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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7일 남자세례명 22가지

피어나네 2023. 3. 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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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7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가우디오소, 드라우시오, 레보카토, 바실리오, 바오로 (주교), 바오로 (은수자), 사투로, 사투르니노, 세쿤둘로, 아가토도로, 아르도, 에오스터와인, 에우불로, 에우제니오, 에테리오, 에프렘, 엘피디오, 요한 라크, 요한 아일랜드, 제르마노 가디너, 카피톤, 테오필로, 총 22분 목록이에요.

 

3월 7일이 영명축일인 남자세례명은 어떤 이름이 좋을까요?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천주교 세례명 상세정보로 이동합니다. 어울리는 세례명을 지금 바로 찾아보세요.

 

3월 7일 여자세례명 페르페투아, 펠리치타, 총 2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3월 7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22가지

 

 

 

 

3월 7일 남자세례명 목록

 

  1. 가우디오소

  2. 드라우시오

  3. 레보카토

  4. 바실리오

  5. 바오로 (주교)

  6. 바오로 (은수자)

  7. 사투로

  8. 사투르니노

  9. 세쿤둘로

  10. 아가토도로

  11. 아르도

  12. 에오스터와인

  13. 에우불로

  14. 에우제니오

  15. 에테리오

  16. 에프렘

  17. 엘피디오

  18. 요한 라크

  19. 요한 아일랜드

  20. 제르마노 가디너

  21. 카피톤

  22. 테오필로

 

3월 7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22가지

 

 

1. 가우디오소

 

  • 가톨릭 성인 이름
    Gaudios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445년 브레시아

 

 

가우디오소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우디오수스.

 

 

가우디오소 자료

성 가우디오수스(또는 가우디오소)는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 브레시아의 주교였다. 그의 유해는 그곳에 안치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드라우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Draus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76년경 수아송

 

 

드라우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드라우시노, 드라우시누스, 드라우시우스, 드라우신.

 

 

드라우시오 자료

현재 파리(Paris)의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 중인 보물 가운데 하나로 로마제국 시대의 아름다운 석관이 있는데, 이것이 성 드라우시우스(또는 드라우시오)의 무덤이 틀림없다고 한다. 그는 프랑스 수아송의 주교인 성 안세리쿠스(Ansericus)로부터 교육을 받았고, 그를 계승하여 수아송의 주교가 되었다. 성 드라우시우스는 역대 주교들 가운데 가장 열심하였고, 설교와 교육을 통하여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증거했던 비범한 인물이었다. 그는 일생동안 단식으로 일관하여 노령에는 병을 얻기도 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만두지 않고 오히려 자발적인 고행을 하여 높은 성덕을 쌓았다. 또 그는 관할교구 내에 수많은 성당과 수도원을 세웠고, 644년에는 수아송의 노트르담(Notre-Dame) 성당을 완공하였다. 그의 성덕은 멀리 영국에까지 알려졌는데, 캔터베리(Canterbury)의 성 토마스 베케트(Thomas Becket, 12월 29일)는 자신이 예견하던 영국에서의 순교를 앞두고 성 드라우시우스에 대한 설교를 할 정도였다. 그는 드라우신(Drausin) 또는 드라우시누스(Drausin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레보카토

 

  • 가톨릭 성인 이름
    Revoca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03년 카르타고

 

 

레보카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레보까또, 레보까뚜스, 레보카또, 레보카뚜스, 레보카투스.

 

 

레보카토 자료

성녀 페르페투아(Perpetua)와 성녀 펠리치타(Felicitas) 그리고 네 명의 동료 순교자 이야기는 초기 순교자들의 전기 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이고 인상적이다. 특히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의 수난기”(Passio SS. Perpetuae et Felicitatis)는 성녀 페르페투아와 그녀의 하녀였던 성녀 펠리치타의 순교에 관한 가장 신뢰할 만한 기록으로 히포(Hippo)의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8월 28일)도 이 수난기를 자주 인용하였다. 이 수난기의 내용은 성녀 페르페투아가 감옥에 갇혀 경험한 것을 직접 적은 기록과 다른 순교자들이 기록한 것을 모아 하나의 전기로 완성되었다.

그에 따르면 당시 로마 제국의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는 칙령을 반포하여 제국 내의 모든 백성이 그리스도인 되는 것을 금지하고, 이에 불응하면 혹독하게 처벌하였다. 그로 인해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진 203년, 귀족 가문의 딸로서 어린 아들을 둔 22살의 어머니였던 성녀 페르페투아와 그녀의 하녀로 임신 8개월이었던 성녀 펠리치타는 예비신자로서 교리를 배우는 중이었다. 그들 외에도 성 레보카투스(또는 레보카토),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성 세쿤둘루스(Secundulus)가 성 사투루스(Saturus)에게 교리를 배우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성녀 페르페투아는 자신과 동료들이 갇힌 감옥의 무서운 분위기와 그들이 느낀 두려움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성녀 페르페투아의 아버지는 아직 세례받지 않은 딸의 배교를 권유하기 위해 감옥까지 와서 설득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성녀 페르페투아와 성녀 펠리치타를 비롯한 다른 동료들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감옥 안에서 몰래 세례를 받았다. 그즈음 성녀 페르페투아는 감옥에서 환시를 경험했는데, 용과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사다리를 올라가 푸른 풀밭에서 양들이 풀을 뜯고 있는 아름다운 곳에 이르는 내용이었다. 성녀 페르페투아는 이 환시를 통해 순교가 가까웠음을 깨달았다. 재판 날이 다가오자 그녀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감옥으로 데려와 보여주며 눈물로써 거듭 설득했으나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혈육의 정까지 끊고 신앙을 지키고자 한 성녀 페르페투아와 동료들은 로마 황제를 위해 원형 경기장에서 열리는 축제 중에 맹수의 먹이로 던져질 것이라는 판결을 받았다.

