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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4일 남자세례명 9가지

피어나네 2023. 5. 1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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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4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마티아, 미카엘 가리코이트, 보니파시오 (순교자), 보니파시오 (주교), 빅토르, 에렘베르토, 에지디오, 카르타고, 폰시오, 총 9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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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4일 여자세례명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 베드로닐라, 유스타, 유스티나, 코로나, 헤네디나, 총 6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5월 14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9가지

 

 

 

 

5월 14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마티아

  2. 미카엘 가리코이트

  3. 보니파시오 (순교자)

  4. 보니파시오 (주교)

  5. 빅토르

  6. 에렘베르토

  7. 에지디오

  8. 카르타고

  9. 폰시오

 

5월 14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9가지

 

 

1. 마티아

 

  • 가톨릭 성인 이름
    Matthia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사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경

 

 

마티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띠아, 마지아, 마티아스.

 

 

마티아 자료

성 마티아는 열두 사도 중 유다 이스카리옷(Judas Iscariot)의 배반과 죽음으로 비어 있는 자리를 채우기 위해 사도로 선출된 예수님의 제자이다.

사도들은 성 요한(Joannes, 6월 24일)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 줄곧 동행했던 이들 가운데서 부활의 증인이 될 사람을 뽑고자 했다. 그래서 후보자로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Josephus)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기도한 다음 제비를 뽑아 마티아를 사도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사도 1,15-26).

‘마티아’는 당시 그리스 문화권에서 흔한 이름으로 ‘하느님의 선물’이란 뜻을 지닌 그리스어 ‘마티아스’(Mattias)와 히브리어 ‘마티티아’(Mattithiah)에서 유래했는데, 그 이름의 뜻 그대로 성 마티아는 주님의 선물로서 열두 사도단의 일원이 된 것이다. 신약성경 안에서 열두 사도로 선출된 사실 이외에 성 마티아에 관한 언급이 더는 나오지 않는다.

후대의 전승에 따르면 그는 예수님께서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짝지어 파견한 72명의 제자(루카 10,1-12)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그 외에도 자캐오(Zachaeus)나 사도 성 바르나바(Barnabas, 6월 11일)와 동일 인물이라는 전승도 전해지고 있다.

이렇듯 성 마티아에 대한 전승은 모호하고 불확실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의 순교 방식에 대해서도 십자가형 또는 참수형을 받았다는 두 가지 전승이 주로 전해지고 있다.

전승마다 다르긴 하지만 그는 사도가 된 후 오랫동안 유다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이방인 지역으로 갔는데, 남쪽으로 에티오피아까지 가서 내륙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다고 하고, 다른 전승은 북쪽으로 흑해 연안의 콜키스(Colchis, 오늘날의 조지아 일대)까지 가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그는 예루살렘(Jerusalem)에서 유다인에게 돌에 맞은 후 도끼 또는 미늘창(도끼와 창을 합친 무기)으로 목이 잘려 순교했다고 한다. 그래서 교회 미술에서 그를 표현할 때 십자가를 들거나 도끼 또는 미늘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등장한다.

옛 “로마 순교록”은 사도 성 마티아가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배신자 유다의 자리를 채울 사도로 뽑혔으며, 유다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또 축일도 2월 24일에 기념했는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1969년의 전례력 개정과 함께 이듬해부터 매년 5월 14일, 주님 승천 대축일과 가까운 부활 시기로 옮겨 기념하고 있다. 동방 정교회는 8월 9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5월 14일 목록에서 이전 판과 같은 내용을 전하며 ‘유다 지방에서’라는 말을 빼고 그가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처럼 로마 순교록은 그의 순교 방법이나 장소 그리고 무덤 등에 대해서는 전승의 다양함을 인정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사도 성 마티아의 유해는 나중에 성녀 헬레나(Helena, 8월 18일) 황후에 의해 발굴되어 로마로 이장되었고,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다시 독일 남서부의 트리어(Trier)로 옮겨 모셨다.

