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저를 바라보고 계시는 사랑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느끼던 순간에도 혼자가 아니었다는 생각에 괜히 울컥해져요. 서두르지 않고 바라보는 눈에는 사랑이 담긴다는 것을 되새기는 오늘입니다.

2026년 6월 14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연중 제11주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6월 14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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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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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 묵상 모아보기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탈출 19,2-6ㄱ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그 무렵 이스라엘 자손들은
2 시나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진을 쳤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그곳 산 앞에 진을 쳤다.
3 모세가 하느님께 올라가자, 주님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셨다. “너는 야곱 집안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알려 주어라.
4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들에게 무엇을 하고 어떻게 너희를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 데려왔는지 보았다.
5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
6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로마 5,6-11

아드님의 죽음으로 화해하게 되었다면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형제 여러분,
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7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9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1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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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9,36-10,8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을 보내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36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10,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3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4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5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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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14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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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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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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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사람을 살리는 건 결국 마음이다.
오늘 복음은 “군중을 보시고”(마태 9,36)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시선이 언제나 사람들에게 머물러 있음을 떠올리게 합니다(5,1 참조). 이들은 고통과 질병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밀려난 이들이며(4,24–25 참조), 시대와 사회의 상처가 만들어 낸 불의이고 불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9,36). 여기에 쓰인 그리스 말은 ‘애가 탄다, 애간장이 녹는다’ 정도의 의미로, 다른 이의 처지를 자기 안에 끌고 와 그 고통과 불행에 함께하는 깊은 자비를 뜻합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이 자비는 대개 인간의 육체적 어려움과 고통을 향합니다. 이는 곧 제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복음을 전할지 미리 밝힙니다. 교회의 첫 선포는 논리적 설명이나 사변적 논쟁이 아닌, 구체적 치유와 돌봄이었습니다.
군중의 처지를 묘사할 때, ‘시달리다’로 옮긴 그리스 말은 ‘가죽을 벗기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목자 없는 양”(민수 27,17; 참조: 에제 34장)의 심상과 연결되며, 마태오 복음사가가 유다 지도자들에게 던지는 조용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목자의 자리, 곧 돌봄과 보호가 있어야 할 자리에 제도와 율법, 그에 따른 심판만 남아 있지는 않은지 오늘 복음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구실을 충실히 하지 못하는 목자들을 대신하여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마태 9,37).
여기서 추수는 심판의 상징이라기보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불러 모으시는 종말론적 부르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 가는 이들이 예수님께 몰려오는 모습은 그 자체로 종말이 다가왔음을 보여 줍니다. 내 삶의 한 조각으로 이웃의 조각난 삶을 이어 붙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종말이고 구원이겠지요.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고
요즘은 전보다 분명히 자기 연민이 넘칩니다. 너나없이 자기 연민에 빠져 삽니다. 자기만 힘들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제일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왜 그럴까? 원인을 생각해 보면 옛날에는 먹고 사는 것이 너무도 치열하고 힘들어 그럴 겨를이 없었던 것에 비해 지금은 그 정도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쨌거나 너나없이 자기 연민에 빠져 살면 그 결과 다른 사람에 대한 연민을 가질 수 없습니다. 곧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볼 수 없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왜 자기 연민에 대해 오늘 얘기를 꺼냈느냐 하면 군중에 대한 연민을 주님께서 오늘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연민만 드러내시지 않고 이렇게 된 원인과 그것을 풀 해법을 제시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주십사고 청하여라.”
