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주기도 환희의 신비 2단이 떠올라요.
성모님은 예수님을 잉태하신 몸으로 서둘러 엘리사벳을 찾아가시잖아요. 문득 저는 누구를 모시고 살아가고 있는지, 누구와 함께하며 그분을 전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정말 그분의 뜻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는지도요.
가난한 과부의 헌금 동전 두 닢보다 그 안에 담긴 진심을 보시는 주님은 찬미 받으소서!

2026년 6월 6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연중 제9주간 토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6월 6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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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보기
- 지금 바로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 오늘 말씀 묵상 모아보기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2티모 4,1-8

복음 선포자의 일을 하십시오. 주님께서 의로움의 화관을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1 나는 하느님 앞에서, 또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리고 그분의 나타나심과 다스리심을 걸고 그대에게 엄숙히 지시합니다.
2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3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더 이상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입니다. 호기심에 가득 찬 그들은 자기들의 욕망에 따라 교사들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4 그리고 진리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신화 쪽으로 돌아설 것입니다.
5 그러나 그대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 내며, 복음 선포자의 일을 하고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6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7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8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애타게 기다린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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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 12,38-44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38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2026년 6월 6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
✚ 강론 시작 07:25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남는 것으로 사랑하고 있진 않은가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되풀이하여 나열합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언어는 따뜻하고 정겨운 교훈이 아니라 진실을 찾는 논쟁의 칼날이 되고, 그 칼날은 율법 학자들을 겨눕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하느님을 향한 길이기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향한 우월과 교만의 무대가 됩니다. ‘기도’조차도 제 위신을 위하여 길게 늘어뜨린 장식으로 삼으며, 그리스 말 표현에 따르면 과부들의 ‘집마저 삼키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당시 관행으로 미루어 보건대, 사회적으로 취약한 과부들을 위한답시고 재산을 맡아 주면서 부당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거나, 성전 제의를 위하여 봉헌하라고 권하면서 재산을 빼앗은 것으로 보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의 긴 기도는 제 이익을 위한 구실이며, 하느님의 종말론적 심판을 더욱 무겁게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이 경고 뒤에 마르코 복음사가는 곧바로 장면을 바꿉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헌금함 맞은쪽에서 사람들이 돈을 넣는 모습을 바라보십니다. 부자들의 많은 돈이 쏟아지는 가운데, 한 가난한 과부가 가장 작은 동전 두 닢을 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언하십니다. 하느님의 눈에는 액수의 크기가 아니라 마음의 깊이가 그 가치를 결정한다고요.
부자들은 풍족한 가운데 남는 것을 바쳤으나, 과부는 부족함 속에서 ‘자기 삶 전체’를 바쳤습니다. 돌로 된 성전은 거대한 금과 은을 삼키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작은 동전 두 닢으로 한 사람의 온 생애를 받아들이십니다.
우리는 묻게 됩니다. 나는 지금 하느님께 무엇을 ‘드리는가’, 또는 무엇을 ‘내맡기고’ 있는가. 또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교회는 신자들이 가진 돈과 시간과 노력, 봉사를 바라는가. 아니면 그들의 온전한 삶이 하느님께 봉헌되기를 바라는가.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총이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요즘 저는 겸손과 진실 또는 성실에 대해 많이 생각합니다. 겸손하지 못하고 진실하거나 성실하지 못한 저를 갈수록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 오늘은 겸손에 대해서 반성하고자 하는데 요즘의 저는 겸손한 것 같으면서도 겸손하지 않습니다.
예전의 저는 무척 교만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저를 아는 것이 저의 겸손이라면 겸손이었기에 저의 교만에 대한 자각이 늘 있었고 그래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교만의 면에서 제가 전보다 나아진 것이 분명히 있지만 그렇다고 정말 제가 겸손해진 것은 아닌데 제가 마치 겸손한 자인 양 삽니다.
교만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해야 하는데 교만하지 않으면 그것이 곧 겸손인 양 착각하며 산 것이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않는 것만으로 겸손해졌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것과 같습니다. 미워하지 않는 것이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요. 미워하지 않는 것이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미워하지 않는 것만으론 아직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하지 않는 것은 기껏 잘해야 미워하지 않는 것이지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게다가 무관심이라는 쉬운 방법이 있기에 오히려 사랑과 더 멀어질 수 있지요.
그렇지요. 미워하지 않는 가장 쉬운 방법이 무관심과 무관계가 아닙니까?. 아무튼 미워하지 않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듯 교만하지 않은 것 자체로 겸손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전보다 덜 교만해진 것으로 겸손해진 줄 착각하였던 것인데 이런 저를 깨닫게 해준 계기가 얼마 전에 있었습니다.
