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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6.06.09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피어나네 2026. 6. 9.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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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저에게 드러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요. 돌이켜 보면 누군가를 위해 한 일인데도 마음 한편에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곤 해요.

 

그래서 가끔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있는지, 제대로 살고 있는지 확인받고 싶을 때도 있고요.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하기도 하고요. 사랑보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세상을 살리는 소금의 삶을 배우게 하시는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2026년 6월 9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성경 말씀 정리

 

2026년 6월 9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6월 9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1열왕 17,7-16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 무렵 엘리야가 숨어 지내던

7 시내의 물이 말라 버렸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8 주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내렸다.

9 “일어나 시돈에 있는 사렙타로 가서 그곳에 머물러라. 내가 그곳에 있는 한 과부에게 명령하여 너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해 놓았다.”

10 그래서 엘리야는 일어나 사렙타로 갔다. 그가 성읍에 들어서는데 마침 한 과부가 땔감을 줍고 있었다. 엘리야가 그 여자를 부르고는, “마실 물 한 그릇 좀 떠다 주시오.” 하고 청하였다.

11 그 여자가 물을 뜨러 가는데 엘리야가 다시 불러서 말하였다. “빵도 한 조각 들고 오면 좋겠소.”

12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구운 빵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단지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두어 개 주워다가 음식을 만들어, 제 아들과 함께 그것이나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

13 엘리야가 과부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당신 말대로 음식을 만드시오. 그러나 먼저 나를 위해 작은 빵 과자 하나를 만들어 내오고, 그런 다음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드시오.

14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이 주님이 땅에 비를 다시 내리는 날까지,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15 그러자 그 여인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 과연 그 여자와 엘리야와 그 여자의 집안은 오랫동안 먹을 것이 있었다.

16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 보기

마태 5,13-16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15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16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2026년 6월 9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

✚ 강론 시작 08:02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빛은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행복 선언으로 인간의 부족함을 드러내신 뒤, 곧바로 신앙인의 정체성을 한 번에 규정하십니다. 신앙인은 가난해도, 부족해도 이미 “세상의 소금”(마태 5,13)이고 “세상의 빛”(5,14)입니다.

이 말씀은 격려이면서 동시에 두려운 선언입니다. 소금과 빛은 스스로를 위하여 존재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다른 이를 향합니다. 소금은 녹아 사라지며 맛을 내고, 빛은 어둠을 밝혀 다른 이들이 볼 수 있게 합니다.

소금은 고대 세계에서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었습니다. 정화하고, 보존하며, 제물과 함께 바쳐졌고,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소금이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것이고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일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바로 이 ‘부자연스러움’을 통하여 경고합니다. 제자들이 행복 선언에서 드러난 삶의 방식, 곧 가난함, 애통함, 온유함, 의로움에 대한 갈망을 잃어버릴 때, 그들은 소금이지만 소금이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이 쓸모없음은 도덕적 실패라기보다, 자기 본성과 정체성을 배반한 결과입니다.

빛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등불을 켜서 함지 속에 두는 행위는 제맛을 잃은 소금처럼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는 것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5,16)를 찬양하게 하려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마태오 복음서 6장이 말하는 위선적인 드러냄(보이기 위한 자선, 기도, 단식)과는 결이 다릅니다. 등경 위의 빛은 요란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그러나 끝내 숨겨지지 않아 모든 사람을 비춥니다.

우리는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소금과 빛이 되었으니 무엇이 ‘되고자 하는 마음’보다, ‘무엇을 위한 마음’을 지녀야 할 사람입니다. 세상의 소금이자 빛인, 자연스러운 오늘의 ‘나로서’ 살아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세상의 빛이란 것이 영광스러운가? 부담스러운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이 내게 영광스러운가? 부담스러운가? 생각하게 되면서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2-30대 때는 마땅히 그런 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후에도 ‘염광교회’니 ‘염광고등학교’니 개신교 신자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그들도 그렇게 하는데 우리는 더더욱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고 갈수록 나 같은 죄인이 어찌 감히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겠다고 할 수 있는가? 오히려 어둠이 되지 않고 악 표양이 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어찌 빛과 소금이 될 수 있겠는가? 생각합니다.

