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두려움보다 신뢰에 대해 생각하게 돼요.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이유가 용기가 없어서라고 생각했는데, 용기보다 의탁하는 마음이 더 부족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의 시선은 쉽게 의식하면서도, 이미 저를 이끌고 계신 그분의 손길은 자주 잊곤 하니까요.
두려움보다 그분을 더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하시고, 삶으로 그분의 사랑을 전하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2026년 6월 21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연중 제12주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6월 21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제1독서
예레 20,10-13

주님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예레미야가 말하였다.
10 “군중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기 마고르 미싸빕이 지나간다!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속아 넘어가고 우리가 그보다 우세하여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1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그들은 성공하지 못하여 크게 부끄러운 일을 당하고 그들의 수치는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이다.
12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13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제2독서
로마 5,12-15

은사의 경우는 범죄의 경우와 다릅니다.
형제 여러분,
12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13 사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죄가 있었지만, 율법이 없어서 죄가 죄로 헤아려지지 않았습니다.
14 그러나 아담부터 모세까지는, 아담의 범죄와 같은 방식으로 죄를 짓지 않은 자들까지도 죽음이 지배하였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예형입니다.
15 그렇지만 은사의 경우는 범죄의 경우와 다릅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복음 말씀 전체 보기
마태 10,26-33

육신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들을
26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28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30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31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32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33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지금 바로 보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2026년 6월 21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
✚ 제1독서 08:13
✚ 제2독서 13:09
✚ 복음 15:18
✚ 강론 17:34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말씀 묵상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당신을 기억하고 계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차례나 같은 말씀을 되풀이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26.28.31). 이 말씀은 공허한 위로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이미 피부에 와닿는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 박해와 거절을 실감하는 제자들에게 건넨 말이기 때문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10,26).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라는 말씀은, 비밀을 폭로하라는 것이 아니라 침묵을 뚫고 나오라는 초대입니다. 고통 속에서 배운 말, 상처를 통하여 들은 말은 혼자 듣고서 감내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복음은 상처받은 영혼들이 세상 한가운데로 나아갈 용기를 줍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10,28).
몸은 상처 입고 쓰러질 수 있지만, 하느님 앞에 선 나의 참된 가치에는 감히 인간의 위력이나 억압이 닿지 못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위협보다 끝까지 우리를 지키시는 하느님의 약속을 더 무겁게 여겨야 합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립니다. 이처럼 값싸게 여겨지는 생명의 죽음조차 하느님의 시선 밖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어 두신다는 말씀은 세상에서 가장 사소하게 여겨지는 것들조차 하느님께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선언입니다. 버려지는 것, 잊히는 것, 이름 없이 사라지는 것들까지 모두 기억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를 향하여 거침없이 오셨습니다. 고통은 우리를 침묵하게 하지만, 신뢰는 우리 입을 열어 주고 우리를 행동하게 합니다. 두려움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의 소음에 굴복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를 기억하시는 하느님을 믿고 세상을 향하여 끝내 나아갈 것인지. 그 선택이 우리의 슬픔을 다른 빛으로 바꿉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좋은 두려움과 나쁜 두려움
“너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어제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께서 오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정확히 말하면 두려워해야 할 한 분 외엔 아무도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모든 두려움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나쁜 두려움과 두려워해야 할 좋은 두려움에 대해 오늘은 묵상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무엇일까요? 행복하게 하고 살게 하면 좋은 두려움이고 불행하게 하고 죽게 하면 나쁜 두려움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나쁜 두려움은 불안과 함께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죽게 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휩싸이고 사로잡힌다는 말처럼 두려워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요,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는 말처럼 아무 자유도 없고 어떤 사랑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와 사랑, 이 가장 위대한 것들을 허용치 않고 불가능케 하는 두려움은 어떻게 해서든지 극복해야 하고 초월해야만 할 두려움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의지로, 신앙적으로는 기도로, 둘을 합쳐 의지와 기도로 극복하고 초월해야 합니다.
내가 살려면 그리고 행복하게 살려고 하면 자유와 사랑이 없으면 안 된다는 깨달음에 행복 의지와 생존 의지가 더해져야 하고, 거기에 간절한 기도가 더 더해져야 하겠지요.