나중에 노르만족의 침략으로 분실되었다가 발견되어 다시 안장되었고, 현재 그의 지하 무덤 위에는 베네딕토회의 성 마티아스 수도원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성 마티아는 오늘날까지도 트리어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기술자의 주보 성인이자 목수와 재단사의 수호성인으로도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미카엘 가리코이트

 

  • 가톨릭 성인 이름
    Michael Garicoit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증거자,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7-1863년

 

 

미카엘 가리코이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이클, 미가엘, 미겔, 미구엘, 미키.

 

 

미카엘 가리코이트 자료

성 미카엘 가리코이트는 프랑스 피레네 산중의 이바레(Ibarre)라는 한 작은 촌락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프랑스 혁명의 박해를 피해서 온 사제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있었다.

산중생활이 대부분인 그는 여느 아이들과 다름없이 이웃의 목장에서 양을 치는 평범한 목동이었지만, 어려서부터 가끔씩 사제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표현하곤 하였다. 그러나 너무나 가난했던 그의 부모는 아들의 교육비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돈이 없다"는 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할머니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할머니는 생팔레(Saint-Palais)의 본당신부를 찾아가서 손자 이야기를 했고, 그 결과 그는 그 본당신부의 주선으로 그 지방의 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부모가 학비를 부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본당 사제관이나 주교관에서 일을 해야만 하였다.

에르(Aire)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닥스(Dax)의 대신학교에서 신학을 수학한 성 미카엘 가리코이트는 비록 시골 목동이었지만 매우 현명하고 또 건강했다. 더욱이 그는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자세로 노동과 공부를 했기 때문에 '우리의 알로이시우스 곤자가(Aloysius Gonzaga, 6월 21일)'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1823년 12월에 바욘(Bayonne) 교구의 사제로 수품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캄보(Cambo)의 보좌신부로서 사제생활을 시작한 그는 예수 성심께 대한 지극한 사랑과 자주 성체를 모시는 관습을 보급함으로써 얀세니즘(Jansenism)과 싸워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그의 다음 부임지는 베타람(Betharram)에 있는 교구 신학교였다. 그는 여기서 철학을 가르치다가 원장이 되었다. 그 교구의 주교가 베타람 신학교를 바욘에 있는 신학교와 합치는 결정을 내렸을 때 그는 다른 두 명의 사제들과 함께 그곳에 남아 새로운 봉사를 꿈꾸게 되었다.

성 미카엘 가리코이트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제 양성 계획을 구체화시킬 심산으로 동료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후 그는 툴루즈(Toulouse)로 가서 예수회원인 르블랑(Le Blanc) 신부를 만났는데, 그 신부는 성 미카엘 가리코이트 신부의 마음을 활짝 열게 했을 뿐만 아니라 격려까지 잊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로욜라(Loyola)의 성 이냐시오(Ignatius, 7월 31일)의 자녀들과 같은 규칙에 근거하는 회헌을 만들고 계획을 하나하나 실천에 옮겼다.

이렇게 해서 1838년에 '베타람의 성심 신부회'가 탄생하였다. 이 선교회는 베타람에서 그가 사망한 지 14년 뒤에 교황청의 인가를 받았다. 그는 1923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47년 7월 6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보니파시오 (순교자)

 

  • 가톨릭 성인 이름
    Bonifac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7년경 타르수스

 

 

보니파시오 (순교자)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보니파시우스, 보니파키오, 보니파키우스, 보니파티오, 보니파티우스, 보니페이스.

 

 

보니파시오 (순교자) 자료

4세기 초 이탈리아 로마에 아글라이다(Aglaida)라는 젊고 부유한 귀족 부인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답고 매력적일 뿐만 아니라 훌륭한 가문 출신으로 세 번에 걸쳐서 시민들을 아주 융숭하게 대접했다고 한다. 그녀의 집사장이 바로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또는 보니파시오)였다.

그는 다소 방종하고 무절제한 사람이었지만 자유롭고 인정이 많았으며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꾸준히 돌보는 신실한 면도 있었다. 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어느 날, 아글라이다 부인은 성 보니파티우스에게 동방으로 가서 순교자들의 유해들을 수집해 오도록 했다.