이것이 저의 솔직한 마음이고 태도인데 그러나 깊숙이 들여다보면 이것은 진정한 겸손이 아니라 얼치기 겸손이거나 거짓 겸손입니다. 그 부담스러운 걸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겸손이니 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보고 세상의 빛이라고 하실 때는 우리가 죄인이 아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당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주님 말씀하셨는데 죄인인 우리가 감히 주님처럼 세상의 빛이라고 할 수 없지요.

그러므로 이것은 아담처럼 감히 주님과 같아지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이자 당신 신성에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교만 때문이 아니라 순종하는 마음으로 빛과 소금의 사명에 참여해야 하고 무엇보다 감사하는 맘으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엇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의 선을 나누는 선행을 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는 것일 뿐이며 나의 선을 나누거나 나의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실천이 그리 어렵지도 않고 실천도 가능합니다. 요즘 저는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준비하기 위해 최정숙 선생님의 전기도 읽고 답사도 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분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재속 프란치스칸으로서 자기를 위해서 착하게 살고 옳게 살고 사랑으로 일생을 사신 분인데 그렇게 사시니 그것이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었던 것이었고, 또 독립지사가 되고 의사도 되고 교육자도 되고 교육감도 되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분이 나를 위해 하느님 자녀와 프란치스칸으로 산다고 생각지 않고 사람들을 위해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면 위선자가 되거나 너무 부담스럽고 힘이 들어 결국 포기해 버리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진정 나를 위한 것인지 생각하게 되고 묻게 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길 포기하고 편하게 사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인지, 어렵고 힘들어도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사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인지. 저는 당연히 답을 알고 있고 여러분도 아십니다.

그런데 알기에 오히려 묻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안다면 그렇게 살아야 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묻지도 생각지도 않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인 그리스도인의 신원과 사명을 밝히십니다. 곧 우리의 신원과 사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이 말씀은 쌍날칼이 되어, 우리의 가슴을 찌릅니다.

곧 내가 하는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할까? 혹 욕하지는 않을까?

또 내 행동이 진정 하느님을 향하여 있는가? 아니면, 내 자신을 향하여 있는가?

또 내 행실은 사람들 앞을 비추고 있는 빛인가? 아니면, 뒤에서 궁시렁대며 불평하는 어둠인가?

그런데 대체, 왜 우리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하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인 까닭이요,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당신의 자녀가 되도록 하신 그 사랑 때문이요, 이미 우리가 그 사랑을 먹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무엇을 행하느냐?’보다 ‘어디를 향하여, 그리고 어떻게 행하느냐?’에 대한 문제입니다. 곧 무엇을 하든지 자신을 ‘소금처럼 녹아들고’ ‘불처럼 태우되’ 그것을 ‘세상이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기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신원을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마태 5,13-14)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이는 우리의 신원이 ‘세상을 향하여’ 있는 존재임과 동시에 우리의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장소가 ‘세상’이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비추는 빛이요, ‘세상 안에서’ 녹는 소금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세상 안에서 자신을 ‘녹여’ ‘세상’의 부패와 불의를 막고 하늘의 맛을 내는 ‘소금’이요, 자신을 ‘태워’ ‘세상’을 비추어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문헌인 [디오그네투스에게]에서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영혼”이라고 부릅니다. ‘세상 안에 살되 세상과는 다른 삶’, 세상에 살되 세속 정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위해서만 살거나 세상과 결별하고서 피안(彼岸)의 세계에만 몰두하고 사는 이들이 아니라 세상에 살되 세상에 물들지 않고 세상을 비추는 이들이요, 단지 어둠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막아내고, 빛을 비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이끌어 가는 이들임을 말해줍니다. 곧 우리의 사명이 ‘세상’의 구원을 위한 ‘사랑의 사명’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지만, 우리 자신이 세상을 비출 수 있는 “빛”인 것은 아닙니다. 단지 “빛의 자녀”(요한 12,36;에페 5,8)로서 빛이신 분으로부터 빛을 받아, 그 사명을 수행할 뿐입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회헌장>(Lumen Gentium)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인류의 빛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비추는 ‘빛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여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오복음 5장 16절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주님! 제게서 착한 행실의 빛이 타오르고, 세상이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소서

제가 타오를 수 있음은 제 안에 당신의 심지를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불을 붙이시어 제 심지를 태우소서.