이것이 프란치스코가 보여준 방법입니다. 먼저 애착하던 것들을 다 버림으로써 그것들로부터는 자유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싫어하고 그래서 두려워하던 나병환자는 계속 두려워했는데 좋아하는 것을 버리는 것보다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극복하는 것이 인간적으로는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재물을 포기하는 것보다 십자가 지는 것이 더 어렵고 힘들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린 이 지점에서 이 힘든 것을 거들어 줄 분에게 눈을 돌려야 하고, 이 눈을 돌리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관상과 기도가 시작되고 힘을 얻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가 몸소 이 좋은 두려움을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게 해주신 것이지만 그리 피해 다니던 나병환자를 외길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 나병환자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야겠다는 의지를 세우고, 그러나 아직 그럴 용기가 없음에 주님께 용기를 주십사 기도하였지요.
그렇게 프란치스코는 두려움을 극복하였고, 싫어하고 두려워하던 나병환자를 통해서 주님을 만났으며 싫어하고 두려워하던 나병환자가 곧 주님임을 깨닫게 되었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나병환자가 아니라 주님과 주님의 사랑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임을 깨달아야 하고, 주님과 주님의 사랑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좋은 두려움은 이렇게 오히려 주님을 만나게 하는 두려움이고, 나쁜 두려움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우리를 사로잡고 그럼으로써 주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두려움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두려워할 것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
오늘은 연중 12 주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예레미아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라.”(예레 20,11)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을 격려해 주십니다. 곧 그 어떤 박해와 고난을 겪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당신께 대한 믿음과 의탁의 요청입니다.
사실, “두려움”의 원래 이유는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는 그들을 찾으시는 하느님께 말합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2,10)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숨은 이유가 사실, 아담의 말처럼 ‘알몸’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처벌하시는 분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원죄’는 단지 금기사항을 위반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왜곡을 말해줍니다. 곧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빼앗는 하느님, 자유보다 속박하는 하느님, 용서보다 처벌하는 하느님으로 왜곡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움의 반대는 용기가 아니라,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이 있는 호수 위에서 “겁내지 마라.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불신’이 두려움을 불러왔으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심은 곧 당신께 대한 믿음의 촉구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두셨을”(마태 10,30) 만큼 제자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보살피고 돌보시는 하느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두려움을 몰아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이는 하느님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로지 주님만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러한 “주님을 두려워함”은 처벌에 대한 노예적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과 믿음을 지닌 ‘사랑의 두려움’입니다.
이를 <집회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집회 2,15).
“주님을 두려워함이 주님을 사랑함의 시작이며, 주님에 대한 사랑의 시작은 믿음이다.”(집회 25,12)
그러니 오늘 <복음>에 세 번 나오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과 한 번 나오는 “두려워하여라.”는 말씀은 다 같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활동하시거나 우리를 박해나 고통으로부터 빼내주시리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박해와 고통을 함께 견디어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난으로부터 구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구해주시고, 고통으로부터 보호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보호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로부터 구원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속에서 구원하십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말합니다.
“예수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게 아니라 당신 자신이 오십니다. 당신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박해와 고통 속에서 동행하시는 그분을 만날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사랑하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말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오복음 10장 31절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박해를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그 속에서 동행하시는 당신을 만나게 하소서.
진리이신 당신께 희망을 두고, 주님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신 당신의 사랑으로 제 두려움을 몰아내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복음선포로만 두려움을 없앨 수 있습니다.
찬미 예수님! 오늘도 한 날을 잘 지내셨는지요. 연중 제12주일 복음 묵상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같은 말씀을 세 번이나 거듭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가장 끈질긴 적이 무엇인지를 알려 줍니다. 바로 두려움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명령하십니다.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27-28 참조)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을 이긴 다음에 선포하여라"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선포하여라, 그러면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라고 하십니다. 순서가 뒤집혀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두려움이 사라지면 그때 사랑을 고백하고, 두려움이 가시면 그때 복음을 전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다리는 사람에게 그날은 영영 오지 않습니다. 두려움은 혼자 방 안에서 이겨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입을 열어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그 관계 안에서, 특별히 하느님을 선포하는 그 관계 안에서 비로소 부서집니다.
이 두려움이 사람을 어떻게 고립의 감옥에 가두는지, 너무도 현실적인 이야기 하나를 먼저 나누겠습니다. 어느 정신과 의사가 전한 한 청년의 사례입니다. 이 청년은 사람들이 자기를 싫어할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누구에게도 먼저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친구가 보낸 안부 문자에도 "답장했다가 어색해지면 어쩌나, 귀찮아하면 어쩌나" 하며 며칠을 망설이다 끝내 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둘 관계가 끊기자, 청년은 "역시 사람들은 나를 싫어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말했습니다. 그를 외롭게 만든 것은 사람들의 미움이 아니라, 미움받을까 봐 먼저 숨어 버린 그 자신의 두려움이었다고 말입니다. 두려움의 무서운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혼자 있게 만들고, 혼자가 된 우리는 두려움을 이길 유일한 길인 '관계'마저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두려움은 점점 더 커집니다. 두려움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는 고립입니다.