그는 즉시 주인의 뜻을 따를 준비를 했고, 긴 여행이니만큼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기도와 단식으로써 임무를 성실히 수행할 결심을 했다. 당시 서방교회는 비교적 평화를 누리고 있었지만 동방교회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모진 박해를 받고 있었다.

성 보니파티우스가 실리시아(Cilicia) 지방, 오늘날의 터키 중남부의 타르수스에 도착해 총독 관저로 가보니 마침 20여 명의 그리스도인이 고문을 받고 있었다. 그는 심플리키우스(Simplicius) 총독 앞으로 가서 “그리스도인의 하느님은 위대하시다! 순교자들의 하느님은 위대하시다! 나는 사탄과 싸우기 위해 여기에 왔다.” 하며 소리를 질렀다.

이 소리를 들은 총독은 진노하여 그에게 모진 고문을 가했다. 그러자 타르수스의 주민들도 들고일어나 “그리스도인의 하느님은 위대하시다!”라고 소리 지르며 큰 소요를 일으켰다. 총독은 소요를 진정시킨 뒤 그의 목을 참수하여 로마로 보냈다.

한편 아글라이다 부인은 이 소식을 듣고 마중 나왔다가 로마의 라티나(Latina) 가도에서 그의 유해를 만났다. 그녀는 그 자리에 성당을 짓고 거룩한 순교자의 유해를 모신 뒤 15년 동안 보속의 생활을 하다가 선종하여 순교자 옆에 안장되었다.

보니파티우스는 라틴어로 ‘좋은(bonus) 운명(fatum)’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게르만족의 사도’ 또는 ‘독일의 사도’로 불리는 성 보니파티우스(6월 5일) 대주교는 본래 빈프리트(Winfrid, Wynfrith)라는 이름이었는데,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Gregorius II)로부터 라인강 동쪽에 사는 이교도들을 선교하라는 사명을 받고 타르수스의 성 보티파티우스의 이름을 따서 새로 지었다고 한다.

12세기에 그의 이름이 로마 보편 전례력에 포함되어 자유롭게 선택해서 기념할 수 있었으나 1969년 전례력 개정과 함께 보편 전례력에서 삭제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5월 14일 목록에서 성 보니파티우스가 타르수스에서 순교한 후 로마로 그 유해가 옮겨져 라티나 가도에 안장되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5월 14일 목록에서 그의 이름을 더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12월 19일에 타르수스의 성 보니파티우스와 로마의 성녀 아글라이다를 함께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보니파시오 (주교)

 

  • 가톨릭 성인 이름
    Bonifac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6세기 페렌티노

 

 

보니파시오 (주교)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보니파시우스, 보니파키오, 보니파키우스, 보니파티오, 보니파티우스, 보니페이스.

 

 

보니파시오 (주교) 자료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또는 보니파시오)는 유스티누스 황제의 통치 기간 중 이탈리아 토스카나(Toscana) 지방 페렌티노의 주교였다. 그는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에 의해 기념하게 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빅토르

 

  • 가톨릭 성인 이름
    Victo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0/70년경?

 

 

빅토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빅또르, 빅똘, 빅톨.

 

 

빅토르 자료

성 빅토르와 성녀 코로나(Corona)는 그리스도교 순교자로서 대부분의 전승에 따르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161-180년 재위)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로마 제국의 속주인 시리아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전승과 순교록 등에서는 다마스쿠스(Damascus)나 안티오키아(Antiochia) 또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나 시칠리아(Sicilia)를 순교 장소로 언급하기도 한다.

순교 시기도 일치하지 않아 더 이른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나 훨씬 뒤인 3세기 말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재임 시기로 보기도 한다.

전승에 따르면, 성 빅토르는 이탈리아 혈통의 로마 군인으로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통치 중에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근무했다. 그는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난 뒤에 며칠 동안 두 눈알을 후벼파고, 온몸의 관절이 부러질 정도로 매를 맞고, 화상을 당한 피부에 식초와 채찍질을 가하는 등 모든 고문을 당했다.

