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어렵고, 이해하는 일은 더 어렵게 느껴져요. 그래서 이해하기보다 이해받고 싶어 하고, 들어주기보다 제 마음을 먼저 알아주기를 바랄 때가 많아요.
오늘 복음은 이런 저에게 사랑이란 결국 마음을 여는 일이라고 말해줍니다. 한 번 더 들어보려고 하고, 한 번 더 이해하려고 마음을 내어주며 사랑을 간직하게 하시는 주님은 찬미 받으소서!

2026년 6월 4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6월 4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보기
- 지금 바로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 오늘 말씀 묵상 모아보기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2티모 2,8-15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8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9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10 그러므로 나는 선택된 이들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이 말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12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13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14 신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설전을 벌이지 말라고 하느님 앞에서 엄숙히 경고하십시오. 그런 짓은 아무런 이득 없이, 듣는 이들에게 해를 끼칠 따름입니다.
15 그대는 인정받는 사람으로, 부끄러울 것 없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일꾼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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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 12,28ㄱㄷ-34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2026년 6월 4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교황님 6월 기도지향 00:20
✚ 미사 시작 00:36
✚ 강론 시작 07:04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사랑은 삶의 방향이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이 사람은 바리사이와 헤로데 당원, 사두가이들과 달랐습니다. 그는 적대감을 가지는 대신 존중하며 경청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 모습을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께 다가와”(마르 12,28)라고 묘사합니다. “듣고”, “보고”, “다가와”라는 동사를 잇따라 쓰며, 한 인간이 진리 앞에서 천천히 마음을 여는 장면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의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라삐들이 613개의 계명을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으로 나누어 논쟁하던 시대, 그는 율법 전체를 떠받치는 중심을 묻습니다. 무엇을 붙들어야 삶이 무너지지 않는지, 무엇이 하느님께 이르는 길인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계명만으로 답하시지 않습니다. 먼저 신명기 6장 4절의 고백을 꺼내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마르 12,29).
하느님께서 한 분이시라면, 사랑도 둘로 갈라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 인간의 온 존재를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삶의 방향의 문제입니다. 하느님께 삶 전체를 돌려놓는 회개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레위기 19장 18절을 가져와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2,31). 여기서 사랑은 단순한 선행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반드시 인간을 향한 책임으로 ‘다시 번역되어야’ 한다는 선언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결국 형제적 관계의 회복으로 드러납니다.
이에 율법 학자는 더 나아가 이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12,33)라고 고백하며, 성전의 제도보다 더 깊고 넓은 곳에 있는 하느님의 뜻을 짚어 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12,34).
아직 문턱이지만, 이미 빛은 그 사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사랑은 그 빛이 머무는 자리입니다. 사랑은 하나의 제도와 그 제도가 만들어 놓은 숱한 형식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율법은 제도와 사상과 규범에 갇히지 않고, 그것을 넘어선 곳에서 완성을 이루어 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 사랑 앞에 마주 서서
“그대는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디모테오에게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라고 하는데 이 말이 지금의 제게는 이런 말로 들립니다. 하느님 안에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하느님 앞에 서라는 말로.
저는 하느님 안에 있다는 느낌을 늘 가지고 살아가고 무엇을 하든 하느님 안에서 하고 있다는 느낌도 늘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바오로 사도가 아테네 시민들에게 한 연설 덕분입니다.
그 연설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 시민들이 자신도 모르는 채 모르는 신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지요.
그것은 진정 큰 깨달음이고 하느님 안에서 늘 살아가게 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 제가 너무 안심하며 하느님 앞에 차렷하고 서려고 하지 않게도 한 측면도 있음을 오늘 처음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마치 아기가 안심하고 엄마 품에 있지만 장난감 놀이에 너무 빠져 엄마를 쳐다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하느님 사랑 안에 있기에 사랑은 다 받아 누리지만 오늘 주님의 말씀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에 있어서는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지는 못하게 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사랑을 받을 때 사랑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사랑할 때 하느님께 더 사랑을 받는 것이지요. 그것은 물론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과 똑같은 사랑 좀생이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면 당신도 우리를 사랑하고, 그렇지 않으면 당신도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그런 분이 아니고, 당신을 더 사랑해야지만 더 사랑해 주시는 분도 아니시라는 것이 우리 믿음입니다.
