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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6.07.03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피어나네 2026. 7. 3.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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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의심이 많아서 토마스처럼 확인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어야 안심이 되고, 이해가 되어야 믿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믿음은 의심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의심 속에서도 다시 주님을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닫힌 마음 한가운데로 오시어 밀어내지 않으시고, 의심과 망설임까지 품어 주시는 주님은 찬미 받으소서!

 

2026년 7월 3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성경 말씀 정리

 

2026년 7월 3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7월 3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제1독서

에페 2,19-22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여러분은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형제 여러분,

19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복음 말씀 전체 보기

요한 20,24-29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지금 바로 보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2026년 7월 3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성 토마스 사도 소개 00:06

✚ 교황님 7월 기도지향 01:32

✚ 미사 시작 01:49

✚ 제1독서 05:36

✚ 복음 07:57

✚ 강론 09:32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말씀 묵상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백재욱 스테파노 신부

빈자리 사이에서 피어나는 믿음

‘교회가 텅텅 비어 간다.’, ‘청년 수가 급격히 줄어든다.’는 우려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현상이 점점 더 빨라지고 있지만, 이를 경계하는 마음은 오히려 무뎌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어차피’라는 말을 남용하며, 부정적인 체념이나 근거 없는 낙관론을 키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래도’를 외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 곁에는 아직도 저마다 자기 자리에서 믿음을 키우고 희망의 밭을 일구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 고백은 통계나 객관적 지표에 담기지 않기에 때로는 약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향한 담백한 고백이야말로 그 어떤 미사여구보다 힘 있고 묵직합니다.

오늘 복음 속 토마스 사도처럼, 오늘날 많은 젊은이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하고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받아들이려 할지 모릅니다. 그들의 눈에 ‘신앙의 언어’는 말장난처럼 비칠 수 있고, ‘믿음의 행위’는 어린아이들의 놀이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상처 입은 몸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께서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며 함께 계심을 체험한 이들은 결코 그분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교회는 결국 이렇게 고백하는 이들의 손으로 바로 세워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전 세계 청년들의 축제인 서울 세계청년대회가 일 년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행사를 안전하게 치르기 위한 준비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이 축제에 참여하는 청년들이 저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끌어안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자신의 신앙을 증언할 수 있는 사도가 되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토마스는 왜 거기 없었을까?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토마스는 왜 그때 그 자리에 없었을까? 그때 토마스는 어디에 있었을까?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자들이 함께 있던 곳에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면 함께 있던 제자들과 토마스의 차이점은 무엇이었을까요? 제자들은 왜 같이 있었고 토마스는 왜 같이 있지 않았을까요?

제자들이 같이 있었던 것은 특별한 이유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토마스처럼 무리에서 이탈하는 것이 두려워 그저 뭉쳐있었을 수도 있고 실패를 즉시 인정할 수 없어서 어정쩡하게 머물러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와 달리 토마스는 자기 실망과 실패에 정직했고 바로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가 예수라는 인간을 구원자로 잘못 알고 믿은 것이라는 면에서 실패를 인정하고 실망한 것일 겁니다. 그런 그가 떠났던 공동체로 왜 돌아왔을까요? 왜 여드레 만에 돌아왔고 어떻게 돌아올 수 있었을까요? 여드레는 완전한 단절의 시간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의 촉각은 분명 여전히 곤두서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제자들 소식은 계속 와닿았을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고도 고마운 것은, 저희 수도회를 떠난 많은 형제가 토마스 사도처럼 떠났어도 오히려 수도원 안에 있는 사람보다 수도원 소식에 더 심정적으로 민감하고 가까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같이 사는 사람은 같이 살면서도 꼴 보기 싫고 심정적으로 들기 싫을 수 있는데 떠난 사람은 떠났기에 오히려 수도원이 그립고 그래서 소식을 듣고 싶어 합니다. 물론 완전히 관심을 꺼버린 사람도 많지만 토마스 사도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고 그래서 부활 소문을 전해 듣고 있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의 공동체로 돌아갈지 말지 결정해야 합니다. 아니 주님께서 소문대로 진짜 부활하셨는지 보러 가야 하는데 그것은 토마스 사도에게는 아직 소문이지 소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돌아와서는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치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믿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믿기 위해선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니까 의심 없이 믿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말이요 믿고 싶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토마스 사도를 공동체와 따로 만나주시지 않았다는 점이고, 부족한 공동체일지라도 공동체적으로 당신을 드러내시고 만나주신다는 점입니다. 물론 꼭 필요하다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토마스 사도에게도 따로 만나주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따로 만나주시지 않고 공동체 안에서 만나셨습니다. 앞서 봤듯이 토마스 사도는 공동체로 돌아올 사람이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사도단의 일원이었기에 개인이 부활해야 할 뿐 아니라 공동체도 같이 부활해야 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공동체 앞에서 신앙고백을 해야 했고 불신의 대명사인 그가 오히려 신앙고백의 모범이 돼야 했기 때문입니다. 나도 잘 믿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된다면 믿음의 무리 안에 어정쩡하게 있지 말고 토마스 사도처럼 더 확실히 믿기 위해 더 의심도 하는 용기를 가짐도 좋을 겁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토마스가 본 것은 상처였지만, 믿은 것은 주님의 사랑이다.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나타나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라고 말한 그를 환히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마치 엠마오를 가던 제자들이 빵 쪼개는 만찬을 보고서 예수님을 알아 본 것처럼, 토마스는 피 흘린 상처를 보고서 비로소 마음의 눈이 열리고, 마침내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토마스로 하여금 이렇게 고백하게 한 것일까?

