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저는 자꾸 제 생각 안에서만 하느님을 이해하려고 할까요?
이해되지 않으면 멀어지려 하고, 설명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어요. 그런데 주님은 오늘도 여전히 쪼개어지고 나누어진 사랑으로 저에게 오십니다.
이해되지 않는 순간에도 곁에 머물러 주시며 지금 이 순간을 살게 하시는 주님께 감사합니다.

2026년 6월 7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6월 7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보기
- 지금 바로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 오늘 말씀 묵상 모아보기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신명 8,2-3.14ㄴ-16ㄱ

하느님께서는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몰랐던 양식을 먹게 해주셨다.
“너희는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 그것은 너희를 낮추시고,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너희 마음속을 알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신 것이다.
3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14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주 너희 하느님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15 그분은 불 뱀과 전갈이 있는 크고 무서운 광야, 물 없이 메마른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시고, 너희를 위하여 차돌 바위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신 분이시다.
16 또 그 광야에서 너희 조상들이 몰랐던 만나를 너희가 먹게 해 주신 분이시다.”.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1코린 10,16-17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형제 여러분,
16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17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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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6,51-58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52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2026년 6월 7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성체 성혈 대축일 소개 00:06
✚ 미사 시작 01:09
✚ 강론 시작 16:20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믿음은 결국 받아들이는 일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느님께 불평하였을 뿐 아니라 그분과 다투기까지 하였습니다(탈출 17,2; 민수 20,3 참조). 탈출기에 나타난 싸움의 말이 요한 복음서에서도 나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두고 서로 “말다툼”(요한 6,52)을 벌입니다.
그들의 분노는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닫힌 결과입니다. 우리 또한 그러한 모습이 낯설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스스로의 계산과 맞지 않을 때, 우리는 속으로 불평하며, 하느님께 따지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6,53)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그저 상식과 관습을 깨뜨리는 사변적 언어 표현이 아닙니다. ‘먹고 마시는’ 행위에는 ‘이 세상에 하느님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믿음은 관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분의 찢긴 몸과 쏟아진 피를 내 생명의 뿌리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성체성사를 암시하면서도 꼭 성체성사만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성체성사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자리이며, 삶이 그 믿음으로 다시 살아 꿈틀거리는 자리입니다. 내가, 우리가 그분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 드러나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이 세상에 현존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우리 삶의 참된 음식이며 참된 음료입니다. 우리 삶과 생명을 이어 가게 하는 실제입니다. 그분을 받아 모시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받아 모신다는 것은, 죽어 가는 우리의 자리, 우리의 공허와 상처와 좌절의 자리에 그분의 살과 피를 들여놓아, 그분의 생명이 우리 대신 살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분 없이 살아가지 못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쉬운 믿음과 어려운 믿음
오늘 우리가 지내는 축일은 성체와 성혈 대축일이 아니라 사랑 대축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먹는 것은 주님의 살과 피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이 축일에 우리는 성체와 성혈을 내어주시는 그러므로 당신 전부를 내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먼저 보겠습니다.
그런데 성체와 성혈을 내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즉시 떠오르는 것이 바로 우리가 미물이라고 하는 동물들의 사랑입니다.
예를 들어 두꺼비는 새끼가 날 때 뱀에게 가서 약을 올린다고 하지요. 이 얘기가 사실인지 모르지만 그래서 뱀이 잡아먹으면 어미 두꺼비는 죽지만 두꺼비의 독에 뱀도 죽어 배 속에 있던 새끼들이 그 살을 먹고 자란다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살모사나 연어와 같은 동물들도 자기를 먹이로 주면서 새끼를 살리는 무화적(無化的) 사랑의 동물들입니다. 동물들이 왜 이러겠습니까? 그것은 사랑의 본성이 자기 무화와 희생이기 때문이고, 하느님의 이 무화적 사랑의 본성을 지니고 생겨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성체와 성혈이 이 무화적 사랑의 모범이지만 관건은 우리가 그것을 믿느냐 또 그것을 먹느냐 그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축일에 주님의 그 큰 무화적 사랑을 알아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어주시는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라고 하시며, 제발 당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하시는데 아무리 그러셔도 우리가 먹고 마시지 않으면 다 헛것이지요. 이 약을 먹으면 모든 병이 낫는다는 말을 들어도 먹어야 낫지 먹지 않으면 다 헛것인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안 먹는 사람은 왜 안 먹는 것일까요? 필요 없어서일까요? 믿지 않거나 못해서일까요? 영원히 살 생각이 없는 사람은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 맛을 모르는 사람도 먹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못해서 그러는 사람이 더 많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매일 먹을 것으로 주신다는 것을 믿기 어려워서, 먹을 것으로 주신다는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살과 피라는 것을 믿기 어려워서.