지난주 저는 평화방송 <님따라 한평생>이라는 프로를 위해 인터뷰했습니다. 이 프로는 원로 사제 수도자의 주님을 따른 한 생을 소개하는 프로인데 이번에는 올해 프란치스코 파스카 800주년을 맞이하여 프란치스칸 수도자를 찾다가 그렇게 원로도 아니고 자격도 없는 제가 인터뷰를 하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제가 겸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1부는 그럭저럭했는데 2부를 마치고 나서는 왠지 찝찝했습니다. 왜 그렇게 찝찝했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니 답이 나왔습니다.
1부에서는 부족한 제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어떻게 성소를 되찾게 됐는지 그것을 비교적 겸손하게 얘기한 데 비해 2부에서는 하느님의 은총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은총을 받은 저를 드러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풍부히 내렸다고 바오로 사도는 말했는데 저는 은총이 많아진 그곳에 죄가 많아진 꼴이 되었던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모든 선은 다 하느님의 것이고, 내 것이라고는 죄와 악습밖에 없다고 했는데 어찌 죄인에게 내려진 은총이 아니라 은총을 받은 나를 자랑하려고 했는지.
죄는 은총과 만나야 하지만 은총은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에게 주어지고 보존되는 것임을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를 통해 다시 한번 깨닫고 뉘우치는 오늘 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대체 무엇이 전부를 바치게 했을까요?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엄하게 질타하십니다.
“뒷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렙톤 두 개를 봉헌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높이 칭송하십니다. 과부의 헌금은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는 “내면적 헌신의 외적인 표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봉헌’의 참뜻을 일깨워 주십니다. 곧 헌금의 의미가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달려있음을 깨우쳐주십니다. 마지막 음식마저 내어주었던 사렙다의 과부처럼, 자신이 가진 동전 전부를 내어놓았던 이 가난한 과부처럼, 아니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그렇게 다른 이들과 하느님을 위해 마음으로 헌신해야 밝혀주십니다.
이처럼, “참된 봉헌”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일입니다. 사실, 이 과부는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인데도, 그의 전부를 바쳤습니다.
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의 전부를 바치게 했을까요?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고 싶은 이를 만났는가?
전부를 건네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그분을 만났는가?
전부를 내어주고도 가지지 못한 것마저 만들어서라도 주고 싶은, 그런 이를 만났는가?
그렇게 소중하고, 그렇게 귀한 이를 만났는가?
진정, 우리가 그분을 만났다면, 어떻게 하면 그분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사실,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도 비싸서 그 어떤 많은 돈으로도 결코 얻을 수가 없지만, 동시에 너무도 싸서 ‘단 돈 두 닢’으로도 얻을 수 있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마음의 순수한 지향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지향’이라는 보화가 있습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분께서는 그 ‘지향’을 보십니다. 마음 속 ‘지향’이 순수하면 예수님 마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곧 아무리 거대하고 큰일일지라도 마음 없이 한다면 결코 예수님 마음을 얻을 수 없지만,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일지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한다면 예수님 마음을 얻게 될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 혹은 ‘크고 거창한 일을 하느냐? 작고 미천한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마음의 지향이 얼마나 순수하느냐?’ 입니다. 곧 무엇을 하든지 ‘사랑하는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당신을 향하는 지향이 깨끗해지게 하소서. 당신을 향한 마음이 갈림이 없이 오롯하게 하소서. 오로지 사랑하는 일만 하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코복음 12장 44절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
주님! 제 마음의 지향을 깨끗하게 하소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하게 하소서.
전부를 내어놓은 가난한 과부처럼, 목숨을 내어놓은 당신처럼, 산 제물이 되게 하소서.
오직 당신이 저의 전부이오니, 전부를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유혹과 맞서는 자는 하느님을 품지 못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마태 2,14-15)
찬미 예수님! 성모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는 6월의 성모 신심 미사입니다.
오늘 복음은 한 편의 숨 막히는 추격 영화 같습니다. 잔혹한 권력자 헤로데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 칼을 빼 들었고, 요셉과 마리아는 한밤중에 급히 짐을 싸서 낯선 땅 이집트로 도망을 칩니다. 겉보기에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의 가족이 세상의 권력자들을 피해 비겁하게 쫓겨 다니는 피난기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아주 뼈아프고도 중대한 영적 질문을 던집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은 왜 천사 군대를 동원해 헤로데를 쳐부수지 않으시고, 굳이 성가정을 한밤중에 '도망치게' 만드셨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 신비를 통해, 우리가 인생의 위기와 유혹 앞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그 진짜 영적 생존법을 파헤쳐 보겠습니다.
품에 갓난아기를 소중히 안고 길을 가는 한 어머니가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갑자기 골목길에서 사나운 들개가 침을 흘리며 덤벼듭니다. 이때 어머니는 어떻게 행동할까요?