주님 말씀대로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와 햇빛을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비를 싫어하는 사람이 비를 맞으러 나가지 않고 피하고, 햇빛을 싫어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햇빛을 쐬지 않는 것과 같이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하느님 사랑 앞에 서지 않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느님 사랑 안에 있고 사랑에 잠겨 사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하느님 사랑 앞에 마주 서서 그 사랑을 포옹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늘 나는 무엇에 제일 관심이 많은가?
어제 <복음>의 사두가이와의 논쟁에서, 예수님께서 부활과 부활체의 특성,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 곧 생명의 하느님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그 말씀을 듣고 있던 율법교사는 그 생명의 길인 ‘계명’에 대해 묻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마르 12,28)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동의 원리로서의 계명’을 말씀하기 전에, 그 ‘계명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왜 중히 여겨야 하는지’를 먼저 밝히십니다. 곧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와 정당성’을 밝혀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한 분이신 하느님’이시라는 사실과 ‘우리 주님’이시라는 의미와 동시에, ‘우리의 존재와 의미’도 밝혀줍니다. 곧 우리가 ‘그분의 것, 그분의 소유’로 그분의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나아가, 그분이 우리를 당신의 소유로 삼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 12,34)
그러니 그는 아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그가 계명을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이를 몸소 실행할 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아직 선포되지 않은 “새 계명”에 따라 실행하지도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뒤에 선포하게 될 “새 계명”은 구약의 이중계명과는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곧 <요한복음>에서 선포된 “새 계명”은 이웃 사랑의 시금석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15,12)로 바뀌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삶을 통해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가?”
혹 ‘이익을 얻는 법’, ‘손해 보지 않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가? 아니면, ‘미워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지는 않는가?
만약, 우리가 ‘사랑’과 ‘하느님’을 앞세우고 있다면, 하느님과 사랑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의 머리가 가득 차 있고 늘 하느님과 사랑에 대한 말을 할 것이며, 사랑하기 위해 고민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나는 무엇에 제일 관심이 많고, 무슨 생각을 제일 많이 하고, 무슨 말을 제일 많이 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느님인가? 나 자신인가? 세상인가? 재물인가?”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코복음 12장 31절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한 형제로 보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이웃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이웃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법의 얽매임이 어떻게 자유와 평화를 주는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르 12,30-31)
찬미 예수님! 연중 제9주간 목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수만 가지 복잡한 율법을 단 두 개의 기둥으로 압축해 주십니다. 하느님을 온전히 사랑하라는 '수직적인 기둥'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수평적인 기둥'입니다. 이 두 기둥이 교차하여 만들어지는 모양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내 마음대로 편하게 살고 싶은데, 하느님은 왜 이토록 무거운 사랑의 의무로 우리를 옭아매려 하실까요? 얽매임 없이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진정한 자유가 아닐까요?
어느 날, 세상의 모든 규칙과 인간관계에 지쳐버린 한 젊은이가 지혜로운 랍비를 찾아와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선생님, 저는 국가에 세금을 바치고 율법을 지키는 것도 억울하고, 매일 부딪히는 이웃들의 비위를 맞추며 사랑하는 척하는 것도 지긋지긋합니다. 수직적인 의무도 없고 수평적인 관계도 없는, 아무도 저를 간섭하지 않는 완벽하게 평화롭고 자유로운 공간은 이 세상에 없습니까?" 젊은이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랍비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물론 있지. 그곳에 가면 자네에게 세금을 내라거나 법을 지키라고 독촉하는 왕도 없고, 자네의 속을 뒤집어 놓거나 돈을 빌려달라고 귀찮게 구는 이웃도 전혀 없다네. 아주 완벽하게 고요하고 자유로운 곳이지."
젊은이가 눈을 번쩍이며 다급하게 물었습니다.
"아니, 그런 천국 같은 곳이 도대체 어디입니까?"
랍비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공동묘지라네. 오직 차갑게 죽어있는 시체들만이 왕에 대한 수직적 의무도, 이웃에 대한 수평적 사랑의 얽매임도 없는 완벽한 자유를 누린다네. 젊은이, 살아 숨 쉬는 생명이라면 응당 그 관계의 무거운 짐을 기꺼이 짊어져야 하는 법이라네."
그렇습니다. 의무와 관계의 얽매임을 거부하는 완벽한 자유는 곧 죽음의 다른 이름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지우신 이 수직과 수평의 얽매임은 우리를 구속하려는 형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 거칠고 무서운 세상 속에서 우리의 생명과 절대적인 자유를 완벽하게 지켜주기 위해 하느님께서 고안해 내신 가장 완벽한 '안전 시스템'입니다.
