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을 읽다 보니 예전에 성지순례를 하며 순례도장을 찍는 데 마음을 쏟았던 때가 떠올라요. 한 군데라도 더 가고, 도장을 하나라도 더 받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마음에 남는 것은 도장이 아니라 그곳에서 침묵 안에 머물며 그분과 함께했던 시간이더라고요. 그제야 무엇을 얼마나 했는가보다,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가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형식보다 당신과 함께하는 기쁨을 먼저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심에 감사합니다.

2026년 7월 4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7월 4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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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아모 9,11-15

나는 내 백성의 운명을 되돌려 그들을 저희 땅에 심어 주리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1 “그날에 나는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리라. 벌어진 곳은 메우고 허물어진 곳은 일으켜서 그것을 옛날처럼 다시 세우리라.
12 그리하여 그들은 에돔의 남은 자들과 내 이름으로 불린 모든 민족들을 차지하리라. ─ 이 일을 하실 주님의 말씀이다. ─
13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밭 가는 이를 거두는 이가 따르고 포도 밟는 이를 씨 뿌리는 이가 따르리라. 산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모든 언덕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넘치리라.
14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운명을 되돌리리니 그들은 허물어진 성읍들을 다시 세워 그곳에 살면서 포도밭을 가꾸어 포도주를 마시고 과수원을 만들어 과일을 먹으리라.
15 내가 그들을 저희 땅에 심어 주리니 그들은 내가 준 이 땅에서 다시는 뽑히지 않으리라.” ─ 주 너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복음 말씀 전체 보기
마태 9,14-17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16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17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지금 바로 보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2026년 7월 4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교황님 7월 기도지향 00:20
✚ 미사 시작 00:37
✚ 제1독서 03:24
✚ 복음 06:52
✚ 강론 08:13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말씀 묵상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백재욱 스테파노 신부
기쁨은 곁에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 본성에 근원적 결핍이 새겨져 있어 소유에 대한 욕망과 집착에 시달리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을 ‘슬픈 짐승’으로 보는 견해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무엇을 ‘더’ 가지기를 바랄수록, 누군가가 내 곁에 ‘더’ 오래 머물러 주기를 바랄수록 우리의 슬픔은 더욱 짙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과연 그런 존재이기만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슬픔에 앞서 기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죄 이전에 인간은 하느님의 복을 충만히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맺은 관계가 단절되면서 깊은 슬픔이 인간을 짓누르기 시작하였고, 이를 회복하고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마태 9,15)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기쁨입니다. 그분의 은총으로 하느님과 관계가 다시 이어지고, 참행복을 충만히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과 함께 있는 지금 단식할 이유가 없습니다. 본디 단식은 무엇을 자꾸만 더 채우려는 소유와 집착의 고리를 끊어 내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판하며 자기들의 단식 행위가 정당함을 드러내는 데 급급합니다. 그들은 규정을 철저히 지켰지만, 단식이 향해야 할 본질에서는 한참 떨어져 있었습니다.
살다 보면 우리는 슬픔에 자주 짓눌립니다. 이런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분과 함께할 때 우리는 참된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지난날에 대한 집착과 낡은 관습적 사고를 벗어던지고, 우리 마음의 새 부대를 마련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은 똑같지만 마음은 새로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지금 저는 연피정 중인데 그래서인지 오늘 말씀이 고백성사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었습니다. 어저께 고백성사를 제가 봤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이 먹을수록 고백성사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줄어듭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닌데 지나고 나면 뭔 죄를 지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큰 이유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제일 큰 이유는 아닙니다. 제일 큰 이유는 망각도 죄의식의 상실도 아니고, 새로움의 의지 없음이고 현재의 안정(安定)에 안주(安住)하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지금 제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안정을 살고 있습니다. 저는 사랑할 자유를 마음껏 향유하고 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사랑만 해도 되고, 사랑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저의 삶은 참 행복한 삶입니다. 그리고 그렇지 못하거나 그럴 수 없는 분들에게 미안할 정도입니다.