한편 성녀 펠리치타는 다른 동료들과 같은 감옥에 갇히지는 않았다. 이는 임신한 여인을 처형하는 것이 법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고자 했던 성녀 펠리치타는 출산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고, 엄청난 산고를 겪은 후 감옥 안에서 여자아이를 조산하였다. 아기가 다른 그리스도인 여인에게 입양되어 그녀 또한 동료들과 함께 처형장으로 갈 수 있었다. 함께 갇혔던 동료 중에서 성 세쿤둘루스는 고문과 매질의 후유증으로 감옥 안에서 순교하였고, 나머지는 매질을 당한 후 “그리스도의 신부답게, 하느님의 귀여운 자녀답게” 원형 경기장으로 끌려갔다. 먼저 성녀 페르페투아가 황소에 받혀 허공에 떴다가 떨어진 후 다시 일어났고, 성녀 펠리치타가 땅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달려가서 부축해 일으켜 세워주었다. 성 사투루스는 표범에게 던져져 피가 낭자했지만 죽지는 않았다. 결국 성녀 페르페투아와 동료들은 참수될 장소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그들은 평화의 예식으로 서로 입을 맞춘 뒤 성 사투루스부터 차례대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순교 직전 성녀 페르페투아는 또 다른 환시를 보았는데, 어릴 때 병으로 죽은 막내 동생이 천국에서 그녀를 따라 기도하는 모습이었다.

성녀 페르페투아와 성녀 펠리치타는 4세기경부터 3월 7일에 로마에서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았고, 파스카 성야의 성인 호칭 기도문에도 추가되었다. 일찍부터 로마 전례력과 시리아 전례력에 수록되어 공경을 받아온 성녀 페르페투아와 성녀 펠리치타는 로마 미사 경본 감사기도 제1양식(로마 전문)에서 기억하는 7명의 성녀에도 포함되어 큰 공경을 받았다. 두 성녀는 그들 이름의 뜻대로 순교를 통해 주님 안에서 ‘영원한’(페르페투아) ‘행복’(펠리치타)에 이른 것이다. 성녀 페르페투아의 유해는 5세기에 로마로, 9세기에 프랑스의 한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10세기에 수도원이 노르만인들에게 약탈당한 후 다시 비에르종(Vierzon)으로 옮겨졌고, 19세기 초에 비에르종의 노트르담 대성당에 모신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녀 페르페투아와 성녀 펠리치타의 축일은 한동안 옛 “로마 순교록”에서 3월 6일로 옮겨 기념했으나, 1969년 전례력 개정과 함께 순교한 날인 3월 7일로 복원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역시 3월 7일에 두 성녀와 동료들의 순교를 함께 기념하고 있다. 동방 정교회는 그들의 축일은 2월 1일에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바실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Basil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 헤르손

 

 

바실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실리우스.

 

 

바실리오 자료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5세기 이후부터 타우리카 케르소네소스(Taurica Chersonesos, ‘타우리카 반도’라는 뜻)라고 부르는 곳에 여러 개의 식민 도시를 건설했는데, 오늘날 우크라이나 남쪽 흑해로 돌출해 있는 크림반도의 케르소네소스가 대표적 항구도시였다. 오늘날 이곳은 우크라이나의 항구도시인 헤르손인데, 2014년 러시아가 무력을 통해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하면서 현재 러시아 영토가 됐지만, 국제사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로마 제국 시대에 이곳은 종종 죄인들의 유배지로 사용되었는데,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 때 신자들도 이곳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교황 성 클레멘스 1세(Clement I, 11월 23일)가 크림반도의 채석장으로 유배 와서 강제 노동에 시달리다가 목에 닻을 매단 채 흑해 바다로 던져져 순교한 역사가 있다. 그러면서 박해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이 지역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4세기 초에 케르소네소스에 주교좌가 설정되었고,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이 지역을 복음화하기 위해 많은 선교사를 파견했다.

그러면서 4세기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교도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순교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은 3월 4일 목록에서 순교 시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케르소네소스(크림반도)에서 사목하다가 순교한 거룩한 주교들로 성 바실리우스(Basilius, 또는 바실리오), 성 에우게니우스(Eugenius), 성 아가토도루스(Agathodorus), 성 엘피디우스(Elpidius), 성 아이테리우스(Aetherius), 성 카피톤(Capiton), 성 에프렘(Ephraem), 성 네스토르(Nestor), 성 아르카디우스(Arcadius)의 이름을 전해주었다. 전승에 따르면, 성 네스토르와 성 아르카디우스 주교는 크림반도가 아닌 키프로스(Cyprus)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케르소네소스에서 순교한 거룩한 주교들의 이름을 동방 정교회와 같은 날인 3월 7일로 옮겨서 기록하였다. 그리고 성 네스토르와 성 아르카디우스 주교의 이름을 3월 7일 목록에서 삭제했는데, 3월 4일이나 다른 날에도 더는 기록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바오로 (주교)

 

  • 가톨릭 성인 이름
    Paul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840년 펠루시움

 

 

바오로 (주교)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파울로, 파울루스, 폴.

 

 

바오로 (주교) 자료

성 바오로(Paulus)는 소아시아 북서부 비티니아(Bithynia) 지방 프루사(Prusa)의 주교였다. 그는 성상파괴주의자들에게 용맹하게 저항했기 때문에 이집트의 펠루시움으로 추방되어 죽을 때까지 돌아가지 못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바오로 (은수자)

 

  • 가톨릭 성인 이름
    Paul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40년경

 

 

바오로 (은수자)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파울로, 파울루스, 폴.

 

 

바오로 (은수자) 자료

일생동안 노동자 생활을 했던 성 바오로 심플렉스(Paulus Simplex, 바오로 단순한 사람)는 60세 때에야 비로소 불충실한 아내를 떠나 성 안토니우스(Antonius, 1월 17일)를 찾아 나섰다. 이때 안토니우스 성인은 이집트의 테베(Thebae, 나일 강 중류에 위치한 고대 이집트 신왕국시대의 수도로 오늘날의 룩소르 Luxor)에 있었다. 그의 나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성 안토니우스는 선뜻 제자로 받아주기를 꺼렸으나, 성 바오로의 항구심에 탄복한 나머지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성 안토니우스가 성 바오로에게 자신을 포기하는 엄격한 훈련을 시킨 결과, 성 바오로는 겸손과 열성 그리고 순종에서 뛰어난 덕행을 보였다. 그래서 성 안토니우스는 그를 위해 움막을 지어 주었다. 그는 치유의 은사를 받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도 있었으며, 수도자의 이상을 성 안토니우스에게 다시금 심어주었을 정도로 위대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의 순진무구한 마음 때문에 그는 '단순한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사투로

 

  • 가톨릭 성인 이름
    Satur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03년 카르타고

 

 

사투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사뚜로, 사뚜루스, 사띠로, 사띠루스, 사투루스, 사티로, 사티루스.

