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가 중고로 혼다 닥스 오토바이를 샀어요. 상태가 아주 좋은데, 전 주인의 아내가 남편이 오토바이를 타다가 다칠까 봐 너무 싫어해서 팔았다고 해요.
이 오토바이를 처음 봤을 때는 엉뚱하게도, 머리가 큰 오빠에게 맞는 헬멧 찾기가 어려울 텐데 헬멧은 어떻게 구하려나 생각했습니다. ㅎㅎㅎ

그러다 문득 이 오토바이를 그려보고 싶어졌어요. 요즘 취미로 어반 드로잉 스케치를 시작했거든요. 그림을 그리려고 사진을 오래 바라보다 보니, 그냥 지나쳤던 것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는 게 신기했어요. 전에는 안 보이던 게 보이더라고요.
달릴 수 있지만
지금은 달리지 않는
오토바이
달릴 수 있는 오토바이가 바다 앞에 멈춰 있습니다. 그 뒤에서는 파도가 계속 밀려오고 바람이 불고 구름이 움직입니다.
멈추었는데도
세상은 움직이고 있어요

멈추어도
파도는
계속 밀려옵니다
어쩌면 쉼이라는 것은 잠시 멈추었을 때 세상이 계속 움직이고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이 아닐까 싶어요. 달려 나가지 않아도 파도는 오고, 바람은 불고, 하늘은 움직이니까요.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 (시편 46,11)
오늘은 붙잡고 있던 것을 잠시 내려놓고 싶어요. 멈추어도 세상을 움직이시는 분은 따로 계시니까요.
핸들을 바라보다
방향을 생각합니다

잘 달리는 것보다
어디로 가는지가
먼저입니다
오토바이는 어디든 갈 수 있어요. 하지만 스스로 목적지를 정하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엔진이어도 누군가 핸들을 잡고 방향을 정해야 하니까요.
인간이 마음으로 앞길을 계획하여도 그의 발걸음을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잠언 16,9)
요즘은 서두르기만 하고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잊곤 합니다. 그래서인지 바다 앞에 멈춘 오토바이가 잠시 방향을 살피는 것처럼 보여요. 서두르기 전에 가야 할 길을 바라보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파도 너머
작은 빨간 등대를 발견했어요

넓은 바다에서
자꾸 눈이 가는 곳이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며 바다 쪽으로 시선을 옮기다 보니 멀리 작은 빨간 등대가 눈에 들어왔어요. 넓은 바다와 거센 파도에 비하면 아주 작게 보이지만, 발견하고 나니 자꾸 그곳으로 눈이 가요.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시편 27,1)
모든 파도를 잠재워 주지는 않더라도, 파도 속에서 바라볼 곳을 잃지 않게 도와주심에 감사합니다.
오토바이를 붙들고 있는
작은 킥스탠드

무거운 것을 붙드는 건
의외로
작은 것이었습니다
오토바이를 그리며 아래쪽으로 시선을 옮기다 킥스탠드를 발견했어요. 무거운 오토바이를 세우고 있는 것은 거대한 무엇이 아니라 작은 받침이었습니다. 사진으로 볼 때는 눈여겨보지 못했는데, 그리려고 오래 바라보니 비로소 보이더라고요.
주님께서는 사람의 발걸음을 굳건히 하시며 그의 길을 마음에 들어 하시리라. 그는 비틀거려도 쓰러지지 않으리니 주님께서 그의 손을 잡아 주시기 때문이다. (시편 37,23-24)
잠깐 긋는 성호경,
우연히 마음에 남은 말씀 한 구절,
매일 반복하는 작은 습관 하나,
별것 아닌 것처럼 지나쳤지만
멈추고 보니 알게 됩니다.
‘아, 이런 것들이 붙들어 주고 있었구나.’
사진 속 작은 킥스탠드처럼요.
다시 달리기 전에
바라봅니다

달리는 동안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
사진 속 오토바이는 지금 바다 앞에 멈추어 있지만 언젠가 다시 출발하겠지요. 오토바이를 그리며 새롭게 보였던 것들을 떠올려 봅니다.
멈추었기에
파도를 바라보았고,
멈추었기에
방향을 생각했고,
멈추었기에
작은 등대를 발견했고,
멈추었기에
오토바이를 붙들어 주는
킥스탠드가 보였어요.
제 눈을 열어 주소서. 당신 가르침의 기적들을 제가 바라보오리다. (시편 119,18)
지금 필요한 멈춤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달리는 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다시 보기 위해 멈추는 것.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무엇을 바라보는지.
그리고 지금까지
무엇이 붙들어 주고 있는지.
오늘은 조금 덜 달리며 바라보고 싶어요. 잠시 멈춘다고 세상이 멈추는 것은 아니니까요.
파도는 여전히 오고,
바람은 불고,
하늘은 움직입니다.
그리기 위해 멈추었더니
비로소 보였습니다
그리기 전에는 보지 못했어요.
그리기 위해 멈추었고, 멈추었기에 조금 더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오토바이를 오래 바라보니 사진 속 풍경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보여요.
지금 이 자리에서 이끌고 붙들어 주시는 당신을 발견하게 하심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