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세례명/세례명 이름 찾기

다윗 남자세례명 6인 목록

pieonane 2023. 6. 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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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세례명 다윗는 다비드, 데이비드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남자세례명 다윗 6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다윗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다윗을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본받고 싶은 남자 세례명 찾기

다윗
천주교 남자세례명
6인 목록

 

 

 

 

다윗 남자세례명 목록

 

  1. 다윗 (3월 1일)

  2. 다윗 1세 (5월 24일)

  3. 다윗 (6월 26일)

  4. 다윗 (7월 15일)

  5. 다윗 루이스 (8월 27일)

  6. 다윗 (12월 29일)

 

다윗 천주교 남자세례명 6인 목록

 

 

1. 다윗

 

  • 세례명 축일
    3월 1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avid

  • 신분과 직업
    주교,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589년경? 웨일스

 

 

다윗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다비드, 데이비드, 드위.

 

 

다윗 이야기

드위(Dewi)로도 알려진 성 다윗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실은 11세기에 기록된 “다윗의 생애”(The Buchedd Dewi)라는 다소 불확실한 그의 전기에 근거한 것이다. 

그 전기에 따르면, 성 다윗은 웨일스 지방의 족장인 샌트(Sant)와 성녀 논나(Nonna, 3월 3일)의 아들로 태어나 사제가 되었고, 성 바울리누스(Paulinus, 11월 23일)의 문하에서 몇 년 동안 공부한 후 선교활동에 투신했다고 한다. 

그는 설교를 통해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 이단의 그릇됨을 알렸고, 그러한 공으로 브레피(Brefi) 시노드에 참석해서 펠라기우스주의 이단을 반대하는 데 앞장섰다.

그의 기적 이야기로 가장 널리 알려진 내용은 이때 군중들 안에서 설교하면서 일어났다. 뒷줄에 있던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도 어렵고 보이지도 않는다고 하자 갑자기 그가 서 있던 곳의 땅이 솟아올라 언덕이 생기고 흰 비둘기가 내려왔다고 한다. 그래서 교회 미술에서 보통 그의 어깨 위에 비둘기가 내려앉은 모습을 표현하곤 한다.

브레피 시노드에서의 뛰어난 설교로 인해 대중의 찬사를 받은 그는 웨일스 지방 교회의 최고 책임자로 선출되었고,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던 중 그곳의 총대주교로부터 케얼레온(Caerleon)의 대주교로 서임되었다.

그는 재임 중에 펠라기우스주의 이단을 최종적으로 배격하는 데 성공했고, 브레피 시노드의 칙령을 인준했으며, 영국 교회의 규정을 제정하는 등 교회 안팎으로 큰 공헌을 쌓았다. 그는 또한 수도원 규칙을 통해 철저한 노동과 금욕적 생활을 강조하였다.

그는 589년경 3월 1일에 자신이 세운 메네비아(Menevia)의 수도원에서 선종하여 묻혔고, 1120년경 교황 칼리스투스 2세(Callistus II)에 의해 그에 대한 공경이 승인되었다. 그의 출생과 사망 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그는 오래전부터 웨일스의 수호성인으로서 높은 공경을 받아 왔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다윗 1세

 

  • 세례명 축일
    5월 24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avid I

  • 신분과 직업


  • 활동 연도와 지역
    1084-1153년 스코틀랜드

 

 

다윗 1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다비드, 데이비드.

 

 

다윗 1세 이야기

스코틀랜드의 왕 말콤 3세(Malcolm III)와 성녀 마르가리타(Margarita, 11월 16일)의 아들인 성 다윗은 1093년에 잉글랜드(England)의 노르만 궁에 파견되었다가, 1113년에 노샘프턴(Northampton) 백작의 과부인 마틸다(Matilda)와 결혼하였으며, 그의 형 알렉산데르 1세가 국왕이 될 때 자신은 컴브리아(Cumbria)의 백작이 되었다. 그 후 그는 형을 승계하여 스코틀랜드의 국왕이 되었고, 잉글랜드와의 오랜 투쟁을 하였다.

그의 노력은 결실을 보게 되어 1139년에는 잉글랜드와 평화를 이룩하였다. 그는 수많은 교구와 수도원을 세웠으며, 스코틀랜드에 노르만 법을 제정하고 연방 법원을 세웠으며, 정의와 사랑 그리고 자비가 온 누리에 빛나도록 노력하였다.