어머니가 무술을 연마한 유단자이고 손에 몽둥이가 들려 있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가 "내가 저깟 개 한 마리 못 이길 줄 알아?" 하며 아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들개와 맞서 싸우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어머니는 내가 싸워서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싸우는 과정에서 행여나 흙먼지가 튀어 아기의 눈에 들어가거나 짐승의 발톱에 아기가 조금이라도 다칠까 두려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기를 꽉 끌어안은 채 미친 듯이 도망을 칩니다.
어머니가 도망치는 이유는 비겁해서가 아닙니다. 내 자존심이나 내 힘을 증명하는 것보다, 내 품에 안긴 '생명'을 지켜내는 것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유일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품은 자는 결코 들개와 기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체면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 이것이 생명을 품은 자의 가장 위대한 본능입니다.
이 원리는 전 세계 국가 원수들을 보호하는 최정예 요원들의 '경호 프로토콜'과도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VIP가 연단에서 연설하고 있을 때, 갑자기 군중 속에서 암살자가 총을 꺼내 들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때 경호원들은 절대로 범인이 누구인지 따지거나, 맞서 싸우기 위해 총격전을 벌이느라 그 자리에 머물지 않습니다.
경호원들의 제1수칙은 단 하나입니다. 위험이 감지되는 그 즉시, VIP의 머리를 강제로 누르고 몸을 둥글게 감싼 뒤, 어떤 질문이나 망설임도 없이 가장 가까운 안전 가옥(Bunker)을 향해 냅다 뛰어 도망치는 것입니다. 경호의 핵심은 적을 물리치는 멋진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켜야 할 '생명'을 살려서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입니다. 체면을 차리거나 상황을 따지고 맞서 싸우려 들면 VIP는 목숨을 잃습니다. (출처: 댄 에머리, 『시크릿 서비스: 대통령 경호의 세계』)
오늘 복음의 성모 마리아와 요셉 성인이 보여준 행동이 바로 이 '어머니의 본능'이자 완벽한 '영적 경호 프로토콜'이었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하니 이집트로 피신하여라"라고 경고했습니다. 보통의 자존심 강한 남자라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아니, 이 아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서요? 하느님이 벼락을 내려 헤로데를 죽이시면 되지, 왜 비겁하게 한밤중에 도망을 가야 합니까?"라며 따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 성인은 단 한 마디도 묻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저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갔다"고 기록합니다. 마리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불평 한마디 없이 남편 요셉의 이끌림에 완벽하게 순종하며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그들은 알았습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자존심이나 내 편안함이 아니라, 내 품에 안겨 있는 이 고귀한 '예수님의 생명'을 지켜내는 것임을 말입니다. 내가 우주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상황의 비참함이나 도망치는 수치심에 상처받지 않습니다.
우리 영혼 안에도 요셉과 마리아처럼 목숨 걸고 지켜내야 할 '아기 예수님', 즉 세례를 통해 잉태된 하느님의 거룩한 생명이 숨 쉬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헤로데와 들개들, 즉 내 안의 교만과 분노, 돈을 향한 탐욕, 음란한 쾌락이라는 마귀는 틈만 나면 내 영혼의 아기를 물어뜯어 죽이려고 이빨을 드러냅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 신앙인들이 가장 자주 범하는 치명적인 교만이 있습니다. 바로 유혹의 들개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워 이기겠다'며 호기를 부리는 것입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술자리나 쾌락의 유혹이 넘치는 장소에 굳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신앙이 깊으니까 이 정도 유혹은 내 의지로 충분히 이겨낼 수 있어. 나는 절대 취하지 않을 거야. 나는 흔들리지 않아."
이것은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영혼 안에 '하느님이 살아 숨 쉬고 계시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한 자의 지독한 오만입니다. 만약 내 품에 갓난아기 예수님이 안겨 있다는 것을 진짜로 믿는다면, 어떻게 감히 그 위험한 유혹의 자리에 머물며 마귀와 주먹다짐을 하려 들겠습니까? 싸우는 동안 유혹의 흙먼지가 내 영혼의 아기에게 덮이고, 마귀의 발톱에 내 안의 은총이 갈기갈기 찢겨나갈 텐데 말입니다. 유혹과 맞서 싸우려 드는 자는, 아직 하느님을 온전히 품지 못한 가짜 신앙인일 뿐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왜 하필 스스로는 걷지도 못하는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어머니 품에 안겨 세상에 오셨을까요?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자유의지'를 완벽하게 존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스스로 고집을 꺾고 당신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을 만큼 '겸손'해질 때까지, 우리 영혼 안에서 스스로 무력한 아기처럼 머물며 기다려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 안에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생명이 잉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내 의지로 이 유혹을 이길 수 있어!'라며 뻗대는 얄팍한 '교만의 화분'에 갇혀 있는 한, 주님은 내 안에서 영원히 아무 힘도 쓰지 못하는 무력한 아기로 계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유혹의 들개 앞에서 나의 한계를 철저히 인정하고, 체면을 버리고 화장실로 숨거나 그 자리를 박차고 도망치는 '겸손'을 선택할 때 어떻게 될까요? 내가 교만의 화분을 스스로 깨부수는 그 순간, 내 안의 아기 예수님은 비로소 우주를 지배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본모습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시작하십니다.
