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종종 지나간 기억 속에서만 하느님을 찾곤 해요. 그래서 "주님, 어디 계시나요?" 하고 묻게 됩니다.
하지만 신앙은 과거의 기억 속에서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함께하시는 주님을 알아보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오늘도 저희 삶 가운데 살아 계신 주님을 잊지 않게 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2026년 6월 3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6월 3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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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보기
- 지금 바로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 오늘 말씀 묵상 모아보기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2티모 1,1-3.6-12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가,
2 사랑하는 아들 티모테오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3 나는 밤낮으로 기도할 때마다 끊임없이 그대를 생각하면서, 내가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깨끗한 양심으로 섬기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6 그러한 까닭에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7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8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9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은총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10 이제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셨습니다.
11 나는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스승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12 그러한 까닭에 나는 이 고난을 겪고 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지 잘 알고 있으며, 또 내가 맡은 것을 그분께서 그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 보기
마르 12,18-27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그때에
1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19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0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21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지만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었고, 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22 이렇게 일곱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23 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2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25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26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2026년 6월 3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소개 00:06
✚ 교황님 6월 기도지향 01:21
✚ 미사 시작 01:37
✚ 강론 시작 08:21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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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부활은 다시 살아나는 마음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부유한 귀족 계층이었고, 성전과 대사제직의 권력 가까이에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로마의 지배 권력과 협력하며 특권을 지키는 데 익숙하였기에, 신앙의 열정보다 체제를 유지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고, 오직 모세오경, 곧 토라만을 하느님의 계시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질문은 진리를 찾기 위해서라기보다, 부활이라는 빛을 꺼뜨리려는 시험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신명기의 결혼 규정을 꺼내 듭니다(25,5-6 참조). 죽은 뒤에도 이 세상의 질서가 그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가정 위에서, 부활을 모순으로 몰아가려 합니다. 질문은 논리의 옷을 입고 있지만, 그 속에는 믿음을 조롱하려는 차가운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이러한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부활은 그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새롭게 보여 주시는 존재의 방식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이 땅의 삶을 되풀이하며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토라에서 증거를 찾으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탈출 3,6.15–16; 4,5)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오래전에 죽은 이들의 이름을 당신의 이름 안에 품고 계신다면, 그들은 사라진 존재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위로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신 이들의 이름을 잊지 않으시고, 죽음조차도 우리를 향한 그분의 기억과 사랑을 끊어 내지 못합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손을 끝까지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그 손을 놓지 않았으면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의 관계는?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은 우리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지금 우리의 관계는 어떻고 미래 우리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맺어졌고 미래는 어때야 하는지도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우리의 관계는 성소 곧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유언에서 “주님께서 나에게 형제들을 주셨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진실한 신앙인은 처음서부터 나와 관계 맺는 사람을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주
셔서 맺게 됐다고 하거나 그때는 그것을 몰랐지만 이제라도 하느님께서 그를 내게 보내주셨고 관계를 맺게 됐다고 믿습니다.
저희 수도자들은 이런 면에서 뚜렷합니다. 제가 같이 사는 형제자매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우연이 모여 살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과 관계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이 삶으로 불러주셨고, 이 삶을 같이 살 사람들을 형제자매로 보내주셨다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재물을 주신 것처럼 형제자매를 주신 것이고, 결혼한 사람에게는 역시 관계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배우자를 주셨고 그 관계를 통해서 자녀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르신 모든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관계는 관계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맺어주신 거라는 믿음으로 서로를 보고 받아들여야 하고, 미래의 관계도 관계의 주인께서 새로 맺어주시는 대로 맺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독서의 바오로와 디모테오 관계가 우리의 모범입니다. 먼저 부르심을 받은 바
오로가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디모테오와 영적인 부자 관계를 맺고 자신의 안수로 그가 받은 은사를 불태우라고 격려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가 사랑하는 아들 티모테오에게 인사합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그러므로 지금 내 옆에서 나와 같이 사는 분들에게 바오로 사도처럼 안수해줍시다. 서로 안수해줌으로써 서로를 성령으로 불타게 하고 거룩하게 살도록 해줍시다. 그리고 이렇게 같이 살다가 마침내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 안으로 같이 들어갑시다.