토마스는 동료들 중 자신만 주님을 뵙지 못한 것이 마치 자신만이 부활하신 ‘주님을 뵐 자격이 없는 자’로 여겨져 더 슬픔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을 더욱 더 확인하고 싶었고, ‘그분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보게 된 것은 ‘그분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앞에서’ 모든 의혹과 자책이 녹아내렸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주님의 끝나지 않은 사랑’, ‘지속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분의 상처는 ‘그리스도임을 보여주는 표시’임과 동시에, 남김없이 쏟아 부은 ‘당신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이토록, 토마스는 눈에 보이는 상처를 통에,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보았던 것입니다. 마치 엠마오의 제자들에게 ‘사랑의 성찬’이 베풀어진 것처럼, 토마스에게는 ‘사랑의 성혈’이 베풀어졌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믿음의 눈’이 열리고 ‘주님의 사랑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믿음’은 <히브리서>에서 말해주듯이,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 그러니 토마스가 본 것은 상처였지만, 믿은 것은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보지 않고는 믿지 못했지만, 보고는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고 또 보고 보지만, 여전히 그분의 사랑을 신뢰하지 않기도 합니다. 마치,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너왔던 히브리인들이 보지 못해서 못 믿었던 것이 아니라, 보고도 목이 뻣뻣해져 하느님을 믿지 안했던 것처럼, 매일 영성체를 하면서도 여전히 그분의 사랑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면, 우리 역시 목이 뻣뻣해진 이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말합니다.

“모든 고뇌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우리 가까이 계신지를 깨닫지 못하는 데서 생깁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오늘도 당신은 찢어진 가슴을 열고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그 지고한 사랑을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증거 해야 할 것도 ‘당신의 사랑’일뿐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20장 27절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주님! 당신 옆구리에서 다시 탄생하게 하소서

당신 피로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받아들여, 옆구리에 간직하고 위로하게 하소서.

상처내고 비난한 이를 끌어안아, 옆구리에 품고 용서하게 하소서.

믿어주고 도와주며, 제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생명의 피를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혼자 믿는 신앙은 왜 무너지는가

오늘은 의심의 대명사로 불리는 성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 토마스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뒤늦게 돌아온 그는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기뻐하자 그만 자존심이 상합니다.

'왜 나만 빼놓았단 말인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내 손가락을 그 상처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

우리는 흔히 토마스의 이 이성적 의심을 탓합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의 이성이 아니라, 그가 공동체를 벗어나 홀로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첫 발현의 순간,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이 그의 불행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드레 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가 다시 공동체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찾아오십니다. 그가 형제들 곁으로 돌아온 바로 그때 부활하신 그분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고는 뼈아픈 말씀을 남기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참조)

