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누군가를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쉽게 판단해 버리고 싶을 때가 있어요. 이해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판단은 순간이니까요.
사람들이 외면하는 자리에도, 손가락질받는 자리에도 먼저 다가가 계시며 끝까지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2026년 6월 10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6월 10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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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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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1열왕 18,20-39

이 백성이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시며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셨음을 알게 해 주십시오.
그 무렵 아합 임금은
20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 사람을 보내어, 바알의 예언자들을 카르멜산에 모이게 하였다.
21 엘리야가 온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나 백성은 엘리야에게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22 엘리야가 백성에게 다시 말하였다. “주님의 예언자라고는 나 혼자 남았습니다. 그러나 바알의 예언자는 사백오십 명이나 됩니다.
23 이제 우리에게 황소 두 마리를 끌어다 주십시오. 그들에게 황소 한 마리를 골라 토막을 내어 장작 위에 올려놓고 불은 붙이지 말게 하십시오. 나도 다른 황소를 잡아 장작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겠습니다.
24 여러분은 여러분 신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나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겠습니다. 그때에 불로 대답하는 신이 있으면, 그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러자 백성이 모두 “그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5 엘리야가 바알의 예언자들에게 제안하였다. “당신들이 수가 많으니 황소 한 마리를 골라 먼저 준비하시오. 당신들 신의 이름을 부르시오. 그러나 불은 붙이지 마시오.”
26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황소를 데려다가 준비해 놓고는, 아침부터 한낮이 될 때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다. “바알이시여, 저희에게 응답해 주십시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대답도 없었다. 그들은 절뚝거리며 자기들이 만든 제단을 돌았다.
27 한낮이 되자 엘리야가 그들을 놀리며 말하였다. “큰 소리로 불러 보시오. 바알은 신이지 않소. 다른 볼일을 보고 있는지, 자리를 비우거나 여행을 떠났는지, 아니면 잠이 들어 깨워야 할지 모르지 않소?”
28 그러자 그들은 더 큰 소리로 부르며, 자기들의 관습에 따라 피가 흐를 때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들 몸을 찔러 댔다.
29 한낮이 지나 곡식 제물을 바칠 때가 되기까지 그들은 예언 황홀경에 빠졌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대답도 응답도 없었다.
30 그러자 엘리야가 온 백성에게 “이리 다가오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백성이 모두 다가오자 그는 무너진 주님의 제단을 고쳐 쌓았다.
31 엘리야는, 일찍이 “너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내린 야곱의 자손들 지파 수대로 돌을 열두 개 가져왔다.
32 엘리야는 그 돌들을 가지고 주님의 이름으로 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제단 둘레에는 곡식 두 스아가 들어갈 만한 도랑을 팠다.
33 그는 장작을 쌓은 다음, 황소를 토막 내어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34 그러고 나서 “물을 네 항아리에 가득 채워다가 번제물과 장작 위에 쏟으시오.” 하고 일렀다. 그런 다음에 그는 “두 번째도 그렇게 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두 번째도 그렇게 하자, 엘리야는 다시 “세 번째도 그렇게 하시오.” 하고 일렀다. 그들이 세 번째도 그렇게 하였을 때,
35 물이 제단 둘레로 넘쳐흐르고 도랑에도 가득 찼다.
36 곡식 제물을 바칠 때가 되자 엘리야 예언자가 앞으로 나서서 말하였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 당신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고 제가 당신의 종이며, 당신의 말씀에 따라 제가 이 모든 일을 하였음을 오늘 저들이 알게 해 주십시오.
37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주님, 이 백성이 당신이야말로 하느님이시며, 바로 당신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셨음을 알게 해 주십시오.”
38 그러자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장작과 돌과 먼지를 삼켜 버리고 도랑에 있던 물도 핥아 버렸다.
39 온 백성이 이것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부르짖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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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5,17-19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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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10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
✚ 강론 시작 11:03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하느님은 사람을 밀어내지 않으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자세히 보면 기존 율법을 보존하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목적을 이루려는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율법과 예언서’는 마태오 복음서에서 구약 전체를 가리키는 상징이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무너뜨리시는 분이 아니라 그 본디 의미를 끝까지 찾아, 목적지에 이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율법을 ‘완성하신다’는 말씀은 ‘참된 의미를 밝힌다’는 뜻으로, 율법을 철저히 따르거나 빈틈없이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 전체가 뜻하고 의도하는 바를 그리스도 안에서 밝히 드러내는 일이 됩니다. 율법의 규범과 실천은 늘 그대로 이어 오지만, 더 이상 형식적으로 되풀이하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고, 율법은 예수님을 통하여 새롭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 5,18 참조). 그러나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5,18)라는 단서가 붙습니다.