이 위대한 십자가의 얽매임이 어떻게 우리를 지켜주고 자유롭게 하는지,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국가와 법'의 원리를 통해 먼저 들여다보겠습니다.
우리가 한 나라의 국민으로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려면, 반드시 그 나라의 법률이라는 강제적인 사슬에 우리 자신을 묶어야만 합니다. 국가의 모든 법은 가만히 뜯어보면 정확히 두 갈래의 얽매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위를 향한 의무입니다. 국방의 의무를 위해 군대에 가고,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내 피 같은 돈을 떼어 세금을 내야 합니다.
둘째는 옆을 향한 의무입니다. 형법과 민법을 지켜야 합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이웃을 함부로 때리거나 이웃의 재산을 훔쳐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얽매임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두 가지 의무가 답답하다며 이렇게 소리친다고 상상해 봅시다.
'나는 내 마음대로 사는 완벽한 자유인이 될 거야! 국가에 세금도 내지 않을 것이고, 내 기분대로 이웃의 물건을 빼앗고 마음껏 때리며 살겠어!'
이 사람이 과연 자유를 얻을까요? 아닙니다. 이 두 갈래의 법을 어기는 순간, 국가는 공권력을 발동하여 그 사람을 체포해 차디찬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자유는 100퍼센트 영원히 박탈당하고 맙니다.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세금을 내기 싫고 이웃의 비위를 맞추기 귀찮아도, 기꺼이 이 두 가지 법의 사슬에 우리 자신을 묶고 순종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우리가 위를 향해 바친 세금과 국방의 의무로 인해, 국가는 거대한 군대를 키워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우리의 생명'을 안전하게 지켜줍니다. 우리가 옆을 향해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법을 지킬 때, 국가의 경찰과 공권력은 강도와 살인자들로부터 '우리의 집과 평화'를 완벽하게 지켜줍니다.
그렇습니다. 위를 향한 국가에 대한 사랑(세금)과 옆을 향한 이웃에 대한 사랑(준법)이라는 얽매임은, 남을 좋게 하려는 것만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밤에 두 다리를 쭉 뻗고 편안하게 잠들 수 있는 '나의 완벽한 자유와 평화'를 보장받기 위해 우리가 기꺼이 선택하는 생존의 밧줄인 것입니다.
우리가 속하고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집단의 수준을 가만히 들여다봅시다. 이 위를 향한 법과 옆을 향한 법이 얼마나 철저하고 깊이 있게 지켜지느냐에 따라, 그 집단이 누리는 평화와 자유의 크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어둠의 세계에 있는 깡패 집단을 생각해 봅시다. 그곳에도 나름의 위계질서가 있고 의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법의 바탕에는 참된 사랑이 없습니다. 위를 향한 존경은 폭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고, 옆을 향한 의리는 돈과 이익 때문입니다. 사랑의 법이 작고 얄팍하기에, 그들은 늘 다른 조직이 자신들을 깔보거나 공격할까 봐 두려워하며, 부하가 언제 배신할지 몰라 밤잠을 설칩니다. 겉으로는 힘이 세 보이지만 내면에는 평화가 전혀 없는 지옥입니다.
반면, 우리가 머무는 가정을 보십시오. 가정은 세상의 어떤 조직이나 회사보다 위를 향한 질서(부모 공경)와 옆을 향한 질서(형제애)가 끈끈한 사랑의 법으로 지켜지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바깥세상에서 아무리 치이고 상처받아도, 집에 돌아와 문을 닫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평화로운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법의 강도, 곧 사랑의 얽매임이 강할수록 평화도 강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 사랑(수직)과 이웃 사랑(수평)이라는 십자가의 계명은 바로 이 가정의 사랑을 우주적으로 확장한 것입니다. 이 두 계명은 하느님 나라라는 우주 최고의 가정에 소속되어 영원한 보호를 받기 위해 우리가 서명해야 할 '영적 헌법'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세상의 그 어떤 법보다 훨씬 더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아가페적인 사랑을 요구합니다. 내 목숨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내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이 가장 무겁고 철저한 십자가의 헌법이 지켜지는 곳이기에, 그곳에는 사탄의 어떤 위협이나 상처도 침범할 수 없는 100퍼센트 완벽한 평화와 자유만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무거운 사랑의 법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일상에서 연습하는 이들만이 그 영원한 나라에 살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의 단잠을 포기하고 성당에 나와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예배하고 십일조를 바칠 때(수직적 세금),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은 전능하신 팔을 뻗어 사탄의 맹렬한 공격과 지옥의 공포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완벽하게 방어해 주십니다.