군중이 이렇게 기가 꺾여 살게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고, 더 정확히 얘기하면 진정한 목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해야 할 것은 양들을 억압하고 잡아먹고 팔아먹는 거짓 목자를 대신할 진정한 목자를 하느님께서 보내주십사 청하라고 하며 열두 제자를 뽑으십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 나의 제자들아, 연민이 없이 등골이나 빼먹으려는 저 거짓 목자들과 달리 너희는 나의 제자답게 양들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그들을 찾아가거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문제는 주님께서 우리도 당신 제자로 삼겠다 하실 때 예라고 할 것인가? 그것이고, 오늘 탈출기의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가 주님의 소유가 되고,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라고 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영광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또 흔쾌히 그리될 것인가? 그것입니다. 제 생각에 신자라면 영광스럽게 생각하긴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광스럽긴 해도 부담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고, 나는 그런 능력도 없고 자격도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만큼 살고 난 저로서는 제자 되는 것이 영광도 부담도 아니고, 능력의 문제나 자격의 문제도 아니고 사명이고 사랑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고 하신 오늘 주님 말씀이 바로 내게 하신 말씀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받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면 가난한 이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되고 기가 꺾인 이들을 위해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 거저 받았고, 넘치도록 많이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면 입을 싹 닦고 있을 수 없을 것이고, 오늘 연중 주일의 감사송처럼 감사의 노래를 이렇게 소리 높여 부를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옵니다. 저희는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 선택된 겨레, 임금의 사제단, 거룩한 민족,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고 저희를 어둠에서 놀라운 빛으로 부르신 주님의 권능을 온 세상에 전하며 외치나이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연중 제11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과 ‘하느님 백성의 사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계약체결을 약속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계약 체결을 통하여,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탈출 19,6)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의 독점적인 수취자가 아니라, ‘사제들의 나라’,의 사명, 곧 하느님과 중재를 이루는 보편적 구원의 도구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로마 5,11)라고 고백합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과 ‘그 사랑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롭게 되었음’을 증언합니다.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에 나타났고, 모든 이가 구원을 받았음을 확인해줍니다.
<복음>은 세 장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치유의 장면’, ‘열두 사도를 뽑으시는 장면’, ‘사도들을 파견하시는 장면’입니다.
<첫째 장면>로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를 고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입니다.”(마태 9,36)
이는 인도하고 보호해 줄 사람이 없는 “목자 없는 양”의 가련한 상태일 뿐만 아니라 괴롭힘을 당하고 짓눌리고 상처받고 “시달리며 기가 꺾여” 방향을 잃고 쓰러져 방치된 현실적이고, 영적인 상태를 말해줍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더욱 안타까운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마태 9,37)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8)고 말씀하시면서도, 못내 “가엾은 마음”을 어쩔 수 없으신 까닭에 손수 그 “일꾼들”을 뽑으십니다.
그러니 <둘째 장면>에서 열두 사도를 뽑으신 것은 ‘가엾은 군중을 위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곧 그들에게로 보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복음의 수취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의 사명을 지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예수님의 그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지녀야 할 일입니다.
사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이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곁에 있고, 우리 중에 있습니다. 힘이 없어 시달리고, 가진 게 없어서 시달리고, 무능해서 시달리고, 온갖 고통과 질병과 가난과 근심에 시달리는 이들에 우리는 둘러싸여 있습니다. 또한 일자리를 못 얻어 거리에서 기가 꺾여 방황하는 이들, 돈이 없어 자녀들에게도 기가 꺾여 위축된 이들, 고국을 떠나와 이방인이 되어 기가 꺾여 있는 이들에 둘러싸여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곁에 있는 형제의 아픔을 보지 못하고, 또 보지 않으려 하는 걸까?
그것은 ‘가엾이 여기고 소중히 여기는 선한 목자의 마음’을 지니지 못한 까닭은 아닐까요? 그러니 우리도 ‘그분의 마음’을 품어야 할 일입니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6)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립 2,5)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예수님의 마음’이 간직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신께서는 “열 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습니다.”(마태 10,1).
그리고 <셋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그러니 우리는 ‘이미 그 마음을 거저 받은 것입니다.’ 가지고 있지 않는 것, 없는 것을 줄 수는 없습니다. 곧 이미 받았기에 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받지 않는 가짜인 자기가 만든 마음이 아니라, 거저 받은 진짜인 예수 마음을 주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마음이 당신 마음이 되게 하소서. 가짜의 제 마음이 아니라 진짜인 당신의 마음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시달리며 기가 꺾인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을 제게서 드러내소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오복음 10장 8절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주님! 당신은 거저 주시는데도 제가 받지 못함은 제 그릇이 가득 차 있어 주어도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입니다.
나누지 못해 비워지지 않은 까닭입니다.
