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라는 말씀이 참 따뜻하게 들려요.
잘 보이려고 애쓸 필요도, 괜찮은 척할 필요도 없이 당신 앞에서는 그냥 저로 있어도 된다는 사실이 참 다행이에요.
하루 중 잠시라도 저만의 무화과나무 아래에 머물며, 제가 주님을 찾기 전부터 먼저 저를 바라보고 계셨던 당신의 시선을 만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심에 감사합니다.

2026년 8월 24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여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8월 24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제1독서
묵시 21,9ㄴ-14

그 초석들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천사가 나에게
9 말하였습니다. “이리 오너라. 어린양의 아내가 될 신부를 너에게 보여 주겠다.”
10 이어서 그 천사는 성령께 사로잡힌 나를 크고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서는,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11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
12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두 성문이 있었습니다. 그 열두 성문에는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13 동쪽에 성문이 셋, 북쪽에 성문이 셋, 남쪽에 성문이 셋, 서쪽에 성문이 셋 있었습니다.
14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복음 말씀 전체 보기
요한 1,45-51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그때에
45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46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7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8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49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50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51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지금 바로 보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말씀을 따라가 보세요.

2026년 8월 24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성 바르톨로메오 소개 00:06
✚ 미사 시작 01:10
✚ 제1독서 05:14
✚ 복음 08:38
✚ 강론 10:53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말씀 묵상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유청 안셀모 신부
주님을 찾는 마음만큼은 진짜이고 싶습니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정말 거짓 없이 살 수 있을까요? 남에게 보일 수 없고 나만 알고 있어야 하는 사정들이 있을 테고, 또 나의 모습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때로는 가면을 쓰고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의 어떤 모습을 보시고 거짓이 없는 이라고 하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나타나엘을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화과나무 아래는 하느님 말씀과 율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곳, 조용한 가운데 하느님을 찾는 장소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알고 싶어 하고,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나타나엘의 마음에 거짓이 없다는 뜻이 아니었을까요? 다른 이유 때문에, 또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자 하느님을 찾고 따르는 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느님을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 하며, 가까이 가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거짓 없는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하느님을 찾는 마음만큼은 거짓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거짓 없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려면 우리에게도 무화과나무 아래와 같은, 조용한 시간과 장소가 필요합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45],11)라는 말씀처럼 하느님을 만나려면 잠시 멈추어야 합니다.
기도와 묵상과 휴식은 거짓된 마음에서 나를 해방시켜 줄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당신을 만나고자 하는지 하느님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그렇게 주님과 만났을 때 우리도 나타나엘처럼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라는 말을 들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똥고집은 없고 좋은 고집은 있는
오늘 축일의 주인공인 바르톨로메오/나타나엘은 예수님에 관해 편견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이것은 그도 본래는 다른 율법 학자들과 마찬가지였다는 표시입니다. 그 당시 율법 학자들은 나자렛에서 메시아가 나올 리 없다고 믿었고, 지금도 많은 유대인은 이렇게 믿고 있기에 계속 유대교를 믿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가 주님의 제자가 되었던 것은 다른 율법 학자들과 달랐기 때문이고 그래서 오늘 주님도 그를 이렇게 칭찬합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주님께서 나타나엘이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고, 거짓이 없기 때문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이 제게는 인정할 것은 솔직히 인정할 줄 안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우리 가운데 똥고집 부리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잖습니까? 한번 자기가 내뱉은 말이 틀린 줄 나중에 알면서도 끝까지 고집하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메시아가 나올 리 없다고 말했지만 즉시 자기 말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것이요, 과오를 인정함으로써 새로운 미래에 열려있는 것이고, 자기를 고집하지 않음으로써 하늘에 열려있는 겁니다. 과오(過誤)란 풀어 말하면 과거의 오류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오류를 인정치 않고 계속 고집하면 그것은 과거의 연장일 뿐 아니라 오류의 연장입니다. 어쨌거나 나타나엘은 과거를 고집하지 않았기에 새로운 미래에 열려있었고, 자기를 고집지 않았기에 하느님께 열려있었으며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수 있었지요.
그런데 우리도 나타나엘을 본받으려면 알아야 합니다. 과오를 미래에 되풀이하지 않고 하늘에 열려있으려면 나타나엘처럼 과오를 즉시 그리고 겸손히 인정해야 함을 말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우리에게는 이것이 어려운 것이고, 옛날의 자기 생각과 믿음이 계속 옳다고 하는 건데 이것을 똥고집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똥고집이라는 말이 있음은 좋은 고집도 있다는 말인데 이 축일을 기해서 나타나엘처럼 똥고집은 버리고 좋은 고집을 지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진정한 만남은 변화를 가져온다.
오늘 우리는 바르톨로메오라고 여겨지는 나타나엘의 신앙고백과 증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증언하지 않고는 못 베기게 만들었을까?
오늘 <복음>은 ‘만남의 신비’ 안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나타나엘은 필립보로부터 예수님께 대한 증언을 듣고서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라고 말하며, 필립보의 증언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핀잔을 주었지만, 그는 “와서 보시오.”(요한 1,46) 라고 확신에 찬 초대를 합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나타나엘을 만나기 전부터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신적인 전지함에 압도당한 나타나엘이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요한 1,48) 하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요한 1,48)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나타나엘에게는 예수님께 대한 모든 의혹과 편견이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홀연히 믿음과 감격이 솟구쳤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대체 이 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바로 여기에 ‘만남의 신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보았다’는 표현은 단순히 필립보가 부르기도 전에 너를 보고 ‘알았다’는 예지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당신께서 주목하고 있었다.’는 의지적인 측면, 곧‘ 사랑’을 드러내줍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바라봄’입니다. 사랑하면 자꾸 바라보게 되는 거죠. 눈을 뗄 수가 없게 되는 거죠. 바로 지금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바라보고 계신 거죠. 우리가 예수님의 이 ‘사랑스런 바라봄’을 받아들인다면, 지금 우리에게도 모든 의혹과 편견이 사라질 것입니다. 곧 우리를 관상하고 계시는 그분을 관상하게 되면, 믿음과 감격이 샘솟을 것입니다. ‘관상’, 그것은 ‘사랑의 바라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로 이 순간, 나타나엘은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보았던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고 계신 그분의 눈동자 안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사랑받는 존재’임을 보았던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이 자신을 온전히 아시는 구원자요 주님임을 보았습니다.
