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오늘을 살고 있지만 언제나 어제와 내일을 오가며 붙들려 있곤 해요. 오늘,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면 좋겠어요. 내일 몫까지 오늘 짊어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씀해 주셔서 마음이 놓입니다.

2026년 6월 20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6월 20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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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2역대 24,17-25

너희는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즈카르야를 살해하였다.
17 여호야다가 죽은 다음, 유다의 대신들이 와서 임금에게 경배하자, 그때부터 임금은 그들의 말을 듣게 되었다.
18 그들은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겼다. 이 죄 때문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가 내렸다.
19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셨다. 이 예언자들이 그들을 거슬러 증언하였지만,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20 그때에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가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주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그렇게 해서는 너희가 잘될 리 없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21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임금의 명령에 따라 주님의 집 뜰에서 그에게 돌을 던져 죽였다.
22 요아스 임금은 이렇게 즈카르야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자기에게 바친 충성을 기억하지 않고, 그의 아들을 죽였다. 즈카르야는 죽으면서,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해가 끝나 갈 무렵, 아람 군대가 요아스를 치러 올라왔다. 그들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들어와 백성 가운데에서 관리들을 모두 죽이고, 모든 전리품을 다마스쿠스 임금에게 보냈다.
24 아람 군대는 얼마 안 되는 수로 쳐들어왔지만, 유다 백성이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을 저버렸으므로, 주님께서는 그토록 많은 군사를 아람 군대의 손에 넘기셨다. 이렇게 그들은 요아스에게 내려진 판결을 집행하였다.
25 아람 군대는 요아스에게 심한 상처를 입히고 물러갔다. 그러자 요아스가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을 죽인 일 때문에, 그의 신하들이 모반을 일으켜 그를 침상에서 살해하였다. 요아스는 이렇게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를 다윗 성에 묻기는 하였지만, 임금들의 무덤에는 묻지 않았다.
복음 말씀 전체 보기
마태 6,24-34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26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28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30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31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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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방송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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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20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
✚ 제1독서 02:37
✚ 복음 08:05
✚ 강론 10:53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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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지금 이 순간 오늘을 살아갈 은총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 걱정하지 마라”(마태 6,25).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어조로 인간의 가장 깊은 불안을 들추어내십니다. “목숨”은 먹고 살아야 하는 구체적 생존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낙관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불안으로 삶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삶에 대한 염려는 삶을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축소시켜 버립니다.
새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삶의 자세를 보여 줍니다. 새는 씨를 뿌리지도 거두지도 않지만, 하늘의 아버지께서 먹이시지요. 여기서 초점은 노동을 부정하며 요행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먹이고 입히는 주체가 누구인지 묻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6,27)라고 물으십니다. 불안과 걱정은 우리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고 우리 삶을 소진할 뿐입니다.
이방인들과는 다르게 제자들은 참된 것을 찾아야 합니다. 바로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6,33)을 찾아야 합니다. 그분의 의로움은 마태오 복음서의 황금률이 정확히 알려 줍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7,12).
신앙은 주어지는 오늘을 건네받는 태도입니다. 오늘, 우리 삶은 나의 노력이나 걱정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의 근원이시고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것입니다. 누군가가 먹고 입는 문제로 힘들어한다면, 그것은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의 의로움을 우리 서로가 챙기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주어지는 오늘을 걱정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아야겠습니다. 적어도 먹고 입는 것 정도는 걱정하지 않게 서로 챙기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걱정하지 말아야 할 이유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오늘 주님께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걱정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가장 간단한 이유는 해봤자 소용없고 쓸데없기 때문이고, 고통을 줄 뿐이고 행복을 밀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잖습니까? 걱정이 한가득하다고 하지요. 걱정이 한가득하면 다른 것이 들어올 자리가 없고, 행복도 밀려나면서 불행감 비슷한 것이 대신 자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야 할 첫째 이유는 쓸데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쓸데없는 것에 밀리어 행복의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시 인간적인 이유일 뿐이고 주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신앙적인 이유는 하느님을 믿지 못하거나 믿지 않는 표시이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믿지 않기에 걱정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더 깊이 생각하면 하느님을 믿는다고 걱정할 일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오늘 주님께서 뭘 먹고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사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헐벗고 굶주리는 일은 비일비재하고,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의식주와 관련하여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믿어도 헐벗고 굶주림이 있을 수 있다면 믿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주시는 분이지만 안 주실 수도 있으며 주시고 안 주시는 것이 하느님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왜 안 주시는지 모르지만 안 주실지라도 주실 때와 마찬가지로 선의로 안 주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선의와 사랑을 믿는 것이고, 이렇게 믿을 때 또 그 뜻에 순종할 때 걱정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선의는 믿어도 순종하지 않겠다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거나 믿음의 자세가 너무도 잘못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엄마가 밥을 안 준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사랑의 이유로 곧 나를 위해 안 주는 것인데 굳이 먹겠다는 것은, 그 뜻을 거스르는 것이요 그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프란치스코도 그렇지만 클라라는 이런 믿음의 모범입니다. 클라라에게 하느님은 자비의 하느님이었고 그렇게 믿었기에 극도의 가난과 고통 중에도 아무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그는 유언에서 이렇게 얘기한 바가 있습니다.