그렇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사실 믿기 쉬운 것이 아닙니다. 믿기 쉬었으면 개신교 신자들처럼 실제가 아니라 상징이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성체와 성혈은 실제가 아니라 전부를 내어주시는 주님 사랑의 상징이라고 믿지요.
그런데 그것은 쉬운 믿음이고 그들은 쉬운 믿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려운 믿음을 선택하고 성체와 성혈이 실제라고 믿습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인간이 되어 오신 최초의 육화를 믿는 것이 힘들지 한 번 내려오신 분이 매일 빵과 포도주로 오시는 것을 믿는 것은 힘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믿기 어렵지 않고 믿을 수 있지만, 하느님께서 빵과 포도주가 되시는 것은 믿기 어렵고 믿을 수 없다는 말입니까? 하느님께서 빵과 포도주로 오시는 것이, 인간이 되어 오시는 것보다 더 낮추시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믿기 어려운 것입니까?
아무튼 저는 쉬운 믿음이 아니라 어려운 믿음을 선택했고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시는 최후 만찬 때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여기서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포함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자들이 배반했어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뜻도 있고, 당신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뜻도 있고, 제자들이 이 세상 삶을 마칠 때까지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뜻도 있고,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그리고 영원히 사랑하신다는 뜻도 있을 것입니다. 성체와 성혈의 성사가 이 ‘끝까지 사랑’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먹고 마시라는 말씀에 담긴 세 가지 뜻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우리를 위해 내어놓으신 당신의 몸과 피, 그 크신 사랑과 신비를 되새기는 날입니다. 곧 이어, 우리는 곧 당신 몸과 피를 우리의 양식으로 내어준 그 크신 사랑을 먹을 것입니다. 그토록 아름답고 거룩한 사랑을 마실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광야에서 하느님께서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는 이야기를 두 번에 걸쳐 반복해 들려줍니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신명 8,3)
이는 오늘날에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몸과 말씀으로 우리를 양육하고 계심을 알려줍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7)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도 형제들과도 한 몸입니다. 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일인지요! 찬미하고 찬양해야 할 일인지요!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참으로, 어마어마한 말마디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라고 하십니다. 단지 “내려온 빵”인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줄 빵”이라고 하시면서, 그 빵은 바로 “당신의 살”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이 이 빵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에 생명을 줄 빵은 그 빵이 되기에 앞서, 밀이 바수어져 물과 함께 반죽이 되듯, 그렇게 부서지고 쪼개지고 피 흘려야만 했습니다. 그래야만 “빵”이 될 수 있고, “참된 양식, 참된 음료”가 될 수 있는 까닭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양식은 결코 우리가 획득하여 얻은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주셔서 받은 것입니다. 은총입니다. 당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은총으로 살아갑니다.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빵”과 “살”과 “생명”입니다. 이는 같은 지평에 자리 잡은 인간 존재 자체를 의미합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주목할 수 있는 단어는 51절고 58절에 나오는 “하늘에서 내려 온”이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인간 존재와 그 존재양식이 가 닿을 수 없는 신적인 차원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늘에서 내려온 빵”인 예수님의 자기 계시는 인간 존재와 존재양식 모두를 신적차원으로 받아들이는 말씀입니다. 곧 ‘하늘의 몸’과 ‘땅의 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 그 ‘몸’이 쪼개진 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54)
당신의 신적 생명을 “먹고 마셔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뜻을 세 가지로 알아들어 봅니다.
<첫째>는 당신께서 ‘생명의 밥이요, 양식’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제1독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명 8,3)
<둘째>는 ‘예수님과의 사귐’을 말해줍니다.
