요?

이것은 하느님의 실패나 인간의 폭력이 만들어낸 우연한 비극이 아닙니다. 이 죽음은 낡고 병든 세상을 심판하고, 죽음을 이겨내는 새로운 생명의 세대, 즉 기꺼이 자신을 내어놓을 줄 아는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기 위한 하느님의 가장 치밀하고도 완벽한 생명 공학적 설계도였습니다.

이 기막힌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 현대 의학에서 수많은 생명을 살려내는 한 가지 위대한 과학적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바로 '혈청(Antivenom)', 즉 해독제와 항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입니다. 사막이나 정글에서 사람이 치명적인 독사에게 물렸을 때, 그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혈청을 주사하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 생명의 혈청을 어떻게 만들어낼까요? 놀랍게도 그 시작은 '건강하고 피가 맑은 말(Horse)'을 사지로 몰아넣는 데서 출발합니다.

과학자들은 가장 튼튼하고 훌륭한 말을 한 마리 고릅니다. 그리고 뱀에서 추출한 치명적인 맹독을 그 말의 혈관 속으로 직접 주사합니다. 독이 퍼지기 시작하면 말은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며 생사를 오가는 진통을 겪습니다. 혈관이 타들어가고 근육이 찢어지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듭니다.

하지만 그 튼튼한 말의 몸속에서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끔찍한 죽음의 독과 싸우기 위해, 말의 면역 체계가 자신의 피를 쥐어짜 내어 그 독을 완벽하게 이겨낼 수 있는 강력한 '항체'를 생성해내는 것입니다.

말이 죽음의 고통을 뚫고 마침내 독을 이겨내고 살아나면, 과학자들은 그 말의 피를 뽑아냅니다. 그 피 속에는 어떤 맹독도 박살 낼 수 있는 무적의 항체가 들어 있습니다. 이 피를 정제하여 독사에게 물려 죽어가는 사람의 몸에 투여하면, 죽어가던 사람은 기적처럼 생명을 얻고 다시 살아납니다. (출처: 데이비드 워먼, 『백신의 역사와 인류』)

이 거룩하고 처절한 의학의 법칙이 바로 오늘 복음에 담긴 십자가 구원의 완벽한 실체입니다.

하느님이 만드신 포도원, 즉 이 세상은 왜 어느새 소작인들의 이기심과 탐욕이라는 치명적인 맹독으로 가득 차 버렸을까요? 그 근본적인 원인은 창세기의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인류 최초의 소작인이었던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포도원(에덴동산)에서 모든 것을 다 누렸습니다. 하느님은 오직 동산 한가운데 있는 '선악과' 하나만을 하느님의 몫으로 구별하여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선악과를 바치는 행위는, "이 포도원의 주인은 제가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라는 겸손한 자기 죽음의 봉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뱀(자아)의 속삭임에 넘어가, 자아를 선택하고 이기주의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소유권을 훔쳐 자신이 주인이 되려 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바치지 못한 그 타락의 순간부터 인류의 혈관 속에는 '내 것을 움켜쥐어야 산다'는 지독한 이기심의 바이러스가 퍼져나갔습니다.

이 죽음의 바이러스를 박살 내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반대의 법칙이 증명되어야만 했습니다. 바로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기꺼이 버리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뎌내며 죽어갈 때, 비로소 더 거대하고 영원한 하느님의 복이 주어진다"는 위대한 진리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이 진리를 훈련시키셨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백 세에 얻은 생명보다 귀한 외아들 이사악을 모리아산에서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는 자기 목숨을 끊어내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자아의 죽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도망치지 않고, 이기심을 꺾으며 기꺼이 아들을 봉헌하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가 기꺼이 자아를 죽이고 순종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하느님은 그 희생의 죽음을 버텨낸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겠다" (창세 22,17-18 참조)라며 더 큰 우주적인 축복을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죽음을 피하지 않고 버텨냈을 때 더 거대한 부활의 복이 온다는 것을 구약의 설계도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설계도를 완벽하게 성취하기 위해, 하느님 아버지는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맹독이 들끓는 포도원으로 직접 투입하십니다.

예수님은 포도원 밖 골고타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온 인류가 뿜어내는 배신과 증오, 살인과 교만이라는 끔찍한 독을 당신의 거룩한 몸으로 고스란히 다 받아내셨습니다.