사실 저에게 새 포도주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새로울 것은 없습니다. 설사 새로운 것이 있어도 그것이 들어올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 제 안에 들어와 저를 차지하고 있는 분과 것들이 있고, 그렇기에 새로운 것들에 그 자리를 내주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다시 말해서 새로운 분은 아니지만 새로운 하느님을 맞이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의 마음과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똑같은 하루이지만 새로운 마음과 눈으로 하루를 맞이하면 그것이 새날이고, 똑같은 사람을 만나지만 새로운 마음과 눈으로 맞이하면 그가 새삼스럽듯 변함이 없으신 하느님이지만 새로운 마음과 눈으로 뵈면 새로운 하느님입니다. 똑같은 하느님 사랑이지만 새로운 마음으로 사랑하면 그 마음이 새 부대 아닐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단식을 왜 하는가?
‘단식’은 요나의 재앙 경고를 들은 니네베 왕이 단식을 선포하고 회개한 것처럼,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느님 앞에서 교만을 내려놓는 행위로 했습니다.
또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전에, 그리고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단식하신 것처럼, 중대한 사명을 시작할 때 유혹을 이겨내고 영적으로 무장하기 위해 했습니다.
또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판관 20,26-28), 회개의 표시로(요엘 2,12), 죽은 이를 위한 애도의 표시로(2사무 7,6), 사도의 임명이나 파견하기 위해서도 했습니다(사도 13,2-3;14,23).
그리고 예수님 당시의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레위기>(16,34)에 따라, 구약의 속죄일을 지키기 위해서 했습니다. 곧 잘못을 벗고 정결해지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단식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한 바리사이들은 신심행위로 1주일에 두 번씩(월, 목) 단식했습니다.
(한편, 이사야 예언자는 이웃 사랑과 정의 실천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이사 58,6-7)으로, 예수님께서는 위선자의 침통한 표정이 아닌 하느님 앞에서의 진실 된 마음을 ‘단식할 때의 바른 자세’(마태 6,17-18)로 강조하셨습니다.)
결국, ‘단식’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낮추고 오직 하느님께만 집중하겠다는 강력한 영적 표현이요, 내면을 정화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은밀하고도 기쁜 영적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영적으로 동참하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단식논쟁을 통해서, ‘새로운 때’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십니다. 곧 <독서>에서 아모스가 예언한 “그날”이 온 것입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말합니다.
“그날에 나는,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리라. ~보라 그날이 온다. ~모든 언덕에서 세 포도주가 흘러넘치리라.”(아모 9,11-13)
“그날”, 바로 ‘신랑이 와 있는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그러니 단지 ‘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때’를 몰고 온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혀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마태 9,15)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하지 않는 이유를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이기 때문이라고 밝히시면서, 당신 자신을 ‘신랑’이라고 밝히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의 비유’(마태 22,1-14)와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에서 당신 자신을 ‘신랑’으로 암시하셨고,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이라고 칭하기도 했습니다(요한 3,29).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새 천”과 “새 포도주”에 비유하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 9,16-17)
이제는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새 부대’는 새 시대를 살아가는 ‘변화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새 포도주’를 담을 ‘변화된 삶’이 필요함을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는 말씀하고 덧붙이십니다. 그러니 이 비유는 ‘새것’과 ‘묵은 것’의 부조화를 강조하면서 마치 유다이즘과 그리스도교 사이의 비연계성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 9,17)는 말씀을 통해, ‘묵은 것’을 잃기를 원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묵은 것’이 ‘새것’에 의해서 보존된다는 것을 제시해 줍니다. 곧 당신 안에서 모든 것이 온전히 완성됨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임과 동시에 우리를 완성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로지 당신 안에 머물게 하소서! 당신이 저의 전부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오복음 9장 14절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주님! 저를 결박하는 마음 속 생각을 멈추고(단식하고) 당신의 뜻 따르게 하소서.
몸으로는 단식하면서도 마음은 다투고 주먹질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선물인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식(폭식)하지 않고 어놓음으로 당신의 생명이 퍼져가게 하소서.
제 자신 섬기기를 멈추고 당신을 주인으로 섬기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단식은 잃어버린 신랑을 되찾는 일이다.