마침내, 나타나엘은 자신의 메시아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분께 대한 믿음은 마침내 신앙고백으로 흘러나오게 됩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 1,49)
이렇게 해서, ‘대전환’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만남의 신비’가 가져온 결과였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고 빈정거리던 그에게 ‘대역전’이 발생한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를 전복시킨 것입니다. 이처럼,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바로 ‘만남의 신비’입니다.
심리학자 융은 말합니다.
“두 개성의 만남은 두 화합물질의 만남과 같다. 반응이 이루어지면 둘은 변한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만남은 변화를 가져온다.’는 신비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과의 ‘거룩한 만남의 신비’를 통하여, 당신 ‘사랑’을 퍼부으십니다. 그 사랑으로 하여, 우리를 증언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고, 고백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이제 ‘우리들 사이의 만남 안’에서도, ‘예수님과의 거룩한 만남의 신비’를 담아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1장 51절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주님! 제 마음에 울려오는 하늘의 이야기를 듣게 하소서.
우리 안에 펼쳐놓은 당신의 사랑을 만나게 하소서.
우리의 만남에서 하늘이 열리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 땅이 당신이 여시는 하늘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와서 보시오.
AI의 영역은 정말로 무궁무진합니다. 못 하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선배 신부님이 노래 하나를 만들었다면서 들려줬습니다. 너무나 훌륭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선배 신부님은 악기 하나 다루지 못하는, 음악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만들었냐고 하니, 자기가 직접 지은 가사를 적어주고 ‘생활 성가 풍으로 만들어줘.’라고 AI에 명령을 내리면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음악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도 훌륭한 음악을 만들 수 있게 합니다.
시험을 굳이 볼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교과서에 적힌 내용을 시험지에 재현하는 일은 AI가 더 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I는 결과물만 훌륭하게 낼 뿐, 그 과정은 없습니다. 결국 번거롭고 시간 걸리는 탐구는 오직 사람만이 누리는 특권이 될 것입니다.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독보적인 창의력을 가진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누구는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공부를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공부로 얻은 지식보다 공부하는 과정에서 길러진 능력이 훗날 훨씬 폭넓게 쓰인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요즘에는 시험 성적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교과서는 설명 부족한 사전과 같습니다. 즉, 교과서는 제대로 된 책이 아닌, 학교 시험이란 교과서라는 사전에 실린 정답과 맞추는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되면, 정답, 오답이 있다는 편협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점점 발전하는 이 세상에서 폭넓은 사고의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그냥 자기 삶의 결과만을 생각하면, 주님과의 관계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원하는 삶만을 지향하면, 기도하고 전례에 참석하는 그 모든 일들이 무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시간 낭비인 것 같다면서 주님과의 관계 맺음을 멀리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따라서 주님과의 관계를 제대로 맺기 위해서는 세상의 선입견에 갇히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오늘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서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그러나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라며 부정적인 생각을 표현합니다. 갈릴래아의 작은 벽촌이었던 나자렛에 대한 세간의 평판, 그리고 메시아가 유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리라는 성경적 기대에서 비롯한 솔직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필립보는 “와서 보시오.”(요한 1,46)라고 하지요.
예수님께서도 제자를 부르실 때, “와서 보아라.”(요한 1,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은 이론적 설득이 아닌, 주님과의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시작됨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찾아가 만남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가 바로 우리가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바르톨로메오입니다.
만일 바르톨로메오가 자기의 선입견에 갇혀있었다면 예수님을 만나러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세속적인 선입견에서 벗어나 열린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러 가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자기 자신을 믿어라.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요한 울프강 폰 괴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거짓이 없는 마음에서 참된 만남은 시작됩니다.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내어놓을 때 주님과의 만남은 참된 체험이 됩니다. 만남은 체험을 낳고, 체험은 만남을 더 깊은 관계로 변화시킵니다. 진리는 설명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진리는 우리에게 체험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머리로 아는 진리를 삶으로 체험하게 합니다. 참된 만남은 상대를 바꾸기 전에 먼저 우리의 시선을 변화시킵니다. 나타나엘이 예수님을 알아보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나타나엘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영적인 삶의 시작은 내가 하느님을 찾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먼저 나를 바라보고 계심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알고 계시고, 바라보고 계시며, 지금도 만나고 계신다는 사실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참된 영적 체험은 언제나 관계를 깊게 합니다. 더 많이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비워 하느님께서 일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영적인 삶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믿고 맡기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을 현재의 모습에 가두지 않으십니다.
“너는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참된 만남을 통해 우리의 삶은 깊어지고 새롭게 변화됩니다.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우리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삶이 열립니다. 하늘을 찾는 사람에게 마침내 하늘이 열립니다. 참된 영적 체험은 하느님을 만나 하느님의 사랑으로 다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참된 만남은 우리의 거짓을 벗겨 내고 참된 나를 만나게 하며, 마침내 우리의 삶 안에 하늘을 열어 줍니다. 하느님의 사랑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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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 6가지
마음에 머무른 한 말씀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지금 이 순간을 빚어 갑니다. 오늘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의 모든 순간에 천천히 스며들면 좋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