 

 

사투로 자료

성녀 페르페투아(Perpetua)와 성녀 펠리치타(Felicitas) 그리고 네 명의 동료 순교자 이야기는 초기 순교자들의 전기 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이고 인상적이다. 특히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의 수난기”(Passio SS. Perpetuae et Felicitatis)는 성녀 페르페투아와 그녀의 하녀였던 성녀 펠리치타의 순교에 관한 가장 신뢰할 만한 기록으로 히포(Hippo)의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8월 28일)도 이 수난기를 자주 인용하였다. 이 수난기의 내용은 성녀 페르페투아가 감옥에 갇혀 경험한 것을 직접 적은 기록과 다른 순교자들이 기록한 것을 모아 하나의 전기로 완성되었다.

그에 따르면 당시 로마 제국의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는 칙령을 반포하여 제국 내의 모든 백성이 그리스도인 되는 것을 금지하고, 이에 불응하면 혹독하게 처벌하였다. 그로 인해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진 203년, 귀족 가문의 딸로서 어린 아들을 둔 22살의 어머니였던 성녀 페르페투아와 그녀의 하녀로 임신 8개월이었던 성녀 펠리치타는 예비신자로서 교리를 배우는 중이었다. 그들 외에도 성 레보카투스(Revocatus),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성 세쿤둘루스(Secundulus)가 성 사투루스(또는 사투로)에게 교리를 배우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성녀 페르페투아는 자신과 동료들이 갇힌 감옥의 무서운 분위기와 그들이 느낀 두려움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성녀 페르페투아의 아버지는 아직 세례받지 않은 딸의 배교를 권유하기 위해 감옥까지 와서 설득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성녀 페르페투아와 성녀 펠리치타를 비롯한 다른 동료들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감옥 안에서 몰래 세례를 받았다. 그즈음 성녀 페르페투아는 감옥에서 환시를 경험했는데, 용과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사다리를 올라가 푸른 풀밭에서 양들이 풀을 뜯고 있는 아름다운 곳에 이르는 내용이었다. 성녀 페르페투아는 이 환시를 통해 순교가 가까웠음을 깨달았다. 재판 날이 다가오자 그녀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감옥으로 데려와 보여주며 눈물로써 거듭 설득했으나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혈육의 정까지 끊고 신앙을 지키고자 한 성녀 페르페투아와 동료들은 로마 황제를 위해 원형 경기장에서 열리는 축제 중에 맹수의 먹이로 던져질 것이라는 판결을 받았다.

한편 성녀 펠리치타는 다른 동료들과 같은 감옥에 갇히지는 않았다. 이는 임신한 여인을 처형하는 것이 법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고자 했던 성녀 펠리치타는 출산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고, 엄청난 산고를 겪은 후 감옥 안에서 여자아이를 조산하였다. 아기가 다른 그리스도인 여인에게 입양되어 그녀 또한 동료들과 함께 처형장으로 갈 수 있었다. 함께 갇혔던 동료 중에서 성 세쿤둘루스는 고문과 매질의 후유증으로 감옥 안에서 순교하였고, 나머지는 매질을 당한 후 “그리스도의 신부답게, 하느님의 귀여운 자녀답게” 원형 경기장으로 끌려갔다. 먼저 성녀 페르페투아가 황소에 받혀 허공에 떴다가 떨어진 후 다시 일어났고, 성녀 펠리치타가 땅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달려가서 부축해 일으켜 세워주었다. 성 사투루스는 표범에게 던져져 피가 낭자했지만 죽지는 않았다. 결국 성녀 페르페투아와 동료들은 참수될 장소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그들은 평화의 예식으로 서로 입을 맞춘 뒤 성 사투루스부터 차례대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순교 직전 성녀 페르페투아는 또 다른 환시를 보았는데, 어릴 때 병으로 죽은 막내 동생이 천국에서 그녀를 따라 기도하는 모습이었다.

성녀 페르페투아와 성녀 펠리치타는 4세기경부터 3월 7일에 로마에서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았고, 파스카 성야의 성인 호칭 기도문에도 추가되었다. 일찍부터 로마 전례력과 시리아 전례력에 수록되어 공경을 받아온 성녀 페르페투아와 성녀 펠리치타는 로마 미사 경본 감사기도 제1양식(로마 전문)에서 기억하는 7명의 성녀에도 포함되어 큰 공경을 받았다. 두 성녀는 그들 이름의 뜻대로 순교를 통해 주님 안에서 ‘영원한’(페르페투아) ‘행복’(펠리치타)에 이른 것이다. 성녀 페르페투아의 유해는 5세기에 로마로, 9세기에 프랑스의 한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10세기에 수도원이 노르만인들에게 약탈당한 후 다시 비에르종(Vierzon)으로 옮겨졌고, 19세기 초에 비에르종의 노트르담 대성당에 모신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녀 페르페투아와 성녀 펠리치타의 축일은 한동안 옛 “로마 순교록”에서 3월 6일로 옮겨 기념했으나, 1969년 전례력 개정과 함께 순교한 날인 3월 7일로 복원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역시 3월 7일에 두 성녀와 동료들의 순교를 함께 기념하고 있다. 동방 정교회는 그들의 축일은 2월 1일에 기념하고 있다. 성 사투루스는 사티루스(Satirus, Satyr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사투르니노

 

  • 가톨릭 성인 이름
    Saturn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03년 카르타고

 

 

사투르니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사뚜르니노, 사뚜르니누스, 사투르니누스.

 

 

사투르니노 자료

성녀 페르페투아(Perpetua)와 성녀 펠리치타(Felicitas) 그리고 네 명의 동료 순교자 이야기는 초기 순교자들의 전기 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이고 인상적이다. 특히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의 수난기”(Passio SS. Perpetuae et Felicitatis)는 성녀 페르페투아와 그녀의 하녀였던 성녀 펠리치타의 순교에 관한 가장 신뢰할 만한 기록으로 히포(Hippo)의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8월 28일)도 이 수난기를 자주 인용하였다. 이 수난기의 내용은 성녀 페르페투아가 감옥에 갇혀 경험한 것을 직접 적은 기록과 다른 순교자들이 기록한 것을 모아 하나의 전기로 완성되었다.

