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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6.07.02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피어나네 2026. 7. 2.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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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누군가의 아픔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릴 때가 있어요. 위로하고 싶지만 자칫 가벼운 말이 될까 조심스럽고, 쉽게 이해한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럴 때면 말을 아끼며 옆에 있어주는 일이 참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돼요. 아는 척하기보다 묵묵히 곁에 머물고, 판단하기보다 함께 걸어가는 마음을 배우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2026년 7월 2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성경 말씀 정리

 

2026년 7월 2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7월 2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제1독서

아모 7,10-17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가서 내 백성에게 예언하여라.

 

그 무렵

10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가 이스라엘 임금 예로보암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였다. “아모스가 이스라엘 집안 한가운데에서 임금님을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더 이상 참아 낼 수가 없습니다.

11 아모스는 이런 말을 해 댑니다. ‘예로보암은 칼에 맞아 죽고 이스라엘은 제 고향을 떠나 유배를 갈 것이다.’”

12 그런 뒤에 아마츠야가 아모스에게 말하였다. “선견자야, 어서 유다 땅으로 달아나, 거기에서나 예언하며 밥을 벌어먹어라.

13 다시는 베텔에서 예언을 하지 마라. 이곳은 임금님의 성소이며 왕국의 성전이다.”

14 그러자 아모스가 아마츠야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15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16 그러니 이제 너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너는 ‘이스라엘을 거슬러 예언하지 말고 이사악의 집안을 거슬러 설교하지 마라.’ 하고 말하였다.

17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아내는 이 성읍에서 창녀가 되고 네 아들딸들은 칼에 맞아 쓰러지며 네 땅은 측량줄로 재어 나누어지고 너 자신은 부정한 땅에서 죽으리라. 그리고 이스라엘은 제 고향을 떠나 유배를 가리라.’”

 

 


복음 말씀 전체 보기

마태 9,1-8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2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3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5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6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7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8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지금 바로 보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2026년 7월 2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교황님 7월 기도지향 00:20

✚ 미사 시작 00:37

✚ 제1독서 03:02

✚ 복음 07:01

✚ 강론 08:38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말씀 묵상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백재욱 스테파노 신부

예수님은 병보다 사람을 먼저 보셨다.

신형철 문학 평론가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다음과 같이 힘주어 말합니다.

“고통의 공감은 일종의 능력인데, 그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한심한 한계다. 경험한 만큼만, 느껴본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한다.”

다른 이의 고통과 아픔, 슬픔에 온전히 가닿을 수 없는 “한심한 한계”를 인정할 때 공부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고통에 대한 공부”라는 표현이 새삼스럽지만, 이보다 더 절실히 필요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그런 공부 없이는 ‘너’를 이해한다는 말 자체가 성립할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율법 학자들은 중풍 병자가 겪는 고통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누워 있는 중풍 병자에게 눈길이 쏠려 있을 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지켜 온 율법의 전통에 따라 예수님의 말씀을 평가하고, 속으로 그분을 죄인으로 낙인찍기에 바쁩니다. 하느님의 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 법이 향하고 있는 본질과는 한참 멀어져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다른 이들의 고통보다는 자신들이 만들어 온 세계가 무너지는 데에 더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길은 달랐습니다. 그분께는 중풍 병자가 용기를 내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고 다시 일어나 걷는 것만이 중요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이신 분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까닭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산다는 것은, 이처럼 우리의 “한심한 한계”, 곧 나 자신에게만 쏠리는 눈길을 부단히 넘어서고자 공부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심판은 No! 용서는 Yes

단죄와 용서의 권한은 하느님께만 있다는 것이 구약의 믿음이자 우리 믿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묶고 푸는 권한이 하느님께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 반대를 한번 생각해보면 좋을 것입니다.