이는 희생 제사와 관련된 율법들처럼 율법의 어떤 규정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완전히 이루어져 더 이상 필요하지 않지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처럼 어떤 규정들은 그분과 함께, 그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지속됨을 뜻합니다. 신앙인은 율법의 본뜻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유연성도 지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어기든 지키든, 누구나 하늘 나라를 향하여 있음을 분명히 하십니다(5,19 참조). 율법은 단죄의 도구가 아니라 하늘 나라로 초대하고자 하는 하느님 자비의 도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지키고자 하는 삶의 질서이며, 그 질서는 예수님 안에서 더 깊은 사랑의 논리로 다시 정리됩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켜야 하지만, 율법을 어기는 이에게도 율법의 이름으로 사랑과 연민과 자비를 전하였으면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미우면 미운 대로
오늘 저는 독서와 복음을 연결하여 묵상하고 싶었습니다. 열왕기에서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가 대비되고, 복음에서 큰사람과 작은 자가 대비되니 말입니다. 그런데 생각의 시작을 작은 자에서부터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작은 자일까? 바로 드는 생각은 자기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풀어 얘기하면 자기 안에 자기밖에 없는, 수용할 그릇이 작아 자기밖에 없는 자입니다. 남이 들어갈 자리가 없고, 하느님께서 들어갈 자리는 더더욱 없는 자입니다. 당장 떠오르는 것이 <복음의 기쁨> 2항의 한 구절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가장 큰 위험은 고립의 정신에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내적 생활이 자기 자신의 이해와 관심에만 갇혀 있을 때, 더 이상 다른 이들을 위한 자리가 없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문헌이 얘기하는 ‘내적 생활’에 대해서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누가 기도를 많이 하며 관상 기도라는 것도 하고, 요가나 마음 수련 또는 영신 수련을 열심히 하고, 좋은 강의를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듣지만 그것이 다 마음 안에서 불안을 몰아내고 평안을 얻으려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런 것들을 아무리 해도 그에게는 이웃과 하느님을 위한 자리가 없고 고립 안에서 그리고 이기주의의 외로움 중에서 계속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바알의 예언자들도 이런 자들에 속합니다. 그들이 기도를 처절하게 하고 황홀경에 들지만 그들에게 아무런 하느님의 응답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황홀경은 어떤 황홀경입니까? 마약으로 인한 황홀경과 무엇이 다릅니까? 부두교도들의 황홀경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기도한다고 하는 우리에게도 심각한 경종입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하느님의 현존을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기도였는데 우리 기도는 하느님을 불러오는 데 실패한 바알 예언자들의 기도와 같지 않을까요? 나의 기도 안에 아예 하느님이 안 계시기에 마음의 평화는 있지만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닌가요?
나의 기도 안에 하느님을 모셔 들이기는 하지만 나의 독방에 주님을 모셔 들여 밀애를 나누면서, 이웃은 밀애 방해꾼으로나 여기고 밀쳐냄으로써 이웃을 위한 사랑의 자리가 없기는 여전히 마찬가지인 것은 아닌가요? 우리는 늘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밀쳐내고 하느님만 모셔 들이려고 하지만 사람을 밀쳐내면 내 안에서 하느님도 밀어내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밤새도록 ‘Deus Meus Omnia!’ 하며 기도했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모두시여! 라는 뜻도 되지만 나의 하느님, 모든 것이시여! 라는 뜻도 됩니다. 하느님은 나의 모든 것이시기도 하지만 하느님은 모든 것이신 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나의 모든 것이신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니 한 사람도 빼놓지 않아야 모든 것이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으며, 한 사람이라도 제외하면 나는 모든 것이신 하느님을 온전히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누구를 사랑하지 못해도 제외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누구를 미워할지라도 미우면 미운 대로 품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사랑이 율법을 완성한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그리스도인이 다른 이들과 구별 짓게 하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맨 먼저 하신 일은 성전에서 마귀 쫓아내고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시는 일이었는데, 그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의 시선에는 안식일 법을 어기는 일에 해당했습니다.
그리고 구마를 하시면서 정결례 법을 어기시고, 또 단식법을 어기셨고, 뿐만 아니라 율법을 모세의 이름이 아닌 당신 자신의 이름으로 가르치셨고, 죄를 용서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야말로 겉으로는 ‘율법의 파괴자’처럼 비쳐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율법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그것은 당시에 문자적이고 형식적으로 지켜지던 율법을 본래의 정신으로 회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갈라 3,34)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줄 따름이었습니다.”(로마 3,20)
결국, 당신 자신이 구약이 지향하고 있는 종말론적인 목표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8)
이는 율법의 단절이 아니라 ‘영속성’을 말해줍니다. 곧 율법이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보충되고 완전하게 되는 것을 말해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5,19)
율법을 ‘먼저’ ‘지켜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지키는’ 것으로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곧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말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스스로 지킴으로써 타인들에게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 안에서 성취됩니다. 그러니 “스스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스로 지킨다는 것’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곧 계명을 주신 분을 사랑하는 일이 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결국,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그는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오복음 5장 19절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
주님! 제 안에 새겨진 사랑의 법이 제 행동의 뿌리가 되게 하소서.