도대체 보지 않고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이 말씀은 눈을 감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 개인의 눈'이 아니라 '공동체의 눈'으로 보라는 준엄한 초대입니다. 토마스는 제 눈으로만 보려다 여드레를 어둠 속에서 헤맸습니다. 그러나 그가 공동체로 돌아왔을 때, 비로소 그 눈이 열렸습니다. 믿음은 나 홀로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믿는 이들 안에서 받아 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신자가 정반대의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나는 주일 미사 거른 적 없고 성체도 꼬박꼬박 모시니 됐다. 성당 사람들과 부대끼며 상처받는 일은 질색이다. 내 신앙은 나 혼자 지킨다.' 이것은 철저한 예외 의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독야청청하는 개인의 신앙을 인정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 백성이라는 울타리 없이 나 홀로 성사만 챙겨 구원받겠다는 것은, 십자가의 길을 피해 가려는 가장 교묘한 이기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법칙을 짚어야 합니다. 한 생명이 어느 공동체에 속하려면, 반드시 같은 부모를 공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한 방송에서 '개가 고양이를 낳았다'는 소동이 있었습니다. 어미 개가 제 새끼들 틈에 고양이 새끼 한 마리를 품고 젖을 먹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알고 보니, 출산하던 그 짧은 사이에 밖에서 태어난 고양이 새끼를 제 새끼인 줄 물어 왔고, 냄새가 섞이자 제 자식으로 품은 것이었습니다. '부모의 흔적'인 냄새가 같아졌기에, 그 고양이는 개의 무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를 보십시오. 백조 새끼는 오리 무리 안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끝내 겉돌고 튕겨 나갑니다. 공동체란 본디 같은 부모를 증명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모기처럼 제 피만 빨려던 이기적 인간이, 공동체 안에서 기꺼이 제 피를 나누는 사람으로 변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거룩하게 낳으신 하느님 아버지의 유전자가 작동한다는 증거입니다.

구약의 파스카 이야기가 이 법칙을 소름 돋도록 준엄하게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던 그 밤, 하느님께서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 명하시며 무서운 단서를 다십니다.

"너희는 아침까지 아무도 자기 집 문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탈출 12,22 참조)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파스카 양고기를 배불리 먹고 문설주에 피를 발랐어도, "나는 하느님을 믿으니 잠깐 밤바람이나 쐬고 오겠다"며 그 집, 곧 공동체 밖으로 나간 자는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고기를 먹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 죽음의 밤을 함께 이겨 내고 하느님 백성으로서 함께 광야를 걷는 공동체적 결속, 그것이 구원의 진짜 핵심이었기 때문입니다. 파스카는 혼자 먹는 밥이 아니라, 한 지붕 아래 함께 먹는 밥이었습니다.

이 파스카가 곧 오늘의 성체성사입니다. 성체는 나 홀로 우아하게 누리는 개인의 양식이 아니라, 한 몸을 이루게 하는 공동체의 양식입니다. 사도 바오로께서 이를 분명히 하십니다.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가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하나의 빵을 나누어 먹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7 참조)

같은 빵을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같은 아버지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요, 그렇게 우리는 한 몸이 됩니다. 그러니 성체를 모시고도 형제와 한 몸이 되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파스카 양고기만 입에 넣고 문밖으로 뛰쳐나가는 어리석음과 같습니다.

이 빛에서 보면, 우리 교회가 삼 년간 고해성사를 보지 않은 이를 냉담 신자로 규정하는 행정적 기준은 어쩌면 본질을 살짝 비껴간 것일지 모릅니다. 참된 냉담은 성사를 쉬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떠나는 것입니다. 가리옷 유다를 보십시오. 그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 손에 직접 빵을 받아 모셨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자리를 떠나 어둠 속으로 나갔습니다. 복음은 그 순간을 짧고 서늘하게 전합니다.

"그는 곧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요한 13,30 참조)

성체를 모시고도 공동체를 등지고 밤으로 나간 그가, 참된 냉담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도행전의 하나니아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제 재산의 일부를 몰래 감춘 채 공동체에 속한 척하려다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습니다(사도 5,1-5 참조). 그의 진짜 아버지는 하느님이 아니라 돈과 탐욕이었기에, 하느님의 유전자를 나누는 공동체에 도무지 섞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다른 이는 결코 그 공동체에 머물지 못합니다.