그에 따르면 당시 로마 제국의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는 칙령을 반포하여 제국 내의 모든 백성이 그리스도인 되는 것을 금지하고, 이에 불응하면 혹독하게 처벌하였다. 그로 인해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진 203년, 귀족 가문의 딸로서 어린 아들을 둔 22살의 어머니였던 성녀 페르페투아와 그녀의 하녀로 임신 8개월이었던 성녀 펠리치타는 예비신자로서 교리를 배우는 중이었다. 그들 외에도 성 레보카투스(Revocatus), 성 사투르니누스(또는 사투르니노), 성 세쿤둘루스(Secundulus)가 성 사투루스(Saturus)에게 교리를 배우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성녀 페르페투아는 자신과 동료들이 갇힌 감옥의 무서운 분위기와 그들이 느낀 두려움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성녀 페르페투아의 아버지는 아직 세례받지 않은 딸의 배교를 권유하기 위해 감옥까지 와서 설득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성녀 페르페투아와 성녀 펠리치타를 비롯한 다른 동료들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감옥 안에서 몰래 세례를 받았다. 그즈음 성녀 페르페투아는 감옥에서 환시를 경험했는데, 용과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사다리를 올라가 푸른 풀밭에서 양들이 풀을 뜯고 있는 아름다운 곳에 이르는 내용이었다. 성녀 페르페투아는 이 환시를 통해 순교가 가까웠음을 깨달았다. 재판 날이 다가오자 그녀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감옥으로 데려와 보여주며 눈물로써 거듭 설득했으나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혈육의 정까지 끊고 신앙을 지키고자 한 성녀 페르페투아와 동료들은 로마 황제를 위해 원형 경기장에서 열리는 축제 중에 맹수의 먹이로 던져질 것이라는 판결을 받았다.

한편 성녀 펠리치타는 다른 동료들과 같은 감옥에 갇히지는 않았다. 이는 임신한 여인을 처형하는 것이 법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고자 했던 성녀 펠리치타는 출산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고, 엄청난 산고를 겪은 후 감옥 안에서 여자아이를 조산하였다. 아기가 다른 그리스도인 여인에게 입양되어 그녀 또한 동료들과 함께 처형장으로 갈 수 있었다. 함께 갇혔던 동료 중에서 성 세쿤둘루스는 고문과 매질의 후유증으로 감옥 안에서 순교하였고, 나머지는 매질을 당한 후 “그리스도의 신부답게, 하느님의 귀여운 자녀답게” 원형 경기장으로 끌려갔다. 먼저 성녀 페르페투아가 황소에 받혀 허공에 떴다가 떨어진 후 다시 일어났고, 성녀 펠리치타가 땅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달려가서 부축해 일으켜 세워주었다. 성 사투루스는 표범에게 던져져 피가 낭자했지만 죽지는 않았다. 결국 성녀 페르페투아와 동료들은 참수될 장소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그들은 평화의 예식으로 서로 입을 맞춘 뒤 성 사투루스부터 차례대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순교 직전 성녀 페르페투아는 또 다른 환시를 보았는데, 어릴 때 병으로 죽은 막내 동생이 천국에서 그녀를 따라 기도하는 모습이었다.

성녀 페르페투아와 성녀 펠리치타는 4세기경부터 3월 7일에 로마에서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았고, 파스카 성야의 성인 호칭 기도문에도 추가되었다. 일찍부터 로마 전례력과 시리아 전례력에 수록되어 공경을 받아온 성녀 페르페투아와 성녀 펠리치타는 로마 미사 경본 감사기도 제1양식(로마 전문)에서 기억하는 7명의 성녀에도 포함되어 큰 공경을 받았다. 두 성녀는 그들 이름의 뜻대로 순교를 통해 주님 안에서 ‘영원한’(페르페투아) ‘행복’(펠리치타)에 이른 것이다. 성녀 페르페투아의 유해는 5세기에 로마로, 9세기에 프랑스의 한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10세기에 수도원이 노르만인들에게 약탈당한 후 다시 비에르종(Vierzon)으로 옮겨졌고, 19세기 초에 비에르종의 노트르담 대성당에 모신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녀 페르페투아와 성녀 펠리치타의 축일은 한동안 옛 “로마 순교록”에서 3월 6일로 옮겨 기념했으나, 1969년 전례력 개정과 함께 순교한 날인 3월 7일로 복원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역시 3월 7일에 두 성녀와 동료들의 순교를 함께 기념하고 있다. 동방 정교회는 그들의 축일은 2월 1일에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세쿤둘로

 

  • 가톨릭 성인 이름
    Secundul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03년 카르타

 

 

세쿤둘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세꾼둘로, 세꾼둘루스, 세꾼디노, 세꾼디누스, 세쿤둘루스, 세쿤디노, 세쿤디누스.

 

 

세쿤둘로 자료

성녀 페르페투아(Perpetua)와 성녀 펠리치타(Felicitas) 그리고 네 명의 동료 순교자 이야기는 초기 순교자들의 전기 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이고 인상적이다. 특히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의 수난기”(Passio SS. Perpetuae et Felicitatis)는 성녀 페르페투아와 그녀의 하녀였던 성녀 펠리치타의 순교에 관한 가장 신뢰할 만한 기록으로 히포(Hippo)의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8월 28일)도 이 수난기를 자주 인용하였다. 이 수난기의 내용은 성녀 페르페투아가 감옥에 갇혀 경험한 것을 직접 적은 기록과 다른 순교자들이 기록한 것을 모아 하나의 전기로 완성되었다.

그에 따르면 당시 로마 제국의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는 칙령을 반포하여 제국 내의 모든 백성이 그리스도인 되는 것을 금지하고, 이에 불응하면 혹독하게 처벌하였다. 그로 인해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진 203년, 귀족 가문의 딸로서 어린 아들을 둔 22살의 어머니였던 성녀 페르페투아와 그녀의 하녀로 임신 8개월이었던 성녀 펠리치타는 예비신자로서 교리를 배우는 중이었다. 그들 외에도 성 레보카투스(Revocatus),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성 세쿤둘루스(또는 세쿤둘로)가 성 사투루스(Saturus)에게 교리를 배우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성녀 페르페투아는 자신과 동료들이 갇힌 감옥의 무서운 분위기와 그들이 느낀 두려움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성녀 페르페투아의 아버지는 아직 세례받지 않은 딸의 배교를 권유하기 위해 감옥까지 와서 설득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성녀 페르페투아와 성녀 펠리치타를 비롯한 다른 동료들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감옥 안에서 몰래 세례를 받았다. 그즈음 성녀 페르페투아는 감옥에서 환시를 경험했는데, 용과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사다리를 올라가 푸른 풀밭에서 양들이 풀을 뜯고 있는 아름다운 곳에 이르는 내용이었다. 성녀 페르페투아는 이 환시를 통해 순교가 가까웠음을 깨달았다. 재판 날이 다가오자 그녀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감옥으로 데려와 보여주며 눈물로써 거듭 설득했으나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혈육의 정까지 끊고 신앙을 지키고자 한 성녀 페르페투아와 동료들은 로마 황제를 위해 원형 경기장에서 열리는 축제 중에 맹수의 먹이로 던져질 것이라는 판결을 받았다.