영의 바람을 일으키시어 불이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제 몸뚱아리를 녹이고서야 빛이 되어 밝힐 수 있기에, 부서지고 사라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자신이 이미 빛과 소금인 줄 모른다면?

전쟁이 끝난 1945년 독일, 폐허 속에서 한 남자가 벽돌을 쌓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직 건축가였습니다. 폭격으로 무너진 마을을 보며 그는 재건을 시작했습니다. 보수도 없이,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습니다. 처음엔 혼자였지만, 한 달이 지나자 이웃 열 명이 함께했습니다. 반년이 지나자 마을 전체가 일어났습니다. 그 마을의 이름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 남자의 행동은 역사가들이 '라인강의 기적'이 시작된 정신의 뿌리라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것도 없었기에, 모두가 서로에게 빛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빛은 자신을 태워 어둠을 밝히고, 소금은 자신을 녹여 음식에 생명을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명령이 아닌 선언으로 말씀하십니다. "빛이 되어라"가 아니라 "너희는 빛이다"라고 하십니다. 세례로 이미 그 본성을 받은 우리에게, 이제 그것을 살아내라고 하십니다. 내가 빛이고 소금인 줄 모르면 내가 빛나야 하고 맛을 내야 하는 줄도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호주 근처 태평양 한가운데, 서울 용산구만 한 작은 섬나라 나우루 공화국이 있습니다. 1970년대, 섬 전체를 뒤덮은 인광석 덕분에 나우루는 갑자기 세계 최고 수준의 부자 나라가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 국민소득이 만 달러일 때, 나우루는 3만 달러를 넘었습니다.

병원비·교육비 무료, 세금 없음, 신혼부부에게 집 무상 제공, 매년 생활비 지급. 아무도 일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국민들은 기름이 떨어지면 차를 버리고 새 차를 샀고, 마트 앞에 차를 세우고 전화를 걸어 종업원이 짐을 실어주길 기다렸습니다. 공무원도, 노동자도 전부 외국인이었습니다. 나우루 사람들은 그저 누리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 인광석이 바닥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항구를 만들어 일자리를 만들었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농사짓는 법을 아는 사람도, 고기 잡는 법을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땅은 채굴로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결국 나우루는 호주의 원조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게라사에서 치유하신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군대 마귀 들린 사람이었습니다. 그 마귀들은 예수님께 청합니다. "저희를 돼지 떼에 들여보내 주십시오." 예수님은 허락하셨고, 돼지 떼는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마귀를 받아들인 돼지는 스스로 빛이 될 수도, 소금이 될 수도 없습니다. 무언가 그 안에 들어가 그 존재를 만듭니다. 우리 안엔 무엇이 들어오셨을까요? 빛과 소금 자체이신 분이 들어왔습니다. 그것만 믿으면 그대로 살 수 있습니다. 나우루의 이야기는 단순한 경제 실패가 아닙니다. 빛과 소금이기를 포기한 인간이 어디로 가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빛과 소금인 줄 아는 사람의 모습은 어떨까요?

2022년 5월 10일, 미국 플로리다주 롤린스 칼리지 졸업식장이었습니다. 한 졸업생이 단상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5분 30초 동안 침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단상에서 내려오자, 졸업생 전원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봉커. 자폐로 인해 말을 할 수 없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15개월까지 재잘재잘 말을 하던 아이였지만, 불과 일주일 사이에 모든 언어 능력을 잃었습니다.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었고,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혼자 분노를 삼켰습니다.

여섯 살 때 타이핑을 배우기 시작했고, 다섯 달 만에 처음으로 표현한 단어는 'AGONY', 괴롭다는 말이었습니다. 말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지 묻자 그녀는 적었습니다.

"NOT TALKING."

그 침묵 속에서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4.0 만점에 4.0, 완벽한 학점으로 졸업했고, 타이핑으로 음성변환을 해 연설했습니다. 그 연설의 끝은 이렇습니다.

"전 세계 언어 장애 자폐인이 3,100만 명이나 됩니다. 그들은 침묵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그 고통에서 벗어나 스스로 길을 개척하도록 돕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목소리를 잘 활용하시길 바랍니다. 빛이 됩시다. '빛이 있으라!'"