반대로, 아버지가 같아지자 원수마저 형제가 된 이야기도 있습니다. 요셉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를 구덩이에 던지고 종으로 팔아넘긴 형제들이었지만, 훗날 굶주려 이집트로 내려온 그들을 요셉은 이렇게 끌어안습니다.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긴 일로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생명을 구하시려고 저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창세 45,5 참조)

갈라졌던 형제들이 다시 한 밥상에 둘러앉아 한 공동체가 된 것은, 그들이 한 아버지 야곱의 자녀임을, 그리고 그 위에 계신 한 분 하느님의 섭리를 함께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아버지를 알아보는 순간, 배신자도 형제로 돌아옵니다. 이것이 공동체의 은총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는 독방에서 홀로 만족하는 내 기도 속이 아니라, 나와 좀처럼 맞지 않는 형제자매와 부대끼고 깨어지며 사랑을 실천하는 그 거칠고 투박한 공동체 안에서 당신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니 스스로 예외라는 껍데기를 부수십시오. 나 홀로 성사만 누리겠다는 이기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의 몸인 공동체에 기꺼이 순명하십시오. 토마스가 공동체로 돌아왔을 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듯이, 우리도 형제들 곁으로 돌아설 때 그분을 뵙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참조)

오늘 성체성사로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은 우리가, 세상 한복판에서 '그리스도'라는 참된 아버지를 증명해 내는 거룩하고 끈끈한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고등학생 때까지 제일 자신 있는 과목을 꼽으라고 하면, ‘수학’이었습니다. 친구들은 이 수학을 너무나 어려워했지만, 솔직히 그 어려워하는 이유를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수학은 원리, 법칙만 알면 절대 어렵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졸업한 지 30년쯤 지났을 때, 수학능력 평가 수학 문제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예전 기억을 살려서 ‘한 번 풀어볼까?’하고 문제를 보는 순간, 시험지를 얼른 덮고 말았습니다. 원리는 하나도 모르겠고, 법칙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30년 동안 수학을 전혀 접한 적이 없으니 다 잊어버린 것입니다. 과거는 그저 과거일 뿐이었습니다.

‘왕년에 열심히 신앙생활 하셨다’라는 분을 자주 만납니다. 이 말씀은 전에는 열심히 신앙생활 하셨지만, 지금은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전에 열심히 했으니, 언젠가는 예전처럼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가능할까요? 수학 공부를 30년 동안 하지 않으면 전혀 문제를 풀 수 없는 것처럼, 신앙생활도 오랫동안 하지 않으면 주님과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행복을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쉬는 만큼 주님과 멀어지고, 주님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자기에게 가장 큰 손해입니다. 신앙생활을 쉬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오늘 성 토마스 사도 축일을 맞아 보여주는 요한복음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토마스는 그 자리에 없었지요. 동료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그는 직접 상처를 만져보지 않고서는 절대 믿지 않겠다고 단언합니다. 단순히 의심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자기의 뼈아픈 상실감을 치유할 수 있는, 진짜이고 확실한 부활을 원했던 것입니다.

여드레 뒤, 예수님께서는 닫힌 문을 뚫고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토마스를 향해 다가가십니다. 그의 불신을 꾸짖거나 내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네 손가락을 대 보아라.” 하시며 토마스가 요구했던 방식대로 자기의 몸을 온전히 내어주십니다. 눈높이에 맞추어 다가오시는 자비의 주님이십니다.

토마스는 상처에 손을 넣어보기도 전에,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라면서 신약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위대하고 완벽한 고백을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지만, 토마스는 더 나아가 예수님을 창조주이신 하느님 그 자체로 선포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토마스의 눈높이에 맞추셨던 것처럼, 우리의 눈높이에 항상 맞추시는 분이십니다. 그 자비하심에 온전히 우리를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세속적인 기준으로 자기의 판단만을 내세우면서 주님께 멀어지게 됩니다. 토마스의 고백처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라고 늘 외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복음을 따라 살려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가톨릭 신자입니다.”라고 소개한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의심이 있었기에 믿음은 더욱 깊어졌고, 상처가 있었기에 사랑은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이와 같이 성공이 절정이 아니라 사랑이 절정입니다. 더 큰 진실을 받아들인 기쁨의 외침입니다.

토마스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그의 마음이 달라졌기에 그의 삶도 달라졌습니다. 토마스의 고백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고백이 아닙니다. 그의 눈이 아니라 그의 존재가 깨어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상처를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의 상처 안에서 사랑과 생명의 신비를 발견합니다. 참된 깨달음은 특별한 체험을 소유하는 데 있지 않고, 이미 다가와 있는 은혜를 알아보고 감사와 실천으로 응답하는 삶에 있습니다.

이렇듯이 우리는 믿음을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토마스는 자신의 질문보다 더 큰 사랑을 만났습니다.

참된 믿음은 하느님을 아는 데 머물지 않고, 하느님을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으로 모시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있습니다. 의심은 기도가 되고, 물음은 믿음이 되며, 고백은 사랑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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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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