그것은 현재의 모든 관계를 끝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의 부모 자식 관계를 이제 끝내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현재의 부부 관계를 이제 끝내고 그리스도의 정배가 되는, 지금의 형제자매가 그리스도의 형제자매가 되는 관계로 관계를 다시 맺읍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우리는 하느님의 능력을 얼마나 믿고 있는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두가이들의 부활에 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은 ‘불신의 페러다임’과 ‘믿음의 페러다임’의 차이를 잘 보여줍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왜곡된 신앙’(잘못된 신앙)이 가져온 불신, 곧 ‘잘못된 생각’에 구속되어 버린 ‘영적무지’와 믿음이 가져온 ‘신적지혜’의 자유의 대조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의 ‘성경과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를 밝힙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해, 모세오경만을 받아들였고 인간의 합리적 사고의 범주로써 이해하려 했으며, 내세와 부활과 영적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활한 상태를 마치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여기고, ‘수혼법’(신명 25,5-10 참조)으로 부활에 대해 따집니다. 곧 그들은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부활한 상태를 마치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상태를 영적 존재로, 마치 천사와 같이 장가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는 존재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그들이 믿고 있는 모세오경인 <탈출기>(3,6)를 인용하여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은 이미 죽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있으며 부활하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느님 능력’에 대해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 아래 하느님의 초월적인 권능을 무시했고, 고작 하느님의 부활의 능력이 마치 죽은 사람을 죽기 전의 생활로 되돌려놓는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되살아난다는 것만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변화된 부활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 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다 죽지 않고 변화할 것입니다. ~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1코린 15,51-52)
그렇습니다. 이러한 ‘영적 존재에 대한 무지’와 ‘하느님 권능에 대한 불신’이 그들로 하여금 부활에 대한 불신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믿으면, 신적지혜가 열릴 것입니다. 불신은 우리를 끝없이 속박할 뿐이지만, ‘믿음’은 우리를 ‘진리’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하오니, 주님! 저희를 신적 지혜로 이끄소서. 당신을 참되게 믿고, 당신의 능력을 따르게 하소서.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코복음 12장 24절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주님! 제 안에 당신이 얼마나 생생히 살아 계신지를 알게 하소서.
제 생각에 빠져 허상에 끌려 다니지 않게 하소서.
제 생각이 빗나가지 않게 하시고, 영적 무지와 불신을 몰아내소서.
믿음으로 기뻐하며,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안에서 변화되고 성화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우리는 무엇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가?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마르 12,27)
찬미 예수님! 연중 제9주간 수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들과 예수님의 치열한 논쟁을 봅니다. 그들은 일곱 형제와 결혼한 여자가 부활하면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아주 유치하고도 인간적인 질문으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무지를 꾸짖으시며, 부활한 이들은 천사들과 같아진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아주 장엄한 결론을 내리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입술을 열어 대영광송을 부르며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정체성은 한없이 낮고 초라한 밑바닥에 내버려 둔 채 입으로만 부르는 찬미가 과연 하느님께 진정한 영광이 될 수 있을까요? 자기 정체성은 끌어올리지 않으면서 말로만 영광을 드리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공허한 소음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순간은, 우리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신성으로 끌어올려 주셨음을 굳게 믿고 그 위대한 본성에 맞게 살아갈 때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 단순히 '죽어서 무덤에 묻힌 사람'과 '심장이 뛰어 숨을 쉬는 사람'을 구분하는 정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의 진짜 의미는 훨씬 더 거대하고 우주적입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산 이들'이란 단순히 호흡을 이어가는 생물학적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과 본성에 참여하여 '하느님과 똑같은 존재(神)'로 수직 상승한 위대한 상속자들을 의미합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굳이 인간을 하느님으로 만드셔야만 직성이 풀리실까요? 이 깊은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스승과 제자의 실화 하나를 먼저 들여다보겠습니다.