하느님은 이미 목소리를 주셨습니다. 내가 빛임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처음엔 자신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꼈던 사람이, 자기 삶 전체를 내어 3,100만 명에게 소금이 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 누군가 믿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믿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에겐 그런 용기를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금 여러분 곁에 누가 있습니까? 디팩 초프라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먹고 사는 것은 내가 책임진다. 너희는 이웃에게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지만 생각하며 살아라."

자녀를 이미 이웃에게 좋은 일을 할 자격이 있는 존재로 믿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믿게 되면 이러한 사람이 탄생합니다. 일론 머스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돈 버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인류의 미래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만 생각합니다."

이것이 세상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2천 년 전에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빛과 소금이기를 거부하면 바로 버려져 쓸모없는 존재가 됩니다. 이러한 삶은 나우루가 증명했습니다. 반면 생명을 주는 삶은 엘리자베스가 증명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쪽을 살겠습니까? 빛이 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빛이 있습니다. 세상에 그 빛을 드러내기만 하면 됩니다.

세상에 맛을 더하는 소금의 역할이 무엇일까만 찾으면 됩니다. 빛과 소금이 되려 하지 말고 ‘내가 빛인데 어떻게 빛나야 하나?’, ‘내가 소금인데, 어디서 녹아야 하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미 되었으니 되려고 하지 말고 어떻게 증명할까만 생각하십시오. 그래야 세상은 물론 하느님께도 쓸모있는 존재로 남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중세 시대의 십자군 전쟁을 들어봤을 것입니다. 이 전쟁의 목적은 예루살렘 성지 탈환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표면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다른 목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영주에게 얽매여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고향을 떠나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던 것이고, 둘째는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면 지금까지 진 빚을 탕감해 준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슬람교도의 땅과 재물을 약탈해서 그곳에 정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두터운 신앙심 때문에 전쟁에 참전한 것 같지만, 위의 세 가지 불순한 목적으로 전쟁에 뛰어든 사람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있으니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겠습니까? 총 4차에 걸쳐 전쟁했지만, 제1차 십자군 전쟁만 성공이라고 부를 만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신다.”(Deus vult)라는 슬로건을 걸었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내용의 전쟁에 절대 함께하실 리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 중입니다. 전쟁할 수 없는 이유를 강조하고 있지만, 결국 자국의 이익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폭력보다 평화를 원하십니다. 힘으로 누르는 폭력보다 사랑으로 함께하는 모범적인 우리가 되길 원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마태 5,13)

순수한 소금 자체는 짠맛을 잃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 팔레스티나 사해 주변에서 구하던 소금은 불순물이 많이 섞인 암염입니다. 습지에 노출되어 소금기가 다 빠져나가면 짠맛 없는 하얀 가루만 남게 되어 길가에 버려지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동화되어 복음의 가치(짠맛)를 상실하면, 존재 이유를 잃고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마태 5,14)

신앙인은 세상 위로 높이 드러나 길을 잃은 이들에게 진리를 보여주는 거룩한 모범과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욕심과 이기심이 판을 치는 세상, 그래서 폭력까지도 합리화하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의 자리는 분명해집니다. 신앙인의 삶은 세상의 뜻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소금과 빛처럼 세상에 유익을 주고, 최종적으로 그 모든 선함의 방향이 하느님을 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태양 아래 있으면 피부를 그을리지만, 성체 앞에 있으면 성인이 됩니다(성 카를로 아쿠티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녹여 다른 것의 맛을 살리고, 생명을 보존합니다. 자기봉헌을 통해 하느님의 생명을 세상에 전달합니다.

소금은 말없이 모든 음식에 스며듭니다. 너무 많으면 짜고, 너무 적으면 싱겁습니다. 한 줌의 소금은 적은 양이지만 음식 전체의 맛을 바꿉니다.

내어줄수록 더 풍요로워지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감사와 은혜라는 소금의 맛을 잊어버리면 삶의 방향을 잃게 됩니다.

작은 감사가 큰 은총을 다시 살립니다. 참된 신앙은 자신을 높이는 삶이 아니라, 자신을 녹여 세상을 살리는 소금이 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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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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