한편 성녀 펠리치타는 다른 동료들과 같은 감옥에 갇히지는 않았다. 이는 임신한 여인을 처형하는 것이 법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고자 했던 성녀 펠리치타는 출산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고, 엄청난 산고를 겪은 후 감옥 안에서 여자아이를 조산하였다. 아기가 다른 그리스도인 여인에게 입양되어 그녀 또한 동료들과 함께 처형장으로 갈 수 있었다. 함께 갇혔던 동료 중에서 성 세쿤둘루스는 고문과 매질의 후유증으로 감옥 안에서 순교하였고, 나머지는 매질을 당한 후 “그리스도의 신부답게, 하느님의 귀여운 자녀답게” 원형 경기장으로 끌려갔다. 먼저 성녀 페르페투아가 황소에 받혀 허공에 떴다가 떨어진 후 다시 일어났고, 성녀 펠리치타가 땅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달려가서 부축해 일으켜 세워주었다. 성 사투루스는 표범에게 던져져 피가 낭자했지만 죽지는 않았다. 결국 성녀 페르페투아와 동료들은 참수될 장소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그들은 평화의 예식으로 서로 입을 맞춘 뒤 성 사투루스부터 차례대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순교 직전 성녀 페르페투아는 또 다른 환시를 보았는데, 어릴 때 병으로 죽은 막내 동생이 천국에서 그녀를 따라 기도하는 모습이었다.

성녀 페르페투아와 성녀 펠리치타는 4세기경부터 3월 7일에 로마에서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았고, 파스카 성야의 성인 호칭 기도문에도 추가되었다. 일찍부터 로마 전례력과 시리아 전례력에 수록되어 공경을 받아온 성녀 페르페투아와 성녀 펠리치타는 로마 미사 경본 감사기도 제1양식(로마 전문)에서 기억하는 7명의 성녀에도 포함되어 큰 공경을 받았다. 두 성녀는 그들 이름의 뜻대로 순교를 통해 주님 안에서 ‘영원한’(페르페투아) ‘행복’(펠리치타)에 이른 것이다. 성녀 페르페투아의 유해는 5세기에 로마로, 9세기에 프랑스의 한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10세기에 수도원이 노르만인들에게 약탈당한 후 다시 비에르종(Vierzon)으로 옮겨졌고, 19세기 초에 비에르종의 노트르담 대성당에 모신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녀 페르페투아와 성녀 펠리치타의 축일은 한동안 옛 “로마 순교록”에서 3월 6일로 옮겨 기념했으나, 1969년 전례력 개정과 함께 순교한 날인 3월 7일로 복원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역시 3월 7일에 두 성녀와 동료들의 순교를 함께 기념하고 있다. 동방 정교회는 그들의 축일은 2월 1일에 기념하고 있다. 성 세쿤둘로스는 세쿤디누스(Secundin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아가토도로

 

  • 가톨릭 성인 이름
    Agathodor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 헤르손

 

 

아가토도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가또도로, 아가또도루스, 아가토도루스.

 

 

아가토도로 자료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5세기 이후부터 타우리카 케르소네소스(Taurica Chersonesos, ‘타우리카 반도’라는 뜻)라고 부르는 곳에 여러 개의 식민 도시를 건설했는데, 오늘날 우크라이나 남쪽 흑해로 돌출해 있는 크림반도의 케르소네소스가 대표적 항구도시였다. 오늘날 이곳은 우크라이나의 항구도시인 헤르손인데, 2014년 러시아가 무력을 통해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하면서 현재 러시아 영토가 됐지만, 국제사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로마 제국 시대에 이곳은 종종 죄인들의 유배지로 사용되었는데,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 때 신자들도 이곳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교황 성 클레멘스 1세(Clement I, 11월 23일)가 크림반도의 채석장으로 유배 와서 강제 노동에 시달리다가 목에 닻을 매단 채 흑해 바다로 던져져 순교한 역사가 있다. 그러면서 박해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이 지역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4세기 초에 케르소네소스에 주교좌가 설정되었고,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이 지역을 복음화하기 위해 많은 선교사를 파견했다.

그러면서 4세기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교도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순교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은 3월 4일 목록에서 순교 시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케르소네소스(크림반도)에서 사목하다가 순교한 거룩한 주교들로 성 바실리우스(Basilius), 성 에우게니우스(Eugenius), 성 아가토도루스(또는 아가토도로), 성 엘피디우스(Elpidius), 성 아이테리우스(Aetherius), 성 카피톤(Capiton), 성 에프렘(Ephraem), 성 네스토르(Nestor), 성 아르카디우스(Arcadius)의 이름을 전해주었다. 전승에 따르면, 성 네스토르와 성 아르카디우스 주교는 크림반도가 아닌 키프로스(Cyprus)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케르소네소스에서 순교한 거룩한 주교들의 이름을 동방 정교회와 같은 날인 3월 7일로 옮겨서 기록하였다. 그리고 성 네스토르와 성 아르카디우스 주교의 이름을 3월 7일 목록에서 삭제했는데, 3월 4일이나 다른 날에도 더는 기록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아르도

 

  • 가톨릭 성인 이름
    Ardo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843년 니아네

 

 

아르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르두스.

 

 

아르도 자료

성 아르도는 프랑크인으로서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Languedoc)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는 수도자가 된 후에 자신의 이름을 아르도로 개명하고 아니아네의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2월 11일)의 초기 제자가 되었고, 사제가 된 후에는 수도원 부속학교의 책임자로 활약하였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아니아네의 수도원 원장 시절에 장서를 수집하고 필사본을 만든 사람인 듯하다. 왜냐하면 그 수도원은 원래부터 학문과 예술의 전당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이고, 또 그 수도원 학교의 영향으로 프랑스와 독일에 여러 수도원 학교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는 아르두스(Ard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에오스터와인

 

  • 가톨릭 성인 이름
    Eosterwin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686년

 

 

에오스터와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스터와인, 에스터윈.