내가 유혹을 피해 도망칠 수 있을 만큼 완전히 작아졌을 때, 내 안의 주님은 가장 커지시어 세상의 그 어떤 마귀와 유혹도 단숨에 짓밟을 수 있는 하느님의 능력을 내 삶에 마음껏 펼쳐 보이십니다.
이렇게 이집트에서 생명을 지킨 성가정은, 헤로데가 죽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또 장애물이 생깁니다. 잔혹한 아르켈라오스가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요셉은 두려워합니다. 그때 천사가 다시 꿈에 나타나 방향을 틀어 갈릴래아 '나자렛'이라는 깡촌으로 우회하도록 내비게이션의 경로를 수정해 줍니다.
왜 우주의 창조주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화려한 예루살렘이 아니라, "거기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며 멸시받던 나자렛 깡촌에 숨겨두셨을까요?
세상의 사나운 들개들로부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완벽한 '위장술(Camouflage)'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귀한 보물은 가장 허름한 상자에 숨겨야 도둑이 훔쳐 가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메시아를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보잘것없는 마을의 청년으로 30년 동안 완벽하게 숨기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무한한 능력을 발휘해도 유혹을 보면 도망쳐야 할까요? 당연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도와주십니다. 할머니가 장성한 아들과 길을 가다가 들개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들을 믿고 개와 싸워야 할까요? 무서워 도망을 치면 아들도 함께 올 것입니다. 만약 유혹이 나를 따라잡을 양이면 그때 아들이 돌아서서 개와 맞설 것입니다. 그러니 어쨌거나 죄에서 도망치십시오. 이것이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오늘 밤 당장 짐을 싸서 도망치라 하시면 도망치고, 시골 구석에 숨어 있으라 하시면 기꺼이 머무르십시오. 그 철저한 도망과 침묵의 발걸음만이 내 품에 안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온전히 지켜내는 유일한 경호 수칙입니다.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처럼,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겸손한 도망을 통해 내 안의 주님을 위대한 하느님으로 키워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십자가의 성 요한 성인은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말씀을 특히 강조하셨습니다. 그의 책 ‘어둔 밤’은 감각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집착에서도 벗어나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한 젊은 가르멜 수도자가 말합니다.
“저의 십자고상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성물입니다. 이 십자고상을 바라볼 때마다 저는 큰 위로를 받습니다.”
이 말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 성인은 이렇게 조언하셨습니다.
“십자고상에 그렇게 집착하고 있다면, 그 십자고상을 버리십시오.”
어두운 밤을 지나가기 위해서는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요한 성인의 요구였습니다. 사실 집착하는 것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진짜 많습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집착도 큽니다. 자기 뜻과 맞지 않다면서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 역시 집착이기 때문입니다. 집착에서 벗어날 때,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을 보지 않고 주님만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끊어야 할 집착은 무엇인지 묵상하십시오.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끊어야 할지 혼란스럽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낮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많은 부자가 큰돈을 넣는데, 가난한 과부는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습니다. 렙톤 두 닢은 당시 통용되던 화폐 중 가장 작은 동전으로 그 누구의 주의도 끌지 못할 만큼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다르게 보십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 12,43)
사람들은 헌금함에 들어간 동전의 액수를 세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주머니에 남아 있는 비율을 보신 것입니다. 즉, 부자들은 자기의 풍족한 재산 중 일부를 바칩니다. 과부의 헌금은 가장 작았지만, 궁핍한 가운데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봉헌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4)
원어인 그리스어 ‘생활비’는 곧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 과부는 내일 당장 살아갈 기약조차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생명 전체를 하느님의 섭리와 자비에 온전히 내어 맡긴 것입니다. 모든 집착을 버린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이기심과 기득권을 포기하고 비울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전부이십니다(성 암브로시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자신의 전존재를 내어놓는 봉헌을 만납니다. 참된 봉헌은 자기 존재를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삶을 어떤 가치에 헌신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봉헌의 삶은 돈의 가치가 아닌 마음의 가치를 좇는 삶입니다.
마음의 가치는 겸손함 속에서 가장 깊은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우리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내어놓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큰 것을 기억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봉헌된 작은 것을 기억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정성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것을 이루고도 감사하지 못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부족함 속에서도 내어놓을 줄을 알았습니다. 사랑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삶이 참된 삶입니다. 참된 삶은 하느님께 내어맡긴 참된 봉헌입니다.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감사의 응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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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