그는 컴브리아의 칼라일(Carlisle)에서 운명하였는데,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쪽 전례력에서 모두 그를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공적으로 시성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다윗

 

  • 세례명 축일
    6월 26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avid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50?-540년 테살로니카

 

 

다윗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다비드, 데이비드.

 

 

다윗 이야기

상부 메소포타미아에서 태어난 성 다윗은 젊은 나이에 그리스 테살로니카 외곽에 있는 성 메르쿠리우스(Mercurius)와 성 테오도루스(Theodorus) 수도원에서 수도승이 되었다.

그는 작은 은둔처에서 은수자로서 또 영적 지도자로서 오랫동안 살면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지혜로운 충고와 기도를 해 주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이 많이 찾아왔다. 그는 더 한적한 곳에서 관상 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아몬드 나무 위로 올라가 3년을 살았다.

그는 적의 침략으로부터 테살로니카를 방어하기 위해 군인들을 보내주도록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 있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게 청원하고자 나무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540년 마케도니아로 가는 길에 배 위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테살로니카의 수호성인으로서 보통 ‘나무 위의 성 다윗’(St. David the Dendrite 또는 David the tree-dweller)으로 불린다. 그의 유해는 13세기 초 십자군에 의해 이탈리아의 파비아(Pavia)로 이장되었고, 1978년 9월 16일 그가 평생을 지낸 테살로니카로 돌아와 성 데메트리우스(Demetrius) 대성당에 모셔졌다.

가톨릭교회와 정교회는 전통적으로 6월 26일에, 그리스 정교회는 성인의 유해를 테살로니카로 다시 모셔온 9월 16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다윗

 

  • 세례명 축일
    7월 15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avid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080년 스웨덴

 

 

다윗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다비드, 데이비드.

 

 

다윗 이야기

성 다윗은 잉글랜드(England) 수도자인데, 평소에 순교함으로써 그리스도께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를 간절히 기도하던 사람이다.

스웨덴의 성 지그프리드(Sigfrid, 2월 15일)의 세 조카들이 이방인들의 손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웨덴으로 가는 선교단의 일원으로 자원하여 북유럽의 사도로 불리는 성 안스카리우스(Anscharius, 2월 3일)의 유업을 계승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그는 박시오(Vaxjo)의 주교로 있던 성 지그프리드에게 갔고, 그에 의해서 베스트만란드(Vastmanland)로 파견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백성들의 회개를 위하여 큰 공적을 쌓았고, 또 후에 문크토르프(Munkthorp)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그는 전심전력으로 선교활동에 임하였으며, 기적을 행하는 은총을 받았고, 고귀한 눈물을 흘리는 은혜 또한 받았으나, 그가 그토록 열망하던 순교의 은혜는 받지 못하였다.

그 대신 그는 연만한 나이가 되도록 수를 누리다가 평화로이 숨을 거두었고, 그의 높은 성덕은 날로 퍼져나갔다. 성 다윗은 흔히 바스테라스(Vasteras)의 초대 주교로 일컬어지며, 그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공경을 받는 성인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다윗 루이스

 

  • 세례명 축일
    8월 27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avid Lewis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16-1679년 영국

 

 

다윗 루이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다비드, 데이비드, 베이커, 찰스.

 

 

다윗 루이스 이야기

성 다윗 루이스는 1616년 영국 웨일스 몬머스셔(Monmouthshire)의 에버게이브니(Abergavenny)에서 성공회 신부로 중등학교 교장인 아버지 모건 루이스(Morgan Lewis)와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 마가렛 프리차드(Margaret Pritchard)의 아홉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나 그곳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공회 신자로 성장했다.

그는 16세 때에 프랑스 파리(Paris)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로마의 영국 대학에서 사제직을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밀고자를 조심하기 위해 당시 많은 가톨릭 사제들이 실천했던 대로 가명을 사용하면서 찰스 베이커(Charles Baker)로 불리게 되었다.

1642년 7월 20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3년 뒤에 예수회에 입회하여 수련기를 마치고 영국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와 1년 동안 활동하다가 로마의 영국 신학교의 영적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로마에서 소임을 마친 그는 다시 몬머스셔로 돌아와 30년 동안 선교사로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다가가며 사도직을 실천했다.