눈멀고 귀먹어 짐승처럼 날뛰던 헬렌 켈러와, 그녀의 곁에서 평생을 바친 앤 설리번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처음 헬렌을 만났을 때, 헬렌은 손으로 음식을 마구 집어 먹고 화가 나면 사람을 물어뜯는 야생 동물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만약 설리번 선생님이 헬렌에게 밥을 잘 떠먹여 주고,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는 '친절한 사육사' 역할에만 만족했다면 어땠을까요? 헬렌은 평생 배부르고 안전한 짐승으로 살다 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설리번 선생님의 목표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피눈물 나는 인내심을 쏟아부어, 헬렌의 손바닥에 끊임없이 글자를 적어주었습니다. 물의 감각을 깨닫게 하고, 사랑의 의미를 가르쳤습니다. 왜 그토록 지독하게 가르쳤을까요? 헬렌을 그저 '살아있는 동물'이 아니라, 자신과 똑같이 생각하고, 사랑하고, 세상을 향해 웅변할 수 있는 '완벽한 인간'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헬렌 켈러가 자신의 본성을 인간으로 끌어올리지 않은 채, 개나 고양이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면서 입으로만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 영광 받으세요"라고 웅얼거렸다면 그것이 스승에게 영광이 되었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마침내 1904년, 헬렌 켈러가 하버드 대학교의 래드클리프 칼리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던 날이었습니다. 헬렌이 학사모를 쓰고 세상에서 가장 지성적인 여인으로 당당하게 단상에 섰을 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설리번 선생님은 기쁨의 눈물을 펑펑 흘렸습니다.
설리번 선생님에게 영광은 무엇이었을까요? "나는 평생 짐승 같은 아이를 굶기지 않고 잘 키운 보모다"라고 말하는 것이 영광일까요? 아닙니다. "보십시오! 이 위대한 철학자이자 작가인 헬렌 켈러가 바로 나의 제자이며 나의 딸입니다!"라고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 스승의 진짜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제자가 스승과 똑같은 지성과 인격을 갖춘 고귀한 존재로 성장했을 때, 스승의 위대함도 완벽하게 증명되는 것입니다. (출처: 헬렌 켈러, 『내가 살아온 이야기』)
하느님의 마음도 이와 정확히 똑같습니다. 부모가 "나는 죽은 아이의 부모다" 혹은 "나는 평생 밥만 먹고 뒹구는 식충이의 부모다"라고 말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겠습니까? 부모의 가장 큰 자랑은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이 아이의 부모다!"라고 외칠 때 완성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분은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라고 선언하신 것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는 고작 땅에 코를 박고 돈과 쾌락만 쫓아다니는 죽은 인간들의 신이 아니다. 나는 나와 똑같은 사랑을 실천하고, 나와 똑같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느님들(Gods)'의 아버지다!"라고 당신의 가장 거룩한 자존심을 온 우주에 선포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 없다고 겸손한 척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 목적을 부정하는 지독한 교만이며, 하느님의 영광을 철저히 가리는 짓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과 욕구는 자신의 '본성'에서 나옵니다. 개라고 믿으면 땅에 떨어진 음식 찌꺼기를 탐하게 되고, 사람이라고 믿으면 식탁에 앉아 품위 있게 식사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죽어 흙으로 돌아갈 인간'으로만 믿는다면, 우리의 욕구는 철저하게 세상의 돈, 권력, 쾌락이라는 썩어 없어질 것들에만 머물게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 보시기에 죽은 자들의 무덤일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체성사를 통해 "나는 하느님의 피를 수혈받은 하느님이다!"라는 정체성을 굳게 믿게 되면, 우리의 욕구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느님처럼 원수를 용서하고, 하느님처럼 가난한 이를 위해 내 살을 내어주고 싶은 '거룩한 욕망'이 불타오르게 됩니다.