이를 <제2독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1고린 10,16)
<셋째>는 그분의 ‘현존 안에 머물음’을 말해줍니다.
이를 <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이 모두는 ‘빵과 피를 받아먹고 마시는 이’ 안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양식이 되고, 우리 안에 머물며, 한 몸이 되어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십니다. 그 크신 사랑으로, 당신의 ‘신적 생명’을 우리에게 선사하십니다. 당신 자신을 증여하십니다. 당신의 살은 우리의 살이 되고, 당신의 피는 우리의 피가 됩니다.
그리하여 갈라지고 패인 우리 가슴 골골에 당신의 피가 흐르게 된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의 피, 구원과 생명의 피가 흐르게 된 것입니다. 이 놀랍고 크신 사랑에, 우리의 가슴은 벅차오릅니다.
잠시 후면, 우리는 “아멘”이라는 응답과 함께 예수님의 몸과 피를 영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살겠다.’는 응답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몸’은 ‘인간관계’, 곧 ‘사랑의 사귐과 친교’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피’는 ‘생명’, 곧 ‘일치와 유대’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의 몸’에서 친교와 사귐으로 사랑의 관계 맺음을 배워야하고, ‘예수님의 피’에서 사랑의 유대와 일치를 배워야할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7)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건네주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로 우리는 예수님이 지니셨던 그 사랑과 생명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이웃과 형제들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어 살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6장 56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주님! 당신은 제 안에 머무르되 저를 장악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제게 먹혀 사라짐으로 제 안에 살아계십니다.
당신 안에 저를 허용하시되 저를 가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숨결에 태워 드높게 날게 하십니다.
오늘도 당신은 모든 것을 내어주고 자신을 감추신 그 오묘함과 놀라움으로, 그 그윽한 당신 사랑의 숨결로 저를 적시오니, 찬미 받으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성체가 신앙의 본질이 되게 하려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요한 6,53.56)
찬미 예수님!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적이고도 무서운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생명' 자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 가톨릭교회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참으로 뼈아픈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분명 "성체가 아니면 구원이 없다, 생명이 없다"라고 목숨을 걸고 말씀하셨는데, 수많은 신앙인에게 성체성사는 그저 미사 중간에 치르는 하나의 거룩한 예식, 혹은 내 신앙생활을 치장하는 '액세서리' 정도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성체를 안 모신다고 해서 당장 내 삶이 죽을 것처럼 애통해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도대체 왜 성체성사의 의미가 이토록 축소되고 힘을 잃어버린 것일까요? 왜 우리는 생명의 양식을 먹으면서도 영적으로 굶어 죽어가고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 치명적인 영적 질병의 원인을 파헤치고, 성체가 어떻게 우리를 완벽한 행복으로 이끄는지 깊이 묵상해 보겠습니다.
1940년대,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과 의사 르네 스피츠(Rene Spitz) 박사는 당시 고아원과 보육원에 수용된 아기들을 대상으로 생존과 발달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당시 시설의 환경은 위생적으로 완벽했습니다. 아기들에게는 매일 정확한 시간에 칼로리와 영양소가 완벽하게 계산된 최고급 우유와 이유식이 공급되었습니다. 병균이 옮을까 봐 간호사들은 아기들을 안아주지 않고, 요람 옆에 우유병을 고정해두어 아기들이 스스로 빨아먹게 했습니다. 육체적인 생존에 필요한 '양식'은 100퍼센트 완벽하게 제공된 것입니다.
그런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이 완벽한 양식을 먹고 자란 아기들의 무려 37퍼센트가 2년 안에 원인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한 것입니다. 살아남은 아기들조차 신체 발달과 지능이 심각하게 지연되었고, 허공을 보며 무의미한 몸짓만 반복하는 정서적 마비 상태에 빠졌습니다. 의학계는 이 병을 '호스피탈리즘(Hospitalism, 시설병)'이라고 불렀습니다.
스피츠 박사는 원인을 찾기 위해 또 다른 집단을 관찰했습니다. 바로 여성 교도소에서 엄마와 함께 지내는 아기들이었습니다. 환경은 고아원보다 훨씬 비위생적이었고, 영양분도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의 아기들은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튼튼하고 명랑하게 자라났습니다.