우리가 내 속을 썩이는 얄미운 직장 동료나 배우자에게 앙갚음하지 않고 꾹 참고 용서할 때(수평적 준법), 내 주변은 분노와 복수의 칼날이 사라진 안전한 평화의 요새가 됩니다. 결국 십자가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우주 최강의 보디가드 시스템입니다. 이 법을 지키는 자는, 우주의 통치자가 나를 지켜주신다는 압도적인 자존감 속에서 '왕의 여유'를 누리며 세상을 두려움 없이 걷게 됩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기적적으로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들은 완벽한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들을 광야로 이끄시자마자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이라는 무거운 법을 주십니다. 1계명부터 3계명까지는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수직적 계명이고, 4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수평적 계명입니다.
이제 막 자유를 얻은 백성에게 왜 또다시 무거운 사슬(율법)을 채우셨을까요? 만약 광야에서 이 수직과 수평의 법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며칠도 안 되어 먹을 것을 두고 서로를 죽이고 빼앗는 짐승의 무리로 전락하여 사막의 모래에 파묻혀 멸망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들이 '자유로운 야만인'이 아니라 '안전하고 거룩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영원히 살아남게 하시려고 십계명이라는 단단한 성벽으로 그들을 묶어 보호하신 것입니다. (출처: 『주석 성경』 탈출기 20장).
교회의 위대한 학자이신 성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하셨습니다.
"사랑의 짐을 거부하는 자는 생명을 거부하는 자입니다. 수레바퀴는 축에 단단히 매여 있을 때만 힘차게 굴러갈 수 있고, 악기의 줄은 팽팽하게 당겨져 묶여 있을 때만 아름다운 소리를 냅니다. 하느님과 이웃이라는 두 기둥에 당신을 단단히 묶으십시오. 그 결박이 당신을 천국의 평화로 이끌 것입니다." (출처: 성 아우구스티누스, 『요한 복음 강해』 참조).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미국 아이오와 주립 대학교 더글라스 젠타일의 연구팀 내용이 있습니다. 대학생 496명을 네 그룹으로 나눠서 12분간 캠퍼스 안을 걷도록 하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에 대해 마음속으로 다음의 특정 생각을 품도록 지시했습니다.
1) ‘그 사람이 행복해지기를’이라며 따뜻한 마음을 보냄.
2) ‘나와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함.
3) ‘내가 상대보다 뛰어날 것 같은 점’에 주목하도록 함.
4) 상대방의 복장이나 물건에 대해 관찰하도록 함.
그 후 참가자들의 행복감, 불안, 공감도, 타인과의 유대 등을 측정했습니다. 과연 어떤 그룹이 가장 좋은 효과를 보았을까요? 첫 번째, 타인의 행복을 바랐던 그룹이 가장 행복감이 높았고, 불안이 감소했으며, 공감도와 사회적 유대감에서도 좋은 수치를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행동하면 결국 자기에게 좋은 영향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선사시대에는 집단을 이루며 살 수밖에 없었기에, 그 유전자가 지금 우리에게도 전해져서 협력관계 안에서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계된 우리입니다. 따라서 자기의 행복을 원한다면, 가장 먼저 타인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율법학자 한 사람이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28)라고 묻습니다. 이는 당시 율법학자 사이에서 논쟁이 끊이지 않았던 질문이었습니다. 수많은 계명 중 무엇이 가장 중요하냐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라는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율법학자는 ‘첫째가는 계명’ 하나만을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시면서 둘째 계명을 덧붙이셨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31)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계명’은 복수가 아닌, 단수입니다. 이 두 가지 계명을 묶으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으며, 이웃을 사랑하는 자비의 실천 없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가장 첫째가는 계명입니다. 이를 알게 된 율법학자는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 12,34)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지 않으시고, 가까이 있다고만 하십니다. 왜냐하면 아는 것만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실천입니다. 이 사랑의 실천만이 결국 나를 행복의 길로 들어가게 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사랑으로 태어났다. 사랑은 우리의 본성이다(루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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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