우리 인간은 본래 죄악 속에서 40년, 80년 뼈 빠지게 일하다가 흙으로 돌아가야 할 일벌과 같은 비참한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한 일벌로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의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어, 십자가에서 당신의 살과 피를 쥐어짜 내어 만든 영적 로열젤리, 곧 '성체'를 우리 입에 물려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성체를 먹는 순간, 우리 영혼 속에는 찌질한 인간의 유전자 발현이 멈추고, 썩지 않는 하느님의 거룩한 DNA가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꿀을 찾아 헤매는 일벌이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고 생명을 낳는 하느님 나라의 여왕벌, 즉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유일한 목적은 바로 인간을 하느님으로 만들기 위함이셨습니다. 이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처럼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 보시기에 '살아있는 자'가 되며 하느님께 완벽한 영광을 돌려드리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인 티모테오 2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두려움에 떠는 티모테오에게 이 위대한 정체성을 벼락처럼 일깨워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2티모 1,7).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돈이 부족할까 봐, 사람들에게 무시당할까 봐 불안해하는 그 '비겁함'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땅에 속한 인간의 죽은 본성일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네 안에 하느님의 힘과 사랑의 영이 있으니, 제발 고아처럼 굴지 말고 하느님의 상속자답게 불꽃을 피워 올려라!"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시편 82편 6절을 보십시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향해 직접 내리신 구원의 설계도가 명확히 적혀 있습니다.
"나는 말한다. 너희는 신이다. 너희는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
교회의 위대한 교부이신 성 이레네오 주교님은 『이단 반박』에서 이렇게 사자후를 토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완전히 살아 숨 쉬는 인간이며,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 (Gloria Dei vivens homo).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출처: 성 이레네오, 『이단 반박』).
그렇습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최고의 영광은 나의 정체성을 하느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한복판에서 십자가를 지고 원수를 사랑하며 "보십시오 아버지! 제가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위대한 하느님입니다!"라고 당당하게 살아낼 때, 아버지는 가장 크게 영광을 받으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일을 진행하는데 잘 풀리지 않아 답답한 마음이 들 때 어떻게 하십니까? 답답한 마음에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묻는다고 하면 과연 명쾌한 답변을 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정답이 아닌 오답으로 더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신부가 되고서 강의 요청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방송 출연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의 미래를 생각하며 전문 강사가 되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교육받을 것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친한 선배 신부님에게 이 고민을 털어 놓았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제가 강의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하면서, 다른 할 일도 많으니 시간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이 조언을 받아들이면서 강사의 역할을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제 모습을 본 동창 신부가 말했습니다. “강의 한번 해 본 적 없는 신부의 말은 왜 들어?” 맞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고, 그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말은 주님의 말씀뿐입니다. 주님 말씀이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사두가이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성전을 주관하는 제사장 가문과 귀족들로 이루어진 보수적 기득권층으로, 무엇보다 모세오경만을 하느님 말씀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모세오경에 나오지 않는 부활, 천사, 영혼의 불멸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옳음을 주장하려고 후사 없이 죽은 형의 아내를 동생이 아내로 맞아 가문을 잇게 하는 제도를 극단적으로 과장하여 일곱 형제 이야기를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두가이들의 가장 큰 착각은 ‘부활 후의 삶’을 단순히 ‘이 세상 삶의 연장선’으로만 여겼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가장 권위 있게 여기는 모세오경(탈출 3,6)의 말씀으로 그들을 가르치십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할 때,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었고, 이사악의 하느님이었고….”라고 과거형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수백 년 전에 죽은 조상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현재형은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죽은 조상이지만 하느님과 맺은 사랑의 관계는 절대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기에 잘못 생각하는 사두가이들,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할까요? 문제는 그들이 당시에 성전을 주관하는 종교 지도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할 것이 아니라 철저히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당연한 것처럼 말하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말에 집중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부정하게 되면 하느님 나라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명언
위대한 일은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일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다(빈센트 반 고흐).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생명을 주시고 생명을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께서는 성장과 변화, 희망과 책임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없이는 우리의 신앙은 생명력을 잃어갑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바라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것을 누리면서도 감사할 줄 모릅니다. 살아있는 삶의 매 순간이 하느님의 넘치는 은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안에서 살아 계시며 생명과 사랑을 나누십니다.
순교자들은 죽음보다 강한 하느님을 선택한 참된 생명의 사람들입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진실로 믿으며 진실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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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