 

 

에오스터와인 자료

성 에오스터와인은 영국 노섬브리아(Northumbria)의 귀족으로 태어나 궁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외모가 잘 생기고 또 언변이 뛰어났기 때문에 그의 장래는 아주 밝았다. 그러나 그는 수도생활에 대한 강력한 부르심을 느끼고 스스로 위어머스(Wearmouth) 수도원에 들어갔다. 성 에오스터와인의 높은 신분 때문에 수도원 측에서 다소 의아해 하였으나, 곧 그의 신심과 겸손이 돋보였으므로 다른 수도자들로부터 큰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되었다.

성 베네딕투스 비스코프(Benedictus Biscop, 1월 12일) 원장은 장시간 동안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원장을 따로 세우려고 선거를 실시하였는데 그가 선출되었다. 그는 4년 동안 성공적으로 또 아주 현명하게 수도원을 이끌어 나가다가 임기를 다하지 못하고 운명하였다. 그는 원장이 된 후에도 죽을 때까지 다른 수도자와 함께 자는 공동 침실에서 지냈다. 그는 동료 수도자들이 밤기도를 바치는 동안 하느님의 품에 고요히 안겼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에우불로

 

  • 가톨릭 성인 이름
    Eubul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9년 카이사레아

 

 

에우불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불로, 에불루스, 에우불루스.

 

 

에우불로 자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팔레스티나(Palestina)의 통치자는 피르밀리아누스였다. 성 하드리아누스(Hadrianus, 3월 5일)와 성 에우불루스(또는 에우불로)는 거룩한 증거자를 찾아보기 위하여 바타네아(Batanea)에서 카이사레아로 왔다. 이 도시의 성문에서 검문을 당했을 때 그들은 상인이라고 거짓말을 하였으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를 돌보기 위해 먼 길을 왔다는 사실이 곧 밝혀지게 되었다.

결국 그 자리에서 체포된 그들은 관리들에게 끌려가 처음에는 매를 맞았으나, 신앙을 포기하거나 그 도시의 신자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쇠막대기로 옆구리를 찌르는 등 온갖 고문을 당하다가 야수들의 밥이 되었다. 그러나 성 하드리아누스는 사자의 밥이 되지 않았다. 사자가 그를 해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성 하드리아누스는 칼을 맞고 순교하였다. 한편 성 에우불루스도 이와 비슷한 형벌을 받고 이틀 뒤에 순교하였다. 그는 참수를 당해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에우제니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ugen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 헤르손

 

 

에우제니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우게니오, 에우게니우스, 에우제니우스, 유진.

 

 

에우제니오 자료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5세기 이후부터 타우리카 케르소네소스(Taurica Chersonesos, ‘타우리카 반도’라는 뜻)라고 부르는 곳에 여러 개의 식민 도시를 건설했는데, 오늘날 우크라이나 남쪽 흑해로 돌출해 있는 크림반도의 케르소네소스가 대표적 항구도시였다. 오늘날 이곳은 우크라이나의 항구도시인 헤르손인데, 2014년 러시아가 무력을 통해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하면서 현재 러시아 영토가 됐지만, 국제사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로마 제국 시대에 이곳은 종종 죄인들의 유배지로 사용되었는데,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 때 신자들도 이곳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교황 성 클레멘스 1세(Clement I, 11월 23일)가 크림반도의 채석장으로 유배 와서 강제 노동에 시달리다가 목에 닻을 매단 채 흑해 바다로 던져져 순교한 역사가 있다. 그러면서 박해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이 지역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4세기 초에 케르소네소스에 주교좌가 설정되었고,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이 지역을 복음화하기 위해 많은 선교사를 파견했다.

그러면서 4세기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교도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순교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은 3월 4일 목록에서 순교 시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케르소네소스(크림반도)에서 사목하다가 순교한 거룩한 주교들로 성 바실리우스(Basilius), 성 에우게니우스(Eugenius, 또는 에우제니오), 성 아가토도루스(Agathodorus), 성 엘피디우스(Elpidius), 성 아이테리우스(Aetherius), 성 카피톤(Capiton), 성 에프렘(Ephraem), 성 네스토르(Nestor), 성 아르카디우스(Arcadius)의 이름을 전해주었다. 전승에 따르면, 성 네스토르와 성 아르카디우스 주교는 크림반도가 아닌 키프로스(Cyprus)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케르소네소스에서 순교한 거룩한 주교들의 이름을 동방 정교회와 같은 날인 3월 7일로 옮겨서 기록하였다. 그리고 성 네스토르와 성 아르카디우스 주교의 이름을 3월 7일 목록에서 삭제했는데, 3월 4일이나 다른 날에도 더는 기록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에테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the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 헤르손

 

 

에테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이떼리오, 아이떼리우스, 아이테리오, 아이테리우스, 에떼리오, 에떼리우스, 에테리우스.

 

 

에테리오 자료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5세기 이후부터 타우리카 케르소네소스(Taurica Chersonesos, ‘타우리카 반도’라는 뜻)라고 부르는 곳에 여러 개의 식민 도시를 건설했는데, 오늘날 우크라이나 남쪽 흑해로 돌출해 있는 크림반도의 케르소네소스가 대표적 항구도시였다. 오늘날 이곳은 우크라이나의 항구도시인 헤르손인데, 2014년 러시아가 무력을 통해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하면서 현재 러시아 영토가 됐지만, 국제사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로마 제국 시대에 이곳은 종종 죄인들의 유배지로 사용되었는데,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 때 신자들도 이곳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교황 성 클레멘스 1세(Clement I, 11월 23일)가 크림반도의 채석장으로 유배 와서 강제 노동에 시달리다가 목에 닻을 매단 채 흑해 바다로 던져져 순교한 역사가 있다. 그러면서 박해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이 지역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4세기 초에 케르소네소스에 주교좌가 설정되었고,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이 지역을 복음화하기 위해 많은 선교사를 파견했다.

그러면서 4세기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교도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순교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은 3월 4일 목록에서 순교 시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케르소네소스(크림반도)에서 사목하다가 순교한 거룩한 주교들로 성 바실리우스(Basilius), 성 에우게니우스(Eugenius), 성 아가토도루스(Agathodorus), 성 엘피디우스(Elpidius), 성 아이테리우스(Aetherius, 또는 에테리오), 성 카피톤(Capiton), 성 에프렘(Ephraem), 성 네스토르(Nestor), 성 아르카디우스(Arcadius)의 이름을 전해주었다. 전승에 따르면, 성 네스토르와 성 아르카디우스 주교는 크림반도가 아닌 키프로스(Cyprus)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케르소네소스에서 순교한 거룩한 주교들의 이름을 동방 정교회와 같은 날인 3월 7일로 옮겨서 기록하였다. 그리고 성 네스토르와 성 아르카디우스 주교의 이름을 3월 7일 목록에서 삭제했는데, 3월 4일이나 다른 날에도 더는 기록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에프렘

 

  • 가톨릭 성인 이름
    Ephrem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 헤르손

 

 

에프렘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애프램, 애프렘, 에프라임, 에프램.