오늘 복음에는 불편한 시비가 하나 등장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따지듯 묻습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자주 단식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 9,14 참조)
이 물음을 가만히 뜯어보면, 겉은 순수한 신학적 질문 같지만 속에는 독한 교만이 배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굶어 가며 법을 지키는데, 저 먹고 마시는 무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저들과 수준이 다르다.' 곧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선민의식입니다. 오
늘 우리라고 다르겠습니까. 금육재를 지키고 사순 절식을 하면서 속으로 은근히 목에 힘을 줍니다. '나는 금요일에 고기도 끊고 미사도 빠지지 않는데, 저 냉담자들은 왜 저 모양인가.' 자기를 거룩한 예외로 여기며 남을 판단하는 그 마음, 그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낡은 가죽 부대의 냄새입니다.
이 교만한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단식의 본질을 통째로 뒤집는 대답을 던지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온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참조)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내가 얼마나 거룩한지 보여 주는 훈장'에서, '신랑을 빼앗겼을 때의 몸부림'으로 완전히 옮겨 놓으십니다. 단식은 과시가 아닙니다. 단식은 내 영혼의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잃어버렸을 때, 그분을 되찾으려는 처절한 갈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쩌다 신랑을 빼앗깁니까. 내 마음이라는 부대 안에 세상의 쾌락과 자존심과 탐욕을 꽉꽉 채워 넣었기 때문입니다. 신랑이 들어오실 자리가 한 뼘도 남지 않으니, 그분이 튕겨 나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단식이란, 신랑을 다시 모시기 위해 내 안에 쌓인 것들을 비워 내는 일입니다.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요괴 가오나시를 떠올려 보십시오. 본래 형체도 목소리도 희미하던 이 요괴는, 소녀의 사랑을 얻으려 온천장의 탐욕을 이용해 사람과 음식을 마구 집어삼키며 집채만 한 괴물로 부풀어 오릅니다. 그러고는 금덩이를 내밀며 구애하지만, 소녀는 단호히 거절합니다.
"내가 원하는 건 네가 절대 줄 수 없어."
사랑을 빼앗겼다고 느낀 가오나시는 폭주하며 모든 것을 부숩니다. 이때 소녀가 그를 구원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쓴 경단을 억지로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삼킨 가오나시는 몸부림치며 집어삼켰던 모든 것을 토해 내고, 다시 본래의 작고 얌전한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텅 빈 그 모습이 되어서야 비로소 평온을 찾습니다.
이것이 신랑을 빼앗긴 자가 겪어야 할 단식입니다. 우리도 세상의 금덩이와 인정을 삼키며 자아를 거대하게 불려 왔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오물로 부푼 괴물 곁에 머무시지 않습니다. 신랑을 되찾는 길은, 쓴 경단 같은 십자가의 단식으로 그 찌꺼기를 전부 토해 내는 것뿐입니다.
성경에서 이 단식의 본질을 가장 뼈저리게 보여 준 이가 다윗입니다. 그는 밧 세바를 범하고 충신 우리야를 죽이는 큰 죄를 지었고, 그 죄의 열매로 태어난 아이가 병들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왕의 체면을 모두 벗어던지고 맨바닥에 엎드려 식음을 끊고 단식합니다. 신하들이 일으켜 세우려 해도 듣지 않습니다.
그의 단식은 거룩함을 보이려는 쇼가 아니라, 죄로 인해 신랑이신 주님의 은총을 빼앗긴 영혼의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끝내 숨지자, 다윗은 훌훌 털고 일어나 몸을 씻고 음식을 먹습니다. 의아해하는 신하들에게 그는 말합니다.
"아이가 살아 있을 때 단식하며 운 것은, 주님께서 혹시 나를 가엾이 여기시어 아이를 살려 주실지도 모른다 여겼기 때문이오."(2사무 12,22 참조)
보십시오. 다윗의 단식은 제 뜻을 관철하려는 투쟁이 아니라, 빼앗긴 주님의 자비에 매달려 자기를 온전히 그분 처분에 내맡기는 순명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이 정해지자 그는 미련 없이 단식을 멈춘 것입니다.