“프란치스코께서는 우리가 육신적으로 연약하고 미약하지만 그 어떤 궁핍도, 가난도, 수고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더없는 큰 기쁨으로 여기는 것을 보시고,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주신 것에 감사하는 가난, 주지 않으셔도 걱정하지 않고 기뻐하는 가난이 부럽고, 그런 가난을 살 수 있는 자비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부러운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신앙인의 길일까? 어떻게 사는 사람이 신앙인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신앙인은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신 한 분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곧 자기 자신을 섬기거나, 물질과 재능이나 기능 등의 피조물을 섬기거나, 자기의 판단이나 주장이나 자신의 뜻을 섬기지 않고, ‘주님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사실,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은 우상숭배요,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일이요, 모독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사실, ‘섬김’은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 하는 신원과 정체성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주님께 속하여 주님을 믿고 섬기는가? 아니면, 다른 피조물이나 자기 자신에 속하여, 자기 뜻과 생각을 주인처럼 섬기고 섬기는가? 하는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진정으로 섬기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주님께 속해 있고,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음을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둘째>로 신앙인은 ‘걱정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않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이는 당연히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신 하느님의 돌보심을 믿고 의탁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신앙인은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마태 6,33) 사람입니다. 곧 자신의 성취나 자신의 편리나 이기, 자신의 의로움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그 모든 것에 앞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 찾기’를 삶의 본질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곧 그 모든 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선사되어 와 있는 것을 찾는 일입니다.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이 이미 우리 가운에 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인의 삶을 두 주인을 삼기지 않으며, 하느님께 의탁하고 자신을 걱정하지 않으며, 하느님 나라와 의로움을 먼저 찾는 삶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누구를 섬기도 있는가? 참된 주님이신 하느님인가? 자기 자신이나 자기 생각이나 물질인가? 혹 그렇게 하느님을 업신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또 나는 지금 무엇을 근심하고 걱정하고 바라고 있는가? 누구에게 의탁하고 있는가? 자기 자신인가?
진정, 나는 모든 일에 앞서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 분의 의로움을 찾고 있는가? 대체 누구의 기쁨이 되고자 하는가? 자신의 기쁨인가? 하느님의 기쁨인가?
주님! 제 생각과 편리, 이기심과 자애심에 떨어져 한갓 피조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떨어지지 않게 하소서. 자신을 채우느라 당신을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나라와 당신의 의로움이 저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당신만이 저의 주님이시오니,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오복음 6장 33절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주님! 제 생각과 편리, 이기심과 자애심에 떨어져 한갓 피조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떨어지지 않게 하소서.
재물을 섬기느라, 저 자신을 섬기느라, 주인이신 당신을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제가 아니라 당신이 재물의 주인이요, 저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있다가도 없어질 것이 아니라 진정 있는 것, 이미 선물로 준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찾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근심 중에 성체 영하지 말기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앙의 급소를 찌르는 말씀을 단호히 선포하신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마태 6,24.34 참조) 나는 오늘 이 말씀을 한 가지 초점으로 좁혀 묵상하려 한다. 곧, 근심하며 성체를 모시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일을 근심하는 그 마음이, 아버지께서 생명처럼 내어주시는 유산의 맛을 우리 입에서 앗아 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명백한 말씀을 교묘히 비틀며 산다.
"신부님, 돈이 있어야 하느님 일도 하고 이웃도 돕지요. 넉넉히 채워주시는 것도 축복 아닙니까?"
그럴듯하게 포장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하느님과 돈이라는 두 주인을 한 손에 움켜쥐려는 탐욕이다. 거룩한 성체를 모시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주식 창을 열어 한숨짓고, 집값이 내려갈까 밤잠을 설친다. 온전히 의탁하라는 말씀은 현실 모르는 옛이야기로 치부하고, 제 입맛대로 "적당한 타협"이라는 덧칠을 해 버린다.