행동으로 지키고 가르치며, 가르친 바를 행동으로 파괴하지 않게 하소서.
말이 아닌 행실로 사랑하고작은 일에도 사랑을 담아 행하며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완벽에 덧칠하는 사람들
찬미 예수님! 하루도 또 잘 지내셨죠? 오늘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복음 묵상 함께 나누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생활의 본질을 뒤흔드는 아주 엄중한 선언을 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요즘 현대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조차 자기 입맛에 맞게 편집하고 조작하는 아주 위험한 풍조에 빠져 있습니다. 귀에 쓴 약은 뱉고 달콤한 사탕만 삼키려는 것이죠. 많은 이들이 고해소 안팎에서 이렇게 속삭입니다.
"신부님, 시대가 어느 때인데 지옥 이야기를 하십니까?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설마 사람을 그런 곳에 던지시겠어요? 지옥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팍팍한 세상에 십일조가 웬 말입니까? 마음이 중요하지 꼭 물질을 바쳐야 하나요? 화가 날 때는 참지 말고 터뜨려야 정신 건강에 좋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즘 유행하는 가짜 복음의 실체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하느님의 법을 교묘하게 지워버리는 것 말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내가 판관이 되어 하느님의 법을 재판하고 있는 꼴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조작 성향이 초래하는 영적 파국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문학적 알레고리가 있습니다. 바로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입니다. 독재를 권력을 잡은 돼지들은 자신들의 편의와 탐욕을 채우기 위해, 동물들이 처음에 피로 써 내렸던 위대한 칠계명을 하나씩 교묘하게 수정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라는 법을 어기고 자기들이 침대에서 자고 싶어지자, 밤중에 슬그머니 글자 몇 개를 덧붙여 고칩니다. "어떤 동물도 시트를 깔고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라고 말이죠. 술을 마시고 싶어지자 "어떤 동물도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라는 조항 뒤에 "지나치게"라는 말을 슬쩍 끼워 넣습니다. 마침내 그들이 도달한 최종 수정안은 무엇이었습니까?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욱 평등하다."라는 기괴한 법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글자 한두 개를 고친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타협과 조작이 결국 농장 전체를 처참한 노예 지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우리 영혼도 똑같습니다. "이 정도 화는 내도 되겠지.", "이 정도 십일조는 안 바쳐도 하느님이 봐주시겠지."라며 한 자 한 획을 고치기 시작하면, 우리 영혼의 법전은 순식간에 사탄이 지배하는 동물농장으로 변질되고 맙니다.
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완벽한 설계도에 인간의 속된 손을 댈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역사 속의 한 사건을 통해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바로 스페인 보르하 성당에서 일어난 예수님 벽화 복원 사건입니다.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고귀한 얼굴을 담은 19세기의 명작 『에체 호모』가 세월이 흘러 조금씩 떨어져 나가자, 히메네스라는 이름의 할머니가 좋은 의도로 붓을 들었습니다. 자기가 직접 예쁘게 고쳐놓겠다는 생각이었죠. 결과가 어땠습니까?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원숭이를 닮은 우스꽝스러운 괴물이 탄생하고 말았습니다.
할머니의 마음은 선의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이 위대한 작품에 손을 대어 더 낫게 고칠 수 있다'는 무서운 교만이 명작을 처참하게 파괴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율법을 내 입맛대로 수정하려 드는 행위가 정확히 이와 같습니다. 자비라는 이름으로 지옥을 지우고, 형편이라는 이름으로 십일조를 빼버리는 순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얼굴을 원숭이 모양으로 짓밟는 영적 히메네스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율법의 한 자 한 획도 결코 없어져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율법은 단순한 규칙의 모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본성이자 사랑의 설계도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에서 가장 작은 글자인 '요드'는 아주 작은 점 하나처럼 보입니다. 획 하나가 삐져나오고 안 나오고에 따라 단어의 뜻이 '하느님'에서 '우상'으로 완전히 바뀌어버립니다.