거절이 두려워 진실을 혼자 편집해 버렸다가 평생의 사랑을 잃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한 병사가 지뢰를 밟아 두 다리를 잃었습니다. 고향에는 결혼을 약속한 약혼녀가 있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몰래 그녀의 집 앞을 찾아간 그는, 자기를 그리며 눈물짓는 그녀를 보면서도 이렇게 단정해 버립니다.
"다리 없는 나를 보면 그녀가 떠나겠지."
거절이 두려웠던 그는 전우를 시켜 자신이 전사했다고 거짓 소식을 전합니다. 몇 해 뒤, 그녀가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멀리서나마 축복하려 식장을 찾은 그는 그만 무너지고 맙니다. 그녀와 혼인 서약을 나누는 신랑은, 두 팔과 두 다리가 모두 없는 상이군인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가 두려움을 혼자 끌어안는 대신 그녀에게 다가가 "내 다리가 없어도 나를 사랑해 주겠소?" 하고 한마디만 건넸다면 어땠을까요. 그는 두려움을 관계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지 않고, 혼자 머릿속에서 결론을 내려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잃었습니다.
이제 구약으로 들어가, 같은 두려움이 사람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보겠습니다. 시나이 산에서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산 아래 백성은 불안에 떨며 대사제 아론을 둘러쌌습니다. 아론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율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난 군중의 시선이 두려웠습니다. 거절당하고 버림받을까 두려웠던 그는, 군중의 비위를 맞추려 율법을 뜯어고쳐 금송아지를 빚어내고 맙니다(탈출 32장 참조).
보십시오. 아론을 무너뜨린 것은 군중이 아니라, 군중을 향한 그의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는 두려움 앞에서 하느님을 선포하는 대신, 두려움이 시키는 대로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그날 하루에 삼천 명이 죽었습니다. 사람에게 미움받지 않으려고 진실을 가위질하면, 우리 영혼 한가운데에 파멸의 금송아지가 세워집니다.
그러나 같은 광야, 같은 두려움 앞에서 정반대의 길을 간 사람도 있습니다. 모세 자신입니다. 하느님께서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그를 부르셨을 때, 모세는 끝까지 두려워하며 핑계를 댑니다. "저는 본래 말솜씨가 없는 사람입니다."(탈출 4,10 참조) 혼자였다면 그는 결코 파라오 앞에 서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두려움을 어떻게 없애 주십니까.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탈출 3,12 참조) 하시고, 형 아론을 그의 입으로 붙여 주십니다. 모세의 두려움은 그가 혼자 극복한 것이 아닙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의 관계, 곁에 보내 주신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녹아 없어진 것입니다. 같은 떨기나무에 마주 선 두 사람, 모세는 함께 가시는 분을 믿고 두려움을 관계 속으로 가져갔고, 아론은 군중의 두려움을 혼자 끌어안다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두려움을 이기느냐 굴복하느냐는, 결국 그 두려움을 누구와 함께 마주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하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라고, 곧 두려움을 관계 한복판으로 끌고 나가라고 명령하셨을까요. 예언자 예레미야의 소명에서 그 까닭이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보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하리라."(예레 1,17 참조) 그러나 같은 자리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겠다."(예레 1,8 참조)
곧, 선포하라는 명령과 함께 있어 주겠다는 약속이 한 짝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다가 거절당하는 것은 내가 거절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함께 계신 하느님께서 거절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자리에 나 혼자 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님 말고'의 영성을 배웁니다. 최선을 다해 사랑을 전하되, 상대가 거부하면 "아님 말고!" 하고 툭 털어 버리는 영적 배짱입니다. 이 배짱은 뻔뻔함이 아니라, 결과를 함께하시는 하느님께 맡기는 깊은 신뢰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가리옷 유다에게 끝까지 사랑을 내어 주셨지만, 그가 끝내 등을 돌리고 떠날 때 억지로 매달리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은 선포하는 내 몫이고, 받아들임은 상대와 하느님의 몫입니다. 그 몫을 구분할 줄 알 때, 우리는 거절이 두려워 입을 닫는 감옥에서 풀려납니다.