아드님은 십자가 위에서 뼈가 으스러지는 산고를 겪으며 생사를 오가셨습니다. 소작인들은 아들이 죽었다고 기뻐하며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무덤이라는 사흘간의 사투 끝에 그 사망의 맹독을 완전히 박살 내시고 부활이라는 가장 찬란한 '생명의 항체'를 생성해내셨습니다. 내가 죽어야만 나도 살고 온 인류도 산다는 우주의 진리를 당신의 십자가로 완벽하게 입증해 내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혈관에는 죽음을 이기는 영원한 생명의 피가 흐릅니다. 주님은 당신의 찢어진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그 피(항체)를 성체성사라는 주사기에 담아, 오늘 죄의 독에 감염되어 죽어가는 우리들의 영혼 속으로 직접 수혈해 주십니다. 아드님의 육신은 으스러졌지만, 그 으스러짐을 통해 우주 최강의 부활 항체가 완성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결론에서 예수님은 시편 118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당신 자신을 "모퉁이의 머릿돌"이라고 부르십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하느님 아버지는 세상이 내다 버린 그 핏덩어리 돌을 가져다가, 인류를 구원할 새로운 하느님 나라(교회)를 지탱하는 무적의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짓눌림을 기꺼이 감당하셨기에, 그분 덕분에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 성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구약의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훔치려던 탐욕스러운 소작인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활의 항체를 수혈받아 하느님의 본성을 지니게 된 새로운 시대의 백성이자, 거룩한 하느님 성전의 일부입니다.

과거의 소작인들은 철저히 내 배만 불리려는 이기심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피를 먹고 마시는 여러분은 이제 달라야 합니다.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쳐 부활로 새로운 치료제를 만들어내는 존재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진짜 축복은 편안함이 아닙니다. 이기주의의 바이러스가 퍼진 세상 한복판에서, 내가 먼저 손해 보고 내가 먼저 죽어지는 그 십자가의 고통을 끝까지 버텨낼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을 살리는 무적의 항체이자 흔들리지 않는 평화의 머릿돌로 완성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적군을 생포해 정보를 얻어야 하는 특수 임무를 맡은 한 독일 병사가 적진의 참호를 습격해 홀로 있던 적군의 병사를 생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적군의 병사는 식사 중이었기에 그의 손에는 무기 대신 한 조각의 빵이 들려 있었습니다. 무방비 상태로 습격을 당한 병사는 겁에 질린 나머지 엉겁결에 손에 들고 있던 빵을 독일 병사에게 불쑥 건넸습니다. 그리고 이 독일 병사는 무의식적으로 빵을 받았습니다.

이제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기치 않은 선물인 빵을 받은 독일 병사는 임무 수행을 포기하고 그 포로를 풀어주었다고 합니다. 자기가 받은 선물인 ‘빵’에 대한 보답이었습니다.

나눔이 마치 자기에게 큰 손해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받을 것에만 집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손해로 볼 것이 아니라,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훌륭한 투자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더군다나 하느님 나라는 사랑의 삶을 산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눔이라는 사랑은 자기에게 커다란 보험이 될 수 있습니다.

매달 나가는 보험금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이 보험금에 ‘손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사람을 지혜롭다고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위해 ‘사랑’을 투자하는 사람은 어리석을까요? 아니면 지혜로울까요?

주인이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운 다음, 소작인에게 포도밭을 내주고 멀리 떠납니다. 그만큼 종을 배려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일은 종이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인이 종들을 보내 소출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보낸 종들을 오히려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제 사랑하는 아들까지 보냅니다. 이 아들을 알아보고 존중했을까요? 아닙니다.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마르 12,7)라고 말하면서 더 큰 죄를 짓고 맙니다.

소작인들이 저지른 가장 근본적인 죄악은 무엇일까요? 자신들의 ‘정체성’을 망각한 데 있습니다. 그저 관리하도록 위임받았을 뿐인데, 자기 소유로 착각하고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주인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이곳은 하느님께서 잠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뿐입니다. 우리의 역할은 떵떵거리며 주인 행세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에게 보낼 합당한 소출을 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삶입니다. 이렇게 사랑이라는 소출을 내는 사람만이 충실한 종으로 인정받고, 주인과 기쁨의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세 가지 헛된 확신이 우리를 가로막는다. 내가 잘 해야만 한다는 확신, 타인이 나를 대우해야만 한다는 확신, 세상이 힘들지 않아야만 한다는 확신(엘버트 엘리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진리를 찾아 먼 길을 걸었던 한 사람의 순교자이며 순례자를 만납니다. 익숙함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진리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리를 찾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을 향해 걸어갑니다.

진리이신 하느님은 삶의 방향이며 인간 존재를 완성하는 빛입니다. 순교는 생명보다 더 소중한 하느님의 진리를 선택하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 유스티노는 인간이란 진리를 갈망하고 사랑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며 자신보다 더 큰 가치를 위해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그의 순교는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끝까지 살아낸 실천의 결실입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진리의 빛을 세상과 나누고자 했으며 자신의 삶 전체를 감사의 봉헌으로 바쳤습니다. 끝내 하느님을 만났고 하느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의 삶 전부를 사랑으로 봉헌합니다.

또한 예수 성심의 사랑이 더욱 깊이 스며드는 아낌없는 사랑의 시간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이며 사명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걸어가는 모든 길이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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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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