그가 평생 활동하던 웨일스 지방에서 가톨릭을 반대하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그는 잠시 몸을 피해야만 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1678년 11월 17일 몬머스셔의 성 미카엘 성당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1679년 3월에 몬머스(Monmouth)에서 가톨릭 사제로서 미사를 봉헌했다는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동시에 그는 성 요한 켐블(Joannes Kemble, 8월 22일)처럼 1678년 발생한 티투스 오츠(Titus Oates)의 ‘가톨릭 음모 사건’(Popish Plot)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는 찰스 2세(Charles II) 왕을 암살하고 웨일스 지방에 가톨릭을 부활하려 했다는 혐의까지 받았다. 물론 오츠의 가톨릭 음모 사건은 1678년 9월 찰스 2세 왕이 직접 오츠를 심문해 모든 것이 거짓임이 밝혀졌으나 그 파장을 오래 지속되었다. 결국 그는 미사를 봉헌하고 다른 성사를 집전하는 것을 보았다는 증인들의 증언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이다.

런던의 뉴게이트(Newgate) 감옥에 있던 그는 처형을 위해 몬머스셔로 돌아왔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다음과 같은 설교를 했다고 한다.

“나는 양심과 신앙을 위하여 죽는다. 인간의 나약성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외면은 죽일 수 있으나 내면은 결코 죽일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나는 나의 몸과 피가 화형에 당할 준비를 마쳤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피에는 피, 목숨에는 목숨이라 하였으나, 그것은 안 된다. 오로지 거룩한 복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그대들을 용서한다. 나는 내가 복음의 아들임을 고백하며, 내가 순종하는 것은 복음이다. … 친구들이여, 하느님을 두려워하라. 그대들의 왕에게 영광을 드려라. … 나는 끝까지 여러분의 믿음이 올바르게 되도록 기도하겠다.”

성난 군중들은 그에게 돌을 던졌다. 마침내 그는 어스크(Usk) 강변의 처형장으로 끌려가 1679년 8월 27일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다윗 루이스는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순교일인 8월 27일에 기념하고, 시성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한편 웨일스 지방에서는 5월 4일 외에도 기존의 10월 25일을 ‘웨일스의 6위 순교성인’을 기념하는 별도의 축일로 유지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다윗

 

  • 세례명 축일
    12월 29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avid

  • 신분과 직업
    왕, 예언자, 구약인물

  • 활동 연도와 지역
    +10세기BC 이스라엘

 

 

다윗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다비드, 데이비드.

 

 

다윗 이야기

성 다윗은 이사이의 막내아들로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이었고, 다윗 왕조의 태조로서 예루살렘에서 기원전 1000-961년 사이에 이스라엘을 통치한 왕이었다. 다윗은 유다 지방 베들레헴 출신이고 룻기 4장 18-22절에 의하면 보아스와 모압 여인 룻 사이에서 태어난 오벳의 손자이다.

‘다윗’이란 이름은 전통적으로 ‘사랑하는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백성들의 요구에 못 이겨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 왕정 제도를 시작한 예언자이자 판관인 사무엘(Samuel, 8월 20일)은 사울이 왕으로 살아 있을 때 이미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미래의 왕으로 세웠다(1사무 16,1-13). 이는 이사이도 다윗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앞서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도 아말렉의 왕 아각과 가장 좋은 양과 소와 짐승들을 없애지 않음으로써 헤렘(Herem) 법을 지키지 않았다. 그로 인해 주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한다는 말씀과 함께 그를 왕위에서 배척하셨다는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1사무 15,10-31).

주님의 영이 사울을 떠나면서 사울은 악령의 괴롭힘을 받았다. 그러면서 다윗이 사울을 위한 비파 연주자로 발탁되어 사울의 총애를 받으며 그의 무기병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음악에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다윗은 사울에게 악령이 내릴 때마다 비파를 타서 악령을 쫓아내고 사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1사무 16,14-23). 이어서 다윗은 필리스티아의 거인 골리앗을 물리치며 화려하게 등장했다(1사무 17장).

골리앗은 이스라엘을 침략한 갓 출신의 필리스티아인 투사로서 엄청난 키와 갑옷으로 중무장한 군인이었다. 이스라엘 군사들이 그를 보고 도망갈 때, 다윗은 돌멩이 다섯 개를 넣은 양치기 가방을 메고 손에는 무릿매 끈을 들고 다가갔다. 그리고 무릿매 끈과 돌멩이 하나로 골리앗의 이마를 맞혀 쓰러뜨리고 그를 죽였다.