구약은 이 진실을 나라 전체의 이야기로도 들려줍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이라는 신랑을 저버리고 우상과 탐욕으로 제 부대를 채웠을 때, 예언자 요엘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제라도 너희는 마음을 다하여,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며 나에게 돌아오라."(요엘 2,12 참조)
단식은 곧 돌아옴이었습니다. 빼앗긴 신랑께로 방향을 되돌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단식하면서도 마음이 돌아서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가포식 없이 굶기만 하는 헛수고일 뿐입니다.
내 마음은 새 부대입니까, 낡은 부대입니까. 성당에 나와서도 남을 평가하고, 알아주지 않으면 분노하며, 내 기도와 희생을 청구서처럼 내민다면, 우리는 아직 바리사이의 낡은 부대를 껴안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늘 메마르고 불평만 가득하다면, 그것은 이미 삶에서 신랑을 빼앗겼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단식은 다이어트가 아닙니다. 단식은 내 영혼을 좀먹는 예외 의식을 도려내는 수술이며, 가오나시처럼 삼킨 세상의 오물을 토해 내어 신랑이 머무실 방을 닦는 거룩한 노동입니다. 오늘 성체성사 앞에 나아가며 이렇게 청합시다.
"주님, 제 안의 세상 것들을 철저히 비워 내오니, 오직 신랑이신 당신 하나로 이 텅 빈 부대를 가득 채워 주십시오."
이렇게 비움의 단식으로 잃어버린 신랑을 되찾아, 참된 기쁨과 구원을 누리는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10만 원짜리 티셔츠를 새봄맞이 세일이라면서, 3만 원에 팔고 있습니다. 자그마치 70% 대할인이라는 말에 관심을 두고 살펴보았지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가려고 하는데, 주인이 다가오더니 조용히 말하는 것입니다.
“손님에게는 특별히 2만 원에 드릴게요.”
솔깃한 마음에 10만 원짜리를 2만 원에 샀습니다. 이득일까요? 계산적으로는 이득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가치로 따졌을 때는 오히려 2만 원 손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막상 입으려고 하니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티셔츠는 옷장에 고이 모셔두게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입을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만 간직한 채 말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어떤 이득을 따져야 할까요? 가격적인 이득이 아닙니다. 아마 대형 상점에서 1+1 행사라는 말에 무작정 카트 안에 물건을 넣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가격적 이득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후회한 적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가치에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에 세속적인 이득을 따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나 봉사 그리고 희생이 자기에게 무슨 이득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속적인 가치를 통해서는 제대로 알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은 더 커다란 가치를 가지십니다. 우리의 구원이라는 가치, 지금을 더 기쁘게 살 수 있는 힘을 받는 진정한 가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과 함께 단식 논쟁을 하십니다. 단식은 하느님을 향한 경건함과 회개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종교적 의무인데, 먹고 마시며 세리나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불경스러워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랑과 혼인 잔치 이야기를 하시면서 지금은 슬퍼하며 단식할 때가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가장 기쁜 축제임을 선언하십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에 이어, 일상적인 생활의 지혜를 빌려 당신 복음이 가진 본질적인 새로움을 강조하십니다. 세탁하지 않은 새 천 조각을 낡은 옷에 대고 꿰매면, 새 천이 줄어들면서 낡은 천을 당겨 옷이 더 심하게 찢어집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복음은 기존 율법을 적당히 수선하거나 땜질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닌, 완전히 새롭고 생명력 넘치는 구원의 길임을 이야기하십니다.
또 갓 짜낸 새 포도주는 발효하면서 엄청난 가스를 뿜어내고 팽창합니다. 낡은 가죽 부대는 이 팽창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린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과 생명력 넘치는 복음의 기쁨을 제대로 담기 위해서는 과거의 편견, 아집, 굳어버린 습관에서 벗어나야 함을 이야기하십니다.
주님의 초대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을까요? 낡은 가죽 부대가 아니라, 새로운 주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새 부대의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은 다 하느님께로부터 온 사람이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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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