하느님의 법은 우리를 하느님의 완벽한 모상으로 빚어내기 위한 신성한 틀입니다. 이 틀을 내 육신의 편안함에 맞추기 위해 찌그러뜨리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을 닮은 빛과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을 조작하는 것은 하느님보다 내가 더 지혜롭다고 믿는 영적 교만이며, 스스로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 혹은 아예 들어가지도 못하는 자로 낙인찍는 자해 행위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법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작고 지키기 고통스러울지라도, 한 자 한 획도 타협하지 않고 철저하게 순명하여 영원한 승리를 거둔 위대한 인간이 있습니다. 바로 영국의 대법관이었던 성 토머스 모어입니다. 국왕 헨리 8세가 가톨릭교회의 결혼 인연을 전면 부인하고 스스로 교회의 수장이 되려 했을 때, 영국의 모든 권력자와 주교들까지 국왕의 뜻에 맞추어 교회의 법을 적당히 수정하고 타협했습니다. "왕의 결혼 하나 눈감아 준다고 나라가 망하겠느냐, 왕이 교회의 머리가 된다는 서약서에 서명 한 줄만 하면 만사가 편하다."라며 모두가 한 획을 지우고 타협의 붓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토머스 모어는 단 한 줄의 서약도, 단 한 자의 타협도 거부했습니다. 하느님의 법은 인간이 손댈 수 없는 절대적인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단두대 위에서 목이 잘리는 참수를 당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융통성 없고 미련하기 짝이 없는 죽음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권력 앞에서 하느님의 율법을 단 한 획도 조작하지 않았기에, 인류 역사상 가장 빛나는 양심의 성인으로 영원히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신앙은 내 삶의 형편에 맞추어 하느님의 말씀을 편집하는 뷔페가 아닙니다. 율법의 완벽한 설계도에 내 핑계와 타협이라는 인간의 가짜 붓칠을 더하지 마십시오. 영혼이 침몰할 뿐입니다.
비록 우리가 약해서 자주 넘어지고 다 지키지 못해 피눈물을 흘릴지언정, 말씀의 한 자 한 획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주님, 제가 부족하지만 이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십시오." 하고 처절하게 매달려야 합니다. 그 순명과 경외심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완전한 자녀로 변화시켜 주시며, 마침내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으로 영광스럽게 안아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언젠가 아주 난처한 일을 겪었던 적이 있습니다. 잠시 쪼그려 앉기 위해 무릎을 굽혀 앉았다가 일어나는 순간 바지의 엉덩이 부분이 터진 것입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바지가 터졌다고 이제 쓸모가 없다며 벗어 던지고 팬티만 입고 다녔을까요? 아닙니다. 터진 부분을 가리고 근처 편의점에서 옷핀을 사다가 터진 부분을 메웠습니다. 이제 집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그러면 이 바지를 버렸을까요? 아닙니다. 실과 바늘로 터진 부분을 꿰맸습니다.
우리는 자기 것을 그냥 버리지 않습니다. 특히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고쳐 쓰려고 합니다. 저에게는 고가의 만년필이 있습니다. 이 만년필이 어느 날 잘 나오지를 않습니다. 고장 났다고 버렸을까요? 아닙니다. 어떻게든 고치려고 온 힘을 기울였고, 현재 잘 고쳐서 잘 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당신이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어떻게든 고쳐서 잘 쓰기 위함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죄를 많이 짓는다고 버리시지 않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면서 구원의 길에서 배제하지도 않습니다. 어떻게든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이 사랑을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완성한다’의 그리스어는 원래 빈 그릇에 물을 가득 채우듯 ‘가득 채우다’, ‘목표에 도달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라는 그릇을 깨뜨리러(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 그릇에 본래 하느님께서 의도하셨던 진정한 의미를 가득 채우려 오셨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문자적이고 외면적인 규정 준수에 얽매여 있는 율법을, 율법의 근본정신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통해 율법을 원래의 목적대로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단순히 말만 앞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언행일치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하늘 나라에서 참으로 큰사람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까요? 큰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이 노력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용감한 사람에게 행운과 불운은 왼손과 오른손과 같다. 그는 두 가지를 모두 사용한다(성 시에나의 카타리나).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미완성의 자리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참된 삶을 일깨워주시는 예수님께서는 결코 형식과 구분에 갇히지 않으십니다. 율법은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가치라도 실제 우리의 삶에서 구현되지 못한다면 불완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사랑하심으로 하느님의 뜻을 완성하셨습니다. 사랑으로 율법의 참뜻을 완성하셨습니다. 계명에 머물면 울법이지만, 사랑이 되면 완성입니다. 더 많은 규칙이 아니라 더 깊은 사랑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느님 안에서 완성됩니다. 율법의 형식에 갇힌 우리들을 다시 자유롭게 하십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랑이 마음의 중심이 되면 계명은 외부의 명령이 아니라, 삶은 자연스러운 표현이 됩니다.
미완성의 자리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실패와 상처 속에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이끄시고 새로운 사람으로 빚어가십니다. 참된 완성은 날마다 사랑으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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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