단죄도 용서도 인간의 권한이지 하느님은 상관이 없다고 무신론자들은 얘기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이것이 하느님의 권한을 인간이 빼앗는 것이거나 인간이 하느님의 위치로 감히 올라가려고 드는 무도함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은 그저 인간일 뿐 같은 인간에게 심판과 용서의 권한이 없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주님께서는 그 권한이 사람의 아들인 당신에게 있다고 말씀하시고, 마태오복음은 그 권한이 점점 확장되어 사람의 아들들인 우리게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군중들은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이 일을 보고 군중들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사람이 자기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주는 것은 두려워할 일도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 것 때문에 하느님을 찬양할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남의 죄까지 용서해주는 것은 하느님께만 유보된 권한 밖의 일이고, 그래서 16장에서는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임을 고백한 베드로에게 당신 교회의 반석이라는 이름과 함께 처음으로 주어진 권한입니다. 그리고 18장에서는 마침내 보통 사람인 우리에게도 용서의 권한이 주어집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그러니까 마태오복음 전체를 놓고 볼 때 심판은 우리에게 여전히 불허되고, 용서는 이제 우리도 할 수 있고 해야 할 것으로 확장하여 허용된 것입니다.

심판은 No! 용서는 Yes입니다. 이것이 심판과 용서와 관련하여 머리로 아는 가르침의 내용인데 실제는 곧 이와 관련한 실제의 실천은 어떻습니까? 그래서 그 반대인 경우가 많지 않은지, 곧 하지 말아야 할 심판은 자주 하고 해야 할 용서는 겨우 하는 내가 아닌지,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 유보된 권한 침범은 너무도 쉽게 하고 이웃에게 하라는 용서는 하지 않는 내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용서가 치유를 가져오는 권능이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는 몸이 마비가 된 지라 제 발로 걸어올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를 치유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치유에 앞서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사실, 이미 앞의 5-7장에서는 ‘율법에 대한 권한’을, 8장에서는 ‘질병과 마귀와 사람과 자연에 대한 권한’을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죄의 용서에 대한 권한’을 밝히십니다.

당시에 질병은 죄의 벌로 여겨졌고, 이 병자 역시 ‘자신의 죄책감’에 빠져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애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

감히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죄의 용서’를 선포하신 이 놀라운 사실,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아니 이 무뢰하고 불경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마태 9,3)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감히 “죄를 용서받았다.”고 누가 선언할 수 있을까요? 용서할 수 있는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히에리무스는 말합니다.

“말하기는 쉬워도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중풍병자가 용서받았는지는 용서하실 수 있는 오직 한 분만이 확실히 아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선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성모독이라고 여기는 율법학자들의 “생각을 아시고”(마태 9,4) ‘전지하신 하느님’의 특성을 드러내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테 9,6)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태 9,7)

그리고 ‘중풍병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하심으로써, 믿는 이들이 아담의 죄로 떨어져 나온 낙원으로 가는 길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힐라리우스).

이렇게 ‘영혼과 육신의 마비’ 모두를 고쳐주시며, 당신께서 영혼과 육신 모두의 창조주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마태 9,8).

한편, 오늘 <복음>은 ‘용서’가 ‘치유를 가져오는 권능’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느님께서 나를 용서하셨음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하면, 이미 치유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처럼 상처받은 치유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오복음 9장 6절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주님! 평상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평상을 들고 가게 하소서.

평상 위에, 당신의 사랑을 들고 다니게 하소서.

십자가 위에 드러내신, 저를 일으키신 그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왜 오늘날 교회에는 기적이 드물어졌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침상에 누운 중풍 병자를 보시고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 참조)

사람들은 병을 고쳐 주시리라 기대했는데, 그분께서는 엉뚱하게도 죄의 용서를 먼저 선언하십니다. 그러자 율법학자들이 속으로 수군댑니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구나. 죄를 용서하는 것은 오직 하느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들의 속생각은 사실 옳았습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오직 하느님의 것입니다. 문제는, 눈앞의 이분이 바로 그 하느님이심을 알아보지 못한 데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이렇게 물으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쉽겠느냐?"(마태 9,5 참조)

그러고는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 명하십니다. 병자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집으로 돌아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묵상의 열쇠를 얻습니다. 보이지 않는 권한은 보이는 표징으로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눈에 보이는 치유로, 보이지 않는 그 권한이 참됨을 똑똑히 증명하셨습니다.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만이 중풍을 일으켜 세우실 수 있으니, 일어선 그 병자가 곧 죄 사함의 살아 있는 증거였던 것입니다.

이 대목은 오늘 우리 교회에 무거운 물음을 던집니다. 교회는 예수님께 그 죄 사함의 권한을 물려받았습니다. 고해성사가 그것이며, 성체성사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 권한을 증명할 표징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그 권한을 점점 의심하게 됩니다. 죄가 정말 용서되는지, 저 빵이 정말 그분의 몸인지 실감하지 못하게 됩니다.