그때 16살 된 어느 전우의 아내인 성녀 코로나가 그에게 큰 위로를 주고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성 빅토르는 결국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고, 성녀 코로나 역시 체포되어 두 개의 야자수에 사지를 묶고 잡아당기는 잔혹한 형벌을 받고 순교했다.

옛 “로마 순교록”은 그들이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박해 때 시리아에서 순교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그에 따르면, 성 빅토르는 세바스티아누스라는 재판관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그때 어떤 군인의 아내인 성녀 코로나가 나서서 성 빅토르가 고통 중에 보여준 용맹한 모습으로 인해 그는 행복하다고 선포하며, 하늘에서 두 개의 왕관이 내려와 하나는 성 빅토르에게 다른 하나는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고 외쳤다.

그로 인해 성녀 코로나는 두 그루의 나무 사이에 묶인 채 끌어당기는 잔인한 고문을 받고 순교했고, 성 빅토르는 참수형으로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일부 다른 자료에서는 성 빅토르와 성녀 코로나가 부부 사이였다고 언급하기도 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성 빅토르와 성녀 코로나가 시리아에서 함께 순교했다고 간단히 기록하였다.

성 빅토르는 이탈리아의 시에나(Siena)에서, 그 도시의 네 명의 수호성인 중 한 명으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14세기 초, 시에나 출신 화가 두초 디 부오닌세냐(Duccio di Buoninsegna)가 시에나의 주교좌성당에 제작해 설치한 마에스타(Maesta)에는 시에나의 네 수호성인이 성모자 양옆의 여러 성인 중에서 가장 앞줄에 무릎 꿇고 성모자를 경배하는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왼쪽부터 성 안사누스(Ansanus, 12월 1일) 순교자, 성 사비누스(Sabinus, 12월 30일) 주교 순교자, 성 크레스켄티우스(Crescentius, 9월 14일) 순교자, 성 빅토르 순교자 순으로 그렸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에렘베르토

 

  • 가톨릭 성인 이름
    Erembert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672년경 툴루즈

 

 

에렘베르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렘베르또, 에렘베르뚜스, 에렘베르투스.

 

 

에렘베르토 자료

오늘날 프랑스 파리(Paris) 인근 프와시(Poissy)의 오쿠르(Wocourt)에서 태어난 성 에렘베르투스(Erembertus, 또는 에렘베르토)는 640년경 젊은 나이로 퐁트넬(Fontenelle)의 베네딕토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그는 퐁트넬 수도원에서 서원한 수많은 수도자들 가운데 남달리 뛰어났다. 그는 수도생활을 좋아하고 또 수도원에서 지내기를 원하였지만 그의 덕이 너무 출중해서 656년 프랑스 국왕 클로테르 3세(Clotaire III)에 의해 툴루즈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한 번은 성 에렘베르투스가 자기 동생 가마르를 만나러 고향으로 갔는데, 때마침 대화재가 발생하여 온 도시가 화염에 휩싸일 지경이었다.

성 에렘베르투스는 가까운 성당으로 들어가 간절히 기도한 뒤에 자기의 십자가를 꺼내들었다. 그때 갑자기 바람이 멈추고 불꽃은 꺼졌다. 큰 기적을 본 주민들은 모두 성당으로 몰려 와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성인을 환호하였다.

12년 동안 교구를 돌보던 그는 건강이 나빠지자 은퇴하여 죽을 때까지 퐁트넬 수도원에서 수덕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의 동생인 가마르도 이미 두 아들을 두었지만 형의 위대한 업적을 보고 퐁트넬 수도원에 들어가 훌륭한 수도자가 되었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에지디오

 

  • 가톨릭 성인 이름
    Aegidiu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185/1190?-1265년 산타렘

 

 

에지디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이기디오, 아이기디우스, 에지디우스, 자일스, 질.

 

 

에지디오 자료

포르투갈의 코임브라(Coimbra) 부근 바오젤라(Vaozela)에서 태어난 에지디우스(또는 에지디오)는 산초 대왕 당시 코임브라의 고관이던 로드리게스 데 바글리아디토스(Rodrigues de Vagliaditos)의 아들로 코임브라에서 공부한 뒤에 의학 공부를 위하여 프랑스 파리(Paris)로 갔다.