차이가 무엇이었을까요? 고아원의 아기들은 차가운 유리병에서 '음식(칼로리)'만 먹었지만, 교도소의 아기들은 엄마의 품에 안겨 엄마의 심장 박동을 들으며, 눈을 맞추고 체온을 나누며 양식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실험은 인류에게 아주 명확한 진리를 선포합니다. 어머니가 아기에게 주는 양식은 단순한 영양분이 아니라 '어머니의 생명' 그 자체입니다. 아기가 엄마의 젖을 갈구하는 진짜 이유는 단순히 배가 고파서가 아닙니다. 그 젖을 통해 엄마의 따뜻한 품을 느끼고, '엄마와 완벽하게 하나가 되는 관계'를 확인하며 그 사랑 안에 '머물고 싶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입으로 들어오는 칼로리가 아니라, 나를 품어주는 거대한 사랑과의 '연결(머무름)'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성체성사의 효과를 느끼지 못하는지,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느 가정에 중학생 아들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사랑해서 매일 저녁 정성껏 따뜻한 밥상을 차립니다. 어머니의 유일한 바람은 아들이 밥을 먹으며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재잘거리며 이야기하고, 엄마와 눈을 맞추며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의 머릿속에는 온통 엄마가 내일 사주기로 약속한 '최신형 스마트폰' 생각뿐입니다. 아들은 식탁에 앉자마자 스마트폰 모델을 검색하며 밥을 마시듯 욱여넣습니다. 엄마가 "밥 맛있니?" 하고 물어도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 마음은 온통 대리점에 가 있습니다. 밥투정까지 부립니다.
이 아들에게 엄마가 차려준 정성스러운 밥상이 무슨 생명의 의미가 있겠습니까? 밥은 그저 스마트폰을 얻어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통과 의례요, 엄마의 식탁은 지루한 대기실에 불과합니다. 사랑이 빠져버린 양식은 의미를 상실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교회의 민낯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미사에 나와 성체를 모시면서도, 정작 예수님이라는 분 자체를 사랑하고 그분과 머무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온통 주님이 주실 수 있는 '스마트폰', 즉 내 사업의 성공, 내 자녀의 명문대 합격, 아프지 않고 오래 사는 건강, 벼락부자가 되는 로또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세상에서 얻어낼 세속적인 축복이 더 우선순위가 되었을 때, 성체성사는 자연스럽게 귀찮은 액세서리로 전락하고 맙니다. 빵을 주시는 하느님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내 탐욕의 배를 채워줄 기적만을 구걸하니 우리 영혼이 시설에 수용된 고아들처럼 영적 아사(餓死) 상태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주님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들에만 미친 듯이 매달리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 '나는 누구인가?'라는 영혼의 본질적인 정체성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 인간은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욕구는 자신의 정체성에서 출발합니다.
거리를 떠도는 고아를 생각해 보십시오. 고아는 늘 불안합니다. 오늘 밤에 잘 곳이 있을지, 내일 먹을 빵이 있을지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고아의 본능은 항상 주변의 것을 '긁어모으고 소유하는 것'을 향합니다. 내가 많이 가져야만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상속자, 곧 '하느님의 친자녀'라는 정체성을 완벽하게 깨달은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내 아버지가 우주의 주인이신데, 내가 내일 먹을 빵 걱정을 하겠습니까? 하느님이 내 아버지임을 진짜로 믿는다면, 그는 더 이상 세상의 얄팍한 돈이나 성공, 타인의 평가에 목매달지 않습니다.
우리가 엉뚱한 스마트폰(세상의 욕망)에만 집착하며 성체성사를 무시하는 이유는, 내가 '하느님의 자녀'요 '또 다른 그리스도'라는 이 압도적인 정체성을 아직 믿지 못하고, 여전히 내 힘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세상의 고아'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인가'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구하는 모든 은총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키시며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만나는 그들이 하느님의 특별한 돌봄을 받는 '선택된 자녀'임을 증명하는 거룩한 하늘의 양식이었습니다. 엄마의 젖과 같은 것이었지요. 그런데 민수기 11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끔찍한 불평을 쏟아냅니다.