솔직히 오늘날 고해소 앞이 한산해지고 성체 앞에 무릎이 가벼워진 데에는, 이 표징의 약함이 한몫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표징이 받쳐 주지 못하면, 보이지 않는 성사에 대한 믿음도 함께 흐려지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표징이라면 무엇이든 좋은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 표징과 거짓 표징을 가르는 영적 법칙을 알아야 합니다. 그 법칙은 이것입니다. 사탄은 결코 사람을 치유할 수 없습니다. 사랑과 치유는 오직 창조주 하느님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제국을 무너뜨린 요승 라스푸틴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혈우병을 앓던 황태자를 낫게 했다는 명목으로 황실을 장악하고 온갖 부패를 일삼았습니다. 그토록 사악한 자가 어떻게 치유의 능력을 부렸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그는 치유한 적이 없습니다. 황태자의 혈우병은 끝내 낫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심리적 최면과 교묘한 속임수로, 잠시 호전된 것처럼 보이게 했을 뿐입니다.

거짓 표징의 본질이 바로 이것입니다. 병을 실제로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나은 것 같은 착각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잠깐 통증이 가시고, 스트레스가 풀려 한결 나아진 듯한 그 느낌을 기적이라 부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삶은 조금도 바뀌지 않고, 병의 뿌리는 그대로 남습니다. 결국 황실은 그 가짜 기적에 속아 나라를 통째로 잃었습니다. 하느님은 빛이요 사랑이시지만 사탄은 어둠이요 증오이니, 그 대척점에 선 사탄이 하느님의 참 치유를 베풀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치유는 무엇으로 가려집니까. 참된 치유는 반드시 그것을 베푸는 이의 피 흘림을 동반합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정말로 거두어 가려면, 그 고통을 누군가가 대신 짊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치유란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옮겨지는 것입니다. 병자에게서 떠난 그 고통은 허공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치유하는 이가 제 몸으로 받아 안습니다. 그래서 참된 치유에는 언제나 피 흘림이 있습니다.

성경이 이를 못 박아 증언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장차 오실 그분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가 매 맞은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5 참조) 보십시오. 우리가 낫는데, 매는 그분이 맞으십니다. 우리의 고통이 그분께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치유하시려 택하신 길이 곧 십자가였습니다. 당신의 온 피를 쏟아 우리의 죄라는 병을 당신 몸으로 받아 안으신 것입니다. 일찍이 광야에서도 그러했습니다. 불뱀에 물려 죽어 가던 백성을 낫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구리 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게 하셨습니다.

그 들어 올려진 뱀을 쳐다본 이들이 살아났습니다(민수 21,8-9 참조). 높이 들어 올려진 그 표징은, 훗날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로 들어 올려져 피 흘리실 그분을 미리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치유는 언제나, 누군가가 들어 올려져 피 흘리는 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기에 악한 존재는 결코 남을 치유하지 못합니다. 악한 자는 남을 위해 피를 흘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남의 피를 빨아 제 배를 채울 뿐입니다. 모기가 누구를 위해 제 피를 내어 주겠습니까. 거짓 치유자는 모기처럼 사람의 고혈을 짜내어 제 잇속을 채우고, 참 치유자는 제 피를 내어 주어 남을 살립니다.

그래서 참된 치유의 표징이 일어났다면, 그를 행한 이의 본질은 사랑일 수밖에 없고, 그가 선포하는 말씀 또한 진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죄 사함의 권한을 증명하시려 굳이 치유의 기적을 택하신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치유하는 그분이 곧 사랑이시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처음의 무거운 물음으로 돌아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교회에는 왜 이런 치유의 표징이 드물어졌습니까. 교회가 받은 죄 사함의 권한은 조금도 줄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그 권한을 증명하던 표징은 희미해졌습니까. 저는 두렵지만 정직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신자를 위해 진짜로 피 흘리는 목자가 줄었기 때문입니다. 치유는 피 흘림이라 하였습니다.