더러는 비워져도 엎어져 있어 담을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아니, 잘못 기울어져 있어 다른 데서 오는 것을 담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제는 제 자신을 비우고,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목숨까지 내어주신 당신 사랑을 따라 거저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착한 목자 되기: 행복한 성체 되기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마태 9,36)
찬미 예수님! 연중 제11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깊은 연민을 느끼십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기가 꺾여 있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원어 '에르리메노이'는 단순히 의기소침한 상태가 아니라, 맹수에게 갈기갈기 찢겨 길가에 내동댕이쳐진 채 스스로 일어설 힘조차 없는 처참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상처받고 길을 잃어 쓰러진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채찍질도, 훌륭한 설교도 아닙니다. 그들의 찢어진 상처를 보듬고 기를 살려 일으켜 세워 줄 '착한 목자'입니다.
구약의 엘리야 예언자를 보십시오. 그는 이세벨을 피해 광야로 도망쳐 싸리나무 아래 쓰러진 채 죽기를 청하였습니다.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1열왕 19,4 참조).
위대한 예언자도 기가 꺾이면 이렇게 됩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그를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천사를 보내시어 구운 빵과 물 한 병을 머리맡에 놓아 주시며 두 번이나 다정하게 깨우셨습니다.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 (1열왕 19,7 참조).
엘리야는 그 음식으로 힘을 얻어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에 이르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듯 기가 꺾인 이를 먼저 먹이시고, 완전히 회복시킨 다음에야 사명을 주어 보내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선언하십니다. "너희는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탈출 19,6). 그렇다면 세상을 살리는 사제, 즉 목자란 무엇이겠습니까?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성 그레고리오 나지안조 주교님의 말씀을 빌려 이렇게 가르칩니다.
"먼저 자신이 정화된 다음에 남을 정화시키고, 먼저 자신이 거룩해진 다음에 남을 거룩하게 하며, 먼저 자신이 하느님이 된 다음에 남을 하느님이 되게 하여야 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589항 참조).
그렇습니다. 순서가 핵심입니다. 먼저 자신이, 그다음에 남입니다. 자신이 먼저 하느님의 사랑으로 행복해진 사람만이 타인에게 진정한 연민을 느끼고 그들을 행복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꺼진 초가 다른 초에 불을 붙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내 심지에 불이 활활 타고 있어야, 나는 내 불을 잃지 않으면서도 수백 개의 초에 빛을 옮겨 붙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감히 이 험한 세상에서 타인의 기를 살려주는 목자가 될 수 있을까요? 타인의 기를 살려주고 상처를 끌어안으려면, 아주 명확한 전제 조건이 하나 필요합니다. 바로 '내가 먼저 뼛속 깊이 사랑받고 있음을 깨달아, 내 기가 우주 끝까지 살아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데 어떻게 남을 일으켜 세울 수 있겠습니까?
이 원리를 가장 뼈저리게 증명해 주는 분이 계십니다. 얼굴의 절반을 덮은 붉은 모반과 상악동 암이라는 가혹한 시련을 이겨내고, 수많은 사람에게 희망의 목자가 된 방송인 김희아 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보육원에서 자라며 얼굴의 모반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수없는 조롱과 괴물 취급을 받았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는 얼굴에 암까지 찾아와 뼈의 절반을 들어내는 대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세상을 원망하며 우울증이라는 깊은 어둠의 동굴에 자신을 가두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녀도 하느님께 제발 이 붉은 점을 없애달라고 피눈물을 흘리며 매달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기도 중에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흉측한 얼굴을 바라보시며, 자신보다 더 아프게, 더 많은 눈물을 흘리며 울고 계신 주님의 모습을 가슴 깊이 만난 것입니다. 그 순간 그녀의 영혼에 벼락같은 깨달음이 찾아왔습니다.
'아, 주님께서 나를 이토록 끔찍이 사랑하시는구나! 이 점은 흉터가 아니라, 주님이 나를 특별히 기억하시는 사랑의 표식이구나!'
자신이 우주의 창조주께 그토록 사무치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녀의 바닥났던 자존감은 하늘 꼭대기로 솟구쳐 올랐습니다. 그녀는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얼굴의 모반을 없애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어떻게 하면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는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릴까'만을 생각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내가 먼저 사랑받아 행복해지자, 그녀는 비로소 다른 이를 살리는 완벽한 '목자'가 되었습니다. 딸아이가 길을 걷다 넘어져 무릎에서 피가 날 때, 그녀는 호들갑을 떨며 야단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아이를 안아주며 밝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이고, 우리 딸! 이만하기 다행이네. 이것밖에 안 다쳐서 참 감사하네. 그치?"