하느님의 법을 제 탐욕에 맞추어 뜯어고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가 이를 날카롭게 보여 준다. 농부 바흠은 "땅만 넉넉하면 악마도 두렵지 않다"는 탐욕에 사로잡힌다. 마침내 그는 한 부족에게서, 해 뜰 때 출발하여 해 지기 전에 제자리로 돌아온 만큼의 땅을 모두 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규칙은 단 하나,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출발점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흠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욕심을 부리다 그 한계를 넘기고 만다. 지는 해를 보고 미친 듯이 달려 가까스로 출발점에 닿았으나,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져 죽는다. 탐욕의 대가로 그가 얻은 땅은, 시신을 묻을 두 평 무덤이 전부였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하신 그 선을 넘어 제 식대로 달리면, 영혼이 이렇게 피를 토하며 죽는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내일 걱정을 하지 말라 하셨는가. 탈출기의 만나 사건이 그 알레고리를 환히 밝혀 준다. 하느님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날마다 만나를 내려 주시며 한 가지 율법을 주셨다. "아무도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마라."(탈출 16,19 참조) 그러나 내일 굶을까 두려워진 사람들은 이를 어기고 만나를 몰래 숨겨 두었다. 그 결과를 성경은 이렇게 전한다. 거기에 구더기가 끓고 악취가 풍겼다(탈출 16,20 참조). 바로 여기에 오늘 묵상의 심장이 있다. 만나는 날마다 내려 주시는 아버지의 양식이요, 훗날 내어 주실 성체의 예표다. 내일을 걱정하여 만나를 움켜쥐는 행위는, 나를 먹이시는 아버지를 믿지 못하는 가장 지독한 불신이다. 그리고 그 불신은 양식을 썩혀 버린다. 어제의 만나는 더 이상 양식이 아니라 구더기였다.
이것이 곧 우리 이야기다. 근심을 품고 성체를 모시는 것은, 어제의 만나를 숨겨 두는 일과 같다. 성체는 본디 영혼의 양식, 아버지께서 오늘 내게 내려 주시는 하늘 만나다. 그런데 내일의 주식과 집값과 노후를 근심하며 그것을 모시면, 그 거룩한 양식의 맛을 우리는 도무지 느끼지 못한다. 근심이라는 구더기가 성체의 단맛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같은 성체를 모셔도, 어떤 이는 하늘의 생명을 맛보고 어떤 이는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한 채 돌아선다. 양식이 달라진 것이 아니다. 그것을 받는 마음에 근심이 끓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내가 예전에 본 한 영상이 그 마음을 절절히 보여 준다. 고등학교 삼 학년 수험생들에게 물었다.
"죽기 전에 꼭 이루고 싶은 꿈이 무엇이냐?"
아이들은 저마다 즐거운 꿈을 적어 냈다. 이어서 물었다. "네 수명이 딱 일 년 남았다면, 그 일 년 동안 꿈을 이루겠느냐, 아니면 오억 원을 받겠느냐?" 아이들은 하나같이 답했다.
"당연히 제 꿈이 중요하지요."
이번에는 그 아이들의 아버지들을 불러 똑같이 물었다. 아버지들의 꿈도 소박하고 아름다웠다. 가족과 떠나는 배낭여행, 시골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아내와 사는 것. 그런데 "당신의 수명이 일 년 남았다면, 꿈과 오억 원 중 무엇을 택하겠느냐?" 묻자, 아버지들은 한결같이 답했다.
"당연히 오억 원입니다.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 돈을 아내와 자식에게 남겨 주고 싶습니다."
보라, 바로 여기에 오늘 복음의 비밀이 있다. 아이들은 제 꿈을 근심한다. 그래서 아버지가 목숨과 맞바꾸어 남겨 주려는 그 유산을 가벼이 여긴다. 그러나 아버지는 제 꿈을 접고 제 목숨까지 팔아서라도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주려 한다. 자식이 제 꿈만 바라보며 근심할 때, 아버지가 생명처럼 건네려는 그 유산의 값을 자식은 알지 못한다. 우리가 꼭 그러하다. 우리는 내일의 내 꿈, 내 안위, 내 계획을 근심하느라, 아버지께서 당신 외아드님의 목숨과 맞바꾸어 우리 손에 쥐여 주시는 유산 ― 곧 성체 ― 의 값을 알아보지 못한다.