표징은 사랑의 피 흘림이 있는 곳에서 솟아납니다. 그런데 양 떼를 위해 제 살을 베어 내고 제 밤을 지새우며 제 안위를 손해 보는 그 피 흘림이 줄어드니, 그 피를 타고 흐르던 표징도 함께 줄어든 것입니다. 삯꾼은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제 목숨을 양을 위해 내놓지 않기 때문입니다(요한 10,12-13 참조). 삯꾼의 손에서는 결코 기적이 나오지 않습니다. 기적은 오직 양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착한 목자의 피에서 흘러나옵니다.

이것은 저 자신에게 먼저 겨누는 칼입니다. 그리고 비단 사제만의 일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자리에서 작은 목자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목자요, 교사는 학생의 목자요, 봉사자는 약한 이의 목자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진짜로 손해 보고, 진짜로 시간을 내어 주고, 진짜로 제 편안함을 베어 내어 피 흘릴 때,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이 낫기 시작합니다. 상처가 아물고, 닫혔던 마음이 열리고, 떠났던 영혼이 돌아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허락된 치유의 표징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분명합니다. 다시 피 흘리는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값싼 위로, 잠시 기분만 풀어 주는 가짜 표징을 구하지 말고, 누군가를 위해 내가 먼저 손해 보고 아파하는 참 사랑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길 위에서 교회는 다시 표징을 회복할 것이며, 그 표징을 통해 사람들은 고해성사가, 성체성사가 참으로 죄를 용서하고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성사임을 다시 믿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를 위해 당신의 온 피를 아낌없이 내어 주시는 예수님 앞에 나아갑시다. 그 피를 받아 모시는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한 방울의 피를 흘릴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청합시다. 그렇게 우리가 서로를 위해 피 흘릴 때, 사탄의 가짜 위로는 물러가고, 영과 육을 함께 살리는 참된 치유의 기적이 이 교회 안에 다시 흐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가치가 있으면서 가격이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스마트폰, 노트북, 명품, 보석류 등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격이 없지만 가치는 있는 것이 있습니다. 숨 쉬게 해 주는 산소, 자연풍경, 직접 만든 도시락, 하느님의 사랑 등이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치도 없고 가격도 없는 것은 무엇일까요? 먼지, 길거리의 돌멩이 등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가치는 없지만 가격이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부분은 자기에게 달려 있습니다. 저는 초콜릿, 사탕 등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비싼 초콜릿과 사탕이라도 손이 가지 않습니다. 분명히 가격이 있지만, 가치는 제게 없습니다. 글 쓰는 것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만년필은 비싸기만 하고 필요하지 않습니다. 역시 가격이 있지만, 가치는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가치는 자기가 만들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앞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가치와 가격이 모두 있는 것들) 역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면, 가격이 있어도 자기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정말 신경 써야 할 것은 가격은 없지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야 세상의 것에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잘 살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진짜 행복도 나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육체의 마비를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 당시 유다인들은 심각한 질병을 죄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아프면 모두 죄책감으로 힘들어했던 것입니다. 용기를 내라는 말씀으로 또 죄를 용서받았다는 말씀으로 그가 가지고 있던 굴레를 끊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이 불만입니다. 죄를 용서한다는 말이 하느님을 모욕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마태 9,3 참조).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마태 9,5)

어떤 말이 더 쉽습니까? 당연히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그 결과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어나 걸어가라는 것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에 어렵습니다. 그래서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태 9,8)라고 말씀하시면서,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힘을 보여주십니다.

이렇게 큰 사랑과 힘을 가지고 계신 주님이십니다. 이 주님께 가치를 둬야 하지 않을까요? 가장 큰 가치가 여기에 있으며, 우리가 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가격도 없고, 가치도 없는 먼지 정도로만 주님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명언

위대한 일은 힘이 아니라 인내로 이루어진다(새뮤엘 존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우리의 삶은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는 용기에서 완성됩니다. 스스로 만든 굴레를 끊고 지금 이 순간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신앙은 과거에 묶여 있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다시 일어서는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구원은 인간 존재 전체를 새롭게 합니다. 죄의 용서와 치유는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구원 사건입니다.

치유의 목적은 병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고 사랑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데 있습니다. 평상을 가지고 돌아가듯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초대입니다.

성숙한 인간은 과거를 지우려 하지 않습니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어제를 다시 살게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오늘 다시 일어나도록 초대하십니다.

신앙은 넘어지지 않는 삶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믿고 날마다 다시 일어서는 삶입니다. 과거에 머물지 않고 상처를 은총으로 품으며 사랑과 희망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오늘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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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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