길을 가던 중에 그는 이상한 사람의 말을 듣고 파리 대신에 톨레도(Toledo)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악마를 섬기는 마법을 공부하였고, 7년 후에야 파리로 가서 훌륭한 의사가 되었다.

그는 오랜 동안 악마의 환시를 보며 괴로워하다가 생활을 개선하고 마술 서적과 부적들을 모두 불태운 뒤에 팔렌시아(Palencia)의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였다. 그 후에도 한동안 악마의 시달림을 받았으나 성모님의 환시를 본 뒤로는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그는 포르투갈의 산타렘 그리고 파리 등지에서 여러 직책을 맡아 봉사하였고 특히 포르투갈 관구장으로서 많은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는 젊은 시절의 과오를 씻기 위해 영웅적인 참회의 생활을 했고, 자신의 의료기술을 이용하여 병든 형제들을 돌보았다.

또한 그는 탈혼을 비롯하여 예언의 은혜도 받았다. 질(Giles)로도 불리는 성 에지디우스는 산타렘 수도원에서 선종하였고, 그에 대한 공경은 1748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카르타고

 

  • 가톨릭 성인 이름
    Carthag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637년경 리즈모어

 

 

카르타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까르따고, 모쿠다, 카르타그, 카르타크.

 

 

카르타고 자료

아일랜드 남서부 케리(Kerry)의 캐슬마인(Castlemaine)에서 태어나 쿠바(Cuba)라고 불렸던 성 카르타고(Carthago)는 원래 돼지 치는 사람으로 성 카르타고(3월 5일) 주교의 제자가 된 후 스승의 이름을 따랐고 그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590년경 그는 킬투라프(Kiltulagh)에서 은수자가 되었고, 그 다음에는 뱅거(Bangor) 수도원에서 성 콤갈(Comgall, 5월 10일)의 지도를 받았다.

여러 수도원을 둘러본 성 카르타고는 얼마동안 오팔리(Offaly)의 라한(Rahan)에서 정착하다가 595년 그곳에 수도원을 세우고 8백 명이 넘는 수도자들을 지도하는 원장이 되었다. 그는 운문체로 수도 규칙을 썼으며 피르콜(Fircall)에서 수도원장 주교가 된 듯하다.

635년 성 카르타고가 라한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40년의 시간이 흐른 뒤 그와 그의 모든 수도자들이 수도원 땅을 욕심낸 그 지방의 영주 블라트맥(Blathmac)에 의해 수도원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수도자들을 이끌고 리즈모어로 가서 새로운 수도원을 세우고 만년에는 근처에 있는 동굴에서 독수자로 살았다.

그는 카르타크(Carthach) 또는 모쿠다(Mochuda)로도 알려져 있고, 그가 설립한 리즈모어 수도원은 아일랜드의 수도자 교육원으로서는 가장 유명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폰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Pon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8년경 시미에

 

 

폰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본시오, 본시우스, 폰시우스, 폰씨오, 폰씨우스, 폰티오, 폰티우스.

 

 

폰시오 자료

성 폰티우스(또는 폰시오)는 258년경에 치멜라(Cimella)에서 순교한 초기 순교자들 가운데 한 명이다. 이 치멜라는 랑고바르드족(Langobard)의 공격을 받고 무참하게 짓밟혔다가 그 뒤에 다시 재건되었는데, 지금의 프랑스 니스(Nice) 근교 리비에라(Riviera) 해안에 있는 시미에이다.

전설에 따르면 성 폰티우스는 로마(Roma) 원로원 의원의 아들로서 교황 성 폰티아누스(Pontianus, 8월 13일)로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을 교육받았다고 한다. 그는 부친이 서거하자 자신의 모든 유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용기를 보였고, 필립 황제와 그 아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다.

그 후 그는 치멜라로 가서 살았는데 그리스도인임이 밝혀져서 맹수들의 밥이 되도록 던져졌지만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집정관이 참수를 명했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Languedoc)에 있는 토미트(Tomietes) 수도원으로 이장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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