 

 

에프렘 자료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5세기 이후부터 타우리카 케르소네소스(Taurica Chersonesos, ‘타우리카 반도’라는 뜻)라고 부르는 곳에 여러 개의 식민 도시를 건설했는데, 오늘날 우크라이나 남쪽 흑해로 돌출해 있는 크림반도의 케르소네소스가 대표적 항구도시였다. 오늘날 이곳은 우크라이나의 항구도시인 헤르손인데, 2014년 러시아가 무력을 통해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하면서 현재 러시아 영토가 됐지만, 국제사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로마 제국 시대에 이곳은 종종 죄인들의 유배지로 사용되었는데,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 때 신자들도 이곳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교황 성 클레멘스 1세(Clement I, 11월 23일)가 크림반도의 채석장으로 유배 와서 강제 노동에 시달리다가 목에 닻을 매단 채 흑해 바다로 던져져 순교한 역사가 있다. 그러면서 박해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이 지역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4세기 초에 케르소네소스에 주교좌가 설정되었고,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이 지역을 복음화하기 위해 많은 선교사를 파견했다.

그러면서 4세기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교도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순교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은 3월 4일 목록에서 순교 시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케르소네소스(크림반도)에서 사목하다가 순교한 거룩한 주교들로 성 바실리우스(Basilius), 성 에우게니우스(Eugenius), 성 아가토도루스(Agathodorus), 성 엘피디우스(Elpidius), 성 아이테리우스(Aetherius), 성 카피톤(Capiton), 성 에프렘(Ephraem), 성 네스토르(Nestor), 성 아르카디우스(Arcadius)의 이름을 전해주었다. 전승에 따르면, 성 네스토르와 성 아르카디우스 주교는 크림반도가 아닌 키프로스(Cyprus)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케르소네소스에서 순교한 거룩한 주교들의 이름을 동방 정교회와 같은 날인 3월 7일로 옮겨서 기록하였다. 그리고 성 네스토르와 성 아르카디우스 주교의 이름을 3월 7일 목록에서 삭제했는데, 3월 4일이나 다른 날에도 더는 기록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엘피디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lpid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 헤르손

 

 

엘피디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엘삐디오, 엘삐디우스, 엘피디우스.

 

 

엘피디오 자료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5세기 이후부터 타우리카 케르소네소스(Taurica Chersonesos, ‘타우리카 반도’라는 뜻)라고 부르는 곳에 여러 개의 식민 도시를 건설했는데, 오늘날 우크라이나 남쪽 흑해로 돌출해 있는 크림반도의 케르소네소스가 대표적 항구도시였다. 오늘날 이곳은 우크라이나의 항구도시인 헤르손인데, 2014년 러시아가 무력을 통해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하면서 현재 러시아 영토가 됐지만, 국제사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로마 제국 시대에 이곳은 종종 죄인들의 유배지로 사용되었는데,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 때 신자들도 이곳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교황 성 클레멘스 1세(Clement I, 11월 23일)가 크림반도의 채석장으로 유배 와서 강제 노동에 시달리다가 목에 닻을 매단 채 흑해 바다로 던져져 순교한 역사가 있다. 그러면서 박해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이 지역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4세기 초에 케르소네소스에 주교좌가 설정되었고,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이 지역을 복음화하기 위해 많은 선교사를 파견했다.

그러면서 4세기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교도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순교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은 3월 4일 목록에서 순교 시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케르소네소스(크림반도)에서 사목하다가 순교한 거룩한 주교들로 성 바실리우스(Basilius), 성 에우게니우스(Eugenius), 성 아가토도루스(Agathodorus), 성 엘피디우스(또는 엘피디오), 성 아이테리우스(Aetherius), 성 카피톤(Capiton), 성 에프렘(Ephraem), 성 네스토르(Nestor), 성 아르카디우스(Arcadius)의 이름을 전해주었다. 전승에 따르면, 성 네스토르와 성 아르카디우스 주교는 크림반도가 아닌 키프로스(Cyprus)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케르소네소스에서 순교한 거룩한 주교들의 이름을 동방 정교회와 같은 날인 3월 7일로 옮겨서 기록하였다. 그리고 성 네스토르와 성 아르카디우스 주교의 이름을 3월 7일 목록에서 삭제했는데, 3월 4일이나 다른 날에도 더는 기록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8. 요한 라크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Larke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44년 영국

 

 

요한 라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라크 자료

요한 라크(Joannes Larke)는 케임브리지(Cambridge) 대학에서 공부했고, 런던(London)의 성녀 에텔부르가(Ethelburga) 본당의 주임 신부로 26년을 재직했다. 그 후 4년 정도 에식스(Essex)의 우드퍼드(Woodford)에서 사목한 후 1530년에 성 토마스 모어(Thomas More, 6월 22일) 경의 지목으로 그가 자주 다니는 첼시(Chelsea) 성당의 주임사제가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가 1534년에 왕의 영국 교회에 대한 최고 수위권을 법률화한 수장령(Act of Supremacy)에 따라 앤 불린과의 재혼을 인정하는 계승권 승복 선서(Oath of Succession)에 서명했다고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하여 거짓 맹세를 한 적이 없을 정도로 곧은 사람이었다. 요한 라크는 1544년 2월에 체포되어 기소되었는데, 이때 한때 성 토마스 모어의 전속 사제였던 복자 요한 아일랜드(Joannes Ireland) 신부와 평신도 게르마누스 가디너(Germanus Gardiner)도 헨리 8세(Henry VIII) 왕의 통치 아래에서 로마 교황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하여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들은 1544년 3월 7일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요한 라크와 게르마누스 가디너는 1886년 12월 2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요한 아일랜드는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들의 축일은 순교한 날인 3월 7일에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그들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9. 요한 아일랜드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Ireland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44년 영국

 

 