이 자유가 한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실제 이야기로 마무리하겠습니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 깊은 감명을 받은 한 옷가게 주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게에 들어오는 모든 손님에게 종교를 가리지 않고 "찬미 예수님!" 하고 인사하기로 결심합니다. 불쾌해하며 나가 버리는 사람도, 장사를 망칠 위험도 있는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내 인사가 싫으면 아님 말고!' 하는 배짱이 있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그다음입니다. 두려움을 무릅쓰고 입을 연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손님의 눈치를 보는 외로운 장사꾼이 아니라, 만나는 모든 이와 복음으로 이어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선포가 그를 두려움에서 풀어 준 것입니다. 그의 벅찬 기쁨에 감화되어 수많은 이가 세례를 받았고, 그는 훗날 위대한 선교왕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두려움을 먼저 없앤 뒤에 입을 연 것이 아닙니다. 입을 열었더니 두려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두려움은 우리에게 늘 "혼자 숨어라"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정반대를 명령하십니다.
"지붕 위로 올라가 선포하여라."
두려움은 골방에서 혼자 이겨 내는 것이 아니라, 입을 열어 다가가는 관계 안에서, 특별히 하느님을 함께 모시고 선포하는 그 관계 안에서 부서집니다. 그러니 미움받을까 두려워 사랑의 고백을 입안으로 삼키지 마십시오. 내 곁에, 내 안에 함께 계시는 그분을 믿고 이렇게 외치십시오.
"예수님 믿으세요, 사랑합니다. 아님 말고!"
그 한마디를 내뱉는 순간, 여러분은 이미 두려움의 감옥에서 한 걸음 걸어 나온 것입니다. 두려움이 없어야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상이 두려움이 사라지는 자유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육신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미시간대 스테파니 브라운 박사 연구팀은 5년 동안 노년 부부를 추적·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타인을 도운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사망 위험이 현저히 낮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것보다, 지지를 제공하는 것이 생존에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카네기 멜런대의 연구도 비슷한 결론을 냈습니다. 자원봉사를 하는 노인은 그렇지 않은 노인보다 혈압이 낮고, 염증 수치가 낮고, 인지 기능 저하 속도가 느린 것입니다. 기여는 뇌뿐 아니라 몸 전체를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은퇴 후에 급격하게 쇠약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단순히 운동량이 줄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뇌가 ‘나는 더 이상 공동체에 기여하지 못한다’라는 신호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부나 기여는 이렇게 나 자신에게 큰 도움을 줍니다. 그런데 할 수 없다는 이유를 계속해서 만듭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할 수 없다고 하고, ‘내 코가 석 자’라면서 자기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상의 뜻만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주님의 뜻을 외면합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으로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자기의 행복과 더불어 이 세상을 더 의미 있고 행복한 곳으로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세상 권력이 가할 수 있는 최악의 형벌은 고작 육신의 죽음뿐이고, 그 권력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에는 결단코 손댈 수 없는 유한한 존재라고 하십니다. 영혼과 육신을 모두 주관하시는 분, 즉 영원한 심판권자는 오직 하느님 뿐으로, 하느님을 향한 마음을 올바로 품을 때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면서 참새와 머리카락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참새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 먹는 가장 값싼 고기였습니다. 이렇게 시장에서 헐값에 팔리는 참새 한 마리의 생사조차 하느님의 섭리 안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머리카락은 약 10만 가닥에 이르며, 우리 자신도 몇 개인지 모를 만큼 사소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를 다 세고 계신다고 합니다. 그만큼 나를 존귀한 자녀로 받아들이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마태 10,32)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사는 사람만이 세상에 주님을 증언하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때로는 세상의 위협과 조롱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 진정한 우리 편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큰 이득일까요?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만족이 더 큰 이득입니다.
오늘의 명언
한 인간의 참된 가치는 그가 무엇을 추구하는지에 따라 가늠된다. 인생의 행복은 하루를 어떤 생각으로 채우느냐에 달려 있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의 은혜를 기억할 때, 두려움은 줄어들고 감사가 자라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교와 우열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라고 초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성공이나 능력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존재 자체가 이미 소중하고 귀합니다.
참새는 참새로서 소중하고, 사람은 사람으로 소중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존엄을 깨달은 사람은 세상의 두려움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두려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존재 가치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두러움보다 먼저 와 있음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품 안에 있는 우리는 이미 존귀한 존재입니다. 세상의 평가와 걱정에 묶인 삶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라는 주님의 초대입니다. 불안과 경쟁이 일상이 된 이 시대에 우리는 자주 자신을 부족한 존재로 여깁니다. 그러나 참된 평화는 더 많이 소유하는 데 있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삶과 역사 안에서 조용히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소중한 날 되십시오.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순간, 두려움은 더 이상 삶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참된 믿음은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의 존엄을 발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 카드 다운로드
마태오복음 10장 31절 말씀 카드 저장하기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