처음에는 어리둥절해하던 아이도, 엄마의 그 굳건한 평화와 감사의 태도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아이가 먼저 넘어져 피가 나도 툭툭 털고 일어나며 말하게 되었습니다.
"엄마, 이것밖에 안 다쳤어요. 참 감사하지요?"
야단치고 걱정만 하는 세상의 보통 부모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입니다. 아이의 기가 꺾일 뻔한 두려움의 순간에, "우리는 이런 작은 일로 행복을 뺏길 시시한 존재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감사를 통해 증명함으로써 아이의 영혼을 강인하게 세워준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성 그레고리오 주교님의 가르침처럼, 이것은 사제뿐만 아니라 세상을 향해 파견되는 우리 모든 신앙인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내가 먼저 십자가의 피와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적 존재로 격상되고 그 압도적인 행복을 누려야만, 세상에서 기가 꺾인 이웃들에게 진정한 연민을 느끼고 그 행복을 전염시키는 '사제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슬픈 얼굴을 한 사람은 결코 기쁨의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내 안의 기를 살리고, 그 행복의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뇌과학과 심리학이 입증하고 모든 성인이 실천했던 가장 강력한 영적 무기가 있습니다. 바로 '감사'입니다.
인간의 뇌에는 망상활성계(RAS)라는 정보 필터링 시스템이 있습니다. 우리가 결핍과 불만에 집중하면, 뇌는 온 세상에서 불행한 증거들만 수집하여 우리를 지옥으로 밀어 넣습니다. 반대로 "이만해서 감사합니다"라고 감사에 초점을 맞추면, 뇌는 즉시 내 삶에 숨겨진 하느님의 은총과 기적들을 찾아내어 우리를 천국으로 안내합니다.
말씀과 성체로 이미 감사의 조건은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 씨앗을 키우기만 합니다. 이 감사의 근육을 키우는 가장 훌륭한 훈련이 바로 '잠들기 전 감사 일기 쓰기'입니다. 인간의 뇌는 잠들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입력된 감정과 정보를 수면 기간 내내 장기 기억으로 저장하고 영혼의 무의식에 새겨넣습니다. 하루 종일 남을 흉보고 세상의 뉴스를 보며 분노하다가 잠이 들면, 우리 영혼은 밤새도록 독극물에 절여집니다. 하지만 잠자리에 누워, 오늘 하루 내 삶에 주어졌던 감사의 조건 5가지를 손가락을 꼽으며 찾아보십시오.
'오늘 아침 무사히 눈을 뜨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원한 물 한 잔을 마실 수 있어 감사합니다. 미운 사람을 향해 한 번 참을 수 있는 인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거창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기를 쓰기 어렵다면 누워서 손가락으로 꼽기만 해도 됩니다. 이렇게 감사의 문을 닫고 잠이 들면, 밤새 성령께서 우리 영혼을 하느님의 평화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우리 영혼은 맹수에게 찢긴 양이 아니라, 세상을 포효하며 호령할 하느님의 거룩한 자녀로 기운차게 깨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할 때, 이 '가엾다(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단어는 창자가 끊어질 듯한 극심한 고통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냥 불쌍히 여기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창자를 끊어내듯 십자가에서 살과 피를 내어주심으로써 우리를 먹이셨습니다. 이 성체의 사랑을 매일 먹는 우리가, 어떻게 세상의 작은 상처에 기가 꺾여 주저앉을 수 있겠습니까? 감사는 이 성체의 사랑을 내 삶의 현실로 번역해 내는 가장 위대한 신앙의 언어입니다.
마지막으로 권고합니다. 넘어져서 피가 나면 "주님, 이것밖에 안 다쳐서 참 감사합니다"라고 웃어넘길 수 있도록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성체로 우리는 그럴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성체조배로 그 믿음을 회복하고 키워가십시오. 밤마다 감사의 일기를 쓰며 영혼의 주파수를 천국에 맞추십시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행복해지십시오. 우리 자신이 행복한 성체가 되었음을 믿고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기운을 불어넣어 주고, 찢겨진 세상을 사랑으로 치유하는 거룩하고 행복한 목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행복한 성체로 살아가십시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가요?