이스라엘의 승리와 함께 다윗은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사울 왕 앞에 나섰다. 이 모든 것은 주 하느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다윗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듯 구약성경은 다윗의 출현을 다양한 전승을 통해 전해주고 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을 시기를 받아 죽음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외적과의 전투에서 연승을 거두며 이스라엘과 유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사울의 딸 미칼과 결혼해 그의 사위가 되었으나 왕의 시기와 위협은 그치지 않았다. 다윗의 절친한 친구인 요나탄 왕자의 중재로 겨우 현상 유지는 했으나 이 또한 오래가지 않았다.

다윗은 라마로 도망갔다가(1사무 19,18-24) 놉으로 가서 사제 아히멜렉의 도움을 받았다(1사무 21장). 그리고 필리스티아의 갓 나라 임금 아키스에게 가서 잠시 머물다가(1사무 21,10-15) 아둘람으로 가서 곤경에 빠진 이들, 빚진 이들, 그 밖에 불만에 찬 사람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 수는 사백 명가량 되었다(1사무 22,1-2). 그 후로 사울의 추적을 피해 모압의 미츠파, 크일라, 지프 광야, 마온 광야, 엔 게디 산성을 전전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군대를 이끌고 엔 게디 광야로 왔을 때, 다윗은 동굴에서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고 단지 겉옷 자락만 잘라왔다(1사무 24장).

마온에서 포악한 부자 나발을 물리치고 슬기로운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이한 다윗(1사무 25장)은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으로 망명해 갓의 임금 아키스와 더불어 살았다. 다윗은 아키스에게 청해 치클락 성읍을 받아 부하들과 함께 아키스의 용병으로 1년 4개월을 살았다(1사무 27,1-7).

사울이 죽자 다윗은 주님의 뜻에 따라 필리스티아를 떠나 헤브론으로 이주하였다. 두 아내와 부하들을 데리고 헤브론 성읍에 자리 잡자 유다 사람들이 와서 다윗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유다의 임금으로 세웠다(2사무 2,4).

헤브론은 곧 유다의 수도가 되었다. 이스라엘에서는 사울 군대의 장수인 아브네르가 마하나임으로 가서 사울의 아들 이스 보셋을 온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웠다(2사무 2,9). 이렇게 유다와 이스라엘은 개별국가로 대립했다.

이스 보셋이 살해된 후(2사무 4,1-12)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자 그는 예루살렘을 점령해 수도로 삼고 새로운 성전 건립을 구상하며 유다와 이스라엘의 통합을 이루고자 했다. 이를 위해 계약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겼다(2사무 6장). 예루살렘에서 33년의 통치 기간 중 이스라엘은 강대한 국가로 거듭났다. 그러나 시련도 많았다.

다윗이 총애했던 셋째 아들 압살롬의 반란이 대표적이었다(2사무 15,1-18,17). 많은 아내를 두었던 다윗은 왕자들의 암투와 반란까지 겪게 되었다. 이미 예언자 나탄이 왕자의 난을 예언한 적이 있다. 다윗 왕이 밧 세바에게 빠져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했을 때다.

“이제 네 집안에서는 칼부림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를 무시하고,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데려다가 네 아내로 삼았기 때문이다.”(2사무 12,10)

압살롬의 반란이 진정되자 다시 벤야민 지파 세바가 반란을 일으켰다. 다윗은 강경 진압으로 초기에 반란을 진압했지만, 앙금이 남아 솔로몬 사후 북쪽 지방이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다윗은 구약성경에 800번 이상 등장할 만큼 이스라엘 역사에 중요한 인물이다. 마태오와 루카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족보를 보더라도 분명 예수님의 조상이다. 구약성경은 이런 다윗의 다양한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긍정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모습도 진솔하게 전해준다. 이는 왕정 제도에 대한 긍정적 · 부정적 견해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성경은 무엇보다 주님의 선택과 그 선택이 다윗에게 변함없이 머물렀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때때로 주님의 질책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돌아서서 하느님을 향했던 다윗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다윗을 사랑하셨고, 그의 후손을 일으키시어 그의 왕좌를 튼튼히 해주셨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 이후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지고 바빌론 유배를 경험하면서 다윗을 떠올리며 그와 같은 임금, 새로운 다윗을 희망하게 되었고, 그 희망은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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