요한 아일랜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아일랜드 자료

요한 라크(Joannes Larke)는 케임브리지(Cambridge) 대학에서 공부했고, 런던(London)의 성녀 에텔부르가(Ethelburga) 본당의 주임 신부로 26년을 재직했다. 그 후 4년 정도 에식스(Essex)의 우드퍼드(Woodford)에서 사목한 후 1530년에 성 토마스 모어(Thomas More, 6월 22일) 경의 지목으로 그가 자주 다니는 첼시(Chelsea) 성당의 주임사제가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가 1534년에 왕의 영국 교회에 대한 최고 수위권을 법률화한 수장령(Act of Supremacy)에 따라 앤 불린과의 재혼을 인정하는 계승권 승복 선서(Oath of Succession)에 서명했다고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하여 거짓 맹세를 한 적이 없을 정도로 곧은 사람이었다. 요한 라크는 1544년 2월에 체포되어 기소되었는데, 이때 한때 성 토마스 모어의 전속 사제였던 복자 요한 아일랜드(Joannes Ireland) 신부와 평신도 게르마누스 가디너(Germanus Gardiner)도 헨리 8세(Henry VIII) 왕의 통치 아래에서 로마 교황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하여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들은 1544년 3월 7일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요한 라크와 게르마누스 가디너는 1886년 12월 2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요한 아일랜드는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들의 축일은 순교한 날인 3월 7일에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그들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0. 제르마노 가디너

 

  • 가톨릭 성인 이름
    German Gardiner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평신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44년 영국

 

 

제르마노 가디너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게르마노, 게르마누스, 저먼, 제르마누스, 제르민, 젤마노.

 

 

제르마노 가디너 자료

요한 라크(Joannes Larke)는 케임브리지(Cambridge) 대학에서 공부했고, 런던(London)의 성녀 에텔부르가(Ethelburga) 본당의 주임 신부로 26년을 재직했다. 그 후 4년 정도 에식스(Essex)의 우드퍼드(Woodford)에서 사목한 후 1530년에 성 토마스 모어(Thomas More, 6월 22일) 경의 지목으로 그가 자주 다니는 첼시(Chelsea) 성당의 주임사제가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가 1534년에 왕의 영국 교회에 대한 최고 수위권을 법률화한 수장령(Act of Supremacy)에 따라 앤 불린과의 재혼을 인정하는 계승권 승복 선서(Oath of Succession)에 서명했다고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하여 거짓 맹세를 한 적이 없을 정도로 곧은 사람이었다. 요한 라크는 1544년 2월에 체포되어 기소되었는데, 이때 한때 성 토마스 모어의 전속 사제였던 복자 요한 아일랜드(Joannes Ireland) 신부와 평신도 게르마누스 가디너(Germanus Gardiner, 또는 제르마노 가디너)도 헨리 8세(Henry VIII) 왕의 통치 아래에서 로마 교황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하여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들은 1544년 3월 7일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요한 라크와 게르마누스 가디너는 1886년 12월 2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요한 아일랜드는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들의 축일은 순교한 날인 3월 7일에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그들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1. 카피톤

 

  • 가톨릭 성인 이름
    Capito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 헤르손

 

 

카피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까삐또, 까삐똔, 카피또, 카피똔, 카피토.

 

 

카피톤 자료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5세기 이후부터 타우리카 케르소네소스(Taurica Chersonesos, ‘타우리카 반도’라는 뜻)라고 부르는 곳에 여러 개의 식민 도시를 건설했는데, 오늘날 우크라이나 남쪽 흑해로 돌출해 있는 크림반도의 케르소네소스가 대표적 항구도시였다. 오늘날 이곳은 우크라이나의 항구도시인 헤르손인데, 2014년 러시아가 무력을 통해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하면서 현재 러시아 영토가 됐지만, 국제사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로마 제국 시대에 이곳은 종종 죄인들의 유배지로 사용되었는데,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 때 신자들도 이곳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교황 성 클레멘스 1세(Clement I, 11월 23일)가 크림반도의 채석장으로 유배 와서 강제 노동에 시달리다가 목에 닻을 매단 채 흑해 바다로 던져져 순교한 역사가 있다. 그러면서 박해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이 지역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4세기 초에 케르소네소스에 주교좌가 설정되었고,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이 지역을 복음화하기 위해 많은 선교사를 파견했다.

그러면서 4세기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교도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순교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은 3월 4일 목록에서 순교 시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케르소네소스(크림반도)에서 사목하다가 순교한 거룩한 주교들로 성 바실리우스(Basilius), 성 에우게니우스(Eugenius), 성 아가토도루스(Agathodorus), 성 엘피디우스(Elpidius), 성 아이테리우스(Aetherius), 성 카피톤, 성 에프렘(Ephraem), 성 네스토르(Nestor), 성 아르카디우스(Arcadius)의 이름을 전해주었다. 전승에 따르면, 성 네스토르와 성 아르카디우스 주교는 크림반도가 아닌 키프로스(Cyprus)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케르소네소스에서 순교한 거룩한 주교들의 이름을 동방 정교회와 같은 날인 3월 7일로 옮겨서 기록하였다. 그리고 성 네스토르와 성 아르카디우스 주교의 이름을 3월 7일 목록에서 삭제했는데, 3월 4일이나 다른 날에도 더는 기록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2. 테오필로

 

  • 가톨릭 성인 이름
    Theophil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845년 니코메디아

 

 

테오필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떼오필로, 떼오필루스, 테오필락또, 테오필락뚜스, 테오필락토, 테오필락투스, 테오필루스.

 

 

테오필로 자료

성 테오필루스(또는 테오필로)는 아시아에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온 소년으로 그곳의 주교인 성 타라시우스(Tarasius, 2월 25일)로부터 총애를 받고 또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학업을 마칠 즈음에 수도성소를 강하게 느끼고 염원했기 때문에 성 타라시우스는 그와 또 다른 제자인 성 미카엘(Michael, 5월 23일)을 보스포루스(Bosporus) 해협 근처에 있는 수도원으로 보냈다. 그 후 그 두 사람은 모두 주교가 되었는데, 성 테오필루스는 니코메디아(오늘날 터키의 이즈미트, Izmit), 성 미카엘은 신나다 교구의 주교가 되었다.

레오 5세 황제가 제국 내에 다시금 성상 파괴 정책을 재개하려 할 즈음에 성 테오필루스는 이를 격렬히 반박하고 나섬으로써 카리아(Caria)의 숲 속에 감금되었다가 나중에 운명하였다. 그는 이처럼 정통 교리를 수호했을 뿐만 아니라 예언의 은혜가 뛰어났으며, 가난한 이와 과부 그리고 고아와 부랑자들에게 깊은 사랑을 표시했고 또 이들을 위한 구호소를 세우기도 하였다. 그는 테오필락투스(Theophilact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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