세상의 죄 많은 아버지도 자식을 위해 제 꿈과 목숨을 돈과 바꾼다. 하물며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어떠하신가. 당신께서는 하나뿐인 아드님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그분의 살과 피를 성체로 먹여 주신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유산이다.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로마 8,32 참조)
아들까지 내어 주신 분께서 우리의 내일을 안 챙기시겠는가. 그러니 내일을 근심함은 단지 소심함이 아니라, 이 위대한 부성애를 짓밟는 교만이다. 근심하며 성체를 모심은, 아버지께서 목숨으로 물려주신 유산을 받으면서 "이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하고 외면하는 자식의 불효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참 일꾼들은 굶주림의 위협 앞에서도 이 유산을 끝까지 신뢰하였다. 콜카타의 마더 데레사 수녀의 일화가 그러하다. 어느 날 고아원의 쌀이 바닥나고 재정도 텅 비어, 당장 내일 아이들이 굶게 될 형편이었다. 사람들은 빚이라도 내자며 발을 굴렀지만, 수녀는 타협하지 않았다.
"걱정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먹이실 것입니다."
그러고는 성당에 들어가 도리어 감사의 기도를 바쳤다. 다음 날 아침, 도시의 파업으로 학교에 배달되지 못한 수천 인분의 빵과 우유가 수녀원 앞에 산더미처럼 쌓였다. 근심이라는 마귀의 속삭임에 한 치도 타협하지 않고 아버지의 약속에 우직하게 순명할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온전한 섭리로 응답하신다. 근심을 내려놓은 손이라야, 아버지의 유산을 가득 받아 쥘 수 있다.
신앙은 내 현실에 맞추어 하느님의 말씀을 가위질하는 일이 아니다. 돈과 하느님을 한꺼번에 섬기려는 영적 간음을 이제 그만두어라. 성체를 모시러 나아갈 때, 내일의 주식과 집값과 노후의 모든 불안을 그 자리에 내려놓아라. 근심을 품은 채로는, 아버지께서 생명으로 빚어 주신 그 유산의 단맛을 결코 맛볼 수 없다.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하신 그 말씀에 목숨을 걸어라. 나를 위해 아드님의 목숨까지 내어주신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을 믿고 우직하게 순명할 때, 비로소 우리의 빈손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풍요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가을을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말합니다. 즉,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찌는 계절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가을이 좋은 계절이라는 뜻일까요? 당연히 가장 좋은 계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천고마비(天高馬肥)’의 어원은 당나라 시인 두심언(杜審言)이 지은 시 ‘증조관기(贈趙管記)’에 등장하는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라는 구절에 유래한다고 합니다. 그 뜻은 가을 하늘이 높고 변방의 말이 살이 찐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좋은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좋은 계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힘든 시기를 의미합니다.
당나라와 국경을 마주했던 흉노족은 가을만 되면 말을 타고 쳐들어와 곡식을 약탈하고 노략질을 일삼았습니다. 이 때문에 북방 변방에 사는 당나라 사람들은 가을만 되면 언제 흉노가 침략할지 몰라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결국 ‘가능 하늘이 높고 변방의 말이 살이 찐다’라는 말은 흉노가 쳐들어올 시기가 되었으니 경계하고 대비하라는 말입니다.
그 누가 ‘천고마비’를 근심 어린 눈으로 바라볼까요? 하지만 원래는 가장 걱정되는 계절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실제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향한 노력이 필요하고, 섣부르게 판단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지혜를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특히 세상을 살아가며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 하느님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않고 온갖 걱정을 하며,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됨을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라고 하십니다.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의 종은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섬김에 있어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느님과 재물을 적당히 양립시키는 타협을 합니다.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기에 물질이 주는 가짜 안정감에 노예처럼 얽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걱정하다’라는 말은 ‘마음이 나뉘다, 찢어지다’라는 어원을 가진다고 합니다. 따라서 걱정은 하느님을 향해야 할 신뢰가 세상의 불안으로 인해 여러 갈래로 찢어지고 흩어진 영적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모으는 방법을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라고 하십니다. 당연히 우리 일상의 필요를 무시하고 정당한 노동을 폄하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 대신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려는 노력을 통해 우리의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걱정 없이 기쁘게 사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당신의 모든 희망을 하느님께 두십시오. 그분으로 채워지기 위해 그분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깨달으십시오. 그분 없이는 무엇을 가지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당신을 공허하게 만들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삶은 언제나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라는 이 자리에서 이루
어집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것이고, 내일도 하느님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미래에 대한 지나친 걱정으로 오늘의 삶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초대하십니다.
내일을 염려하기보다 오늘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 내일에 대한 두려움은 신뢰와 희망으로 바뀝니다. 돌아보면, 우리가 지나온 수많은 날들도 우리의 힘만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걱정은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을 소모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 자신을 바르게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오늘을 온전히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을 살아갈 힘과 은총을 주십니다. 내일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는 것은 하느님 사랑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은총의 하루하루를 하느님의 선물로 여기며 감사로 살아가는 오늘 되십시오. 내일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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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