사람들이 톨스토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톨스토이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첫째는 지금 여기, 둘째는 옆에 있는 사람, 셋째는 그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바로 내 옆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 옆의 사람을 그렇게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때로는 미워하면서 내 옆에서 밀어냅니다. 다른 것이 더 좋다면서 밀어내기도 합니다. 또 나와 같지 않다고 밀어냅니다. 그래서 가장 귀한 것들이 내 안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가족, 친구, 직장 동료, 성당 교우, 그밖에 만나는 모든 사람이 귀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언제 귀할까요? 지금 그 귀함을 깨달아야 하는데, 먼 훗날에 그들이 내 옆에 있지 않을 때 비로소 깨닫습니다. 저의 경우도 부모님께서 주님 곁으로 가신 뒤에야 얼마나 귀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알게 되어 행복했을까요? 아닙니다. 그 귀함을 보지 못했음에 후회하게 되었고, 한동안 힘들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 옆에 있는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이 가장 귀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었고, 예수님께서 직접 그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라고 시작합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를 뜻하는 희랍어 단어는 단순히 불쌍히 여긴다는 것이 아니라, 창자가 뒤틀리는 듯한 연민을 느끼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은 지금 상처받고 억눌린 인간을 향한 사랑에서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타락한 종교, 정치 지도자들을 통해 어떤 보호도 받지 못했기에, 오히려 율법의 무거운 짐만 지웠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착한 목자로 다가가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사랑으로 다가가십니다. 그들이 가장 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열두 명의 사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완벽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눈으로는 부족함이 더 많이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로마에 세금을 가져다 바치는 세리 마태오도 있었고, 로마에 무력으로 항거하던 민족주의자 열혈 당원 시몬도 함께 있었음을 봅니다. 이렇게 지향점이 다른 사람을 제자로 뽑으시고, 심지어 당신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까지 명단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완벽한 의인들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나약함과 실패의 가능성까지 품고 있는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거저 받았을 뿐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거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 특히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가장 귀한 것임을 잊어버리고, 대신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온 힘을 기울이곤 합니다. 내가 지금 기쁘고 행복한 것이 가장 귀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탈출 19,5)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야 주님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미니코회 신학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하느님은 언제나 준비되어 계시지만, 우리는 준비되어 있지 않다. 하느님은 우리 가까이에 계시지만, 우리는 그분에게서 멀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준비를 그리고 하느님께 가까이에 있는지를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친구에게 “너는 하느님을 믿어?”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럼. 나는 매주 성당에 다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그러면 하느님께 기도 많이 하겠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더 말하기 힘들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기도는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할 모든 준비를 마치셨고, 또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이제 우리의 움직임이 필요할 때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그 뜻을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과 함께할 주님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학교에서는 배운 다음에 시험을 치지만, 인생에서는 시험을 치르면서 배우게 된다(톰 보뎃).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과 사랑을 나누어 주시고, 하느님 나라를 함께 이루기 위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병자들을 고치신 것은 단순히 육체적 질병을 낫게 하시기 위함만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얽매고 있는 어둠과 집착에서 해방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먼저 예수님과 함께 머뭅니다. 예수님 가까이 머문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 안에서 자신의 참모습을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한 사람은 타인의 상처도 깊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타인의 상처를 보듬는 과정에서 우리 안의 상처 또한 치유됩니다. 성찰 없는 힘은 폭력이 되기 쉽지만, 사랑으로 정화된 힘은 치유와 회복의 도구가 됩니다.
제자들을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의 사랑을 뜨겁게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자신들의 상처와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치유받은 사람이 치유자가 되고, 사랑받은 사람이 사랑의 전달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바꾸기에 앞서 먼저 당신의 마음을 닮아 가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처럼 부르심과 치유는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부르심은 곧 치유의 시작이며, 정화와 성장의 출발점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치유받은 사람이 다시 세상을 치유하도록 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넘치는 초대입니다. 부르심은 하느님의 몫이고, 응답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 초대에 필요한 것은 완벽한 능력이 아니라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과 신뢰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신뢰는 모든 부르심의 시작이며, 모든 치유의 출발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순간, 우리는 치유받은 사람이 되고, 동시에 세상을 치유하는 은총의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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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