"아, 고기 좀 먹어 보았으면!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생선이며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지금 우리 눈에는 이 만나밖에 없으니 기운이 다 빠져버렸구나." (민수 11,4-6 참조).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만나)을 먹으면서도, 그들의 영혼은 여전히 '이집트의 노예'라는 비참한 정체성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거부하니, 하느님이 주신 거룩한 양식이 입에 맞을 리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유인의 양식인 만나를 버리고, 노예 시절에 채찍을 맞으며 주워 먹던 파와 마늘(세상의 자극적인 욕망)을 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결국 그 영적 이식증에 걸린 자들은 약속의 땅에 단 한 명도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의 모래 무덤 속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출처: 『주석 성경』 민수기 11장)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의 쓰레기 같은 욕망을 끊어내고,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완벽한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그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해답이 바로 '올바른 성체성사'입니다. 올바른 성체성사를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나는 누구인가?’를 해결하기 위해 다가가야 합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머물고 싶은 마음’입니다. 성체가 좋다면, 성체조배는 더 좋습니다. 하느님 자녀 됨의 마음을 더 오래, 깊이 간직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 복음 강해』에서 이렇게 일갈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빵을 먹는 자는, 빵을 먹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먹는 것입니다. 빵을 주신 분을 영혼의 안방에 모시지 않고 빵의 단맛만 빨아먹고 도망치는 자는, 결코 생명의 식탁에 영원히 앉을 수 없습니다." (출처: 성 아우구스티누스, 『요한 복음 강해』).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보통 ‘손님은 왕이다’라면서 고객 중심의 운영을 합니다. 그런데 이 매장의 점원들은 손님에게 도도하고 쌀쌀맞게 대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오히려 고객이 점원에게 잘 보이기 위해 구하기 힘든 유명 가수 콘서트 티켓을 주고, 여기에 비행기표까지 얹어준다고 합니다. 말이 안 되죠? 실제로 있습니다. 에르메스 벌킨 백 판매장에서는 그렇다고 합니다.
이 가방의 가격은 수천만 원에 달하고, 돈이 있다고 해서 곧바로 살 수 있는 가방도 아닙니다. 손에 넣으려면 보통 1년 이상 기다려야 하고, 그전에 에르메스의 다른 제품 여러 개를 사야 하고, 점원에게도 잘 보여야 합니다. 이곳 점원의 불친절을 오히려 “역시 고급 매장은 달라.”라고 말합니다.
명품의 특별한 점은 무엇일까요? 제작 비용은 그렇게 많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보다 제품의 기능,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품위와 자존심이 아닐까요? 이런 명품보다 더 특별한 품위와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가장 커다란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맞이합니다. 성체성사의 제정과 그 신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 대축일에 교회는 요한복음의 ‘생명의 빵’을 선포합니다. 이 부분을 통해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특별한지를 그래서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함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요한 6,51)라고 선포하시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요한 6,52)라면서 거센 반발을 보입니다. 율법에서는 동물의 피조차 마시는 것을 엄격히 금지합니다. 하물며 사람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예수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단순히 비유이고 상징이라고 해명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더 강하게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라고 말씀하시지요. 반드시 우리가 주님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보통 음식을 먹으면, 그 음식은 소화되어 나의 일부가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양식인 성체는 반대라는 것입니다. 성체가 우리 안으로 들어와 나의 일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 안으로 흡수되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성체가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귀하고 특별합니다. 이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성체를 모심으로 특별해졌습니다. 그 특별함을 담아 고귀함과 품위를 드러내는 명품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나는 이 세상에 잘 살려고 왔지, 오래 살려고 온 게 아니야(최윤필).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성체 성혈의 신비는 하느님과 하나 되어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하느님 사랑입니다.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자기증여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우리가 참여하게 됩니다.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는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체성사는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입니다. 우리와 하나 되시기 위해서 살과 피로 오십니다. 성체성사는 가톨릭 신앙의 중심입니다. 우리를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생명의 거룩한 가치입니다.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생명을 세상 안에서 살아내는 것입니다. 매 순간 사랑으로 깨어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사랑으로 살아내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삶이 곧 성체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삶이고, 그 사랑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느님과 우리가 하나의 생명으로 만나는 사랑의 가장 좋은 감사의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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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